12월 3일부터 4월 4일, 넉 달의 시간이 흘렀다. 나 또한 평온한 일상만을 살아갈 수 없었다. 일상 속에 어떤 비극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늘 함께 한 나날들이었다.
어지러움 속에서 어떻게든 해야 할 것은 해내야 했기에 공부든 글이든 전에 없이 무겁고 어렵게 다가오기도 했다. 12월, 김윤식의 카프 연구에 대해서는 끝내 완결된 글을 쓸 수 없었다. 아제르바이잔에 가서 발표한 동아시아론에 대해서도 주석을 붙일 여유를 얻지 못했다.
12월에서 1월까지 앞이 캄캄하다시피 했다. 나라의 앞날이 그렇게 암울해 보일 수 없었다.
2월에 간신히 ‘맹목과 통찰-임화의 해방공간’을 쓰고, 시인 김규동을 김기림에 연결지어 발표한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임화의 해방공간의 활동에 대한 조명은 지금이 곧 해방공간을 방불케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교훈과 힌트였다. 김규동은 김기림 문학이 해방과 6·25 전쟁 이후의 문학사에 연결되는 중요한 고리요 매개 역할을 했다.
하나 더, 가람 이병기 선생이 해방 직후에 펴낸 ‘가루지기 타령’ 교주본을 검토해 본 것은 현대 소설사 인식에 더할 수 없는 도움이었다.‘가루지기 타령’의 ‘리얼리즘’은 ‘소설’이 시대를 어떻게 투영할 수 있는지, 그 수사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어지러움 속에서 억지로 쥐어진 것 같은 공부들을 해나가는 가운데 한 가지 얻은 생각이 있다. 역시 공부는 공부대로 침잠하는 시간 없이는 충분한 논리와 증명에 이를 수 없음이다. 어떤 빛살 같은 영감을 얻었다 해도 이에 빛나는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무를 유로 변신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시간을 충분히 들이지 못한 논리와 증명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결국 그 미진함에 애를 태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간을 쓸만큼 써 매달리지 않는 한 허점은 언제까지나 제대로 메울 수 없다.
이제 모든 것이 막막해진 시점에 나는 최근 공부의 ‘마지막’ 주제에 도전한다. 카프카의 작품들에 대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 권말에 일종의 비평적 주석을 가했다. 카뮈에 따르면 카프카 문학은 현대의 인간조건을 ‘상징’으로 제시하는 소설적 문법의 한 전통을 가리킨다. 이 소설적 문법을 익히 알고 있던 한국의 작가는 장용학과 최인훈이었는데, 아주 최근에 이 소설적 전통에 접맥된 한 사람의 남성 작가가 나타났다.
이 비평적 주제를 충분히 소화해 내려면 카프카와 카뮈를 새롭게 읽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 지난 해는 그렇지 않아도 카프카 서거 100주년이었다. 난공불락의 요새 카프카의 ‘성’, 여기서 카뮈의 ‘이방인’으로 연결되는 계선에 대한 공부 없이 제대로 된 글은 쓰이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카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문학의 진로를 막아섰던 난해한 ‘성채’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느낌, 그 시절 거기에 카프카도 함께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시간을 실하게 들여 공부해야 하리라. 지독한 시대의 어지러움 속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