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9일,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에 저항하는 시민들이 공덕동 서부지방법원에서 재동의 헌법재판소까지 긴 행진을 했다.
전날인 18일 오후부터 구속영장이 청구된 서울 서부지방법원에 20~30대 청년들이 중심이 된 시민들이 이렇다할 사전 연락도 없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날은 토요일, 원래 광화문에서 전광훈 목사 교회 쪽이 주최하는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예정과 달리 대통령이 영장 실질 심사에 직접 참석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서부지방법원으로 달려갔고, 그러자 광화문 세력도 서부지방법원으로 합세하기로 한다.
이날 오후부터 한밤까지, 그리고 19일의 새벽까지 날이 아주 길었다. 시민들은 불법적으로 영장을 발부한 이순형, 신한미 전담판사와는 다른 주말 당직판사가 심사를 맡는다는 사실에 큰 기대를 걸었다. 차은경 판사가 어떤 사람인지 어지간히 찾아들 보고 화제에도 올렸다. 이런 저런 판결 이력들을 살펴 이 사람은 혹여 다를지도 모른다고들 했다.
자정을 훨씬 넘겨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법원을 둘러싼 사람들이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빛깔의 것이었다. 청년들은 나이든 사람들과도 다르다.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서부지방법원은 그동안 억눌려온 분노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서부지방 법원 유리창들, 외벽들, 그밖의 시설물들이 파손되고 경찰 바리케이트도 부서졌다. 경찰이 법원 진입을 유도했다고도 하고, JTBC 기자가 유리창을 깨고 조작뉴스를 방영했다고도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든 폭력과 파괴는 정당화될 수 없다.
날이 새자 한밤의 시위대가 해산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헌법재판소까지 행진하기로 한 시민들이 새로 모여 들었다. 거리 행진은 길었고,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강압적인 심판 진행에 거세게 항의했다.
이 1월 19일의 상황은 필자로 하여금 지나쳐 온 한국현대사를 돌아보게 한다.
4·19혁명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학생 시위대의 한 사람인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우리가 오늘 사월혁명이라 부르는 4·19의 새벽이 밝아오게 된다.
1960년의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사월혁명으로 일어났다면, 1987년 6월 10일에 시작된 6월항쟁은 1월 14일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다.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시민들은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외쳤다.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국민주권 박탈상태에 국민저항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번 1·19 사태는 지난 12월 3일 대통령의 계엄 포고가 직접적 배경이라 하겠다. 지금 탄핵 심판에서 대통령 측은 계엄령 포고가 2024년 4월 15일 22대 국회의원 선거의 부정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포고 당시에 대다수 국민은 계엄령 포고가 21세기의 번영을 구가하는 한국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황당한 도발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대통령이 다수파 야당의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고 체포, 구속까지 당하게 되면서 국민들 생각과 감정이 아주 달라진 것 같다. 필자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다.
과연 22대 국회는 가짜였던 것이 아니냐. 이것이 지금 국민들이 의혹을 품고 대통령을 심정적으로 동정하는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