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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후명 선생과 예술지상주의 계보

윤후명 선생이 별세하셨다. 지난 5월 8일, 온 나라가 대통령 선거 후보 문제로 뒤숭숭할 때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윤후명 선생은 한국문학의 유미주의 계보학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김동인·임노월에서 발흥한 현대 유미주의 계보는 이효석·이상·계용묵 등을 거쳐 해방 후 이제하 선생으로, 윤후명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다시 작가 심상대에게로 연결된다. 사적 친소 관계가 아니라 예술사적 계보학상에 그렇다는 것이다. 9일 저녁에 채만식 문학상 서성란 작가 시상식을 마치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대학로 ‘예술가의 집’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차로 불과 5분 거리다. 2층 5호실, 장례식장은 떠들썩하지도 않았다. 황충상 선생, 잡지 ‘문학나무’를 이끌어 가시는 작가께서 빈소를 지키고 계셨다. 황충상 선생과 윤후명 선생은 일생을 가까운 친구로 지내오셨다. 윤후명 선생 제자라 할 이평재 작가는 먼저 와서 계시다 가셨고, 이승하 선생, 구효서 작가, 윤대녕 작가 같은 분들이 뒤에 더 도착하셨다. 빈소를 떠나는데 정희성 선생이 막 조문을 마치고 계셨다. 재작년 11월 13일, 윤후명, 정희성, 강은교 세 분이 시동인지 ‘고래’를 앞에 두고 정담(鼎談)을 나누실 때 사회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윤후명 선생을 그 후로 한두 번은 더 뵌 적이 있을 텐데 인상이 선명치 않다. 이 세 분은 저 옛날 ‘1970년대’ 동인을 함께 하셨던 사이셨고, 긴 세월 흘러 ‘살아계신’ 분들이 다시 모이신 것이었다. 이제 윤후명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정희성 선생의 심회는 무척 참혹하실 것이었다. 그날은 비가 무척 내리기도 했다. 홀로 집으로 향하는데, 빈소에서 본 윤후명 선생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몹시 안타깝고, 이 혼탁한 정치 세상에 조금만 더 버티고 계셨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 문단은 정치에 깊이 침윤되어 소란스러운 소리 그칠 새 없고 나 또한 그런 세상의 한 모퉁이에 서 있다. 소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명처럼 정치적인 상황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윤후명 같은 작가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윤후명 선생의 세대 또한 최인호, 황충상, 조금 더 뒤의 강석경 같은 작가까지 합쳐 생각하면 1940년 전후 출생 세대의 ‘6·25 전쟁 문학’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뭔가 다른 방향의 문학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절실히 느꼈을 때 비로소 시선에 들어온 작가가 바로 윤후명이라는 존재였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돈황의 사랑’, ‘누란의 사랑’ 같은 소설들은 나로 하여금 정치적 현실과는 다른 삶의 차원을 숙고할 수 있게 했다. 윤후명 선생은 스스로 엉겅퀴를 그리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과 여행에 심취한 분이셨다. 윤후명 문학처럼 제도와 관습을 심문하고 거기서 이탈하기까지 하는 문학은 예술이 삶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진짜 문학은 정치 이전이거나 정치를 함축하면서도 정치를 초월해야 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 명제를 놓치지는 않겠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5-19

‘광인수기’를 읽은 끝에

어떤 것도 제대로 하기는 어렵다. 참으로 수백, 수천 중에 하나나 둘 있는 것이 제대로 하는 사람이리라. 갈수록 수업이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마음이 둘로, 셋으로, 다섯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제대로 해보려 하면 어디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자만할 수 없다. 기차를 타고서, 길을 가며, 그 여성 작가를 주제로 삼은 석사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심사 때도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시간 들여 찬찬히 읽으니 그 성취가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때, 계속해서 공부하기 어렵다 했던 말 떠올라, 어째서 그랬던가, 대학원이 시끄러워 그랬던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가, 마음에 걸린다. 결국은 전화로 안부를 묻고, 논문 참 잘 읽었다 하고, 그때 왜 계속하지 않았던가 묻고, 사연을 듣고, 뭐라 격려라도 한 마디 전해주어야 했다. 며칠 후로, 나는 해당 수업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그 여성 작가를 읽는다. 시베리아며 청도며 훌쩍 떠나기 좋아했던 작가, 아뿔싸, 서른한 살 나이로 요절해 버린 작가, 위병을 오래 앓던 이 여성 작가를 저세상으로 데려간 것은 췌장암이라 했다. 요즘에는 시간을, 박경리 선생 말씀하신 그 ‘두루마리’로 쓰기가 너무 어렵다. 조금 나가고 다른 데 빠졌다 다시 돌아와 조금 더 나간다. ‘혼명에서’는 그 얼마나 절실한 어둠의 노래인가. 그 ‘混冥’(혼명)이란 것은 한 덩어리의 어둠이요 혼돈한 어둠이라고도 한다는데, 도대체, 어려서 독학당에서 공부를 했다는 이 작가는 절체절명의 죽음 앞에서 무슨 뜻으로 이 ‘혼명’을 말한 것인가? 이 작가, 백신애(白信愛)는 1908년 5월 19일에 나서 1939년 6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혼명에서’가 발표된 것은 잡지 ‘조광’의 1939년 5월호다. 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최후’의 문장을 써나가는 작가의 존재를 실감치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삼엄한 죽음의 감정과 의식을 토대로 삼아 나는 이 작품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독법을 찾아낸다. 수업이 있던 금요일, 저녁에 미국서 온 시인을 만나고 일찍 귀가해서, 토요일 문학 강의를 하나 하고는, 죽은 듯이 열다섯 시간을 잠에 빠져 들었다.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알 수 없다. 몸살 때문일 수도 있고, 요즘 따라 삶이 더욱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요일, 파주의 창고에 가 이것저것 꼭 필요한 책들을 챙겨오는 중에 ‘백신애 작품집’이 들어 있다. 대구 사는 문주 형이 정성 들여 엮어 놓은 선집에 ‘광인수기’가 눈에 뜨인다. ‘광인’이라. 그렇지 않아도 나는 요즘 ‘광인’에 빠져 있는 참인 것을, 이번의 ‘광인’은 일생을 참고 참으며 살아온 한 여성의, ‘광인’ 된 이야기다. 이 작가, 백신애는, 삶의 실상을, 욕망의 움직임을, 허무를 무참히도 날카로운 언어로 헤집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가둬 두고 있는 인습과 제도의 ‘사슬’로부터 한없이 자유롭고자 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문제작 ‘꺼래이’, 이 작품에 새겨진 처절한 ‘고려인’들의 사연도 그런 욕망과 ‘광기’가 빚어낸 ‘방랑’의 산물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4-21

어지러움 속에서, 시간을 들여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12월 3일부터 4월 4일, 넉 달의 시간이 흘렀다. 나 또한 평온한 일상만을 살아갈 수 없었다. 일상 속에 어떤 비극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늘 함께 한 나날들이었다. 어지러움 속에서 어떻게든 해야 할 것은 해내야 했기에 공부든 글이든 전에 없이 무겁고 어렵게 다가오기도 했다. 12월, 김윤식의 카프 연구에 대해서는 끝내 완결된 글을 쓸 수 없었다. 아제르바이잔에 가서 발표한 동아시아론에 대해서도 주석을 붙일 여유를 얻지 못했다. 12월에서 1월까지 앞이 캄캄하다시피 했다. 나라의 앞날이 그렇게 암울해 보일 수 없었다. 2월에 간신히 ‘맹목과 통찰-임화의 해방공간’을 쓰고, 시인 김규동을 김기림에 연결지어 발표한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임화의 해방공간의 활동에 대한 조명은 지금이 곧 해방공간을 방불케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교훈과 힌트였다. 김규동은 김기림 문학이 해방과 6·25 전쟁 이후의 문학사에 연결되는 중요한 고리요 매개 역할을 했다. 하나 더, 가람 이병기 선생이 해방 직후에 펴낸 ‘가루지기 타령’ 교주본을 검토해 본 것은 현대 소설사 인식에 더할 수 없는 도움이었다.‘가루지기 타령’의 ‘리얼리즘’은 ‘소설’이 시대를 어떻게 투영할 수 있는지, 그 수사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어지러움 속에서 억지로 쥐어진 것 같은 공부들을 해나가는 가운데 한 가지 얻은 생각이 있다. 역시 공부는 공부대로 침잠하는 시간 없이는 충분한 논리와 증명에 이를 수 없음이다. 어떤 빛살 같은 영감을 얻었다 해도 이에 빛나는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무를 유로 변신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시간을 충분히 들이지 못한 논리와 증명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결국 그 미진함에 애를 태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간을 쓸만큼 써 매달리지 않는 한 허점은 언제까지나 제대로 메울 수 없다. 이제 모든 것이 막막해진 시점에 나는 최근 공부의 ‘마지막’ 주제에 도전한다. 카프카의 작품들에 대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 권말에 일종의 비평적 주석을 가했다. 카뮈에 따르면 카프카 문학은 현대의 인간조건을 ‘상징’으로 제시하는 소설적 문법의 한 전통을 가리킨다. 이 소설적 문법을 익히 알고 있던 한국의 작가는 장용학과 최인훈이었는데, 아주 최근에 이 소설적 전통에 접맥된 한 사람의 남성 작가가 나타났다. 이 비평적 주제를 충분히 소화해 내려면 카프카와 카뮈를 새롭게 읽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 지난 해는 그렇지 않아도 카프카 서거 100주년이었다. 난공불락의 요새 카프카의 ‘성’, 여기서 카뮈의 ‘이방인’으로 연결되는 계선에 대한 공부 없이 제대로 된 글은 쓰이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카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문학의 진로를 막아섰던 난해한 ‘성채’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느낌, 그 시절 거기에 카프카도 함께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시간을 실하게 들여 공부해야 하리라. 지독한 시대의 어지러움 속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2025-04-07

믿음과 정치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사람의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부모·자식 관계는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는 관계일 테다. 때로 부모·자식 간에도 돈이나 그 밖의 것으로 서로 외면하고 심지어 살상을 벌이기까지 한다. 그런 것들은 예외로 치부된다. 친구 관계도 고등학교 다닐 때쯤부터 깊이 사귄 이들끼리는 우정으로 평생을 지켜가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동창은 시골 동창 아니면 너무 어려서, 삶이 갈려서 오래가기 어렵고, 대학 동창은 머리가 커진 뒤라 순수한 관계를 만들기 어렵다. 고교 동창 정도면 한두 사람씩은 평생의 관계를 맺어나갈 수도 있다. 그 친구들은 정의감이 같아서가 아니요 기질이 맞고 정이 들어서 길게 진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사회 나가서나 대학에서도 대학원 같은 곳에 가서는 정말 믿고 통하는 관계는 이루기 어렵다. 무엇보다 자기 존재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경쟁이 되고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여겨지기 쉽다. 나이 엇비슷한, 아래위 5년 정도의, 같은 세대 사람들은 평상시 친해도 끝내 상대를 불신하고 저버리기 쉽다. 이렇게 서로 믿고 의지하기 어려운 사람 관계 속에서 어쩌다, 정말, 저 친구는, 저 선배는, 저 상사는, 그리고 저분은 믿을 수 있다고, 따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아주 드물게 얻어질 수 있다. 희귀하게 그런 관계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계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세상은 거칠고 인생은 험난해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 괴로움, 외로움을 많이 덜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라면 어떨까? 글쎄다. 꼭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고교 동창이 한둘 있고, 대학에 믿고 의지할 선생님이 또 그만큼은 계시고, 대학 나와 문단과 학계에서 이런저런 관계로 얽힌 좋은 선후배들, 친구들이 또 몇 사람은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숫자를 너무 많이 ‘잡은’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한다. 더구나 지난 삼 개월여 동안 나는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다. 어떤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고, 이유는 비교적 간단명료해 보인다. 무엇인가, 내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형이, 선생님이, 당신이 그렇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나는 또 나대로 오랫동안 숙고해 온 데다 특히 지난 3개월은 사태가 엄중한 만큼 별일 아니라고 쉽게 의견을 접어버릴 수도 없다. 이런저런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혹은 자기 확신의 적개심에서 쏟아내는 말들이야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픔도 없는 까닭이다. 굳게 믿는 사람들이 걱정 반, 실망 반의 반응을 보일 때는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 마음 아픈 것을 감추기도 쉽지 않다.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다고 애써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믿음이란 세상의 정치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정치적 견해란 얼마나 ‘쉽게’ 변하는 것이던가. 세월을 조금이라도 길게 돌아보면 이미 우리들이 그런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 않던가.

2025-03-24

정치를 문학적으로 생각함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때로 나는 문학주의자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긴다. 나는 현실 정치보다 삶 전체 또는 근본적인 삶에 집념을 발휘하는 문학주의자의 길을 귀하게 여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사람의 삶은 노동하고 예술 작품을 ‘제작’하고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라 한다. 문학주의자는 예술적인 작업에 집념을 품은 자다. 이 예술의 기억 행위는 삶 전체에 걸쳐 있어 사회적 결정에 ‘집단’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정치적 결정 행위와 다르다. 그리하여, 문학이 정치에 관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어느 파당에 들어 그 파당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내는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단적인 사례다. 이때 문학은 문학 아닌 것, 정치적이다 못해 정치주의적인 차원의 것에 떨어질 수 있다. 해방공간 때 프롤레타리아 시인 임화는 바로 이 함정에 빠져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당원’의 시를 썼고 그 ‘당원’의 실천에 뛰어들었고, 자신의 문학을 싸우는 ‘전선’의 문학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정치에 관여하는 다른 방식의 문학이 있다. 그 좋은 사례들로 작가 최인훈과 손창섭이 있다. 최인훈과 손창섭의 정치는 ‘파당’의 정치가 아니라 단독자의, 곧 ‘한 사람’의 ‘정치’였다. 자기 한 사람으로 ‘1인 정당’의 당원 또는 ‘1인 공화국’의 주권자가 되어 자신만의 목소리를 추구한 것이다. 최인훈은 6·25 전쟁 중 ‘원산철수’ 직전까지 북한의 회령과 원산에서 살았고,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손창섭은 평양 태생이지만 일본에 일찍 건너가 대학까지 다녔고, 한국사회를 ‘방법론적’ 외부자의 시선으로 냉연하게 관조할 수 있는 ‘거리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최인훈과 손창섭은 1950~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누구보다 비판적으로 해부해 본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좌익·우익 또는 보수와 진보라는 ‘낡디 낡은’ 진부한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자신들만의 사유능력을 발휘해 한국인들의 삶의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자 했다. 나는 그들의 문학의 길에서 작가는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가를 깨닫곤 한다. 문학은 정치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 걸까? 나는 정치를 넓게 보는 방법을 찾는다. 정치를 넓게 보는 것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우선 정치를, 그것을 둘러싼 더 넓은 맥락에서 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넓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는가? 그것은 정치를 현실에 결부된 파당 대결만의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문명론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단지 옳고 그름, 단지 사실에 부합하거나 왜곡되어 있음을 떠나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 우리 ‘공동체’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가를 묻고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적 투쟁에 골몰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흔히 권력투쟁,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논의되곤 한다. 사회를 갈등과 반목의 차원에서 보는 이들에게 정치는 집단적 투쟁 그 자체이고 상대편을 ‘쳐서’ 내 편을 살게 만드는 과정이다. 이런 정치에서는 ‘적’이라는 관념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작동한다. 나는 세력과 파당의 대결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더 낫게 해 줄 수 있는 삶의 길을 찾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정치를 문학적으로 대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2025-03-10

기다려지는 삼일절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삼일절, 3월 1일, 그날, 경성의학전문, 중앙고보 같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은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행진을 벌였다. 삼일운동은 시민운동이면서 동시에 학생운동이었다. 그러면서 삼일운동은 삼일혁명인 것이었다. 바로 이 삼일 항거의 여파로써 중국 상해와 각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제국, 곧 황제가 유일 주권자인 나라에서 대한민국, 온 국민이 주권자인 나라로. 삼일운동은 그래서 삼일혁명이라 불리어 마땅하다. 며칠 전 대전 서구 보라매공원 광장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국의 시청 광장들 중에 가장 넓다는 그곳이 발디딜 틈 없었다. 느리다는 충청도 사람들이 광장에 빽빽히들 모여들었다. 방송사 뉴스들은 이도 다른 모든 것들처럼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무리 왜곡을 일삼아도 한번 방향을 잡은 불길, 물길을 막을 수는 없다. 드론이 유튜브로 송출해 보여준 광장은 탄핵 반대의 큰 물결이 바야흐로 거세게 북상 중임을 알려주고 있다. 돌이켜 보면, 계엄과 탄핵의 한 달 반은 오로지 서울 광화문에만 의지했던 것이었다. 서울 세종로 동화 면세점 앞 광화문 탄핵 반대의 인파는 주말마다 급속도로 불어났던 것이었다. 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꽉꽉 채우고 모자라 서울역 쪽으로 더 길게 자리를 잡은 때도 있었던 것이었다. 불법으로 발부받은 영장으로 대통령을 체포하겠노라고, 공수처가 한남동 관저에 들이닥칠 때에는 그 인파가 한남동에까지 몰려갔던 것이었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물결은 그러다 마침내 부산역 광장에 똬리를 튼 것이었다. 부산, 대구, 그리고 광주, 울산에 이어 대전으로 탄핵 반대의 물결이 지금 바야흐로 북상 중에 있다. 일주일 후, 3월 1일, 삼일절 날에는 이 사람들이 광화문 동화 면세점 앞에 진을 친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고대, 부산대 등 전국의 대학생들이 지금 탄핵 반대의 선언문들을 릴레이식으로 낭독해 가고 있다. ‘태극기 부대’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쓴 탄핵반대 집회는 이제 2030 청년들이 함께 하는 젊은 집회로 탈바꿈을 했다. 반면, 탄핵 찬성 집회는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하는 노래 가사처럼, 지금 숱한 깃발들만 높이 들려 있는 형국이다. 과연 탄핵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방송사 뉴스는 ‘8대 0’이라고들 한다. KBS는 한술 더 떠 부정선거를 말하는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을 했다. 이 추적 아닌 추적 방송을 보고 누가 내게 해준 말. 도둑놈 보고 도둑질 했느냐 물어보고 안 했다고 하니 거 봐 안 했다잖아,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왜 부정선거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졌는가. 그것은 극우 유튜버에 현혹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정선거의 증거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기다려지는 올해의 삼일절. 이날은 부정선거라는 국민주권 유린 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거부를 보여주는 날이 되어야 한다. 부정선거가 끔찍한 것은, 그것이, 현대사회의 기본 원리인 국민주권,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 표가, 제대로, 정당히 계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삼일절은 국민주권 원리를 다시 확인하는 삼일혁명의 날이어야 한다.

2025-02-24

서울구치소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지금 서울구치소는 서울에 있지 않다. 의왕에서 성남 가는 방향에 있다. 옛날에는 경성감옥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대문형무소라 했다. 8·15 해방 후에 서울형무소라 했다. 1967년에 서울구치소로 바뀌었어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계속 있었다. 1987년 11월 15일에 지금의 의왕시 포일동으로 이전했다. 나는 1984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때는 제5공화국 시절이다. 2학년이던 1985년 11월 18일 아침 8시, 서울 시내 14개 대학 학생 191명의 한 사람으로 민정당 정치 연수원 3층 건물에 들어갔다. 점거농성이었다. 학생들은 건물 안의 책상 등 집기들을 가져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에 바리케이트를 쳤다. 경찰 진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불이 잠깐 났던 것도 같은데, 위험하다고들 하며 금방 꺼버렸다. 관련 기사는, 소방차 여덟 대가 출동해 옥상의 학생들에게 물을 뿌렸고, 2,100여 명의 정사복 경찰들이 투입되었다고 했다. 옥상 철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여섯 시간 반의 농성은 경찰 ‘백골단’이 옥상 철문을 절단하고, 학생들을 한쪽으로 내몰아 몽둥이로 두드리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날 하늘에 헬리콥터가 떠 있었다. 부모님들이 걱정한다고, 농성을 풀라고, 선무방송을 했다. 그때 학생들은 ‘점거 농성’을 ‘자살택’이라고 불렀다.‘자살’이란 체포를 면할 길 없음을 의미했다. ‘택’이란 ‘전술’을 뜻하는 ‘tactic’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체포, 연행된 학생들은 각기 소속된 대학 근처의 경찰서로 옮겨졌다. 나는 관악경찰서로 옮겨져 조사를 받았다. 저녁 여섯 시가 조금 지났을까, 담당 형사가 “전원 구속”이라며, 손에 수갑을 채웠다. 그 ‘전원 구속’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지난번 서부지법 사태가 날 때까지 꼭 그런 줄만 알았다. 서부지법에 진입한 청년들을 “전원 구속”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인터넷을 뒤졌다. 실제 구속자는 82명에 ‘불과’했다. 나는 ‘선별’된 82명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나마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3년형인가를 받은, 같은 과 선배의 모습을 지금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대학 2학년생, 서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던 때였다. 열흘을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고, 서울구치소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이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현저동에 있던, 지금의 의왕으로 옮겨지기 직전의 서울구치소에서 열흘을 보냈다. 나머지 열흘은 의정부교도소로 보내졌다. 이렇게 열흘씩을 법무부 교도 행정을 ‘속성 이수’한 끝에 다시 사회로 내보내졌다. 사십 년이 흐른 지금, 불법체포, 불법구속에 항거한 청년들이 ‘폭력시위’ 죄목으로 ‘전원 구속’이라 한다. 부정선거를 밝히려고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은 누명을 쓰고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다. 그 청년들의 미래를,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힘겹게 독재와 싸워 얻은 ‘87년 체제’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부정선거’가 ‘87년 체제’의 국민주권 원리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2025-02-10

4·19와 6·10, 그리고 1·19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지난 1월 19일,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에 저항하는 시민들이 공덕동 서부지방법원에서 재동의 헌법재판소까지 긴 행진을 했다. 전날인 18일 오후부터 구속영장이 청구된 서울 서부지방법원에 20~30대 청년들이 중심이 된 시민들이 이렇다할 사전 연락도 없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날은 토요일, 원래 광화문에서 전광훈 목사 교회 쪽이 주최하는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예정과 달리 대통령이 영장 실질 심사에 직접 참석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서부지방법원으로 달려갔고, 그러자 광화문 세력도 서부지방법원으로 합세하기로 한다. 이날 오후부터 한밤까지, 그리고 19일의 새벽까지 날이 아주 길었다. 시민들은 불법적으로 영장을 발부한 이순형, 신한미 전담판사와는 다른 주말 당직판사가 심사를 맡는다는 사실에 큰 기대를 걸었다. 차은경 판사가 어떤 사람인지 어지간히 찾아들 보고 화제에도 올렸다. 이런 저런 판결 이력들을 살펴 이 사람은 혹여 다를지도 모른다고들 했다. 자정을 훨씬 넘겨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법원을 둘러싼 사람들이 바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빛깔의 것이었다. 청년들은 나이든 사람들과도 다르다.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서부지방법원은 그동안 억눌려온 분노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서부지방 법원 유리창들, 외벽들, 그밖의 시설물들이 파손되고 경찰 바리케이트도 부서졌다. 경찰이 법원 진입을 유도했다고도 하고, JTBC 기자가 유리창을 깨고 조작뉴스를 방영했다고도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든 폭력과 파괴는 정당화될 수 없다. 날이 새자 한밤의 시위대가 해산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헌법재판소까지 행진하기로 한 시민들이 새로 모여 들었다. 거리 행진은 길었고,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강압적인 심판 진행에 거세게 항의했다. 이 1월 19일의 상황은 필자로 하여금 지나쳐 온 한국현대사를 돌아보게 한다. 4·19혁명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학생 시위대의 한 사람인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우리가 오늘 사월혁명이라 부르는 4·19의 새벽이 밝아오게 된다. 1960년의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사월혁명으로 일어났다면, 1987년 6월 10일에 시작된 6월항쟁은 1월 14일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다.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시민들은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외쳤다.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국민주권 박탈상태에 국민저항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번 1·19 사태는 지난 12월 3일 대통령의 계엄 포고가 직접적 배경이라 하겠다. 지금 탄핵 심판에서 대통령 측은 계엄령 포고가 2024년 4월 15일 22대 국회의원 선거의 부정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포고 당시에 대다수 국민은 계엄령 포고가 21세기의 번영을 구가하는 한국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황당한 도발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대통령이 다수파 야당의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고 체포, 구속까지 당하게 되면서 국민들 생각과 감정이 아주 달라진 것 같다. 필자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다. 과연 22대 국회는 가짜였던 것이 아니냐. 이것이 지금 국민들이 의혹을 품고 대통령을 심정적으로 동정하는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2025-01-20

‘1987년 체제’의 위기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지난 한 달 간, 숨가쁜 나날들이었다. 비상계엄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안 가결, 한덕수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의 탄핵, 대행의 대행에 의한 헌법재판소 판사 임명, 무안 공항의 제주항공 비행기 동체착륙 폭발 대참사,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등의 사건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많은 국민들은 순진한 면이 있다. 그네들은 티비가 연출하는 조작된 이미지들에 ‘사로잡힌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다. 과연, 이 연속적인 사태의 귀결점은 어디일까? 필자는 현금의 상황을 ‘1987년 체제’의 파국으로 진단한다. ‘1987년 체제’란 1987년 6월 10일에 시작된 ‘6월 항쟁’에 의해 수립된 현재의 헌법적 체제를 의미한다. 유신체제에서 신군부 정권까지 국민들은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1987년의 6월 항쟁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자기 손으로 뽑는 국민주권 원리를 실질적으로 회복한 역사적 혁명이다.‘1987년 체제’란 직선제로 상징되는 국민주권의 공준 체제다. ‘1987년 체제’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 또한 본질적이다. 신군부의 ‘기만적인’‘6·29 선언’ 이후 새로운 요구와 도전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7~8월 노동자 대투쟁’이 그것이다. 1987년 체제는 이 민중적 요구와 권리를 헌법적으로, 국가정체적으로 인정하고 보장하는 체제다. 때문에 이 체제는 항상적인 ‘위기 체제’이기도 하다. 민중들의 요구는 이 체제에서 합법적, 합헌적이다. 이 체제는 항상적인 위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위기를 겪지만 감내해야 한다. 위기 속의 ‘영구혁명’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대가다. 이와 같은 전제 위에서, 현재의 파국적 상황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많은 이들에게 계엄령은 반민중적 독재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시대착오적 도발로 이해된다. 대통령은 군사독재 세력을 계승한 ‘국힘’을 대표하는 존재이고, 이 세력의 독재주의적 도발이 충격적으로 시도된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대통령은 어째서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했던가? 그는 그날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비상 수단을 동원한 것이라고 했다. 만약, 대통령의 주장대로, 지금 우리가 ‘1987년 체제’의 제1원리인 국민주권의 원리를 침해, 침탈당한 상황이고, 국민들이 이를 채 깨닫지 못한 상태라면, 그런 조건 속에서의 민중적 ‘영구혁명’은 전체주의의 도래를 의미할 뿐이다. 지금 성행하는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 체포·수사·구속, 언론 조작을 통한 여론 유도, 군중 심리의 억압, 인민 재판적 지목 양상 등은 바로 전체주의의 대표적 요소들이 아닐 수 없다. 부정선거 시스템의 존재와 작동 여부는 월드 와이드 웹이 지배하는 가상현실 세계의 작동 원리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다. 많은 서구국가들과 티이완이 아날로그적인 수개표를 고집한 데 반해 한국의 중앙선관위는 국민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전산 개표를 투명하다고 강변해 왔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에 가까운가? 필자는 생각한다. 사태의 진실은 우리가 보았다고 생각한 것과는 언제나 많이 달랐다고. 여기서는 필자 또한 예외는 될 수 없을 것이다.

2025-01-06

검은 1월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3박 5일의 아제르바이잔 바쿠 여정. 바람 세차게 부는 공항에서 곧바로 메르큐어 호텔(Mercure Baku City)로 가 여장을 풀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호텔이다. 이번 학술대회 이름은 ‘아시아인의 문학: 전통과 새 경향’(Literature of Asian: Traditions and Modern Tendencies). 아제르바이잔 사회과학원 산하 문학연구소 주최다. 내가 맡은 역할은 기조 강연. 발표 주제는 ‘동아시아론을 넘어서’(East Asian Discourse and the New Future of Korea). 다음날 오전에 발표를 마쳤으므로, 오후 세션은 홀가분했다. 나를 초청해 준 레르드한 교수의 세션에서 빠져나와 대회장 건물 1층 서점을 둘러본다. 카라바흐 지역, 나흐치반 자치공화국, 이라반 왕국에 관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 말들은 아제르바이잔의 아픈 역사를 가리킨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와 두 번 전쟁을 치르면서 카라바흐 지역을 되찾았다. 아르메니아 안에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고립되어 있는 ‘나흐치반’ 지역이 있고, 지금 아르메니아의 수도의 이름이기도 한 ‘이라반’은 아제르바이잔 고대 왕국이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투르크족 계열이다. 투르크어를 쓰는 한국인들의 친족 민족들이다. 몽골과 위구르를 지나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이어지고, 카스피해 건너로 아제르바이잔과 튀르키예가 긴 띠를 이룬다. 다음 날 아침, 문학연구소를 둘러보고 사회과학원 한 모퉁이에 나무를 심는다. 방문한 연구자의 나라마다 심을 여유는 없다. 나는 중국의 연구자 두 사람과 함께 나무를 심는다. 아제르바이잔 아카데미 학술행사 끝내고 바쿠 교외의 ‘불타는 산’(Yanar Dag)에 다녀오자 날이 저문다. 마지막 방문지는 ‘순교자의 길’(Martyrs’Lane)이다. 입구에서 주최 측이 카네이션 꽃송이들을 나누어 준다. 이 카네이션은 ‘검은 1월’ 사태 이후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상징이 되었다. ‘검은 1월’(Qara Yanvar)이란, 1990년 1월 19~20일에 독립을 염원하던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소비에트 연방 군대에 학살당한 참사를 가리킨다. 여전히 ‘사회주의’ 소련이 군림하던 상황에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일어났다. 소련 특수부대가 바쿠로 진격해 많은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 학살극 속의 저항과 희생에 힘입어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 1991년 10월 18에 독립을 쟁취한다. 겉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한 소련 제국주의의 기나긴 통치로부터 극적으로 해방과 자유를 쟁취한 것이다. 어둠 속의 참배, 돌아 나오면서 눈앞에 보인 세 개 빌딩에 검붉게 타오르는 횃불.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을 상징하는 저 횃불은 인간에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말해준다. 머나먼 동아시아의 한 조그마한 나라를 생각한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조국, 자유를 향해 지금 다시 고통스러운 여정을 통과해 가는 나라. 과연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 나라에서는 늘 진실이, 멀리, 파스칼의 ‘숨은 신’처럼 존재한다. 아예 보이지 않는다면 믿지 않아도 될 것을. 늘 보인다면 홀로 애써 찾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을.

2024-12-23

이 광기의 바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그가 바다 한가운데 버티고 섰다. 맹렬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성난 바다는. 미친 바람이 사정없이 몰려들었다. 바다는 저도 모르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허기에 사로잡힌 바다였다. 무엇이라도, 통째로, 송두리째 집어삼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았다. 괴물 같은 바다가 몸부림을 칠 때마다 미물 같은 생명들은 안쓰럽게 휘둘렸다. 바다는 눈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바다는 오로지 제 사나운 갈퀴를 들어 무엇이라도 찍어버리려 했다. 산더미 같은 파도 갈퀴들이 버티고 선 그를 덮쳐 버리려 했다. 미친 바다 날카로운 거품, 갈퀴 파도가 그를 향해 쇄도해 들었다. 어디를 어떻게 긁혔는지, 빨간 핏물이 버티고 선 그의 두 뺨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핏물 아닌 눈물, 피눈물이었다. 그때 성난 포말의 군중들이 사방에서 그를 물어뜯으려 몰려들었다. 하이에나 떼라도 된 것 같은 그들은 미친 문자의 바닷속에서 자기야말로 진짜 갈퀴를 가졌노라, 아우성을 쳤다. 하마 누구한테 뒤질세라, 더 맹렬하게 끓어올라야 하리라, 거품들은 거품처럼 거품답게 부풀어 올랐다. 한없이 부풀어올라 곧 금방이라도 허무하게 터져버릴 것 같았다. 미친 바다 한가운데서 그는 고독했다. 고립되어 있었다. 처절한 싸움의 한가운데 있었다. 사방에 덧없는 거품들, 헛소리들, 휘어진, 찢어진, 너덜너덜한 깃발들, 빛을 잃은 구호, 급조된 발작 버튼, 진실의 표면 위를 핥아대는 혓바닥, 시간에 쫓겨 초를 다투며 초조하게 날뛰는 몸부림들, 가짜 용기들, 가짜 소식들, 오염된 주인들, 가짜들, 어리석음들…. 이 더러운 끓어오르는 바다 한가운데서 그는 산더미같은 고독에 휩싸여 있었다. 과연 그는 헤쳐나갈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몸부림치는 적들을 잠재울 수 있을까. 진실을, 정의를,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회복할 수 있을까. 이 현대판 리바이어던, 사나운 미친 포말의 괴물들, 거짓으로 빚은 공포의, 전체주의의, 괴물의 바다에서 그는 살아남아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벗들아, 그대들은 아는가? 그대들이 본 것은 진리가 아니었음을 사막의 신기루, 씻겨버릴 오물, 녹아버릴 3월의 눈, 말라붙은 쥐오줌, 썩어가는 분뇨더미, 악취 나는 노숙자 발바닥 같은 것들을 아는가? 우리가 우리를 속여왔음을 아는가? 스스로 최면을 걸고, 주박에 걸려, 앞뒤 모르고, 좌우도 모르고 날뛰고 있음을 아는가? 하늘 높이 우리의 부끄러움이 효수가 되어 걸려 있는 것을 아는가? 시간은 아무도 이길 수 없는 법, 어떤 것도 시간 속에서 녹슬지 않는 것 없고, 병들지 않는 것 없고, 찌들지 않는 것 없고, 정확히 원래 품었던 염원의 정반대 것으로 전화되어 버리는 것을 아는가? 벗들아, 그대들이 눈이 없는 걸 아는가? 냄새도 맡지 못하는 색맹인 것을 아는가? 그대들의 깃발에 갈고리 문양이 그려진 것을 아는가? 그대들이 포말처럼 솟구쳐 올랐다 꺼져버릴 때, 그가! 우리들 상상 속 피투성이 ‘프로 혼’처럼, 그가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 것을 아는가? 모래 시계 속에서 핏덩이 같은 모래알갱이들이 무심하게, 냉정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대들, 허위의 목소리들, 문자들의 시간이 흩어지고 있다.

2024-12-09

도쿄 2박3일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도쿄에 가자고, ‘K-Book 페스티벌’도 참관하고,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도 간다고 했다. 외국여행 간다기보다 모처럼 사람들 만날 기회를 버리기 싫었다. 2박3일, 일정은 짧았다.‘새벽 출정’처럼 다섯 시 반에 집결했으니, 멀리 속초나 춘천에서 온 이들 가운데 공항에서 날밤을 새운 경우도 있었다. 일곱 시 반 출발 예정이었는데 여덟시 넘어 떠나는 연착 비행이었고, 나리타 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이크로 버스에 나누어 타고 한참을 달렸다. 예정보다 늦어 점심 밥을 먹고 또 버스를 타고 가 무사시노의 카도카와 문화박물관에 가 닿을 즈음 우리는 모두 기진맥진 상태였다. 갔다 와서 찾아보니, 이 박물관은 “아트, 문학, 박물 등의 장르를 뛰어넘어 모든 지식을 재편성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박물관”이라 했다. 8미터가 넘는 거대한 책장에 빛의 폭포가 쏟아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박물관의 위용보다 비로소 쉴 수 있음에 안도했고, 박물관 맞은편으로 지는 석양빛을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시련’은 계속되었다. 숙소까지 우리는 거의 두 시간을 더 달렸던 것 같다. 저녁식사는 식은밥이었고, 호텔 방은 모든 것이 ‘축소지향형’의 나라에 온 것처럼 비좁았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와세다대학으로 향했다. 그곳에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이 있다고 했는데, 나로 말하면 벌써 여러 번째 이 도서관의 존재에 관해 듣고 잔뜩 호기심에 차 있던 나였다. 와세다대학의 은행나무 단풍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양옆의 가로수 길을 따라가 드디어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을 찾아냈다. 생각보다 아담해서 좋았던 이 독특한 라이브러리의 1층과 지하층은 온전히 하루키 문학을 위한 것이었고, 윗층은 다른 작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길디긴 하루키 문학 연표였다. 1979년에 그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 신인상을 받으며 창작을 시작했다. 그 사이에 그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쓰고 또 썼다. 우리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그는 이 상에서 몇 걸음 멀어졌지만 장인적인 작가로서 그는 어떤 부족함도 없어 보인다. 점심밥은 네 사람씩 짝을 지어 맛을 찾아냈고, 모처럼 배를 불린 우리는‘K-book 페스티벌’이 열리는 진보초의 출판그룹 빌딩으로 향했다. 과연, 페스티벌다웠다. 한국 작가 책을 낸 출판사들이 모여든 책 잔치는 좁지 않은 공간이 꽉 찰 정도로 찾아온 일본 독자들로 인해 잔칫집 분위기를 연출했다. 모르는 사이에 한국문학 작품들에 대해서도 일본 출판계는 결코 게으르지 않은 듯했다. 우리는 또 아동과 소년 책들을 내는 대표 출판사 쇼가쿠칸(小學館) 빌딩으로 가 일본 문학인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이분들의 안내를 받으며 헌책방들이 운집해 있는 간다 고서점가를 걸었다. 나는 기회를 엿보아 이경재 선생이 알려준 고양이책방(‘네코당’)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이날 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 본 것도, 재미있는 것도 많았다. 그러나 정작 다음날 귀국 여행길에 오르자, 새삼스럽게 귀하게 느껴진 것은, 함께 떠났다 돌아오는 열여섯, 일곱 한국의 작가, 시인들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잘 모르다가 세상에 나가고서야 그네들이 그렇게 귀하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2024-11-25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지난 주말 서울은 무척 시끄러웠다. 생각을 달리하는 두 ‘집단’이 각기 거의 같은 시간에 시내에 집결했다. 모인 사람들 수가 몇 만 단위를 넘었다고들 주장된다. 당분간 이런 시절이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미리부터 나 자신에게 다짐을 해 둔다. 이번에는 어디에도 ‘나가지’않으련다. 고민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 20년 전, 평론집 ‘행인의 독법’을 낼 때 심정으로 돌아가 보자는 것이다. ‘행인’의 심정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냉연히,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모든 것이 기이하리만큼 이상했다. 정부는 단순히 무능력한 것만 아니고 무언가 모를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모론’이라 매도되는 모든 가설과 추론이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었다. 문제의 선박은 출항 일자부터 항로, 구조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납득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 전대미문의 참사는 2년 후 정부가 무너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국정농단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의 의문은 그 시점부터다. 정부가 바뀌었는데, 어째서 참사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걸까. 선거 때 참사의 선박이 인양되기는 했다. 그뿐이었다.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은 없었다. 참사 때문에 들어선 정부, 진실을 요구하던 단체들, 모두들 딴전을 피웠다. 허무한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정부가 다시 한번 새로운 정부로 바뀌었다. 처음부터 ‘탄핵’을 하자는 말들이 쏟아졌다. 왜? 내게는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몇 달이 흘렀다. ‘핼로윈 데이’. 이태원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원인은 이번에도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정부로 책임을 돌리려고들 했다. 사고 당시의 동영상 기록 등 앞뒤 상황은 의문투성이였다. 걱정과 번민 속에서 사태의 진실에 다가가고 싶었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이태원 인파들 가운데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을 추적하는 유튜브 채널들은 사람들이 어디서 희생되었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특정 세력의 개입은 없었는지를 따지고 있었다. 공개된 영상들이 조작된 것이라고 믿은 어떤 이는 장례식장, 분향소를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는데, 이는 나중에 야당 대표가 테러를 당했다는 데 대해서도 진위 여부를 따지다 고발을 당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내게 하나 깨닫기는 게 있었다. 신문·방송을, 유튜버들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만은 없다. 이들의 무성한 수풀을 찬찬히 헤쳐 누가 정말로 진실을 말하는지 헤아려야 한다. 선거도, 여론조사도, 그렇게 엉망진창이어서는, 베일에 가려 있어서는, 민심 그것과는 현격한 거리가 생기는 법이다. 원인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외치는 소리에 너무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은 아닐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야흐로 시작된 11월의 사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 번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진실’에 의문을 품고 있는 나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 그것은 같은 일이 두 번 똑같이 일어나가는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 바로 그것일 것이다.

2024-11-11

김윤식 선생 전시회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오전 열 시 반, 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향했다. 저녁에 있을 학술상 시상식 전에 한 번 더 김윤식 선생 전시회를 둘러보겠다고 생각했다. 9월 30일 개막해서 올해 말까지 이어지는 이 특별전시회 제목은 ‘혼신의 글쓰기’였다. 지하 1층 전시실 입구는 적막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이르다. 사람들이 아직 찾아들지 않았다. 좁지만은 않은 전시실. 김윤식 선생이 쓰신 저작들과 육필원고들, 연구를 위해 준비한 자료들, 그리고 당신의 생전 서재들. 적막한 전시실에 김윤식 선생의 생전의 말씀이 흘렀다. 소리를 따라 전시실 한쪽 공간으로 향했다. 설치된 티비에서 김윤식 선생의 강연, 대담 편집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당신만의 참으로 독특한 표정들, 당신은 표정을 많이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정말 몇 개의 표정으로 당신의 삶을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적은 개수의 표정만을 가진 ‘사나이’였다. 소설 습작도 몇 편 남기신 선생은, 그러나 비평가였다. 가장 비평가다운 고독과 괴력의 사나이였다. 영상 속에서 선생이 말했다. 비평가는 자기표현을 금지당한 사람이라고. 또 자신은 ‘시체지기’처럼 남들이 쓴 것들 속에서 살아왔노라고. 나는 그 말씀 속에서 사르트르를 읽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가 비평가를 그렇게 규정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影武者, かげむしゃ)에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다케다 신겐의 ‘그림자 무사’가 등장한다. 그는 하찮은 신분의 사람이었는데, 다케다 신겐을 닮은 까닭에 죽은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세상을 속이는 사람으로 ‘채용’된다. 모든 것이 서투르기만 한 그는 살아생전의 다케다 신겐처럼 전투에까지 나가야 하는 딱한 신세가 된다. 날아오는 화살들에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그림자 무사’. 옆에서 성난 꾸짖음이 들려온다. 주군은 산과 같았고,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질타에 가짜 무사는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선생이 바로 그 ‘그림자 무사’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그는 진짜 다케다 신겐 같은 차림새를 얻는다. 진짜처럼, 진짜가 되려고 하면서 그는 이윽고 생전의 다케다 신겐을 꼭 닮은 사람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진짜처럼 연기할 수 있었을 때 그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든다…. 선생은 비평가란 그런 존재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설가도 될 수 있었고, 강렬한 문체를 가진 산문가였지만, 비평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숙명적 의식을 체득한 사람이었다. ‘진짜’ 비평가였다. 세월이란 무상하다. 지난 10월 25일은 김윤식 선생의 6주기 기일이었다. 저녁에 김윤식 학술상의 제3회 시상식이 있었다. 수상자는 숭실대 이경재 교수, 수장작은 ‘한국현대문학과 민족의 만화경’(2023)이었다. 이 상의 기금은 김윤식 선생의 생전의 아파트에서 온 것이다. 가정혜 선생께서 당신의 아파트를 국문학 연구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으신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한국문학관에는 김윤식 선생이 생전에 쓰신 저작들로 모아진 더 큰 기금을 내놓으시기도 했다. 미망인께서 한국문학 전체와 선생이 재직하신 곳을 위해서 각기 ‘희생적인’ 출연을 아끼지 않으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쉽게 할 수 없다.

2024-10-28

한강이 내게 보내준 선물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10일 밤에 멀리 스웨덴에서 들려온 소식은 한국문학의 의미를 단번에 바꾸어 버렸다. 한강의 수상 소식은 그 한 사람 작가의 영예가 아니었다. 그것이 한국문학 전체의 밝은 빛임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첫날, 다음날에 사람들은 오로지 기쁨뿐이었다고 생각된다. 이틀째 되는 날 ‘조선일보’1면은 “‘한강 신드롬’ 대한민국이 종일 웃었다”였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이 한국문학만의 기쁨이 아니었다는 인식을 아주 명징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언론사의 기자분들, 그리고 문학인들과 전화로, 문자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룻새 달라진 한국문학의 색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부터 벌써 다음 날 있었던 ‘한국현대문학사’ 수업을,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노벨문학상으로 ‘긴급 편성’을 해야 했다. 출생률 저하로 한국어 인구가 바싹 줄어들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 짓눌려온 한국문학을 앞으로 계속해서 공부해도 좋다는 푸른 신호를 받아든 것 같았다. 어두운 복도에 형광등이 일제히 켜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반가운 소식을 받아들고, 그러나 동시에 나는 어떤 착잡한 심경에도 사로잡힌 것이었다. 기쁘지 않아서가 아니요, 너무나 기쁜 가운데 심중에 스며드는 한 가닥 세차지도 않은 쓸쓸한 바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과연 나의 문학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결코 부러워 해서도, 시샘해서도 아닌, 부드러운 회색빛의 마음의 어스름은 나 자신이 걸어온 문학의 길을 찬찬히 한번 되돌아보라고 주문하고 있었다. 명함을 가진 사람의 ‘논평’이 필요한 라디오나 티비에서 나를 부르기도 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의미 부여하기도 했다. 해남에서는 카프카와 관련해서도 한강 이야기를 했고, 불광동에서도 작가 이호철 선생의 행로를 말하며 다시 노벨문학상 이야기를 했다. 김유정문학촌의 발표를 앞두고도 한강의 ‘채식주의’는 김유정과 크로포트킨의 ‘사랑의 투쟁’과도 비교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강 문학의 앞뒤 사정을 생각해 보고, 그것이 한국현대문학의 큰 나무의 소산일 수 있음을 명료하게 인식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나의 문학은?, 하고 자문하고 있었다. 문학인들은 한강으로 인해 자신의 길이, 선택이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납득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잘은 보이지 않은 한 줄기 희미한 생각의 빛을 쫓아 시선을 먼 앞으로 던져 보고 있었다. 한강이 내게 준 선물은 바로 이 질문 그것에 있었다. 나는 짧은 며칠 사이에 지난 십 년 동안 생각해 본 것보다 더 많이 나 자신의 문학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게 있어 시는 무엇이었나? 소설은 무엇이었나? 어떤 궁극의 질문을 가지고 있었나? 얼마나 좋은 일인가? 급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볼 수 있음은. 걸어온 길과 남은 길을 ‘측량’할 수 있음은. 사위가 고요하고도 기쁜 날들이다.

2024-10-14

늦은 밤 별 다방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스타벅스’보다 ‘별 다방’이 좋다. 아침부터 한밤까지 앉아있을 수 있다. 그 쓰고 독한 아메리카노는 ‘캐모마일아이스’로 바꾸었다. 창가에 앉으면 더 좋다. 2층 창밖, 행인들은 여유롭다. 과일 행상에 백열등이 노랗게 켜졌다. 쓰려면 자기만 쓸 수 있는 것을 써야 한다. 공부하려 해도 자기만 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삶은 아침부터 밤까지 보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저마다 주어진 시간, 남은 시간이 결코 길지 않다. 몇십 평이나 되는 스타벅스 2층에 두 사람, 세 사람씩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마다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다. 어제, 그저께, 잡지에 보내온 장편소설 1부를 하루종일 교정했는데, 더 이상 손볼 수도 없고, 작가 의견도 전혀 달라서 결국은 겨울호로 미루기로 했다. 이틀 내내 다른 일 다 버리고 끙끙 매어달렸건만. 과일가게 아저씨가 금방 복숭아를 팔았는지 노란 백열등 아래서 지페를 세고 있다. 김남주 시인이 자꾸 떠오른다. 도대체, 바보스럽게, 남민전이 무어란 말이냐. 겨우 일 년 들어 있었다고, 9년 하고도 3개월씩이나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그는 시인이었다. 다른 것보다, 하이네고 네루다고 마야코프스키고, 아라공이고, 푸시킨이고, 그는 다른 시인들을 진짜로 읽었다. 그들을 읽고, 읽었다고 이름을 기억하는 대신에, 자기는 어떻게 써야 하느냐고 생각했다. 작가, 시인은 제2의 현실을 사는 사람, 다른 이들이 써온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그 현실이다. 날것으로서의 제1 현실 아니라 이 제2 현실을 날카롭게 의식할 때 진짜 시인이 된다. 방금 신호등이 바뀌었다. 푸른 신호등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건너간다. 참, 자기는 정의롭다고, 옳다고 말하기는, 주장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이냐. 요즘은 다들 바빠서 그런 포즈 아래 숨어 있는 속셈을 탐정이 범인 찾듯 캐낼 수는 없는 노릇인 때문이다. 제기랄. 티비에 나와, 유튜브에 나와, 아니면 다른 이들 앞에서 자기는 정의롭다고 강변하면 다들 속고 만다. 한 겹짜리 가면 속에서 좋다고 웃는다. 그러는 사이에 참혹하게 괴롭힘 당한 사람은 오늘 차라리 죽어야 할까를 생각한다. 시를 이렇게까지 안 쓰고 있으면 안 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다른 일만 하고 있는 걸까. 읽는다 읽는다 하고 밀쳐 둔 소설도 미처 안 읽은 게 한두 권이 아니다. 재능은 그나마 시에 가까운데, 이렇게도 소설을 쓰고 싶은 것은 무슨 부조리, 모순이란 말이냐. 지난 주에는 나도향이 참 좋았지.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겨우 스물세 살에 그런 대단한 삼부작을 쓰다니. 스물네 살에 아깝게도 세상을 떠난 사람. 처음에 생명체는 눈이 없었단다. 그러므로 목표가 없었단다. 눈이라는 게 생기고 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생겼단다. 생명체 탄생 이후 한참 지난 후란다. 나는 어느 때나 눈뜨려나. 9시 13분. 별 다방 그만 괴롭히고 떠나야 할 때다.

2024-09-02

프란츠 파농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이날 우리는 간월암 거쳐 수덕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마지막 회의를 그쪽에서 갖기로 한 것이다. 합정동에서 셋이 만나고, 다른 세 사람은 간월암에서 합류하기로 했다.내려가면서 나는 계속 프란츠 파농을 생각했다. 마침 그의 평전 ‘나는 내가 아니다’를 읽고 있던 참이다. 파농은 1925년생인데 1961년에 세상을 떠났다. 길지 않은 일생이었다. 백혈병이었지만, 그 전에 프랑스 정보당국에서 이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몇 번씩이나 일종의 ‘공작’을 벌였다고 한다.프란츠 파농은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섬 출신이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 노예의 후예였다. 비록 어머니는 흑백 혼혈이었다지만 그는 형제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검은 피부를 타고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철학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평전은 말한다. 파농은 프랑스 정규 군대 군인이 되었다가 의대를 거쳐 정신과 의사가 되지만 결국 철학적인 저서를 쓰게 된다.‘검은 피부, 흰 가면’은 전체를 읽어보면 흑인의 ‘정신적’ 해방에 관해 쓴 책이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알제리 사람들의 해방운동에 깊이 참여하지만 그의 저서는 흑인들의 진정한 자기의식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한국에서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김남주였다. 이 시인은 ‘남민전’ 준비위 사건으로 15년형을 받고 9년여를 살다 석방되었다. 그가 이 책을 번역, 출간한 때는 1978년이다. 그는 영감어린 시인의 문체로 이 책을 완역했다.김남주에 관한 회상들은 그가 전대 영문과 시절부터 이 책을 읽었음을 보여준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그에게 한국 농민의 상황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상황과도 같은 것으로 느껴졌던 게 아닐까?김남주가 감옥에 갇혀 있던 1980년대에 상당수 지식인들은 한국이 ‘제3세계’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제3세계’라면 한국은 그 정태적 패러다임이 계시하는 탈식민지 해방 혁명이 아니고서는 구원될 수 없다.그러나 한국은 그러한 의미의 혁명이 없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계로 변모했다. 한국은 식민지의 유제라 할 분단을 청산치 못한 가운데에도 제1세계와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이다.이 문제는 아주 까다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 끝에 내가 찾아낸 해법은 제3세계론, 종속이론, 올드 마르크시즘 등 1970~1980년대를 풍미한 해방의 이론들은, 그 정태적 패러다임, 즉 어떤 불변의 구조를 상정하고 이 구조는 진정한 혁명 없이는 타파될 수 없다는 신념을 공유한다는 것이다.프란츠 파농, 김남주, 남민전, 제3세계, 혁명, 해방…. 혹시, 그 해, 1987년, 6월부터 7~8월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는 ‘전형적인’ 제3세계 혁명과는 다른 의미의 ‘진짜’ 혁명을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진짜 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간월암이라는 이름은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간월암 저편으로 아름다운 핏빛 석양이 졌다. 사람이 진실을 안다는 것은 단연코 쉽지 않은 일이 아닐까 한다.

2024-08-19

사람은 올바름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한 주가 숨가쁘게 흘러갔다. 일요일부터 다시 일요일이 올 때까지 무엇인가 내 삶에서는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올바름을, 원칙을 따라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눈 감고 포용하는 길을 택해야 하나?옛날에 나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게 남의 흉허물을 드러내지 말라 하셨다. 따지지 말라 하셨다. 그렇게 하면 인생을 살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자식이 어렵고 힘들게 살까 걱정하신 것이었다.화요일쯤이었나? 한 밤, 두 밤을 뜬눈으로 새다시피 한 판에, 파주의 후배 작가 작업실로 수박을 커다란 것을 하나 들고 돈 아까운 줄도 모르고 택시를 타고 갔다. 거기에 작가 몇 사람이 모인다고 놀러오라 했었다. 몸은 너무나 피곤한데,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서 아예 잠을 잘 수 없는 상태, 잠깐만이라도 정 많은 친구들 만나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한 삼십 분 앉았다 돌아온다는 것이 두세 시간을 그대로 눌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퀴즈를 내듯 후배 친구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말하고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했다. 올바름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음을 깨닫는 나이, 더구나 그 올바름을 취한다면 사람을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몇 살이라도 젊은 친구들인데, 모두들 내가 더 어려워질 것을 걱정들을 했다. 이미 많이 늦었으니 판을 벌리는 것보다는 그대로 사람을 사는 쪽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지혜가 담긴 의견들이었다.파주 헤이리의, 이 작업실 주인은 요리 솜씨가 아주 좋았다. 모인 사람들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해두었고, 내가 가자 서둘러 조리를 해서 다시 내주는데, 와인 한 잔 하기에 안성맞춤 멋진 음식들이었다. 이미 모인지 꽤 되었지만 내가 가자 무슨 일인가로 긴장해 있던 분위기가 더 풀린 것 같았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속에서 좋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편안한 것도 없다. 우리는 꽤 오래,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때부터 서로 가까워진 사람들이었다. 어려울 때 서로 가까워진 사람들은 사이가 쉽게 나빠지기 어렵다. 어려울 때 쌓인 정이 깊기 때문이다.더 늦기 전에 이제는 불광동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몸이 천근이었다. 일산이 집인 후배와 같이 다시 택시를 타고 바래다주고 집으로 오기로 했다. 이 친구는 아직 자리를 옮겨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차 안에서 다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구했다.이제 혼자였다.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건만.그러나 두날째 밤을 새다시피 한 정신이 맑아지고 차분해졌다. 감정을 앞세울 일도 아니고 사리에 맞게, 일이 생긴 대로, 이에 맞게 대처하면 될 뿐이었다.이 일은 결국 올바름을 쫓아 문제를 풀어나가겠지만, 사람은 결코 올바름만으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그리고 사람은 각기,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사람이 결코 같지 않다. 사람마다 올바름이 같지 않을 수 없고, 내 올바름이 객관적으로 올바른 게 아닐 수도 있다.끙끙 속앓이를 하며, 나는, 그래도 사람은 올바름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하고 애써 내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2024-08-05

울릉도·독도 2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비바람에 머리가, 옷이 다 젖는 것도 모르고 나는, 우리는, ‘환상’ 속의 독도를 하나의 실체로 만나고 있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 둘에, 여든아홉 개의 크고 작은 바위 섬들로 이루어졌다. 서도가 동도보다 조금 더 넓고 높다.배는 섬에 오르지 못해 아쉬운 사람들을 위해 그 옆을 스쳐 돌며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얼굴에 빗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넋을 잃고 섬을 건너다 보았다. 배가 흔들리는 파도를 따라 떠밀리며 오르내리는 까닭에 섬은 생생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비바람 속의 환영처럼 일렁였다.마음 속에, 심중에 섬의 형상들을 깊이 심어두는 데 집중해야 하건만 우리는 사진을 찍는 데도 바빴다.어느 분인가 섬을 보라며 정말 사람 같다고 하셨다. 가리키시는 방향을 바라보니, 정말 생각에 깊이 잠긴 듯한 수행자의 얼굴이 옆으로 보였다. 비바람 속의 수행자는 깊은 묵상에 들어 있었다. 저게 얼굴 바위일까. 그러고 보면 섬에 가까워지면서 서도 쪽의 코끼리 바위의 선명한 모습을 보았던 것도 기억에 또렷하다.비바람 속에서 묵상에 잠긴 외로운 수행자를 뒤로 하고 울릉도로 돌아온 우리는 파김치 상태였다. 저녁식사 후 나와 이찬 선생의 숙소에 미국에서 오신 박시걸 시인 등 여럿이 모여 신원철 시인의 클라리넷 연주에 유튜브로 선곡을 해 들었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에 밤이 깊었다.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울릉섬을 돌고 나리 분지로 들어가는 순례길에 나섰다. 버스 운전 기사분이 들려주는 울릉 섬에 딸린 죽도 총각 이야기며 섬의 정확한 수치들에 관한 이야기는 재밌고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리 분지는 섬의 한가운데 높은 곳에 들어앉은 아늑한 평지다. 고종실록에 섬에서 이 나리만이 관청을 둘 수 있으리라 했었다. 겨울 들면 출입이 어렵다는 이 독특한 화산섬 분지에서 우리는 막걸리 한 잔씩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막걸리 이름은 ‘씨껍데기’라 했다. 아하, 춘천 길에 ‘조껍데기’ 술이 있다면 나리 분지 길에는 ‘씨껍데기’로구나. 문득 시간강사 시절에 문흥술 선배한테 배운 강원도식 막걸리를 떠올리며 씨껍데기 주를 한 모금 마셔보는데, 약초 넣은 술은 전혀 달지 않고 시원스러웠다.아름다운 성불사, 가수 이장희 집, 예림원, 수토역사 전시관 같은 명소를 고루 돌아 숙소 세미나실에서 우리는 이윽고 학술 논의를 한다. ‘우리 땅과 시의 영토’라는 주제로 박덕규 선배가 사회를 맡으시고, 최동호, 유성호, 양은창 교수, 그리고 내가 학술발표를 했다. 이 가운데 최, 유 두 분의 발표는 시문학 속의 울릉도·독도를 논의한 것이고 나의 발표는 우리 역사 속에 남아 있는 두 섬의 기록,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최근에 관심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 새로운 역사인식, 특히 고대사 인식을 중심으로 두 섬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했다.다음날 우리는 드디어 독도박물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유치환 시인의 시 ‘울릉도’의 시비가 있다. 그는 해방 후의 어지러운 위기의 시대에 이 시를 썼다. 시는 역시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2박 3일의 짧은 순례길. 나라와 역사와 시가 만나는, 시를 쓰는 사람들의 뱃길. 소중한 기억을 위해 짧게 옮겨 놓는다.

2024-07-22

울릉도·독도 (上)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지난 2일 밤 11시 반경 한국시인협회 사람들 약 마흔 사람이 창덕궁 돈화문 옆으로 모였다. 한밤에 울릉도를 향해 떠나기로 한 것이다. 대개 2박 3일 일정이면 새벽 세 시쯤이나 출발이라는데, 이 팀은 자정녘 출발을 택한 것이다.시인협회 살림을 맡은 이채민 시인과 김향숙, 김조민 시인들은 일찍 나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김수복 회장도, 최동호, 김추인 시인들 모습도 보이셨다. 내 발표에 토론을 맡아줄 비평가 이찬 선생은 커피숍에서 출발 시각을 기다리고 있다 했다.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한밤 출발 일정표를 보고, 몇번이고 차라리 하루 먼저 묵호에 가 다음날 새벽에 올 버스 일행들을 기다릴까 했다. 실제로 박덕규 선배는 그러신다고도 했다. 나나 이찬 선생이나 다 사정이 허락치 않은 게 문제였다. 새 버스였지만 45인승인 탓에 우리는 모두 빽빽히 들어앉았다. 양평휴게소에서 한번 쉬고 동해 휴게소에선가 한번 더 쉬고 드디어 새벽 세 시 반의 묵호항. 출발부터 나는, 우리는 기진맥진 상태였다.새벽의 묵호에서 밤의 산책으로 겨우겨우 졸음을 쫓고, 청솔식당에서 황태국으로 아침을 때우고, 우리는 드디어 씨스타 1호 울릉도행 배에 올랐다. 멀미약 키미테를 왼쪽 귀밑에 붙이기는 했지만 나는 은은히 겁에 질려 있었다. 십여 년 전 백령도행 배를 탄 게 마지막 연안 여행이었고, 그때 배멀미를 심하게 한 끝에 위 속의 모든 것을 다 토해 놓았었다. 한밤 서울 출발 덕분이라고나 할까. 좌석도 불편했지만 출항 이삼십 분을 못 가 나는 잠에 떨어졌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도동항에 얼추 도착할 즈음이었다. 그래도 그 마지막 삼십 분 동안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큰 다행이었다. 넘치는 바다를, 한량없는 크기, 부피를 가진 바다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라 해도 나는 동해 바닷물에 내 지친 영혼을 깊이 적셔 씻어낼 수 있었다.배는 울릉도 입도의 관문 도동항에 가 닿았다. 비 내리는 도동항은 첫눈에도 한반도의 산하와는 사뭇 다른 풍광을 보여주고 있었다. 겨우 항구에 발을 붙이기는 했지만 섬은 바로 앞에서 급한 경사의 언덕들에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로 무척이나 낯선 풍경을 연출했다. 우리는 점심식사가 준비된 울릉호텔로 향했는데, 이 호텔 쪽 언덕에 군청이며 경찰서며 농협 같은 모든 중요 기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다시 도동항으로 나갔는데, 당장 오늘 독도 가는 배를 타지 않으면 내일은 배가 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이제 정말로 독도에 가보는 것이었다.울릉도에서도 독도는 87킬로미터, 배로 한 시간 반 가량 걸리는 곳이었다. 파고가 높아 섬에 접안할 수 없으리라는 안내방송에 적잖이 실망했지만 어찌됐든 배가 뜰 수 있는 것만 해도 큰 다행이었다.섬이 가까워 오자 우리들 얼굴에는 모두 긴장이 서렸다. 안내방송과 함께 비내리는 일렁이는 바다 바로 저편에 섬이 보였다. 독도였다. 외로운 섬, 애원의 섬, 너와 나를 우리들로 연결해 주는 사랑의 섬이었다.“비바람 속에서 너를 보았다. 비바람 속에서 너를 만났다.”나는 뱃전으로, 이물 쪽으로 나가 비바람 속의 독도를 바라보며 독도, ‘나의 너’를 소리없이 애타게 불러보고 있었다.

2024-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