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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문학적으로 생각함

등록일 2025-03-10 19:59 게재일 2025-03-1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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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때로 나는 문학주의자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긴다. 나는 현실 정치보다 삶 전체 또는 근본적인 삶에 집념을 발휘하는 문학주의자의 길을 귀하게 여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사람의 삶은 노동하고 예술 작품을 ‘제작’하고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라 한다. 문학주의자는 예술적인 작업에 집념을 품은 자다. 이 예술의 기억 행위는 삶 전체에 걸쳐 있어 사회적 결정에 ‘집단’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정치적 결정 행위와 다르다.

그리하여, 문학이 정치에 관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어느 파당에 들어 그 파당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내는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단적인 사례다. 이때 문학은 문학 아닌 것, 정치적이다 못해 정치주의적인 차원의 것에 떨어질 수 있다. 해방공간 때 프롤레타리아 시인 임화는 바로 이 함정에 빠져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당원’의 시를 썼고 그 ‘당원’의 실천에 뛰어들었고, 자신의 문학을 싸우는 ‘전선’의 문학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정치에 관여하는 다른 방식의 문학이 있다. 그 좋은 사례들로 작가 최인훈과 손창섭이 있다. 최인훈과 손창섭의 정치는 ‘파당’의 정치가 아니라 단독자의, 곧 ‘한 사람’의 ‘정치’였다. 자기 한 사람으로 ‘1인 정당’의 당원 또는 ‘1인 공화국’의 주권자가 되어 자신만의 목소리를 추구한 것이다.

최인훈은 6·25 전쟁 중 ‘원산철수’ 직전까지 북한의 회령과 원산에서 살았고,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손창섭은 평양 태생이지만 일본에 일찍 건너가 대학까지 다녔고, 한국사회를 ‘방법론적’ 외부자의 시선으로 냉연하게 관조할 수 있는 ‘거리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최인훈과 손창섭은 1950~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누구보다 비판적으로 해부해 본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좌익·우익 또는 보수와 진보라는 ‘낡디 낡은’ 진부한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자신들만의 사유능력을 발휘해 한국인들의 삶의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자 했다. 나는 그들의 문학의 길에서 작가는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가를 깨닫곤 한다.

문학은 정치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 걸까? 나는 정치를 넓게 보는 방법을 찾는다. 정치를 넓게 보는 것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우선 정치를, 그것을 둘러싼 더 넓은 맥락에서 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넓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는가? 그것은 정치를 현실에 결부된 파당 대결만의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문명론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단지 옳고 그름, 단지 사실에 부합하거나 왜곡되어 있음을 떠나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 우리 ‘공동체’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가를 묻고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적 투쟁에 골몰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흔히 권력투쟁,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논의되곤 한다. 사회를 갈등과 반목의 차원에서 보는 이들에게 정치는 집단적 투쟁 그 자체이고 상대편을 ‘쳐서’ 내 편을 살게 만드는 과정이다. 이런 정치에서는 ‘적’이라는 관념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작동한다.

나는 세력과 파당의 대결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더 낫게 해 줄 수 있는 삶의 길을 찾고자 한다. 이것이 내가 정치를 문학적으로 대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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