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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도층의 표심이 두렵지 않은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제22대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선거다. 여당이 과반을 얻지 못하면 국정의 동력을 잃고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이 불가피할 것이며, 야당이 대선·지선에 이어 총선까지 패배한다면 최후의 버팀목인 입법 권력마저 상실하기 때문이다.누가 승리할 것인가?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의 표심을 잡는 정당이 이긴다. 총선은 결과가 뻔한 영남과 호남, 그리고 여야 각각 30% 안팎에 묶여 있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변수가 되지는 못한다. 총선의 승패는 전체 지역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도권에서 갈릴 것이며, 이 때 30%에 달하는 중도층의 선택이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다.중도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레이코프(G. Lakoff)는 “이슈에 따라 보수적 또는 진보적으로 투표하는 이중개념주의(biconceptualism) 소유자”라고 했다. 이들은 ‘이념이 아니라 이슈’에 따라 움직이는 ‘스윙보터(swing voter)’들이며, ‘무지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현명한 실용주의자’이다. 정치팬덤들과는 달리 진영정치에 구속되지 않고 이슈와 상황에 따라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그럼에도 여야의 정치적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는 갈수록 태산이다. 윤 대통령은 여당 연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역설했고, 국무회의에서는 장관들에게 ‘전사’가 되어서 “싸워 달라”고 주문했다.대통령이 요구한 ‘이념전쟁’에 지지층이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실용’을 중시하는 중도층은 비토(veto)그룹으로 돌아설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한국갤럽, 2023년 9월22일) 중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평가(59%)가 긍정평가(32%)의 2배 가까이 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야당의 극단주의는 또 어떤가? 이재명 대표 역시 ‘개딸’에 의존하는 팬덤정치로 일관해왔다.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국회의 체포동의안 통과에 격분한 개딸들은 비명계 의원들에게 욕설은 물론 살해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팬덤에 편승하는 극단의 정치가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는 있겠지만 중도층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다.이처럼 대통령의 이념 리스크와 야당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모두 총선에 부담요인이 되고 있다. 중도층은 사법 리스크에 기대어 반성 없는 여당도, 이념 리스크에 기대어 성찰 없는 야당도 싫어한다. 권력자의 입만 쳐다보는 ‘친윤’과 ‘친명’의 똑같은 편향적 행태, 그리고 지지자들의 목소리만 듣는 ‘뺄셈의 정치’로서는 중도 확장이 불가능하다.따라서 총선을 앞둔 여야는 중도층을 잡기 위한 혁신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여당은 ‘용산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당정관계를 재정립하는 동시에, 이념보다 실용을 모색해야 하고, 야당은 ‘친명’과 ‘비명’의 갈등을 극복하는 한편, 팬덤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문제는 총선 공천권을 쥐고 있는 여야 최고 권력자의 목에 누가 먼저 ‘혁신의 방울’을 달아서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2023-10-09

권력과 언론의 거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불편한 것이 정상이다. 언론의 사명은 권력을 감시·비판·견제하는 것이고,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달성에 유리한 언론환경을 조성하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과 언론의 이념적 성향이 다를 경우(진보정권과 보수언론, 보수정권과 진보언론)에는 양자의 갈등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다.권력과 언론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는 거리(不可近不可遠)’에 있어야 한다. 양자가 너무 가까이 밀착되면 진실에 대한 은폐·조작·왜곡이 일어나고, 너무 멀어져 적이 되면 권력은 언론을, 언론은 권력을 죽이려고 한다.때문에 권력과 언론은 ‘비판적 동반자’로서 적정거리를 두고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럼에도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언론을 장악하려고 한다. 권력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언론의 힘을 제어함으로써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던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와 통폐합, 언론인에 대한 감시와 해직 등이 민주화 이후에는 보다 은밀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비판언론들을 악마화하면서 ‘언론 길들이기’를 하고 있다.문재인 정권의 언론장악을 거세게 비판했던 윤석열 정권의 언론정책 역시 도긴개긴이다. 윤 대통령은 “언론과의 소통이 궁극적으로 국민과의 소통”이라고 하면서 “언론의 제언과 쓴 소리를 잘 경청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출근길 약식회견은 6개월 만에 중단되었고, ‘비속어 발언’을 처음 보도한 MBC는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됐으며, KBS사장과 이사장,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이사장,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해임하는 등 공정언론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비판언론 옥죄기가 계속되고 있다. 소통을 약속한 대통령이 불통의 길을 가고 있으니 우려가 크다.한편 언론의 행태도 문제다.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된 폴리널리스트(polinalist)들이 언론의 신뢰를 훼손하고 있다. 언론인들이 정·관계로 진출하여 권력의 관점에 서면 언론은 정치화된다. 바로 이것이 ‘언론과 권력의 이익 카르텔’이다. 권력 감시견(watch dog)인 언론이 경비견(guard dog) 또는 애완견(lap dog)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정치논리가 저널리즘 원칙을 지배하면 언론의 공정성은 무너진다.대통령을 향해 낯 뜨거운 ‘윤비어천가’를 부르는 언론이 있는가 하면, ‘독재자의 전형’이라고 조롱하는 언론도 있다. 언론은 진영을 넘어서 양면을 함께 볼 수 있는 ‘뫼비우스의 띠(M00F6bius strip)’가 되어야 한다.권력과 언론은 가야 할 길이 다르다. 언론의 역할을 권력이 대신할 수 없듯이 정치인의 책무를 언론인이 대신할 수 없다. 언론이 권력과 가까워지면 권력의 시녀가 되고 멀어지면 권력을 감시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권력도 언론의 감시를 받지 않으면 ‘리바이어던(Leviathan·괴물)’이 된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언론이 범하는 오류보다 더 위험하다.권력은 언론의 입을 잠시 막을 수는 있지만 영원히 죽일 수는 없다.

2023-09-25

국민을 배신한 ‘네 탓’ 정치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의 행사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기 때문이다.‘내 탓’은 없고 ‘네 탓’만 하는 정치는 책임회피이며,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권력을 감당할 인격도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의 유체이탈 행태가 가소롭다.‘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실패로 끝나자 그 책임을 둘러싼 네 탓 공방은 가관이었다. 전 정부와 현 정부,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모두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여당은 전 정부와 전북도에, 그리고 야당은 정부여당의 비판에 집중했다.심지어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격을 잃었고, 긍지를 잃었다.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 됐다”고 마치 남 얘기하듯 현 정부를 비판했다.국제적 망신을 사고서도 반성은커녕 ‘네 탓 타령’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의 행태가 한심하다.‘서울­양평고속도로 노선변경’ 의혹을 둘러싼 여야의 네 탓 공방은 결국 고속도로 추진을 중단시켰고,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에서는 행안부·경찰·소방·서울시·용산구청 등이 서로 네 탓을 하면서 책임회피에 급급했다.또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의 책임소재를 두고서도 충북도·청주시·흥덕구청·경찰·소방이 낯 뜨거운 네 탓 공방을 벌였다.이처럼 “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네 탓”이라는 책임회피 심리를 그린월드(A. Greenwald)는 ‘베네펙턴스(beneffectance) 현상’이라고 했다.성공에 대한 자신의 공로는 과대평가하는 반면, 실패에 대한 자기 책임은 과소평가하는 성향이다. 이는 자기기만의 ‘이기주의적 편향성’으로서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 찾아서 ‘핑계 만들기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핑계를 통한 자기합리화는 제3자의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책임회피 및 책임전가일 뿐이다.특히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의 ‘네 탓 타령’은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최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윤대통령은 야당을 향해 “1 더하기 1은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야당과 언론이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했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이 야당 탓, 언론 탓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하는 국민은 서글프다. 야당과 언론의 역할이 정부여당의 견제와 비판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인가?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마찬가지로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 역시 ‘네 탓’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잘했다면 왜 정권이 교체되었는가? 남 탓하며 책임을 회피해왔으니 내 탓이 무엇인지를 알 리가 없었다. 민주당은 남 탓하기에 앞서 현재 수사 받고 있는 각종 비리와 의혹에 대한 자기반성이 먼저다.소크라테스(Socrates)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집행권력과 입법권력을 나눠가진 여야 정치인들이 특히 명심해야 할 말이다. 정부든 국회든 권력을 가진 쪽에서 먼저 성찰하고 반성할 때 비로소 정치가 정상화될 수 있다. 이것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책임정치의 정신이요, 정치지도자가 가야할 길이다.

2023-09-11

무너진 교권, 위기의 교육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담하다. 2년차 신규교사가 학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사면초가(四面楚歌)의 환경 속에서 사명감 하나로 버티던 교사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가 하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교단을 떠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추모집회에서 동료교사들은 “교권침해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이 현실이 정상이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존경과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선생님들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학생의 인권이 중요한 것처럼 교권도 중요하다. 수업하는 교사 옆에서 학생이 드러누워 휴대폰을 사용해도 이를 제재할 권한이 없다니 기가 막힌다. 학생이 수업을 방해하고 성희롱·욕설을 하는가 하면,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니 교육 백년대계는 공염불이다.학부모들의 갑질과 악성 민원은 또 어떤가?자녀가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면서 담임교사에게 ‘황당한 갑질’을 한 학부모가 ‘교육부 사무관’이었다니 어이가 없다. 학부모들의 폭언·폭행·협박이 점입가경이며, 최근 5년간 교사를 대상으로 한 고소·고발이 무려 1188건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교사들은 ‘왜 아동학대를 무릅쓰고 생활지도를 해야 하느냐’, ‘참 교사는 단명 한다’는 등 자조적인 한탄이다. ‘폭탄 학부모’나 ‘폭탄 학생’을 ‘명퇴도우미’라고 부른다는 교단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정치철학자 아렌트(H. Arendt)는 “교육은 반드시 가르침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했다. 교육의 본질은 “아이들이 세계 속에서 진정한 한 인간 존재로 탄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교육은 죽었다. 공동체의식, 남에 대한 배려, 사회화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교육은 무의미하다. 교권이 무너졌으니 교육이 무너진 것이다.교권 회복을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 교권을 약화시키는 ‘학교폭력법’과 ‘아동학대법’은 개정되고, 유명무실한 교권보호위원회의 실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학생의 수업방해를 제재할 수 있는 교사의 권한과 수단이 있어야 하고, 교사의 정당한 학생지도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면책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나아가 교사가 송사를 당했을 때 신경 쓰지 않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도 절실하다.갑질 학부모들의 성찰과 반성도 중요하다. ‘생물학적 탄생은 부모의 몫’이지만 ‘사회적 재탄생은 교육의 몫’이다.잘못된 자식사랑은 자녀에게 독이 된다. 교권이 무너지면 그 피해가 자녀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걸핏하면 경찰·검찰·법원에 호소하는 ‘교육의 사법화’는 지양되어야 한다. 사법적 승패는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승자가 없는 싸움일 뿐이다.교육정상화는 교육주체인 교사·학생·학부모의 상호존중과 신뢰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각 주체들은 권리에 앞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풍토 속에서 참 교육은 불가능하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이해하고 소통해서 신뢰를 회복할 때 비로소 교육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

2023-08-28

존재적 삶을 위하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청춘예찬’에 환호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노년예찬’이 가슴에 와 닿는다. 청춘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E. Fromm)의 ‘소유냐 존재냐’와 ‘존재의 기술’은 머리와 가슴에서 분리됐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보니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고학생(苦學生)은 부·권력·명예의 소유가 곧 행복인줄 알았던 것이다.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존재론적 물음은 이념·성별·직업·빈부에 관계없이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이다. 특히 정치인·언론인·교수 등 사회지도층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더욱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인은 정치의 존재이유를 생각할 리가 없고, 확증편향에 갇힌 언론인은 언론의 존재이유를 말할 자격이 없으며, 권력과 야합한 어용교수는 지식인의 존재이유를 왜곡할 뿐이다. 소유가 목적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기 때문이다.물론 우리의 삶에서 재화는 생존에 필요하므로 소유 자체를 부정하거나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의 위험성이다. 돈·권력·명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소유에 집착할수록 더 큰 욕심을 내게 되고, 많이 소유할수록 더 크게 얽매이게 된다. 모든 소유는 오직 한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다.소유적 삶은 욕망·물질·외형을 우선하는 삶이며, 존재적 삶은 절제·정신·내면에 치중하는 삶이다. 소유적 삶은 항상 불안하지만 존재적 삶은 언제나 평온하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소유적 삶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까닭에 행복할 수 없다. 반면 존재적 삶은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과거나 미래의 허상을 쫓아가지 않는다. 행복이란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성현들이 역설한 행복한 삶은 존재적 삶에 있다. 사르트르(J. P. Sartre)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일갈했던 것처럼, 존재가 없는 소유란 있을 수 없다. 톨스토이(L. Tolstoy)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고 했고, 프롬은 “인간의 목표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텅 빈 충만’의 역설을 가르쳐주었다. ‘비워야 울림이 있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다.그럼에도 우리가 존재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성찰과 구도(求道)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존재적 삶을 위해서는 소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이 있어야 한다. 프롬이 ‘존재의 기술’에서 “자각·집중·명상을 통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했듯이, 존재적 삶은 끊임없는 성찰과 연마(練磨)의 결과물이다. ‘행복으로 가는 구도의 길’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2023-08-07

누구를 위한 정쟁(政爭)인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는 실종되고 ‘정쟁’만 난무한다. ‘후쿠시마 오염수’와 ‘서울­양평 고속도로’를 둘러싼 정쟁이 점입가경이다. 정쟁의 외관은 국민의 건강과 편익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권력의 획득·유지·강화를 위한 투쟁일 뿐이다. 정치인들의 선동·거짓·과장·왜곡이 갈수록 태산이다.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한 정치인들의 행태는 가관이다. 여당의원은 방류를 시작하기도 전에 해수가 안전하다면서 어패류 수조의 물을 마시는가 하면, 야당의원은 ‘핵 폐수’라고 하면서 “차라리 X를 먹겠다.”고 국민을 겁박한다. 2년 전 문재인정부의 합동TF에서는 “오염수 방류의 유의미한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낸 반면, 당시 야당인 국민의힘은 방류를 강력히 반대했었는데 정권이 교체되자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이처럼 오염수 문제는 이미 과학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오염수의 유해성 여부에 대해서는 ‘괴담과 과학’ 그리고 ‘과학과 과학’이 충돌하고 있다. 과학까지도 이미 정쟁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과학적 입장을 수용하느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누구의 주장이 과학적인지, 누가 과학을 빙자한 거짓말을 하는지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알기 어렵다.한편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둘러싼 정쟁은 더욱 한심하다. 야당이 고의적으로 의혹을 증폭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전면백지화를 선언한 원희룡 장관의 직권남용은 더 큰 문제다. 양평군민의 15년 숙원사업이자 대통령의 공약인 국책사업을 어떻게 장관이 하루아침에 중단시킬 수 있는가. 여당의 자충수로 의혹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민주당만 살판났다. 각종 비리와 의혹으로 수사를 받고 있는 민주당으로서는 역공할 수 있는 호재를 만난 것이다.“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고 했다. 변경된 노선에 김건희 여사 일가의 땅이 많으니 의혹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정부여당을 견제·비판하는 것은 야당이 해야 할 당연한 역할이다. 정부가 떳떳하다면 사업을 백지화시킬 것이 아니라 변경된 사유를 투명하게 설명하고 그 타당성을 입증하면 된다.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전문가들이 원안과 변경안을 비교분석한 후 양평군민을 비롯한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객관적 판단을 구해야 할 것이다.정쟁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권력투쟁이다.‘정치는 국민’을 생각하지만 ‘정쟁은 권력’을 생각한다. 권력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승리’이며,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여야가 권력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는 국민의 표심을 잡기 위해 선동과 왜곡을 일삼고 있는 이유다.결국 중요한 것은 ‘정쟁을 심판하는 국민’이다. 정치인들의 잘못된 습관과 버릇을 고쳐줄 수 있는 것인 주권자밖에 없다. 따라서 국민은 정쟁에 휘둘리는 ‘노예’가 아니라 그것을 심판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국민의 혜안(慧眼)은 여야의 잘잘못을 정확히 평가하여 내년 총선에서 투표로 심판하게 될 것이다.

2023-07-24

의대 광풍의 그림자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의대 광풍(狂風)이 거세다. 사교육 1번지, 대치동 학원가에서 시작된 ‘초등생 의대 진학반’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학기술과 첨단산업을 이끌어야 할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 진학을 위해 휴학·자퇴·재수를 서슴지 않는다. KAIST를 비롯한 4대 과학기술원과 포스텍의 재학생 중 매년 200여 명이 자퇴 후 상당수가 의대에 가고 있다.이러한 ‘의대 블랙홀’은 심각한 문제이며 원인 분석과 대책이 시급하다. 의대 광풍의 원인은 무엇보다 고소득·안정성에 있다. 공대는 SKY대라도 취업이 쉽지 않지만, 의대는 지방대라도 취업 걱정은 없다. 공대는 고소득자가 되려면 석·박사가 필수지만, 의대는 비인기전공이라도 고소득이 보장된다. 특혜나 다름없는 의사면허증이 사회의 공정성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의대 광풍에도 의사가 없다”는 아우성은 ‘불편한 진실’이다. 의사들이 힘들고 위험한 필수진료과(외과·내과·소아과·산부인과)를 기피하고 돈이 되는 전공(피부과·성형외과·이비인후과)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최근 지방의 한 종합병원은 연봉 10억을 제시했는데도 심장내과 의사를 구하지 못했다. 의사들은 신입생 증원, 간호법, 의사면허취소법 등을 반대하고 있으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환자를 인질로 삼아 파업도 불사함으로써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물론 존경받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봉사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도 환자 곁을 떠나지 않았던 장기려 박사, 94세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 소외된 환자들을 보살폈던 한원주 원장과 같은 ‘한국의 슈바이처들’이 지금도 촌각을 다투는 생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오직 환자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 덕분에 의사들이 존경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처럼 의사들에게는 두 얼굴이 있다. 우리는 의대 광풍에서 ‘빛’이 되어야 할 의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본다. 의사가 존경받으려면 돈과 명예가 아니라 희생과 헌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의사는 성직자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필수진료과를 기피하고 돈이 되는 전공에 몰리는 의사들의 행태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의대 광풍은 반드시 멈춰야 한다. 정부는 의사들의 파업에 굴복하여 18년째 동결된 정원(3천58명)을 대폭 확충하여 붕괴된 필수의료체제를 조속히 복구해야 한다. 기득권이 강화되어 특권층이 되어버린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의사는 생명을 맡긴 환자의 믿음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 의사에게는 전문성 못지않게 소명의식이 중요한 이유다.의사의 행복과 소명의식은 적성과 자질에서 나온다. 고소득과 명예에 현혹되어 의대 광풍에 휘둘리는 부모의 욕심은 자녀의 불행을 초래한다. 부모와 선생님의 권유로 2015년 명문 Y대 의대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서 올해 초 자퇴하고 다시 J대 수학교육과에 입학한 B군의 사례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23-07-10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을 감시·견제하고 정의·진실을 위하여 정론직필(正論直筆)해야 할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이 심각하다. 공익과 사실에 충실해야 할 언론마저 정파적 보도를 서슴지 않는다. 편 가르기를 비판하면서도 늘 어느 한 편에 서 있으니 자기모순이다. 상업화된 언론사와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된 언론인들에게 불편부당(不偏不黨)을 기대할 수는 없다.정파성은 언론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객관성을 상실한 언론을 누가 믿겠는가.영국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발표(2023/06/14)에 의하면 한국의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조사대상 46개국 중 41위로서 최하수준이며 아시아·태평양국가들 가운데는 꼴찌다. 국내언론 분석에서는 정파성이 강한 신문과 방송의 신뢰도가 최저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론의 정파성이 문제되는 것은 모든 언론들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이념적·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실(fact)을 왜곡·조작하거나 축소·은폐·확대하는 불공정한 행태들이다.언론이 공정성과 객관성을 견지하면서 정의와 진실을 논하려면 무엇보다 언론인들의 소명의식이 중요하다. 언론인은 진실을 먹고 사는 지식인이다. 돈·권력·명예가 아니라 정의·공정·진실을 추구하는 참 언론인들이 많을 때 비로소 ‘언론다운 언론’을 기대할 수 있다. 언론인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권력과 야합하여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면 언론도 죽고 나라도 죽는다. 이해관계에 따라 펜대가 휘어지는 ‘기레기’들을 어떻게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특히 진영논리에 갇힌 편파적 언론의 내로남불 행태는 선악의 이분법적 양극화를 악화시킨다. 공정해야 할 언론이 편 가르기를 주도함으로써 오히려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참 언론인이라면 ‘속 시원한 해장국 언론’에 열광하는 확증편향의 유혹에 굴복하면 안 된다. 올곧은 언론인은 ‘중도(中道)’의 길을 가야 한다.중도란 단순히 좌우의 중간적 입장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치열하게 추구해 나가는 적극적 중도, 비판적 중도를 말한다. 중도는 어정쩡하게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이다.한편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권력의 책임 역시 무겁다.최근 KBS·MBC 등 공영방송의 운영을 둘러싼 정부와 언론사·언론노조 간의 갈등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언론의 공정성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권력만 잡으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언론으로 길들이려고 한다. 권력이 겉으로는 ‘공정언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유리한 ‘편파언론’을 만들려하기 때문이다.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한다. 권력이 언론을 어용화하면 부패된 권력은 비극을 맞는다. 권력은 자신을 감시·비판하는 언론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오바마(B. Obama) 전 대통령이 “비판적인 언론 덕에 더 정직하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던 것처럼, 권력은 언론을 길들이려 할 것이 아니라 언론의 비판에 감사해야 한다.

2023-06-26

혼돈의 시대 지식인의 책무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오웰(G. Orwell)은 1949년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출현을 우려했지만, 우리는 지금 ‘탈진실(post-truth)사회’를 걱정하고 있다. 가짜뉴스가 판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혼탁한 세상이다. 노회(老獪)한 권력은 진실의 가면을 쓰고 거짓을 일삼고, 진리와 가치의 객관성을 포기한 정치적 광신자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나라의 사정이 이러한데 ‘진리의 최후보루인 지식인’은 어디에 있는가? 사회의 고민과 대안을 담은 지적 담론을 주도해야 할 지식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물론 민주화시대의 ‘지사적 지식인’과 지식정보시대의 ‘전문적 지식인’은 그 역할과 책임이 다르다. 그래서 사르트르(J. P. Chartres)는 ‘지식인’과 ‘지식전문가’를 구별하고, 후자는 전자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했다. 지식인은 지식전문가에 더해 “사회적 모순을 직시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정의와 진리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촘스키(N. Chomsky)의 지적처럼 “지식인은 진실을 밝히고 대중이 늘 깨어있도록 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생명인 ‘합리적 비판정신’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며, 공정성·균형감·자기성찰은 지식인의 필요조건이다. 지식인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특정 이념과 진영에 구속되지 않는 ‘경계인(境界人)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아가 지식인은 반드시 ‘권력과 일정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권력과 야합한 지식인들, 즉 어용교수·어용언론인·어용법조인 등은 권력의 주구(走狗)가 된 위선자들이다.지식인이 사익(私益)을 위해 정의와 진리를 배반하면 위선자가 된다. 그 위선과 배반은 인격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뱅다(J. Benda)는 “지식인은 이성적 사유를 통해 영원불변의 진리와 이상을 추구하는 성직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념과 이익에 따라 합리적 이성을 포기하고 현실과 야합하는 배신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지식인의 배반은 탈진실사회의 주범이다. 권력과 야합하여 ‘정치적 기생충’으로 전락하고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식인들의 위선과 배반은 비판받아 마땅하다.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지식인들의 양심과 인격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의 부패는 곧 지식인의 부패를 의미하며, 지식인이 병든 나라는 망국의 길을 가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하여 매국행위를 한 이완용, 망국의 소식을 접하고 “난세에 지식인 노릇하기 정말로 어렵구나”라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한 황현(黃玹)은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오직 양심과 인격의 차이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했을 뿐이다.우리사회의 혼돈은 ‘지식전문가’는 많지만 ‘참 지식인’이 적기 때문이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직시하고 불의와 거짓에 맞서는 것은 지식인의 책무다. 지금 우리사회는 지식인들에게 엄중히 묻고 있다. 돈과 권력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설 것인지를.

2023-06-12

춘풍추상 vs 내로남불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인들은 흔히 ‘춘풍추상(春風秋霜·타인에게는 부드럽게, 나에게는 엄격하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행태를 보인다. ‘춘풍추상’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가 어렵고, ‘내로남불’은 남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자신을 반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민주당의 경우 문재인정부가 약속했던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는 내로남불이었다. 조국 전 장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문 대통령이 비서들에게 선물한 ‘춘풍추상 액자’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지금도 대장동사건을 비롯한 각종 의혹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명 대표, 돈 봉투 선거로 수사 중에 있는 송영길 전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 청년들을 기만한 김남국 의원의 ‘코인의혹사건’ 등 그 어디에서도 춘풍추상의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국민의힘 역시 마찬가지다. 내로남불을 타파하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한 ‘공정과 상식’도 선택적이었다. 아·가·패(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 패밀리)정부이자 검찰공화국이라는 비판은 ‘인적 편향성’을 말해준다. 편향성은 공정성을 해치는 주범이다. 당대표를 제거하기 위해서 ‘체리따봉’ 문자를 보냈고, 당대표 선거에 개입하여 당내민주주의를 훼손했다. ‘민심’과 ‘당심’ 위에 군림한 ‘윤심’은 결코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았다.이처럼 여야의 정치행태는 모두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상대에게는 혹독하다. 의회권력을 가진 민주당은 입법독주를 하고, 집행권력을 가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 책임은 서로 상대방에게 떠넘기니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권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이(利)가 아니라 의(義)’를 위해 행사되어야함을 망각한 까닭이다.여야는 이분법적 흑백론을 버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민주주의 원칙인 ‘대화와 타협’은 ‘흑백론이 아니라 회색론’이다. 인간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중간적 존재’인데 서로가 ‘나는 천사고 당신은 악마’라고 우긴다. “나만 할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인정할 때 비로소 내로남불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에 그 누구도 내로남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중종이 도덕정치를 역설한 조광조에게 내린 죄목은 “뜻이 맞는 자들하고만 어울리고 맞지 않으면 배척한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군자’, 반대파는 ‘소인’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언행이 일치되지 않았으니 위선자로 본 것이다. 정치지도자에게 이중기준이 허용되는 것은 내로남불이 아니라 춘풍추상이다. 남에게 관대할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한다.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정적(政敵) 아이아스(Aias)의 명예를 회복해줌으로써 양분위기에 있던 그리스 군을 통합할 수 있었고, 엄격한 자기절제로 바다요정 칼립소(Calypso)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춘풍추상의 리더’를 만날 수 있을까?

2023-05-22

동맹, 도청 그리고 외교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동맹국을 도청한 나라의 ‘국빈 자격’ 방문외교라는 ‘이 웃픈 현상’은 힘과 국익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동맹·도청·외교’의 공통점은 모두가 ‘국익을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동맹’과 ‘외교’는 합법적이고 ‘도청’은 불법적이지만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동맹외교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북핵 고도화에 대한 실효적 대응, 중국 및 러시아 관련 이슈들에 대한 한미공조, 반도체법과 인플레감축법(IRA)의 해결, 도청의 재발방지 등 우리의 국익과 직결된 중대현안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국익이 충돌하고 힘의 우열이 존재하는 외교협상에서는 동맹국이라고 해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협상의 성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오직 동맹국을 설득할 수 있는 전략과 능력이다.물론 이번 정상외교를 통해 북핵 위협에 대응하는 ‘핵협의그룹(NCG)’ 신설에 합의함으로써 확장억제의 신뢰도를 높인 것은 평가할만하다.하지만 최대 관심사인 반도체법과 IRA는 해결하지 못했고, 미국에 밀착됨으로써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구도는 더욱 악화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이번 정상외교의 전략적 문제점 및 협상결과에서 비롯되는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그 대책을 면밀히 강구해야 한다.무엇보다도 전략적 측면에서 미국의 도청을 ‘외교의 지렛대’로 삼지 못한 것은 실책이었다.NBC 앵커의 “친구가 친구를 염탐합니까?”라는 질문에 윤 대통령은 “철통같은 신뢰를 흔들지 못한다”라고 답변함으로써 도청에 항의하는 대신 사실상 면죄부를 주었다. 도청으로 민감한 국가기밀이 노출되었고 한·러 관계도 악화됐다. 그럼에도 주권국가로서 재발방지는 요구하지 않고 동맹의 선의에만 의존했다.국익은 동맹국이 선의로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전략으로 내가 지키는 것이다.한편 신설되는 NCG의 실효성 확보 역시 중요한 외교과제다. NCG 설립 자체가 미국의 확장억제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NCG 출범으로 핵전력 운용에 있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지만, 기존의 차관보급 ‘확장억제협의체’보다 실효성이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핵사용 결정권은 전적으로 미국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발언권이 갖는 영향력은 여전히 의문이다. 따라서 향후 NCG의 구체적 운영과정에서 우리의 발언권 제고에 각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지막으로 ‘동맹의 강화 및 확장에 따른 양면성’ 인식이 절실하다. 한미동맹은 강화되고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확장됐다.미국에 대한 의존이 커질수록 우리외교의 자율성은 줄어든다. 미국은 인도·태평양전략, 미·중 패권경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 우리에게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할 것이고, 북한·중국·러시아와의 이해관계 충돌은 한국외교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예상되는 ‘고난도 외교환경’이 ‘고난도 외교역량’을 요구하고 있다. 여야와 보혁을 초월한 국가적 차원의 외교역량 결집이 절실한 시점이다.

2023-05-08

부유한 국가, 불행한 국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유엔이 최근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WHR) 2023’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8개국 중 35위로서 최하위권이며, 조사대상 137개국 가운데 57위다. 세계 10위의 경제력, 1인당 GDP 3만3천 달러의 부유한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불행이다.행복이란 “일상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심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은 ‘삶의 질적 만족도’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평가’이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물질적 조건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가치관, 사회적 신뢰도, 정부의 청렴도, 사회적 관계 등 정신적 요인들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그렇다면 한국인들은 풍요 속에서 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양극화와 빈부격차로 상대적 박탈감이 크고, 소득·교육·기회의 불평등에 따른 빈곤의 대물림이 심각하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경쟁문화는 동물의 세계와 같다. OECD국가들 가운데 최악의 자살률·우울증·노인빈곤율·사회적 고립도 등은 불행의 증표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0.78%는 청년들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반증한다.반면에 행복지수 6년 연속 1위인 핀란드 국민들의 삶은 다르다. 핀란드는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제도화된 나라다. 연간 30일의 유급휴가, 출산에 따른 유급육아휴직은 부모 각각 160일이 보장되고, 노인·장애인·신생아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전망이 완벽하다. 물론 여기에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고, 그들은 높은 세율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특히 핀란드인들의 행복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요인은 ‘신뢰’이다. 정부와 정치에 대한 높은 신뢰, 공동체에 대한 높은 상호신뢰가 행복한 삶을 만들어주었다. 정치인들의 청렴한 삶은 사회적 신뢰를 조성했고, 대화와 타협의 선진정치문화는 국민통합에 기여했다.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제 한국이 가야할 길은 분명하다. 우리의 행복은 ‘정부와 개인’의 차원에서 ‘물질과 정신’이 동시에 개선되어야 제고될 수 있다. 정부차원에서는 국민신뢰 회복, 소득양극화 해소, 사회안전망 확충이 시급하다. 행복한 나라는 구성원들 간 행복격차가 작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원의 강화와 ‘워라밸’의 제도화 역시 중요하다. 나아가 행복을 위한 올바른 가치관교육, 즉 개인적·물질적 가치 못지않게 사회적·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전인교육’이 절실하다.개인차원에서는 ‘행복할 수 있는 인생관과 가치관’이 요구된다. 행복은 외적·물질적 조건보다는 내적·정신적 성숙에 더욱 좌우된다. 행복은 돈·권력·명예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소득이 일정수준을 지나면 더 이상 행복은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돈·권력·명예와 관련하여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함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바로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2023-04-24

반지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우리사회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심각하다. 포퓰리즘과 진영논리, 편 가르기와 팬덤정치가 공동체의 지성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지성의 최후 보루인 언론과 지식인들까지 권력과 야합하여 반지성적 행태를 보이는가 하면, 반지성주의를 비판했던 대통령 자신도 언행불일치로 반지성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반지성주의 담론은 자기중심적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반지성주의’란 지성의 유무(有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작용방식이 ‘이성적·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자들은 대체로 자기확신·적대감·성찰불능 등의 인지적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쓴 호프스태터(R. Hofstadter)는 “반지성주의는 서로 대척점에 선 세력들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가장 큰 원인은 반지성주의”라고 민주당을 겨냥한 반면, 민주당의 박홍근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반지성주의가 대한민국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양측의 공통된 잘못은 ‘가치중립적 개념인 반지성주의’를 ‘내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서 편향된 진영논리로 접근했다는 사실이다. 반지성주의를 비판한 세력이 바로 그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슬픈 코미디’가 아닌가?이처럼 우리는 반지성주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탈진실시대의 포퓰리즘 정치는 인간의 지성을 위협하고 있다. 인간은 정보홍수로 인해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지면 쉽게 이성을 포기하고 감정의 길을 택한다. 게다가 반지성주의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이나 선의로 포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 이해관계와 연결될 경우에는 더욱 단절하기가 어렵다.그렇다면 우리는 반지성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신’과 ‘제도’의 양면적 혁신이 절실하다. 정신적 측면에서는 편향성 극복을 위한 지성주의 가치관의 내면화가 요구된다. 지성의 원천은 ‘사실’과 ‘합리성’이다. ‘인지적 편향성’은 소통의 과정에서 반지성주의를 유발 또는 촉진시킨다. 지성주의는 ‘감정이나 의지보다 이성과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타협에 필요한 민주적 가치관, 즉 “동의하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agree to disagree)”는 정신이 중요하다. 이 때 그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지식인은 ‘비판적 지성주의’를 견지해야 함은 물론이다.이와 함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의 혁신도 수반되어야 한다. 반지성주의 정치는 승자독식이라는 대통령제의 영향이 크다. 정치는 진영 간 싸움인 동시에 진영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승자의 독식으로 패자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면 협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화와 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정치제도를 구축해야 반지성적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다. 물론 제도개혁 이전이라도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의지만 있다면 야당과의 대화와 협치를 통해 반지성적 정치풍토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2023-04-10

봄이 정치인에게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의 암흑기에 시인 고영민은 ‘봄의 정치’라는 시에서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봄의 희망으로 국민의 분노를 위로했다. 독재에 대한 저항과 희생은 민주화시대를 열었지만, 권력정치의 퇴행은 또 다시 주권자의 봄을 빼앗아가고 있다.봄은 왔건만 우리네 삶은 여전히 춥다.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소명을 망각한 권력은 봄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권력이 봄으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오관(五官)으로 봄을 접촉하지만 감각기관의 뿌리에 있는 마음으로 꿰뚫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이 봄으로부터 배워야 할 그 첫째는 ‘유능제강(柔能制剛)’, 즉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가르침이다. 봄은 폭염의 여름, 혹한의 겨울과는 달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계절이다. 봄은 권력에게 ‘온화하고 따뜻한 정치’를 하라고 말한다. 팬덤(fandom)에 의존하는 강성정치는 상대의 적대심만 불러올 뿐이다. 합리성을 상실한 극단의 정치로서는 온건한 합리정치를 결코 이길 수 없다.정치인들의 강성 발언은 민주주의 원칙인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한다. 타협을 거부하는 독선은 반민주적 태도다. 정치인의 사고가 합리적이고 유연할 때 비로소 정쟁은 사라지고 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 유연한 정치는 자신을 낮출 때 가능하다. 겸손은 자기성찰을 통한 능력 한계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둘째, ‘인고(忍苦)’의 가르침이다. 봄꽃들의 곱고 여린 모습의 뒤에는 모진 겨울을 견뎌낸 인고의 시간이 숨어있다. 봄소식을 알리는 매화는 혹한의 고통을 겪어야 맑은 향을 낼 수 있다. 새 봄을 열기 위해 애쓴 꽃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한국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여야 정치인들의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민주정치는 독재정치와 달리 정치행위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결과물이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결과(result)보다 과정(process)’을 중시한다.정치적 쟁점을 둘러싼 대화와 타협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숙성된 장이 맛있듯이 우리의 정치도 숙성되어야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마지막으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가르침이다. 활짝 핀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것처럼, 천하를 호령하던 제왕적 권력도 한 때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정치의 세계에서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의 봄에도 멀지 않아 가을이 찾아오고 혹독한 겨울이 오면 끝난다. 정도(正道)정치는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때 가능하다. 게다가 권력은 본래 내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것이니 목에 힘주지 말고 늘 겸손해야 마땅하다.봄은 사계(四季)를 시작하는 계절이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도 봄이다. 이제 여야 정치인들은 ‘전쟁 같은 정치’를 멈추고, 봄의 가르침에 따라 유연한 정치, 겸손한 정치, 그리고 대화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2023-03-27

초저출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세계 최악의 출산율 0.78명, 이것은 청년들의 ‘고통’과 ‘가치관’을 반증한다. 취업·결혼·출산·육아는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정부는 출산율 제고에 16년간(2005∼2021) 280조를 투입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돌팔이 의사가 중환자의 병을 진단·치료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성세대가 아니라 ‘청년세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결혼과 출산은 당사자의 생각이 중요하다. 취업난과 무주택 상황에서 결혼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결혼을 해도 출산과 양육에는 엄청난 돈·시간·희생이 요구된다.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일·가정 양립은 어렵고, 이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돈 몇 푼 주고 아이 낳으라’고 하는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청년세대의 가치관도 변했다. MZ세대는 인간 실존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자아실현을 위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결혼과 출산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성세대의 가족주의·가부장주의와는 달리 개인주의·양성평등주의 성향이 강하다. 그들은 자녀가 노후를 보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내생(來生)보다 현생(現生)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들이다.이제 우리사회가 가야할 길은 분명하다. 청년세대의 관점에서, 그들의 고통과 가치관을 반영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 있는 중·장기정책으로 삶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결혼과 출산이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확신이 설 때 비로소 그들의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이를 위해 정부는 ‘매우 어렵고 힘든 개혁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들의 취업·주거·육아·교육 등 생애 전반에 대한 정부의 법적·제도적 책임이 크게 강화되어야 한다. 국가소멸위기의 극복은 ‘허울뿐인 위원회’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명무실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정부의 공식 부처로 승격하는 동시에 행·재정적 권한을 부여하고 범정부적 협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국가균형발전위원회’ 역시 마찬가지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나지만 인구집중에 따른 과잉경쟁과 주거불안으로 고통은 가중된다. 전국 최저의 출산율 0.59명은 서울 청년들의 고단한 삶을 말해준다. 하지만 수도권 집중화는 수도권 유권자들의 발언권을 강화시킴으로써 점점 더 집중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적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허울뿐인 위원회’로서는 국가균형발전도 어렵고 저출산문제도 해결할 수가 없다.양성평등문화의 정착도 시급하다. 출산과 육아는 육체적·정신적 부담이며, 현대여성들은 ‘독박 육아, 독박 가사’를 단호히 거부한다. 양성평등의식이 절실함은 물론, 이를 위한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일·가정 양립을 성공시킨 영국·프랑스·스웨덴의 사례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성세대의 낡은 의식이나 정치권의 권력 논리를 버리고 청년세대,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비로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2023-03-13

공정과 상식, 그 표리부동에 대하여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은 비정하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된다. 권력은 위선적이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 권력이 약속한 평등·정의·공정 등은 집권을 위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때문에 우리는 권력의 이중성, 즉 그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윤석열 정부의 핵심가치는 ‘공정’과 ‘상식’이다. 대선후보 때는 물론이고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공정과 상식이 회복된 반듯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국민은 “공정과 상식은 어디에 있느냐?”고 대통령에게 묻고 있다. 도대체 정치를 어떻게 하였기에 집권초반에 벌써 ‘불공정하고 몰상식한 정권’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가?공정의 전제는 ‘균형’이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가 들고 있는 ‘저울’은 공정성의 상징이다. 판사가 선악을 판단할 때 ‘주관과 편견에 치우치지 말고 공평하게 판단하라’는 것이다. 불공정은 편향에서 비롯되며, 편견과 독선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에서 나온다. 공정과 상식의 아이콘(icon)인 윤석열 대통령이 선택적으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스스로 공정과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다.구체적 사례들은 차고 넘친다.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고위공직자들을 사적 인연에 의해 ‘아·가·패’(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 패밀리)인사를 했으니 공정할 수가 없다. 또한 검찰·경찰·감사원 등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이 흔들리는 것은 공권력 행사가 ‘내 편, 네 편’ 나누어서 차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여당의 홍준표 대구시장이 “요즘 판·검사는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샐러리맨”이라고 비판했겠는가.‘선택적 언론관’ 역시 불공정의 증표다. 윤 대통령의 외교무대 비속어 발언을 최초로 보도한 MBC 기자들은 전용기 탑승이 배제된 반면, 채널A와 CBS 기자는 기내에서 개별 면담까지 했다. 비판언론에는 법적 대응으로 재갈을 물리고, 친여언론은 특별대우를 하는 것이 공정인가? ‘선한 우리’와 ‘악한 그들’로 갈라치기해서 내편만 챙기니 공정할 수가 없다. 언론의 사명은 감시와 견제인데, 이를 무력화시키려는 것은 몰상식한 권력의 남용이다.불공정의 압권은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여당대표 선거 개입이다. 윤심1위 김기현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규정을 변경해서 민심1위 유승민의 출마를 막았고, 당심1위 나경원의 사표를 수리하는 대신 파면함으로써 윤심을 드러냈으며, 윤·안 연대를 말한 안철수에게는 “무례의 극치”이자 “국정운영의 적”이라고 공격했다.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못한 당무개입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대통령이 당대표를 임명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선거하느냐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평등·공정·정의를 약속했던 문대통령의 표리부동한 행태는 결국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공정과 상식을 약속한 윤 대통령 역시 명심해야 할 점이다. 대통령이 초심을 잃으면 민심을 잃고, 민심을 잃으면 권력을 잃는다.

2023-02-27

성찰하는 권력에 박수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전쟁 같은 정치’가 국민을 짜증나게 하고 있다. 집행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이나 입법권력을 가진 야당이나 하나같이 자기성찰은 없고 정적(政敵) 공격에만 혈안이다. 민생은 외면하고 ‘네 탓 공방’으로 날을 새고 있으니 ‘정치의 존재이유’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정치인들의 오만과 독선, 확증편향, 선택적 정의, 내로남불 행태는 전혀 변화가 없다. 여야가 바뀌었을 뿐, 권력은 자기성찰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권력은 ‘편견과 독선의 괴물’로 전락함으로써 정치는 국민에게 ‘희망이 아니라 근심’이 되고 있다.이처럼 권력은 왜 성찰에 인색할까? 그 원인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성찰을 위한 전제는 ‘경청(傾聽)’이다. 타인의 고언(苦言)을 겸허히 듣고자 할 때 비로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은 커질수록 자기중심성이 강해짐으로써 타인의 충고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권력의 크기와 성찰의 가능성이 반비례’하는 까닭이다.한국정치의 고질병인 ‘내로남불’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성찰을 거부하면 ‘소신’이고, 상대가 성찰을 거부하면 ‘아집’이라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니 ‘내 탓은 없고 남 탓’만 하게 된다.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을 탓하면서 적폐청산에 올인(all-in)했고,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을 탓하면서 새로운 적폐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내 탓이오’라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권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게다가 여야의 강성 지지자들, 즉 정치팬덤들의 극단적 행태도 권력의 성찰을 가로막고 있다. 좌우의 팬덤들은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당 내부에서 제기되는 합리적 비판까지도 이적(利敵)행위로 몰아서 집단린치를 가하고 있다. ‘충신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내부비판을 막고 있으니 권력의 자체교정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이처럼 권력의 성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성찰 없는 권력은 국가적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주권자인 국민은 ‘엿과 채찍’으로서 정치인들의 성찰을 유도해야 한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권력의 표리부동(表裏不同)’에 속지 말고, 위선적 권력은 가차 없이 비판하고 성찰하는 권력은 격려해야 한다. 특히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권력에 직언하는 충신들, 그리고 정치팬덤들의 비열한 공격을 받고 있는 내부비판자들에게는 성원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반면에 성찰을 거부하는 오만한 권력은 미래가 없음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권력의 속성상 자기성찰은 쉽지 않기 때문에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는 국민이 채찍을 들 수밖에 없다. 최선의 방법은 대선·총선·지선 등의 선거를 통해서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총선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보다 자기성찰에 충실한 정당과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퇴행적이고 야만적인 한국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

2023-02-13

당심·윤심·민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당권에 도전한 후보들이 벌이는 ‘윤심 경쟁’은 꼴불견이다.공정해야 할 선거가 당 지도부의 경선규칙 변경, 윤핵관의 편 가르기, 대통령실의 개입 등으로 매우 혼탁해졌다. ‘당심’과 ‘윤심’이 과연 ‘민심’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민주정치는 정당정치이기 때문에 정당민주주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당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율성·객관성·공정성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스스로 정당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민심1위 후보’의 출마를 저지하기 위해 경선규칙을 변경하는가 하면, ‘당심1위 후보’를 조직적으로 비판·모욕·겁박함으로써 결국 출마를 포기시켰다. 이러한 반민주적 행태는 ‘윤심1위 후보’의 당선을 위한 것이고, 그 배후에는 윤핵관과 대통령실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지도자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고 한 윤 대통령이 자신에게 충성할 당대표를 원한다면 자기모순이다.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은 친윤·비윤·반윤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해서 정당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권위주의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당심이 윤심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공당의 사당화’일 뿐이다.국민의힘 청년당원 김우영은 “윤심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투표나 하라)식의 전당대회는 국민에게 실망을 줄 뿐”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민심’이 돌아선다면 ‘윤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집권당 대표는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다. 양자 관계는 정치상황에 따라 상호보완적일수도 있고 경쟁적일수도 있지만, 당대표가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수직적 관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당이 대통령실의 출장소로 전락하면 정당정치는 본래적 기능을 할 수 없다. 여당대표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동시에, 민심을 대통령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가교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대표의 독립성과 정치적 균형감이 중요한 까닭이다.국가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이 분열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된다. 윤심을 얻으려는 후보들이 ‘윤심 팔이’를 하더라도 대통령은 “어떤 후보에게도 윤심은 없다”고 분명히 밝혀야 한다.집권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는 ‘윤심 바라기’가 아니라 당과 국가의 미래비전을 놓고 경쟁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대통령 자신이 정당민주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대표경선과정이 민주적이라고 강변한다면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윤심이 공정과 상식을 잃으면 민심은 외면하고 정권은 위기를 맞게 된다.윤심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으로 선출된 대표가 지휘하게 될 내년 총선은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총선의 승패는 ‘윤심이 아니라 민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권에 도전한 후보들은 물론, 대통령과 당원들도 ‘민심의 엄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기 바란다.

2023-01-30

‘어느 편이냐’ 묻는 당신에게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진보정권에서는 진보를 비판하고, 보수정권에서는 보수를 비판하는 당신은 도대체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편 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언론이나 지식인은 정권·이념·권력의 편이 아니라, 정의·진실·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다.자유·정의·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념적 프레임’에 갇히는 ‘편 가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프레임은 정치이념이 반영된 ‘선택과 배제’의 결과물이다.정치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자유인의 사고는 유연성을 잃고 정신적 노예로 전락한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편이냐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진영논리에 빠졌다는 것은 주체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자유와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영과 진영 사의의 경계’에 서야 한다. ‘경계인’의 삶이야말로 자유인의 지성적인 삶이다.‘정의’라는 담론 역시 진영논리로 정치화되면 ‘선택적 정의’가 ‘보편적 정의’를 대신하게 된다. 편향적인 ‘보수의 정의’나 ‘진보의 정의’가 ‘보편적 정의’로 인정받지 못하는 까닭이다.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정·정의·상식’의 역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못한 이유는 대통령들의 정치성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공정은 정의로워야 하고 정의는 공존을 지향할 때 비로소 보편적 정의가 될 수 있다.‘확증편향이 지배하는 흑백사회’에서는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 사람을 흔히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한다. 보수를 비판하면 진보이고, 진보를 비판하면 보수라는 단세포적 발상은 반민주적 흑백론이다.파스칼(B. Pascal)이 갈파했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천사(백색)도 악마(흑색)도 아닌 중간적 존재(회색)”이다. 완벽한 백색 또는 흑색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수많은 회색들의 농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는 중도층이 보수와 진보의 극단화를 막아주고,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 빈부갈등을 완화시켜주니 ‘회색지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우리가 지금 앓고 있는 ‘확증편향이라는 병’은 망국병이다. 조선시대의 동인과 서인, 해방정국에서 좌파와 우파의 극단적 대립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독선과 오만에 빠진 ‘편 가르기의 끝은 공멸’이다. 정치이념이 종교화되면 권력투쟁은 종교전쟁처럼 극단화되기 때문이다. 독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성’이 아니라 ‘신념’이며, ‘외골수의 신념’은 이성적 토론을 어렵게 함으로써 마침내 민주주의는 사망하게 된다.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말자. 그 대신 우리의 인식과 행태가 불편부당(不偏不黨)하도록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자.철학자 호르크하이머(M. Hork heimer)는 “인간의 이성이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포기할 때 비극이 초래된다”고 했다. ‘확증편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성찰’과 ‘통합적 인식의 시선’이 절실한 이유다.

2023-01-09

권력의 위기, 신뢰의 위기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에서도 우리의 정치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정치의 실종은 권력의 위기이고, 권력의 위기는 신뢰의 위기를 의미한다. 집행권력을 가진 여당이나 입법권력을 가진 야당이나 권력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여야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약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은 ‘권력의 획득·유지·확대’를 위해 수많은 거짓말들을 한다.이 가운데에는 ‘용서받은 거짓말’도 있고, ‘용서받지 못한 거짓말’도 있다. 미국의 트럼프(D. Trump) 전 대통령은 4년 동안 ‘3만573번의 거짓말’(워싱턴포스트)을 하면서도 임기는 채웠으나, 닉슨(R. Nixon) 전 대통령은 워터게이트(Watergate)사건을 은폐, 조작한 거짓말이 탄로나 재임 중에 하야했다.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어떤가? 지난 대선 결과가 보여준 윤석열과 이재명의 ‘간발의 득표 차이’는 두 후보가 국민으로부터 평가받은 ‘간발의 신뢰 차이’를 말해준다. 대장동사건으로 최측근들이 연이어 구속되었는데도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사과 한마디 않는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나, 외교무대에서 불거진 비속어 논란을 덮으려고 말 바꾸기와 우기기로 일관하다가 그 책임을 언론으로 돌린 윤석열 대통령이나 ‘신뢰의 수준은 도토리 키 재기’이다.공자가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無信不立)”고 한 것처럼, 정치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국민의 신뢰다. 신뢰란 무엇인가? 믿음을 뜻하는 신(信)은 ‘사람(人)+말(言)’로 구성되어 있다.사람이 말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즉 ‘언행일치’가 신뢰다. 스스로 ‘무신불립’을 역설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것이나, 공정·정의·평등을 약속했던 문재인 정권이 심판받은 것은 모두 국민을 배신했기 때문이었다.윤석열 대통령의 성공 역시 국민의 지지여하에 달려 있고, 국민의 지지율은 신뢰도와 궤를 같이한다. 낮은 지지율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윤 대통령은 당선 인사에서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고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간절한 호소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대통령이 보여준 정치행태는 공정과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대립으로 통합의 정치는 말뿐이었다.대통령의 약속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민심은 떠나고 정권은 위기를 맞는다. 정치의 성공은 신뢰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국정의 동력도 역시 국민의 신뢰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내 탓을 남 탓으로 돌려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권력, 민심을 외면하는 권력 지상주의 정치로서는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거짓말’이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로 미화되는 탈진실시대의 지도자는 ‘권력과 신뢰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정치적 공인의 권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적이 된 권력은 국민의 신뢰를 잃음으로써 마침내 권력도 잃게 된다.

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