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누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한국 민주주의가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병의 원인은 ‘제도’에도 있지만 ‘사람’이 더 큰 문제다. 확증편향과 선택적 정의에 갇힌 중환자들이 자신은 병이 없다고 하니 ‘웃픈’ 현실이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분노와 적대가 만연해서 독선과 편견, 오만과 아집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랫(D. Ziblatt)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의 핵심규범은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인데, 이것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무너진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서로의 견해 차이를 존중하고 자기의 절대성을 고집하지 않아야 유지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고, 집행권을 가진 대통령은 주저 없이 거부권을 행사한다. 외관상 각자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니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관용·타협이라는 절차규범을 어긴 것이다. 입법 권력과 집행 권력의 ‘힘의 대결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정치가 전쟁과 다른 점은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협력해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는데 있다.민주주의는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토대로 한다. 하지만 견리망의(見利忘義)하는 정치인들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은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부족적인가를 말해준다. 부족주의 정치는 국가이익보다 당파이익을 중시한다. 철학의 빈곤과 이기심으로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인들의 선동과 매도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기둥은 공정과 정의다. 롤즈(J. Rawls)가 말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적 공정’을 통한 ‘결과적 정의’를 의미한다. ‘정의가 힘’이 되어야지 ‘힘이 정의’가 되는 정치로서는 정의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재명과 조국의 경우처럼 힘으로 공당을 사당화하거나 범죄혐의를 정치적으로 덮으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권력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기도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배신이다.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처음이자 끝이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언론의 비판기능이 죽으면 민주주의도 죽는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민주주의 리포트 2024’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언론통제와 사정기관을 통한 공포정치로 “한국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고 했다. 법을 적용하는 공권력의 남용이 민주주의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는 시민의 주권을, 그리고 ‘공화’는 공공선을 말한다. 우리의 미래는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가 되는 ‘공화정(共和政) 정신’에 달려 있다.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너와 내가 함께하려면 관용·대화·타협의 정신이 필수다. 우리가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진정한 공화주의자로 거듭날 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는 회생될 수 있다.

2024-05-06

성난 민심을 어떻게 받들 것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108 대 192’, 국민은 윤석열 정권을 무섭게 심판했다.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에 성난 민심의 폭발이었다. 이미 6개월 전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강력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으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대통령은 이번에도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겠다”고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무엇을, 어떻게 쇄신하겠다는 것인가? 병은 원인을 알아야 치료할 수 있다. 대통령은 참패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검찰 중심의 측근 인사는 불통의 상징이었고, 대통령이 내쳤던 이준석·안철수·나경원은 모두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돌아왔다. 이태원·오송 등 대형 참사에서 보여준 무책임, 해병대 채 상병 사망수사와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사건의 처리에서 보여준 오만한 태도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대통령의 성찰·반성·변화가 시급한 까닭이다.대통령이 민심을 받들려면 국민, 여당 및 야당과 제대로 소통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과의 소통’인데, 그것은 바로 ‘언론과의 소통’을 의미한다.대통령은 총선 참패에 대해 언론 앞에서 직접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고 국무회의 비공개회의에서 간접적으로 사과했다고 한다.“참모 뒤에 숨지 않고 잘못은 솔직하게 고백하겠다”고 한 대통령은 어디로 갔나? 분노한 민심에 진솔하게 사과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가?다음으로 당정(黨政) 소통을 위한 양자관계의 재정립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당의 주류가 합리적·개혁적 보수로 교체되어야 한다. 수구적인 보수, ‘윤심’만 살피는 보수는 시대변화에 부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변화와 혁신을 추동할 수 없다.여당은 대통령에게 고언(苦言)하는 ‘악마의 대변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대통령은 ‘검사 윤석열’이 아니라 ‘정치인 윤석열’이 되어야 한다. 검찰문화에 습관화된 상명하복의 정치행태는 불통만 키울 뿐이다.마지막으로 야당과의 소통이다. 정쟁을 중단하고 정치를 복원하라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이다. 향후 대통령의 잔여 임기 3년은 가시밭길이다.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야당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대통령의 레임덕만 재촉할 뿐이다. 이재명과 조국의 범죄혐의에 대한 법률적 판단은 사법부에 맡겨두고, 대통령은 정치적 대화를 통해 국정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여소야대의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이처럼 성난 민심은 대통령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요구하고 있다. 취임 이후 반복되어온 표리부동과 언행불일치, 선택적으로 적용해온 공정과 상식을 반성 없이 변명만 하면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다.병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데 야당을 탓하고 참모들을 질책해서 될 일이 아니다. 권력에 취해 초심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 아닌가.민심을 받드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길’은 대통령이 변하는 것이다. 오만과 불통의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소통·대화·타협의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할 때 비로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2024-04-22

막장 총선, 성찰과 반성을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철면피(鐵面皮)들의 행진이었다.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정치꾼들의 목소리만 높다. 내로남불과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난무하고, 범죄자들까지 총선에 뛰어들어 ‘견강부회(牽强附會)’하니 어처구니없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민주주의의 무덤’이 되었다. 정치가 난장판이니 총선 이후가 더 걱정이다.내일은 민심 심판의 날이다. 패자의 반성은 물론, 승자도 박수 받을 처지는 아니다. 여야가 하나같이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소명의식 없이 사익만 추구한 정상배(政商輩)들이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굽신거리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정치의 퇴행이며 민주주의 위기다. 오직 진정한 자기성찰과 반성만이 공동체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무엇을 성찰하고 반성해야 하는가? 정치지도자들은 오만과 불통, 언행불일치와 표리부동부터 고쳐야 한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는데 불신을 자초했다. ‘시스템 공천’을 말하면서 ‘고무줄 공천’을 했고, 국민을 빙자하여 권력을 남용했다. 통합을 말하면서 분열을 획책했고, 법치를 말하면서 법원의 판결을 비웃었다. 국민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뻔한 거짓말’로 주권자를 기만했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권력을 탐하여 ‘편 가르기’와 ‘혐오 정치’를 한 것도 반성해야 한다. ‘통합의 수단’인 정치를 ‘분열의 도구’로 악용함으로써 나라는 ‘심리적 내전상태’가 되었다. 반역자집단·범죄자연대와 같은 막말로 상대를 악마화하고 내편의 분노를 부추겨 나라를 두 동강 내었다. 물론 이들의 선동에 놀아난 주권자의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국민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어떻게 해야 희망의 정치를 만들 수 있을까?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각성이 시급하다. 베버(M. Weber)는 그의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에게는 ‘열정·책임감·균형감각’ 등 세 가지가 필수조건이라고 했다. 우리 정치인들도 공익을 위해 희생·봉사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권력을 위임해준 국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야 하며,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이러한 정신적 각성과 함께 제도개혁이 병행되어야 한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적대적 공생정치를 심화시켰고, 연동형비례대표제는 꼼수 위성정당을 양산하여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 법학 교수였던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1·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자 “비법률적 방식으로 명예회복을 하겠다”면서 비례정당을 창당했다. 법학자가 범법자가 되어 법을 부정하고 정치적 면죄부를 받겠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이제 이 난장판 선거가 끝나면 반드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정치인은 공정과 정의를 말하면서 불공정과 불의를 일삼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을 반성해야 하고, 국민은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정치인들의 선동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한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한다. 희망의 정치도, 파멸의 정치도 모두 우리가 만든 인과응보(因果應報)다. 성찰과 반성 없이는 미래도 없다.

2024-04-08

‘민주 없는 민주당’이 가는 길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민주’를 자랑해온 민주당이 길을 잃었다. 정당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이재명의 민주당’이 되었다는 비판이 거세다.김대중·노무현의 관용과 통합정신은 보이지 않고 이재명의 ‘독선과 배제의 정치’가 요란하다. 75년 역사와 전통의 민주당이 처음 가는 길이다.‘민주 없는 민주당’의 현실은 ‘친명횡재, 비명횡사’라는 조어가 웅변으로 말해준다. ‘시스템공천’이라고 자랑하더니 알고 보니 ‘고무줄공천’이었다. 이낙연 전 총리는 민주당이 “1인 정당, 방탄정당으로 변질됐다”고 성토했고, 홍영표 의원은 “민주가 사라진 가짜 민주당”이라고 하면서 탈당했다. 오죽하면 권노갑·정대철 등 당의 원로들까지 나서서 “공천이 당 대표의 사적 목적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비판했겠는가.이재명의 사당화(私黨化)에 분노한 의원들은 탈당하여 신당 창당, 무소속 출마, 심지어 여당에 입당하여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다. 민심을 외면하고 ‘공천 자해극’을 벌였으니 민주당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또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지속 여부를 당대표 1인에게 위임한 것은 정당민주주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친북·반미세력들과 함께 비례연합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이념적 좌편향이 심화되었다. 그 결과 민주당의 정체성은 크게 훼손된 반면, ‘이재명 당’의 색깔은 더욱 분명해졌다.정치권력의 오만과 독선은 반드시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하고 배신한 벌이다. 민주당에 민주가 없으니 검찰독재론이 작동하기 어렵고, 우세하던 총선 판세도 결코 낙관할 수 없게 되었다. 여당의 잘못을 비판하면 “너나 잘 하세요”라는 힐난만 돌아온다. 당 대표가 자신의 사법리스크 방탄과 차기대권 도전을 위해 공천을 무기로 ‘공당을 사당화’했다. 사익(私益)을 위해 대의(大義)를 버린 것이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희생과 헌신으로 대통령에 오른 ‘김대중·노무현의 민주당’이 아니다.‘민주 없는 민주당’은 여야관계와 정치발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정치발전은 정당발전을 전제로 하는데, 이재명의 민주당은 정당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개딸’과 ‘팬덤’에 의존하는 극단의 정치, 친명체제 강화와 이념적 좌편향은 여야의 갈등과 대립을 격화시킬 뿐이다. 대화와 타협이 없는 증오와 혐오의 정치에서는 민주정치의 반동화, 즉 ‘독재정치의 싹’이 태동한다.민주화 역사에 빛나는 정통 민주당이 이재명의 사당으로 전락한 것은 민주당의 불행이요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독선과 아집의 정치는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성공의 길은 탐욕의 정치가 아니라 희생과 헌신의 정치, 즉 ‘사즉생(死卽生)’에 있다. 나를 비우는 것이 당을 살리는 길이다. 민주당이 약자를 보호하고 권력의 횡포를 막아주는 건강한 정치세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길을 물어 ‘민주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민주가 바로 민심’이며, ‘민심이 곧 천심’이다. 국민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

2024-03-25

영화의 정치화,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인들은 ‘정치 영화’를 이용해서 ‘영화 정치’를 한다. 대통령이나 정치적 이슈를 다룬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여야는 ‘영화의 정치화’를 통해서 색깔논쟁을 일으키며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선거용 정치 영화’를 만들어서 돈벌이하려는 제작사와 그것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일치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은 영화를 자신의 정치철학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지지자를 결집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민주화운동을 다룬 남산의 부장들(10·26), 택시운전사(5·18), 1987(6·10), 서울의 봄(12·12) 등이 진보진영의 메시지 전파에 이용되었다면, 건국·산업화·안보를 다룬 국제시장(산업화), 연평해전(남북충돌), 인천상륙작전(6·25), 건국전쟁(이승만) 등은 보수진영에 이용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스크린 정치’라는 영화의 ‘정치마케팅’이다.그러나 영화의 정치화는 부작용이 크다. 영화 제작사나 감독이 정치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고, 정치권은 그 영화를 편향적,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여 정치적 선전·선동의 도구로 삼기 때문이다. 정치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영화가 다를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평가는 전혀 다르다.영화 ‘건국전쟁’의 경우, 보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에, 그리고 진보는 그의 ‘과(過)’에 초점을 둔다. 서로 다른 관점과 잣대로 정치적 여론몰이에 이용하는 것이다.‘영화의 진영정치화’는 국론분열과 적대정치를 심화시킨다. 언론들이 정치 영화에 편을 갈라 싸우면 갈등은 격화되고, 감독의 제작 의도는 왜곡·훼손될 수 있다. 특히 선거를 겨냥해서 영화인·정치인·언론인들이 야합하여 영화를 정치화할 경우 영화예술의 순수성은 훼손되고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전체주의체제에서 영화는 이념과 정권의 홍보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들의 성찰과 각성이 필요하다. 물론 영화는 매체의 특성상 정치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인이 정치인의 노예로 전락하면 영상예술의 발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영화의 상업성을 인정하고 영화인의 가치관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제작사나 감독은 영화발전을 위해 양심과 책임을 갖고 정치적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정치인들의 영화 정치는 더 큰 문제다. 정치를 잘해서 민심을 얻으려하지 않고 영화에 기대에 표심을 사려고 잔 꽤만 부리는 행태는 한심하다.영화 정치는 내편 결집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비판자나 중도층을 끌어들이기는 어렵다. 영화 한편 보고 표심을 바꿀 유권자가 어디 있겠는가. 영화를 정치의 수단으로 삼으면 영화예술도 죽고 정치발전도 없다.삶은 현실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의 도구화, 즉 영화로 정치를 할 것이 아니라 정치로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영화 같은 정치’가 아니라 정도정치(正道政治)를 통해서 사회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영화 같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2024-03-11

총선용 매표(買票) 포퓰리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용 포퓰리즘(populism) 광풍(狂風)이 불고 있다. 선거 때마다 도지는 ‘망국적 고질병’이다. 매표나 다름없는 선심성 공약을 여야가 경쟁적으로 남발한다. 여당이 50을 약속하면 야당은 100을, 또 다시 여당은 150을 던지는 ‘투전판 정치’다. ‘아니면 말고’식의 허황된 공약을 하는가하면, 여야가 야합해서 ‘예타 면제 특별법’으로 대못을 박기도 한다.윤 대통령은 “매표에 가까운 포퓰리즘 정책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총선이 다가오자 소상공인들에게 재난지원금 환수면제, 대출이자의 현금반환, 전기료감면 및 신용사면을 단행했다. 또한 부동산·주식·금융투자자들에 대한 소득세와 상속세의 감세도 발표했다. 포퓰리즘을 비판하면서 재정건전성을 외치던 대통령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다.여당과 야당의 ‘개발 포퓰리즘’ 경쟁은 더욱 가관이다. 여당이 1기 신도시의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푸는 특별법을 발의하자, 야당은 노후계획도시 정비·지원특별법을 발의했다. 여당이 수도권도심철도 지하화를 공약하자, 야당은 전국 모든 도심철도의 지하화로 맞섰다. 여당이 김포의 서울 편입을 다시 띄우자 야당은 서울지하철 5호선 김포 연장 예타를 면제했다. 심지어 여야는 야합하여 대구∼광주 달빛철도 특별법과 수도권 철도지하화 특별법을 모두 예타 없이 통과시켰다.‘복지 포퓰리즘’은 또 어떤가. 야당이 노인 간병비의 보험 급여화와 경로당 주5일 점심제공을 발표하자, 여당은 간병비의 국가부담 확대와 주7일 점심제공으로 맞불을 놓았다. 여당이 2028년까지 기초연금 40만원을 공약하자 야당은 2026년까지 모든 고령층에 기초연금 제공을 약속했다. 야당이 청년들에게 월 10∼20만원 수당, 학자금 무이자대출, 교통비 할인 청년패스를 공약하자, 여당은 대학생 50%에서 80%까지 국가장학금을 주는 동시에 ‘대학생 1천원 아침밥’의 확대 및 연 2%대의 주택담보대출을 약속했다.이러한 막가파식 선심성 정치는 망국의 길이다. 포퓰리즘에 빠졌던 이탈리아·그리스·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지금 참회하고 있다. 총선을 겨냥해 여야가 던지는 포퓰리즘은 ‘마약’이다. 국민이 ‘마약’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지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대가는 다시 부메랑이 되어 국민에게 돌아온다. ‘마약 복용’의 대가는 경제파탄이고 미래세대의 불행이다.포퓰리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면 정치 불신을 초래하고, 약속대로 실행되면 재정악화로 경제가 거덜 난다. 물론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약 같은 권력’에 중독된 정치인들이 ‘마약 같은 포퓰리즘’을 국민에게 투여하고 있으니 제정신이 아니다.결국 미래는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스위스 국민은 매월 300만원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헌법개정안을 77%의 압도적 반대로 부결시킴으로서 남유럽이나 남미처럼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았다. 앞날을 내다본 그들의 혜안(慧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2024-02-26

대통령의 소통,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윤석열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는 이유를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항상 언론과 소통하고 언론 앞에 자주 서겠다”고 하면서 “질문 받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도어스테핑’은 6개월 만에 중단됐고, 신년기자회견도 하지 않은지 2년째다. 국민은 왜 청와대를 나왔느냐고 묻고 있다.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대통령의 소통 대상이 ‘제한적이고 선택적’이라는 사실이다. MBC기자는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반면, 조선일보에는 대통령 단독인터뷰라는 특혜를 줬다.소통의 본질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내가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데 있다. 편안한 여당, 우호적 언론만 상대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야당이나 비판언론이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고언(苦言)은 국정운영에 좋은 약이 된다. “언론과의 소통이 국민과의 소통”이라고 했던 대통령이 불편하다고해서 기자회견을 피한다면 되겠는가.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통령의 소통방식이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소통은 ‘민주적 대등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호적이어야 한다.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문제에 답해야 소통이 된다. ‘홍보’와 ‘소통’의 차이는 ‘쌍방향 여부’에 있다. 국무회의의 일방적 중계는 홍보의 일환이며, 대통령실에서 기획했다는 ‘민생토론회’는 참석자와 질문자를 사전에 선별한다는 점에서 소통이 아니라 ‘쇼(show)통’이며 일종의 홍보다.소통의 요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한 공감능력에 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한 까닭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대화의 수평적 관계’가 보장돼야 한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권위적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장악하면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 언론(조선일보)이 지적한 ‘59분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불통의 상징이다. 대통령이 상명하복의 검찰조직문화에 익숙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니 참모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하버마스(J. Habermas)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기초한 의사소통, 즉 홀로 결정하는 ‘나’가 아니라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가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고 했다.소통의 최대 장애요인은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이다. 야당과 국민을 계도(啓導)의 대상으로 보면 소통할 수 없다.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참모들에게 “소통을 강화하라”고 지시만 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야 한다.재임 8년 동안 158회의 기자회견을 한 미국의 오바마(B. H. Obama) 전 대통령은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나를 단련시켰다”고 했다. 언론과의 소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반면에 윤 대통령은 올해도 생방송 신년기자회견은 하지 않고 KBS와의 대담을 녹화, 편집해 3일후에 공개했다. ‘도어스테핑’을 하던 그 대통령이 아니다. 소통을 위해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2024-02-12

여의도 사투리 vs 서초동 사투리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권의 ‘사투리 논쟁’이 꼴불견이다. 경상·전라·충청도의 ‘지방 사투리’는 정감이 있지만, 정치꾼들의 ‘패거리 사투리’는 반감만 불러온다.여당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전·현직 야당대표를 비판하면서 ‘여의도(국회)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고 하자, 야당에서는 법비(法匪)들이 쓰는 ‘서초동(검찰) 사투리’부터 고치라고 했다. ‘내가 쓰면 표준말’이고 ‘남이 쓰면 사투리’라고 하니 ‘내로남불’이다.‘말’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은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을 써야 한다. 정치인들의 표준말이란 무엇인가? 권력의 원천인 ‘주권자의 언어’가 표준말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 민심을 모르거나 민심을 왜곡하면 사투리가 된다. 사투리가 매우 심한 정치인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의 모순조차 깨닫지 못한다. 패거리 사투리에 익숙해진 까닭이다.여당의 구원투수로 나선 한 위원장이 총선에서 이기려면 민심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국민은 여의도 사투리를 싫어하지만 서초동 사투리나 용산 사투리도 단호히 거부한다.여의도 사투리를 비판한 그가 ‘여의도 문법’으로 ‘여의도 패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권력에 오염된 패거리 사투리를 쓰면서 그것이 국민의 표준말이라고 우긴다면 누가 동의하겠는가. 여당의 김웅 의원이 “우리 당의 문제는 여의도 사투리가 아니고 용산 사투리”라고 한 비판을 새겨들어야 한다.서초동 사투리는 ‘비민주적’이라는 것도 문제다. ‘검사 대 피고인’의 관계,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검찰조직문화에 익숙한 초보정치인들은 서초동 사투리를 고쳐야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시스템 공천을 강조했던 한 위원장이 경솔한 행동으로 사천(私薦) 논란을 빚은 것도 문제지만, 이를 빌미로 그의 사퇴를 요구한 대통령실의 위법적인 당무개입은 더 큰 문제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고 말한 대통령이 국민의 60% 이상이 요구하는 영부인의 ‘디올 백’ 의혹 규명을 외면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대통령실은 ‘몰카’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하지만, 국민은 ‘디올 백 수수’를 문제 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니체(F. W. Nietzsche)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여의도 사투리를 쓰는 괴물과 싸우다보면 어느새 서초동 사투리를 쓰는 또 다른 괴물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초동 괴물은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해서 여의도 괴물보다 훨씬 더 저급하고 난폭하다’는 비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괴물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나부터 고쳐야 한다.2011년 12월, 총선을 4개월 앞두고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된 박근혜는 “여당으로서 국민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석고대죄(席藁待罪) 했다. 민심을 제대로 알려면 남의 사투리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나의 사투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성찰과 반성을 모르는 패거리 사투리는 표준말을 논할 자격이 없다.

2024-01-29

제3지대 신당이 성공하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제1야당 대표가 백주대낮에 정치테러로 쓰러졌다. ‘증오의 진영정치’가 초래한 비극이다. 대결의 정치는 대화·타협·공존을 모른다. 거대 양당은 협치의 대상을 섬멸해야 할 적으로 간주해서 ‘전쟁 같은 정치’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모르는 양당의 주특기는 ‘내로남불’이다. 국민은 말뿐이고 권력에만 혈안이니 양당에 실망한 중도·무당층의 비율이 역대급이다.그럼에도 양당은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은 총선을 앞두고 분출하는 제3지대 신당들에 관심이 간다. 최근 여론조사(리얼미터, 2023년 12월 18일)는 국민의 48.3%(무당층은 68.3%)가 제3지대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했다. 중도·무당층을 겨냥한 신당들은 ‘합리적 진보’ 또는 ‘개혁적 보수’를 표방하고 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새 정치를 펴겠다는 포부도 크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제3지대 신당이 성공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3지대의 ‘철학과 비전’이다.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신당인가?”에 분명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신당은 거대 양당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만 기대서는 안 되며, 차별화된 가치와 비전으로 대안세력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은 ‘새로운 당’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당은 양당체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 정치의 지향점과 비전’을 확실히 제시해야 한다.다음으로 신당의 정치성향(political orientation)은 합리적·이성적·실용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진영정치를 거부하는 민주시민들의 열망일 뿐만 아니라, 신당의 지지기반이 되고 있는 중도·무당층의 요구이기도 하다. 신당은 ‘사익을 위한 정쟁’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며, 상대를 ‘척결의 대상’이 아니라 ‘협치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성향은 당내민주주의를 가능케 함으로써 합리적 정책 선택을 제고함은 물론이다.한편 신당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총선만 의식한 기회주의적 접근으로는 유권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신뢰는 말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의 누적된 결과물’이다. 거대 양당의 혐오에 기대어 당장 성과를 보겠다는 과욕은 곤란하다. 비록 이번 총선에서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일관된 철학과 행동으로 긴 호흡을 한다면 반드시 국민의 호응을 얻게 될 것이다.이처럼 제3지대 신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철학, 합리적 성향, 장기적 관점에서 양당체제의 압력을 돌파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난관은 많겠지만 성공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현재의 양당체제’에서는 팬덤정치·극한대결·민심왜곡·포퓰리즘·내로남불 등의 수많은 병폐들이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3지대 신당의 성공은 참여 정치인들의 철학·성향·행태에 대한 국민의 공감여부에 달려있다.

2024-01-15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새해 첫날, ‘바람의 섬’ 제주에서 올레 길을 걸으며 ‘바람이 가르쳐주는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삶을 옭아매는 수많은 그물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의 가르침이 가슴을 때린다.우리는 ‘바람과 같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살고 있다. 내가 만든 그물에 내가 걸려 허덕이는 것이다. 서로를 연결하는 인터넷은 이제 서로를 옭아매는 그물망이 되었다. SNS는 소통할 수 있는 ‘개방적인 연결망’이 아니라 고기들을 가두는 ‘어망 (漁網)처럼 폐쇄된 그물’이 되고 있다. 적과 동지를 구별한 ‘진영의 일원으로서의 나’만 있을 뿐이다. ‘독립된 나’를 상실하고 진영에 ‘종속된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볼 수 없다. 오만과 독선이라는 그물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들이 우물 밖 세상이 잘못됐다고 아우성이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진보 꼴통’은 ‘보수’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보수 꼴통’은 ‘진보’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념과 진영의 그물에 걸린 탓이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은 밀(John S. Mill)이 지적한 것처럼 “검증되지 않는 신념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경향성”에 있다. 자유를 외치면서도 노예의 길을 가는 어리석음이다.‘탐욕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의(大義)도 잃고 자유도 잃는다. 그물에 걸리는 이유는 물질적·외형적 가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돈·권력·명예가 목적이 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근심꺼리가 되어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인들의 불행은 초심을 잃고 권력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서 온다. 권력·명예·자유를 모두 잃어버린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적 종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어떻게 하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물 자체가 문제다. 바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마음의 거름망’을 촘촘하지 않고 성글게 해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사고의 유연성을 잃으면 자유로울 수 없고 변화에도 적응하지 못한다. 자신을 옭아매는 수많은 ‘편견의 그물’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특히 권력자는 자신을 둘러싼 ‘예스맨(yes man) 그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통·혁신·변화를 가로막는 낡고 쓸모없는 그물들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나아가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면 ‘마음의 근력’도 키워야 한다. 성찰과 명상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수행을 통해 마음의 근력을 단련함으로써 자유·진리·평화의 삶을 만들어야 한다. 물질에 집착하면 ‘정신의 근력’을 키울 수 없고, 그물에 걸린 삶을 합리화하면 ‘바람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자유인은 역경 속에서도 결코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피는 희망의 꽃을 아는가. 엄동설한(嚴冬雪寒)에 피는 ‘매화의 기개’와 ‘동백의 열정’을 배워야 한다.

2024-01-01

명분 없는 정치는 가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는 대의(大義)와 명분(名分)이 있어야 한다. 대의 없는 권력 추구는 야만이며, 명분 없는 권력 행사는 폭력이다. 정치의 이상이 대의를 구현하는데 있음에도 현실의 정치는 권력투쟁뿐이다. 대의도 명분도 없이 오직 권력에만 혈안이 된 ‘야만의 정치’ 때문에 국민의 고통이 크다.총선이 코앞인데 아직도 ‘게임의 룰’이 확정되지 않았다. 여야가 ‘명분 없는 실리’를 위해 잔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으면 손해고, 병립형으로 돌아가자니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여야는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제에 관심이 있을 뿐, 나라의 미래를 위한 대의는 외면하고 있다. ‘견리사의(見利思義)’해야 할 정치지도자들이 ‘견리망의(見利忘義)’하고 있으니 국민의 불행이요 국가의 위기다.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의 행태도 명분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동관 방통위원장을 임명하여 분란을 자초했던 대통령이 그의 후임으로 또 다시 검찰 선배, 김홍일을 지명했다. 이를 두고 야당은 물론 친여 언론들까지 나서서 방송통신분야의 전문성이 없는 ‘내 편만을 생각한 명분 없는 인사’라고 비판했다.대통령이 약속한 ‘공정과 상식’이라는 대의는 없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내 편만 집착하고 있으니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다.엑스포 유치경쟁 참패로 화난 ‘부산 민심’을 달래려고 ‘대통령의 국제시장 먹방’에 기업 총수들을 동원한 것도 명분 없는 권력의 횡포였다. 치열한 세계경제전쟁에 촌음을 아껴 써야 할 바쁜 총수들이 불려나와 떡볶이 접시를 들고 대통령 주변에 들러리서있는 모습은 안타깝고 한심하다.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정치쇼가 총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리석다.강서구청장 보선 참패로 출범한 인요한 혁신위원회의 윤핵관·지도부·중진 등의 희생 요구에 장재원 의원은 세력을 과시하며 반발하다가 마지못해 불출마선언을 했고, 진즉 물러났어야 할 김기현 대표는 용산의 눈치를 보다가 벼랑 끝에 몰리자 사퇴했다. 이 과정에서 중진의원보다 더 노회(老獪)한 초선의원들이 대표 호위무사 노릇을 하다가 이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으니 측은하다.총선을 앞두고 분출하는 정치인들의 탈당과 창당 및 그들 간의 연대도 분명한 철학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물론 제3지대가 극단적 대결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중도의 민심을 반영하고자 한다면 명분은 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권력을 목적으로 정치공학적 계산 아래 이루어지는 합종연횡은 공익을 명분으로 사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성공하기 어렵다.정치는 대의명분으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명분’과 ‘실리’가 충돌하면 대부분 실리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실리, 즉 권력은 명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다.더욱이 그 실리가 국민과의 약속을 파기해서 얻은 것이라면 불신을 자초함으로써 결국 권력도 잃게 된다. 정치지도자는 명분과 신의를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야 한다.

2023-12-18

여야 혁신경쟁,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화두는 또 다시 ‘혁신’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상투적인 구호다. 그 동안 여야가 경쟁적으로 내세웠던 수많은 혁신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또 혁신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진정성 없는 ‘혁신 쇼’를 반복해왔기 때문일 것이다.권력정치에서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다. 마키아벨리(N. Machiav elli)는 “강력한 적과 미온적인 동지, 그것이 바로 혁신이 성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라고 했다. 혁신에 저항하는 기득권세력은 강력한 반면, 그들의 저항을 돌파해야할 혁신파의 힘은 약하고 그 태도는 소극적이다. 권력은 달콤하지만 혁신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정치혁신이 성공하려면 ‘왜’ 그리고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혁신의 출발점은 진정성 있는 반성과 성찰인데,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반성은 거짓이고 혁신은 위장일 뿐이다. ‘비윤’의 비판을 ‘내부총질’로 매도하는 ‘친윤’, 그리고 ‘비명’의 비판을 ‘수박’으로 폄훼하는 ‘친명’이 바로 혁신의 걸림돌이다.이러한 점에서 혁신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 여야 혁신의 키(key)는 누가 쥐고 있는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야당대표의 사법리스크와 ‘개딸정치’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 여야의 혁신경쟁을 대통령과 야당대표의 반성·성찰·의지의 경쟁으로 보는 까닭이다. 대통령이나 당대표에게 쓴 소리, 바른 소리를 못하는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혁신을 요구하는 ‘비윤’과 ‘비명’의 고언을 수용하지 못하는 권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혁신의 또 다른 장애요인은 기득권세력의 인적·제도적 저항이다. 인적 차원에서 볼 때 야당의 김은경 혁신위원회는 당내 주류의 눈치를 보다가 제대로 혁신하지 못했고, 여당의 인요한 혁신위원회 역시 당 지도부·윤핵관·TK중진 등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유명무실하다. 권력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자기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정치혁신은 말장난에 불과하다.제도적 차원에서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 집착이 선거혁신의 최대 걸림돌이다. 양당은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야합해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야가 꼼수를 쓴 위성정당들이 비판받자, 여당은 퇴행적인 ‘병립형 비례대표제’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고, 야당은 위성정당 방지를 주장하지만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여 선거법 혁신에는 소극적이다. 이러한 양당의 행태는 국민의 다양한 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반민주적인 정치적 야합이다.이처럼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몰염치한 정치인들에게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혁신을 주도해야 할 거대 양당이 ‘이권 카르텔’에 안주함으로써 오히려 혁신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이 선거와 투표를 통해 정치인들의 잘잘못을 심판함으로써 지속적인 혁신을 추동(推動)할 수밖에 없다.

2023-12-04

서울공화국 vs 국가균형발전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용 포퓰리즘 광풍이 불고 있다. 보선 참패로 수도권의 싸늘한 민심을 확인한 여당이 총선전략으로 ‘메가시티(megacity) 서울’을 띄웠다.이미 정치·경제·사회·문화가 고도로 집중된 ‘서울공화국’인데 ‘메가시티 서울’은 또 무엇인가? 지방은 소멸위기인데 헌법 제123조에 규정되어 있는 ‘국가균형발전’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할 의지는 있는지 묻고 싶다.서울은 ‘너무나 메가’해서 주택·교통·교육·직장·과잉경쟁의 부작용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전국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지방은 역대 정권의 ‘균형발전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은 오히려 약화되어 고사 직전에 있다. 그동안 지방 인구를 빨아들여 버텨온 서울공화국이 멀지 않아 지방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그럼에도 여당이 또 다시 서울공화국에 매달리는 이유는 뻔하다. 지방인 영남과 호남의 표심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총선 승패를 결정짓는 수도권은 가변성이 크기 때문이다. 수도권의‘떠난 표심’을 되돌리기 위해 극약 처방을 한 것이지만, 이것이 ‘승부수’가 될지 ‘자충수’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서울확장론’이 서울과 지방, 인접도시의 서울편입 여부, 그리고 서울에서도 지역적 편차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메가시티 서울’과 ‘지방시대’의 양립은 희망에 불과하며 현실에서는 충돌한다. 서울이 집중화될수록 지방소멸은 더욱 가속화 될 뿐이다. 양자관계에서 우선은 ‘헌법적 가치인 국가균형발전’이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도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방 거점도시의 경쟁력을 키우는 균형발전전략이 우리의 활로라고 지적하고 있다.따라서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은 서울을 확장하기 전에 문제의 발생 원인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국민의힘 5선의 서병수 의원은 “이미 ‘슈퍼 울트라 메가시티’인 서울을 더 ‘메가’하게 만든다는 건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은 메가시티가 아니라서 문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메가시티라서 문제인 것이다.설사 서울의 확장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서는 ‘지방의 부활’ 다음이다. 지방소멸을 막는 것이 서울확장보다 훨씬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지방이 죽으면 서울도 죽는다.지방 부활의 전제조건은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이다. 따라서 대선공약인 ‘500개 공공기관의 2차 지방이전’부터 조속히 실행해야 할 것이며, 메가시티도 서울이 아니라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여수·순천·광양처럼 지방에서 먼저 추진되어야 한다.국가발전전략은 면밀한 연구와 공론화 과정이 필수라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김대기 대통령실장은 ‘메가시티 서울’에 대해서 “대통령실과 여당의 사전 협의는 없었다”고 했으니 어이가 없다. 정부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총선용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오죽하면 여당의 유정복 인천시장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치 쇼”라고 비판했겠는가.총선만 생각한 정략적 접근으로서는 서울의 문제도 지방의 문제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2023-11-20

‘윤심’이 아니라 ‘민심’을 받들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속담에 “죽어봐야 저승을 안다”고 했다. 정부·여당이 강서구청장 선거에 올인 했으나 참패하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다. 이제야 윤 대통령은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나부터 반성하겠다”고 했고, 여당은 환골탈태하겠다면서 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총선을 앞두고 저승이 어른거리니 겁이 나서 허둥대는 모습이 측은하다.필자는 이미 본 칼럼을 통해 여러 차례 정부·여당에 고언(苦言)을 했다. “제주 돌담이 대통령에게”(2022년 8월 9일),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보라”(2022년 9월 6일), “당심·윤심·민심”(2023년 1월 31일), “공정과 상식, 그 표리부동에 대하여”(2023년 2월 28일), “중도층의 표심이 두렵지 않은가”(2023년 10월 10일) 등이 대표적이다. 유사한 비판과 충고들이 다른 언론에서도 수없이 지적되어왔음은 물론이다.그럼에도 모른 채 하더니 총선이 다가오자 이제야 호들갑이다. 쇄신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혁신과 변화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인식이다. 내년 총선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중간평가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여당은 사실상 ‘용산의 출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권력은 민심을 받들면 살고 거스르면 죽는다. 윤 대통령은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했지만 말 뿐이었다. 오만·독선·불통으로 무너진 전 정권을 닮아가고 있다. 청와대를 떠나 용산으로 이전할 때의 초심은 어디로 갔는가? 소통이 막혔으니 왜 청와대를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민심이다. ‘59분 대통령’이라는 별명은 불통의 상징이다. 참모들에게 “소통을 강화하라”고 지시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나부터 반성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위기 모면용’이 아니길 바란다. ‘반성이 기만’이 되면 민심은 폭발한다. 보선 참패는 대통령이 자초했고, 총선의 승패도 대통령의 변화에 달려 있다. 정치초보가 오만해서 폭주하면 사고 친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민심은 부정평가가 긍정평가의 두 배를 넘나들고 있다. 대통령이 바뀌지 않으면 총선은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다.여당의 쇄신 역시 시급하다. 용산만 쳐다보는 무력한 당이나 ‘혁신 시늉만 내는 혁신위원회’는 없는 게 낫다. 보선 참패의 책임으로 물러난 ‘윤핵관’ 사무총장을 20일 만에 다시 총선 핵심직책에 중용(重用)한 것이 혁신이란 말인가? 위장된 혁신은 역풍을 불러온다. 또한 정당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당내 비판은 ‘내부 총질’이 아니라 ‘충언(忠言)’이다. 총선 승패는 중도층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중도 확장성이 있는 당내 비판세력을 존중해야 한다. 이들이 탈당 또는 신당을 창당할 경우 수도권 선거는 더욱 어려워질 뿐이다.대통령이 민심을 오독(誤讀)하거나, 당이 ‘윤심’만 살피면 ‘떠난 민심’이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공천에 ‘윤심’이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당락은 민심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2023-11-06

가을, 나와 마주하는 거울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가을은 ‘거울’이다. 청명한 하늘, 소슬한 바람, 낙엽 구르는 소리만큼 나를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은 없다. 가을에는 사람의 마음도 거울처럼 맑아진다. 내면의 정신세계로 인도하는 가을은 나와 마주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가을의 고독과 외로움은 고요한 침잠과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 가을은 감상적 상념이 아니라 냉정한 성찰을 요구한다. 위대한 철인들이 품었던 질문을 나도 피해 갈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혁신함으로써 삶의 질적 수준을 높여나간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Hermann K. Hesse)는 “가을은 더 높은 삶으로 들어가는 계절”이라고 했다. 수준 높은 삶은 인간의 내면과 마주한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나와 마주해야하는 이유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고, 부르제(P. Bourget)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의 현실이 보여주듯이 정치꾼들이 만들어놓은 진영프레임에 갇히면 ‘사유의 정치’가 ‘믿음의 정치’로 전락한다. 광신도(狂信徒)가 된 정치팬덤들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고력이 약화되어 자기성찰이 불가능하다. 진영정치의 포로가 되어 화병(火病)에 걸린 사람들은 진영의 족쇄를 벗어던져야 그 병을 고칠 수 있다.가을은 ‘비움의 철학’을 가르쳐준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구르는 소리는 세월이 가는 소리다. 가을은 ‘집착의 계절’이 아니라 ‘버림의 계절’이다. 인간은 탐욕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건강은 몸(육체)과 마음(정신)이 동행해야 하는데, 마음 챙김이 없는 육체의 건강은 공허할 뿐이다. 우리의 삶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온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는 가을의 가르침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가을은 ‘결실’과 ‘소멸’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결실의 풍요로움에 감사하는 것도 가을이며, 다가올 북풍한설을 염려하는 것도 가을이다. 가을은 오색단풍의 환희와 바람에 뒹구는 낙엽의 쓸쓸함이 공존하고 있다. 가을의 양면성은 나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나와 마주한다는 것은 나의 장점만이 아니라 부족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단점들까지도 솔직하게 보는 것이다. 가을의 투명한 거울에 비추어 현재의 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미래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가을에는 누구나 생각이 깊어진다. 구도자가 되어 자연의 섭리를 깨달음으로써 참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돈·권력·명예를 쫒아서 진흙탕 싸움에 휘둘리다보면 정작 중요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살펴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청명한 가을 하늘에 비추어 맑은 영혼을 찾아내고, 소슬한 바람에 구르는 낙엽의 소리를 들으러 홀연히 떠나야 한다. 나를 만나러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야 한다.

2023-10-23

중도층의 표심이 두렵지 않은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제22대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선거다. 여당이 과반을 얻지 못하면 국정의 동력을 잃고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이 불가피할 것이며, 야당이 대선·지선에 이어 총선까지 패배한다면 최후의 버팀목인 입법 권력마저 상실하기 때문이다.누가 승리할 것인가?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의 표심을 잡는 정당이 이긴다. 총선은 결과가 뻔한 영남과 호남, 그리고 여야 각각 30% 안팎에 묶여 있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변수가 되지는 못한다. 총선의 승패는 전체 지역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도권에서 갈릴 것이며, 이 때 30%에 달하는 중도층의 선택이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다.중도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레이코프(G. Lakoff)는 “이슈에 따라 보수적 또는 진보적으로 투표하는 이중개념주의(biconceptualism) 소유자”라고 했다. 이들은 ‘이념이 아니라 이슈’에 따라 움직이는 ‘스윙보터(swing voter)’들이며, ‘무지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현명한 실용주의자’이다. 정치팬덤들과는 달리 진영정치에 구속되지 않고 이슈와 상황에 따라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그럼에도 여야의 정치적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는 갈수록 태산이다. 윤 대통령은 여당 연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역설했고, 국무회의에서는 장관들에게 ‘전사’가 되어서 “싸워 달라”고 주문했다.대통령이 요구한 ‘이념전쟁’에 지지층이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실용’을 중시하는 중도층은 비토(veto)그룹으로 돌아설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한국갤럽, 2023년 9월22일) 중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평가(59%)가 긍정평가(32%)의 2배 가까이 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야당의 극단주의는 또 어떤가? 이재명 대표 역시 ‘개딸’에 의존하는 팬덤정치로 일관해왔다.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국회의 체포동의안 통과에 격분한 개딸들은 비명계 의원들에게 욕설은 물론 살해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팬덤에 편승하는 극단의 정치가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는 있겠지만 중도층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다.이처럼 대통령의 이념 리스크와 야당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모두 총선에 부담요인이 되고 있다. 중도층은 사법 리스크에 기대어 반성 없는 여당도, 이념 리스크에 기대어 성찰 없는 야당도 싫어한다. 권력자의 입만 쳐다보는 ‘친윤’과 ‘친명’의 똑같은 편향적 행태, 그리고 지지자들의 목소리만 듣는 ‘뺄셈의 정치’로서는 중도 확장이 불가능하다.따라서 총선을 앞둔 여야는 중도층을 잡기 위한 혁신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여당은 ‘용산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당정관계를 재정립하는 동시에, 이념보다 실용을 모색해야 하고, 야당은 ‘친명’과 ‘비명’의 갈등을 극복하는 한편, 팬덤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문제는 총선 공천권을 쥐고 있는 여야 최고 권력자의 목에 누가 먼저 ‘혁신의 방울’을 달아서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2023-10-09

권력과 언론의 거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불편한 것이 정상이다. 언론의 사명은 권력을 감시·비판·견제하는 것이고,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달성에 유리한 언론환경을 조성하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과 언론의 이념적 성향이 다를 경우(진보정권과 보수언론, 보수정권과 진보언론)에는 양자의 갈등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다.권력과 언론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는 거리(不可近不可遠)’에 있어야 한다. 양자가 너무 가까이 밀착되면 진실에 대한 은폐·조작·왜곡이 일어나고, 너무 멀어져 적이 되면 권력은 언론을, 언론은 권력을 죽이려고 한다.때문에 권력과 언론은 ‘비판적 동반자’로서 적정거리를 두고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럼에도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언론을 장악하려고 한다. 권력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언론의 힘을 제어함으로써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던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와 통폐합, 언론인에 대한 감시와 해직 등이 민주화 이후에는 보다 은밀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비판언론들을 악마화하면서 ‘언론 길들이기’를 하고 있다.문재인 정권의 언론장악을 거세게 비판했던 윤석열 정권의 언론정책 역시 도긴개긴이다. 윤 대통령은 “언론과의 소통이 궁극적으로 국민과의 소통”이라고 하면서 “언론의 제언과 쓴 소리를 잘 경청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출근길 약식회견은 6개월 만에 중단되었고, ‘비속어 발언’을 처음 보도한 MBC는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됐으며, KBS사장과 이사장,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이사장,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해임하는 등 공정언론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비판언론 옥죄기가 계속되고 있다. 소통을 약속한 대통령이 불통의 길을 가고 있으니 우려가 크다.한편 언론의 행태도 문제다.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된 폴리널리스트(polinalist)들이 언론의 신뢰를 훼손하고 있다. 언론인들이 정·관계로 진출하여 권력의 관점에 서면 언론은 정치화된다. 바로 이것이 ‘언론과 권력의 이익 카르텔’이다. 권력 감시견(watch dog)인 언론이 경비견(guard dog) 또는 애완견(lap dog)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정치논리가 저널리즘 원칙을 지배하면 언론의 공정성은 무너진다.대통령을 향해 낯 뜨거운 ‘윤비어천가’를 부르는 언론이 있는가 하면, ‘독재자의 전형’이라고 조롱하는 언론도 있다. 언론은 진영을 넘어서 양면을 함께 볼 수 있는 ‘뫼비우스의 띠(M00F6bius strip)’가 되어야 한다.권력과 언론은 가야 할 길이 다르다. 언론의 역할을 권력이 대신할 수 없듯이 정치인의 책무를 언론인이 대신할 수 없다. 언론이 권력과 가까워지면 권력의 시녀가 되고 멀어지면 권력을 감시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권력도 언론의 감시를 받지 않으면 ‘리바이어던(Leviathan·괴물)’이 된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언론이 범하는 오류보다 더 위험하다.권력은 언론의 입을 잠시 막을 수는 있지만 영원히 죽일 수는 없다.

2023-09-25

국민을 배신한 ‘네 탓’ 정치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의 행사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기 때문이다.‘내 탓’은 없고 ‘네 탓’만 하는 정치는 책임회피이며,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권력을 감당할 인격도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의 유체이탈 행태가 가소롭다.‘2023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실패로 끝나자 그 책임을 둘러싼 네 탓 공방은 가관이었다. 전 정부와 현 정부,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모두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여당은 전 정부와 전북도에, 그리고 야당은 정부여당의 비판에 집중했다.심지어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격을 잃었고, 긍지를 잃었다.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 됐다”고 마치 남 얘기하듯 현 정부를 비판했다.국제적 망신을 사고서도 반성은커녕 ‘네 탓 타령’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의 행태가 한심하다.‘서울­양평고속도로 노선변경’ 의혹을 둘러싼 여야의 네 탓 공방은 결국 고속도로 추진을 중단시켰고,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에서는 행안부·경찰·소방·서울시·용산구청 등이 서로 네 탓을 하면서 책임회피에 급급했다.또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의 책임소재를 두고서도 충북도·청주시·흥덕구청·경찰·소방이 낯 뜨거운 네 탓 공방을 벌였다.이처럼 “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네 탓”이라는 책임회피 심리를 그린월드(A. Greenwald)는 ‘베네펙턴스(beneffectance) 현상’이라고 했다.성공에 대한 자신의 공로는 과대평가하는 반면, 실패에 대한 자기 책임은 과소평가하는 성향이다. 이는 자기기만의 ‘이기주의적 편향성’으로서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 찾아서 ‘핑계 만들기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핑계를 통한 자기합리화는 제3자의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책임회피 및 책임전가일 뿐이다.특히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의 ‘네 탓 타령’은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최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윤대통령은 야당을 향해 “1 더하기 1은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야당과 언론이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했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이 야당 탓, 언론 탓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하는 국민은 서글프다. 야당과 언론의 역할이 정부여당의 견제와 비판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인가?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마찬가지로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 역시 ‘네 탓’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잘했다면 왜 정권이 교체되었는가? 남 탓하며 책임을 회피해왔으니 내 탓이 무엇인지를 알 리가 없었다. 민주당은 남 탓하기에 앞서 현재 수사 받고 있는 각종 비리와 의혹에 대한 자기반성이 먼저다.소크라테스(Socrates)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집행권력과 입법권력을 나눠가진 여야 정치인들이 특히 명심해야 할 말이다. 정부든 국회든 권력을 가진 쪽에서 먼저 성찰하고 반성할 때 비로소 정치가 정상화될 수 있다. 이것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책임정치의 정신이요, 정치지도자가 가야할 길이다.

2023-09-11

무너진 교권, 위기의 교육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담하다. 2년차 신규교사가 학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사면초가(四面楚歌)의 환경 속에서 사명감 하나로 버티던 교사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가 하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교단을 떠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추모집회에서 동료교사들은 “교권침해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이 현실이 정상이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존경과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선생님들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학생의 인권이 중요한 것처럼 교권도 중요하다. 수업하는 교사 옆에서 학생이 드러누워 휴대폰을 사용해도 이를 제재할 권한이 없다니 기가 막힌다. 학생이 수업을 방해하고 성희롱·욕설을 하는가 하면,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니 교육 백년대계는 공염불이다.학부모들의 갑질과 악성 민원은 또 어떤가?자녀가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면서 담임교사에게 ‘황당한 갑질’을 한 학부모가 ‘교육부 사무관’이었다니 어이가 없다. 학부모들의 폭언·폭행·협박이 점입가경이며, 최근 5년간 교사를 대상으로 한 고소·고발이 무려 1188건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교사들은 ‘왜 아동학대를 무릅쓰고 생활지도를 해야 하느냐’, ‘참 교사는 단명 한다’는 등 자조적인 한탄이다. ‘폭탄 학부모’나 ‘폭탄 학생’을 ‘명퇴도우미’라고 부른다는 교단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정치철학자 아렌트(H. Arendt)는 “교육은 반드시 가르침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했다. 교육의 본질은 “아이들이 세계 속에서 진정한 한 인간 존재로 탄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교육은 죽었다. 공동체의식, 남에 대한 배려, 사회화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교육은 무의미하다. 교권이 무너졌으니 교육이 무너진 것이다.교권 회복을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 교권을 약화시키는 ‘학교폭력법’과 ‘아동학대법’은 개정되고, 유명무실한 교권보호위원회의 실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학생의 수업방해를 제재할 수 있는 교사의 권한과 수단이 있어야 하고, 교사의 정당한 학생지도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면책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나아가 교사가 송사를 당했을 때 신경 쓰지 않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도 절실하다.갑질 학부모들의 성찰과 반성도 중요하다. ‘생물학적 탄생은 부모의 몫’이지만 ‘사회적 재탄생은 교육의 몫’이다.잘못된 자식사랑은 자녀에게 독이 된다. 교권이 무너지면 그 피해가 자녀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걸핏하면 경찰·검찰·법원에 호소하는 ‘교육의 사법화’는 지양되어야 한다. 사법적 승패는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승자가 없는 싸움일 뿐이다.교육정상화는 교육주체인 교사·학생·학부모의 상호존중과 신뢰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각 주체들은 권리에 앞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풍토 속에서 참 교육은 불가능하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이해하고 소통해서 신뢰를 회복할 때 비로소 교육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

2023-08-28

존재적 삶을 위하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청춘예찬’에 환호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노년예찬’이 가슴에 와 닿는다. 청춘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E. Fromm)의 ‘소유냐 존재냐’와 ‘존재의 기술’은 머리와 가슴에서 분리됐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보니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고학생(苦學生)은 부·권력·명예의 소유가 곧 행복인줄 알았던 것이다.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존재론적 물음은 이념·성별·직업·빈부에 관계없이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이다. 특히 정치인·언론인·교수 등 사회지도층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더욱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인은 정치의 존재이유를 생각할 리가 없고, 확증편향에 갇힌 언론인은 언론의 존재이유를 말할 자격이 없으며, 권력과 야합한 어용교수는 지식인의 존재이유를 왜곡할 뿐이다. 소유가 목적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기 때문이다.물론 우리의 삶에서 재화는 생존에 필요하므로 소유 자체를 부정하거나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의 위험성이다. 돈·권력·명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소유에 집착할수록 더 큰 욕심을 내게 되고, 많이 소유할수록 더 크게 얽매이게 된다. 모든 소유는 오직 한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다.소유적 삶은 욕망·물질·외형을 우선하는 삶이며, 존재적 삶은 절제·정신·내면에 치중하는 삶이다. 소유적 삶은 항상 불안하지만 존재적 삶은 언제나 평온하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소유적 삶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까닭에 행복할 수 없다. 반면 존재적 삶은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과거나 미래의 허상을 쫓아가지 않는다. 행복이란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성현들이 역설한 행복한 삶은 존재적 삶에 있다. 사르트르(J. P. Sartre)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일갈했던 것처럼, 존재가 없는 소유란 있을 수 없다. 톨스토이(L. Tolstoy)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고 했고, 프롬은 “인간의 목표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텅 빈 충만’의 역설을 가르쳐주었다. ‘비워야 울림이 있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다.그럼에도 우리가 존재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성찰과 구도(求道)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존재적 삶을 위해서는 소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이 있어야 한다. 프롬이 ‘존재의 기술’에서 “자각·집중·명상을 통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했듯이, 존재적 삶은 끊임없는 성찰과 연마(練磨)의 결과물이다. ‘행복으로 가는 구도의 길’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2023-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