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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적대적 공생의 정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한국정치는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이라는 점에서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다.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될수록 양당 내부에서는 강경파가 득세함으로써 대결은 더욱 치열해진다. 겉으로는 서로의 증오가 폭발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이익을 지켜주는 ‘은폐된 공생관계’에 있다.‘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적대적 공생은 특수한 한국정치문화의 산물이다. 정치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정당체제는 보수와 진보의 전통을 잇는 양대 정당의 독과점 정치구조이다. 한 때 유력한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제3당이 부상한 경우도 있었지만, 양당 중심의 정치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키지는 못했다. 양당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안이 없다는 현실이 유권자들의 정치혐오를 증대시키고 있다.양당의 적대적 공생은 이분법적 정치문화로 인해 더욱 공고해졌다. 한국정치는 냉전과 6·25, 남·북한 간의 끝없는 대치 속에서 선악을 나누는 ‘정치적 흑백론’이 지배하게 되었다.‘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독선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치의식이 우리의 정치를 갈등과 대결로 내몰았다. 그 결과 각 진영에서는 극단적 성향의 정치팬덤(fandom)들이 득세하게 되었는데, 이는 동시에 두 진영 간 적대적 대결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적대적 공생관계는 여야 정당에게 정치적 이익을 제공해 준다. 야당은 국정을 책임진 여당의 무능과 실정을 공격할 수 있고, 여당은 그 책임을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야당 탓으로 돌릴 수 있다.야당은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사법 리스크로 흔들리고 있는 이재명 대표를 지키려하고, 여당은 야당 대표를 대장동사건의 몸통으로 각인시킴으로써 윤석열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과 부인 및 처가 리스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두 정당은 ‘전쟁’을 통해서 서로의 ‘생존’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적대적 공생의 최대 수혜자는 거대 양당의 정치인들이고, 최대 피해자는 국민이다. 적대적 공생의 정치는 증오를 먹고 살기 때문에 양당은 모든 역량과 자원을 소모적 정쟁에 투입한다. 이 때 수세에 몰린 야당은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권력투쟁의 전선을 확대해나가는 반면, 권력을 장악한 정부여당은 야당과의 협치를 거부하고 야당 인사들에 대한 비리 수사에 박차를 가한다. 결국 정치가 실종됨으로써 국민의 고통만 커지게 된다.이제 우리 정치도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적대적 공생’의 악순환을 끊고,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우호적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는 독과점 정치구조의 혁신을 모색해야하며, 단기적으로는 정치인과 국민의 정치의식개혁이 시급하다.양당의 주도세력이 교조주의자에서 합리주의자로 대체될 때 비로소 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 특히 정치팬덤들은 자신들의 과격한 행동 때문에 상대 진영 팬덤들의 입지가 더욱 강고해진다는 역설을 깨달아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의 이성 결핍은 민주정치의 반동화를 초래한다.

2022-12-12

권력과 책임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헌법에는 국가의 최고의무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하지만 이태원에서 10·29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국민은 “압사당할 것 같다”, “살려 달라”고 절규했는데, 국가는 응답이 없었다. 무책임한 국가를 믿었던 순진한 청춘들의 비극이었다.이번 참사와 관련하여 고위공직자들이 보여준 행태는 개탄스럽다.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행안부장관), “국정상황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대통령 비서실장), “핼러윈은 축제가 아니라 현상”(용산구청장)이라는 등 모두가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또한 참사가 일어났던 그 시간, 경찰청장과 용산경찰서장은 비상연락이 되지 않았고, 용산구청장은 참사 전후의 대책회의에 모두 불참했다. 게다가 책임을 추궁 받는 국감장에서 홍보수석과 시민사회수석은 “웃기고 있네”라고 필담을 하다가 들켜서 같은 당 주호영 위원장에 의해 퇴장 당했다. 이처럼 공직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이 총체적이니 문제가 심각하다.철학자 베른하르트 그림(Bernhard A. Grimm)은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민주정치는 책임정치다. 국민을 책임지지 못하는 정권은 교체된다. 책임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에 비례한다. 고위직일수록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다. 책임은 법적 책임은 물론, 정치적 책임까지 포함된다. 고위공직자는 형사책임이 없다고 해서 정치적 책임도 없는 것은 아니다. 10·29 참사와 관련하여 “장관과 경찰청장에 대한 경질요구는 후진적”이라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인식이야말로 후진적이다. 비서실장의 책임의식이 이러하니 공직사회의 책임윤리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인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충돌할 때 책임윤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정치는 결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하고, 선의(善意)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신념윤리가 강할수록 정치는 이념화되고 실용성은 떨어진다. 책임윤리는 없고 권력의지만 강한 정치인은 국민에게 재앙이다. 고위공직자는 법적 책임을 묻기 이전에 스스로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윤석열 대통령의 책임윤리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대통령이 법적 책임만 따진다면 분노한 민심을 더욱 격앙시킬 뿐이다. 법적 책임은 향후 법원이 판단할 것이니 대통령은 먼저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야당의 무책임한 정치공세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이 10·29 참사의 책임을 야당에 돌릴 수는 없다.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측근의 보호가 아니라 국민의 고통과 함께하는 것’이다.책임윤리가 실종된 고위공직자들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들에게 권력에 따른 올바른 책임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대통령의 책임이다.

2022-11-28

만추의 새별오름, 그 정치철학적 함의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오름의 왕국, 제주도에는 368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있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필자도 수없이 올랐던 ‘새별오름’에 매혹되어 올해도 어김없이 또다시 찾았다. 오름의 서쪽, 경사가 가파른 길로 정상에 올라서 360도 파노라마 풍경을 감상한 후, 경사가 완만한 동쪽으로 내려왔다.만추의 새별오름이 가르쳐주는 정치철학적 함의는 크다. 멀리서 보는 새별오름은 민둥산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억새꽃들이 춤추고 있다. 오름의 정면에서는 억새들만 보이지만, 오름의 후면에서는 작은 나무들과 넝쿨이 빽빽이 엉켜있는 숲을 볼 수 있다. 오름의 아래에서는 능선만 보이지만, 정상에 서면 동쪽의 한라산, 남쪽의 산방산, 그리고 서쪽 바다의 비양도까지 볼 수 있다.흔히 우리는 억새꽃을 은빛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언제나 맞는 말이 아니다. 억새의 색깔은 빛과 바람의 방향, 꽃이 핀 시기에 따라서 다르다. 빛의 순방향과 역방향에서 보는 억새의 색깔과 농도는 전혀 다르며, 저녁노을이 질 때는 황금색을 연출한다.가을에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억새가 겨울을 앞두고 다시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모습은 경이롭다. 특정 시점, 특정 장소에서 내가 보았던 억새의 색깔이 전부는 아니다.이처럼 우리는 종합적 팩트(fact)를 간과하고 단편적 인식의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자연현상에 대한 거시적 또는 미시적 인식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처럼, 정치적 신념에 따른 문제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른 선입견과 편견만 고집하기 때문이다.내가 알지 못한 사실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는데 보지 못했을 뿐’이다. ‘관점의 차이가 인식의 차이를 초래한다’는 자연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 비로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억새의 생존법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유연성’에 있다.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함으로써 부러지지 않는다. 유연성은 ‘채움보다 비움’에서 나온다. 억새가 비우지 않고 엽맥(葉脈)이 가득 차 있으면 강풍에 꺾이고 만다. 그럼에도 인간은 억새가 가르쳐주는 ‘비움의 철학’을 외면한다. 권력·돈·명예를 더 많이 가지려고 혈안이다.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얽매이므로 유연성을 상실한다. ‘텅 빈 충만’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회한다.‘유연성’은 상대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철학이고 ‘경직성’은 절대를 추구하는 독재주의 사고다. ‘민주정치는 인간의 정치’이고 ‘독재정치는 신의 정치’이다. 나의 판단만이 옳다고 우기는 정치인들은 신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치는 수많은 신들의 싸움판이 되어버렸다.내가 본 것, 내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주장은 오만이며 독선이다. 민주정치의 요체는 조화정치이며, 조화정치의 생명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유연성에 있다. 정치인들은 자연이 가르쳐주는 정치철학적 함의를 깨달아야 한다.

2022-11-14

메멘토 모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철학의 계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인생도 가을을 맞으면 생각이 깊어진다. 권력·재산·명예도 모두 한 때일 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우리의 삶도 끝없는 세월의 변화 속에 존재하는 찰나(刹那)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에 외면했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다.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라틴어 격언은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고대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고, 중세의 수도사들은 만날 때 마다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였다. 승리의 환희 속에서도 죽음을 기억하고, 수행의 성찰 속에서도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이처럼 우리는 왜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이다.하이데거(M. Heidegger)는 “죽음이 삶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죽음은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어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은 삶의 가장 절실한 친구이자 삶의 일부이다. 때문에 삶과 죽음은 ‘모순(contradiction)이 아니라 역설(paradox)’로 이해되어야 한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이 삶에 말하는 충고’이다. 죽음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삶의 본래성’을 회복함으로써 거짓된 삶으로부터 진정한 삶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메멘토 모리는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언제나 겸손하라고 가르친다. 절정의 순간을 맞이한 개선장군의 뒤에서 노예가 ‘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친 까닭은 무엇인가? 너도 언젠가 죽음을 맞을 것이니 승리에 우쭐대지 말라는 것이다.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그럼에도 정치권력·자본권력·언론권력 등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오만과 독선에 빠져있으니 메멘토 모리의 가르침을 잊은 것 같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그러니 모두 목에 힘을 빼고 겸손하라.메멘토 모리는 ‘삶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삶에 대한 몰입’을 증대시킨다. 죽음을 외면한 삶은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톨스토이(L. Tolstoy)는 “죽음을 대면하고 살아갈 때 삶의 성장과 초월이 일어난다”고 했다. 우리가 죽음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면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숙고하게 된다. 메멘토 모리가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되면 누구나 추구하는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고 싶은 것을 찾게 됨으로써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이 인생의 겨울도 피할 수 없다. 죽음을 기억하며 사느냐, 죽음을 망각하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달라진다.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며, 잘 산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죽음 앞에서도 후회하지 않는 삶의 철학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2022-10-31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2항).고 했으니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을 잡은 여당은 물론, 권력을 잡으려는 야당도 명심해야 한다. ‘군주민수(君舟民水)’이니 배(대통령)를 띄우는 것도 물(국민)이요, 그 배를 전복시키는 것도 물이다.윤석열 정부에 대한 여론은 어떤가? 새 정부가 출범한지 5개월에 불과한데 민심은 싸늘하다. 기대가 컸으니 실망도 큰 것일까? 최근 여론조사(한국갤럽, 10월 2주차)에 의하면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63%)가 긍정평가(28%)의 2배를 넘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선거에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의 평가가 긍정 24%, 부정 66%이고, 정권의 핵심지지기반인 TK지역도 긍정 41%, 부정 52%로서 상당히 심각하다.어떻게 해야 민심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이미 여론조사결과에 나와 있다. 부정평가의 구체적 요인은 경험·자질부족·무능(15%), 외교(13%), 전반적 잘못(10%), 민생/발언부주의/독단적(각 6%), 신뢰부족/인사(각 5%), 소통미흡(4%) 등이다.영국의 이코노미스트(Econo mist)가 “한국의 대통령은 기본을 배워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 국민들도 정치초보인 대통령의 경험·자질부족·무능을 똑같이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이성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편견을 버리고 국민의 관점에서 고언(苦言)을 경청할 때 비로소 초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대통령의 외교 설화(舌禍), 즉 비속어 ‘이××’에 대해서는 국민 다수가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듯이, 대통령의 말은 품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고, 여당은 MBC를 고발하여 프레임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정치미숙이었다. 국내언론은 물론이고, CNN·BBC·WP 등 해외언론도 이 사태를 언론탄압으로 규정했다.이들은 정권에 비판적인 MBC를 고발한 것은 대통령이 누누이 강조했던 ‘자유’를 스스로 침해함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비판했다.‘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윤 대통령은 “당무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고서는 권성동에게 ‘체리 따봉’ 문자를 보냈다. 대통령이 “감사원은 독립기관”이라고 했는데, 감사원 사무총장은 “오늘 또 제대로 해명자료가 나갈 겁니다”라고 대통령실에 문자로 보고했다. 이처럼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으니 누가 대통령의 말을 믿겠는가?국민은 ‘이슈’ 자체보다 이슈를 다루는 대통령의 ‘태도’가 더욱 문제라고 보고 있다. 정치는 ‘사실의 게임’이 아니라 ‘인식의 게임’이다. 권력의 원천인 국민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아닌 것이다.대통령의 균형 있는 문제인식과 겸손한 정치행태가 요구되는 이유다. 여론을 무시하고 국민과 싸우려는 대통령만큼 어리석은 권력은 없다.

2022-10-17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벗어나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21세기의 문명국가,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부족전쟁’이 한창이다. 부족전쟁을 이끌고 있는 각 진영의 지도자는 물론, 그 진영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부족 구성원들 간의 대립도 심각하다. 전선(戰線)은 내정과 외교를 가리지 않는다. 정부여당은 전 정권에 대한 ‘신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그리고 야당은 현 정권의 ‘편파적 수사’를 이유로 부족의 사활을 걸고 전쟁 중이다.예일대 에이미 추아(Amy Chua) 교수는 ‘정치적 부족주의(political tribalism)’에서 “부족본능은 소속본능인 동시에 배제본능”으로서 “부족주의자들이 위기감을 느끼게 되면 똘똘 뭉치고 더욱 폐쇄적·방어적·징벌적이 되며 ‘우리 대 저들’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패거리 부족주의, 그리고 그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서 내로남불·유체이탈·자가당착 등 온갖 꼴불견 행태를 보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부족주의에 노예가 된 한국정치의 비극이다.부족주의 정치는 ‘좀비정치’다. 좀비정치는 ‘우리는 선’, ‘저들은 악’으로 규정하고,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해서 상대를 공격하고 물어뜯는 정치다. 분노와 증오의 부족주의 정치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지배하고 있으며, 부족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정치행태는 폭력적이고 적대적이다. 그들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생각한다. 팬덤(fandom)정치가 위험한 이유는 편향된 인식과 과격한 행태가 결국 ‘좀비정치화’되기 때문이다.정치적 부족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추아가 지적했듯이 “부족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집단의 목표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서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부족은 ‘상대를 악마화’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이익공동체’이며, 역지사지(易地思之) 능력을 상실하여 민주정치가 요구하는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한다. 특히 대통령이 정치적 부족주의에 매몰되면 ‘국민의 리더(leader)’가 아니라 ‘진영의 보스(boss)’로 전락함으로써 나라는 갈등과 분열로 망국의 길을 가게 된다.부족주의 좀비정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대화에 필요한 ‘균형의 힘’을 키워야 한다. 모든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도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완벽한 신의 흉내를 내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어떤 정치권력이나 정치적 부족도 예외일 수 없다.따라서 정치적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독선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로 ‘보수는 진보의 충고’를, 그리고 ‘진보는 보수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 특히 부족 내부의 문제에 대한 자기성찰, 즉 ‘보수는 보수를 비판’하고 ‘진보는 진보를 비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때 지식인과 언론의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역할이 중요함은 물론, 국민들도 늘 깨어있어야 한다.

2022-10-03

대학, 교수 그리고 권력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대학은 ‘진리탐구의 전당’이고, 교수는 ‘가치’와 ‘당위’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대학과 교수들이 권력의 눈치를 봐서야 되겠는가? 김건희 여사의 학위논문 표절과 관련하여 해당 대학과 교수들이 보여준 정치적 행태는 매우 실망스럽다.국민대는 2008년 김건희 여사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이미 2007년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타인의 아이디어나 연구내용 등을 인용 없이 도용하는 행위를 표절”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대는 최근 표절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에서 “베꼈다 해도 연구내용의 핵심 부분이 아니면 괜찮다”는 매우 정치적인 판정을 함으로써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졌다.이에 국민대 교수회는 자체 재검증을 위해 전체교수투표를 추진했으나 대학본부와 교무위원들의 개입으로 찬성 38.5%, 반대 61.5%로 부결되었다. 이는 대학과 교수들이 ‘지성적 판단’을 하지 않고 ‘지능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인의 침묵이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권력 앞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한 대학과 교수들이 내린 정치적 판단은 ‘역시 Yuji대’라는 오명(汚名)을 남겼다.논문 표절의 피해자인 숙명여대 구연상 교수는 “출처를 숨기는 표절은 정신적 도둑질”이라고 하면서 “국민대가 도둑질을 방치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자신의 논문을 “인용부호, 각주, 참고문헌 없이 몰래 따왔기 때문에 100% 표절이 맞다”고 반박하면서 “어떻게 그런 논문이 통과되었는지 불가사의하다”고 비판했다.나아가 전국 14개 교수·학술단체는 ‘김건희 여사 논문표절 검증을 위한 범학계 국민검증단’을 구성하여 1개월여 조사 끝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해당 박사학위논문은 구연상 교수의 논문 외에도 9명의 논문을 표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피캠퍼스, 디지털타임스, 점집 홈페이지, 사주팔자 블로그 등에서 복사 또는 짜깁기했음이 밝혀졌다. 인용 출처는 대부분 표시되지 않았고, 정상적으로 표기된 것은 187쪽 가운데 8쪽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이러한 엉터리 논문을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했으니 어이가 없다. 물론 교육부의 행·재정적 지원과 감독을 받아야 하는 국민대로서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곤혹스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와 진리의 전당인 대학이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대학의 정의가 무너지면 나라의 정의도 무너진다. 최고의 지성인 교수들이 불의와 야합한다면 나라의 정의는 누가 지키는가?‘학생과 동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대학’이 있고, ‘교수를 부끄럽게 만드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교수가 ‘올바른 교수의 길’을 가려면 ‘권력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권력의 주구(走狗)노릇을 하는 정치교수들은 교수라고 할 수 없다. 표절 당사자인 김건희 여사의 사죄와 학위반납은 물론, 논문의 지도교수와 심사교수들도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해야 한다. 대학은 대학답고 교수는 교수다워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2022-09-19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보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권력’인가 ‘국민’인가.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시작도 방향도 목표도 국민”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집권당에서 계속되고 있는 권력싸움은 “시작도 방향도 목표도 권력”때문이 아닌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표리부동의 전형이다.‘백언불여일행(百言不如一行)’이라고 했다.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 대통령의 말은 ‘정치적 수사(修辭)’일 뿐이다. 대통령은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공직자’이다. 대통령의 ‘국민만 보고 가는 정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국민은 정부여당에 묻고 있다. 대통령이 권성동에게 보낸 ‘체리따봉’ 문자가 국민을 위한 것인가? 법원이 지적했듯이 이준석을 쫓아내기 위해서 ‘억지로 비상상황을 만든 것’도 국민을 위한 것인가?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꼼수로 갈등을 심화시킨 것이 국민을 위한 것인가? 당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내분의 빌미를 제공한 대통령은 왜 ‘강 건너 불구경’인가? 이 모든 정치행태에는 ‘국민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의 논리’가 지배되고 있다.윤석열 정부는 지지기반이 약한 연합정권이다. 2030과 6070, 윤석열과 안철수, 그리고 윤석열과 이준석의 연합으로 간신히 0.73% 승리했다. 하지만 권력투쟁으로 연합정권은 붕괴위기다. 정권의 표리부동을 경멸하는 중도는 이미 떠났고 2030은 분열되고 있다. 20년 장기집권을 장담했던 문재인정권이 민심을 잃고 5년 만에 무너진 사실을 벌써 잊은 것 같다.무엇보다 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권력싸움을 멈추라. 정치력이 없어서 ‘정치의 사법화’를 초래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법원이 가처분 인용의 근거로 지적한 ‘정당민주주의 침해’, ‘가짜 비상상황 조작’ 등은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이 거짓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권력밖에 모르는 ‘꼰대’와 ‘싸가지’의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국민은 ‘대결이 아니라 대화’의 정치를 바란다. 당내 갈등도 수습하지 못하면서 여야협치와 국민통합을 말하고 있으니 ‘소가 웃을 일’이다.권력의 그 음흉한 속내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국민은 이미 ‘권력의 잔머리’를 꿰뚫고 있다. 오죽하면 당내에서조차 “새 비대위는 불가능하고 옳지도 않다”(안철수), “억지와 집착에 빠졌다”(홍준표)는 비판이 나오고, 서병수 의원이 당헌·당규개정에 반대하며 전국위원회 의장직을 사퇴했겠는가? 정기국회는 시작되었는데 민생을 책임진 집권당은 권력싸움으로 날을 새고 있다. 윤 대통령의 당선 지지율 48.5%가 9월 2일 현재 27%(한국갤럽)로 추락했다. ‘국민’이 아니라 ‘권력’을 선택한 ‘배신의 정치’ 때문이다.‘문명의 정치는 국민’을 보지만 ‘야만의 정치는 권력’을 본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정치의 야만성’은 여전하다. 권력남용과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야만의 한국정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022-09-05

검사 윤석열 vs 대통령 윤석열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검사와 대통령은 그 역할과 책임이 다르다. 검사에게는 법적 시비(是非)가 중요하지만, 대통령의 관심사는 국익과 민생이다. 검사는 법치를, 대통령은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검사가 범인을 수사하듯 대통령이 이분법적 흑백론으로 국정을 운영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윤 대통령의 검사경력은 27년이지만 정치경력은 9개월에 불과한 ‘초보’다. 여권 주변에서는 “대통령이 여전히 검찰총장 스타일에서 못 벗어난 것 같다”고 한다. 지지율 급락을 묻는 기자에게 “그 원인을 알면 어느 정부나 잘 해결했겠죠”라고 했다. 아무리 정치초보라도 이렇게 민심에 둔감할 수 있는가. 게다가 초보가 겁도 없이 과속까지 하니 국민이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다.대통령이 원인을 모른다고 하니 분명히 알려드린다. 국민이 화난 가장 큰 이유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인사다. 대통령이 “전 정권에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옹호했던 교육부장관은 여론의 뭇매로 취임 35일 만에 물러났다. 이미 장관 및 장관(급)후보 6명이 낙마했고, ‘윤핵관’과 김건희 여사가 관여했다는 인사 잡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이 갈등의 중심에 있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선거 3연승을 이끈 당대표를 토사구팽(兎死狗烹)한 것은 ‘뒤끝 작렬’이었다. 대통령이 당대표를 “이×× 저××”, “내부 총질하던 대표”라고 했으니 당의 화합이 되겠는가? 또한 당대표가 대통령을 향해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 직격하는 모습은 막장드라마였다. 이들의 권력싸움은 국정을 맡긴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최근 여론조사(KBS/한국리서치, 8월 15일)는 지지율 하락의 가장 큰 책임이 대통령(46.2%)에게 있으며, 윤핵관(19.7%), 야당(10.2%), 참모진(9.1%), 이준석(7.9%)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고, 국민이 듣고 싶은 인사쇄신, 당의 내분에 대한 답변은 모두 회피했다. 이것이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고 한 대통령의 태도인가. 공감능력이 없는 대통령의 말은 공허할 뿐이다. 국민은 벌써 대통령이 말한 ‘공정과 상식’의 자기모순을 지적하고 있다.따라서 대통령부터 바뀌어야 한다. 오랫동안 습관화된 검찰문화에서 벗어나야 소통할 수 있다. 강골검사의 ‘외골수 기질’은 대화와 타협의 민주정치에 장애요인이다. 정치초보의 독선과 오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하며, 언론과 야당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윤핵관을 멀리하고, 정무감각 없는 참모들의 전면개편도 시급하다.정치지도자의 미덕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다. ‘권력을 등에 업은 검사’라는 세평은 ‘정치를 모르는 대통령’이라는 말과 같다. 대통령은 비판을 포용할 수 있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정치는 독재다. ‘다름’을 ‘조정’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으로 인식하면 민주정치를 할 수 없다. 대통령 윤석열은 검사가 아니라 대통령다워야 한다.

2022-08-22

제주 돌담이 대통령에게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철학자 루소(J. J. Rousseau)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노자(老子)는 자연에 존재하는 소통의 통로인 도(道)를 인식하고, 그 도를 좇아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최선”이라고 했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자연의 가르침에서 지혜를 얻으라고 했다. 자연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기 때문이다.제주 돌담은 우리가 ‘자연의 철학’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유산이다. 제주 돌담은 밭담·산담·집담·원담·올레담 등 그 장소와 기능에 따라 다양하다. 미학적인 측면에서 제주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도 자연친화적인 돌담이다. 게다가 제주 돌담은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에게도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제주 돌담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통’이다. 제주 돌담은 바람을 막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구멍이 숭숭 뚫려져 있다. 잘 쌓은 돌담은 바람에 흔들리기는 하지만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자연과 과학의 절묘한 만남이다.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떤가?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한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8월 5일 현재 24%(한국갤럽)로 추락했다. 대통령의 메시지와 국민의 인식이 너무나 동떨어진 ‘소통의 위기’이다. ‘수직적 검찰문화’에 익숙한 대통령의 경직된 사고는 ‘수평적 소통이 생명인 정치’를 어렵게 만든다. 검사에게는 ‘법치’가 중요하지만 대통령은 ‘정치’를 해야 한다. 장관 인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자들에게 “전 정권에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봤느냐?”고 받아친 대통령의 오만은 불통의 증표다. 정치에 초보일수록 비판과 고언을 겸허히 수용해야 소통할 수 있다. 제주의 거센 바람이 돌담 구멍을 지나가지 못하면 돌담이 무너지듯이,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는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나아가 제주 돌담은 정치인에게 ‘공존과 상생’의 중요성도 가르쳐준다. 돌담을 무너지지 않게 쌓으려면 크기나 모양이 각기 다른 돌의 면과 면을 고려하여 잘 꿰맞추어야 한다. 서로 어깨를 맞댄 돌들은 ‘공존의 돌담’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상생’을 가르쳐주고 있다.그럼에도 여당과 야당은 걸핏하면 상대를 공존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처럼 ‘악마화(demonize)’한다. 집행 권력과 입법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서로 힘자랑하는 ‘야만의 정치’는 공멸의 길이다. 더욱 기막히는 것은 국정과 민생에 전념해야 할 대통령이 이준석을 향해 “내부 총질하던 당대표”라고 직격하자 소속의원들은 친윤과 비윤으로 갈라져 당권싸움으로 날을 새고 있다. 당내의 이견과 갈등을 통합하여 공존과 상생의 길로 이끌어야 할 대통령이 오히려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정권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군주민수(君舟民水)’라고 했던가. 물(국민)은 배(대통령)를 띄울 수 있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이제라도 제주 돌담이 가르쳐주는 ‘소통과 상생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

2022-08-08

민주적 통제인가, 중립성 훼손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권력의 비대화는 부패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공권력의 두 축인 검찰과 경찰도 마찬가지다.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수사 주체가 바뀌어도 민주적 통제는 여전히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역설했고, 윤석열 정부는 경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주장한다. 하지만 두 정부는 모두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할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에는 관심이 없다.정권교체로 여야의 공수(攻守)가 바뀌었다. 정부여당은 민주적 통제를 명분으로 경찰을 장악하려는 반면, 야당은 수사기관의 중립성을 보장함으로써 정부여당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한다. 집행 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은 입법이 필요 없는 시행령으로 경찰을 통제하려고 하는 반면, 입법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야당은 법적 제도화를 통해서라도 경찰의 중립성을 제고시키려 한다.‘민주적 통제’와 ‘중립성 훼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권력기관은 통제받지 않으면 부패되지만, 정치권력에 의한 통제가 강화될수록 중립성은 더욱 훼손된다. 권력의 속성상 모든 권력은 통제받아야 한다는 ‘당위론’과 권력에 의한 통제는 사정기관을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킬 뿐이라는 ‘경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권력정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엄존하는 딜레마이다.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권력이 비대해진 경찰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문제는 통제의 구체적 방법론이다. 현재 추진 중에 있는 행정안전부 경찰국 신설은 경찰의 중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조직법과도 충돌한다는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행안부장관이 인사와 감찰을 무기로 통제할 경우 경찰은 무력화(無力化) 될 수밖에 없다. 수사기관의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민주적 통제는 권력의 예속화에 불과하다.윤 대통령은 대선 때 “검찰의 중립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법무부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 폐지를 공약했다. 하지만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이 없는 상태에서 ‘윤석열 라인’을 중용하여 대통령-장관-검찰청으로 이어지는 직할체제를 구축했다. 이러한 코드인사가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한다는 말인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수사기관의 생명은 정치적 중립과 공정성이다. 권력의 시녀가 된 검찰에게 공정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민주적 통제의 이름으로 공권력을 예속화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정치는 ‘민주를 빙자한 독재’이며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모든 권력기관은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지만, 공정성이 생명인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정권이 검찰과 경찰을 허수아비로 만들면 당장은 통치하기 쉬울지는 몰라도 결국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다.민주적 통제와 정치적 중립이 충돌할 때는 시비를 가려줄 심판관이 필요하며, 그 심판은 바로 대통령과 국회에 권력을 위임한 국민이다. 심판은 공정해야하기 때문에 이념과 진영에 갇혀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의 권모술수와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않는 국민의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고 있다.

2022-07-25

나 하나 꽃 피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우리는 거대하고 조직화된 정치문화에 압도되어 흔히 ‘나’의 능력과 존재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무력증(無力症)에 걸려 신민화(臣民化)된 시민은 주권자의 힘과 그 역할을 평가절하 한다. 권력의 오만과 독선을 내가 막을 수는 없으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적 팬덤(fandom)들의 광신적 행태를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한다.과연 그럴까? 시인 조동화는 “나 하나 꽃피어/풀밭이 달라지겠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피고/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시인은 ‘나 하나의 힘’이 매우 중요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비록 나의 희망이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것이 너의 희망과 만나서 마침내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될 때 풀밭은 꽃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나 하나’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나 하나’가 선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자·정치가·과학자들은 모두가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지고 외롭고 힘든 길은 걸어온 선구자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독배(毒杯)를 마셨고, 링컨은 남북전쟁을 치르면서까지 국론분열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냈으며, 코페르니쿠스는 잘못된 우주관과 세계관을 완전히 변혁시켰다. 오늘의 이성사회(理性社會)는 이 같은 선각자들의 희생과 노력의 대가로 피어난 꽃이다.‘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영감을 얻어 고향 제주에서 ‘치유의 길’을 열기 시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올레길이 완성되자 도보여행자들은 열광했다. 전국의 자치단체들이 제주올레를 벤치마킹하여 둘레길·해파랑길·누리길·갈맷길·바래길·생태문화길 등 600여개의 걷기여행길을 조성했고, 제주올레는 일본과 몽골에 수출까지 하였다. 한 사람의 새로운 발상과 노력이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에게도 얼마나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반면에 많은 사람들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는 ‘도덕적 해이’는 개인의 능력을 떨어뜨리는 이른바 ‘링겔만 효과(Ringelmann effect)’를 초래한다. 공동체에 무임승차하려는 이기주의자들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은 소홀히 하고 자유와 권리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 팬데믹(pandemic)상황에서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는 이기적 행동이 집단감염의 확산을 초래했음을 분명히 경험했다.이처럼 ‘나 하나’의 존재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작은 하나’에서부터 비롯된다. 그 ‘작은 하나’는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갈파한 석가처럼 위대한 선구자가 될 수 있다. 풀밭을 꽃밭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도 한 사람의 선구적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하나가 ‘바로 나’라면 더욱 기쁘지 않겠는가?

2022-07-11

인사(人事)가 만사(萬事)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윤석열 대통령은 기자들이 검찰 편중 인사를 지적하자 “전 정권은 민변 출신들로 아주 도배를 했지 않느냐”고 받아쳤다. 민변 도배로 실패한 전 정권처럼 검찰 도배로 현 정권도 같은 길을 가려는 것인가?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Michelle Obama)가 “저들이 저급하게 나가더라도 우리는 품격을 지키자”고 했던 것처럼, 새 정부는 지난 정부의 잘못을 핑계 삼지 말고 정도정치(正道政治)를 해야 한다.“인사가 만사”라는 금언은 대통령이 명심해야 할 통치의 요체다. 대통령의 성공 여부는 ‘널리 인재를 구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데 달려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정과 상식을 역설한 윤 대통령은 더욱 더 합리적 인사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대통령이 보여준 인사는 ‘아·가·패’(아는 사람·가까운 사람·패밀리)코드라고 비판받고 있으니 연고정치(緣故政治)에 대한 우려가 크다.대통령실의 인사기획관을 비롯하여 인사·공직기강·법률·총무비서관 및 부속실장, 그리고 내각의 법무부장관과 차관, 법제처장, 심지어 국무총리 비서실장, 국정원 기조실장, 금융감독원장도 모두 검찰 출신이다. 게다가 현 정부의 인사시스템은 대통령실 인사기획관과 인사비서관이 특정 인사를 추천하고, 법무장관이 지휘하는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해당 인사를 검증하는 구조다. ‘검사동일체’원칙에 익숙한 예스맨(yes man)들의 검찰 연고주의가 심히 우려되는 까닭이다. 게다가 안보실장은 초등동기, 주중대사는 고교동기, 행안부장관과 경호처장은 고교동문, 서울대동문 장관들의 절반은 법대동문이라는 학연(學緣)이 깊다.이러한 정실인사는 실정(失政)의 원천이다. 대통령의 성공은 용인(用人)에 달려있으며, 용인의 기본은 개방적 인사인데 연고주의는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육부 및 복지부장관 후보자가 이미 낙마했고 새로 임명된 두 후보자 역시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다. 동종교배(同種交配)적 인사는 ‘집단사고의 오류’를 범하여 국정실패로 이어진다.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검찰문화에 익숙한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직언하지 못할 때 권력은 남용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진영논리에 빠진 폐쇄적 인사는 새 정부의 시대적 소명인 협치와 통합에 결정적 장애요인이다. 대통령의 연고인사가 우선은 편하고 쉬울지는 몰라도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조국에 대한 잘못된 인사가 정권교체의 단초를 제공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새 정부의 성공 여부도 대통령의 인사에 달려 있다. 인사에 성공하려면 열린 마음(open mind)으로 이념·지역·성별·연령·학력에 관계없이 널리 인재를 구해야 한다. 반경(反經)의 저자 조유(趙8564)는 “제왕이 될 자는 스승 같은 사람을 신하로 삼고, 폭군이 될 자는 굽신 거릴 자를 신하로 삼는다.”고 했으며, 유비는 삼고초려(三顧草廬)끝에 천재전략가 제갈량(諸葛亮)을 얻었다.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어떤 인재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2022-06-27

‘극단’의 시대, ‘균형’의 가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나라가 거꾸로 가고 있다. 디지털혁명의 시대정신은 균형과 통합인데, 우리사회는 오히려 극단과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좌우의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팬덤(fandom)정치 때문에 중도의 합리주의자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흑백의 극단론자들이 판치는 나라에서 회색은 기회주의자로 매도되고 있을 뿐이다.누가 천사이고 누가 악마인가? 붉은색과 푸른색의 안경을 쓴 두 사람이 자신이 본 세상의 색깔이 옳다고 싸우고 있다. 서로 다르게 정의(定義)한 선택적 정의(正義)는 객관성이 없다. 독선에 빠진 보수진영이 대선·지선·총선 등 3연패(連敗) 후에 비로소 혁신을 모색했던 것처럼, 진보진영 역시 대선에 이어서 지선에서도 참패했으니 이제 극단과 오만의 정치를 청산할지 두고 볼 일이다.인간은 신이 아니다. 생명과 능력의 유한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의 흉내’를 내서는 안 된다. 신격화된 인간이 지배하는 독제체제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너무나 자명하다.파스칼(B. Pascal)이 갈파했듯이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야수도 아닌 중간적 존재”다. ‘인간의 본질이 회색’인데, 나는 백색이고 당신은 흑색이라고 서로를 비판, 공격하고 있으니 참으로 무지하고 오만하다. 확증편향과 선택적 정의, 내로남불과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는 이성적 시민들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이 극단의 시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순이 공존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균형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다. 유교에서의 ‘중용(中庸)’, 불교에서의 ‘중도(中道)’,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중용’이 모두 균형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고, 불교의 근본입장인 중도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도리”를 말한다. 이처럼 동서양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들은 하나같이 삶의 중심과 균형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균형’이란 이성의 힘으로 충동과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의지의 결과물이다. ‘균형의 힘’을 역설하는 중용철학은 어느 한쪽을 개조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조화를 모색하는데 무게를 둔다. 중용에서 말하는 ‘중(中)’은 ‘단순한 가운데’가 아니라 ‘균형·중심·불편부당’을 의미한다.정치적 인간의 공동체에서 상이한 입장과 상충하는 이익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균형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가 들고 있는 저울은 ‘공정성’과 ‘공평성’을 상징한다. 저울이 무게중심을 잃으면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 기울어진 저울처럼 균형감각을 상실한 극단주의자는 사이비종교의 광신도(狂信徒)처럼 비이성적이고 반사회적이다.흑백·독선·아집의 언어들이 분열·대립·투쟁의 일상화로 이어져 지금 나라는 벼랑 끝에 서 있다. 이 야만적인 극단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균형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2022-06-13

‘통합의 정치’를 위하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윤석열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는 ‘통합의 정치’다. 나라는 빈부·이념·정당·학력·성별·세대 등 다차원적 갈등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대선 결과 0.73% 차이로 갈라진 승패는 분열된 국민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분열의 극복을 위해서는 국가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이 ‘통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당선 직후 열린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박빙의 승부를 의식한 듯 “국민을 편 가르지 말고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간절한 호소”라고 하면서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이 따로 없을 것”이라고 통합을 약속했다.하지만 통합의 정치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가 통합을 약속했지만 하나같이 행동이 수반되지 못했다. 그들의 통합 약속은 취임사를 장식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고, 대선·총선·지선 등 선거 때마다 편 가르기와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켰다. 통합의 정치를 약속한 대통령이 실제로는 분열의 정치를 한 것이다.통합의 정치는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균형감각’과 ‘소통능력’이다. ‘대통령의 최대의 적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자기 확신’은 독선과 오만을 초래하며, 확증편향의 덫에 걸려 비판과 고언(苦言)을 수용하지 못한다. 대통령에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참모가 없으면 균형감각을 상실한다. 획일(劃一)은 통합이 아니라 독재다. 검찰총수였던 윤 대통령은 검찰 출신의 ‘예스맨(yes man)’들에 둘러싸여 ‘집단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통합의 정치를 위해서는 소통이 중요하고, 소통을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대통령이 ‘집행권력’으로 야당을 압박하면 민주당은 ‘의회권력’으로 맞설 것이다. 대통령이 지지층을 의식하여 진영정치에 끌려 다니면 협치는 불가능하다. 여당과 야당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다른 점의 차이를 좁히려고 소통할 때 비로소 통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통합의 정치는 완승 또는 완패의 정치가 아니다. 권력투쟁의 정치현실에서 타협 없이는 협치도 통합도 없다.통합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통합 실패는 모두가 정치적 수사에 그쳤기 때문이다. 협치의 책임은 여야 모두에게 있지만, 집권여당이 먼저 행동으로 솔선수범해야 한다. 올해 5·18행사에 대통령과 여당의원들이 모두 참석한 것은 통합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처럼 통합은 정치적 강자가 약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행동에 나설 때 시작된다.통합의 정치는 이념과 정당, 지역과 세대의 차이를 모두 뛰어 넘는 ‘포용의 정치’다. 내편만 보는 진영정치와 팬덤정치는 ‘분열의 정치’다. 통합과 분열,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인식과 정치행태에 달려 있다. 대통령의 일상(日常)이 소통과 협치로 통합을 진전시키는 ‘고뇌의 날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2-05-30

북핵 고도화와 한미정상회담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윤석열 정부의 출범 직후에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의제는 양국의 공동관심사인 북한 핵과 미사일, 한미동맹과 대북공조, 경제안보와 지역적·국제적 현안 등 이른바 ‘포괄적 전략동맹’의 강화방안이다.한미동맹의 총론과는 달리 각론으로 들어가면 양국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에 대해 ‘미국은 전략핵과 ICBM’에 신경을 쓰지만, ‘한국은 전술핵과 단거리미사일’ 위협을 더욱 우려한다. 또한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쿼드(Quad) 참여를 기대하고 있지만, 중국이 최대 교역국인 한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같은 이해관계 차이를 조율하고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이번 정상회담의 과제다.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두어야 할 의제는 북한의 전술핵 위협이다. 김정은은 이미 “핵기술을 고도화하여 소형·경량화, 전술무기화 할 것”을 여러 차례 지시했다. 나아가 지난 4월 25일 인민군 창설 90주년 열병식에서는 “핵 무력은 전쟁방지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근본이익이 침탈되는 등 비군사적 상황에서도 선제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공언했다. 핵이 방어용이라는 기존 논리를 뒤집고 선제공격용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이제 우리의 관심은 ‘북한의 비핵화라는 비현실적인 대북정책’이 아니라 ‘북핵을 억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안보전략’이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5년 동안 벌인 ‘평화 쇼’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시켰을 뿐이다. 그 결과 지금 윤석열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균열되고 약화된 한미동맹을 다시 복원함으로써 북핵 위협에 대한 확장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다.특히 이번 회담은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의 신뢰도’를 제고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전술핵은 전략핵과는 달리 실전에서 사용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양상을 일거에 바꾸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이다. 단거리미사일이나 방사포에 탑재된 전술핵은 포착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술핵을 통한 전자기파(EMP)공격’은 우리의 최첨단 전자무기들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따라서 미국의 ‘핵우산 신뢰도’를 제고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들이 향후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의 재가동과 함께 논의될 수 있도록 그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절대무기인 핵’에는 핵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이제 우리는 북한의 핵이 공갈협박수단 또는 협상용에 불과하다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김정은은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술핵의 사용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NATO의 직접적 참전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커다란 시사점을 얻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핵을 가진 러시아에 유린당하고 있는 이 참담한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2022-05-16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을 위하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윤석열 당선인의 아이콘(icon), ‘공정’과 ‘상식’이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인사청문회와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박탈)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당선인의 태도는 실망스럽다. 새 정부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정과 상식이 벌써부터 흔들리고 있으니 우려가 크다.공정을 역설했던 당선인이 정호영 보건복지부장관 후보자의 ‘아빠찬스’ 의혹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 정 후보 관련 의혹들은 조국 전 장관 자녀의 특혜 입학과 닮은꼴이다. 2030세대는 물론이고 보수언론들까지 많은 의혹들을 지적, 낙마의 불가피성을 지적했음에도 청문회를 지켜보자고 했다. 청문회는 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법의 역할과 정치의 역할은 다르다. 대통령이 된 ‘정치인 윤석열’은 ‘검사 윤석열’과는 달라야 한다.당선인은 선거에서 자신을 “조국의 위선을 무너뜨린 공정의 상징”이라고 하면서 문재인 정부와는 달리 “내로남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공정이라는 잣대는 여당과 야당, 조국과 정호영에게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고무줄’이 아니다. ‘특권에 대한 이중 잣대’가 바로 내로남불이다. 정 후보자를 두고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당선인의 태도에 대해 벌써 조국 전 장관은 “윤석열의 선택적 정의”라고 비판하고 있지 않는가?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공동체가 되어버린 어용교수는 공정할 수가 없다. 자녀에게 ‘아빠찬스’를 제공한 장관이 업무에는 공정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겠는가? 최근 당선인의 직무수행을 평가한 여론조사는 부정(45%)이 긍정(42%)보다 높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이뿐만 아니라 ‘검수완박’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당선인의 태도 역시 적절하지 못했다. 그는 “검찰 수사권 폐지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는 법치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하면서 검찰총장직을 던지고 대선에 출마해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그런데 이른바 ‘윤핵관’이라는 권성동 원내대표가 법안의 핵심내용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국회의장 중재안에 전격 합의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국민들이 ‘신·구 권력의 정치적 야합’이라고 거세게 반발했고, 심지어 안철수 인수위원장까지 “이해 상충이며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비판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당선인은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고 했다. 최측근이 합의한 내용을 몰랐다는 말인가? 더욱이 원내대표가 합의하고 의총에서 추인까지 받았는데, 이를 3일 만에 파기한 것을 당선인이 역설해 온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인가?이처럼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은 ‘내로남불’과 ‘합의번복’으로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으면서 표류하고 있다. 공정과 상식의 잣대가 흔들리면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된다. 입법 권력의 독재도 문제지만 집행 권력의 ‘선택적 공정’ 역시 문제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요구되는 협치는 집권당이 먼저 공정과 상식을 지킬 때 가능하다. 당선인에게 기대하는 ‘춘풍추상(春風秋霜)’이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2022-05-02

윤석열 당선인에게 드리는 고언(苦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둘러싼 신(新)·구(舊)권력의 충돌은 윤석열 당선인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협치를 통해서 통합에 노력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벌써 잊어버렸는지 ‘떠오르는 별’이 ‘지는 별’과 힘겨루기 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윤 당선인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협치와 통합에 나서야 한다. ‘닫힌 마음’은 협치의 가능성을 외면하는 ‘적대적 사고방식’이다. 협치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원칙이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요구하는 현실적 조건이다. 이 원칙과 조건을 무시하고 일방통행 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식물대통령이 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 빈부·이념·정당·학력·성별·세대 등의 갈등, 즉 ‘문화전쟁(culture war)’이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나라이니 협치와 통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협치를 위해서는 패자를 포용할 수 있는 승자의 넓은 도량이 필요하다. 협치는 힘을 가진 자가 먼저 손을 내밀고 양보할 때 시작된다. 협치의 전제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다. 야당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협치 할 수 있다. 독일은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준 메르켈(Angela D. Merkel) 수상의 성공적인 협치 16년을 통하여 세계의 중심국이 됐다. 야당의 이념과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의 합리적 주장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윤 당선인은 두 동강 난 나라의 현실과 ‘승자독식(勝者獨食)’ 정치제도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통섭(統攝)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측근과 공신(功臣)만 챙기는 보은인사는 결국 자신에게 독이 되어 돌아온다. 협치를 위해서는 여야를 가리지 말고 널리 인재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통합의 정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가 통합을 역설했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써 분열만 심화시켰다. 통합을 위한 실천행동의 첫 단계는 ‘소통’이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긴다고 해서 소통이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소통에 필요한 대통령의 인식과 의지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검찰조직 총수가 지녔던 권위적 태도로서는 소통이 어렵다.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며,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대선 결과 0.73% 득표율 차이는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던 절반의 국민소리도 경청하라는 의미이다.이를 위해서는 당선인의 오만과 독선을 막아줄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 필요하다. 권력 주변에는 언제나 ‘권력 불나방’들이 우굴 거린다. 당선인이 ‘예스맨(yes man)들’의 감언이설과 집단사고에 휘둘리는 순간, 교만과 독선의 늪에 빠진다. 이 늪에서 그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충성스런 비판자’ 밖에 없다. 당선인의 성공 여부는 ‘내로남불’이 아니라 ‘춘풍추상(春風秋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22-04-04

우크라이나 전쟁의 외교·안보적 함의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국제정치는 ‘힘의 정치’이다. 강대국들의 국익이 충돌할 때 약소국의 이익은 무시된다. 강대국 간 전략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같은 지정학적 ‘중추국(pivot state)’은 외교·안보적 딜레마를 안고 있다. 유사한 지정학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국도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관’과 러시아의 ‘현실주의 국제질서관’의 충돌이다. NATO의 동진(東進)을 우려해 온 러시아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NATO가입 추진을 침공의 빌미로 삼은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내부의 친러파(동부지역)와 친서방파(서부지역)의 지속적인 대립과 갈등, 특히 동부 돈바스지역에서 계속되어 온 친러 반군의 분리·독립운동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의 외교·안보에 커다란 함의(implication)를 던져주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힘이 지배하는 국제정치 현실’을 직시하고,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평화는 이상(당위론)이지만 전쟁은 현실(경험론)’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는 허구임을 증명했다. ‘평화는 목적이고 전쟁은 수단’이다. 국가는 국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전쟁을 활용하며 전쟁의 승패는 수단, 즉 전력(戰力)의 질과 양에 달려있다.동맹은 자체 방위력을 보완해주는 힘이다. 우크라이나는 방위력도 약했고 동맹국도 없었다. 북핵 위협에 직면해 있는 한국에게는 핵 억지력을 제공하는 한미동맹이 사활적 중요성을 갖는다. 경제안보 차원의 한중 전략적 협력관계와 군사안보 차원의 한미동맹은 질적으로 다르다. 한미동맹과 한중관계의 경중(輕重)을 고려하여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한국 외교안보전략의 핵심이다.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핵무기의 중요성을 재확인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핵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영국·러시아와 체결한 ‘부다페스트 협정’으로 안전보장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그 협정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우크라이나가 ‘절대무기인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러시아의 침략도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핵 억지력 강화를 위해 미국의 전술핵무기 재배치 또는 핵 공유협정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마지막으로 국내정치에 대한 안보적 함의이다. 친러파와 친서방파의 대립은 우크라이나를 약화시켰고, 친러 반군의 무장투쟁은 러시아의 개입 명분이 되었다. 한국정치에도 엄존하고 있는 자주파와 동맹파, 친미파와 친중파의 대립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외세에 악용될 수 있다. 중추국의 위치에 있는 한국이 북핵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주와 동맹, 동맹과 균형을 둘러싼 이분법적 흑백논쟁은 백해무익(百害無益)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내부의 분열이 외부의 침략을 불러온다.’는 사실이다.

2022-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