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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적 삶을 위하여

등록일 2023-08-07 16:31 게재일 2023-08-0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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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청춘예찬’에 환호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노년예찬’이 가슴에 와 닿는다. 청춘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E. Fromm)의 ‘소유냐 존재냐’와 ‘존재의 기술’은 머리와 가슴에서 분리됐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보니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고학생(苦學生)은 부·권력·명예의 소유가 곧 행복인줄 알았던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존재론적 물음은 이념·성별·직업·빈부에 관계없이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이다. 특히 정치인·언론인·교수 등 사회지도층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더욱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인은 정치의 존재이유를 생각할 리가 없고, 확증편향에 갇힌 언론인은 언론의 존재이유를 말할 자격이 없으며, 권력과 야합한 어용교수는 지식인의 존재이유를 왜곡할 뿐이다. 소유가 목적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재화는 생존에 필요하므로 소유 자체를 부정하거나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의 위험성이다. 돈·권력·명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소유에 집착할수록 더 큰 욕심을 내게 되고, 많이 소유할수록 더 크게 얽매이게 된다. 모든 소유는 오직 한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다.

소유적 삶은 욕망·물질·외형을 우선하는 삶이며, 존재적 삶은 절제·정신·내면에 치중하는 삶이다. 소유적 삶은 항상 불안하지만 존재적 삶은 언제나 평온하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소유적 삶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까닭에 행복할 수 없다. 반면 존재적 삶은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과거나 미래의 허상을 쫓아가지 않는다. 행복이란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현들이 역설한 행복한 삶은 존재적 삶에 있다. 사르트르(J. P. Sartre)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일갈했던 것처럼, 존재가 없는 소유란 있을 수 없다. 톨스토이(L. Tolstoy)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고 했고, 프롬은 “인간의 목표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텅 빈 충만’의 역설을 가르쳐주었다. ‘비워야 울림이 있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럼에도 우리가 존재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성찰과 구도(求道)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존재적 삶을 위해서는 소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이 있어야 한다. 프롬이 ‘존재의 기술’에서 “자각·집중·명상을 통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했듯이, 존재적 삶은 끊임없는 성찰과 연마(練磨)의 결과물이다. ‘행복으로 가는 구도의 길’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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