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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북·러 밀착과 우리의 대응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최근 평양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안보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양국은 군사동맹에 준하는 ‘포괄적 전략동반자관계 조약’을 체결했을 뿐만 아니라, 푸틴(V. Putin)은 북핵을 사실상 인정하고, 군사·기술협력을 천명함으로써 유엔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부정했다.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고도화되면서 이루어진 북·러 밀착은 한국안보에 중대한 위협이다. 북·중 혈맹에다가 러시아의 군사협력까지 확보한 김정은은 이른바 “남조선 영토 평정을 위한 대사변 준비”를 가속화할 것이다. 북·중·러 3국은 모두 핵보유국인데, 우리는 핵 없이 미국이 약속한 핵우산만 쳐다보고 있다. 한미동맹의 재정비, 핵개발 잠재력 확보, 독자 핵무장 등보다 실효성 있는 안보전략이 요구되고 있는 까닭이다.철학자 스펜서(H. Spencer)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종(species)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종은 도태되어 사라지는 현상”이라고 했다. 생존하려는 자는 환경의 변화를 직시하고 신속히 대처해야 한다.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힘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안보를 위한 현실주의적 인식이다. 현실주의는 이상주의가 주장하는 ‘대화를 통한 평화’를 신뢰하지 않으며,‘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한다. 지난 정부의 이상주의적 대북정책은 비핵화에 실패함으로써 북핵을 고도화시켰을 뿐이다. ‘핵무기는 비대칭전력’이라는 점에서 ‘핵은 핵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이 절실하다.이를 위해서는 장·단기 핵전략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그 핵심은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의 실효성을 제고하면서 핵개발 잠재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현재의 ‘핵 확장억제전략’보다 진전된 ‘전술핵 재배치’ 또는 ‘NATO식 핵공유’와 같은 방식으로 핵우산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미국 의회와 학계에서도 제안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외교 여하에 따라서는 충분히 성과를 거둘 수 있다.한편 장기 전략으로서는 독자 핵무장을 위한 ‘핵개발 잠재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당장 핵무장을 위해 NPT를 탈퇴한다면 유엔제재로 우리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국제제재를 피하면서도 한미동맹이 작동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플랜 B가 필요하다. 그것은 일본처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핵무장 할 수 있을 정도의 잠재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원자력협정의 제한을 받고 있는 우라늄농축과 핵연료 재처리 권한의 확보가 관건이므로 지속적인 대미외교협상이 중요하다.이러한 외교안보전략이 성공하려면 정쟁으로 날 새는 정치권의 각성이 시급하다. 내분(內紛)은 외침(外侵)을 초래하고, 분열된 나라는 통합된 안보를 추진할 수 없다. 정치인들은 권력투쟁으로 병든 소아(小我)를 버리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대의(大義)에 따라야 한다.

2024-07-15

디케의 저울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의 저울이 흔들리고 있다. 공정한 재판의 상징인 ‘천칭 저울’이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는 것은 정의가 흔들린다는 뜻이다. 법의 저울이 공정하지 못하면 정의가 실현될 수 없고, 기울어진 저울로 내리는 판결은 정의를 빙자한 불의일 뿐이다.누가 디케의 저울을 흔드는가?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그 주범이다.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인들의 정치력 부족으로 정치적 문제를 법적 판단에 호소하는데서 비롯된다. 노회(老獪)한 정치인들이 자기편에 유리한 판결이 나오도록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흔들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은 사법부의 판결까지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하여 지지 또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최근 민주당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오자 보복성 입법으로 사법부를 길들이려 하는가 하면, 재판 담당판사의 실명을 공개하여 공격하는 등 사법시스템을 흔드는 것은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사법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변질시켜 정쟁을 일삼는 행태는 헌법에 보장된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신분보장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반면 ‘사법의 정치화’는 사법부와 법관이 반성해야 할 문제다. 법관은 헌법 제103조에 규정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대원칙을 엄수해야 사법 불신을 막을 수 있다.이 때 법관의 양심은 주관적 판단이 배제된 객관적이고 공정한 법률적 양심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법관은 재판에 있어서 자의성과 편향성을 엄중히 경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정치적 고려도 없이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그럼에도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진보성향의 민변·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의 ‘코드 인사’로 스스로 사법부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일부 판사들은 ‘재판이 곧 정치’라면서 법과 양심이 아닌 ‘개인의 정치적 표현’을 인정하자는 주장으로 사법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법관이 정치적 진영논리에 갇혀 재판에서 객관적 인식을 외면하고 주관적 이념성향을 드러낸다면 판결의 공정성은 보장될 수 없다.더욱이 정의의 가치를 흔들었던 조국 전 정의부(법무부)장관이 1·2심의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비법률적 방법에 의한 명예회복을 하겠다”면서 정치에 뛰어들고, 그의 책 ‘디케의 눈물’에서는 자기반성 없이 사법의 정치화를 비판한 것은 너무나 몰염치한 행위다.한 때 대학에서 제자들에게 가치와 당위를 가르친 교수였던 그가 어떻게 이 지경으로 추락했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측은하다.결국 디케의 저울은 누가 흔들거나 스스로 흔들리지 않아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정치인이 권력으로 법관을 겁박해서도 안 되며, 법관이 권력욕 때문에 정치인 흉내를 내서도 안 된다. 정치인과 법관이 각자 주어진 소명에 충실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디케의 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

2024-07-01

‘확증편향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온 나라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과도한 확신과 확신, 편향과 편향의 충돌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확증편향의 덫에 갇힌 것을 모르거나 편향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오죽하면 ‘한국사회·성격심리학회’에서 ‘2024년 한국사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현상은 확증편향’이라고 우려했겠는가.심리학자 웨이슨(P. C. Wason)은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가치관·신념·판단에 부합하는 정보만 믿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성”이라고 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지편향’이다. 확증편향에 갇힌 사람이 증거라고 제시하는 사실(fact)은 ‘선택적 인식’에 의한 ‘선택적 사실’일 뿐이다.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에 좌우되기 쉬우며, 편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감정적 행태를 보인다. 개인적 삶의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인지편향은 매우 완고해서 수정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가 거의 매일 접속하는 ‘유튜브 알고리즘(YouTube Algorithm)’의 영향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지편향이 심화됨으로써 정신적 노예로 전락할 위험성은 커진다.철학자 니체(F. Nietzsche)는 “확신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라고 경고했다. 성찰하지 않는 확신은 객관적 사실까지도 자신의 믿음에 맞게 왜곡해서 거짓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지도자의 확증편향은 과도한 자신감과 교만함을 낳고, 정책결정과정에서 다양한 대안의 검토를 방해함으로써 심각한 오류를 초래하게 된다.확증편향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덫에서 벗어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적 오만’의 경계이다. 오만은 ‘무지’와 ‘확신’의 결합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지편향에서 벗어나려면 ‘지적 겸손’과 ‘비판적 자기성찰’이 필수조건이다. 균형식이 건강에 좋듯이, 균형 잡힌 사고가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준다. 유유상종(類類相從)에서 비롯되는 집단사고(group think)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균형적 사고를 회복하려면 ‘열린 마음(open mind)’을 가져야 한다. 확증편향은 ‘자신이 만든 덫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확신의 덫에 갇히면 사고의 유연성을 잃는다. 지금은 일관성보다는 유연성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열린 마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정 성향의 방송·신문·유튜브 등은 편식하지 않아야하고, 이념·정당·연령·종교가 다른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 확증편향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우리사회의 비극은 타인의 편향은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편향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편향과 편견은 분열의 길’이며, ‘균형과 헤아림은 통합의 길’이다. 남북대치와 북한의 핵위협 속에서도 ‘망국적인 심리적 내전’을 벌이고 있는 대한민국이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는 너무나 자명하지 않는가.

2024-06-17

‘승자독식 전쟁’을 끝내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가 ‘전쟁’이 되었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이라는 함정에 빠진 탓이다. 승자의 독식은 패자의 박탈감과 분노를 불러온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정치보복이 반복되는 이유다.대화와 양보가 없는 승자독식 정치는 민주주의를 형해화(形骸化)한다. 집행권을 가진 여당과 입법권을 장악한 야당의 끝없는 전쟁이 그 생생한 증거다.승자독식 선거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의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대선에서 득표율 0.73% 차이(윤석열 48.56%, 이재명 47.83%)로 승리한 대통령이 집행권을 100% 독점하며, 총선에서 지역구 득표율 5.4% 차이가 의석수 1.8배 차이(민주당 161, 국민의힘 90)를 초래했다. 이처럼 엄청난 사표(死票)가 발생하는 선거는 민심을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승자독식 제도에서는 승리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 같은 정치’가 일상화된다. 다수결의 전제인 대화와 타협은 공허할 뿐이며, 이성과 양심은 설 자리가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증오 마케팅’으로 상대를 비난, 조롱하고 혐오를 극대화시킨다. ‘나는 천사, 당신은 악마’라는 흑백론이 거대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을 심화시킴으로써 공동체의 기반을 무너뜨린다.그렇다면 어떻게 ‘승자독식 전쟁’을 ‘승패공존 정치’로 바꿀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정신’과 ‘제도’의 혁신이 필요하다. 먼저 정신적 측면에서는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가치관이 내면화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전부 혹은 전무’(all or nothing)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대소’(more or less)를 두고 벌이는 협상과 타협이다.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겠다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오만과 독선이 민주주의 파괴의 주범이다.다음으로 제도적 측면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개혁과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은 물론, 대통령 4년 중임제 또는 의원내각제 개헌까지도 본격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서유럽국가들이 보여주듯이 다당제 연합정치와 같은 합의제민주주의가 정치의 양극화를 완화하고 정책의 연속성을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는 꼼수 위성정당을 막고, 소선거구제의 사표를 줄이기 위해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이 문제는 이미 여야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음에도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여 ‘폭탄 돌리기’만 계속하고 있다.거대양당이 여론을 의식하여 개혁시늉만 할 뿐,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얻는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다.이처럼 선거법 개혁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니 결코 쉽지는 않다. 하지만 지식인·시민사회·언론 등 여론의 압력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성사시킨 것처럼, 개혁요구가 거세지면 정치권도 계속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은 거대양당의 ‘승자독식 전쟁 놀음’에 놀아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혁에 나서도록 지속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2024-06-03

보수의 성찰, 반성, 그리고 혁신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국민의힘이 길을 잃었다. 총선 3연패에도 성찰과 반성에 인색하다. 중환자가 수술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진통제만 먹고 있다. 집권당이 되자 변화에 둔감하고 민심도 모른다. 이대로 가면 다음 지선과 대선도 필패다. 보수의 사활은 민심에 부응하여 혁신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그럼에도 구원 투수로 나선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은 총선 패인으로 외연확장에 따른 내부 결속력 약화를 지적하면서 “보수의 정체성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중환자를 치료해야 할 의사의 진단이 거의 돌팔이 수준이다. 참패의 원인을 제공한 대통령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고, 비대위원 7명 중 6명을 친윤으로 임명했다. 비상 상황에 대한 인식과 대처가 이처럼 안이하니 미래가 암담하다.국민의힘은 죽어야 산다. 민심을 받들어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환골탈태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혁신 보수’로 거듭나는 일이다.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수구 보수’는 생존할 수 없다. 보수는 위기 때마다 가면을 쓰고 변신하는 흉내만 내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자초했다. 이번에도 중도 확장에 실패한 것은 ‘혁신의 가면’은 썼지만 ‘혁신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국민의힘은 민심에 민감한 ‘열린 보수’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성공한 지구적 보수는 ‘실용’과 ‘통합’을 중시한 ‘열린 보수’인데 ‘닫힌 보수’를 고집했으니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의 가치는 개인의 자유를 배려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위한 통합의 구현에 있다. 약자의 좌절과 분노를 헤아리고 그들과 동행할 수 있는 따듯한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나아가 수직적 당·정관계도 재정립해야 한다. 당이 대통령의 시녀가 되면 민심과 유리된다. 물론 대통령이 당을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아야겠지만, 당도 ‘윤심’만 살피는 예스맨(yes man)이 되어서는 안 된다. 권력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는 무기력한 여당을 누가 신뢰하겠는가. 대통령의 부당한 요구에는 분명히 ‘노(no)’라고 거부할 수 있어야 유능한 정당이다.이와 관련하여 국민의힘은 ‘영남당’과 ‘고령당’의 한계를 벗어나는 혁신이 시급하다. 반공과 산업화 신화에 안주해서 지지층이 노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수포당(수도권을 포기한 정당), 4포당(40대를 포기한 정당)이 되었다. 영국 보수당은 디즈레일리(B. Disraeli)의 과감한 정당개혁, 처칠(W. Churchill)의 ‘젊은 보수’와 같은 혁신정책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 보수가 더욱 젊어지고 영남을 벗어날 때 비로소 떠난 민심이 돌아올 수 있다.보수는 수구(守舊)가 아니다. 고루한 이념에서 벗어나 미래를 개척하는 실용성 있는 나침판이 되어야 한다. 권위는 없으면서 권위주의를 고집하는 ‘꼰대당’은 시대착오다. 보수의 생명력은 실용적 변화와 혁신에 있다. 암환자가 진통제 처방으로 회생될 수는 없다. 중병에 걸려 있는 보수가 살길은 오직 처절한 반성을 통한 과감한 혁신뿐이다.

2024-05-20

누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한국 민주주의가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병의 원인은 ‘제도’에도 있지만 ‘사람’이 더 큰 문제다. 확증편향과 선택적 정의에 갇힌 중환자들이 자신은 병이 없다고 하니 ‘웃픈’ 현실이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분노와 적대가 만연해서 독선과 편견, 오만과 아집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랫(D. Ziblatt)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의 핵심규범은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인데, 이것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무너진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서로의 견해 차이를 존중하고 자기의 절대성을 고집하지 않아야 유지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고, 집행권을 가진 대통령은 주저 없이 거부권을 행사한다. 외관상 각자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니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관용·타협이라는 절차규범을 어긴 것이다. 입법 권력과 집행 권력의 ‘힘의 대결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정치가 전쟁과 다른 점은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협력해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는데 있다.민주주의는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토대로 한다. 하지만 견리망의(見利忘義)하는 정치인들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은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부족적인가를 말해준다. 부족주의 정치는 국가이익보다 당파이익을 중시한다. 철학의 빈곤과 이기심으로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인들의 선동과 매도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기둥은 공정과 정의다. 롤즈(J. Rawls)가 말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적 공정’을 통한 ‘결과적 정의’를 의미한다. ‘정의가 힘’이 되어야지 ‘힘이 정의’가 되는 정치로서는 정의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재명과 조국의 경우처럼 힘으로 공당을 사당화하거나 범죄혐의를 정치적으로 덮으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권력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기도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배신이다.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처음이자 끝이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언론의 비판기능이 죽으면 민주주의도 죽는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민주주의 리포트 2024’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언론통제와 사정기관을 통한 공포정치로 “한국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고 했다. 법을 적용하는 공권력의 남용이 민주주의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는 시민의 주권을, 그리고 ‘공화’는 공공선을 말한다. 우리의 미래는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가 되는 ‘공화정(共和政) 정신’에 달려 있다.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너와 내가 함께하려면 관용·대화·타협의 정신이 필수다. 우리가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진정한 공화주의자로 거듭날 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는 회생될 수 있다.

2024-05-06

성난 민심을 어떻게 받들 것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108 대 192’, 국민은 윤석열 정권을 무섭게 심판했다.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에 성난 민심의 폭발이었다. 이미 6개월 전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강력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으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대통령은 이번에도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겠다”고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무엇을, 어떻게 쇄신하겠다는 것인가? 병은 원인을 알아야 치료할 수 있다. 대통령은 참패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검찰 중심의 측근 인사는 불통의 상징이었고, 대통령이 내쳤던 이준석·안철수·나경원은 모두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돌아왔다. 이태원·오송 등 대형 참사에서 보여준 무책임, 해병대 채 상병 사망수사와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사건의 처리에서 보여준 오만한 태도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대통령의 성찰·반성·변화가 시급한 까닭이다.대통령이 민심을 받들려면 국민, 여당 및 야당과 제대로 소통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과의 소통’인데, 그것은 바로 ‘언론과의 소통’을 의미한다.대통령은 총선 참패에 대해 언론 앞에서 직접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고 국무회의 비공개회의에서 간접적으로 사과했다고 한다.“참모 뒤에 숨지 않고 잘못은 솔직하게 고백하겠다”고 한 대통령은 어디로 갔나? 분노한 민심에 진솔하게 사과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가?다음으로 당정(黨政) 소통을 위한 양자관계의 재정립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당의 주류가 합리적·개혁적 보수로 교체되어야 한다. 수구적인 보수, ‘윤심’만 살피는 보수는 시대변화에 부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변화와 혁신을 추동할 수 없다.여당은 대통령에게 고언(苦言)하는 ‘악마의 대변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대통령은 ‘검사 윤석열’이 아니라 ‘정치인 윤석열’이 되어야 한다. 검찰문화에 습관화된 상명하복의 정치행태는 불통만 키울 뿐이다.마지막으로 야당과의 소통이다. 정쟁을 중단하고 정치를 복원하라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이다. 향후 대통령의 잔여 임기 3년은 가시밭길이다.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야당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대통령의 레임덕만 재촉할 뿐이다. 이재명과 조국의 범죄혐의에 대한 법률적 판단은 사법부에 맡겨두고, 대통령은 정치적 대화를 통해 국정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여소야대의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이처럼 성난 민심은 대통령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요구하고 있다. 취임 이후 반복되어온 표리부동과 언행불일치, 선택적으로 적용해온 공정과 상식을 반성 없이 변명만 하면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다.병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데 야당을 탓하고 참모들을 질책해서 될 일이 아니다. 권력에 취해 초심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 아닌가.민심을 받드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길’은 대통령이 변하는 것이다. 오만과 불통의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소통·대화·타협의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할 때 비로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2024-04-22

막장 총선, 성찰과 반성을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철면피(鐵面皮)들의 행진이었다.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정치꾼들의 목소리만 높다. 내로남불과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난무하고, 범죄자들까지 총선에 뛰어들어 ‘견강부회(牽强附會)’하니 어처구니없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민주주의의 무덤’이 되었다. 정치가 난장판이니 총선 이후가 더 걱정이다.내일은 민심 심판의 날이다. 패자의 반성은 물론, 승자도 박수 받을 처지는 아니다. 여야가 하나같이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소명의식 없이 사익만 추구한 정상배(政商輩)들이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굽신거리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정치의 퇴행이며 민주주의 위기다. 오직 진정한 자기성찰과 반성만이 공동체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무엇을 성찰하고 반성해야 하는가? 정치지도자들은 오만과 불통, 언행불일치와 표리부동부터 고쳐야 한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는데 불신을 자초했다. ‘시스템 공천’을 말하면서 ‘고무줄 공천’을 했고, 국민을 빙자하여 권력을 남용했다. 통합을 말하면서 분열을 획책했고, 법치를 말하면서 법원의 판결을 비웃었다. 국민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뻔한 거짓말’로 주권자를 기만했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권력을 탐하여 ‘편 가르기’와 ‘혐오 정치’를 한 것도 반성해야 한다. ‘통합의 수단’인 정치를 ‘분열의 도구’로 악용함으로써 나라는 ‘심리적 내전상태’가 되었다. 반역자집단·범죄자연대와 같은 막말로 상대를 악마화하고 내편의 분노를 부추겨 나라를 두 동강 내었다. 물론 이들의 선동에 놀아난 주권자의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국민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어떻게 해야 희망의 정치를 만들 수 있을까?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각성이 시급하다. 베버(M. Weber)는 그의 저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에게는 ‘열정·책임감·균형감각’ 등 세 가지가 필수조건이라고 했다. 우리 정치인들도 공익을 위해 희생·봉사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권력을 위임해준 국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야 하며,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이러한 정신적 각성과 함께 제도개혁이 병행되어야 한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적대적 공생정치를 심화시켰고, 연동형비례대표제는 꼼수 위성정당을 양산하여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 법학 교수였던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1·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자 “비법률적 방식으로 명예회복을 하겠다”면서 비례정당을 창당했다. 법학자가 범법자가 되어 법을 부정하고 정치적 면죄부를 받겠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이제 이 난장판 선거가 끝나면 반드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정치인은 공정과 정의를 말하면서 불공정과 불의를 일삼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을 반성해야 하고, 국민은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정치인들의 선동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한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한다. 희망의 정치도, 파멸의 정치도 모두 우리가 만든 인과응보(因果應報)다. 성찰과 반성 없이는 미래도 없다.

2024-04-08

‘민주 없는 민주당’이 가는 길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민주’를 자랑해온 민주당이 길을 잃었다. 정당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이재명의 민주당’이 되었다는 비판이 거세다.김대중·노무현의 관용과 통합정신은 보이지 않고 이재명의 ‘독선과 배제의 정치’가 요란하다. 75년 역사와 전통의 민주당이 처음 가는 길이다.‘민주 없는 민주당’의 현실은 ‘친명횡재, 비명횡사’라는 조어가 웅변으로 말해준다. ‘시스템공천’이라고 자랑하더니 알고 보니 ‘고무줄공천’이었다. 이낙연 전 총리는 민주당이 “1인 정당, 방탄정당으로 변질됐다”고 성토했고, 홍영표 의원은 “민주가 사라진 가짜 민주당”이라고 하면서 탈당했다. 오죽하면 권노갑·정대철 등 당의 원로들까지 나서서 “공천이 당 대표의 사적 목적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비판했겠는가.이재명의 사당화(私黨化)에 분노한 의원들은 탈당하여 신당 창당, 무소속 출마, 심지어 여당에 입당하여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다. 민심을 외면하고 ‘공천 자해극’을 벌였으니 민주당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또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지속 여부를 당대표 1인에게 위임한 것은 정당민주주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친북·반미세력들과 함께 비례연합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이념적 좌편향이 심화되었다. 그 결과 민주당의 정체성은 크게 훼손된 반면, ‘이재명 당’의 색깔은 더욱 분명해졌다.정치권력의 오만과 독선은 반드시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하고 배신한 벌이다. 민주당에 민주가 없으니 검찰독재론이 작동하기 어렵고, 우세하던 총선 판세도 결코 낙관할 수 없게 되었다. 여당의 잘못을 비판하면 “너나 잘 하세요”라는 힐난만 돌아온다. 당 대표가 자신의 사법리스크 방탄과 차기대권 도전을 위해 공천을 무기로 ‘공당을 사당화’했다. 사익(私益)을 위해 대의(大義)를 버린 것이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희생과 헌신으로 대통령에 오른 ‘김대중·노무현의 민주당’이 아니다.‘민주 없는 민주당’은 여야관계와 정치발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정치발전은 정당발전을 전제로 하는데, 이재명의 민주당은 정당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개딸’과 ‘팬덤’에 의존하는 극단의 정치, 친명체제 강화와 이념적 좌편향은 여야의 갈등과 대립을 격화시킬 뿐이다. 대화와 타협이 없는 증오와 혐오의 정치에서는 민주정치의 반동화, 즉 ‘독재정치의 싹’이 태동한다.민주화 역사에 빛나는 정통 민주당이 이재명의 사당으로 전락한 것은 민주당의 불행이요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독선과 아집의 정치는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성공의 길은 탐욕의 정치가 아니라 희생과 헌신의 정치, 즉 ‘사즉생(死卽生)’에 있다. 나를 비우는 것이 당을 살리는 길이다. 민주당이 약자를 보호하고 권력의 횡포를 막아주는 건강한 정치세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길을 물어 ‘민주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민주가 바로 민심’이며, ‘민심이 곧 천심’이다. 국민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

2024-03-25

영화의 정치화,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인들은 ‘정치 영화’를 이용해서 ‘영화 정치’를 한다. 대통령이나 정치적 이슈를 다룬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여야는 ‘영화의 정치화’를 통해서 색깔논쟁을 일으키며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선거용 정치 영화’를 만들어서 돈벌이하려는 제작사와 그것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일치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은 영화를 자신의 정치철학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지지자를 결집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민주화운동을 다룬 남산의 부장들(10·26), 택시운전사(5·18), 1987(6·10), 서울의 봄(12·12) 등이 진보진영의 메시지 전파에 이용되었다면, 건국·산업화·안보를 다룬 국제시장(산업화), 연평해전(남북충돌), 인천상륙작전(6·25), 건국전쟁(이승만) 등은 보수진영에 이용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스크린 정치’라는 영화의 ‘정치마케팅’이다.그러나 영화의 정치화는 부작용이 크다. 영화 제작사나 감독이 정치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고, 정치권은 그 영화를 편향적,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여 정치적 선전·선동의 도구로 삼기 때문이다. 정치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영화가 다를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평가는 전혀 다르다.영화 ‘건국전쟁’의 경우, 보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에, 그리고 진보는 그의 ‘과(過)’에 초점을 둔다. 서로 다른 관점과 잣대로 정치적 여론몰이에 이용하는 것이다.‘영화의 진영정치화’는 국론분열과 적대정치를 심화시킨다. 언론들이 정치 영화에 편을 갈라 싸우면 갈등은 격화되고, 감독의 제작 의도는 왜곡·훼손될 수 있다. 특히 선거를 겨냥해서 영화인·정치인·언론인들이 야합하여 영화를 정치화할 경우 영화예술의 순수성은 훼손되고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전체주의체제에서 영화는 이념과 정권의 홍보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들의 성찰과 각성이 필요하다. 물론 영화는 매체의 특성상 정치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인이 정치인의 노예로 전락하면 영상예술의 발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영화의 상업성을 인정하고 영화인의 가치관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제작사나 감독은 영화발전을 위해 양심과 책임을 갖고 정치적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정치인들의 영화 정치는 더 큰 문제다. 정치를 잘해서 민심을 얻으려하지 않고 영화에 기대에 표심을 사려고 잔 꽤만 부리는 행태는 한심하다.영화 정치는 내편 결집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비판자나 중도층을 끌어들이기는 어렵다. 영화 한편 보고 표심을 바꿀 유권자가 어디 있겠는가. 영화를 정치의 수단으로 삼으면 영화예술도 죽고 정치발전도 없다.삶은 현실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의 도구화, 즉 영화로 정치를 할 것이 아니라 정치로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영화 같은 정치’가 아니라 정도정치(正道政治)를 통해서 사회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영화 같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2024-03-11

총선용 매표(買票) 포퓰리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용 포퓰리즘(populism) 광풍(狂風)이 불고 있다. 선거 때마다 도지는 ‘망국적 고질병’이다. 매표나 다름없는 선심성 공약을 여야가 경쟁적으로 남발한다. 여당이 50을 약속하면 야당은 100을, 또 다시 여당은 150을 던지는 ‘투전판 정치’다. ‘아니면 말고’식의 허황된 공약을 하는가하면, 여야가 야합해서 ‘예타 면제 특별법’으로 대못을 박기도 한다.윤 대통령은 “매표에 가까운 포퓰리즘 정책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총선이 다가오자 소상공인들에게 재난지원금 환수면제, 대출이자의 현금반환, 전기료감면 및 신용사면을 단행했다. 또한 부동산·주식·금융투자자들에 대한 소득세와 상속세의 감세도 발표했다. 포퓰리즘을 비판하면서 재정건전성을 외치던 대통령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다.여당과 야당의 ‘개발 포퓰리즘’ 경쟁은 더욱 가관이다. 여당이 1기 신도시의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푸는 특별법을 발의하자, 야당은 노후계획도시 정비·지원특별법을 발의했다. 여당이 수도권도심철도 지하화를 공약하자, 야당은 전국 모든 도심철도의 지하화로 맞섰다. 여당이 김포의 서울 편입을 다시 띄우자 야당은 서울지하철 5호선 김포 연장 예타를 면제했다. 심지어 여야는 야합하여 대구∼광주 달빛철도 특별법과 수도권 철도지하화 특별법을 모두 예타 없이 통과시켰다.‘복지 포퓰리즘’은 또 어떤가. 야당이 노인 간병비의 보험 급여화와 경로당 주5일 점심제공을 발표하자, 여당은 간병비의 국가부담 확대와 주7일 점심제공으로 맞불을 놓았다. 여당이 2028년까지 기초연금 40만원을 공약하자 야당은 2026년까지 모든 고령층에 기초연금 제공을 약속했다. 야당이 청년들에게 월 10∼20만원 수당, 학자금 무이자대출, 교통비 할인 청년패스를 공약하자, 여당은 대학생 50%에서 80%까지 국가장학금을 주는 동시에 ‘대학생 1천원 아침밥’의 확대 및 연 2%대의 주택담보대출을 약속했다.이러한 막가파식 선심성 정치는 망국의 길이다. 포퓰리즘에 빠졌던 이탈리아·그리스·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지금 참회하고 있다. 총선을 겨냥해 여야가 던지는 포퓰리즘은 ‘마약’이다. 국민이 ‘마약’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지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대가는 다시 부메랑이 되어 국민에게 돌아온다. ‘마약 복용’의 대가는 경제파탄이고 미래세대의 불행이다.포퓰리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면 정치 불신을 초래하고, 약속대로 실행되면 재정악화로 경제가 거덜 난다. 물론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약 같은 권력’에 중독된 정치인들이 ‘마약 같은 포퓰리즘’을 국민에게 투여하고 있으니 제정신이 아니다.결국 미래는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스위스 국민은 매월 300만원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헌법개정안을 77%의 압도적 반대로 부결시킴으로서 남유럽이나 남미처럼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았다. 앞날을 내다본 그들의 혜안(慧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2024-02-26

대통령의 소통,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윤석열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는 이유를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항상 언론과 소통하고 언론 앞에 자주 서겠다”고 하면서 “질문 받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도어스테핑’은 6개월 만에 중단됐고, 신년기자회견도 하지 않은지 2년째다. 국민은 왜 청와대를 나왔느냐고 묻고 있다.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대통령의 소통 대상이 ‘제한적이고 선택적’이라는 사실이다. MBC기자는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반면, 조선일보에는 대통령 단독인터뷰라는 특혜를 줬다.소통의 본질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내가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데 있다. 편안한 여당, 우호적 언론만 상대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야당이나 비판언론이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고언(苦言)은 국정운영에 좋은 약이 된다. “언론과의 소통이 국민과의 소통”이라고 했던 대통령이 불편하다고해서 기자회견을 피한다면 되겠는가.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통령의 소통방식이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소통은 ‘민주적 대등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호적이어야 한다.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문제에 답해야 소통이 된다. ‘홍보’와 ‘소통’의 차이는 ‘쌍방향 여부’에 있다. 국무회의의 일방적 중계는 홍보의 일환이며, 대통령실에서 기획했다는 ‘민생토론회’는 참석자와 질문자를 사전에 선별한다는 점에서 소통이 아니라 ‘쇼(show)통’이며 일종의 홍보다.소통의 요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한 공감능력에 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한 까닭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대화의 수평적 관계’가 보장돼야 한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권위적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장악하면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 언론(조선일보)이 지적한 ‘59분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불통의 상징이다. 대통령이 상명하복의 검찰조직문화에 익숙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니 참모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하버마스(J. Habermas)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기초한 의사소통, 즉 홀로 결정하는 ‘나’가 아니라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가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고 했다.소통의 최대 장애요인은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이다. 야당과 국민을 계도(啓導)의 대상으로 보면 소통할 수 없다.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참모들에게 “소통을 강화하라”고 지시만 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야 한다.재임 8년 동안 158회의 기자회견을 한 미국의 오바마(B. H. Obama) 전 대통령은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나를 단련시켰다”고 했다. 언론과의 소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반면에 윤 대통령은 올해도 생방송 신년기자회견은 하지 않고 KBS와의 대담을 녹화, 편집해 3일후에 공개했다. ‘도어스테핑’을 하던 그 대통령이 아니다. 소통을 위해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2024-02-12

여의도 사투리 vs 서초동 사투리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권의 ‘사투리 논쟁’이 꼴불견이다. 경상·전라·충청도의 ‘지방 사투리’는 정감이 있지만, 정치꾼들의 ‘패거리 사투리’는 반감만 불러온다.여당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전·현직 야당대표를 비판하면서 ‘여의도(국회)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고 하자, 야당에서는 법비(法匪)들이 쓰는 ‘서초동(검찰) 사투리’부터 고치라고 했다. ‘내가 쓰면 표준말’이고 ‘남이 쓰면 사투리’라고 하니 ‘내로남불’이다.‘말’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은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을 써야 한다. 정치인들의 표준말이란 무엇인가? 권력의 원천인 ‘주권자의 언어’가 표준말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 민심을 모르거나 민심을 왜곡하면 사투리가 된다. 사투리가 매우 심한 정치인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의 모순조차 깨닫지 못한다. 패거리 사투리에 익숙해진 까닭이다.여당의 구원투수로 나선 한 위원장이 총선에서 이기려면 민심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국민은 여의도 사투리를 싫어하지만 서초동 사투리나 용산 사투리도 단호히 거부한다.여의도 사투리를 비판한 그가 ‘여의도 문법’으로 ‘여의도 패싸움’을 벌이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권력에 오염된 패거리 사투리를 쓰면서 그것이 국민의 표준말이라고 우긴다면 누가 동의하겠는가. 여당의 김웅 의원이 “우리 당의 문제는 여의도 사투리가 아니고 용산 사투리”라고 한 비판을 새겨들어야 한다.서초동 사투리는 ‘비민주적’이라는 것도 문제다. ‘검사 대 피고인’의 관계,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검찰조직문화에 익숙한 초보정치인들은 서초동 사투리를 고쳐야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시스템 공천을 강조했던 한 위원장이 경솔한 행동으로 사천(私薦) 논란을 빚은 것도 문제지만, 이를 빌미로 그의 사퇴를 요구한 대통령실의 위법적인 당무개입은 더 큰 문제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고 말한 대통령이 국민의 60% 이상이 요구하는 영부인의 ‘디올 백’ 의혹 규명을 외면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대통령실은 ‘몰카’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하지만, 국민은 ‘디올 백 수수’를 문제 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니체(F. W. Nietzsche)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여의도 사투리를 쓰는 괴물과 싸우다보면 어느새 서초동 사투리를 쓰는 또 다른 괴물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초동 괴물은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해서 여의도 괴물보다 훨씬 더 저급하고 난폭하다’는 비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괴물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나부터 고쳐야 한다.2011년 12월, 총선을 4개월 앞두고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된 박근혜는 “여당으로서 국민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석고대죄(席藁待罪) 했다. 민심을 제대로 알려면 남의 사투리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나의 사투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성찰과 반성을 모르는 패거리 사투리는 표준말을 논할 자격이 없다.

2024-01-29

제3지대 신당이 성공하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제1야당 대표가 백주대낮에 정치테러로 쓰러졌다. ‘증오의 진영정치’가 초래한 비극이다. 대결의 정치는 대화·타협·공존을 모른다. 거대 양당은 협치의 대상을 섬멸해야 할 적으로 간주해서 ‘전쟁 같은 정치’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모르는 양당의 주특기는 ‘내로남불’이다. 국민은 말뿐이고 권력에만 혈안이니 양당에 실망한 중도·무당층의 비율이 역대급이다.그럼에도 양당은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은 총선을 앞두고 분출하는 제3지대 신당들에 관심이 간다. 최근 여론조사(리얼미터, 2023년 12월 18일)는 국민의 48.3%(무당층은 68.3%)가 제3지대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했다. 중도·무당층을 겨냥한 신당들은 ‘합리적 진보’ 또는 ‘개혁적 보수’를 표방하고 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새 정치를 펴겠다는 포부도 크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제3지대 신당이 성공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3지대의 ‘철학과 비전’이다.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신당인가?”에 분명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신당은 거대 양당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만 기대서는 안 되며, 차별화된 가치와 비전으로 대안세력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은 ‘새로운 당’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당은 양당체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 정치의 지향점과 비전’을 확실히 제시해야 한다.다음으로 신당의 정치성향(political orientation)은 합리적·이성적·실용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진영정치를 거부하는 민주시민들의 열망일 뿐만 아니라, 신당의 지지기반이 되고 있는 중도·무당층의 요구이기도 하다. 신당은 ‘사익을 위한 정쟁’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며, 상대를 ‘척결의 대상’이 아니라 ‘협치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성향은 당내민주주의를 가능케 함으로써 합리적 정책 선택을 제고함은 물론이다.한편 신당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총선만 의식한 기회주의적 접근으로는 유권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신뢰는 말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의 누적된 결과물’이다. 거대 양당의 혐오에 기대어 당장 성과를 보겠다는 과욕은 곤란하다. 비록 이번 총선에서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일관된 철학과 행동으로 긴 호흡을 한다면 반드시 국민의 호응을 얻게 될 것이다.이처럼 제3지대 신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철학, 합리적 성향, 장기적 관점에서 양당체제의 압력을 돌파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난관은 많겠지만 성공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현재의 양당체제’에서는 팬덤정치·극한대결·민심왜곡·포퓰리즘·내로남불 등의 수많은 병폐들이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3지대 신당의 성공은 참여 정치인들의 철학·성향·행태에 대한 국민의 공감여부에 달려있다.

2024-01-15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새해 첫날, ‘바람의 섬’ 제주에서 올레 길을 걸으며 ‘바람이 가르쳐주는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삶을 옭아매는 수많은 그물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의 가르침이 가슴을 때린다.우리는 ‘바람과 같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살고 있다. 내가 만든 그물에 내가 걸려 허덕이는 것이다. 서로를 연결하는 인터넷은 이제 서로를 옭아매는 그물망이 되었다. SNS는 소통할 수 있는 ‘개방적인 연결망’이 아니라 고기들을 가두는 ‘어망 (漁網)처럼 폐쇄된 그물’이 되고 있다. 적과 동지를 구별한 ‘진영의 일원으로서의 나’만 있을 뿐이다. ‘독립된 나’를 상실하고 진영에 ‘종속된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볼 수 없다. 오만과 독선이라는 그물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들이 우물 밖 세상이 잘못됐다고 아우성이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진보 꼴통’은 ‘보수’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보수 꼴통’은 ‘진보’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념과 진영의 그물에 걸린 탓이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은 밀(John S. Mill)이 지적한 것처럼 “검증되지 않는 신념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경향성”에 있다. 자유를 외치면서도 노예의 길을 가는 어리석음이다.‘탐욕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의(大義)도 잃고 자유도 잃는다. 그물에 걸리는 이유는 물질적·외형적 가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돈·권력·명예가 목적이 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근심꺼리가 되어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인들의 불행은 초심을 잃고 권력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서 온다. 권력·명예·자유를 모두 잃어버린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적 종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어떻게 하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물 자체가 문제다. 바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마음의 거름망’을 촘촘하지 않고 성글게 해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사고의 유연성을 잃으면 자유로울 수 없고 변화에도 적응하지 못한다. 자신을 옭아매는 수많은 ‘편견의 그물’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특히 권력자는 자신을 둘러싼 ‘예스맨(yes man) 그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통·혁신·변화를 가로막는 낡고 쓸모없는 그물들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나아가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면 ‘마음의 근력’도 키워야 한다. 성찰과 명상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수행을 통해 마음의 근력을 단련함으로써 자유·진리·평화의 삶을 만들어야 한다. 물질에 집착하면 ‘정신의 근력’을 키울 수 없고, 그물에 걸린 삶을 합리화하면 ‘바람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자유인은 역경 속에서도 결코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피는 희망의 꽃을 아는가. 엄동설한(嚴冬雪寒)에 피는 ‘매화의 기개’와 ‘동백의 열정’을 배워야 한다.

2024-01-01

명분 없는 정치는 가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는 대의(大義)와 명분(名分)이 있어야 한다. 대의 없는 권력 추구는 야만이며, 명분 없는 권력 행사는 폭력이다. 정치의 이상이 대의를 구현하는데 있음에도 현실의 정치는 권력투쟁뿐이다. 대의도 명분도 없이 오직 권력에만 혈안이 된 ‘야만의 정치’ 때문에 국민의 고통이 크다.총선이 코앞인데 아직도 ‘게임의 룰’이 확정되지 않았다. 여야가 ‘명분 없는 실리’를 위해 잔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으면 손해고, 병립형으로 돌아가자니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여야는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제에 관심이 있을 뿐, 나라의 미래를 위한 대의는 외면하고 있다. ‘견리사의(見利思義)’해야 할 정치지도자들이 ‘견리망의(見利忘義)’하고 있으니 국민의 불행이요 국가의 위기다.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의 행태도 명분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동관 방통위원장을 임명하여 분란을 자초했던 대통령이 그의 후임으로 또 다시 검찰 선배, 김홍일을 지명했다. 이를 두고 야당은 물론 친여 언론들까지 나서서 방송통신분야의 전문성이 없는 ‘내 편만을 생각한 명분 없는 인사’라고 비판했다.대통령이 약속한 ‘공정과 상식’이라는 대의는 없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내 편만 집착하고 있으니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다.엑스포 유치경쟁 참패로 화난 ‘부산 민심’을 달래려고 ‘대통령의 국제시장 먹방’에 기업 총수들을 동원한 것도 명분 없는 권력의 횡포였다. 치열한 세계경제전쟁에 촌음을 아껴 써야 할 바쁜 총수들이 불려나와 떡볶이 접시를 들고 대통령 주변에 들러리서있는 모습은 안타깝고 한심하다.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정치쇼가 총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리석다.강서구청장 보선 참패로 출범한 인요한 혁신위원회의 윤핵관·지도부·중진 등의 희생 요구에 장재원 의원은 세력을 과시하며 반발하다가 마지못해 불출마선언을 했고, 진즉 물러났어야 할 김기현 대표는 용산의 눈치를 보다가 벼랑 끝에 몰리자 사퇴했다. 이 과정에서 중진의원보다 더 노회(老獪)한 초선의원들이 대표 호위무사 노릇을 하다가 이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으니 측은하다.총선을 앞두고 분출하는 정치인들의 탈당과 창당 및 그들 간의 연대도 분명한 철학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물론 제3지대가 극단적 대결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중도의 민심을 반영하고자 한다면 명분은 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권력을 목적으로 정치공학적 계산 아래 이루어지는 합종연횡은 공익을 명분으로 사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성공하기 어렵다.정치는 대의명분으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명분’과 ‘실리’가 충돌하면 대부분 실리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실리, 즉 권력은 명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다.더욱이 그 실리가 국민과의 약속을 파기해서 얻은 것이라면 불신을 자초함으로써 결국 권력도 잃게 된다. 정치지도자는 명분과 신의를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야 한다.

2023-12-18

여야 혁신경쟁,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화두는 또 다시 ‘혁신’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상투적인 구호다. 그 동안 여야가 경쟁적으로 내세웠던 수많은 혁신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또 혁신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진정성 없는 ‘혁신 쇼’를 반복해왔기 때문일 것이다.권력정치에서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다. 마키아벨리(N. Machiav elli)는 “강력한 적과 미온적인 동지, 그것이 바로 혁신이 성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라고 했다. 혁신에 저항하는 기득권세력은 강력한 반면, 그들의 저항을 돌파해야할 혁신파의 힘은 약하고 그 태도는 소극적이다. 권력은 달콤하지만 혁신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정치혁신이 성공하려면 ‘왜’ 그리고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혁신의 출발점은 진정성 있는 반성과 성찰인데,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반성은 거짓이고 혁신은 위장일 뿐이다. ‘비윤’의 비판을 ‘내부총질’로 매도하는 ‘친윤’, 그리고 ‘비명’의 비판을 ‘수박’으로 폄훼하는 ‘친명’이 바로 혁신의 걸림돌이다.이러한 점에서 혁신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 여야 혁신의 키(key)는 누가 쥐고 있는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야당대표의 사법리스크와 ‘개딸정치’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 여야의 혁신경쟁을 대통령과 야당대표의 반성·성찰·의지의 경쟁으로 보는 까닭이다. 대통령이나 당대표에게 쓴 소리, 바른 소리를 못하는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혁신을 요구하는 ‘비윤’과 ‘비명’의 고언을 수용하지 못하는 권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혁신의 또 다른 장애요인은 기득권세력의 인적·제도적 저항이다. 인적 차원에서 볼 때 야당의 김은경 혁신위원회는 당내 주류의 눈치를 보다가 제대로 혁신하지 못했고, 여당의 인요한 혁신위원회 역시 당 지도부·윤핵관·TK중진 등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유명무실하다. 권력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는 자기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정치혁신은 말장난에 불과하다.제도적 차원에서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 집착이 선거혁신의 최대 걸림돌이다. 양당은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야합해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야가 꼼수를 쓴 위성정당들이 비판받자, 여당은 퇴행적인 ‘병립형 비례대표제’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고, 야당은 위성정당 방지를 주장하지만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여 선거법 혁신에는 소극적이다. 이러한 양당의 행태는 국민의 다양한 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반민주적인 정치적 야합이다.이처럼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몰염치한 정치인들에게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혁신을 주도해야 할 거대 양당이 ‘이권 카르텔’에 안주함으로써 오히려 혁신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이 선거와 투표를 통해 정치인들의 잘잘못을 심판함으로써 지속적인 혁신을 추동(推動)할 수밖에 없다.

2023-12-04

서울공화국 vs 국가균형발전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총선용 포퓰리즘 광풍이 불고 있다. 보선 참패로 수도권의 싸늘한 민심을 확인한 여당이 총선전략으로 ‘메가시티(megacity) 서울’을 띄웠다.이미 정치·경제·사회·문화가 고도로 집중된 ‘서울공화국’인데 ‘메가시티 서울’은 또 무엇인가? 지방은 소멸위기인데 헌법 제123조에 규정되어 있는 ‘국가균형발전’의 헌법적 가치를 수호할 의지는 있는지 묻고 싶다.서울은 ‘너무나 메가’해서 주택·교통·교육·직장·과잉경쟁의 부작용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전국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지방은 역대 정권의 ‘균형발전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은 오히려 약화되어 고사 직전에 있다. 그동안 지방 인구를 빨아들여 버텨온 서울공화국이 멀지 않아 지방이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그럼에도 여당이 또 다시 서울공화국에 매달리는 이유는 뻔하다. 지방인 영남과 호남의 표심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총선 승패를 결정짓는 수도권은 가변성이 크기 때문이다. 수도권의‘떠난 표심’을 되돌리기 위해 극약 처방을 한 것이지만, 이것이 ‘승부수’가 될지 ‘자충수’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서울확장론’이 서울과 지방, 인접도시의 서울편입 여부, 그리고 서울에서도 지역적 편차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메가시티 서울’과 ‘지방시대’의 양립은 희망에 불과하며 현실에서는 충돌한다. 서울이 집중화될수록 지방소멸은 더욱 가속화 될 뿐이다. 양자관계에서 우선은 ‘헌법적 가치인 국가균형발전’이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도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방 거점도시의 경쟁력을 키우는 균형발전전략이 우리의 활로라고 지적하고 있다.따라서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은 서울을 확장하기 전에 문제의 발생 원인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국민의힘 5선의 서병수 의원은 “이미 ‘슈퍼 울트라 메가시티’인 서울을 더 ‘메가’하게 만든다는 건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은 메가시티가 아니라서 문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메가시티라서 문제인 것이다.설사 서울의 확장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서는 ‘지방의 부활’ 다음이다. 지방소멸을 막는 것이 서울확장보다 훨씬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지방이 죽으면 서울도 죽는다.지방 부활의 전제조건은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이다. 따라서 대선공약인 ‘500개 공공기관의 2차 지방이전’부터 조속히 실행해야 할 것이며, 메가시티도 서울이 아니라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여수·순천·광양처럼 지방에서 먼저 추진되어야 한다.국가발전전략은 면밀한 연구와 공론화 과정이 필수라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김대기 대통령실장은 ‘메가시티 서울’에 대해서 “대통령실과 여당의 사전 협의는 없었다”고 했으니 어이가 없다. 정부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총선용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오죽하면 여당의 유정복 인천시장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치 쇼”라고 비판했겠는가.총선만 생각한 정략적 접근으로서는 서울의 문제도 지방의 문제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2023-11-20

‘윤심’이 아니라 ‘민심’을 받들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속담에 “죽어봐야 저승을 안다”고 했다. 정부·여당이 강서구청장 선거에 올인 했으나 참패하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다. 이제야 윤 대통령은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나부터 반성하겠다”고 했고, 여당은 환골탈태하겠다면서 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총선을 앞두고 저승이 어른거리니 겁이 나서 허둥대는 모습이 측은하다.필자는 이미 본 칼럼을 통해 여러 차례 정부·여당에 고언(苦言)을 했다. “제주 돌담이 대통령에게”(2022년 8월 9일),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보라”(2022년 9월 6일), “당심·윤심·민심”(2023년 1월 31일), “공정과 상식, 그 표리부동에 대하여”(2023년 2월 28일), “중도층의 표심이 두렵지 않은가”(2023년 10월 10일) 등이 대표적이다. 유사한 비판과 충고들이 다른 언론에서도 수없이 지적되어왔음은 물론이다.그럼에도 모른 채 하더니 총선이 다가오자 이제야 호들갑이다. 쇄신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혁신과 변화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인식이다. 내년 총선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중간평가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여당은 사실상 ‘용산의 출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권력은 민심을 받들면 살고 거스르면 죽는다. 윤 대통령은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했지만 말 뿐이었다. 오만·독선·불통으로 무너진 전 정권을 닮아가고 있다. 청와대를 떠나 용산으로 이전할 때의 초심은 어디로 갔는가? 소통이 막혔으니 왜 청와대를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민심이다. ‘59분 대통령’이라는 별명은 불통의 상징이다. 참모들에게 “소통을 강화하라”고 지시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나부터 반성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위기 모면용’이 아니길 바란다. ‘반성이 기만’이 되면 민심은 폭발한다. 보선 참패는 대통령이 자초했고, 총선의 승패도 대통령의 변화에 달려 있다. 정치초보가 오만해서 폭주하면 사고 친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민심은 부정평가가 긍정평가의 두 배를 넘나들고 있다. 대통령이 바뀌지 않으면 총선은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다.여당의 쇄신 역시 시급하다. 용산만 쳐다보는 무력한 당이나 ‘혁신 시늉만 내는 혁신위원회’는 없는 게 낫다. 보선 참패의 책임으로 물러난 ‘윤핵관’ 사무총장을 20일 만에 다시 총선 핵심직책에 중용(重用)한 것이 혁신이란 말인가? 위장된 혁신은 역풍을 불러온다. 또한 정당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당내 비판은 ‘내부 총질’이 아니라 ‘충언(忠言)’이다. 총선 승패는 중도층이 결정한다는 점에서 중도 확장성이 있는 당내 비판세력을 존중해야 한다. 이들이 탈당 또는 신당을 창당할 경우 수도권 선거는 더욱 어려워질 뿐이다.대통령이 민심을 오독(誤讀)하거나, 당이 ‘윤심’만 살피면 ‘떠난 민심’이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공천에 ‘윤심’이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당락은 민심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2023-11-06

가을, 나와 마주하는 거울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가을은 ‘거울’이다. 청명한 하늘, 소슬한 바람, 낙엽 구르는 소리만큼 나를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은 없다. 가을에는 사람의 마음도 거울처럼 맑아진다. 내면의 정신세계로 인도하는 가을은 나와 마주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가을의 고독과 외로움은 고요한 침잠과 사색을 가능하게 한다. 가을은 감상적 상념이 아니라 냉정한 성찰을 요구한다. 위대한 철인들이 품었던 질문을 나도 피해 갈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혁신함으로써 삶의 질적 수준을 높여나간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Hermann K. Hesse)는 “가을은 더 높은 삶으로 들어가는 계절”이라고 했다. 수준 높은 삶은 인간의 내면과 마주한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나와 마주해야하는 이유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고, 부르제(P. Bourget)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의 현실이 보여주듯이 정치꾼들이 만들어놓은 진영프레임에 갇히면 ‘사유의 정치’가 ‘믿음의 정치’로 전락한다. 광신도(狂信徒)가 된 정치팬덤들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고력이 약화되어 자기성찰이 불가능하다. 진영정치의 포로가 되어 화병(火病)에 걸린 사람들은 진영의 족쇄를 벗어던져야 그 병을 고칠 수 있다.가을은 ‘비움의 철학’을 가르쳐준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구르는 소리는 세월이 가는 소리다. 가을은 ‘집착의 계절’이 아니라 ‘버림의 계절’이다. 인간은 탐욕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건강은 몸(육체)과 마음(정신)이 동행해야 하는데, 마음 챙김이 없는 육체의 건강은 공허할 뿐이다. 우리의 삶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온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는 가을의 가르침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가을은 ‘결실’과 ‘소멸’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결실의 풍요로움에 감사하는 것도 가을이며, 다가올 북풍한설을 염려하는 것도 가을이다. 가을은 오색단풍의 환희와 바람에 뒹구는 낙엽의 쓸쓸함이 공존하고 있다. 가을의 양면성은 나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나와 마주한다는 것은 나의 장점만이 아니라 부족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단점들까지도 솔직하게 보는 것이다. 가을의 투명한 거울에 비추어 현재의 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미래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가을에는 누구나 생각이 깊어진다. 구도자가 되어 자연의 섭리를 깨달음으로써 참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돈·권력·명예를 쫒아서 진흙탕 싸움에 휘둘리다보면 정작 중요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살펴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청명한 가을 하늘에 비추어 맑은 영혼을 찾아내고, 소슬한 바람에 구르는 낙엽의 소리를 들으러 홀연히 떠나야 한다. 나를 만나러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야 한다.

2023-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