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정치’가 국민을 짜증나게 하고 있다. 집행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이나 입법권력을 가진 야당이나 하나같이 자기성찰은 없고 정적(政敵) 공격에만 혈안이다. 민생은 외면하고 ‘네 탓 공방’으로 날을 새고 있으니 ‘정치의 존재이유’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정치인들의 오만과 독선, 확증편향, 선택적 정의, 내로남불 행태는 전혀 변화가 없다. 여야가 바뀌었을 뿐, 권력은 자기성찰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권력은 ‘편견과 독선의 괴물’로 전락함으로써 정치는 국민에게 ‘희망이 아니라 근심’이 되고 있다.
이처럼 권력은 왜 성찰에 인색할까? 그 원인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성찰을 위한 전제는 ‘경청(傾聽)’이다. 타인의 고언(苦言)을 겸허히 듣고자 할 때 비로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은 커질수록 자기중심성이 강해짐으로써 타인의 충고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권력의 크기와 성찰의 가능성이 반비례’하는 까닭이다.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내로남불’은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성찰을 거부하면 ‘소신’이고, 상대가 성찰을 거부하면 ‘아집’이라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니 ‘내 탓은 없고 남 탓’만 하게 된다.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을 탓하면서 적폐청산에 올인(all-in)했고,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을 탓하면서 새로운 적폐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불행하게도 ‘내 탓이오’라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권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게다가 여야의 강성 지지자들, 즉 정치팬덤들의 극단적 행태도 권력의 성찰을 가로막고 있다. 좌우의 팬덤들은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당 내부에서 제기되는 합리적 비판까지도 이적(利敵)행위로 몰아서 집단린치를 가하고 있다. ‘충신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내부비판을 막고 있으니 권력의 자체교정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권력의 성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성찰 없는 권력은 국가적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주권자인 국민은 ‘엿과 채찍’으로서 정치인들의 성찰을 유도해야 한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권력의 표리부동(表裏不同)’에 속지 말고, 위선적 권력은 가차 없이 비판하고 성찰하는 권력은 격려해야 한다. 특히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권력에 직언하는 충신들, 그리고 정치팬덤들의 비열한 공격을 받고 있는 내부비판자들에게는 성원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
반면에 성찰을 거부하는 오만한 권력은 미래가 없음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권력의 속성상 자기성찰은 쉽지 않기 때문에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는 국민이 채찍을 들 수밖에 없다. 최선의 방법은 대선·총선·지선 등의 선거를 통해서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가오는 총선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보다 자기성찰에 충실한 정당과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퇴행적이고 야만적인 한국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