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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법치를 파괴하는 정치모리배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이나 무리’를 모리배(謀利輩)라 한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판에는 이런 모리배들이 득실거린다. 이들은 자신의 안위와 이득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기본 틀인 법치(法治)를 파괴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삼권분립은 무너지고, 입법·사법·행정부가 좌경이념의 진영논리로 한 덩어리가 되어 법치와 국가 체제를 심각하게 훼손했다.소위 ‘검수완박’을 놓고 온 나라가 뒤끓고 있다. 며칠 전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여·야 원내대표가 받아들여 합의를 하더니, 대다수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야당이 합의를 번복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위헌의 소지가 있는 국기문란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것이 과연 문재인 정권이 추구하는 정의로운 검찰개혁이라면 당연히 정권 초기부터 공론화하고 입법절차를 밟아야 했다. 검찰이 지난 정권을 적폐로 몰아 수천 명을 수사하고 수백 명을 기소할 때는 박수를 쳐놓고 이제 저들의 적폐가 도마에 오르자 서둘러서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겠다는 것은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법치파괴가 아닐 수 없다.좌파정권에 국회 다수의석을 몰아준 것은 망나니에게 칼자루를 쥐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 기본 취지인 토의나 협상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망나니의 칼춤을 방불케 하는 전횡으로 법치를 누더기로 만들어 버렸다. 걸핏하면 수적 우세를 내세워 저들의 입맛에 맞게 법조문을 뜯어고치거나 위헌의 소지가 있는 법안을 밀어부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흔히들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의한 제도라고 하지만, 히틀러의 나치가 그랬듯이 다수에 의한 결정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국회의 다수의석으로 밀어부친 입법권의 횡포가 어떻게 민주주의와 법치를 훼손할 수 있는가를 역력히 보여주는 현실이다.영국에서 비롯된 법치주의는 절대군주의 권력을 견제하여 군주의 자의적인 통치를 막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에 의해서만 통치하게 하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통치를 법에 의한다는 것만으로는 권력자의 자의를 통제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데 충분하지가 않다. 지금처럼 여당이 국회의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정권이 사법부를 장악한 경우엔 법치가 오히려 권력의 전횡을 합법화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실질적 법치주의’라는 개념이다. 국가권력을 단순히 형식적인 법치가 아닌 헌법의 실질적인 가치에 귀속시키는 원리다. 즉, 모든 국가권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게 되고, 모든 법률은 이 헌법의 최고 가치를 실현할 때에만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아무튼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훼손한 폭거로 역사에 남을 일이다. 자의로 법을 고쳐 형법체계의 근간을 파괴하는 짓을 공청회나 여론수렴은 물론 국회토론 등의 충분한 과정과 절차를 거치지 않고 날치기로 의결한다면, 그 불의한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2022-04-28

카플레이션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카플레이션(Carflation·자동차와 인플레이션을 합친 용어)이 심화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동차 제조에 필요한 각종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고 있기 때문이다.우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 코로나 봉쇄 등 국제 정세 악화가 주요 요인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도 카플레이션 영향을 미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완성차업계에 따르면 차량 가격은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거치며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지난해 승용 모델 평균 가격은 4천759만원으로 전년 대비 13.8% 올랐다. 기아의 지난해 레저용차량(RV) 가격도 4천130만원으로 전년 대비 13.9% 상승했다. 국내 차량의 대당 평균가격도 4천416만원으로 처음으로 4천만원선을 돌파했다.카플레이션은 올해 하반기까지 지속될 전망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의 코로나 봉쇄 등으로 각종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고 있기 때문이다.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바로 차량용 강판가격 인상이다. 철강과 완성차업계는 최근 강판 가격을 톤(t)당 15만원 가량 인상하기로 잠정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철강 가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실제 철광석 가격은 지난 23일 기준 t당 150.5달러(약 19만원)로 연초에 비해 22.5% 올랐다. 이외에도 전기자동차의 핵심으로 꼽히는 배터리 생산 원자재인 니켈·코발트를 비롯해 자동차 경량화 필수 소재인 알루미늄 등 원자재 가격이 오르고 있다.완성차업계는 개별소비세 인하 폭 확대 등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치품이 아닌 자동차의 개별소비세 폐지에 점차 힘이 실린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4-27

내려가는 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장규열한동대 교수 긴 터널이었다. 마스크와 함께 두 해를 훌쩍 넘겼다. 스산한 거리를 만나 소상공인들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학생이 사라진 강의실은 쓸쓸하였다. 손님이 없는 극장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학교 운동장이 공터가 되었고 도시의 빌딩 숲까지 한산하였다. 일일 감염자 숫자에 때로 예민했지만,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에 온 세상이 잠식당했다.이제는 끝이 보이는지 급격하게 숫자가 내려간다. 급격한 하락세에 코로나19는 감염병 등급마저 2급으로 강등되었다. 확연한 내림세를 의학계는 ‘안정적 감소세’라 부르고 팬데믹(Pandemic)이 엔데믹(Endemic)으로 바뀌어간다고 표현한다. 무서운 전염병이 아니라, 늘 존재하는 풍토병 정도로 보겠다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막을 내렸고 학교들이 전면 대면수업에 돌입하였다.기세가 꺾인 건 분명하지만, 끝나지는 않았다. 대한의사협회가 ‘코로나 종식이 아니며 마스크 착용의무조치를 해제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경고한다. 돌이켜 보면, 코로나가 시작되던 첫 해의 봄을 넘기며 한 차례 긴장이 느슨해 지기도 하였다. 스러진듯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하루에 몇만씩 신규감염이 발생한다.등산을 즐긴다면, 사고는 올라갈 때 보다 늘 내려오는 길에 만난다. 사회통계에 따르면, 교통사고도 하루 중 귀가 길에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게 아닌가. 비행기는 이륙보다 착륙이 어렵다고 한다. 만날 때 보다 헤어질 때 좋게 마무리하는 게 어디 쉬운가.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총,균,쇠’에서 ‘질병이 인류의 문명에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빌게이츠(Bill Gates)가 수년 전부터 팬데믹의 도래를 예견했을 뿐 아니라, 코로나19 이후에도 유사한 바이러스의 습격이 인류를 덮칠 것을 경고한다. 생활 속에서 적정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배려있는 소통과 교류에 익숙해야 한다.포스트코로나의 뉴노멀(New normal)을 다시 정리해 보아야 하며 새로운 환경과 질서를 만들어가야 한다. 디지털과 온라인 소통을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하고, 소비문화와 레저환경도 바뀌어 가야 한다. 급격하게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듯한 환상은 버려야 하고, 차분하게 새로운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 경제를 다시 일으켜야 하지만, 급하게 모든 문을 열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빠져나가는 터널의 끄트머리에 또 어떤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게 분명하다면 새롭게 만날 세상을 사려깊게 준비해야 한다. 방역과 의료체계, 소통과 협력의 양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할, 사람 간 관계형성과 유지방식, 과학문명과 세계질서의 변화 등 헤아려야 할 과제가 차고 넘친다.이럴수록 차분히 신중하게 정비하여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반갑지만 찬찬히 헤아려야 한다. 흥분하여 옛 모습으로 달려가기 보다 차분하게 포스트코로나를 맞아야 한다. 어려웠던 시간을 함께 견뎌준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마지막 언덕을 아름답게 넘었으면 한다.

2022-04-27

내나무

정미영수필가 봄기운이 완연한 내연산 수목원을 걷는다.싱그러운 나뭇가지들이 연초록 바람을 일으키며 눈인사를 건넨다. 나뭇잎 속에 담겨 있는 바람의 지문을 열심히 정독하는데, 묘목을 심느라 애썼던 어릴 적 추억이 찰랑거리는 바람결에 실려 온다.초등학교 오 학년 때였다. 집 가까이 신축 학교가 들어섰기에 친구들과 그곳으로 등교했다. 전에 다녔던 학교까지는 강둑을 걸어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늘 뭉쳐 있던 다리를 만지며, 앞으로 다리 고생은 줄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다리 대신에 손 고생이 시작되었다. 새로 지은 학교 운동장에는 돌이 많았다. 매주 월요일 조회 때나 체육 시간은 물론, 틈만 나면 돌을 주워 화단 한쪽에 돌무더기를 쌓았다.선생님들께서 돌 줍기를 시키신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뛰다가 넘어졌을 때 돌이 있으면 다칠 가능성이 높았다. 또 돌과 시멘트를 섞어 건물 뒤편 구석진 곳에 낮은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서너 마리의 토끼를 풀어놓고 키웠다.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만의 추억 만들기를 하자고 하셨다. 집에서 꽃씨나 묘목을 가지고 오라고 당부하셨다. 친구들 대부분은 구하기 쉬운 꽃씨를 가지고 왔다. 우리 집에는 마침 아버지가 마당에 심으려고 했던 동백 묘목이 있었다. 나는 신문지에 뿌리를 둘둘 말고는 비닐봉지에 넣어 조심스레 들고 갔다. 나무를 가지고 온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친구들은 나무에 관심을 보였다. 심을 장소를 물색하고 학교 창고에서 삽이며 호미를 들고 와 구덩이를 팠다. 선생님의 지시대로 땅은 알맞은 깊이로 파였는지 삼십 센티미터 자로 재어보는 개구쟁이도 있었다. 나는 뿌리가 상하지 않게 손으로 흙을 덮고 발로 다지며 잘 자라기를 빌었다.추억 만들기는 선생님의 나직한 가르침이었다. 선생님은 평소에 우리가 주워 나른 돌멩이를 가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를 빙 둘러쌌다. 그러고는 이제 묘목은 장대비에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동안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돌들이 고마웠다. 짜증스럽던 돌 줍기가 보람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선생님은 나에게 이름표를 만들라고 하셨다. 나는 나무 이름과 소망하는 것을 빼곡히 적었다. 내가 만든 이름표를 보고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셨다.동백나무가 ‘내나무’라고 말씀하시며, 내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셨다.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는 풍속이 있었다. 아이를 족보에 올리면서 집 주위나 논두렁에 몇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딸 앞으로는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위해서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 딸이 커서 시집갈 날을 받으면 그 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주었다. 아들의 경우는 관을 짜는 데 사용되었다.‘내나무, 내나무’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부를 때마다 동백나무는 소중한 의미로 마음에 담겼다. 날마다 키 재기를 했다. 자주 들여다보며 물을 주고 말을 걸었다. 걱정이 있거나 비밀이 있을 때 친구들 몰래 찾아가 내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지끈거렸던 머릿속이 한결 나아졌다.나만의 작은 나무가 있어 생활이 즐거웠다.학교는 점점 신나는 곳이 되었다. 나는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갔다. 무릎을 굽히고 내 키를 낮춰 악수하듯 이슬 맺힌 동백나무를 살며시 잡으며 속삭였다. 꽃망울을 맺어주어 고맙다고.시간이 흘러 꽃송이가 붉게 터졌다. 꽃봉오리에 코를 박고 한참을 머물러 있으면 가슴이 찌르르 떨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감동이 전해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벅차다. 투덜이 여학생이 긍정적인 소녀로 바뀐 것은 모두 내나무 덕분이었다.나무 계단을 올라 수목원 전망대에 오른다. 드넓게 펼쳐진 숲이 바다가 되어 일렁인다. 초록 물결이 출렁대자, 어릴 적 교정에 심었던 내나무가 떠밀려와 품에 안긴다. 동백나무와의 추억들이 열심히 여물어 간다.

2022-04-27

ESG경영과 해조류

햇수로 9년 전 일이다. 출산예정일이 6일 지난 날, 터질 듯한 배를 안고 황급히 병원을 찾았다. 진통 없이 양수가 터진 상황으로 의사는 보호자를 대동한 입원을 권했다. 가족을 불러야 했지만 공공제대혈 은행에 먼저 연락을 취했다. 출산 전 연락이 닿아야 의약품 전담 특수차량이 제때 도착할 수 있다는 전언 때문. 물론 아이와 함께 하는 ‘생애 첫 기부’를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다행히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제대혈 채취도 문제없이 진행됐다. 한 달 뒤 은행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제대혈 성분 결과 연구와 기증이 가능하다는 것. 곧 의미 있게 사용될 것이라고 했다. 순간 조혈모세포 이식을 기다리는 골수병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뭉클한 순간, 새근거리며 자는 아이를 바라보자 벅찬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가 한 작은 기부가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 온 우주가 감동받는 기분이었다.그 이후 찾아온 엄마라는 극한 직업은 내 삶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물론 거창한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 장난감을 사주고 종이 기저귀를 사용하면서 스치는 생각. 이렇게 쓰다보면 내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는 어떤 환경을 마주하게 될까. 출산 전에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고민이었다. 그 후 소비와 구매에 ESG 평가 지표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작지만 소중한 우리 가족만의 환경사랑 실천방식이 됐다.잘 알다시피 ESG경영은 환경(Environment)과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등 기업의 비재무적인 요소를 기업경영에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쓰인다. 미세먼지로 아픈 횟수가 늘고, 바닷가 산책에서 쓰레기더미를 만날수록 기후변화와 탄소배출, 생태계와 생물다양성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종이 빨대를 사용하는 기업의 커피를 마시고, 지속가능성을 인증 받은 수산물을 구매했다. 특히 세계자연기금(WWF)과 네덜란드 지속가능한 무역(IDH)이 공동 설립한 국제 인증인 MSC에코라벨을 알고 난 후 제품 선택의 기준이 더 까다로워졌다. MSC(해양관리협의회)에코라벨은 생산과정에서 해양환경 훼손을 최소화했다는 인증으로 수산업 분야의 친환경인증마크다.최근에는 탄소배출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 기업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조류를 이용한 친환경기업이다. 해조류의 효용가치는 그동안 꾸준히 발표되어 왔다. 먼저 해조류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바이오에너지로 손꼽힌다. 현재도 많은 기업들이 기술개발 및 양산에 나서고 있다. 최근엔 이산화탄소 흡수율이 높아 탄소중립을 실현시킬 대체재로 떠오르기도 했다. 식품으로 소비하기 위해 양식하는 해조류 양이 늘어날수록 지구를 살린다는 개념이다.여기에 더해 신소재로도 개발되고 있다. 미국 스타트업 롤리웨어(LOLIWARE)는 해조류로 식기를 개발해 폐기물 문제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한국의 스타트업 기업도 미역귀와 우뭇가사리 등으로 친환경 종이컵과 달걀 담는 용기를 개발해 국제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해양수산부가 주최하는 창업 콘테스트에서는 해조류를 이용한 기술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대회에서는 유망 창업 아이디어로 ‘해조류를 이용한 화장품’과 ‘해조류 사료’가 대상을 수상했다. 해조류 사료의 경우 소의 헛배 부름을 막아 트름과 방귀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인다고 한다. 실제 메탄가스는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산화탄소보다 84배나 높다. 탄소중립의 대안으로 해조류가 떠오르는 이유다. 해조류가 지구를 살리고 가축의 건강까지 챙기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정현미작가 해조류의 영양학적 가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식이섬유와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 등이 풍부해 대표적인 건강식으로 꼽힌다. 사실 미역국에 톳나물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간식으로 다시마 부각을 먹는 민족은 한국 등 동아시아에 집중된 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해조류가 각광받으면서 한국의 식문화가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다. 요즘엔 미국의 아이들도 스낵으로 조미김을 먹는다고 한다.오는 5월 10일은 바다 식목일이다. 바다 속에 해조류를 심어 바다 숲을 살리는 등 바다 생태계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바다사막화를 의미하는 갯녹음 현상이 급속히 퍼지자 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바다 숲을 되살리자는 의미라고 한다. 해조류의 효용성이 주목받는 동시에 한 쪽에서는 파괴되어 가는 해조류 숲을 살리는 운동이 벌어지는 아이러니다. 해조류는 바다 숲을 이루는 근간이자 바다 생태계를 지탱하는 힘이다. 해조류가 기후변화를 감지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후변화는 내 아이의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 당장의 실천이 필요하다.

2022-04-27

거짓으로 피는 꽃

오낙률시인·국악인 살면서 그리움 하나쯤 가슴에 묻고 살지 않은 이가 있을까?봄을 맞아 산이나 들판 혹은 공원 등에서 이름조차도 너무나 아름다운 수많은 생명이 다투어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 헤치고 있다. 팬데믹으로 고통받던 우리네 인간도 거리두기 제한이 풀렸으니 저 대자연의 대열에 끼어 아름답게 피어날 그리움의 씨앗들을 사방에 뿌리며 실로 몇 년 만에 봄 다운 봄을 즐기게 될 것이다. 직장인, 소상공인, 예술인 등 많은 국민의 가슴 가슴에 지금쯤은 작고도 큰 희망의 꽃송이가 봄꽃 터지듯 번지지지 않을까 싶다. 바야흐로 움츠려져 좀처럼 피어나지 못하던 인간의 꽃 무리가 다발로 모여 피는 야생화 군락처럼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피어날 것이다.꽃이 가짜로 필 수 있다면 꽃의 존재가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만약에 눈속임으로 예쁘게 피는 꽃이 있다면 그건 아름답기에 앞서 신기한 것이거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꽃임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그 꽃을 두고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찬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말 대신에 현혹이라거나 유혹이라는 말이 그 꽃에 매겨지는 기본 이미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서 가끔은 그 꽃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인간의 웃음을 꽃의 반열에 올려놓고 보면, 앞에서 말한 ‘거짓으로 피는 꽃’을 인간의 꽃밭에서 종종 만날 수 있다는 현실에 마음이 좀 그렇다. 지천으로 피어나는 4월의 꽃밭에서 가슴 한쪽에 작고도 시린 그늘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봄이면 딜레마처럼 생각나는, 인간의 원죄 같은, 거짓으로 피는 사람의 꽃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좀 아리다. 특히 선거를 앞둔 이맘때면 그렇게 거짓으로 피는 꽃이 무리 지어서 피는 것 같아 씁쓸하다.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시신에서 떠나는 영혼은 그냥 떠나는 게 아니라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듯 사람에게 주었던 사람의 마음이 떠난다는 것 또한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에게서 사람의 마음이 떠난다는 것처럼 슬프고 어쩔 수 없는 일이 우리네 인간사 중에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운명처럼 몇 번은 만나야 하는 꽃이 가짜로 피는 인간의 꽃이라면 그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이 이렇게 찬란한 봄에 저렇게 온 대지를 뒤덮으며 거짓 없이 피어나는 식물들의 꽃을 보며 치유와 위안을 더 크게 얻게 되는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다.꽃이란 그리움 그 자체이다. 꽃은 세상 아름다운 것의 대표이며 핵심이다. 그리고 그립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표현의 역설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조상님이 그립고, 가고 없는 배우자가 그립고 나를 즐겁게 해주던 어느 날의 이성이나 정답게 지내던 형제며 친구가 그리운 것은 모두 과거 그들과 맺어 놓은 인연이 꽃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 인간은 그리운 꽃만 피울 일이다. 훗날에 누군가가 나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그런 꽃만 피울 일이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에서 피는 꽃이, 오늘 같은 봄날에도 한치 부끄럼 없이 대자연에 녹아들어 대자연의 꽃처럼 아름다워야 할 일이다.

2022-04-27

꿈이란 무엇인가?

최병구경상국립대 교수 요즘 많은 대학에서 학부생 진로 상담은 교수의 의무이다. 우리 대학도 매 학기 학생들과 꿈과 미래를 주제로 상담을 해야 한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학과 교수와 진로 상담은 당연히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진로란 자신의 관심사에 맞춰 각자 설계하고 노력하는 과정 정도로 생각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학부생 진로 상담 제도가 시행되고도 꽤 오랫동안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시대가 바뀌면 제도와 사람들의 인식도 변한다. 이제 대학은 학생의 입학부터 졸업 후 진로까지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공간이 되었다. 대학이 ‘소비자 만족도 조사 1위’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러워하는 시대이며, 수업에서 ‘가성비’를 따지는 학생들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대학이 취업사관학교가 되었다는 자조가 들려 온 지도 어림잡아 10년이니, 이제 학부생 진로 상담은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 되었다. 당연히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우리 학과 학생들의 고민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보통 처음 만나는 학생들에게는 꿈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이유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는지를 묻는다. 그럼 여지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교사, 작가, 공무원 등과 같은 특정 직업이다. 그럼 다시 물어본다. 가령 왜 선생님이 되려고 하니? 라고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는 많은 학생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안정적인 직업이라서 되고 싶다는 경우가 다수이고 일부 학생이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추억하며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한다.사실 꿈을 질문하며 내가 기대한 답변은 ‘가치’였다. 좀 더 정확히는 어떤 가치를 평생 진력을 다해 실현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 가치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 바로 직업이다. 직업 안정성만 보고 교사가 된 사람보다 윤리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더 좋은 선생님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고난이 찾아왔을 때 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크다고는 말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안정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람은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윤리적 올바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안정성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지난주 신입생들의 학창시절 고민이 담겨 있는 작문에서 성적으로 학생을 차별하는 행동과 같은 비상식적 모습을 가진 선생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고등학교에서는 우·열반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분들도 한때는 좋은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치를 잊어버리는 순간 인간은 순식간에 괴물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조급함을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 당장 어떤 직업으로 진로를 결정하기보다는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를 천천히 고민하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올바른 가치 추구라는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은 평생 반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꿈은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가치를 쫓는 과정에서 느끼는 설렘이다. 이번 주말에는 내 꿈에 대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 보아야 겠다.

2022-04-27

야만의 도시, 포항

허명환 한국재정투자평가원장 사람은 기본적으로 식물이 아닌 동물에 속한다. 동물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이다. 누, 가젤, 얼룩말, 치타, 사자, 하이에나 등이 평화롭게 사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처절하고 치열하다. 죽으려 하지 않는 상대를 잡아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적인 속성은 죽음 회피 그리고 먹기와 번식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 역시 동물이기에 그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면 명예롭고 그릇된 일을 하면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이 짐승과는 다르게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인간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동물적 속성이 견제되지 않는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되어버릴 것이다. 각자가 동물적 속성을 충족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인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찾아내었다. 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동물적 속성을 충족하면서도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이 고안된 것이다. 이때 법이란 법률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관습도 포함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정해진 법에 따라 행동할 때 진정 자유로워지고, 우리는 그것을 바로 법치라 하는 것이다.그 법을 어겨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그 법을 내가 권세를 지녔다고 내 마음대로 정하고 강요하는 것을 독재라 한다. 그런 경우 법과 정의란 강자의 이익일 뿐 약자들이 믿고 의지할 수단이 되지 못한다. 껍데기만 민주주의 운운하지 세렝게티 초원의 야만생활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 나라는 스페인처럼 한 때 융성했더라도 결국은 쇠락한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포항에서 정치를 하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양하게 시민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포항시민들이 어떻게 세월을 살아가는지 윤곽을 그릴 수 있다. 포항시민 역시 동물적 속성을 유지한다. 죽음을 회피하니 자동차도 조심해서 몰고, 코로나 방역조치에 협조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죽도시장이든 비학산이든 연일들이든 직장에서든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면서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며 후손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대부분 포항시민의 소득원은 크게 두 가지로 포스코와 포항시청이다. 포스코는 정권이 바뀌면 새로운 권력이 기존의 밥그릇 체계를 바꾸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운다. 포항시장 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선거 때만 되면 어느 줄에 설지 잘 판단해야 나중에 먹고 사는데 편해진다. 수많은 관변단체, 협회, 인쇄, 광고, 꽃집, 식당, 납품, 건설 등등 사업자들이 안테나를 높이고 줄을 댄다. 먹이가 우선이라 평상시 인간관계는 한 줌 가치도 없다. 우리 편이 아니면 아래 위도 없이 물어뜯어 댄다. 세렝게티 초원의 야만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인간의 동물적 속성상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하는 것은 푸줏간, 술집, 빵집 주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해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 했다. 그러기에 법을 지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주의 나라라면 오히려 권할 일이다.3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새 인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나 다 자기들 주장일 뿐이다. 각자의 주장을 목소리만 높인다면 포항은 세렝게티 초원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공천은 정치관행이 중요하다. 법과 원칙이 안정되어야 잠재적인 입후보자들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시장 개인에 대한 지지도와 당에 대한 지지도 차이를 이용한 교체지수를 4년 전에 적용 않다가 이번에 적용하거나, 일부 시군에만 적용하면 관행에 맞지 않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야지, 권세 쥐었다고 그 때 그 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적용하면 법이란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 힘 있는 곳에 붙어야 먹고 산다며 민초들을 야만의 세계로 인도하는 꼴이다.진정한 포항의 지도자들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줄 알고, 명예와 수치를 알며,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옳음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공직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일시 담임을 할 뿐이다. 선출직 권력이 천년만년 갈 듯 옳음보다 이익만 쫓고 그것에 빨대 꽂아 단물 빨아대는 기생세력이 기세등등 하는 한 포항은 세렝게티 초원이 된다. 항상 양지바른 곳만 찾는 해바라기가 득세하는 한 포항은 쇠락하는 야만의 도시가 될 뿐이다.

2022-04-26

그 많던 꿀벌은 어디로 갔을까

영화감독 M.나이트 샤말란은 초현실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감독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식스 센스’에서부터, ‘싸인’, ‘언브레이커블’ 3부작, ‘데블’, ‘비지트’, 최근의 ‘올드’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하나의 이상 현상을 전제한 후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상의 뒤틀림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이상 현상을 영화의 주된 장치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샤말란 감독의 영화가 포착하는 세계란 이해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느끼는 공포가 어떤 것인가를 극대화시킨 세계라 할 수 있다.그렇기에 샤말란 감독의 영화는 ‘코즈믹 호러’와 닮아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이 감히 대적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거대한 미지’로 인해 촉발되는 공포다. 오로라나 거대한 협곡, 인간의 인지를 아득히 뛰어넘는 크기의 현상을 마주할 때 느끼는 경이로움과 숭고함과 같은 부류의 공포감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영혼이나 악령 혹은 초능력자나 시간 가속과 같은 비일상적이며 불가해한 사건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샤말란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장치란 그러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전제라 할 수 있다.그런 샤말란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해프닝’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이유 없는 ‘자살’이다. 어느 날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현상이 특정한 개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산책을 하던 사람이, 책을 읽던 학생이, 일을 하던 인부가 갑작스레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인간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현상을 해석하고자 여러 가지의 가설을 내놓기 시작하고, 독가스 테러일 것이라 가정한다. 때문에 영화에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가정에 초점을 맞춰 살아남기 위한 행로를 결정하지만, 그와 같은 가정과 가설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테러일 것이라는 예측에 그들은 한적한 교외로 향하지만,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의 사건이 벌어지며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버리고 만다.이유를 알 수 없는, 그러나 계속해서 벌어지는 ‘해프닝’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이유를 알 수도, 그렇기에 저항할 수도 없는 불명확한 대상 앞에서 인간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한없이 무력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가 으레 그렇듯, 이 영화 또한 우연의 우연이 중첩되며 가까스로 사태는 진정되지만 공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상 현상이 사실은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 기제로 인해 만들어진 독소로 인한 것이었으며, 때문에 언제든 사태는 반복될 수 있다는 암시가 남기 때문이다.물론 이와 같은 가정은 비과학적이며 극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쉽사리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영화의 초반부에 제시되는 하나의 설정 때문이다. 그것은 꿀벌의 실종이다. 갑작스럽게 시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꿀벌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사라지는 것인가. 이것은 단지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섬뜩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도 꿀벌의 실종에 대해 여러 가설을 내놓고 있지만, 그 이유를 완전하게 해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과연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꿀벌의 실종이 인간의 집단 자살 현상이라는 파국적인 결말의 전조로 설정되어 있었던 것을 떠올려보자면, 현실의 이와 같은 사건 또한 더 큰 비극과 파국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일지도 모른다.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초래될 비극의 전조 말이다.우리가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의 문제를 더 이상 쉽사리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며 이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은 눈앞에 벌어지는 자연 현상에 대해 전지전능하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사례들을 단지 ‘해프닝’으로 치부함으로써, 우리가 자연을 충분히 이해하고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견고한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의 무지와 환상의 대가는 언제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샤말란 감독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뿐인 채로.

2022-04-26

사랑하는 일

설레는 순간을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커피를 몇 잔이나 들이켠 것처럼 심장이 자꾸만 뛰고. 늦은 밤 침대에 누워도 잠은 쉽게 오지 않고. 양 발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따금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보면 흔히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말로 외로움과 고독을 떠올리기도 한다. 외로움과 고독은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집어 삼키는 괴물처럼 성큼성큼 다가온다.그것은 인식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이라서 무엇보다 인간이 혼자 있을 때 더욱 거세게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이 괴물이 두려워서 타인을 찾아가기도 한다.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면 외로움과 고독은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느껴지고 일종의 안심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괴물은 언제고 다시 찾아올 수 있으므로 불안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구원해줄 미지의 상대를 간절히 기다리기도 한다.불안과 고독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찾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이 아닐까.혼자서 무시무시한 괴물을 물리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분명 몇 번이고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먼저 보살피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쓸모없게 느껴지고 아름답지 않은 부분까지도 감싸 안을 수 있는 너른 포용력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존재인 자신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신뢰하게 되었을 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타인을 사랑하는 일까지 나아가게 된다.불가해한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문자 그대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까다로운 일을 번번이 해내는 이상한 존재들이다.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겉으로 보기에만 예쁘고 반짝이는 모습이 아니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오히려 괴로운 일에 가깝다. 대상을 사랑하는 일은 영원할 수 없다. 언젠가는 상실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언제나 이별은 힘겹다. 사랑했기 때문에 더욱 괴롭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고 외치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한다. 설레고 기쁘고 즐거운 것을 넘어서서 아픔과 고통까지도 감내한다. 그러니 사랑은 슬픔까지도 기어이 껴안고야 마는 행위이며 이는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사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고자 하는 노력의 영역이다. 인간은 평생 오직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좋거나 싫다고 결정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은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혼자였다면 결코 맛보지 않았을 음식의 맛을 느끼게 되고, 묻지 않았던 질문에 관한 답을 찾게 되며, 그동안 자신이 아니라고 믿어왔던 것을 긍정하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의문하게 되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사랑하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자기에게 갇혀 있던 시야는 계속해서 넓어지게 된다. 상대의 어려움을 고민하고 인간을 넘어선 생명의 영역에 대해 생각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아스팔트 사이로 아무렇게나 피어난 들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일상의 아주 작은 영역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은 자기 반경을 무한히 넓히는 일이며 끊임없는 성장을 하게끔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세상의 모든 언어를 쥔다고 해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전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온갖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놀라운 형식으로 발현될 때 우리는 어렴풋하게 그것이 사랑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뿐이다.‘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구절은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끝난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모순을 경험하면서도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일.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타인을 신뢰하게 되는 일.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일. 슬픔까지 기꺼이 껴안으면서도 이토록 복잡한 세계까지 이해하게 일. 일말의 가능성을 믿는 일.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끝끝내 해내야만 하고 자신도 모르게 이행하고 있는 신비한 사랑의 영역이다.

2022-04-26

신공항 특별법, 대구시장선거가 기회다

심충택 논설위원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인 홍준표 의원은 지난 19일 열린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대구 50년 미래번영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대구통합신공항 건설과 동촌후적지의 성공적인 개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항산단 200만 평을 조성해 대기업과 첨단산업을 유치하고, 대구 동촌 이전터는 첨단관광상업지구로 개발하며 아파트는 짓지 않겠다”고 했다.TV토론회를 지켜보면서 홍 의원의 이 공약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대구는 말할 것도 없고 비수도권 대도시의 가장 큰 현안은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취업할 만한 일자리를 많이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기업을 유치해야 한다. 국내에 있는 대기업이든, 해외에서 국내로 다시 리턴하는 대기업이든, 지자체가 깜짝 놀랄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정부가 압력을 넣는다고 해서 지방도시로 선뜻 이전해 오지 않는다.대기업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국제사회와 24시간 연결돼 있는 관문공항이 있어야 한다. 홍 의원은 평소에도 기자들과 만나면 “대기업들이 수도권 입지를 선호하는 것은 항공화물의 거의 100%를 인천공항에서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지방도시가 인근에 하늘길을 열어 기업 물류비를 줄여주고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면 땅값이 비싼 수도권을 선호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문제는 국비지원을 받아 통합신공항을 건설하려면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신공항 건설의 제1관문인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와 국가 재정지원을 받으려면 홍 의원이 이미 국회에 발의한 특별법 제정이 선행돼야 한다. 다행인 것은 윤석열 당선인이 지난 2월 15일 동대구역 대선 유세에서 통합신공항 건설을 위해 확실히 협력과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도 신공항 국책사업화를 위한 관련 TF가 꾸려지고, TF 첫 간담회에서 그동안의 최대현안이었던 국비 지원과 공공기관 개발참여가 긍정적으로 검토됐다.차기 정부가 특별법 제정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칼자루를 쥔 측은 국회 다수의석을 가지고 있는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2월 대구경북신공항 특별법은 보류한 채 가덕도 특별법만 통과시킨 전례가 있다. 부산과 대구의 갈등을 유발시켜 정치적 이익을 도모한 것이다.밉든 곱든 지금으로선 대구경북신공항 특별법이 제정되려면 민주당이 찬성하지 않고는 달리 길이 없다. 민주당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이번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한 여야 후보들이 특별법 제정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현재 민주당에서는 서재헌 전 대구 동구갑 지역위원장, 정의당에서는 한민정 대구시당위원장이 출마 의사를 밝힌 상태다. 선거운동 기간 중 여야후보들이 TV토론회 등을 통해 특별법 제정 촉구결의에 대한 합의안을 만들어 각 정당으로 하여금 당론으로 채택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홍 의원이든 서 위원장이든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제안을 하면 지방선거를 특별법 제정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

2022-04-26

정치 양극화

우정구 논설위원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나와 친한 친구가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을 반드시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다. 경우에 따라 그 정치인을 싫어할 수도 있는 것이 유권자의 정치적 호불호다.이런 사례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극단적 사례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다. 동일 사안인데도 불구, 여당 지지자의 80%는 반대를 하고 야당 지지자의 80%는 찬성하는 경우다. 사안의 중요성보다 지지 정당의 호불호에 따라 지지자의 뜻이 반영되는 결과다.정치가 타협과 수용을 전제로 한다지만 이 정도쯤 되면 타협의 여지는 거의 없다.더 문제는 해결점을 찾겠다는 노력보다 서로를 악마시하는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절친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지금 한국적 정치 상황이 이 지경이다.특히 대선 결과가 극소한 격차로 승부가 남에 따라 여야는 서로의 존재감에서 밀리지 않는 분위기다. 검수완박을 둘러싼 극한 대립도 이런 정치적 배경을 안고 다툼을 벌이는 양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얼마 전 한국행정연구원(KIPA)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평가 비율을 추적 분석한 결과, 여야 지지자간의 격차가 해마다 심화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김영삼 정부 당시 39% 포인트였던 여야 지지자간 대통령 지지율 격차가 문재인 정부에 와서는 84% 포인트까지 벌어졌다고 했다. 민주화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도 나왔다.정치의 양극화는 구조적으로 정치분열을 초래한다. 당연히 민주주의 발전에도 나쁘다. 새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지금 우리 정치권은 극심한 대립 국면에 빠져있다. 국민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2-04-26

마이걸 <Ⅰ>

안나는 헬스트레이너였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스포츠센터 소속으로 일하던 중 만식의 집으로 출장을 갔다. 만식을 담당하던 트레이너가 교통사고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트레이닝을 받은 지 두 달이 되었을 때 만식이 안나에게 제안을 했다. 스포츠센터 그만 두고 내 개인 트레이너가 되는 게 어때? 원한다면 지낼 방도 마련해주지. 충분한 급여와 기대 이상의 자유 시간,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안나는 만식의 개인 트레이너가 되었다. 그래도 남잔데, 한 번 더 생각해봐. 안나의 어미가 말했었다. 아빠보다 더 나이 든 할아버지니 걱정 마. 안나는 여행 가방에 속옷을 넣으며 대답했다. 아들이 하나 있다는데 같이 사는 것은 아니니 그것도 걱정할 것은 아니라 했다.사귀던 남자가 반대했다. 안나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만식의 집으로 짐을 옮기던 날 안나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방에서 만식이 직접 골랐다는 침대에 앉았다. 차라리 잘 되었어. 헤어질 이유가 필요했어. 엉덩이로 매트리스의 쿠션을 확인하며 혼잣말을 했다.만식은 건강한 남자였다. 규칙적인 트레이닝과 의료진의 정기적인 관리 그리고 인공 장기들이 만식의 건강을 지키고 있었다. 트레이닝 중 만식의 옆구리에 안나의 손이 스쳤을 때, 안나의 가슴이 만식의 등에 닿았을 때, 안나가 허리를 숙여 시범이라도 보일 때면 만식의 몸은 뻣뻣해졌고 얼굴은 붉어졌다. 잠시 동안은 숨을 쉴 수 없었고 어지러웠다. 인공 심장만이 아무 일 없는 듯 규칙적으로 뛰었다. 저 나이에도? 안나는 놀랐다. 그리고 궁금했다. 일부러 몸을 대어 보기도 했고 몸매가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만식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만식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저앉거나 몸을 돌려 허공을 보면서도 힐끔거렸다. 안나는 만식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안나와 만식의 운동시간은 놀이 시간이 되었다. 놀이는 둘 사이를 친근하게 만들었고 친근함은 둘의 나이를 잊게 만들었다.건강과 재산을 가진 수컷들이 다음으로 관심을 가질 것은 뻔했다. 권력, 그리고 여자. 젊은 여자를 두고 젊은 남자와 늙은 남자가 경쟁하기 시작했다. 늙었지만 육체적으로 밀리지 않고 충분한 부를 가지고 있다면 젊은 남자와 겨루어 볼 만했다. 젊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둘 사이를 견줄 만했다. 암컷에게 수컷의 건강함이란 자신과 자식들을 잘 보살필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가죽 자켓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빨간 오픈카의 운전석에 앉아 경적을 울리고, 길을 걷던 젊은 남자가 놀라 몸을 피하고, 운전석 옆자리의 젊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장면은 티브이 광고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안나도 그랬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젊은 남자와 사귀며 그의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전 부인과 사별한 돈 많은 늙은 남자와 사귀며 그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만식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안나는 자신이 몸을 팔고 있다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 주고받은 감정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겼다. 상대가 젊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 그게 어때서? 그 뿐이었다. 사람들은 안나와 같은 여자를 마이걸이라 불렀다.안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랑은? 사랑? 사랑이야 언제든. 나는 아직 젊잖아.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만식은 안나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날 필립에게 안나를 소개했다.-내 아이를 가졌다. 너의 동생인 셈이지. 새엄마라 부르라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 아버지의 여자고 네 동생의 엄마다.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어 주었으면 좋겠다.안나는 만식의 곁에 붙어 앉은 채 필립을 보았다.-그 헬스트레이너?필립이 물었다.-그렇게 되었다.만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애들 엄마에게서 여자 트레이너가 상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것도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그게 가능하다니. 아버지도 대단하십니다. 옆에 계신 분도 대단하시고. 아들 불러 자랑하실만하네요. 요즘 말하는 마이걸, 뭐 그런 겁니까? 아이고, 부러워라. 부럽습니다, 진정.-그런 것이 아니다. 비꼬지 말거라.만식의 곁에 꼭 붙어 앉아있던 안나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부르셨습니까? 손녀 보기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하긴, 잘 되었네요. 언젠가 아버지 손녀가 삼촌이든 고모든 하나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한 적 있었거든요. 아버지의 손녀에게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삼촌이 될지 고모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가 널 위해 선물 하나 만드셨다고. 너하고 나이가 비슷한 할머니도 한 분 생겼다고.의자의 손잡이를 딛고 일어서려는 만식의 손을 안나가 잡았다. 안나가 필립에게 말했다./ 김강 소설가

2022-04-25

聖(성), 俗(속), 권력의 긴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영화 ‘베네데타’는 세 가지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성스러운 종교의 층위로 신의 증명에 대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종교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17세기 중세의 속, 욕망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층위를 둘러싼 권력에 대한 것이다.주인공 베네데타는 이탈리아 벨라노 출신으로 8세 무렵에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페샤의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당시 수녀가 되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며, 상당한 금액의 지참금을 지불해야 수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거래가 시작된다. 가장 성스러운 길로 들어서는 초입에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흥정이 오간다. “과일과 포도주를 25년간 수녀원에 전하도록 하겠다”는 말에 “지참금은 얼마나 내겠냐”는 수녀원장의 질문이 이어진다. 금액이 제시되고 적어도 얼마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정해진다. ‘매년 주님을 따르려는 소녀들’은 넘쳐나고 그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성스러운 영역이 아닌 지극히 세속적인 금전적 가치로 결정된다.신에게로 향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자격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고, 그 지불금액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심이 결정되던 시기. 1517년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대자보를 내건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공고했던 신의 세상, 신의 관념으로 살고자 했던 세상에 균열이 일어나며 불길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대이다.오랫동안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의 삶에 지침이 되었던 종교는 수도원과 수녀원을 중심으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고, 신성이라는 장막 속에서 성적 일탈이 다반사로 벌어지던 시기. 14세기 시작된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던 시기에 영화가 위치한다.성스러움과 세속의 욕망, 권력의 세 가지 층위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이 세 가지의 경계지점을 아슬아슬하게 오고가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성령의 증거와 증명, 세속의 욕망이 어떻게 종교적으로 해석되고 판단되는가. 성령으로 주어지는 권력의 달콤하고 위험한 줄타기를 주인공 베네데타를 통해 보여준다. 베네데타는 이 세 가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으며, 성과 욕망과 권력의 일체를 오간다.종교가 타락해갈수록 반대급부로 종교는 형식적 엄숙을 더해가면서 높고 견고한 장벽을 구축한다. 엄격하고 잔인한 잣대로 가짜 성인을 가려내는데 힘을 기울였던 시대에 베네데타를 둘러싼 실체는 쉽게 판단되지 않는다. ‘어쩌면’이라는 반문 속에서 성녀인지 악녀인지는 시대 상황과 맞물리며 두 시간이 넘는 동안 진위는 숨바꼭질을 한다.베네데타의 실체에 대한 암시는 기저에 깔고 있지만 영화는 그것의 중요성보다는 그것을 통한 한 시대의 논란이 되었던 사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다른 지점에 있음을 말한다. 성녀인가 사기꾼인가. 이 문제를 통해 한 시대를 지배했던 문제점들을 드러내며 그 시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새로이 돋아나는 기운에 대해서 말한다.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베네데타를 통해 성과 욕망, 권력의 자리를 오가며 실체에 대한 판단 근거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고 있지만 그것은 참고사항일 뿐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모호한 지점으로 이끌고 간다. 진실인가 거짓인가가 두 시간 동안 이 영화를 끌고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지만 어느 쪽을 결정짓고 영화를 보더라도 결말에 이르러 남게되는 감정은 동일할 것이다.수백년 간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과 종교적 타락의 끝지점에서 견고했던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들의 원인이 대한 진단과 사례를 종교재판을 통해 보여준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종교재판은 낱낱의 것들을 기록하고 상세하게 묘사해 기록에 남겼다.그 기록을 바탕으로 영화는 ‘주님의 신부’로서 “주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수치심이란 없다”라는 당당함으로 나아간다. 신의 믿음을 빙자한 부조리가 만연하던 시대에 신의 이름으로 육체적 관계를 통해 ‘사랑’을 알게됐다는 베네데타의 대사는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것인가. 17세기 페샤의 수녀원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실화를 기록한 ‘수녀원 스캔들 :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4-25

‘제로 웨이스트’

남광현 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나날이 심해지는 기후재난에 대응하여 전 지구적으로 2050탄소중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2030년까지 2018년 배출량 대비 40%나 되는 감축을 국제사회에 약속하였다.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온실가스 배출율이 37%로 가장 높은 전환부분(주로 발전분야)은 44.4%로 40%이상 감축을 계획하였으나 전환분야 다음으로 배출율이 높은 산업(36%)부문은 14.5%에 불과하며, 수송(13%)과 건물(7%) 부문도 각각 37.8%와 32.8%로 40%에 미치지 못한다.이로 인해 배출율이 2.4%에 불과한 폐기물부문에서 폐기물 감량이나 재활용, 바이오가스 생산 등 다양한 수단을 총동원하여 무려 46.8%의 감축을 계획하고 있다. 즉, 2050탄소중립에 20년 앞서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40%의 감축을 달성하기 위해 폐기물부문에서의 감축 약속의 강도가 가장 높다.이를 위해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쓰레기를 완벽하게 재활용하여 배출을 ‘0(Zero)’에 가깝게 최소화해야 한다.탄소중립을 위해 RE100 프로젝트 등의 전개로 신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비약적으로 높이고 에너지이용 효율을 극대화하여도 산업이나 농축수산 부문 등에서 물질이용은 불가피하며, 온실가스는 필연적으로 배출될 수밖에 없다. 즉 2050탄소중립을 위해서는 산업, 농축수산, 폐기물 등 각 부문에서 물질순환 비율을 최대한 높이고, 폐기물배출을 극소화하는 순환경제 시스템의 도입이 시급하다. 이 순환경제 시스템이 정착되어 2050탄소중립을 확실히 실현하기 위해서 국민은 이제부터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라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현실에서 제로 웨이스트는 모든 제품, 포장 및 자재를 태우지 않고, 환경이나 인간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토지, 해양, 공기로 배출하지 않으며, 책임 있는 생산, 소비, 재사용 및 회수를 통해 모든 자원을 보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미국의 제로 웨이스트 운동가 비 존슨(Bea Johnson)은 ‘5R 운동’을 제안하였는데, Refuse(거절하기), Reduce(줄이기), Reuse(재사용하기), Recycle(재활용하기), Rot(썩히기)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Refuse(거절하기)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이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며, Rot(썩히기)는 음식물쓰레기를 퇴비화하여 농업에 재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최근의 대구통계를 살펴보면 1일 쓰레기 배출량은 2014년에 1만2천489t에서 2019년에 1만5천757t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재활용량이 크게 증가하였으나 매립과 소각 등 최종 처분량도 동시에 증가하고 있어 폐기물부문 탄소배출량은 계속 늘고 있고 2050탄소중립에 역행하고 있다. 이와중에 지난 3월말에 대구시와 대구녹색소비자연대가 제로 웨이스트 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아까와 가게’ 38곳을 선정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2022-04-25

엔데믹 시대의 과제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전히 해제되고 25일부터는 주요 교통수단을 비롯해 영화관, 실내 공연장 등에서도 취식이 허용되는 등 엔데믹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는 현재 팬데믹 감염병으로 지정돼 있다.팬데믹은 세계보건기구가 지정한 감염병 최고등급으로, 전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의미한다.이제 세계 각국이 코로나19를 엔데믹으로 감염등급을 하향조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엔데믹이란 특정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질병을 의미하며, 대표적인 예가 말라리아, 뎅기열, 장티푸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엔데믹 시대의 도래에 따라 코로나로 옥죄었던 일상이 빠르게 원상으로 돌아가고 있고, 침체됐던 밑바닥 경제도 활기를 되찾을 전망이다. 다만, 사회 곳곳에서 코로나 팬데믹 후유증이 남아있다.특히 외식업계는 영업시간 제한이 풀렸음에도 정작 함께 일할 직원들을 다시 구하기가 쉽지 않아 몸살을 앓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일하던 외국인 종업원들은 이미 다 대한민국을 빠져나갔고 국내 인력은 임금을 더 준다고 해도 일할 사람이 없다.유흥업계에서 인력난은 더욱 심각하다. 쉬는 기간 종업원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거나 그만둔 경우가 많아 2년 전 인력의 절반도 못 채우고 있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곳은 외식업계뿐만 아니라 호텔업계와 서비스업 등 산업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무엇보다 코로나 유행 이후 일상에서 우울감 등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생활 제약으로 혼란을 겪고, 또 다시 일상회복이라는 변화로 생활 패턴 변화의 조짐을 보이면서 우울감과 혼란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많아진 것이다. ‘엔데믹 블루’, 엔데믹 시대의 과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4-25

물꼬 트는 나눔활동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꽃피고 새가 울며 잎새들이 싱그럽다. 화창한 날씨에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초목은 생명의 잔치를 벌이는 듯 푸르고 싱싱하다. 3년째 발목 잡던 코로나19의 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봄을 즐기는 발걸음도 잦아들며 차츰 활기를 더해가는 것 같다. 아직은 여전히 마스크 너머의 세상이지만, 그간 멀어졌던 몸의 거리두기를 없애고 마음의 거리를 좁히며 아쉬움을 달래는 표정들이 사뭇 밝고 넉넉하기만 하다.만물이 생기를 더해가는 때, 마침내 코로나의 안개도 서서히 걷히는 듯하니 날씨마저 청량하고 산천은 한껏 푸르름으로 일렁이고 있다.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취해졌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가공(可恐)의 코로나19도 홍역, 수두와 같은 2급 감염병으로 조정돼, 일종의 엔데믹(풍토병)으로 가는 대응체계 전환과 일상회복의 길이 열리고 있어서 안도와 다행스럽기만 하다. 그에 따라 최근 한강변의 나들이객이 부쩍 늘었는가 하면 전국 곳곳에서는 3년째 미뤄왔던 축제를 재개한다는 소식 등으로 확연히 달라지고 생기를 되찾아가는 모습들이 역력하다.그에 발맞춰 한동안 뜸해졌던 나눔과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어서 반갑고 고무적이다. 곧 개방할 경로당이나 무료급식소를 대청소하고 방역작업을 실시하는가 하면, 야외시설에 대한 일제점검 보수와 묵은때 제거, 칙칙한 골목길 담벼락의 벽화 도색, 바닷가와 산책로 주변의 환경정화, 어르신들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장수사진 촬영 등의 다양한 자원봉사활동이 물꼬 트이듯이 동시다발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봉사활동은 포스코 직원과 가족들이 각 부서 자매마을이나 재능봉사단 등을 통해 펼치는 새봄맞이 사랑의 손길, 희망의 나눔활동이다.포스코는 이와 같은 봉사활동을 포함, 임직원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을 활용해 운영되는 1%나눔재단의 고유한 사회공헌 활동으로 정착시켜 2013년부터 다양한 나눔 사업을 적극적,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다. 지역별 소외되거나 취약해진 계층에 대한 맞춤형 나눔, 지원사업은 물론, 아동·청소년, 다문화 가정, 홀몸어르신 등을 중심으로 1%나눔사업을 강화하고, 태풍, 화재 등 자연재난을 입은 지역사회에 임직원들의 봉사활동과 연계시켜 피해복구지원과 상생협력을 도모하는 사회공헌 및 기업시민 나눔활동의 가치를 부각시키고 있다.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나눔활동은 많은 것들을 변화, 발전시킬 수 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큰 희망의 씨앗이 되고 한, 두발 내딛는 나눔의 발걸음이 큰 세상을 움직이는 기틀이 된다. 나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함께 나누는 마음들이 자라고 있음은 따스하고 넉넉한 일이다. 배려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온정의 나눔 속에 보람이 싹트고 기쁨과 감사의 꽃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찬란한 햇볕도 나누어 가지고 싱그러운 꽃밭도 함께 뛰놀면 언제나 기쁨이 넘쳐 흐르지 않을까? 코로나로 가뜩이나 메마르고 성글어진 마음 밭에 나눔의 새순들이 신록처럼 움트고 잎새처럼 무성해지면 좋겠다. 나눔과 베풂으로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면 어떨까?

2022-04-25

경쟁력의 조건, 기본의 실천

김종찬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관성의 법칙이란 게 있다. 과학이라는 과목에서 손을 뗀 지 수십 년도 훨씬 더 된 내게 남아있는 기억으로는 가려던 것은 진행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려 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 정도의 의미다.묘한 건 이 ‘관성의 법칙’이란 게 물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일 속에서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회의,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동선으로 움직이는 출퇴근, 우리의 생활은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가던 방향으로 흘러가고자 한다.무엇을 시작할 때는 장밋빛 희망으로 넘실대고 혁신적이며 각종 다짐들로 다이어리가 가득 차다 못해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이든 취미든 익숙해지는 순간 또 관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관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건 안정을 보장받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커다란 위험은 없을 거라는 본능적인 선택,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안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건 그런 안도감이 주는 달콤함 때문인지도 모른다.개인이든 기업이든 관성의 법칙에 안주해 있다면 그 생명은 정점에서 이미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 개인이나 기업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기본의 실천’이 필요하다.논어에서도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 하여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 했다. 기본은 무엇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내 것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이기도 하고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절차이다. 기본의 실천은 사람이나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어 치열한 시장에 들어설 수 있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우리는 기계도 학습하는 상상이 현실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딥러닝(Deep Learning)을 통해 다양한 데이터들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고, 거의 무한대의 변수를 고려한 최적화된 조건으로 제어되어 불량은 줄어들면서 생산성은 최상으로 유지되는 결과를 얻고 있지만 그것의 전제조건은 기본에 있다. 그 기본이 되는 3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첫째, ‘데이터 신뢰성’ 확보이다. 데이터 신뢰성은 ‘부품의 신뢰성’이며 부품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능이 열화 되지 않도록 습도나 온도를 관리하고 최적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둘째, 완전한 점검이 돼야 한다. 점검은 자투리 시간에 한다는 생각으로 시기를 놓치게 되면 부품의 기능이 열화 되고 ‘데이터 신뢰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완전한 점검이 되기 위해서는 스킬(Skill)을 갖추는 학습, 점검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 관리자는 점검이 가능한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마지막으로, 설비관리체계의 바닥을 다지는 일이다. 거기에는 이론이 아니라 실용이며, 말이 아니라 축적이 필요하다. 새것처럼 닦고, 느슨한 것은 조이고, 마찰되는 곳은 기름 치며 기본을 실천할 때 설비는 고장이 없는 강건함으로 보답을 할 것이며 그 보답은 ‘데이터 신뢰성’에 의한 강건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2022-04-25

대나무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누구나 좋아하는 꽃과 나무가 있다. 나는 이팝나무꽃과 작약꽃 그리고 배꽃을 특히 좋아한다. 이팝나무꽃의 하얗고 풍성하며 우아하고 여유로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 작약꽃의 은은하고 새침하며 깔끔한 자태. 배꽃의 화사하고 조화로우며 미끈한 형상이 정말 멋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복숭아꽃과 배꽃을 천시하고 구박했는데, 그것은 꽃에도 인문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던 유자(儒者)들의 유난함 때문이었다.나무 가운데서는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그리고 대나무를 좋아한다. 가정집에서 느티나무를 키우는 일은 격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단풍나무를 기른다.화분에서 키우던 오죽(烏竹) 몇 그루와 산죽(山竹)을 마당에 옮겨 심었다. 단풍나무는 길이와 부피생장이 느긋한 편이다. 반면에 대나무는 감추고 있던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 저런 일이?!어째서 사람들이 ‘쑥대밭’이라는 말을 쓰는지 알게 되는 참사(慘事)가 일어났다. 어디서 날아온 지 모르게 마당 일부를 점령하여 세를 키워나가는 쑥과 오른쪽 모퉁이에서 시작하여 마당 전체를 접수할 요량으로 번지는 대나무의 위세는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쑥대밭에 가깝게 번지는 녀석들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그들과 대적(對敵)하면서 ‘방아쇠 손가락’ 증후군까지 경험해야 했으니, 이쯤이면 전쟁이 따로 없었다.올해도 쑥과 대나무는 푸릇푸릇하게 존재감을 발휘한다. 서책에서 조선의 선비들이 대나무 그림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춘하추동과 결부된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설중매, 여름의 무더위와 비바람을 견디는 난초, 서리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국화도 대단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군자 가운데 으뜸은 역시 대나무라고 한다.곧게 자라는 강직함과 속이 빈 겸허함 그리고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지조와 절개를 선보이는 대나무야말로 선비의 표상으로 최고였기 때문이다.국가가 경영하는 ‘도화서’의 화원을 선발하는 과거시험인 ‘취재(取才)’에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초의 다섯 가지 종목이 있었는데, 대나무가 그 가운데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대나무는 선비사회에서도, 화원 집단에서도 가장 사랑받은 묘사 대상이었다.조선 시대에 대나무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탄은(灘隱) 이정(1554∼1626)이었다. 세종의 고손자 이정은 왕족 출신 화가였다. 더욱이 그는 임진왜란 당시 오른팔에 왜놈의 칼을 맞아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정은 굴하지 않고 대나무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가 남긴 ‘풍죽도(風竹圖)’는 그야말로 대나무 그림의 압권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의 형상화가 최고도로 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정의 그림은 바람이 균질하게 불지 않음까지도 포착하고 있다. 아, 저런 시선과 손길을 가진 화가가 실존했구나, 하는 크나큰 즐거움이 몰려온다. 그래도 마당에서 번성하는 대나무는 근절해야 한다는 다짐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시절이다.

2022-04-24

정치적 파국 위기를 반복할 건가

위태위태하다. 정치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흔히 허니문 기간이라고 하는 인수위 단계에 선거 기간보다 더 격렬하게 정치권이 부딪쳤다. 주고받는 말도 협상 파트너의 대화가 아니다. 육탄전을 벌이는 병사를 연상시킨다.겨우 지난 22일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로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검수완박’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검사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검수완박)는 구호를 검찰총장 출신인 대통령 당선인과의 전쟁으로 생각한다.사실 경찰이건 중수처(중대범죄수사처)건 윤석열 대통령이 지휘한다. 검찰보다 더 독립적인 기구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윤석열 검찰총장에서 독립적인 수사 가능성을 봤다. 1차 ‘검수완박’을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위장 탈당하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서두르는지 알 수 없다.여야 지도부가 정치력이 없다. 그저 ‘돌격 앞으로’만 외친다. 이건 정치가 아니다. 중재안이 적절한지는 차치하고, 중재안 없이 벌어졌을 일을 생각하면 파국이다.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드는 게 정치다. 그런데 왜 국회의장이 나설 때까지 그런 시도도 하지 않았나.정치의 주도권을 정치 팬덤에게 빼앗겼다. 이번 사태도 팬덤 정치 탓이다. 팬덤에 편승만 할 뿐 설득할 리더십이 없다. 팬덤 정치는 타협이 없다. 타협은 내 것을 내줘야 한다. 그런데 팬덤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는 협상할 수 없다.팬덤 정치의 싹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다. 지금도 봉하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지역주의에 번번이 무너지던 ‘바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최대의 공로자들이다. 이전 정치인들의 지지 모임과는 다른 팬덤 현상을 보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름이 ‘노빠’다.노 전 대통령은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았다. 필요하면 설득했다. 임기 중 이라크 파병, 강정기지, 한미FTA 등 지지층의 여론과 일치하지 않는 결단도 내렸다.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지지자를 설득했다.그 이후로 정치인들에게 그런 결단력이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586에 얹혀 간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다. 정치인만 달라진 게 아니다. 지지자들도 변했다. ‘노빠’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나를 버리고 가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를 공세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비극을 겪었다는 생각이다.그 반성이 ‘노빠’를 ‘문빠’로 만들었다.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는 이름은 시시비비에 대한 팬덤의 태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우리 이니(문재인) 하고 싶은 것 다 해’라는 말도 무조건 지지하겠다는 표시다. 정치적 아젠다를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덤들의 놀이처럼 다루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비속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합리성과 자제를 포기하고, 전투력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보인다.팬덤 현상이 정치 참여를 끌어올리는 것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전체주의적 성향이다. 경쟁자를 인정하지 않고, 타도 대상으로 삼는다. 내부에서도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여야 의원 중에 이런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합리적 접근보다 승리 지상주의에 매몰돼 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자 폭탄이 겁나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나치나 중국 문화대혁명기에 경험했던 실패를 반복하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발붙일 여지가 없다.대선 결과 심각한 여소야대에 직면했다. 13대 국회의 여소야대와도 다르다. 그때는 4당 체제였다. 합종연횡할 수 있었다. 각당의 리더십도 확실했다. 지금은 그 반대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국민통합, 협치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은다. 그러나 ‘개딸’(개혁의 딸들) 등 민주당 팬덤은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24만 표 차만 생각한다. 새 정부는 경험이 부족하다. 정치력도 없으면서 국회를 우회해 돌진하려 한다. 서로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각자 가진 제도적 힘을 자제해야 한다. 팬덤을 무서워하면 정치를 할 수 없다.위기는 기회다. 극단적인 여소야대는 잘못된 선거제도 탓이다. 이참에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는 정치제도를 고민해야 한다. 김진국 고문 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본사 고문

2022-04-24

성주 미래 100년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

이규현성주군체육회 수석부회장 성주군은 미래 100년 건설을 위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남부내륙철도 성주역 유치확정, 전국 최초 단일 농작물 연소득 6천억원 달성(참외), 동서3축 성주~대구간 고속도로 건설계획 확정, 선남~대구 다사간 국도 30호선 6차로 확장, 각종 국지도 및 지방도 확장·신설, 각종 국·도비 공모사업 선정에 따른 SOC(사회간접자본)사업 추진 등 성주군이 경북의 교통·경제·관광·주거의 중심허브로 도약할 용트림을 준비하고 있다.이러한 지역 변혁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성주군을 올바르고 강력하게 이끌 리더의 존재다.그러면 어떤 리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일까?리더의 최우선 조건은 청렴이다. 청렴을 더하지 않는 능력과 소신은 바퀴없는 자동차와 같다.아무리 능력이 있고 추진력이 있다한들 청렴하지 않는 리더는 구성원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지지받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할 때 마다 의심받고 부정적인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이번 20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잘 보여주듯이 국민들의 청렴에 대한 지지와 갈망이 높다는 것을 방증한다.리더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그 핵심가치를 발굴하여 현실화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세계의 명물 성주참외”는 지난 3년간 연소득 5천억원 이상의 고소득을 유지해왔고 지난해에는 5천534억원이라는 역대 최고의 소득을 올려 순항중이다.앞으로 성주군의 참외 산업은 쾌속으로 항해할 수 있는 돛을 달아야 하는 시점이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의 산업구조가 재편되고 있다. 오프라인 중심의 경제에서 온라인 경제로 급격하게 경제의 기울기가 기울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농업부문에서도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각종 농산물이 백화점, 마트가 아닌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가정으로 배달되고 소비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다행히, 최근 몇 년간 성주참외는 라이브 커머스, 온라인 쇼핑몰, 쿠팡, 마켓컬리 등을 통해 온라인 시장에서의 성장률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올해도 5월에 개최할 예정인 참외 페스티벌은 메타버스(현실세계와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 가상세계를 일컫는 말)를 기초로 한 축제를 개최, 온라인 경쟁력을 높이고 젊은 소비자층에게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펼치고 있어 그 결과가 기대된다.이처럼 성주 참외의 미래를 위해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소비패턴 변화를 읽고 대응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진 리더가 필요하다.과거 관료주의식 탁상행정을 펼치던 시기를 지나 현재는 현장중심으로 발로 뛰는 인재가 필요하다. 현장에서 주민들과 소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발전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상황에 맞게 추진 할 수 있는 리더를 주민들은 원하고 있다. 집무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군수 보다는 마을에서 만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군수가 주민들에게는 훨씬 인간적이고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또한, 지역사회에서 행정을 이끄는 절대적인 힘은 예산의 확보다. 특히 국·도비 확보에 따라 지역의 발전 속도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내 집 드나들 듯이 중앙부처, 도청을 방문하고 또 방문해서 그들에게 성주군 발전의 비전을 제시하고 공모사업을 통해 국·도비 예산을 확보함으로써 지역 발전의 기틀을 잡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리더의 중요한 요건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경험의 유무이다.“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라는 J. 로크의 말처럼 지도자로써 여러 가지 실적을 쌓고 난관을 극복해 본 사람의 능력치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미국 대통령 중임제가 대표적인 예가 되지 않을까?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의 연속성과 성공 확률을 높혀 줄 수 있는 기대감에 국민들은 전임 대통령에게 많은 지지를 해주었고 연임을 통해 선임된 대통령은 리더로써의 능력을 발휘해왔고 지금의 위대한 미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앞서 말했듯이 성주군은 미래 100년을 위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풍요롭고 살기 좋은, 아름다운 성주를 만들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2022-04-24

읽는다

혼자 묵독한다는 것은 19세기 중반까진 불가능했다. 그 이전엔 혼자서 책을 눈으로만 읽으며 사색에 잠기면 불온하며 위험한 자로 취급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말없이 읽어 부하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시저도 연애편지를 소리 내서 읽지 않은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니 지금은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다.하지만 나는 혼자서 조용히 읽는다. 소리 내어 읽으면 집중이 안 되기 때문이다. 늦은 밤일수록 책 읽는 속도가 난다. 묵직한 책을 들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 쫙, 글쓴이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때론 내 생각은 다른데 하며 밑줄 옆에 메모를 남긴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 줄을 긋고 모서리를 접기도 해야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책 속에 있던 무심한 낱말이 그 순간 내게로 들어와 나만의 문장이 된다.물건 사는 것 자체를 즐긴다. 눈으로 하는 쇼핑을 더 좋아하지만, 가끔 꼭 쓸모가 있지 않은 물건도 보기에 좋으면 그냥 사버린다. 볼펜, 수첩, 티셔츠.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 많다. 물건뿐만 아니라 책도 충동구매를 한다. 신문에 광고를 보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책 소개하는 걸 보고 덜렁 주문해버린다.또 좋아하는 작가의 새 책이란 이유로 내용도 보지 않고 사버리기도 한다. 고인이 된 작가의 단편집이 그랬다. 가격도 만만찮았는데 지금 아니면 못 살 것 같아서 저질렀다. 한정판이라는데 하면서. 다른 물건도 그렇지만, 책은 절판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음에 사야지 하다가 놓친 책이 여러 권이다. 그래서 눈에 들어올 때 사야 한다.책이 배달되어 오는 날은 설렌다. 택배 상자를 뜯으며 연애편지를 볼 때 기분을 느낀다. 받은 책 겉장을 넘겨 그 책을 산 날짜와 이유와 그날의 기분 정도를 메모한다. 그래야 내 책이 된다. 오늘 도착한 택배는 상자가 아니라 비닐 포장만으로 우리 집까지 달려왔다. 명화가 많이 담겨 책 무게가 만만치 않은데 걱정을 하며 뜯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배달 기사가 던졌는지 다른 상자에 눌린 것인지 뾰족한 책 모서리가 눌리고 찢겨 있었다.받자마자 읽으려고 준비한 마음이 무색해졌다. 교환신청을 하니 다음날 새 책이 당도했다. 파란 표지를 조심히 넘겨 책을 두 번 받은 사연과 기분까지 적어, 내 책이라는 표시를 남겼다. 서문을 읽으며 작가의 손을 맞잡는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제 친구처럼 아는 책이 됐다. 그렇게 사 모은 것들이 한방 가득하다.문제는 다 읽지 못한다는 점. 단행본이면 그날로 보았을 것을 전집은 방학 때 읽어야지, 주말에 봐야지, 미루다 몇 년이 흘렀다. 저렇게 묶여 있으니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 못 읽은 상태다. 책꽂이를 볼 때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다. 다른 곳에 갔으면 사랑받으며 읽혔을 것을. 내 욕심에 갇혀 책꽂이에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기지개 한번 켜지 못했다. 집을 새로 단장하면서 먼저 정리한 것이 책장이다. 잡지류를 일 번으로, 색이 누렇게 변한 소설을 또 내놨다. 남편은 학창시절의 전공 서적도 버리려 했다. 안된다, 그건. 내가 그은 밑줄과 여백에 써놓은 글귀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느냐며 그 손에서 구해냈다. 두 권인 것과 죽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전집, 아이들 백과사전은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달 동안 반을 버렸다.리모델링 후 새로 맞춘 책꽂이에 주제를 나눠서 꽂았다. 역사, 시, 수필, 소설, 그림책, 그 외의 책을 영역별로 꽂으며 또 3분의 1을 버렸다. 책 사이로 난 틈으로 여유가 들어앉으니 내 마음에도 또 살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공간이 생겨 허허로웠다.조선 시대 선비들의 낭랑한 책 읽는 소리는 여인이 담장을 넘게 했고,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한 계집아이가 귀동냥으로 천자문을 익힐 수 있게 했다. 글 읽는 소리는 비록 작지만,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기도하며 오늘 밤도 펜을 들고 쓰윽쓰윽 읽는다. /김순희(수필가)

2022-04-24

‘협치(協治)’의 서광이 보인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불안한 대결의 정치,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격랑의 정치는 한국의 고질병이다. 대선이 끝난 지 달포가 지났지만 우리 정치는 여전히 대선의 연장전이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 마타도어가 판을 쳤던 선거 결과는 간발의 차이로 승패를 판가름 지었다.주변에는 이기고도 크게 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지고도 졌다고 승복하는 사람이 없다.새 내각 후보자들의 인사 청문회를 앞두고 그들의 도덕성뿐 아니라 비리와 비행이 드러나고 있다. 검찰 개혁을 빌미로 ‘검수완박’정국이 여야를 대치시키고 극한 대립으로 국민을 불안케 했다. 윤석열 정부에 기대가 컸던 사람들마저 벌써 실망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상호 거부하는 대결의 정치, 패거리 정치는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지난주 검찰개혁을 둘러싼 대결의 정국이 타협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타협의 달인이라던 박병석 국회의장의 리더십이 크게 돋보였다. 과거의 국회는 의장의 중재안이나 타협안이 여지없이 무시되고 의장실마저 점거당하는 일이 빈번하였다.박 의장은 미국 방문도 연기하고 검찰 개혁 법안의 중재에 나섰고 여야는 이에 즉각 동의하였다. 이 중재안은 여당과 야당, 대법원과 검찰, 변협과 시민 단체의 요구까지 적절히 반영하였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권의 분리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그 과도기적 조치를 인정한 것이 중재안의 주요 골격이다.6개의 중대 범죄 중 부정부패와 대형 경제 범죄는 6개월간 검찰에 한시적으로 존치하면서도 한국형 FBI인 중수청이 설립되면 이전한다는 것이다. 여당에서 172석이라는 수적 우세와 위장 탈당이라는 꼼수로 무리한 법 통과를 기획하였고, 야당은 필리버스터 등 극한 저지를 통해 입법을 저지하려는 상황에서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무척 다행한 일이다.극한적 대치상황에서 여야가 극적으로 중재안을 수용한 배경은 무엇일까.여당은 절대 다수 의석을 배경으로 법안 통과를 위한 무리수를 쓴 것은 사실이다. 안건 조정위에서 즉각 법사위로 넘기기 위한 민형배 의원의 위장 탈당행태까지 자행되었다. 이에 여론은 의회 정치의 ‘절차적 정당성’ 파괴와 의회 독재라는 비난으로 비등하였다.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 역시 검찰의 수사권 유지 및 기소권 독점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윤석열 정부의 출범에 앞선 청문회 정국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더 근원적인 문제는 검찰 총장 출신 대통령과 이에 저항하는 다수 야당의 대결 구도는 윤석열 새 정부 출범의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민생을 외면하고 코로나로 지친 여론의 질타는 여야 정치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황이 여야가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전격 수용하는 배경이 되었다.아직도 검찰은 이 중재안에 반대하고 있지만, 검찰 이기주의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야가 이번 중재안을 수용한 것은 타협정치의 모델이 될 수 있다.우리 정치는 여야 모두 상생과 화합의 정치를 외치면서도 사실상 상호 부정의 정치로 일관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는 민주주의의 과실인 선거마저 내면적으로 승복치 못하는 이상한 정치 풍토가 되어 버렸다.이런 정치문화에서 타협이나 화해는 비굴이나 굴종으로 비쳐지고, 투쟁만이 선명성으로 위장되었다. 우리 정치는 아직도 민주화 세력과 반민주화 세력으로 양분되어 상호 불신의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자기편은 빛이며 상대는 어둠으로 치부하는 네거티브 정치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같은 우군 내에도 불신과 대립의 계파 정치가 저주의 정치로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문화는 결국 적대적 공존 관계만 성립시킨다. 이번 여야의 극적인 타협을 이제 상생의 정치, 공존의 정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이제 시민 사회의 정치의식도 상당히 높아져 투쟁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20∼30대 청년들도 이념성향의 표심이 흔들리고 실용적인 이익 투표로 변화하고 있다. 고질적인 지역감정의 표심도 완화될 기미를 보인다. 우리 정치가 선진 민주 정치를 배우기에 앞서 협치의 전통을 하나씩이라도 쌓아야 한다.서구는 이미 좌파나 심지어 공산당까지 포용하는 ‘역사적 타협’을 통해 타협의 정치를 실행한지 오래다. 여야는 대선 과정에서 합의한 다당제의 협치 약속부터 반드시 지켜야 한다.이를 위해 정치인들의 구태 정치 전반에 대한 자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87 체제서 주역으로 등장했던 586 세대의 자기반성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들의 민주화 세력이라는 자부심이 기득권 세력화하여 소위 ‘내로남불’의 정치가 빈발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위장된 자유 민주주의이념에 안주하여 상대를 여전히 좌익 프레임으로 가두려 한다.이러한 구시대적 정치를 혁파하지 않고는 타협의 정치는 더욱 어렵다. 구시대 청산을 위한 개헌보다는 정치인들의 정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2022-04-24

지지배배(知知拜拜)

이원만 맏뫼골놀이마당 한터울 대표 知之知之 主之主之去之年之 又之拜알겠지요? 알겠지요? 주인님 알겠지요.떠난 지 해가 지나 다시 와서 인사드립니다.판소리 흥보가 제비노정기에 나오는 제비울음소리 대목의 일부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와 주인을 알아보고 아는 척 절을 한다는 뜻이니 지지배배는 ‘知知拜拜’라고 제비의 울음소리를 적을 수 있겠다.제비는 빈집에 집을 짓지 않는다. 상위 포식자인 사람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집의 처마 밑에 둥지를 튼다. 사람들도 삼월 삼짓날이 가까워지면 제비가 돌아올 줄 알고 둥지를 고쳐주는 풍속을 만들기도 했다. 제비는 사람의 곡식을 먹지 않고 하루 400회의 비행으로 1천 마리의 해충을 잡아먹는 농사에 큰 일꾼인 셈이니 기꺼이 처마 밑을 내어주었다.사람과 함께 사는 야생의 새가 있다니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사람에게 이로운 새이니 판소리에도 등장을 시켰을 것이다. 다리를 다친 제비를 치료해서 강남으로 돌려보내 주었더니 다음해에 은혜를 갚는 박씨를 물고와 흥보가 잘 살게 되었다는 스토리텔링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학생들에게 전통음악을 가르치는 교육프로그램을 연구/개발할 일이 생겨 연극, 미술, 판소리꾼 등 예술가들을 만났을 때 나는 주저 없이 흥보가의 제비노정기를 제안하였다.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판소리가 되어야 의미가 있다며 ‘포항예술가들의 더늠’을 해보자는 제안에 다들 찬성했고 단막창극의 대본작업에 들어갔다.지금 우리 주변의 새들이 아파트의 방음벽 때문에 많이 죽어가는 이야기처럼 새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찾아내고 새들이 멀리서도 금방 볼 수 있는 필름 막을 박을 타면 나오게 하자는 등등 온갖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흥보가가 새 지킴이 흥보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짜여진 교육프로그램은 전통판소리교육과 지구시민교육의 콘텐츠가 되어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판소리대본을 쓰기 위해 새 이야기를 찾아보니 극 제비갈매기는 겨울을 나기 위해 따뜻한 남쪽의 바다를 찾아가기 위해 1만 2천㎞를 비행한다고 한다. 그리고 6개월의 방랑생활, 다시 돌아오는데 1만 2천㎞까지 합치면 한해에만 9만㎞를 이동한다고 한다.최근 쇠제비갈메기의 한국 여름나기도 우리와 친숙하다. 매년 4, 5월 호주에서 날아와 안동호, 포항, 부산 등지에서 둥지를 틀고 여름을 나고 있다. 바다가 아닌 안동호 둥지를 튼 쇠제비갈메기 이야기는 지난 2013년부터 내륙 안동호 내 쌍둥이 모래섬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길러 다시 호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안동시는 인공모래섬까지 만들어 안전하게 호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돌보고 있다.그냥 산보하듯 강남 갔다 오는 게 아닌 것이다. 그 작은 덩치와 작은 날개로 하늘을 날며 사람은 정면으로 쳐다보기 어려운 태양을 가장 오래 보는 새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겸허해지기까지 한다.새는 하늘과 땅 ‘사이’를 난다고 ‘새’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하늘의 메시지를 땅에 전하는 전령사로 자유로움의 상징인 새들이 인간이 만든 건축물, 비행기, 농약 등에 죽어가고 도시의 확장으로 서식처를 잃어가고 있다.미국의 어느 도시에서는 굴뚝을 서식처로 삼는 칼새를 위해 초등학교 아이들이 난방은 칼새가 돌아간 뒤에 하자는 캠페인을 위해 2주간 홍보티셔츠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그리고 그 캠페인에 호응하여 어른들은 양조장 굴뚝을 무너뜨리지 않는 조건으로 야외에서 칼새를 관찰하며 술을 마시는 ‘칼새와 보내는 밤 산책’이라는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보호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새들이 도시에 찾아오는 이유는 도시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왔기 때문이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간들이 비운 거리에 얼룩말들이 다니고 유람선이 사라진 강에는 백조와 물고기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인도의 한 음악가는 연주 중에 새가 날아와 울자 연주를 멈추고 새가 떠날 때까지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새가 사라지자 자신의 음악은 저 소리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새는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메신저다.봄이 되어도 사람들은 ‘소통대신 소탕’을 하느라 시끌시끌하다. 새소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신호등을 이용해 자동차 바퀴에 견과류를 깨어 먹을 줄 아는 까마귀들에게 빵빵거릴 뿐 까마귀의 식사를 웃으며 도와 줄 여유가 없다. 사람과 나무 사이에 새가 날지 않는다면 얼마나 삭막한가.아이들과 새로운 버전의 판소리 한 대목을 나누며 인도의 음악가처럼 음악의 근원을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새들이 그 먼 거리를 날아와서 어처구니없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방지하는 일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지배배, 아는 척 절을 하며 날아드는 제비들을 포항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2022-04-24

꼼수와 묘수

꼼수는 바둑에서 나온 말이다. 바둑에서 상대가 잘못 대응할 것을 가정하고 두는 수다. 상대가 제대로 대응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 프로는 이런 의도된 수를 쓰지 않는다. 보통 아마추어가 상대의 실수를 노려 쓰는 경우가 많다.바둑에서는 꼼수 말고도 형편에 따라 여러 수가 동원된다. 묘수, 자충수, 강수, 초강수, 악수, 무리수 등등이 그런 경우다. 그중 꼼수는 최악의 수로 평한다. 반면 묘수(妙手)는 현 판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승부수로 통한다.국어사전에는 꼼수를 째째한 수단이나 방법이라 설명한다. 교활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잔꾀를 굴린다는 뜻의 얍삽하다와 비슷하다. 경상도 포항지방에서는 이를 더듬수라는 사투리로 사용한다.우리 속담에 “눈 가리고 아웅한다”는 말이 있다. 눈을 가리고 고양이 소리를 낸들 사람이 고양이가 될리 없다. 얕은수로 남을 속이려 할 때 쓰는 표현인데 꼼수가 이와 같다. 정직하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어서 보통 꼼수는 소인배나 사기꾼이 잘 쓰는 수법이라 말한다.일상에서도 꼼수가를 많이 목격된다. 임대차 보호법 발효로 임대료가 제한되자 관리비를 잔뜩 올려 받는 임차인이 등장했는데, 이도 일종의 꼼수다. 고가의 슈퍼카를 폼 잡고 굴리는 사람의 뒤를 조사해 보니 70%가 회사 명의의 차로 밝혀졌다. 세금을 면탈하려는 부자들의 꼼수다.‘검수완박’을 둘러싼 정치권에서 꼼수논란이 벌어졌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얕은 수를 쓴 민주당이 비난의 대상이다. 민주당 원로 정치인조차 “쥐 잡다가 쌀독 깬다”며 힐책했다. 꼼수가 묘수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은 속임수를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순리가 아니라는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4-24

무슨 바람

강길수 수필가 경내가 잔인하다. 울부짖음이 가득하다. 어제 퇴근 때는 연록 새 식구 맞는 노랫소리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한데, 오늘 아침엔 아파 우는 소리, 앓는 소리, 겁에 질린 소리가 마음 귀를 따갑게 파고든다. 게다가 커다란 기계음이 몸의 귀청을 마구 때린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소리가 뒤범벅되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일꾼들은 사다리차 작업대에 타고 기계톱 소리 한껏 올려, 몸통에 뻗어 오른 굵은 팔뚝들을 툭툭 잘라낸다. 통곡도 기계음도 못 듣는 로봇 일꾼 같다. 며칠 안에 연록 새 잎새들이 손가락마다 돋아나 생명을 찬양할 텐데, 그 꿈들도 댕강 끊어지고 있다. 잘린 팔뚝들은 바닥에 이리저리 떨어져 너부러진다. 그 서슬에 애꿎은 진달래꽃 가지와 장미 새순도 덩달아 유명을 달리한다.대여섯 해를 이 담장 곁을 걸어 출퇴근하는데, 오늘 같은 광경은 처음이다. 해마다 거리에서 막무가내식 가로수 가지치기를 많이 보아 온 터다. 커다란 가로수들이 사람의 손에 갑자기 흉물스레 변모할 때는, 사람은 다른 생명에게 너무 잔인하다는 마음이 파도쳤었다. 반면, 이곳은 그런 무참한 모습이 없어 즐거웠다. 맘껏 사는 나무들과 자연스레 벗하며 오갔다.올핸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4월에 접어들자마자 사람 손이 울창하던 경내를 휑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뚝 잘린 팔뚝만 몸통에 붙인 채,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는 저 나무들은 졸지에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까. 교통방해, 통신시설 피해 등 불가피한 전지도 있다. 그 이외의 나무는 가로수나 정원수라도 자연의 섭리에 맡기는 문화는 만들 수 없을까.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어야 하는가. 그 일부여야 하는가.오늘날 우리 지구 행성을 ‘지구촌’으로 만들어버린 서양문명은, 급변하는 생태계와 기후변화에 어떤 진단과 처방과 치료를 하고 있을까. 서양문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바탕은 아무래도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일 것이다. 모세의 토라에서 신은 만물을 창조한 후,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또한,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하고 명하였다. 예수그리스도는 회개의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치유했을 뿐 아니라, 죽었다가 부활하였다.땅과 생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한 유다이즘과, 사람을 치유하고 부활한 예수그리스도의 모범은, 서양문명의 기조로 전승되면서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라고 곡해하지 않았을까. 그 곡해가 자연을 크게 훼손해 왔다 싶다. 자연과 하나로 살아온 여러 문화의 멋진 삶은, 안타깝게도 기계 물질문명의 물결에 밀려나고 말았다. 웰빙, 로하스, 슬로시티 같은 운동이 서구 중심으로 일고 있으나 역부족으로 보인다.이곳 나무 가지치기는 사나흘에 걸쳐 끝났다. 자연 숲을 옮긴 듯 아름답던 경관은 사라지고, 텅 빈 허전함만 남았다. 전장(戰場)의 잔해처럼 남은 저 굵은 둥치들은, 언제 싹틔워 가지가 자라나고 초록 옷을 입을 것인가. 팔을 잃은 나무들은 끙끙 앓을망정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치고 있다.‘우린 절망을 모른답니다. 곧 새 팔에 연록 옷을 다시 입을 테니까요!’라고….

2022-04-24

지구가 식지 않는다 해도

유영희 작가 지난 4월 7일 10년 쓰던 승용차를 팔았다. 아플 때는 차가 있어야 한다는 동료 강사의 설득에 넘어가 차를 안 사겠다는 평소의 지론을 꺾고 운전을 배웠다. 그 중고차는 한참 건강이 안 좋을 때 나의 발이 되어 주었고, 무엇보다 부모님 병원 방문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 심부름에도 가끔 썼다.그러나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독립하고 나니 차 쓸 일이 없어졌고, 건강도 나아져서 차 없이도 나들이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차가 있다가 없으면 불편하다고 아이들은 걱정했지만, 유지비만 나가고 쓸 일이 없는데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돌아보면, 30여 년 전에는 ‘내가 차를 안 사는 이유’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고 이웃이 차를 산다고 하면 ‘녹색평론’을 들고 가서 차 사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 두 살, 세 살짜리 두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가 두 아이가 잠들어서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하고 종점까지 간 적도 있고, 나중에는 잠들지 말라고 지하철을 탈 때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결혼할 때 세탁기도 사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서 세탁기 안 쓰는 가족으로 KBS ‘일요스페셜’에도 출연한 적도 있다. 그 후 아이들 한창 클 때 중고 세탁기를 잠시 집에 들이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몇 년 전 없애고 지금은 다시 손빨래를 하고 있다.그러고 보니, 지난주 4월 22일은 52주년이 되는 지구의 날이었다. 올해 지구의 날 주제는 ‘지구를 위한 실천 바로 지금 나부터’이다. 우연히도 차를 없애서 그런지 다른 지구의 날보다 올해는 내게 괜히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우리나라에서는 2009년부터 지구의 날 저녁 8시부터 10분간 전등을 끄는 소등 행사를 시행하고 있다. 이 10분간 소등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어느 기사에는 85만 가구가 참여하면 4만1천189kw/h가 절약된다고 하고, 다른 기사에는 100만 가구가 참여하면 10만7천kw/h가 절약된다고 한다. 이산화탄소 역시 20t에서 50t까지 감축된다고 한다. 참여하는 가구와 절감되는 에너지가 왜 비례하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은 실천의 에너지 절감 효과는 작지 않다. 30년생 소나무 7천900그루가 1년간 흡수하는 이산화탄소만큼 줄어든다고도 한다.아무리 지구가 빨개진다고 해도 가까운 내 생활의 편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너무 힘들 때는 차도 샀고 세탁기도 샀다. 차는 내게 없지만 그 차는 이집트로 가서 달릴 것이니 차 없앤 것을 내세울 일도 아니다. 나 한 사람 세탁기를 안 쓴다고 빨간 지구가 식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그러나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단순한 생활을 하는 것은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에 좋다는 것을 가진 물건을 줄일 때마다 깨닫는다. 옷도 줄이고 책도 줄이니 정신이 한가하다. 헬스장 갈 때도 50분 걸려 걸어가고 있다. 지구가 식으면 더 좋겠지만, 지구가 식는다는 보장이 없어도 더 줄이고 더 단순하게 살아가고 싶다.

2022-04-24

유영하의 ‘꽃놀이패’유감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6·1지방선거 대구시장 선거전이 홍준표·김재원·유영하 3파전으로 흐르고 있는 가운데 유영하 후보에 대한 항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의리남’부터 ‘몹쓸 사람’까지 다양하다.유 후보는 2005년 이후 박근혜의 법률분야 참모로 두각을 나타내 정치 인생 동안 줄곧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보좌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에는 박 전 대통령의 개인 변호인을 맡아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정치행보는 파란만장하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경기도 군포에서 세 차례 출마했고, 두번은 현 국무총리인 김부겸 후보에게 패했으며, 한번은 이학영 후보에게 패했다.2016년에는 새누리당 지지세가 높은 송파을에서 단수공천받기로 했으나 김무성 당시 대표의 이른바 ‘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파동’으로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일찍부터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정치운은 무척 좋지 않은 셈이다.대구시장 선거에선 유 후보가 ‘꽃놀이패’를 진행중이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국민의힘 공천 경선에서 지더라도 1위를 달리는 홍준표가 대구시장 후보 공천을 받게되면 선거법상 30일 이전에는 국회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 그러면 6월1일 지방선거일에 수성구을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함께 치러지게 되고, 보궐선거 전략공천을 받을 심산으로 수성구을 지역구에 주소를 옮겨놓은 상황이다. 전략공천 역시 박 전 대통령에 기대 따낼 요량인 듯 싶다. 대구시장에 출마했지만 유 후보는 대구와의 인연은 그리 깊지않다. 부산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사한 뒤 대구서부초등학교 6학년까지 다니다 경기도 군포초등학교로 전학한 게 대구와의 인연 전부다.이게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공천경쟁에 뛰어든 유 후보의 실체다. 여기에는 대구시민을 위한 대구시장 후보로서 가져야 할 비전이나 결의, 각오는 찾아볼 수 없다.그렇다고 그가 보궐선거에 나설 대구 수성구을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서 지역구민과 대구시민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이 있을 리 없다. 이런데도 대구시민들과 국민의힘 책임당원 상당수는 유영하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아무리 정치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라지만 대구시민 입장에선 거의 생면부지에 가까운 인물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 동영상 하나로 이런 지지세를 얻는다니 개탄스럽고, 허망하다. “정치인은 본인 부고 기사 아니면 어떤 기사가 나도 땡큐”라고 했던 어느 정치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탄핵돼 감옥살이까지 치른 박 전 대통령을 오랜 기간 별다른 보상없이 챙겨온 노고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박 전 대통령도 그런 그의 헌신이 기껍고 미더웠을 것이기에 반대급부로 후원회장 자리를 받아들이고, 지지 동영상을 찍었으리라. 다만 이런 처신이 과연 온당한가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헌신이 결코 순수하게 읽히지 않는 이유다.그의 꽃놀이패 역시 고향 대구를 걱정하는 필자에게는 왠지 모욕처럼 느껴진다.

2022-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