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살 먹었다. 아….
연말 내내 독감을 앓느라 새해가 된 줄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약 먹고 빨래 돌리고 방 정리도 하고, 아파서 하지 못했던 설거지며 온갖 잡무를 한바탕 해치우고 잠깐 숨 돌릴 겸 TV를 켰다가 오늘이 1월 1일인 걸 알았다. 앓아눕는 동안 시간 감각이 마비된 건지, 여전히 12월의 어디쯤인 것 같다. 왠지 나 혼자 외딴 시간 속을 헤매는 기분. 어쨌든 새해구나. 한 살 더 먹었네.
별다른 감흥이 없다. 이십 대 때에는 새해 인사와 덕담에 핸드폰이 터질 것 같았는데 올 해엔 그런 연락도 뜸하다. 왠지 2022년의 인간관계 성적표를 받는 기분이다. 새해 인사도 별로 못 받을 만큼 인간관계를 소홀히 했구나! 평생 새해 인사나 덕담 같은 걸 성실히 하지 않은 업보(?)를 이제 돌려받는 것 같다. 홀가분하다.
사실 난 연말 연초의 분위기가 좀 그렇다. 좋다 싫다 라기보다는 그냥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어야 하나, 그런 기분이 든다. 어딜 나가도 사람으로 넘치고, 다들 억지로라도 신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호들갑. 그 단어가 딱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한 해를 끝낸다는 건 분명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라는 게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는 아닐 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일을 신나는 축제처럼 보내야 한다고 강박을 느끼는 것 같다. 마치, 억지로 슬프고 괴로운 일들을 잊으려고 술을 퍼붓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기분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연말 모임에 최대한 불참을 했더니, 몸과 마음은 편하다. 독감이 좋은 핑계가 되었던 것 같다.
작년 한 해는 참 정신없었다.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해. 그 전에도 돈을 벌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적은 돈이나마 월급을 받는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물론 월급은 들어오자마자 대출금이며 할부금이며 공금이며 순식간에 사라지기 일쑤였지만, 다음 달에도 비슷한 돈을 번다는 건 생각보다 꽤 큰 안정감을 줬다.
미뤄둔 일들을 하나씩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기분. 이제, 원하는 걸 하나씩 마련하고 좋은 걸 하나씩 가져도 된다는 사회의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전셋집으로 이사를 왔고, 이제는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며 차를 살 준비를 하고 있다. 여전히 통장 잔고는 항상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전처럼 불안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정감에 기분이 제법 묘하다.
안정감.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은 삶을 살게 되었지만(사실 그마저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형편없을지 모르지만), 대신 건강이 심히 안 좋아졌다. 학기 내내 수업과 원고 마감에 치여 살면서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잠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 수준이 되어 이상한 불면에 시달릴 즈음부터는 자기 전마다 술을 마셨다.
덕분에 영상 실조라는 어이없는 진단도 받아봤고, 골다공증 초기라는 황당한 진단도 받았다. 그런데도 마음은 전보다 편하다니. 정말 묘한 기분이다.
사실 병원에서 좋지 않은 진단 결과를 받았을 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뭐랄까, 열심히 몸을 돌보지 않고 살고 있다는 공증을 받은 기분이랄까. 그게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줬다.
지금까지의 내 삶의 모든 불행과 사건사고가 내가 열심히 살아오지 않은 탓인 것만 같은 이상한 불안감에 시달렸었는데, 몸이 심히 안 좋아지고 나니 그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삶에 불행이 찾아든다면, 그건 내 탓은 아니겠네. 내가 어쩔 수가 없는 일이겠네 하는 기묘한 안심. 이걸 안심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긴 하지만.
그래서 올 한 해에는 그다지 열심히 살지 않아볼 계획이다. 돈도 열심히 안 모을 거다. 자동차나 사고, 할부금만 갚을 정도로 살 거다. 진심이다. 열심히 사는 거 별로 좋은 거 아닌 것 같다. 아프기나 하고, 괜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나 시달리고, 몸도 망치고 기분도 망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행동하기나 하고. 행복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거고, 뭔가를 사려고 노력하지도 않아볼 계획이다. 작으나마 전셋집에 차까지 구했으면 됐지 뭘. 그런 기분으로 책방에 갔고, 시집을 두 권 샀다. 아. 만화책이나 살 걸. 왜 난 또 시집을 샀지? 직업병인 것 같다. 올 해엔 진짜 공부도 열심히 안 할 거고, 일도 열심히 안 할 거다. 그런 기분으로 또 마감을 하나 끝냈다. 서른여섯 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