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학원 은사님과 선배와 강릉 율곡연구원에서 열리는 학회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가 취소되었다. 율곡연구원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다리에 많이 무리가 될 것 같다고 하신다. 은사님이 몇 달 전 다리를 삐었는데 치료를 잘못해서 나들이 이틀 전까지 불편감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왼쪽 발목에 문제가 있어 걷기 힘들 때가 여러 번 있었기에 다리가 아프면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고 있다.
새해가 밝았다. 들뜬 마음으로 의욕적인 한 해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힘겨운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비롯한 인권보장을 외치며 2021년 12월부터 서울 지하철 시위를 이어온 전국장애인철폐연대(전장연)에게도 새해는 희망보다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1년여간의 시위로 많은 서울 시민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는 데다 ‘지하철 탑승 시위 지속하면 더이상 관용이 어렵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단호한 태도 때문이다.
장애인 예산 부족이 시민 잘못도 아닌데 시민이 불편을 왜 겪어야 하느냐는 항변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장애인 인권보장을 호소했어도 아무도 몰랐다가 지하철 시위를 해서야 정치인과 시민에게 들리기 시작했다는 전장연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생각해보니, 지하철 계단에 종종 보이던 장애인용 리프트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어도 전장연의 시위가 있기 전까지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현재의 질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사람 중에 질서의 결함을 다른 사람보다 강하게 느끼거나 그 결함에 희생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스승으로 알려진 와타나베 가즈오 교수의 말이다. 누구에게는 당연하고 필요한 질서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서, 불관용을 벌하기 위해 불관용으로 맞서는 것을 ‘관용의 자살’이라고 한다. 전장연이 출근하는 직장인에게 불관용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다시 불관용으로 맞서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사소한 장소들에서 모든 사람이 무사히 함께 살아가게 하는 대화의 연속이라는 와타나베의 말이 마음을 울린다.
장대익은 ‘공감의 반경’에서 느낌을 중심으로 하는 엠퍼시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면서 사고를 통한 엠퍼시를 강조했지만, 사고를 통해 엠퍼시를 경험하기는 말처럼 쉽지는 않다. 감정 경험이 너무 강렬하고 직접적이다 보니 자기 사고의 합리성이나 타당성을 따져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유지하면서 남의 고통을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진정한 ‘엠퍼시(empathy)’를 갖기 위해서는 자기가 겪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남의 의자에 앉아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 의자에 앉으면 내 자리에서 보던 것과 다른 것이 많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내게는 안 보이기도 한다. 새해에는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이 휠체어를 타고 하루라도 다녀보고 전장연과 대화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