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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속도 경쟁을 초탈한 물길, 추억·아련함을 벗삼아 흐르고

형산강을 건너지 않고서 포항과 경주로 들어올 수 없고, 나갈 수도 없다. 우리나라 10대 강 중의 하나인 형산강은 300여 개가 넘는 지류를 가지고 있으며, 포항과 경주 일대에 핏줄처럼 이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형산강을 건너다니고 있는 셈이다.청어·소금 실은 황포돛배 수없이 오가던 옛시절을 지나강줄기 가로지른 동해남부선 철도 KTX에 그자리 내줘변함없는 모습의 형산강, 느림의 미학 간이역 서로 닮아예로부터 형산강을 따라 촌락이 형성됐고, 크고 작은 시장들이 형성됐으며 조선 후기부터 전국 3대 장의 하나로 전국의 이름난 시장으로 성장했다. 대략 1780년대부터 1905년까지 융성해 함경도 일대의 명태, 강원도의 오징어, 포항연안의 청어와 소금을 경상도 일대의 내륙으로 팔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산물을 교육하는 상거래의 중요한 요지로 지금의 연일읍 중명리 일대의 형산강 유역에 수많은 황포돛대와 객주, 여각, 창고, 판매업 숙박업이 번성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교통 요충지였다고 한다.당시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연일읍 중명리에 세워진 `현감 조동훈 복시선정비`를 보면 `깃발과 점포가 안개처럼 열을 세웠으니 모두가 봄날을 만났다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포돛대와 각 상단의 깃발과 점포에 내어 걸린 간판들이 형산강 일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형산강 유역 교통의 수단이 바뀌게 된 것은 조선총독부의 철도개설이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약탈을 위한 물자 수송을 위해 `조선철도12년계획`을 세우고 1927년부터 실행하게 된다. 이 계획에는 석탄, 목재, 광물, 해산물의 본국 반출을 위해 부산과 함경선을 연결할 목적으로 동해선 건설의 계획이 포함된다.구간별로 개설되던 동해선은 1936년 12월 1일에 울산~경주 구간을 표준궤로 개량 개통하고 이어 경주~포항 구간도 표준궤로 개량됐다. 그리고 1940년 4월에 포항~흥해간 12㎞ 구간이 개통됐다고 한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공사는 중단되고 동해선은 안변~양양 구간의 동해북부선과 부산진~포항 구간의 동해남부선으로 분단돼 연결되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른다.부산을 출발해 바다를 끼고 울산을 거쳐 경주로 이어지는 동해남부선은 형산강과 나란히 하며 종착역인 포항으로 이어진다. 형산강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나란히 하기도 하며 사연 깊은 역들을 지나 수 십년 동안 주요한 교통수단이 됐다.□ 동해남부선, 형산강 유역의 역(驛)들형산강 유역의 동해남부선은 경주역을 지나 나원역~청령역~사방역~안강역~양자동역~부조역~효자역~포항역으로 이어진다. 1998년(정선선은 2000년 11월 14일까지 운행)까지 운행되었던 비둘기호는 앞서 소개한 모든 역에 정차했으며, 인근 주민들의 소중한 발이 돼 줬다.경주역과 나원역, 안강역, 효자역, 포항역을 제외하고는 승무원과 대합실이 없는 간이역이다. 그리고 지금은 경주역과 안강역 효자역, 포항역을 제외하고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한때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거점지이며, 세상의 소식과 물류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이기도 했다.이후 비둘기호가 운행을 중단하고 최하위급 열차로 격하되었던 통일호마저 통근열차로 명칭이 바뀌게 되면서 나원역, 청령역, 사방역, 양자동역, 부조역은 2007년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여객 취급을 중지하게 된다.청령역, 양자동역은 처음부터 역사도 없었다. 철로변에 지붕을 얹은 플랫폼과 의자가 전부였으며, 철길 아래 구멍가게에서 기차표를 살 수 있었다.매년 한 번씩은 이들 간이역을 찾는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나, 녹음이 짙푸른 7월의 간이역은 다양한 이야기와 풍경, 추억과 아련함이 함께하는 공간이 된다.현대사회는 계속해서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다. 모든 변화와 발전은 `속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속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간이역은 역설적인 존재다. 비둘기호가 그랬고 통일호가 그러했듯이, 또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KTX라는 무서운 속도를 가진 경쟁자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간이역에는 역 이름이 적힌 표지판과 벤치가 전부다. 그 벤치에 앉으면 일상생활에서 달려왔던 모든 속도를 가진 것들이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것과 같은 기분이 빠져든다. 빈 철로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와 푸른 하늘 위에 흘러가는 구름의 속도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우리의 삶을 곧잘 기차여행에 비유한다. 태어남이 출발역이고 죽음은 종착역이다. 인생행로의 크고 작은 일들을 기차역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간이역을 찾을 때면 내 인생의 어느 행로쯤을 가고 있는가를 되짚어 보게 된다. 지금 어느 역을 통과해 어느 역을 향해 가고 있는가, 지나온 길을 반추하고 새로운 준비를 위한 사색의 장소가 돼 주곤 한다.□ KTX라는 또 다른 속도를 가진 형산강속도의 경쟁과는 반대로 우리의 삶은 많은 간이역에 정치하는 삶이 더 행복할 것이다. 천천히 가더라도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는 삶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반추할 수 있는 추억이 그만큼 많음을 의미한다.내 인생의 어디쯤을 어떤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가. 한 번쯤 일상의 속도에서 잠시 이탈해 되돌아볼 장소로서 간이역은 최적의 장소가 된다.자동차가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7번 국도와 더불어 사통팔달 도로가 건설되고 기차 여객 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여기에다 KTX의 등장으로 속도에 밀린 추억의 열차들은 기억 속에서 급격히 사라지게 된다. 출퇴근과 등하교 시간, 장날이면 분주했을 간이역 또한 급격히 쇠락해져 갔을 것이다.2015년 상반기면 KTX 포항~서울 직결선이 개통되어 2시간 10분이면 서울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포항은 전국 반나절 생활권에 본격 편입되면서 경제·사회·문화·관광 등 일상생활 전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이제 형산강은 황포돛배와 달구지에 이어 KTX라는 엄청난 속도를 갖게 됐다. 형산강을 가로지르고 안강들판을 지나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갈 KTX.예나 지금이나 강물의 속도는 변함이 없다. 그때의 속도와 지금의 속도가 같을 것이며, 예전의 물길이 큰 변화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형산강을 제외하고 그 위를 가로지르거나 그 주변을 달려가는 모든 것들이 속도를 바꾸어 왔던 셈이다. 비록 또 다른 속도가 등장하더라도 형산강은 변함없는 속도로 영일만으로 흘러갈 것이다./김규형 사진작가

2015-01-26

경주군 서면 도리 `인내산 동쪽 계곡`서 63.9㎞ 여정 시작

강(江)의 위상은 그 규모에서 가장 먼저 알 수 있다. 하지만 강의 규모를 정하고 서로 비교하는 기준이 과연 `길이`인가, `수량`인가의 문제는 학계의 오랜 숙제이자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관련 전문가로 손꼽히는 이형석 한국하천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2000년 당시 건설교통부가 발간한 `한국하천일람`의 기준이 타당한 것으로 분석됐다. `하천의 발원지는 하구로부터 먼 곳을 나타내는 최장의 발원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신라시대 `굴연천`으로 불려져우리나라 10大 하천에 들어가강 유역엔 비옥한 평야 발달해포항·경주 발전 `천년의 젖줄`이에 따라 우리나라 10대 하천을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안성천, 삽교천, 만경강, 형산강, 동진강으로 나열해 놓았다. 그렇다면 형산강을 몇번째로 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여러 자료에는 영산강과 동진강을 10번째로 정하는 등 차이가 적지 않다. 이러한 근거들을 토대로 할 때 9번째에 속하는 것으로 정리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소장은 형산강은 길이 순으로 남·북한을 통털어 26번째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이형석 소장이 형산강의 길이와 최장 발원지에 대한 각종 서적(국어사전 2종, 백과사전 3종, 지리 관계서적 2종, 조선지지 자료)을 검토한 결과 1969년 이후에는 거의 `경남 울주군 두서면`을 기재했다.하지만 `한글판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은 유일하게 `경주군 서면 도리`를 내세웠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건설교통부는 `한국하천일람`에 경주군 서면 도리 `인내산 동쪽 계곡`을 최장 발원지로 하고 유로연장(길이)은 63.9㎞ 또는 63.95㎞로 기록·공인했다. 이 소장의 자료에도 다소 혼선은 엿보이는데 65.5㎞로 표기한 것이 그 사례이다.형산강은 신라시대에는 `굴연`(掘淵) 또는 `굴연천`으로 불렸으며 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형강`(兄江)으로 기록됐다. 1486년 `동국여지승람` 경주부 편에 `형산포(兄山浦):안강현의 동쪽 24리에 있다. 굴연의 하류이며 어량(漁梁)이 있다` `경주부의 동천, 사등이천, 서천 등의 물은 모두 형산포로 들어간다`고 기록돼 있다. 다시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형산강 유역 내에 위치한 취락은 경주, 영일, 안강, 기계 등으로 표기됐다.㈔포항지역사회연구소가 2002년 발간한 `형산강`에 이형석 소장은 형산강과 인접 하천의 수계를 나누는 산, 고개 등 분수령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형산강 하구 북단-도음산-비학산-성법령-사관령-배실재-첨곡산-서당골재-불릿재-운주산-이리재-도덕산-자옥산-삼성산-시티재-어림산-관산-사룡산-당고개-안석산-소호고개-백운산-천마산-북안고개-동산령-토함산-추령-시루봉-운제산-은정재-서원재-형산강 하구 남단.`형산강은 그 주변에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는데 하천으로서는 크지 않고 지류도 많지 않으나 유역에 비옥한 지구평야를 발달하게 함으로써 경주와 포항의 젖줄이다.멀리는 천년 역사의 신라에서 현대에 들어 하구에 자리잡은 포항에 포항종합제철이 들어서기 까지 역사 속에 우뚝 솟은 강이다. 그 강의 언저리와 이를 내려다 보는 골짜기의 굽이굽이에서 인물이 나고 문화가 샘 솟아 오늘에 이르렀다.다시 먼 길의 출발을 `兄山`에서 시작하다형산강은 울산과 경주, 포항 일대의 크고 작은 산들에서 발원한 수 백개의 지류들과 합류해 동해로 흐른다. 형산강에 대한 이 간명한 글귀 속에 고대 삼국 통일의 위업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신라 천 년의 역사와 근현대의 역사들과 함께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흘러 왔고, 흐르고 있다.300여 개의 지류들과 몸을 합친 형산강이 크게 한 번 휘돌며 경주를 지나 포항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곳이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이 마주한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와 국당리이다. 형산강 하류의 시작이라고 하겠다. 신라시대 전설에 의하면 형산과 제산은 형제산으로 서로 붙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남천, 북천 기계천의 물이 안강 일대에 모여 호수를 이루고 있었고, 이 호수가 자주 범람하여 이 일대의 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경순왕의 아들 태자 김충이 용이 되어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쳐서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게 됐고, 그 틈으로 안강 호수의 물이 강을 이루어 영일만으로 흘러들어가 지금의 형산강이 됐다고 한다.신라시대에는 내륙에서 내려온 물이 지금처럼 곧바로 영일만으로 유입되지 못하고 강동지역의 퇴적물에 막혀 안강과 단구리 일대에 거대한 호수가 형성됐음을 볼 수 있다. 이 일대의 침수문제는 왜구의 침입과 함께 신라시대 통치자가 풀어야할 중요한 숙제였다고 하겠다.형산 정상에는 왕룡사원이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신라시대에는 형산사, 이후에는 옥련사, 그리고 왕룡사에서 지금은 왕룡사원이라고 칭한다. 국당마을에서 북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절에 도착하게 되는데, 절의 좌측으로 멀리 경주로부터 흘러온 형산강이 안강평야를 가로질러 형산 아래에 이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우측으로는 형산과 제산을 가르고 멀리 영일만으로 흘러가는 강을 볼 수 있다.이곳은 비교적 유량이 풍부한 곳으로 1832년 기록된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형산강 하류에 큰 시장이 존재했었음을 알려 준다. 이 시장은 부조장으로 1900년대 초반까지 서해 강경장, 남해 마산장과 함께 남한 3대 시장 안에 들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었다고 한다. 한편 강 포구에 윗 부조장(강동면 국당리)과 아랫 부조장(연일읍 중명리) 두 곳의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선박 접안이 용이한 아랫 부조장이 크게 성행해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시장이었다고 한다.아랫 부조장이 열렸던 연일읍 중명리 마을회관 앞에는 `현감 조동훈 복시 선정비`와 `현감 남순원 선정비`가 나란히 서는데 비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당시의 부조장이 얼마나 큰 규모를 자랑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강 어구의 좌우양안(左右兩岸)으로 범선들이 열을 지어 늘어섰다. 함경도, 전라도 등 각 방면의 상선과 어선들이었다. 배들이 달고 선 황포 돛들이 바람 속에서 도도하게 펄럭였다. 장에서 구입한 물건을 바리바리 짊어진 조랑말들이 마부를 따라 길을 가득 채웠다`형산의 정상에서 우측을 통해 바라보는 형산강의 모습에서 황포돛대를 단 배들이 멀리 영일만을 거쳐서 지금의 송도와 해도, 상도동을 지나 형산 아래의 부조장으로 밀려들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좌측의 풍경을 통해 물건을 이고진 조랑말 행렬들이 형산강을 건너고 안강들판을 지나 경주와 영천, 대구, 청송, 안동 등의 경북 내륙으로 흩어지던 풍경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형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포항 일대는 다시 지류로 분화돼 5개의 섬(송도, 해도, 상도, 대도, 죽도)과 3개의 호수(환호, 두호, 아호)를 형성하며 영일만으로 흘렀다고 한다. 비록 그 당시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이러한 지형은 지명에 남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그때나 지금이나 형상강의 유량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시적으로 내리는 강우에 의해 삽시간에 포항과 경주 일대는 300여 개가 넘는 지류를 따라 불어난 강물로 인해 잠식되곤 했다. 거기다 꾸준히 물살을 타고 흘러 내려온 육지의 퇴적물과 해수에 밀려온 퇴적물들이 쌓이게 되면서 유량이 적을 때에는 일시적으로 육지의 섬이 형성되는 형국을 만들곤 했다.김규형 작가는?포항 출신의 사진작가로 ㈔포항지역사회연구소에 소속돼 1년 6개월 동안의 형산강 답사와 조사의 결과를 모아 2002년 단행본 `형산강` 발간에 참여했다. 개인전 및 다수의 기획전을 열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의해 한국의 사진작가로 선발돼 `노마딕 레지던스 in 몽골`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주에 작업실을 두고 기획 및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김규형 사진작가/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2015-01-12

신라 천년을 흘러 포항·경주 미래로

형산강은 천년 왕국 신라의 영광을 키워낸 젖줄이었다. 또 현대사에서는 한국전쟁 격전지의 아픔을 딛고 마침내 제철산업의 성공으로 대한민국 산업화의 신화를 일궈낸 한 주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격동의 이면에서 환경은 오염되고 유역에 깃들어 사는 이웃 도시, 경주와 포항은 수계를 나누고 살아왔지만 그 모듬살이는 강의 혜택 만큼 그리 정답지는 않았다. 2014년 발아된 두 지자체 간 협력의 씨앗은 2015년 새해 들어 형산강을 매개체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워 미래를 위한 공동 발전의 시기를 예고하고 있다. 본지는 연중기획탐사 `다시 형산강에서`를 마련해 형산강의 문화와 역사, 환경과 지리 등에 대한 총체적 보고서로 삼고자 한다. ▲ ㈔포항지역사회연구소가 경주환경운동연합과의 수질환경조사 결과 등을 담아 발간한 종합인문지리지 `형산강`.경주 서면 도리서 발원종교·문학 태동의 젖줄□ 형산강의 발원지㈔포항지역사회연구소(이사장 이재섭)는 포스코의 지원으로 1년 6개월에 걸친 답사와 연구를 거쳐 2002년 종합적 역사문화지리지(誌)인 단행본 `형산강`을 발간했다.당시 발원지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에 이형석 한국하천연구소 소장은 `형산강의 발원지와 위상`을 통해 기존의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이 아닌 경주시 서면 도리임을 명확히 했다.1983년과 1985년 등 두차례에 걸쳐 두 지역을 모두 답사한 이 소장은 형산강의 최장 발원지가 바뀜으로써 길이도 기존의 62㎞ 보다 약 3.3㎞가 늘어난 65.5㎞라고 정리했다. 이 같은 노력 등의 결과로 2000년 5월 건설교통부의 `한국하천일람`에 경주 발원지와 유로 길이 63.9㎞ 또는 63.95㎞가 기록·공인됐다.□ 문학의 모태 형산강형산강과 관련된 대표적 고전으로는 신라 시조신화와 연관된 알영정(閼英井) 고사, 찬기파랑가, 서거정의 한시, 원효 이야기, 신라 원화 남모(南毛)와 준정(俊貞) 이야기, 원성대왕 고사 등이다. 김유정 영남대 강사는 형산강의 지류인 문천과 원효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소개했다. 원효는 남산에서 내려와 반월성 뒤의 내에 있던 문천교를 지나다 일부러 물에 빠졌다. 그는 옷을 말리기 위해 들어간 요석궁에서 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게됐으니 인연의 강이라는 것이다.현대에 들어 형산강은 경주 출신의 김동리와 박목월을 낳았다. 무녀도의 배경인 애기청소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입구 경대교의 북쪽 300m에 자리한 물웅덩이로 `명주 실꾸리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깊다`고 기술돼 있다. 하류인 포항에서는 `보리`의 작가 한흑구, `동전 한닢`등의 동화작가 손춘익의 문심을 길러냈다.□ 형산강과 종교경주는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포덕(布德)에 일생을 바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고향이다. 35세의 수운은 해발 500m의 구미산 계곡 용담정에서 후천개벽을 깨닫고 동학을 선포했다. 해월은 형산강을 건너다니며 동학을 포교했으며 포항 신광면 마북리에 은거하며 생업에 종사한 이후 강원도와 충청도 산간을 떠돌며 30여년 간 종교적 암행을 이어갔다.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골짜기의 진목정은 경북 동해남부의 몇 안 되는 교우촌 중 한곳으로 병인박해(1866년) 때 이곳에서 체포돼 순교한 김종륜, 허인백, 이양등으로 인해 한국 천주교의 성지가 됐다.□  하천 환경과 수계형산강은 길이는 비교적 짧지만 울산과 경주, 포항 등 3개 지자체에 걸쳐 있어 수자원 이용과 수질 관리 면에서 민감한 갈등 요소를 안고 있는 하천이다.2001년 경주환경운동연합과 포항지역사회연구소는 포항시 직원이 참가한 가운데 경주 서천 시외터미널 인근에서 포항의 형산강 취수보 하류까지 환경탐사를 했다. 이를 통해 형산강은 콘크리트 인공시설 설치 등으로 인한 하천 유지수 감소, 둔치의 불법 경작지 등으로 인한 환경오염에 시달리고 있음이 확인됐다.당시 환경조사연구를 주도한 최석규 동국대 생태교육원 교수는 “13년이 흐른 지금 형산강은 외부 유입 오염물이 대폭 감소했다”면서 “하지만 포항 상수원의 상류인 경주 신당리 위쪽 희망촌 가축분뇨 유입 등의 오염원은 과거와 큰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김규형 사진작가다시 길 위에서…14년전 `기록과 감탄의 여정`을 되새기며아쉬움 함께했던 첫 탐사`형산강과 재회` 가슴 벅차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1년 포항지역사회연구소의 사무차장으로서 1년 6개월에 걸친 형산강 프로젝트를 수행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삶과 문화- 형산강`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됐다. 이 책은 강의 역사, 역사속의 강, 문화의 강, 강과 사람들, 강과 자연 등 분야별로 나눠 형산강을 전체적으로 조망했다.아침이면 지도를 펼쳐들고 형산강 줄기를 따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답사를 떠나 해질녘이면 돌아오는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300개가 넘는 지류를 넘나들고 강을 따라 뻗어나간 숱한 산과 들판을 가로지르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형산강이 품었던 풍경과 사람, 역사와 자연을 살뜰히 기록하고 감탄하는 시간이기도 했었다.내 작업실 한 켠에는 아직도 그 당시 답사의 과정과 흔적들을 일일이 기록한 축척 지도 백여장과 필름들이 그때의 공기를 담고서 조용히 잠들어 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의 어플을 이용해 길을 찾고 그 종적을 자동으로 기록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엔 축척 지도를 들고 다니며 길을 찾고 그날 그날의 촬영 계획과 실행들을 기록했었다.형산강 발원지에서부터 송도 앞바다의 합류지점까지, 크고 작은 지류들의 발원지에서 강과의 합류지점까지. 그 행적을 따라 분포돼 있는 문화유적과 자연경관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숱한 대화와 사건들. 분명히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곳을 직접 발로 디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가 본 곳보다 못 가본 곳이 더 많으며, 내가 본 것보다 더 적은 내용이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는 아쉬움이 늘 함께 했었다.`10년이면 강(江)과 산(山)도 변한다`고 했다. 이제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과 산의 변화, 그때 내가 보았던 형산강은 얼마나 변했을 것이며, 미쳐 발 딛지 못한 형산강은 또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가 궁금하다.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종이 지도에서 디지털 지도로, 앳띤 얼굴의 젊은이에서 중년의 나이로, 지난 14년 동안 나를 둘러싼 것들은 다양하게 변화됐다. 이러한 변화 도구를 가지고서 형산강을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가장 아름답게 노을이 지는 곳과 가장 맛있게 음식을 내놓던 기사식당. 가장 운치있는 산책로와 왕릉 사이로 떠오르던 일출, 더위를 피해 어느 시골집 담벼락에 기대었을 때 등 뒤로 전해지던 그 시원함과 들판에서 길을 묻기 위해 만났던 어느 농부의 얼굴. 산기슭의 작은 암자의 곱게 빗질된 마당을 밟는 느낌과 찬 바람을 맞으며 강둑을 가로지르던 그 감촉과…./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2015-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