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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딸 혼수비 마련 위해 젊음 판 귀향인 이야기

소설가이자, 시인, 사회 평론가로 다양한 글쓰기를 해온 복거일(66)의 열한번째 장편소설 `내 몸 앞의 삶`(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이 소설은 북한에서 반중 활동 혐의로 긴 시간 동안 강제 노역을 하다 풀려난 윤세인이라는 인물이 딸의 결혼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거액의 대가를 받고 자신의 젊은 몸을 늙은 몸과 바꿔 노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담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이후의 조금은 먼 미래 이야기다.작가는 생명 연장과 노화 방지 기술이 발전된 극단의 미래를 상정하고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을 문제들을 제시한다.젊음을 돈으로 사고팔게 된다면 어떨까? 긴 노년을 맞게 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그들의 욕망은 어떠한 것들이고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고 운명을 수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등의 의문이 소설의 줄기를 따라 솟아오른다.복거일은 사회와 문명의 발전에 따른 문학의 진화와 확산 가능성,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소설의 시공간 확대에 주목해왔다.이 소설은 그가 천착해온 그 가능성의 사회를 펼쳐내 보이며 인류가 처음 맞닥뜨리게 될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길 요구한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인물들의 일관된 면모가 돋보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1-04

파키스탄 청년이 느낀 9·11테러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민음사)는 파키스탄 청년이 느낀 9·11테러를 소재로 쓴 소설이다.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저명한 학자, 작가, 기자들의 엄청난 찬사를 받았으며 전 세계에서 100만 권이 넘게 팔린 데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가디언` 선정 `지난 10년간 최고의 작품`으로 뽑혔다.또한 다양한 상의 후보(부커 상, 제임스테이트 블랙 문학상, 연방 작가상)에 올랐으며 애니스필드울프 문학상, 아시아아메리칸 문학상, 앰배서더 문학상, 사우스뱅크 쇼 문학상, 이탈리아 문학상 등 여러 상을 휩쓸며 3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저자 모신 하미드는 찬게즈라는 한 파키스탄 청년이 익명의 미국인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을 통해, 그 상대 미국인을, 독자들을 `청중`으로 만든다.하미드는 세계의 독자들을 향해 9·11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이야기는 실컷 들어 왔으니, 이제는 제3세계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들어 볼 때가 됐다고, 서구의 목소리가 늘 제3세계의 목소리를 압도해 왔지만, 설혹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그들과는 다른 시각과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목소리로 말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소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특별한 점은 자칫 무거워질 수도 있었을 민감한 정치 주제를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명료하고 날카롭게, 하지만 결코 그 목소리가 과격해지거나 공감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하고 나직하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거기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찬게즈의 사랑 이야기다.모신 하미드는 정치적 주제와 사랑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자연스럽게 녹여 냈다. 프린스턴에 진학해 이제 막 새로운 삶에 대한 꿈에 부푼 찬게즈에게 있어 미국 여성 에리카는 그 꿈을 상징하는 존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그런데 찬게즈와 에리카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다. 에리카에게는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 있고, 그 첫사랑은 에리카를 고립 속으로 몰고 간다.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는 연인에게 9·11은 위기로 다가온다. 위태롭고도 은밀한 사랑 이야기는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아찔하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러브 스토리에 더해 이 소설은 또 하나 `스릴러`의 외피를 입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라호르의 옛 시가지, 한 파키스탄 청년과 미국인 남자가 식당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하지만 이 미국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며, 그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웨이터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태도, 안주머니 속에서 불룩 솟은, 마치 권총과도 흡사한 실루엣과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키피”한 박쥐 무리까지, 어딘지 음울하고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작품 전반을 휘감는데…./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3-01-04

현실의 냉혹함… 그래도 희망은 있다

쇄빙의 아침이다오늘 하루도 얼음장을 깨고 쇄빙의 시간 속으로 나간다갈비뼈 있는 데서 피가 흐른다쇄빙의 칼날 밑에 오늘도 네 사람의 학생과한 사람의 교수가 자살했다면류관 같은 얼음칼이 쇄골에 쿡쿡 박힌다속이 차디찬 사과의 반쪽이 떨어져 있다차바퀴가 하얀 사과의 속살을 뭉개고 지나간다반쪽 가슴의 사과는 아프다조간신문이 내 골 속에 떨어진다돈 돈 돈…. 하고 우르르 몰려간다나는 시인이다연탄재를 버리려고연탄집게를 들고 영동대로에 서 있다버릴 곳이 없다얼어붙은 입이 자꾸 구겨지며 피가 터진다-`서울의 우울 3` 부분시인이자 소설가로, 또한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하는 김승희(60)의 아홉번째 시집 `희망이 외롭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전작 `냄비는 둥둥`이후 6년 만에 펴낸 시집이라 반가움이 큰 이번 시집은 시단에 나온 지 꼬박 40년을 채워가는 시점에 출간된 시집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사변적이거나 페미니즘적인 시가 아닌 현실과 문명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담은 시로 동시대 여성 시인들과 구별되며 현대시사에 확고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 시인 김승희가 아홉번째로 펴내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핑크색 시집에 담긴 키워드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그러나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절실한 바람과 달리 작금의 현실에서 핑크빛 미래를 꿈꾸기는 쉽지가 않다. 그리하여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외롭다`.`이번 시집에는 연작시들이 많아 시선을 끈다. 그중에서도 2부의 주를 이루고 있는 `서울의 우울` 연작은 날카로운 현실 분석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연민 가득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시인 김승희의 눈과 가슴에 맺히는 사건은 무엇보다 죽음이다.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하거나,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내몰린, 하여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러나 어느새 아무 일 없는 듯 묻혀버린 장자연에 대해 쓸 때에는 “황폐한 도성에서 죽어가는 어린 것들을 보며 창자가 찢어지고 피가 끓는 극한 고통을 느꼈던 예레미야의 탄식이 이 시집에 황혼처럼 내려앉아 있”(허윤진)는 듯하다.사정이 이러할진대,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연탄집게를 든 초라한 모습으로 대로에서 할 일을, 갈 곳을 잃고 만 시인의 등에 대고 살며시 묻는다.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폐허에서 쓰러지기 직전에 가끔은 말의 에피파니(epiphany)를 꿈꾸기도 했다. 신은 시인에게 언어와 언어의 꿈을 주었기에. 결국은 말의 에피파니가 부서진 세계와 영혼의 병을 구원하는 것일까? 거기에 그리움이 있었고, 희망의 빈혈로 너무 아플 때면 우리말을 부여잡고 우리말에 기대어 울어보기도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얼어붙고 어두운 세상에서 불안과 죽음들이 빚어놓은 비극을 목격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언어에 기대어 울어보는 일. 그렇게 `희망`을 조심스럽게 꺼내보는 일을 테다.1부를 수놓고 있는 `~라는 말`로 표현된 제목의 시들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시인이 담아내는 `하물며` `부디`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 `저기요` `아~` 등의 말은 문장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활기를 부여하며 의미를 풍성하게 하기 위한 부사와 감탄사이다.이번 시집의 해설은 맡은 허윤진은 “명사와 형용사보다는 동사와 부사가 언어의 정취를 결정하는 한국어의 세계에서 부사는 동사를 단장하는 마지막 손길 같은 것”이라고 했다.“얼음처럼 차가운 현실의 냉혹함. 그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시인의 절박함이 이끌어낸 언어들. 그리하여 간신히, 희망을 희망해보는 오늘.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 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 아까워/ 물에 피가 번지듯…. /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희망이 외롭다”(`희망이 외롭다 1`)./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1-04

밥벌이의 고단함과 일상의 허무함 일깨워

김기택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 지성사)가 출간됐다. 김기택은 현실에서 효용이 없어 버려지는 것들, 도시의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들, 목적과 수단에서 일탈해 있는 생뚱맞은 것들을 시적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쉽게 지나칠 수 있는 대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어떤 감정이입도 없이 그저 열심히 옮겨놓는다. 그러나 그의 시적 진술은 정지된 묘사가 아니라 꿈틀꿈틀 살아 있는 시어들로 진동한다.원숙미에 짓눌려 차분해지기보다는, 어떤 통찰로 쉽게 재단하기보다는 대상을 포착해 그저 살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김기택 시가 항상 새로울 수 있는 이유다. 그렇게 포착한 비정형, 비효율, 비경제적인 대상들은 격정적인 울분이나 서정적인 감상에 갇혀 있지 않는다.죽어 가는, 죽어 있는 세상을 비판하거나 애도하지 않는 단단하고 건조한 응시는 현실 안의 희망과 가능성을 포기한 듯하지만 그것은 해답을 주는 대신 질문만을 지속함으로써 대상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어떤 감상적인 자기연민에도 빠지지 않고 우리의 삶과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새로운 시적 언어를 탐구하는 김기택의 시적 태도가 돋보인다.덧붙여, 시집 첫 장에서 시인은 `시 쓰는 일 말고는 달리 취미도 재주도 없는 자신의 뛰어난 무능과 활발한 지루함`을 탓하면서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자신의 삶의 태도를 고백한다. 시집을 받아든 이들은 이러한 `있음`의 방식을 통해 밥벌이의 고단함과 일상의 허무함에 의미를 새기고 가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통속적이지 않으면서도 다중을 위로하는 김기택 시만의 강인함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2-28

계간 `스토리텔링 아시아` 출간

계간 문예지 `아시아` 겨울호인 `스토리텔링 아시아 시리즈`(아시아)는 우리가 잘 아는 도시지만 잘 알지 못하는 도시의 이야기를 `이야기 지도`로 펼쳐 보인다. 2012년 `스토리텔링 아시아`는 하노이, 상하이, 삿포로를 먼저 여행했고 올해 마지막으로 인도 델리를 찾아간다.28개 주, 7개 연방직할령이 있고, 24개의 공용어를 사용하는 인도는 하나의 문화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델리는 여러 가지 문화와 언어가 한데 어우러지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도시이다. 쿠시완트 싱이 소설 `델리`에서 말한 것처럼 이번 델리편을 읽다보면 델리가 가진 묘한 매력에 취할지 모른다.십 수 년 인도를 드나들며 다양한 층위의 여행을 하며 진짜 여행은 인도에만 있다고 여긴 여행가이자 사진가인 이희인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어 한다. 바로 진짜 소설들은 인도에만 있다고. 인도 소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소설보다 약동하는 생명력을 자랑한다고 한다. 2008년 `화이트 타이거`로 부커상을 수상한 아라빈드 아디가 `적절한 균형` `그토록 먼 여행`의 로힌턴 미스트리,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비카스 스와루프, `축복받은 집`의 줌파 라히리, `작은 것들의 신`의 아룬다티 로이, `아편의 바다`의 아미타브 고시 그리고 `델리`, 인도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쿠시완트 싱의 작품 등이 있다. 이번 스토리텔링 아시아 델리편에서도 M. 무쿤단과 폴 자카리야의 단편소설을 통해 인도 소설의 풍미를 맛볼 수 있다.`라마야나`는 고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재미있다. 신과 인간과 동물이 어우러진 판타지같은 배경에 왕자 `라마`의 모험과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자격, `도덕`에 관한 물음을 다시 속 깊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에 영화평론가 이안이 다시 물음을 던진다. 바로 여성의 눈으로 `라마야나`를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영화인 이안의 글 `영화 속의 라마야나`는 디파 메타 감독의 `파이어`와 니나 페일리 감독의 `블루스를 부르는 시타`를 고찰한 글이다.영화 `파이어`가 고국 인도의 여성을 여전히 얽매는 관습 때문에 여성들이 어떻게 고통 받고 저항하는가를 짚어보는 영화라면 `블루스를 부르는 시타`는 그 관습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됐으며, 그런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인도 바깥 여성에게 어떤 공감과 위안을 주는가를 살피는 애니메이션이다.`Dilli dur ast`(델리는 멀다)라는 말처럼 델리는 인도의 민중들에게도 또 여행자들에게도 천상만큼 먼 도시이다. 그래서 델리편 이야기 지도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서장을 연다. 이희인 작가의 `인도를 여행하는 독서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는 인도에 매혹된 여행자의 인도 현대 소설에 대한 단상들을 담고 있다.`이야기 지도 4`는 인도가 가진 고민에 대한 이야기다. 말라얄람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M. 무쿤단의 단편소설 `운전사`는 평생 남의 운전사로 일하다 존재론적 각성에 이르러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폴 자카리야의 `라다. 오직 라다`는 앞서 말한 무쿤단에 대한 소설적 오마주를 숨기지 않는 실험적인 작품이다.마카란드 파란자페의 논문 `인도 영어, 인도 토착어`는 공용어만도 열네 개에 이르며 보조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다언어 사회인 인도에서 문학 텍스트의 생산과 번역 문제를 탐구한 글이다. 닐락시 보르고하인의 단편 `현지인`은 소수 언어인 아삼어 사용자인 작가의 곤경을 자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언어 문제에 대한 비평과 소설이 서로 잘 조응하고 있다.`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국내 발표된 소설 중에서 우수한 단편을 골라 소개하고 있다. 이번호에 소개할 단편은 박형서 작가의 `아르판`이다.태국과 미얀마 국경의 소수 언어 사용자를 인물로 끌어들여 글쓰기에 대한 고뇌를 야심차게 밀어 붙인 단편이다. 아울러 이영광 시인의 두 편의 시는 겨울의 길목에서 짙은 서정을 입혀주고 있다. 그리고 현재 델리에 체류 중인 고명철 평론가가 보내온 산문은 인도의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망한 글로 현장 보고서로서 손색이 없다. 김정남 평론가가 쓴 로힌턴 미스트리 장편소설 `그토록 먼 여행` 리뷰도 일독을 권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2-28

한 사람이 바꿔놓은 행복한 가족 이야기

“초등학교 6학년, 아직 어린 나이에 민석이는 엄마를 잃습니다. 몸은 작고 가벼웠지만, 포장마차를 하면서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정성껏 모셨던 엄마였습니다. 민석이는 엄마가 큰고모의 모진 말 폭탄과 아빠의 무심함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공부 잘하는 사촌 정미가 있는 학교도 가기 싫고, 집안 살림을 잡고 흔드는 큰고모가 있는 집도 싫습니다. 그래도 이제 할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민석이뿐입니다. 오로지 할아버지 때문에 버티고 있던 민석이 앞에 몽골에서 온 `새엄마`가 나타납니다. 새엄마는 항상 웃는 얼굴입니다. 하지만 민석이에겐 `입 큰 괴물`로만 보입니다. 새엄마 때문에 더 속상하고 집이 불편하다고 느꼈는데, 언젠가부터 새엄마가 궁금하고 의지가 됩니다. 특히 전학을 하는 날에는 새엄마가 옆에 있어 주어서 조금은 든든합니다. ”중진 동화작가 김일광씨가 최근 다문화가정을 소재로 한 창작장편동화 `엄마라서 행복해`((주)중앙출판사) 를 출간했다. `엄마라서 행복해`속 가족은 단순히 다문화 가정이 꾸려지는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어린 소년이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자신을 위해 주고 지켜 주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금 의존하며 커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최근 아동문학이 아이들의 기호에 맞춰 가벼워지고 있는 반면 김씨의 이번 동화는 한국 아동문학을 진중한 서사와 주제로 지키고 있는 아동문학의 버팀목이 되는 주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김일광씨는 “최근의 동화작품들이 다문화 여성들이 한국으로 시집와서 고생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엄마라서 행복해`는 결혼이주여성을 통해 흩어진 우리사회를 꾸려나가는 훈훈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포항 출신인 김일광씨는 30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1984년 창주문학상,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기도 했으며, 대표작 `귀신고래`는 `포항시의 One Book One City`와 2008 창비어린이 `올해의 어린이 문학`에도 선정됐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물새처럼` `말더듬이 원식이` `아버지의 바다` 등이 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12-28

조선후기 학자·정치인 이형상을 통해 본 지도자가 가져야할 덕목과 자세

이정옥 전 위덕대 교수사진가 조선 후기의 문신인 병와 이형상의 인문학적 성찰을 조명한 `백성은 물, 임금은 배`를 펴냈다. 이 전 교수는 이형상(효종 4년~영조 9년)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당화에 휩쓸린 조선조 후기 관료사회의 모순들을 혁신하려고 노력한 학자임과 동시에 청렴한 `정치인`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병와는 전 생애를 통해 총 142종 326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목민관으로서 경험과 성리학적 사유는 새로운 실학의 불을 당기는 가교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의 생애 경험이 고스란히 방대한 저술로 남아 그의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둔서록(遯筮錄)`, `악학편고(樂學便考)`, `강도지(江都志)`,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등은 국가 보물(제 256호 1~10)로 지정됐다.한 개인이 지켜내야 할 정직하고 깨끗한 숭고한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또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고결해야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편찬한 이 책에는 300년 전 병와가 이뤄낸 인문학적 성찰 또한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이 전 교수는 “시대는 변했지만,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과 자세는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300년 전, 백성을 사랑하고 녹슨 관료사회를 개혁하려 한 병와의 가르침을, 현 사회를 살아가고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받아들여야할 이유”라고 전했다.“대저 사람의 세상이란 하나의 큰물이고, 백성의 마음은 하나의 큰 바람이다. 성난 물결이 해(임금을 상징)를 향해 쏟아지고 급한 여울이 산을 밀치며, 무너져 내린 구름과 자욱한 안개가 바다를 가리고 하늘을 막아 천오(天吳, 북두의 중심별)가 잠깐 보였다가 금방 숨어 암초가 이미 지났는데 다시 부딪치게 되는 것이 바로 험악하다는 것이다. 막연하고 어두운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갑작스레 거울같은 평면의 물결을 격렬하게 뿜어대어 하늘에 닿을 형세를 이루어서 돛대가 부러지고 삿대가 망그러져서 방황하고 정신이 없어 지척의 사이를 알 수가 없고 담이 떨어지고 정신이 나가는 것이 이른바 무섭다는 것이다.”-본문 `백성은 물, 임금은 배`편 중에서이 전 교수는 “경제가 어렵고, 민심이 동요되고, 정치인들, 소위 윗사람 들만 풍족하고 편안한 나라를 바라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다. 이 책 속에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뜻하는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을 나아가게 해줄 넉넉하고 잔잔하고 넓은 물, 바로 국민을 생각할 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2-21

현실에 길들여진 40대 중년의 삶 노래

1989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주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그리움의 넓이`(창비)가 출간됐다. 80년대 민중민족문학 진영의 촉망받는 젊은 시인이던 그는 첫 시집 `도화동 사십계단`을 발표한 뒤로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2007년 `꽃이 너를 지운다`를 펴내며 시작활동을 재개했다. 네번째 시집 `나쁜, 사랑을 하다`(2009)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실에 길들여진 채 살아가는 사십대 중년의 소시민적 삶을 담백한 어조로 노래한다. 평범한 일상 언어로 삶의 사소한 기척들을 포착해내는 자전적 시편들이 가슴 저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우주는 지구를 저질러놓고/용암 같은 점액질의 시간을 흘려보냈다/육신을 만난 시간이 뼛속에 나이테를 새겨/뜨겁고 촘촘히 과거를 감아놓았다/나는 사건이다/깊은 숲 속 시간의 무거운 흐름 위로/어느날 튀어오른 물고기처럼/세상에 왔다/(…)/생은 시간을 역류하여 솟아오른 사건이다/아들이 나의 해결할 수 없는 벅찬 사건이듯이/모든 생은 스스로를 수습한다”(`시간의 사건`부분)현실의 구체적인 풍경 속에서 삶의 진정성과 아름다운 가치를 찾아내는 김주대 시의 밑바탕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깔려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2-21

평생 한 여인만 사랑한 한 남자의 운명적 연애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성석제(53) 작가가 첫 번째 장편 연애소설 `단 한 번의 연애`(휴먼북스)를 펴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고래잡이의 딸에게 매혹 당한 소년이 중년의 남성이 되기까지, 시대의 폭력과 인생의 굴곡을 넘어 오직 한 여자만 사랑한 그 연애와 구원의 서사를 그린 소설이다.사랑과 구원이라는 보편적 테마를 성석제 작가 특유의 유머와 통찰, 그리고 자기 세대의 경험담을 농축해 그려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흡인력 강한 소설이다.동해안 어촌마을(포항 구룡포)에서 태어난 남자(이세길)는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고래잡이의 딸(박민현)을 만나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힌다.그 시점부터 남자는 유년 시절,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데모와 미팅으로 대변되는 대학 시절, 그리고 군대(전경) 시절을 거쳐 사회인으로서의 시절까지 이어지는, 한 여자만을 향한 아름답고도 운명적인 연애를 펼쳐간다.황홀하고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연애의 미학이, 깊은 좌절감과 극한의 희열 사이를 오가며 반복되는 연애의 본질이, 작가 세대의 경험담과 시대상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을 통해 한편으로는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릴 정도의 묵직한 감동으로 그려진다.그와 동시에 베이비부머 세대의 주인공들이 시대와 일상의 폭력을 넘어 사랑을 통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 역시 흥미진진하다.고래잡이배의 포수인 아버지와 나나(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식모)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민현을 알고 난 후 지속된 세길의 연애 여정에는 삶이 지닌 본연의 폭력성과 한국 현대사 50여 년의 격렬한 물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험난한 질곡의 순간순간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의 사랑은 비범하지만 위안의 장소가 없는 그녀에게 구원의 도피처가 되어 준다.소설은 민현을 향한 세길의 연애 연대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모든 현대적 폭력들에 맞서 인간과 자연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현재의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교차 병렬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성석제 작가 특유의 필담으로 리드미컬하게 현재와 과거, 그리고 시대상을 오가며 이야기의 재미를 배가하고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한다.`단 한 번의 연애`는 평생 단 한 여자만을 사랑했던 한 남자의 간절한 연애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폭력을 극복해내는 사랑의 가치를 다시금 웅변하는 작품이며, 동시에 현시대 인류가 극복해 나가야 할 폭력은 무엇이며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는 무엇이지를 되묻는 진정성 가득한 소설이다.소설의 시대라 불리며 세계적인 대문호들을 배출한 19세기의 문학. 이 시대의 소설이 다룬 주제를 가장 극명하게 두러낸 작품들로 허먼 멜빌의 `백경`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 세계문학 중에서도 단연 백미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전자는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과 집념을, 후자는 죄와 구원의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성석제의 `단 한 번의 연애`는 이들 고전소설의 소재와 주제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시대적 역전 현상을 생생하게 반영한 작품이다. 허먼 멜빌이 `백경`을 통해 광포하고 거대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과 위대한 정신을 다루었다면, `단 한 번의 연애`는 역으로 인간의 탐욕이 고래와 같은 자연과 생명, 그리고 인류 절대 다수의 삶에 가하는 폭력을 경고하는 형태로 주제의 역전을 이룬다.또 `죄와 벌`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윤리를 구원하는 소냐의 여성적 치유를 그려냈다면, `단 한 번의 연애`는 민현을 향한 세길의 남성적 헌신과 평범함으로 위대함의 빈틈을 아우르는 포용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구원이라는 테마의 변주를 이루어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2-21

철강왕 박태준 사상·생애 `총망라`

청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타계 1주기에 맞춰 그의 사상과 생애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 책 `박태준 사상, 미래를 열다`(아시아)가 출간됐다. 지난 4월 출간된 총5권의 `청암박태준연구총서`의 30명 저자들 중에 송복, 최진덕, 전상인, 김왕배, 백기복이 집필하고,`박태준`평전을 쓴 이대환 소설가가 엮었다.사회적으로 공로가 큰 인물의 타계 이후 그를 기리는 책이 발간되는 일은 출판계에서 흔한 일이지만, `박태준 사상, 미래를 열다`는 무엇보다도 고인의 정신을 후세에 유용한 유산으로 남기고자 하는 작업이라는 데서 더욱 관심을 끈다.송복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선비의 전형(典型) 박태준의 선비사상`에서 `박태준 연구`의 당위성을 다른 기업인 연구와 달리 사회·인문학 연구자들의 참여에서 풀어본다. 자칫 주관주의에 빠질 수 있는 고인이 지녔던 `매력`, 그 이상을 뛰어넘는 증명해내고 싶은 사상과 정신이 그 삶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매력`은 무엇인가? 송복 명예교수는 철강왕 박태준의 매력을 한 마디로 `선비`라고 말한다.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박태준의 결사적인 조국애`에서 간단명료했지만 위대한 행동인이 되어 대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힘을 박태준의 `조국애`에서 찾아본다.측량할 수 있는 `성취`의 부분에서는 다소 알려진 반면, 사상에 대해서는 잘 논의되지 않은 점을 집어보는 이 글은 박태준의 사상이 강력한 정신과 방대한 독서를 통한 지식에서 나온다는 점, 비극적인 우리 현대사 속에서 남달랐던 박태준의 애국심을 풍부한 예로 설명해준다.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는 `박태준 영웅론:제철입국의 근대 정치사상`에서 독일의 비스마르크, 미국의 카네기,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 중국의 덩샤오핑, 베트남의 호치민,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 동서양에 걸친 영웅들의 삶을 살펴보고, 근대화 과정에서 제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가운데 박태준 삶의 영웅적 면모를 입증한다.김왕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박태준의 국가관과 사회관`에서 국가중흥주의자로서 박태준의 보국이념이 오늘날 갖는 의미를 짚어본다.이념과 행위의 결과는 어느 시대, 누구의 눈으로 무엇을 잣대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나오지만 공동체의 번영을 추구한 박태준의 삶을 비추어보며 개인과 사회, 국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용혼(熔魂)이란 “혼으로 녹여내어 이룬다”는 뜻이다.백기복 국민대 경영대학 교수는 `박태준의 용혼(熔魂) 경영사상`에서 포스코 창업에서부터 세계 굴지의 철강기업으로 키워낸 청암 박태준의 경영사상을 `용혼사상`이라고 부른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세계최고 철강인 박태준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그가 이루어낸 업적에 비추어 분석해낸다.그리고 `박태준` 평전의 저자 이대환의 `엮은이의 말`에 이 책을 펴내는 뜻이 잘 나타나 있는 이대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2011년 12월 13일 청암 박태준의 부음을 알리는 한국의 모든 언론들과 해외의 많은 언론들이 일제히 헌화하듯이 그의 이름 앞에 영웅·거인·거목이란 말을 놓았다. 시대의 고난을 돌파하여 공동체의 행복을 창조한 그의 인생에 동시대가 선물한 최후의 빛나는 영예였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망각의 늪으로 빠지는 함정일지 모른다. 영웅이란 헌사야말로 후세가 간단히 공적으로만 그를 기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영웅의 죽음은 곧잘 공적의 표상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이 인간사회의 오랜 관습이다. 세상을 떠난 영웅에게는 또 하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강요된다. 여기서 그는 우상처럼 통속으로 전락하기 쉽고, 후세는 그의 정신을 망각하기 쉽다.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흐트러짐 없이 필생을 완주하는 동안에 시대의 새 지평을 개척하면서 만인을 위하여 헌신한 영웅에 대해 공적으로만 그를 기억하는 것은 후세의 큰 결례이며 위대한 정신 유산을 잃어버리는 사회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막아낼 길목에 튼튼하고 깐깐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할 수는 있다. 인물연구와 전기문학의 몫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12-14

前 중국 여군 장교 포항서 한글판 시집 펴내

“만약 사랑이 과정과 준비 없이갑자기 일어난다면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그것은 강도에게 당한억울한 심정과도 같은 것이다내가 말하는 사랑은끓는 주전자와 같아물에 열을 가하고온도를 높이고점 점 끌어 올려야 하는 것”(이수매 시 `한줄기 서정`)중국의 한 여성 시인이 포항에서 한글 번역판 시집을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이수매(李樹梅) 시인 한글 번역 시집 출판기념회`가 13일 오후 6시 포항시 남구 대도동 청솔밭웨딩에서 이 시인 부부, 이환진 포항시국제화전략본부장, 영산만산업(주) 황인식 회장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이수매(53) 시인이 포항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게 된 것은 평소 이 시인과 교분이 있는 영산만산업 황인식 회장의 초청에 따른 것이다.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짱지아코우시(張家口市) 태생인 이 시인은 지난 2009년 중국 여군 장교로 근무하다 전역한 후 현재 북경 헝뤼중한(恒瑞中韓) 문화발전유한공사(文化發展有限公司) 총경리(대표)로 있다.이 시인은 `중국 여성` `중국 당대 시집` 등 여러간행물에 시를 발표하는 등 왕성한 시작활동을 해오고 있다.시인 채종한씨(전 위덕대 교양학부 교수)는 “이 시인의 시는 뛰어난 감수성을 바탕으로 마치 청순한 어린 소녀의 마음같은 순수성과 다정다감함이 강점”이라며 “시집 제목인 `한줄기 시정`에서 간파할 수 있듯이 거의 모든 시를 관통하는 아이덴티티가 바로 인간내면의 순수성에 대한 갈망”이라고 논평했다.시집 `한줄기 서정`에는 `한줄기 서정` `오직 당신만이` `내 마음속의 아침` `행복은 새처럼` 등 모두 50여수가 실려 있으며, 대부분 서정시로 분류된다.이 시인은 “제 보잘것없는 시를 번역해 출판기념회를 열어 준 영산만산업 황인식 회장께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포항시와 장가구시와의 문화교류 발전에 적은 힘이나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12-14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 담아

방대한 독서와 저술로 유명한 교회법 전문가 정진석 추기경사진의 새로운 책 `가라지가 있는 밀밭`(가톨릭출판사)이 출간됐다. 지난 6월15일 서울대교구장직 이임 감사 미사 강론에서 “교구장직을 떠나도 매 순간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작은 정성과 기도가 교회와 교구에 작은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정 추기경은 신자들을 위한 또 하나의 영적 양식을 준비한 것이다.지난해 진정한 부의 가치를 묵상할 수 있도록 펴낸 `안전한 금고가 있을까`에 이어 이번 책 `가라지가 있는 밀밭`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들을 담아냈다.`하느님 나라`는 예수님만이 밝힐 수 있는 신비로 예수님은 이 신비를 여러 비유들로 계시해 줬다. 이 책은 이 비유들에 대한 시대적·사회적 배경뿐만 아니라 비유의 핵심까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정리해 줌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그리고 비유와 관련된 성화들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묵상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실 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심지어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고도 전한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세상의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이들보다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이들, 특히 비천한 이와 철부지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아무런 편견 없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일상적인 삶과 친근한 주변 환경에 빗대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신 것이다. 공관 복음서에는 약 40여 개의 비유가 쓰여 있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특징적인 교육 방법으로, 복음 전승의 초석을 이룬다. 예수님은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일상생활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재하는 것들을 소재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 주셨다.`씨 뿌림의 비유`를 통해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를 통해서는 하늘 나라를 얻기 위해 그 가치를 알아야 하고 희생과 노력이 필요함을,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는 언제든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려면 스스로 믿음을 준비해야 함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은 이밖에도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물의 비유, 혼인 잔치의 비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등 각각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적절한 비유를 다양하게 들어 사용하셨다. 예수님이 하늘 나라의 신비를 육하원칙으로 풀지 않고 쉬운 소재들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이유는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고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깊이 생각하여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2-07

`中역사+현실+상상`의 황당한 이야기

▲ 작가 모옌올해 중국 대륙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 중국의 프란츠 카프카, 윌리엄 포크너로 불리는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모옌의 작품세계는 한마디로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규정할 수 있다.모옌 문학의 정수가 담긴 `열세 걸음`(문학동네)이 출간됐다.모옌은 1981년 단편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로 등단한 이래 열한 편의 장편소설과 여덟 권의 소설집을 펴내고, 창작 희곡 `패왕별희`를 무대에 올려 40회 연속 공연하는 성공을 거두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다.30년 넘게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고향 산둥 성 가오미의 농촌을 배경으로 중국 인민의 원시적 생명력을 형상화해온 모옌은 1987년 고향 가오미에서 `열세 걸음`을 처음 집필했다.참새가 두 발로 종종 뛰지 않고 한 발 한 발 열두 걸음까지 걷는 걸 보면 천운을 얻지만, 열세번째 걸음을 걷는 걸 보는 순간 열두번째 걸음까지 들어온 모든 운이 곱절의 악운이 되어버린다는 러시아 민담을 모티프로 쓰인 `열세 걸음`은 1989년 초판이 출간된 지 10여 년 후인 2003년 대폭 개작돼 재출간 됐다.모옌은 중국 역사와 현실을 배경으로 역사와 환상, 현실과 상상을 결합시켜서 기이하고 황당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이욱연) 것으로 유명한 작가다.또 화자와 청자가 수시로 주객의 위치를 바꾸고, 시간 흐름이 뒤엉키고,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인상이 뒤섞이며,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작품세계로도 유명하다.모옌은 이런 형식의 실험을 통해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규정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왔고, 모옌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특히 `열세 걸음`은 스웨덴 한림원이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모옌을 선정하면서 밝힌 이유를 가장 잘 구현한, 모옌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열세 걸음`은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서술자가 분필을 씹어 삼키며 청자(혹은 독자)에게 자신들의 도시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서술 시점이 끊임없이 바뀌면서 서술자는 때로 `나`였다가 `너`가 되고, 청자도 처음에는 `우리`인가 싶지만 곧 `너`가 되고 또 어느 순간 `나`로 등장한다.서술자의 이야기 속 `그들`도 `나`와 `너`로 번갈아 등장하길 반복한다. 이야기도 시간 순서로 전개되지 않는다. 서술자의 머릿속에 떠오는 대로, 서술자의 주관적 느낌이나 중국의 민담들과 뒤섞여서 전개된다. 하지만 마치 전설이나 민담, 신화 같은 이 이야기들은 중국의 20세기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모옌은 우리가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어하지도 않지만 엄연하게 존재하는 현실을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투과해, 어느 한 사건, 어느 한 관점의 역사만이 진실이 아니라고 웅변하고, 하나의 시점이나 하나의 화자가 등장인물의 운명과 사건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을 거부한다.1980년대 중국의 어느 소도시, 장츠추와 팡푸구이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궁색하게 살고 있는 이웃이자 같은 학교 물리교사이다. 이 둘은 대학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지만 그들의 현실은 열악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다. 집에서는 초라한 가장이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쉴새없이 학생들을 채찍질하고 내몰아야 하는 교사일 뿐이다.그러던 어느 날, 팡푸구이가 수업중 졸도를 하자 학교에서는 그가 과로로 순직한 것으로 처리해버린다. 팡푸구이의 `순직` 소식이 학교 밖으로 퍼지면서, 박봉에 업무 과다로 죽음으로 내몰린 교사를 돕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시 정부는 예산을 대폭 투입해 교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기로 결정한다.한편 죽지 않은 팡푸구이는 장의사로 실려가던 차 안에서 정신을 차리지만, 교장은 그가 죽으면 모든 교사들의 삶이 나아진다며 `작은 비인도주의와 큰 인도주의`를 맞바꿀 것을, 팡푸구이에게 그대로 죽을 것을 강요한다.시작은 어느 소도시의 중학 교사가 교단에서 과로로 기절한 것에 불과했다.그러나 그 작은 사건이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지식인들의 억압적인 현실, 대학입시 위주의 비인간적인 교육 풍토, 고기 한 점 먹기 힘든 가난과 맞물리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로 기형적으로 발전해간다.그리고 그 속에서 팡푸구이와 장츠추 그리고 그 가족들은 그동안 허상처럼 간신히 유지해오던 인간성을 점차 잃어가면서 비극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2-07

능력자 권하는 사회의 무능력자를 위한 엘레지

“내가 지향하는 문학은 바로 `항문발모형(肛門發毛形, 울다가 웃다가 ***에 털이 나는)` 문학이다.” 2010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은 최민석은 이렇게 선언하며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는 등단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통해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끝까지 읽게 만드는 필력이 예사롭지 않으며, 화자의 시선이나 화법 등에서 이미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추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이후 `부산말로는 할 수 없었던 이방인 부르스의 말로`, `쿨한 여자`, `누구신지….`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아 온 그는 마침내, 2012년 제3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데 성공했다.`능력자`(민음사)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없던 신인 무명작가 `남루한`이 전직 세계 챔피언 `공평수`의 자서전을 대필해 주면서 진정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출판사”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 작가 남루한은 `순수문학`을 넘어 `청순문학`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청순한 작품을 써 왔으나, “청순하게 살아서는 입에 풀칠도 못한다는 거대한 문학 세계의 현실적 장벽”에 부딪혀 야설 작가로 전락하고 만다.`한때는 온 땅을 뒤흔들었으나 지금은 멸종해 버린 티라노사우루스`처럼 이제는 누구 하나 관심 갖지 않는 권투를 소재로 삼은 이 소설에서 전직 권투 선수 공평수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그러나 소설은 공평수의 삶을 마냥 우울하게만 그리지 않으며, 그에게 남아 있는 진정성을 감동적으로 그려 낸다.공평수는 말한다.“비운의 선수, 게으른 천재, 시대가 몰라본 선수. 이런 말 들으면서 자위할지도 모르지. 그건 정말 허망한 자위일 뿐이야. 평생 그렇게 변명할 텐가. 나는 지금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스스로 “너절한 자아”라 할 만큼 추락해 있는 남루한은, 공평수가 복귀전을 치르면서 보여 주는 진정성으로 인해 “너절해져도 찢어지진 않는” 삶의 경지를 깨달으며 자신의 삶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능력자`는 초능력자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현대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사회는 결과 위주, 성과 위주, 경력 위주의 가치관을 갖고 오로지 승부에만 집착하며 결과만 기억한다.땀 흘리는 과정 따윈 어느 누구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평범한 능력으론 살아남지 못한다. 사회는 능력자를 넘어선 `초능력자`를 원한다.“학생들은 더 나은 대학을 위해, 청년들은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직장인은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주부들은 더 넓은 집을 위해, 청춘들은 더 나은 배우자를 위해, 더욱 혹사하라고, 더욱 희생하라고” 몰아친다.이렇게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이,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일상, 우리의 진정한 삶을 잃고, 그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를 구성하는 볼트와 너트로 전락하고 만다.그러면서도 우리는 “저의 오늘은 모두 어제의 희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저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라고 자기최면을 걸며 더더욱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한다.그러나 공평수는 “평범함 능력만으로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고, 보잘것없는 시간들이 값지다는 것”을 보여 준다.“난 끝까지 버텼어. 난 포기하지 않았어. 알지? 꼭 그렇게 써야 해.”공평수가 남기는 마지막 말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승리임을, 승부를 떠나, 달리고, 땀이 나고, 눈물이 나는 그 과정, 비록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살아 있음 그 자체를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승리라는 진리를 가슴 깊이 전해 준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11-30

`무사`하지만 `안녕`하지 않은 날들

느리고 조용하게, 치밀하지만 따뜻하게 일상적 삶의 한 면을, 누군가의 아픈 마음자리를 가만히 더듬어보는 작가 이혜경의 새 소설집 `너 없는 그자리`가 출간됐다.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틈새`(2006) 이후 6년 만의 작품집이다. 6년 그리고 아홉 편의 단편, 워낙 과작(寡作)인 작가의 유독 더딘 걸음이지만 그 발자국은 여전히, 보다 더 깊고 단단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작가가 옮겨놓은 그 한 발 한 발, 선명하게 남아 있는 발자국은 깊고 넉넉하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밤사이 큰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내어놓은 아버지의 첫 발자국과도 같다. 우리는 그가 찍어놓은 발자국 위에 내 발을 포개어놓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된다. 감당하지 못할 폭설이 아니어서, 재앙으로 이어지는 큰눈이 아니라서, 그것은 얼핏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발자국 위에 제 발을 포개어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앞서간 이가 내어놓은 그 발자국이 얼마나 다행한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더운 온기를 품고 있는 것인지.“당신, 잘 지내요?사건사고가 차고 넘치는 요즘, 뉴스거리와는 (다행히) 상관없는 우리의 일상은 일견 무탈해 보인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지나가고, 또 내일도 다르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면서 우리는 잠이 든다. 하지만 바로 같은 순간에, 늘 같아 보이는, 평온해 보이는 그 일상과 함께 자라나는 불안과 상처의 자리 역시,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고개만 돌리면 환한 햇살인데, 그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해 그늘에 갇혀 있어야 하는 날들이 있다.”`그리고, 축제`그런 날들이 있다. 그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해 스스로를 그늘 안에 가둔 날들. 그것은 때로 무사한 일상에 날아든 뜻하지 않은 사고가 아니라, 어느새 한켠에 자리를 잡아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늘이기도 하다. `무사`하지만 `안녕`하지는 않은 날들의.이혜경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이런 일상의 한가운데서 문득 건네받는 안부인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신, 잘 지내요?` 작가의 밝은 눈은, 우리 안의 그늘과 상처와 허기를 미리 보고 더듬어, 오히려 우리를 조용히 무너뜨린다.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은 일상, 잠들기 전이면 또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에 가슴 쓸어내리는 동시에,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는구나, 한숨 쉬는 날들.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 위에 드리워진 그늘 안에서 우리는 늘 흔들리고 불안하다. 단단하게 발붙이고 있는 듯 보이는 두 다리는 실은 늘 가늘게 떨리고, 일상이라는 바닥이 과연 안전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때문에, `무사`한 하루중에 누군가 문득, 당신 잘 지내요? 안부를 물어오면, 우리는 때로,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싶다. 그제야 우리가 `안녕`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해서, 이혜경의 소설이 건네는 이 안부인사는 입밖으로 내지 않은 더 많은 말들을 삼키고 있다. `알아요, 당신. 괜찮지 않다는 거. 쉽지 않다는 거. 지금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발버둥치며 울고 싶다는 거. 하지만 당신,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우리.`세상 밖으로 달아나던 오후, 시장에서였다. “내 손이 이렇게 커지는 걸 보니, 아가씨가 무척 허기졌나보우.” 그러면서 떡장사가 내민 떡은, 치른 값의 두 배가 되는 양이었다. 그 떡이 간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임을, 어떻게 알아본 걸까. 사람의 허기를 눈 밝게 알아보고 어루만지는 손, 내가 쓰는 글이 그런 것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그런 글을 쓸 수 있게 될까.오래전 작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길 위의 집`작가의 말) 소원한 대로 그는 무탈한 일상에도 상처를 입는 우리에게 더운 손이 되려 하고 `약풀`이 되려 하지만, 섣불리 위로하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위로와 공감의 말이 어차피 제대로 가 닿지 않을 것임을. 함부로 입밖으로 내놓은 위로의 말이 오히려 또다른 독이 될 수도 있음을. 한 걸음 햇살 안으로 걸음을 떼어놓는 건 결국, 우리의 몫이다. 다른 누구의 손에 이끌려서는 그늘과 맞닿아 있는 그 얇은 `금`을 넘을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그렇게 별뜻 없어 보이는, 무심해 보이는 안부인사 한마디로 온기를 전한다. 그 자리에 그렇게 흔들리며 견뎌내는 것이 우리의 삶일지 모른다고. 저마다의 앞에 놓인 그 강은 결국 혼자 건너야 하는 것이라고.불가항력을 딛고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항력에 한 발을 내어준 채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짜 삶다운 것이라고, 그리고 그 삶다움을 재현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문학다움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려는 듯하다. 제 자신의 불행을 모른척하기 힘들다는 앎의 불가항력,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삶의 불가항력, 그리고 어떤 위로나 공감으로도 좀처럼 완벽해질 수 없다는 관계의 불가항력. 작가는 이 모든 불가항력을 디딘 채로만 우리 삶이 언젠가는 진정한 축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연정(문학평론가) 작가의 문장들은 아무 멋부림 없이, 섣부른 위로의 몸짓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던져져 있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한 편 한 편이 이미 어떤 `틈새`를 드러내고 `파문`을 만든다. 그것은 결국 호수의 저 끝까지 닿은 뒤에야 다시 고요한 수면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무사`한 일상을 흔드는 모든 불가항력을 깨닫게 함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위로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30

`격동의 19C` 이야기꾼으로 술술술

▲ 등단 50주년 맞은 작가 황석영씨.1962년 `사상계`에 `입석부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황석영이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동시에 그의 나이 칠십에 이르렀다. 그의 문학 인생 50년을 되돌아보면 단 한 순간도 평범했던 적이 없었다. 황석영의 발자취는 우리의 근현대사와 항상 함께해왔다. 황석영이라는 인물 자체가 격동의 시대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그릇인 것이다. 황석영은 당대 역사의 큰 물줄기 속에서 단 한 번도 직면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맞서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황석영이 우리 식의 `이야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심해온 것은 그의 후반기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출옥 이후부터이다. `오래된 정원`이 이전 산문의 습관들을 해체하는 데서 시작했다면, 그 뒤 연이어 발표한 `손님`, `심청`, `바리데기` 등은 우리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형식과 내용 모두 지금의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심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르포나 신문기사 같은 사실적 자료를 바탕으로 개발독재의 사회사를 서사적 다큐멘터리로 엮은 작품이 `강남몽`이고, 1980년대가 배경이었지만 줄거리 자체를 현대적 민담으로 탄생시킨 작품이 `낯익은 세상`이다.그리고 이제,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자신을 돌아보며 19세기의 `이야기꾼`에 대해 집필한 자전적 작품 `여울물 소리`(자음과모음)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작품은 이미 인터넷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은 작품이기도 하다.`여울물 소리`는 외세와 신문물이 들이치며 봉건적 신분 질서가 무너져가던 격변의 19세기를 배경으로 이야기꾼 `이신통`의 일생을 뒤쫓는 내용으로 동학과 이야기꾼이라는 존재를 큰 축으로 하고 있다.19세기는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봉건왕조가 무너져가던 때로, 민중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제국주의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는 시기이기도 하다.동학은 민중의 자생적 근대화 의지가 담긴 사상이었고, `이야기꾼`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존재로, 이신통을 통해 작가의 담론을 펼쳐낸다.“내 마음 정한 곳은 당신뿐이니, 세상 끝에 가더라도 돌아올 거요”`여울물 소리`는 19세기 격동의 시대를 담아낸 작품으로, 그 주제의식과 소재 등은 대하소설을 써도 충분할 만큼 방대하다.이런 방대한 작업을 단 한 권으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진정한 압축의 미를 보여준다. 그만큼 밀도 있고 탄탄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또한 동학, 전기수, 강담사, 작자 미상의 수많은 방각본 소설, 타령 등 다양한 소재들은 소설 곳곳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하며 독자들에게 독서의 재미를 선사한다.이 소설의 이야기는 화자 `박연옥`의 회상으로 시작된다.시골 양반과 기생 첩 사이의 서녀로 태어난 연옥은 이신통에 대한 연정을 한평생 마음속에 품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리워하며 인내하는 우리네 전통적인 여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라진 그를 찾기 위해 직접 그의 행적을 따라 길을 나설 정도로 당찬 면모를 보여준다.소설은 연옥의 입을 통해 모자이크 벽화처럼 이신통의 행적이 드러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신통은 물론 주변인들의 태생, 성격과 이들이 겪은 일을 손바닥 보듯 훤하게 꿰뚫고 있는 연옥은 사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 근접한 1인칭 관찰자이다.“갑오년에 시작된 혁명이 이제 다 끝났지요. 그러나 아주 끝나버린 것은 아니외다. 물이 말라 애를 태우던 가뭄이 지나면 어느새 골짜기와 바위틈에 숨었던 작은 물길이 모여들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고, 강물은 다시 흐르겠지요. 백성들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찌 죽은 이들의 노고가 잊히겠습니까?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p. 467)/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23

서구 인문주의 전통 조망·철학 새 지평 열어

`진리와 방법`(문학동네)은 `진리`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저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근대 과학의 객관주의적 방법론으로 포착되지 않는 진리의 경험과 그 정당성을 밝힌다. 가다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와 스피노자, 칸트와 헤겔을 거쳐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에 이르는 서구 인문주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면서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가다머에게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동적인 인간경험의 역사성에 기초한 이해의 산물이다.후설과 하이데거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은 훗날 비판이론의 하버마스, 해체론의 데리다와 세기적 논쟁을 촉발한다.가다머 사후 데리다는 `끝나지 않은 대화`라는 제목의 추도사에서, 가다머와 나눈 우정어린 대화를 통해 비로소 20세기 독일 사상과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학과 미학에서 가다머의 영향사 이론은 야우스의 수용미학과 허쉬의 문학해석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진리와 방법`은 학제간 경계를 넘나들며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을 담은 저작이다.가다머는 자연과학의 객관주의와 그 영향을 받은 인문과학(사회과학)의 실증주의, 그리고 정신과 인식대상의 주객 동일성을 전제하는 관념론에 맞서 `이해의 역사성`을 축으로 정신과학적 진리를 복권시킨다.가다머가 `진리와 방법 1`(1부)에서 천착하는 것은 예술경험에서의 진리 문제다.이렇게 예술경험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이 미적 체험의 영역이 근대 과학의 객관주의적 방법론의 영향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23

남성 우위의 시대 `저문 자리` 여성 특징·위상 변화로 대체

`남자의 인류의 여명기부터 줄곧 지배적인 성별이었던 남성의 몰락과 쇠퇴의 현상을 진단하고 원인을 파악하며, 남녀 간 권력의 이동 및 성 역할의 혁명적인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 질서의 재편을 주장하는 `남자의 종말`(민음인)이 출간됐다. `애틀랜틱`의 수석에디터이자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해 온 저널리스트 해나 로진이 쓴 이 책은 지난 9월 미국 출간 직후 `뉴욕타임스`, `타임`, `가디언` 등 유수의 언론에 소개됐으며, 단숨에 관련 분야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르는 등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저자 해나 로진은 이 책을 통해 남성 우위의 시대가 어떻게 저물고 있는지, 그 자리를 여자들이 어떻게 차지해 가고 있는지를 통계 자료 및 인물 인터뷰, 현장 취재 등 다방면에서 취합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통해 철저하게 분석한다.뿐만 아니라 성 역할의 변화가 결혼 및 자녀 양육 등의 개인 차원의 문제부터 노동,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의 구도를 재정립하는 데 미치는 영향까지 여러 각도로 성찰한다.또한 억측이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은 깊은 통찰력과 폭넓은 호기심으로,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변화가 근본적인 지형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있음을 보여 준다.2009년 미국 전체 노동 인구 중 최초로 여성 비율이 남성을 넘어섰다. 그 이듬해인 2010년, 한 편의 칼럼이 월간지 `애틀랜틱`에 실리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남자의 종말`이라는 제법 자극적인 제목으로 실린 이 칼럼은 미국의 대학 입학률, 이혼율 등을 예로 들며 남성 우위 시대의 종언을 냉정히 선언했다.칼럼을 쓴 해나 로진은 “현대 후기 산업사회는 여성에게 점점 유리해지고 있다”며 “그 증거는 사방에 널려 있지만, 오랫동안 관습에 얽매여 온 대중들이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이제 여자들은 더 이상 남자들의 뒤만 쫓고 있지 않으며, 거의 모든 면에서 남자들을 결정적으로 앞지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해나 로진은, 칼럼 내용을 바탕으로 집필한 `남자의 종말`에서 이러한 주장을 더욱 치밀하게 드러낸다. 더불어 가부장적 질서와 남성적 특성들이 가치 우위를 점하던 사회가 막을 내리고, 그 자리를 여성의 특징과 위상 변화가 대체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짚어 내며, 이 과정에서 기존에 남성이 당연하게 누렸던 권력과 여성이 불가피하게 받아야 했던 차별이 고스란히 역전되는 상황까지 언급한다.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인 8장 `골드 미스 분석` 에서는 한 장 전체를 아시아 사례를 소개하는 데 할애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아시아 대학생 영어 토론 대회의 참가자인 김예은, 하버드대학교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취업한 김용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대변인 나승연, 한국 여성의 실상을 알리는 파격적인 광고를 통해 주목받은 마케팅 컨설팅 회사 대표 황명은, 한국의 전형적인 골드 미스라 할 수 있는 스테파니 김과 커스틴 리까지 다양한 상황에 놓여 있는 한국 여성들을 직접 취재하고 그 이야기를 실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23

조선시대 커리어 우먼, 의녀의 세계

`팔방미인 조선 여의사`라는 부제가 붙은 `의녀`(문학동네)는 한국 의학사상 가장 특별하면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존재인 의녀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다. 의녀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처음 탄생했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천출인 까닭에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또한 높은 사람들을 시중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에게도 냉대를 받았다. 능력보다 신분을, 일하는 여성보다 규방 여성을, 여성보다 남성을 우대하던 조선시대의 낡은 관습 때문이었다.1장에서는 어떤 목적과 배경에서 의녀가 탄생했는지 알아본다. 의녀는 조선시대에만 존재했던 특이한 직업이다. 유교 이념에 따른 내외법(內外法) 아래 남녀 간의 신체 접촉을 금기시했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당시 의원(醫員)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텔레비전 드라마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손목에 묶은 실로 왕실 여성을 진맥하는 의관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태종 대에 여성의 질병 치료를 위해 의녀 제도를 만들어 국가 차원에서 의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2장에서는 의녀의 교육에 대해 살펴본다. 의녀 교육은 제생원(濟生)에서 이뤄졌다. 각 지방에서 뽑혀 올라온 나이 어린 여종들은 먼저 `천자문` `효경` `정속편(正俗篇)` 등을 읽고 글을 깨우친 다음 기초 의학 과목과 산부인과 등에 대해 배웠다. 그런 다음에야 맥경(脈經)과 침구법(鍼灸法), 약 조제법을 배우는 단계로 넘어갔다. 매 과정에서는 경쟁 또한 치열했는데, 실제로 수련 과정에서 탈락하는 이들이 많았다.세종과 세조, 성종, 중종 등은 의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3장에서는 의녀의 구체적인 역할과 활동에 대해 알아본다.의녀는 크게 진맥, 침과 뜸, 약을 담당했다. 모든 의녀는 이 세 가지 일 모두에 얼마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했지만 전문 분야에 따라 의녀를 맥의녀, 침의녀, 약의녀로 구분하기도 했다. 의관이라도 왕실 여성의 몸은 만질 수 없었기 때문에 왕비, 대비 등의 진맥은 의녀가 했다.물론 주된 역할은 의원을 보조하는 것이었지만 의녀는 이렇듯 진맥 등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발휘했다.4장에서는 의녀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살펴본다. 같은 의료인으로서 어의(御醫)는 정3품, 심지어 당상관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에 견주면 의녀의 대우는 보잘것없었다. 의녀는 아예 품계가 없었다. 그러나 쌀, 보리 등으로 급료를 받았고, 조세와 요역에서 혜택을 받았다. 이는 의녀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로써 국가에 일정한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의녀가 받을 수 있는 포상 가운데 으뜸은 바로 천민 신분을 벗을 수 있는 면천(免賤)이었다. 공에 따라 포상에도 차등이 있었는데 면천은 주로 침술로 큰 공을 세웠을 때 내려졌다. 비록 기회는 적었지만 어쨌든 의녀에게는 능력에 따른 신분 상승의 기회가 있었던 셈이다. 5장에서는 조선시대에 유명했던 의녀들에 대해 알아본다.성종 대에는 장덕과 귀금이라는 의녀가 유명했다. 장덕은 제주도 출신으로 치통과 충치 치료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고 하고 부스럼 또한 잘 고쳤다고 한다.성종이 제주 목사에게 의녀 장덕이 죽고 없으니 여러 아픈 곳의 벌레를 잘 고치는 사람이 있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보내라(`성종실록`권266, 성종 23년 6월 14일 계축) 하였을 정도로 유명했다. 귀금은 장덕의 기술을 물려받은 의녀라고 한다. 중종 대의 유명한 의녀로는 바로 대장금이 있다. 대장금의 `대(大)` 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가 미지수다. 키가 컸다는 뜻인지, 의술이 뛰어났다는 뜻인지, 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인지 현재로서는 밝혀낼 자료가 없다. 혹은 장금과 큰 장금, 각각 다른 두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대장금 또는 장금은 실록에 29년 동안 그 이름이 등장한다.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임금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치료하고 간호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정조 대에는 기근에 굶주린 제주 백성을 구한 김만덕이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직함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의녀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6장에서는 의료 외에 의녀가 수행했던 임무에 대해 살펴본다.의녀를 지칭하는 또다른 말로 `약방기생`이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연산군 이후에 생겨났는데 연산군이 연회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기녀와 더불어 의녀까지 동원했기 때문이다. 연산군 대에 의녀는 “의서 말고도 음악을 배워 궁궐의 잔치 때마다 화장을 하고 참가하였다”고 한다.의녀는 수사관 역할도 했다.범죄와 관련해 여성의 상처를 조사해 사건 담당 기관에 보고하고, 때로는 시체를 검시하기도 했다. 내외법에 따라 여성 범죄 혐의자는 의녀가 수색했다.의녀는 또 국가의 사치 단속 활동에도 동원됐다. 혼인집에 가서 사치스러운 폐물이나 예물이 있는지 조사했던 것이다.그 밖에도 친잠례(親蠶禮)에 참여해 왕비를 시중들고, 죽은 궁인의 제사 때 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연회에 참석하는 기녀에게 글과 시를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16

거울속 詩人은 귀를 만진다

최규승의 두번째 시집 `처럼처럼`이 출간됐다. 2000년 계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2006년 첫 시집 `무중력 스웨터`가 나온 다음 다시 6년 만이다.여기와 저기, 남자와 여자, 시인과 대상처럼 대칭되는 지점에 놓인 존재들이 서로 몸을 섞으며 배치를 바꾸는 최규승 특유의 시 쓰기는 `처럼처럼`에 이르러 더욱 조밀해졌다. 이 시집에서 최규승은 대칭과 순환을 통해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언어와 의미, 언어와 언어의 `사이`를 짚어내며 시의 프랙털을 자아내고 있다.최규승은 시에서 대칭 구도를 자주 이용한다. 통념과 달리 오른쪽부터 읽게 씌어진 `이상한상이`에서, 의미가 도출되는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과 익숙한 왼쪽(보이지 않는 축)부터 읽어야 한다는 관성이 충돌하면서 독자는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최규승이 주목하는 것은 이런 충돌에서 벌어지는 틈, 언어의 `사이`다.“다본라바 미러끄물 를나 은인시 의속울거이없 도임직움 히용조 도무너다진만 를귀 은인시 속울거”―`이상한상이`부분최규승의 퍼즐은 난해하지만 아예 풀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제시인 `처럼처럼`에서는 힌트를 슬쩍 내주며 “언어와 대상, 언어와 실재 사이의 거리를 감추기보다는 그것을 날카롭게 드러낸다”.첫 연에서 “마치 사실인 듯/피처럼 붉은 물을 뚝뚝 흘리며/온몸에 전구 같은 심장을 수없이” 달고 “기계처럼, 쇳소리 같은, 소리를 내”는 “냉정한 여자인 듯”했던 “그녀”는, 마지막 연에서 덕지덕지 붙은 연결어들을 떼내 “상징도 리얼리티도 진정성도 내러티브도/모두 잘려나간 퍼즐”(`안개도시국제카페`) 답게 정돈된다.힌트는 두번째, 세번째 연에 있다. “처럼” “같은” “인 듯”이 의미 포착을 돕기보다 오히려 실재에 끝내 다가가지 못하고 맴돌게 했음을 보여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16

나를 오늘까지 이끈 것은 `어제의 내일`

하나의 추억으로 서 있을 삶의 분위기를 담담한 어조로 직조해내는 시인 홍영철이 7년 만에 네번째 시집 `여기 수선화가 있었어요`(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시인은 35년이라는 두툼한 시력(詩歷)을 쌓아오는 동안 일상적 삶의 풍경을 통해 생의 공허와 허무를 읊으면서도 결국엔 폭력과 상처를 모두 껴안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다.이번 시집에서도 역시 시인은 허무의 정조가 가득한 화법으로 오늘을 배회하는 듯하지만 도처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어제의 추억과 내일의 희망을 탁본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아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피상과 추상의 옅고 얕은 흔적에서 `수선화`라는 구체를 떠내기까지 시인이 감내했을 고뇌가 엿보인다.이 시집을 여는 첫번째 시 `가슴을 열어보니`는 화자의 이력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 사막을 지나`온 듯한 `청춘`이 있다. 그 청춘의 가슴에는 `샘도 풀도 나무도 오아시스`도 사라지고 `마른 모래바람`만 가득하다. `먼 사막`은 청춘이(내가) 지나온 `어제`를 말한다. 나의 `어제`에는 혼내고 겁주던 아버지(`그러면 아프잖아요`)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시던 어머니(`슬픈 컵라면`)가 있다. 그런가하면 `꽃잎 밟으며 꽃향내 따라`가버린 `그 사람`은 내게 지독한 풀냄새만 남겨놓았다(`풀냄새`). 아픔을 하소연하고 슬퍼서 울고 상실에 절망하던 나는 어느덧 오늘에 와 있다. 나를 오늘까지 이끈 것은 어제의 내일, 즉 오늘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것은 구원의 열망이기도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09

현대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詩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돼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적 감수성의 세계를 펼치며 기대되는 젊은 시인으로서 평단의 주목을 받아온 백상웅의 첫 시집 `거인을 보았다`가 출간됐다. 등단 당시 “인간세계의 갈등과 상처를 식물적인 상상력으로 봉합하고 치유”하며 “순수 우리말의 음색과 빛깔을 잘 살려 자연 서정의 세계를 독특하고 빼어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던 시인은 세밀한 관찰력과 깊이있는 성찰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아픔을 기록한다. 아울러 친근한 언어와 부드러운 상상력으로 그 아픔을 따스히 어루만지는 데까지 나아가는 그의 시들은 우리가 시인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기 충분하다.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선택하는 백상웅의 시에는 상황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이 도드라진다. 사물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풍부한 상상력을 결합시키며,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삶의 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를테면 “평생 오른손으로만 일”하다가 “팔을 굽히지 못하게 되었을 때, /멀쩡한 반쪽으로 일을 다시 시작하”(`스위치`)며 “평생 전전긍긍 살았”(`아버지의 터널`)던 아버지나 “각목을 절구에 찧어서 질긴 실을 뽑아”내듯 ”딱딱하고 팍팍한“ 어머니의 삶을 연민과 동정으로 가득 찬 세계가 아니라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낸다.80년대생 시인답게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두꺼운 현실의 벽과 맞닥뜨리며 느끼는 절망과 고독을 진지하게 사유한다. 시인은 2006년 최명희청년문학상을 시작으로 전국 대학생 무진기행 백일장 대상, 충주대 국원문학상, 대산대학문학상 등을 차지하며 정식 등단 이전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평단은 물론 시를 읽는 젊은 독자들 사이에서 이미 큰 관심을 모아온 데에는 이 세대의 뿌리 깊은 아픔에 주목하는 시인의 시선과 저들의 어떤 보편적인 감수성이라 할 만한 지점에 가닿는 시어들의 둔중한 울림이 큰 역할을 한 듯하다.백상웅의 시에서 `노동`은 가장 핵심적인 제재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 외삼촌, 화자 자신, 혹은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시화한다.게다가 우리는 이것이 지난 시기의 `노동시`와는 결을 달리하여 새로운 감각으로 태어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노동을 하는 건 밥상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것”(`밥상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노동의 아름다움을 허튼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독특한 상상력을 전개하며 객관적으로 보여준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11-09

테마가 있는 세계 여행 한눈에

소설가 김훈을 비롯해 은희경·신경숙·백영옥과 영화감독 이명세,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셰프이자 에세이스트인 박찬일, 뮤지션 장기하·이적.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열 명의 유명인이 각자 세계 각국으로 `테마가 있는 여행`을 떠난 뒤 단행본으로 묶어낸 여행에세이 `안녕 다정한 사람`(달)이 출간됐다. 이 전혀 다른 열 번의 여행에서 우리가 그동안 익히 알아온 그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와 꿈, 기호, 바람 등을 가만히 엿볼 수 있다.# 1 은희경에게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탄력의 게임2011년 10월 은희경 작가는 와이너리 답사를 위해 호주를 택했다. `와인`을 기꺼이 `애인`이라고 부르는 그녀답다. 호주의 전통 있는 와이너리를 돌아보며 자연과 벗하는 야생의 맛을 음미한다. 술도 온기가 있는 생명체인지라 시간의 흐름이나 기분의 높낮이에 따라 그날 그날 맛이 다르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코알라나 캥거루 등이 서식하고 있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농장을 체험하기도 하고, 그레이트 오션 로드나 12사도 바위를 돌아보며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압도적인 스케일에 흠뻑 취하기도 한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호주 와인을 찾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지금은 그곳이 사무치게 그립다. # 2 김훈에게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2012년 2월 소설가 김훈이 자전거만큼이나 아끼는 것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는 카메라가 아닐까 싶다. 그는 여행할 때마다 성능 좋은 카메라 두어 개를 챙겨 롱샷으로 크고 먼 풍경을 내다보기도 하고 가깝게 당겨서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예측하건대, 그 카메라의 역할을 때론 작가의 두 눈이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미크로네시아의 축 섬으로 들어간 그는 클로즈업을 통해 울트라마린블루의 해안과 열대 생물들을 보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롱샷으로는 그 바다 심해에 잠긴 전쟁의 상흔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곳에서 `사람`의 다른 말은 바로 울트라마린블루만큼이나 청명한 `희망`이었다.# 3 박칼린에게 여행은 물이고, 시원한 생수고, 수도꼭지2012년 3월 박칼린 감독의 뉴칼레도니아 여행기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그녀의 상상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읽는 이를 또 상상 속에 빠뜨린다. 그녀를 마법으로 이끌고 간다는 바다, 그리고 노캉위와 브러시 섬, 그리고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아이처럼 해맑았을 박칼린 감독의 모습까지. 이런 게 여행이 주는 달콤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간 사이사이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듬뿍 담고 있다. 그리고 삶의 저변에서 올라오는 평온함과 안온함에 대해 오래 깊이 생각하도록 한다. # 4 박찬일에게 여행은 좋은 친구와 여행을 떠나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것2012년 4월 식도락 여행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대리만족의 기쁨을 준다. 아마 인간의 오각 중에서 가장 민감하면서도 또 가장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건 바로 `미각`이 아닐까. 요리하고 글 쓰는 남자 박찬일 셰프가 잡은 여행의 테마는 `도시락`, 그리고 선택한 여행지는 `일본 규슈`였다. 우리가 보통 흔히들 `벤또`라고 부르는 그것, 그리고 좀더 구체화시키자면 기차에서 먹는 `에키벤`. 그 도시락의 화려한 세계를 특유의 입담으로 안내한다. 특히, 도시락 올림픽에서 순위가 매겨지는 그것들은 구경만 해도 침이 꼴딱 넘어간다. #5 신경숙에게 여행은 친숙한 나와 낯선 세계가 합해져서 넓어지는 일2012년 6월 신경숙 작가에게 맨해튼이란 낯선 여행지라기보다는 그리운 제2의 고향쯤이 아닐까. 일 년 정도 지내다온 곳에 다시 가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도착하자마자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살던 집에 가보는 것. 로비의 경비가 아직도 살고 있다고 착각해 반갑게 인사를 걸어올 정도로 친숙한 그곳이었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골목마다 세계 거장의 미술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수준급의 악사들이 거리에서 무료 공연을 펼치고 있는 곳. 바로 맨해튼에서는 누구나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관객이 되어버린다.그렇게 매혹적인 그곳에 그녀는 책상을 하나 놓고 싶다고 말한다. 그 책상에서 이번엔 금발의 이방인들의 심금을 울릴 어떤 새로운 작품이 탄생할지도 궁금해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09

`바람이 분다`… 7편의 작품 묶어

1993년 등단한 이래 줄곧, 삶의 근원에 자리한 인간 본연의 고독과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의 추구와 삶을 향한 의지를 특유의 단단하고 시정 어린 문체로 그려온 작가 한강이 `내 여자의 열매` 이후 12년 만에 세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작가가 2002년 여름부터 일곱 달에 걸쳐 쓴 중편 `노랑무늬영원`을 포함해 2012년 여름에 이르도록 쓰고 발표한 총 7편의 작품을 묶은 이번 소설집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수십 번 계절이 바뀌는 동안 존재의 근원과 실재 세계를 탐문하는 작가의 온 힘과 온 감각이 고통 속에 혹은 고통이 통과한 자취에 머물렀고 그 결과로 우리는 장편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 각각의 장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조응하는 중편과 단편들이 씌어졌고 고스란히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 담겼다.“두 눈을 시큰하게 하는 빛,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게 하는 빛, 어른어른 마성이 피어오르는 빛”(`훈자`) 속을 달리며 액셀과 브레이크를 교차로 밟고, 욕설과 기도를 절반씩 섞어 뇌까리는 당신이 “내가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은 내 삶이야”(`훈자`)라며 스스로를 거칠게 몰아세우면서도 잊지 않는 것은 “제발, 잘못되지 말아줘”라는 당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02

한 권의 책이 600만명을 학살했다

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은 무엇일까? 고대 로마의 문헌 `게르마니아`가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책 중 한 권이 됐는지 밝혀내는 `가장위험한 책`(민음인)이 출간됐다.이 책은 하버드 대학의 고전학 교수인 저자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가 수세기 동안 세계 각지에서 출간된 `게르마니아`와 관련된 엄청난 문헌 자료를 찾아내고, 라틴어, 히브리어, 독일어 등 자신의 모든 언어 역량을 집약시켜 조국 독일 역사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이다.20세기 냉전 시대를 야기한 `공산당 선언`, 미국 남북 전쟁의 도화선이 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 이슬람교를 신성 모독했다는 이유로 저자, 출판사, 번역가, 신문사 등이 테러를 당해 5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악마의 시`에 이르기까지, 책 한 권의 텍스트가 그 고유한 의미를 넘어 현실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위험한` 책들은 많다.그중 로마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르날도 모밀리아노(Arnaldo Momigliano)가 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 중에서 상위권으로 꼽은 책이다. 이 책이 분열된 독일 민족에 국수주의 운동, 인종차별주의, 독일 민족지상주의, 게르만 신화 등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20세기 최대의 재앙으로 꼽히는 유대인 600만명 대학살을 일으킨 히틀러와 친위대 총사령관 히믈러가 나치 핵심 개념을 구상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에서다.`게르마니아`는 라틴어로 된 지리적·민족학적 작품으로, 현존하는 고대 게르만족에 관한 유일한 저서이다.서기 98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여행자들의 보고와 문학적 자료를 토대로 게르마니아 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의 기원·관습·사회상을 간결하게 기록했다. 처음에 그가 그려 낸 게르만족은 충성스럽고 신체적으로 강인하지만, 문화와 교양이 없는 원시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필사(筆寫)로 전해지던 이 책은 수세기 동안 자취를 감추었고, 15세기에 이르러 로마에서 양피지 필사본이 재발견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교황 비오 2세를 비롯한 이탈리아 성직자들은 독일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게르마니아`의 게르만족 개념을 끌어들였으며, 독일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은 게르만족의 순혈성, 충성심, 강인함에 대한 설명을 새롭게 해석하며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원고 자체도 불가사의한 마력을 띠게 되어, 학자, 귀족, 심지어 교황까지 이 원고를 구하거나 훔치려고 가세했다.그 뒤 500년간 `게르마니아`는 꾸준히 재해석되고 오독됐으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용되거나 조작되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을 써서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유럽 전역에 전파했고,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타키투스가 쓴 게르만족의 특성에 영감을 받아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란 연설문을 발표했다.프랑스의 민족학자 고비노는 `게르마니아`를 근거로 `인종불평등론`을 썼고,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는 이를 읽고 고비노와 교류하며 게르만족 이론을 국수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했다.결국 `게르마니아`는 20세기 나치 독일에 이르러 독일 혈통의 순수성과 우수성을 증언하고 나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이민족과 결혼을 금했다는 `게르마니아`를 근거로 독일인과 유대인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독일인 혈통 및 명예 수호법`이 제정됐고 `게르마니아` 속 경구는 청년들을 `게르만 전사`로 육성하고 다른 인종을 증오하도록 교육하는 각종 교재와 역사서에 인용됐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의 제목으로 `게르만 혁명`을 검토했고,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의 수도가 있는 미래의 게르만 국가를 구상했으며, `게르마니아`를 이용해 독일 민족지상주의, 인종주의 이론을 내세웠다.`게르마니아`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홀로코스트의 주모자인 나치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는 순수한 독일을 부활시키겠다고 맹세하고 그 사본을 입수하기 위해 비밀공작을 벌였다. 1천800여 년 전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를 썼을 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저자는 로마 시대부터 나치 독일까지의 권력자와 지식인들이 각자의 지식과 이해관계에 따라 `게르마니아`를 오독하거나 왜곡한 사례를 광범위하게 분석해 나가며 한 권의 책이 지닌 의미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왜곡되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마치 탐정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추적한다.치밀하게 논지를 전개하면서도 요소요소에 건조한 유머를 배치해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대중적이고 지적인 역사물의 전범”을 만들어 냈다는 찬사를 받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02

전직 복서와 유명 작가의 추락과 회복 이야기 그려

올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민석(35) 작가의 장편소설 `능력자`(민음사)는 신선함, 새로움, 독창성과 매력으로 무장한 채 끊임없이 웃음 폭탄을 터트린다.`능력자`는 한때는 세계 챔피언이었으나 지금은 정체불명의 스티커를 파는 전직 복서와 전통과 권위 있는 문예지로 데뷔했으나 지금은 야설을 쓰며 연명하는 삼류 작가, 이 몰락한 두 인생이 빚어내는 추락과 회복의 이야기다.이 소설은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한 다큐멘터리 화면처럼 흔들거리고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에피소드들이 때로는 거친 원석 같은 매력을 발산하며 아주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매우 시적으로 형상화된다.또한 삶에 대한 치열한 천착은 고통과 정면 대결하겠다는 작가의 땀과 굳은 결기를 느끼게 하며, 단숨에 읽히는 필력과 장편 서사에 대한 집중력이 돋보인다.살냄새와 땀냄새가 진동하는 생생한 캐릭터들과 감칠맛 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를 능숙하게 이끌어 나가는 이 작품은 웃음과 감동을 넘나들며, 독자들로 하여금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최민석의 소설은 울다가 웃게 만드는 `항문발모형 문학`에서 한층 더 깊고 따스한 휴머니즘이 넘치는`유머니즘(humornism) 문학`으로 진화했다.`능력자`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없던 신인 무명작가 `남루한`이 전직 세계 챔피언 `공평수`의 자서전을 대필해 주면서 진정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1-02

한국인이 사랑하는 세계 詩人 52명 대표작 묶어

수많은 가슴을 시로 물들였던 한국의 애송시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외국 편 `우리 가슴에 꽃핀 세계의 명시`(민음사)가 출간됐다. 기원 전 300년 무렵의 시인 굴원에서부터 20세기의 시인 네루다까지, 먼 나라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에서부터 이웃 나라 일본의 시인 다쿠보쿠까지, 시공을 초월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그중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52명의 대표작을 묶었다.지난해 8월부터 올 8월까지 네이버 캐스트 `세계의 명시` 코너에 정끝별·문태준 시인이 매주 번갈아 가며 연재했던 것을 모아 두 권의 선집으로 엮은 이 책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살았던 시인들만큼이나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위로의 시편과 사랑의 시편을 비롯해 사회·정치적 시, 삶과 죽음에 관한 시 등 분야를 망라하는 세계의 명시들이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참신하고 깊이 있는 해설로 다시 태어났다.따뜻하고 감각적인 일러스트 역시 책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그녀에 대하여` 등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일러스트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 박정은과 진중권의 `생각의 지도`등을 통해 감성적이면서도 독특한 개성이 묻어 나오는 일러스트를 선보여 온 작가 정원교가 호흡을 맞췄다. 번역했을 때에도 좋은 시가 진짜 좋은 시라는 말처럼 여기 실린 52편의 시는 언어라는 벽을 넘어 모두의 가슴을 울린, 말 그대로 `세계의 명시` 52선이다.네이버 데이터를 활용해 포털에서의 검색 순위가 높은 외국 시인 100명의 리스트를 뽑았다.검색 순위 최상위에 링크된 시인은 저작권이 소멸된 작가 중에서는 괴테가, 저작권이 유효한 작가 중에서는 헤르만 헤세가 각각 1위를 차지했다.괴테를 잇는 인기 작가로는 니체, 윌리엄 워즈워스, 오스카 와일드, 랭보, 이하 등이 꼽혔고 헤르만 헤세를 잇는 인가 작가로는 브레히트, 엘리엇, 네루다, 발레리 등이 선정됐다.이들 중 정끝별·문태준 시인이 시적 성취가 높고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시인 위주로 각각 26명씩을 골랐다.정끝별 시인의 통통 튀는 해석과 문태준 시인의 가슴 뭉클한 해석이 다 읽은 시를 한 번 더 읽게 만든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0-26

어릴적 상처입은 아이 실수하는 인간으로 성장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양장 제본서 전기`가 당선되며 등단한 정소현의 첫번째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등단작을 포함해 `실수하는 인간` `너를 닮은 사람` `폐쇄되는 도시` `돌아오다` `지나간 미래` `이곳에서 얼마나 먼` `빛나는 상처`까지 총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돼 있다.젊은 작가답게 작품마다 신선한 면모가 돋보임에도 등단 후 짧지 않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소설을 치밀하게 벼려온 탓에 `신인`이나 `신예` 같은 명멸하는 수식은 부족하기만 하다. 2010년 제1회 젊은작가상, 2012년 제3회 젊은작가상에 선정되며 가족 상실의 경험과 싸우는 여성 개인의 미묘하고 복잡한 심리와 한 인간 속에 숨어 있는 죄의식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우리 문학에서 흔치 않은 집중력을 보여준 것은 부단한 정진의 정직한 결과다.정소현 소설의 집중력은 가족, 좀더 명확히 말해 `엄마`에게서 출발한다. 정소현 소설 속의 엄마들은 명백하게 일그러져 있다. 비정상적 부모는 아이를 억압하고 결국 심리적, 물리적으로 아이를 `유기`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내상을 입은 아이는 자라서 이상한 어른이 된다. 수월하게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해 흔히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악마적 인물, 혹은 체념하며 다른 모든 버려진 것들과 손을 잡는 윤리적 인물이 그 두 양상이다.`실수하는 인간`은 여자들의 이야기다.일부 작품을 제외하고 할머니, 엄마, 딸로 이어지는 `모계` 등장인물들은 그러나 여성성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오려 하기보다는 모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듯하다.정소현 소설 속 아버지는 대개 살아 있지 않다. 주로 자살로 생을 마감(`지나간 미래` `돌아오다`)하고, 행여 살아 있더라도 자식을 방임하는 무책임한 존재에 불과(`양장 제본서 전기`)하다.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엄마`로의 역할 분배는 온데간데없이 `나무라고 징벌하는` 초자아 같은 엄마만 남게 되는 것이다.정소현의 엄마들은 아이를 질투하며 매질한다. 착취하고 무시하며, 다그치고 유기한다. 엄마라는 힘센 초자아에게 상처 입은 아이도 어떻게든 자란다. 그러나 이들은 자라서 `실수하는 인간`이 된다. 의욕을 잃고 무기력한 백수로 살거나 말을 더듬는 건 예삿일이다. 상처는 영영 남는다. 아이는 현실을 사는 게 아니라 “갈기갈기 찢겨 과거들 속에 흩뿌려져 있”(`너를 닮은 사람`)을 뿐이다.좀더 극단적인 반응도 있다. 어떤 아이는 질서를 파괴하는 `악마적 인물`이 된다. `실수하는 인간`의 주인공 석원은 덜떨어진 사람에서 용의주도한 연쇄 살인마가 되어간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10-26

10가지 감정이 인간 사회를 바꾸다

▲ 행복우리의 삶은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지하철에 가방을 두고 내린 사실을 깨닫고 당황해 하고 갑자기 들려오는 크나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며 으슥한 골목길에서는 사람 형상을 닮은 것만 봐도 공포를 느낀다. 경쟁 상대의 승승장구에 질투가 밀려오다가도 연인이나 오랜 벗의 격려 한마디에 금세 행복감에 사로잡힌다.위정자의 위선에 혐오감을 느끼며 부당한 처우를 받는 일에 함께 분노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상실에 슬퍼한다. 인간에게 감정 없는 삶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인간다움의 조건(사이언스북스)`은 감정을 생물학적 성질의 것인 동시에 문화적 성질을 지닌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인간의 문화사를 통해 감정의 문화사를 들여다보는 과감하고도 새로운 시도를 담고 있다.저널리스트이자 문화사가인 스튜어트 월턴은 다윈이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꼽은 6가지 감정에 더해 그 6가지와 충분히 구별되면서도 엄격한 뜻에서 감정으로 규정할 만한 4가지 감정, 즉 질투, 수치, 당황, 경멸을 덧붙인 10가지 감정을 가지고, 개별 감정이 처음 시작된 기원에서부터 국가나 언론, 광고 매체 등이 적극적으로 감정을 이용하고 조작하는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문학과 예술, 철학, 대중문화를 분석함으로써 감정이 어떻게 인간 사회를 바꾸었고, 또 인간 사회는 어떻게 감정을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본다.인간의 먼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프리카 초원을 가로지르던 그때 대자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던 공포와 불안은 이제 정치권력이, 종교가, 언론이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대상이 됐다.그러나 지속되는 두려움은 분노로 바뀔 수 있다. 사회적 억압이, 통제가, 불평등이 집단적 분노를 낳기도 한다. 썩은 고기나 배설물 따위의 심각한 감염 위험성이 있는 대상을 인간이 피해야 함을 가르쳐 줌으로써 인간의 진화 과정에 기여했던 혐오는 이제 물질적 영역이 아닌 예술적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왔다.어떻게 피하려는 욕구가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일까?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전쟁의 위협 없이 살아가는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이 수많은 문학 작품과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서 해피엔딩을 끝없이 재생산하는 것일까?이 책은 크게는 10개의 장, 작게는 30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10가지 감정을 다루되 하나하나의 감정을 세 가지 각도에서 접근한다.공포를 예로 들면 먼저 공포라는 감정의 기본형을 다룬다.인류의 조상이 남긴 무덤과 동굴에 그린 벽화를 통해서 공포라는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거시적으로, 문명사적으로 성찰한다.공포는 무서운 자연 앞에서 느끼는 원초적 감정이기도 하지만 무서운 권력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기도 하다.둘째 장에서는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의 저작을 통해서 권력이 인간에게 어떻게 공포를 유발하려고 하는지를 성찰한다. 권력 집단이 공포라는 타동사로 인간이라는 목적어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 준다.마지막 장에서는 공포라는 감정이 개인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실존적으로 파헤친다.약소국 프로이센을 유럽의 패권국으로 도약시킨 프리드리히 대제가 옷 갈아입기를 죽기보다 두려워한 까닭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구타당하면서 겨우 지금의 자리로 올라선 자신이 다른 옷을 입으면 다시 낯설어 보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무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일화는 공포라는 감정이 개인을 어떻게 바꿔 놓는지를 보여 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