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우레처럼 다시…` 엄원태 지음 창비 펴냄, 116쪽
육체적 고통의 삶을 끌어안는 `견딤의 시학`과 소멸하는 생에 대한 `쓸쓸한 긍정`을 서정적 명상의 언어로 노래해온 엄원태 시인의 네번째 시집`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창비)가 출간됐다.
12년의 공백기를 거쳐 나온 `물방울 무덤`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소멸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의 한계를 껴안으며 고통의 삶을 따듯한 시선으로 감내하는 마음을 성찰의 언어에 담아 소멸의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다.
“덧없이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기록이자 애도”(시인의 말)로서 애잔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간절한 시편들이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가슴 서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고독은 그늘을 통해 말한다. //어쩌면 그늘에만 겨우 존재하는 것이 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늘로 인해 생은 깊어갈 것이다. 고통과 결핍이 그늘의 지층이며 습곡이다. //밤새 눈이 왔다. 말없이 말할 줄 아는, 싸락눈이었다. ”-`싸락눈`전문
이토록 절절한 시의 삶이 있을까. 고통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엄원태의 시는 자못 숙연한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선인장처럼 가시가 굵”은 “근심”에 “대책 없이 찔리곤”(`소금사막`) 하는 기나긴 고통 끝에 시인은 생은 “한바탕 부유(浮游)”(`공중 무덤`)이고 “삶이란, 언제나 죽음 지척의 일”(`주저앉은 상엿집`)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형편이 좀체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생활 속에서 “가짜 희망처럼, 헛소문처럼/부풀어오르”(`생활`)는 삶에 대한 기대감에 젖기도 하는 시인은 “덩치가 북극곰만하”고 무게가 “무려 구백구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외로움을 “제 몸에 저장된 고독을 태우면서 버텨”(`극지에서`) 내며 “먼 우레처럼/다시 올”(`강 건너는 누떼처럼`) `사랑`을 기다린다.
“창문 깊숙이 햇살 비껴들어, 병상 발치까지 환하다. 내 몸에, 빛기둥이 섰다. 몸에선, 기껏 살비듬 같은 먼지들이 떠다닌다. 때로 그것들도 먼 별들처럼, 반짝인다. //수행승들은 스스로 토굴에 들어 용맹정진했다지만, 내 몸뚱이가 영락없이 토굴이다. 장좌불와(長坐不臥) 대신 장와불립(長臥不立)이다. 한 오백년쯤 지난 후, 뜻밖의 어느 도굴꾼에 의해 관 속까지 비껴드는 한 줄기 햇살처럼, 한 소식처럼, 내 몸에도 빛기둥이 섰다. 늦은 오후, 겨울 햇살 덕분이다.”-`일주(日柱)`부분
이렇듯 “삶이 건네는 고통을 `견딤의 시학`으로 관통해왔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제 몸을 잃어가면서” 그 고통을 “그 자체로의 풍경으로 인식하는”(양경언, 해설) 투명하면서도 냉철한 시선으로 존재의 무상함을 그윽이 바라본다. “전심전력 타오르는 촛불”을 보면서 “소멸을 지향하는 집중력이야말로 존재의 근원적인 에너지라는 이 역설”(`아름다운 얼굴`)을 간파해내는 시인은 다만 “어디서든 무심히 흘러”갈 뿐인 “그렇고 그런 날들”(`대구선공원에서`)의 쓸쓸함을 아늑한 풍경으로 그려내며 “축생, 혹은 먼지 같은 날들”(`11월`)에 생의 따듯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삶의 고통은 비단 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검을 딛고, 죽음을 건너는”(`강 건너는 누떼처럼`) 생존의 아픔 속에서 빛을 잃고 시들어가는 제 몸을 어루만지듯 시인은 “저 혼자 찬 공중에 떠 있”(`개밥바라기`)는 “개밥바라기같이 외로운 행성”처럼 외진 “들판 가운데 홀로 우뚝” 서서 “자체발광 대신 자주 자가발광을 해서 생의 에너지를 보충하곤”(`별마을아파트`) 하는 주변화된 존재들과 “다만 흘러가”(`다만 흘러가는 것들`)며 “제각각의 어둠으로 저물어”(`길을 가면서`) 가듯 그늘 속으로 가뭇없이 스러져가는 것들의 상처를 애틋한 마음과 “그렁그렁 눈물 어린 눈길”(`4월`)로 쓰다듬는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엄원태 시인은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려왔다.
그 병든 일상, “몸통째 슬픔”(`토르소들`)뿐인 “상처 많은 생”(`간벌(間伐)`)의 힘겨운 나날을 시인은 이미 전작 시집들에서 `뼈마디 저린 절창`으로 들려주었다.
때로 “공포에 질리기도 하는” “뼈저린 고통”일지라도 “징한 새끼 같은 삶”(`후스루흐`)을 받아들이면서 시인은 이제야 비로소 “슬픔이 구역꾸역 치미는 횡경막을 건너” “고통의 임계 지점”(`타나 호수`)을 넘어선 것일까. “생의 가장 중차대한 고비에 한 매듭처럼 묶이는”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올 때쯤이면, 나도 새 생명으로 거듭나 세상의 빛을 새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시인의 말)이라는 시인의 육성이 한편 눈물겹다.
“우연 아닌 삶이 또 있을까마는/단순한 방문객으로 살기엔/내 눈은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몸의 감각 지나치게 예민하여/괴로움 또한 적지 않았다/나를 가둔 방은 춥거나 더웠으며/음식은 식었거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어떤 날은 국물에서 바퀴벌레가 나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여기의 단 한번뿐인 이 삶은/대체로 살아볼 만한 것이었으니,/태초에 별들 사이를 흐르는 음악 같은 것이 있어/그 무시무종의 음률을 따라/나는 왔고 또 돌아가리란 걸 겨우 이해하고 나니/오고 감 또한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지금 여기`부분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