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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여름 삽화

오춘 할머니 네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을 안노인들은 날만 새면 그 집 대청마루에서 여름을 났다. 그 집을 드나들던 할머니들 손에는 귀한 주전부리들이 들려있기도 했다. 집집마다 종이부채로 견디던 시절 그 집 마루에서는 저 혼자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가 돌아갔다. 할머니들이 마루에 빙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민화투를 치는 진종일 선풍기는 쉬는 법이 없었다. 마루를 가득 채운 할머니들에게 골고루 바람을 나눠줘야 했으므로 선풍기는 항상 회전을 했다. 사이사이엔 마당에서 뛰어놀다 더위에 지친 어린 우리들도 끼어 있었다.선풍기가 내 얼굴을 한 번 쓱 스쳐가고 나면 다시 선풍기의 방향이 나를 향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세월처럼 지루했다. 얼굴이 여러 개 달린 선풍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어린 마음에 생겨났다.일찍 혼자되신 오춘 할머니는 너른 집에 손주들과 함께 살았다. 아들 내외가 시내에 가게를 얻어 분가하면서 아이들을 맡겨둔 때문이었다. 덕분에 오춘 할머니 네는 할머니들의 사랑방뿐 아니라 동네 꼬맹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할머니는 꽃을 유난히 좋아해 골목과 대문 사이 네모모양 자투리땅에는 해마다 분꽃 씨앗 뿌리는 걸 잊지 않았다. 향기로운 분꽃이 피면 꼬맹이들은 그 꽃을 따서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소꿉을 살았다. 넓은 마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채소밭과 꽃밭이 나란히 반반을 차지했다.여름 마당엔 해바라기며 달리아, 백일홍 따위 키 큰 꽃이 많았고 옥수수며 들깨 온갖 채소도 우거져 있었다. 꼬맹이들은 꽃밭과 채소밭을 넘나들며 자주 숨바꼭질을 했다. 오춘 할머니가 남새밭이며 꽃이 망가진다고 호통을 내지르면 꼬맹이들은 우르르 도망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선풍기 앞으로 몰려들었다.오춘 할머니네 우물은 얕고도 시원했다. 우물이 없는 옆집에서는 항상 오춘 할머니네로 물을 길으러 다녔는데 여름에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게다. 날마다 김치통이 드리워있고 어쩌다 새끼줄에 묶인 수박이 담겨 있기도 했으니 그것들을 피해 가며 조심조심 두레박을 내리고 물을 길어야 했던 탓이다.우물 속에서 나온 열무김치는 서늘해서 입맛 없는 여름에는 제격이었다. 대청마루에 모인 안노인들은 점심때가 되면, 커다란 양푼에 우물에서 갓 꺼낸 열무김치와 살강 위 대소쿠리에 식혀 놓은 보리밥과 고추장을 듬뿍 넣고 한데 비볐다. 마지막엔 오춘 할머니 텃밭에서 나온 참기름도 한 방울 들어갔는데 그 고소함에 반해 눈치 없는 꼬맹이들이 숟가락을 먼저 들이밀곤 했다.여름내 잘 돌아가던 선풍기가 말썽을 부릴 때가 있었다. 되짚어보면 하루도 쉬지 않고 회전을 하며 마을 안노인들의 땀을 식혀주었으니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선풍기를 고치러 보낸 얼마 동안 할머니들도 꼼짝없이 부채질을 하느라 팔을 쉴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는 화투 패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연신 부채질을 하다가 차례가 돌아오면 부채를 내려놓고 화투장을 내놓고 집어가곤 했다. 부채질로는 더위가 가시지 않는 어느 오후 오춘 할머니는 아이들을 불러 점방에 얼음을 사러 보냈다. 꼬맹이들이 낑낑 거리며 심부름을 다녀오는 동안 마루에는 우물 속에서 건져 올린 수박이 초록빛도 선명하게 놓여있었다. 꼬맹이들에겐 반으로 툭 자른 수박을 양푼에 퍼 담고 설탕과 얼음을 넣어 휘휘 젓는 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물 한 방울 남김없이 싹싹 비웠던 어린 날의 수박화채는 고장 난 선풍기가 준 선물이었다.오춘 할머니네 꽃밭도 선풍기도 시들해지는 날이 있었다. 그 집 언니들이 유난히 심술을 부려 꼬맹이들을 못 살게 군 그런 날이었을 게다. 그런 날은 우리 집 감나무 그늘이 꼬맹이들을 불러 모았다. 감나무 아래는 오래된 평상이 여름 내 놓여있었다. 꼬맹이들은 평상에 앉아 마당에 핀 봉숭아꽃으로 손톱을 물들이고 종이 인형을 오리며 놀았다. 평상에 햇빛이 들어오면 어른들이 평상을 들어 그늘 쪽으로 옮겨주었다. 가끔씩 평상 위로 감나무에 살던 송충이가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꼬맹이들에겐 송충이를 구경하는 일마저 놀이가 되어주었다. 감나무 그늘 아래는 바람이 시원했고 바람이 없는 날은 부채가 바람을 만들었다. 꼬맹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향해 팔이 떨어져라 부채질을 해주며 깔깔거렸다. 감나무 이파리도 팔랑거리며 따라 웃었다.오춘 할머니도, 그 집 마루에 그득하던 안 노인들도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나신 지 한참이 지났다. 열린 양철 대문 안으로 철철이 다른 꽃을 피워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잡던 그 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지금 그 자리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바뀌었고 주변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층수를 자랑하는 아파트촌이 되었다. 아파트 베란다를 올려다보면 에어컨 실외기가 빠짐없이 나와 있다. 우물을 갖지 않은 아파트에선 선풍기만으론 살 수 없다는 듯 집집마다 날개가 없어도 시원한 바람을 쏟아놓는 에어컨을 설치해 놓고 쾌적하게 여름을 난다. 점점 더워지는 지구별을 생각하니 오춘 할머니 네 마루에 떡 하니 자리하고 앉아 여름내 마을 안노인들의 더위를 식혀주던 선풍기와 감나무 그늘과 평상에 놓였던 부채가 참으로 고마운 것들이었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박월수 수필가

2024-06-25

횃불 하나

강길수 수필가 22대 국회가 시작되었다. 의원이 다수인 야당은 소수인 여당의 반대와 관행을 무시하고 단독 국회를 열어, 법사위를 포함한 11개 상임위원장을 뽑았다는 보도다. 자유민주주의인 우리나라에서, 이름에 ‘민주당’이 든 1야당이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회 독재를 또 시작했다. 국민이 뽑은 다수라 강변하겠지만, 올 총선의 진실을 알고도 그랬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다.지난 4·10 총선 선관위 발표 선거 데이터를 분석한 G 박사는, 58개 지역에서 승부가 바뀌어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주장했다. 여야의 진짜 의석은 여당 166, 1야당 118이라고 했다. 당일 투표와 사전투표 결과의 차이가 통계학 대수의 법칙을 위반한 계산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경영학을 했던 나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투표는 국민, 당락은 선관위!’라는 경천동지할 주장이 유튜브 등에 퍼져도 선관위는 물론, 제도권과 주류 언론은 침묵하고 있다.입으로 ‘민주주의’를 읊지만, 실제로는 입법 독재를 자행하는 거대 야당의 행실을 투표지의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국민은 또 목도하고 있다. 일말 양심도 없는 의원 나리들이다. 자기들이 어떻게 거대 야당이 되었고, 진짜 민심을 속으론 다 알 터. 도덕, 윤리는 고사하고 눈치마저 팽개친 철면피들이다.‘여의도 대통령’이란 말이 왜 나왔는지 이제 국민은 명확히 알게 되었다. 대체 언론의 책무와 지식인, 정치인들의 사명과 시민단체들의 정의, 종교인들의 사랑은 다 어디에다 버린 걸까.정치인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국가는 어찌 될 것인가. 야당은 현 정권을 ‘검찰 독재’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시민 나는 그 반대로 느낀다. 재판 중인 범법 혐의자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특권을 악용, 재판 지연 등 법질서를 파괴해도 멀쩡하다. 이래도 ‘검찰 독재’인가. 21대 국회에서 나라의 안위와 살림은 안중에 없이, 포퓰리즘적 법안을 쏟아내 정부 발을 묶은 사실을 국민은 다 안다. 암울한 야만의 필드였다.횃불 하나 밝혀졌다. 갓 출발한 22대 국회의 여당 수석대변인 K 의원의 횃불이다. 자신의 SNS에 4·15와 4·10 부정선거 문제를 22대 국회의원으로선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이 사실을 보도한 한 유튜브 방송은 18시간 만에 4100명이 시청했고, 댓글 799개가 달렸다. 댓글은 대부분 용기 있는 의원을 응원하고 존경하며, 차기 당대표와 대통령감에 추천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국민이 새 희망을 본 것이다.그렇다! 정상 국회의원이라면, 부정선거 의혹만 나와도 달려들어 바로잡아야 할 최우선 국가 근본 과제다. 한데, 지난 4년간 우리 국회는 외면했다. 민주주의의 기반인 선거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얼마나 상심했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초선 K 의원을 당대표와 차기 대통령감이라는 댓글까지 많이 달까. 국민은 언제까지, 가짜일지 모르는 국회의원들의 탈 쓴 행태를 강 건너 불 보듯 해야만 하는가.지금은 국민 각자가 나라와 나의 길이 같음을 다시 깨달아, 무엇이 국가를 위한 일인지 찾아내야 할 시기다. 또, 참여할 일엔 분연히 일어나 횃불을 함께 들 때다.

2024-06-24

관계 맺기의 방법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미국에 사는 동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2년 만에 한국에 왔다. 지난 연휴 기간에 시간을 내어 동생네 가족을 만나러 상경했다. 올해 5살, 7살이 된 조카들과 우리 아이들은 잠시의 어색함을 극복하고 곧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7살 조카가 8살 된 첫째 아이의 이름을 자주 부르자 첫째 아이는 ‘누나’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미국 문화를 설명하자, 아이는 조금 이해하는 듯 보였지만 어딘가 불편함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익숙한 한국의 문화를 쉽게 벗기 어려웠던 까닭이다.동생으로부터 우리를 만나기 전 아이들과 동네 놀이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의 이야기는 이랬다. 동생이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 있을 때, 다른 아이 두 명이 와서 조카들에게 나이를 물었다. 조카들의 나이를 듣자 그 아이들은 바로 형과 동생을 정리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있는데 나이가 아니라 ‘이름’을 묻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나이’와 ‘이름’,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범주이지만, 각각의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나이가 위계 서열화를 동반한다면 이름은 개인의 특이성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이 위계를 내면화했다는 말이 아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아이들은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도 친구처럼 스스럼 없이 어울린다. 문제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만나자마자 나이를 묻는 바로 그 관습이며, 그것은 아이들이 관계 맺기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왜 아이들은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우리는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기까지 관계 맺기에서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을 정리하는 습관을 반복한다. 대학에 입학해서 동기들끼리 혹은 선후배끼리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을 정리하는 풍경은 익숙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20년 전에는 재수생까지는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면, 이제는 한 살이라도 많으면 바로 호칭이 바뀐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가 어린 시절의 놀이문화부터 형성된 것이라 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당장 나부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름보다 나이를 궁금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 이상 나이를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대학에 와서 관계 맺기에 서툰 학생이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성장기의 수직적 환경이 크게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선생님 혹은 부모님이란 절대적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대부분 수직적이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나이가 혹은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자기의 생각을 따르길 사실상 강요한다. 대학에서의 자유, 수평적 관계성이 강조되는 순간이 학생들에게는 낯선 것이다.이제부터라도 관계를 맺을 때 나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특이성을 보려고 해야겠다. 요즘 20대가 아니라 각각의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그 학생의 면면을 관찰하는 습관을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럴 때 관계가 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2024-06-24

與당권레이스, ‘尹心’이 최대변수돼선 안 된다

윤석열 정부 임기 중반부 당정관계를 이끌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레이스가 시작됐다. ‘한동훈·나경원·원희룡·윤상현’ 4파전 구도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친윤(원희룡) 대 비윤(나경원·윤상현)’ 구도, 또는 ‘원내(나경원·윤상현) 대 원외(원희룡·한동훈)’ 구도가 어떻게 세력을 형성해 나갈지에 따라 판세가 요동칠 수 있다. 선거 결과는 다음 달 23일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발표된다. 이번에 뽑히는 당 대표는 2026년 지방선거와 2027년 대선에서 여당의 승리를 견인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당권레이스 최대 쟁점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이다. 후보가 용산 대통령실과의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정립하느냐에 따라 당원투표의 향방이 결정될 가능성이 큰 탓이다. 당정관계를 둘러싼 계파 간 대립 양상은 초반부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 전 위원장은 “당정 관계를 수평적으로 재정립하고 실용적으로 쇄신하겠다”고 했다. 윤심보다 민심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나 의원은 ‘당정동행’을 강조했다. 판단의 절대 기준은 오직 민심이고, 국민이 옳다고 하는 대로 함께 가겠다고 했다. 원 전 장관은 “저는 대통령과 신뢰가 있다. ‘레드팀’을 만들어 당심과 민심을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했다. 윤 의원은 SNS를 통해 “대통령과 당이 갈등하면 안 된다”고 했다.4·10 총선이 끝난 지 석달째에 접어들었지만, 국민의힘은 여전히 무기력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끝없는 ‘국회 보이콧’이 국민을 피로하게 한다. 당원수가 가장 많은 TK정치권에서 후보가 나오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여당은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당 체질을 개선하고 올바른 당정관계도 설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후보들은 ‘윤심’이 아닌 당의 쇄신과 비전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192석의 국회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의 입법폭주에 대한 대응책과 협치 전략을 후보마다 구체적으로 밝히고 당심과 민심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2024-06-24

태국의 한국 여행 보이콧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피부색, 인종, 종교, 국적을 이유로 개인을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건 명백한 범죄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평등과 존엄에 대한 도전이다. 용서받기 어려운 일.한국을 여행했거나 여행하고자 하는 태국인들이 “전자여행허가(K-ETA)를 받았음에도 입국 거부 사례가 많다”며 한국 법무부가 태국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를 했다. 이런 분위기가 ‘한국 여행 보이콧’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태국여행사협회(TTAA)에서 흘러나온다.보이콧(Boycott)이란 특정 국가나 단체에 보복을 가하며 공동으로 배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론 소비자가 기업에 항의하는 불매운동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한국인들은 비자 없이 태국 여행을 즐기는데, 태국 사람들은 전자여행허가를 받고도 입국이 거부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니, 이는 불공정하며 양국의 우호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게 태국여행사협회의 주장일 터.실제로도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한국을 찾은 태국 여행객은 11만9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1%가 줄어들었다. 동일한 시기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여행자가 대폭 증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을 찾은 태국인 중 입국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SNS에 ‘한국 여행 금지’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수만 명이 그것에 동조하는 최근 상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한국 법무부가 곤혹스러움에 빠졌다. 불법 체류자를 꼼꼼하게 찾아내는 본연의 임무가 ‘한국 여행업계를 죽이고 있다’는 비난으로 돌아온 탓.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태국인 불법체류자는 16만 명에 육박한다. 적지 않은 숫자다. 딜레마에 빠진 법무부가 뾰족한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보인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6-24

마음의 심급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페이스북이 트위터에 이어 크고 작은 문단 일들을 실어나르는 도구가 되었다. 과장을 하고 엄살을 피우고 그렇지 않아도 현시욕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하다.‘정파고’라는 분이 각 SNS의 특징을 인용해 놓은 것이 있다. 페이스북: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다. 트위터: 나 이렇게 병신이다. 인스타그램: 나 이렇게 잘 먹고 산다. 트위터 요약의 비어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누군가 이렇게 정리해 놓았다고 한다.그러고 보면 문학인들이 아직은 인스타그램에 몰두하지 않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학인이 나 이렇게 잘 먹고 산다는 인스타그램으로 옮겨가기에는 아직들 배가 고프다고 할 수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이스북에서 얼마 전에 표절 논란이 하나 일었다. 이런저런 사례들로 문단에서 표절은 아주 치명적임이 입증되었지만, 요행히 피해 가는 사람도 있고, 별일 아닌 것이 크게 과장되기도 한다.한 모임이 있어 오랜만에 나들이를 했는데, 마침 입에 올리기 꺼림칙한 표절 논란으로 큰 곤욕을 치르신 분을 만났다. 사태의 전말에 대해 나 나름대로 판단은 섰지만 이 글에서 그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직접 당사자를 대면하면 그냥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인지상정, 나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돌아오는 말씀이 뜻밖이었다.당신은 지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지나칠 지 모르지만 그래도 평정심을 많이 되찾았다 하셨다.그래, 나는 그분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셨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 문단에서 그런 일은 보통 일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당신은, 어떤 일이 생기면, 마음에 문제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욕구가 일게 되는데, 젊은 시절부터 그것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오셨다고 하셨다. 그래, 이번에도 일을 당하여 당신 자신을 옹호하려는 마음이 이는 것을 깨달으며, 당신이 잘못한 일로부터 생겨난 문제라 생각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하셨다.이에 나는 겉으로 큰 반응을 나타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속으로 많이 놀라고 있었다. 내 자신의 숱한 경험으로도 무슨 일이든 나는 옳고 나와 갈등하는 다른 이는 그릇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둘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나 자신이 옳은 일도 많았고, 틀리고 그릇된 경우도 참 많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옳았던 일도 더 넓은 견지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경우도 아주 많았다. 또 근본적으로는, 세상에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날 때, 그 몸과 마음에 무슨 옳고 옳지 못함이 함께 있었겠는가.표절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물텀벙에 빠져 허우적도 거리셨을 텐데, 그렇게까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까지, 그분은 얼마나 자신을 모질게 대했어야 할까.마음의 심급.내 머릿 속에 떠오르는 다섯 개의 글자다.마음의 심급을 생각해 본다. 어느 깊이에 이르러야 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헤아려 본다. 그리고 끝내 완전한 옳음에는 이를 수 없을, 불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나와 물을 건너가는 이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다. 괴로운 심사가 조금은 편안해지기를 기대해 보면서.

2024-06-24

APEC 개최 경주… 도시발전 10년 앞당기자

기초단체인 경주가 광역단체인 제주도와 인천을 제치고 2025 APEC 개최도시로 선정된 것은 크게 두가지 요소가 중점 고려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첫째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란 점이다. 우리나라 전통의 문화와 역사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천년고도의 장점이 개최도시 선정의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경주는 알다시피 신라 천년고도로서 유네스코 지정의 세계문화유산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도시다.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 양동마을 등이 있는 세계문화유산도시이자 한반도 문화유산의 보고다.APEC 정상회의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21개국 정상과 각국의 각료 등 6000명 이상이 참석하는 세계 최대규모 지역 협력체다. APEC 회원국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40%, 교역량은 50%다. 우리나라가 APEC에 수출하는 금액은 국내 총수출액의 76%에 달한다. 이런 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리는 장소로 경주가 선정된 것은 경주 발전의 절호 기회다.2025 APEC 개최를 통해 역사문화관광도시 경주의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 경주발전의 획기적 전기로 삼아야 함은 당연하다. 부산은 2005년 APEC 개최 후 해양항만도시로서 도시 브랜드와 인지도를 크게 높였다. 관광수입도 1000억원에 달했다.또 하나 경주가 개최도시로 선정된 배경은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성과가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국토균형발전은 국가 차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문이다. 균형발전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밝히고 지방의 인구소멸도 막아야 한다. 경북연구원은 경주서 개최되는 APEC으로 1조4000억원의 경제유발효과가 생긴다고 했고, 7900명의 취업 유발효과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APEC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경주 발전을 10년 앞당길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경주뿐 아니라 경북도와 정부까지 나서 내년도 APEC 정상회의 개최가 성공리에 치러질 수 있도록 치밀한 준비를 다 해야 한다. 특히 경주시는 이번 기회를 통해 경주발전을 10년 앞당길 수 있게 만반의 준비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4-06-24

포항사랑상품권 해프닝 그 이후

“포항 북구의 유명 음식점인데 지역사랑상품권을 안 받아요. 그뿐이 아닙니다. 바로 인근 줄 서서 먹는 물횟집도 상품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포항사랑상품권 취재는 한 지인의 제보로 시작됐다. 우선 사실관계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지역 상품권은 사실상 현금 유통과 같은 효과가 있고 수수료가 붙지 않아(있다 하더라도 정부, 지자체가 모두 보전해준다) 점포주들이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포항시 경제노동과에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메일을 보냈다. 1시간도 안 돼 이상현 과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이 과장은 “지역 상품권 제도는 지역 소상공인, 전통시장을 육성하고, 지역 자금 역외(域外)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인데, 이 취지를 거스르는 점포가 있다면 강력하게 단속하겠다”며 “점포 실명을 제보해 주면 가맹점 취소 등 행정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사실상 현금과 다름이 없어 매출, 소득 증대와 직결되는 상품권을 점포주들이 기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상품권(지류형)을 모아서 현금화하는 과정이 너무 번거로운가?, 카드, 상품권을 받으면 매출, 소득이 노출돼 세금 문제가 따르나? 의문을 제기하니, 이 과장은 ‘그런 일조차 귀찮다면 장사 그만 둬야죠’ 하며 그 사례는 없을 것이라며 일축했다.한 경제관료와 기자와의 신경전은 10분 후 걸려온 전화 한 통화로 모두 일단락 됐다.“한 기자, 작년에 연 매출 30억을 초과해서 지역 상품권 가맹점에서 제외된 곳이 몇 곳 있는데, 아마 그 식당들인 것 같습니다.”포항시는 점포들이 연간 매출이 30억을 넘어서면 가맹점에서 탈퇴시켜, 그 효과가 영세상인들에게 내려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보통 병원, 주유소 등이 대부분이지만 유명 식당, 횟집들도 상당수 포함된다는 것. 한상갑 사회정치부 이로써 모든 오해는 풀렸다. 그런데 정작 지역 상품권이 ‘거부’되는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전통시장의 영세상인이나 노점의 어르신들이다. 이분들은 대부분 카드 단말기가 없거나, 있어도 작동이 서툴러 사용을 기피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디지털 문외한인 이들에게 웹(Web)이나 온라인 결제 등은 말그대로 그림의 떡이다. 그렇다 보니 노점들은 대부분 종이상품권만 취급할 수밖에 없다. 소상공인 보호, 지역 경제 공동체 회복이라는 상품권 제도 취지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저희들이 노점에 계도를 나가면 ‘웹, 단말기, 그거 알아야 쓰지’ 하며 그냥 해오던 대로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어쨌든 단말기 설치까지는 지도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만 도입돼도 지역 상품권의 낙수(落水)가 이 어르신들에게 훨씬 많이 내려갈 수가 있으니까요.”연 매출 ‘30억 클럽’과 디지털 문맹인 노점 어르신, 그 간극에서 포항사랑상품권의 접점과 방향이 정해져야 할 것 같다./arira6@kbmaeil.com

2024-06-24

유안진 시인의 안동 악센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유안진 시인은 1941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65년 ‘현대문학’에서 박목월 추천으로 등단한 원로시인이다. 시집 ‘달하’,‘물로 바람으로’,‘날개옷’,‘달빛에 젖은 가락’,‘영원한 느낌표’등을 발간하면서 꾸준한 시작활동을 하였다.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이형기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숱한 문학상의 행운을 누렸다. 평생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를 지낸 학자이기도 하다.14권 가까운 시집들의 작품을 일별해 보면 시인의 시작의 기품을 느낄 수가 있다. 서구문학은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을 통해 인간 구원을 언어예술로 풀어내었다면 오랜 세월 성리학의 세례를 받아온 우리나라 시문학은 자기 절제와 안존한 통제를 통한 인격 수련의 자세를 연마하였다. 그래서 문학의 지향성이 다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았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인간 중심의 존재 탐구 시대로 넘어왔지만 궁극적으로는 참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일이 문예예술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유안진 시인은 선비의 고향 안동 명문가 출신이다. 그래선지 전형적인 반가의 여인으로서 그가 직조한 시작의 내면 속에 그 그림자를 읽을 수가 있다. 자신의 삶의 태도와 방법과 같이 안존하고 자신을 치켜세우지 않는다.오양진이 ‘문학의 이유’(파란, 2023) 중 ‘숙맥노트’에서 유안진의 시작의 태도를 평한 바 있다. “말하는 시인이 아니라 귀로 듣는 시를 겸허한 자세로 제목처럼 숙맥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조명하는 시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단히 정확한 평가라 아니할 수가 없다. 작가가 청자이면서 화자가 되기도 하지만 시인은 늘 낮은 자세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심각하게 청취하는 양반가의 문화와 습속을 자신의 시속에 오롯이 담았다. 그는 조물주와 같은 창조자입네 하면서 잘난 체하며 머리를 쳐들고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는 시인이 아니라 기품을 유지하며 안존하게 소리를 듣는 시인이다.화자가 내는 그 소리는 비록 표준어로 발화하지만 안동의 악센트와 안동의 화법이 묻어있다. 유독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만연한 유년의 풍경화 속에는 안동방언이 묻어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지러지게 불러대는 말매미들의 합창을/귀로 먹고 자라는 여름 가족들이/사람 떠난 마을에 더 주민답다”, 유안진, ‘귀도 입이다’에서 유안진 시인의 세상을 조망하는 방식이 보인다. 즉 낮은 마음으로 화자의 소리를 듣는 겸손한 청자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비록 화자가 사람이 아닌 말매미라도 고향을 지키니까 사람보다 중하다며 고향지킴이라는 명예를 부여해 준다. 참 신선하다. 오랜만에 시를 왜 읽어야 하는지, 시를 읽어보면서 인간 삶의 도리와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배울 기회를 얻는 것 같다.만년에 40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남편의 죽음은 시인에게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의 소리는 억누른다. 대신 퇴근하면서 현관에 들어서는 남편의 투박한 목소리 “나 와 쏘!”에 섞인 사투리 억양. 그래서 더욱 그립고 안타깝다.유안진의 ‘벌초, 하지 말 걸’에서는 들판 벌레들의 소리를 듣는 어머님의 혼령이 말한다. 표준어로 시를 썼지만 내 귀에는 마치 안동의 방언의 에코가 여운으로 날아든다. ‘모자’, ‘바늘에게 바치다’, ‘아버지의 마음’에서는 친정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화자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하여 듣는다.유안진 시인의 시작이 기대는 곳은 고향이다. 안동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 자매,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할배요 오늘 장에 가시니껴?” 그리운 안동이 어느새 감익는 마을은 온통 고향으로 전환된다.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 /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유안진,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에서는 시집을 가서 아이들을 낳고 시가 부모님과 조상을 모신 타향조차 내 고향으로 치환한다. 내 고향은 멀리 있어도 향기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항상 함께 하는 곳이다.시인은 계절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다. 봄과 가을 겨울의 흰 눈을 소재로 한 섬세한 서정일기도 고요하고 잔잔하게 울려온다.

2024-06-24

떠난 자들과 남은 자들

지난 번에는 니가타항을 떠나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이들은 북한행 편도 표만을 가지고 니가타항을 떠난 사람들인데요. 일본에는 왕복표를 가지고 니가타항과 북한을 오고간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귀국 교포’의 가족이 그 주인공입니다. 양영희는 ‘귀국 교포’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창작 원천으로 삼아 활동해 온 영화감독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김일성주의자로서, 아버지 양공선은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부위원장과 오사카조선학원의 이사장까지 역임한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제주 4.3의 처절한 비극을 피해 오사카로 밀항하여 조총련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양영희의 부모는 세 명의 아들 모두를 ‘귀국 교포’로 북한에 보냈는데요. 이 때 오빠들의 나이는 각각 만 열네 살(중학생), 열여섯 살(고등학생), 열여덟 살(대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양영희도 ‘조선인 부락’으로 유명한 오사카 이카이노(현 이쿠노구)에서 태어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랐으며, 이후 도쿄에 있는 조선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양영희의 다큐멘터리 3부작(‘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 장편소설 ‘조선대학교 이야기’(2018),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2022)는 모두 이러한 자신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녀는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에 오른 오빠들을 배웅한 이후에도, 여러 번 만경봉호를 타고 니가타항과 북한의 원산항을 오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귀국 교포’와 그 가족의 삶에 대한 재현에 있어, ‘당사자 서사’에 가장 가까운 서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양영희입니다.최근에 발표된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귀국 교포’의 북한 생활이나 일본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이 매우 밀도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귀국 교포’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는데요. 이와 관련해 이 산문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북한에 간 아들들의 사진을 처음 받아보고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오빠들은 처음 평양과 원산에 위치한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오빠들은 처음부터 편지에 음식을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는데요, 정치적으로 신실한 어머니는 “되도록 현지인과 같은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라”며 음식 대신 약품이나 학용품 정도만을 보냅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 오빠들의 빼빼 마른 사진을 본 엄마는, 너무나 놀라 그 사진을 찢어 버리고는 소리 죽여 흐느낍니다. 이후에는 음식이 될 만한 것은 뭐든지 가리지 않고 소포에 꾹꾹 눌러 담아서 보내기 시작하는군요.무엇보다 ‘귀국 교포’들의 안타까운 삶은 큰오빠의 삶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님의 환갑에 바치는 청년 축하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간 큰오빠는 클래식 음악과 해외 명작들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받고, 자기비판을 강요당하고, 감시당하고, 미행당했으며, 결국에는 우울증과 조울증에 시달리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죽고 맙니다.그런데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귀국자’라는 신분이 북한 사회에서 반드시 핍박과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 드러나 흥미롭습니다. 둘째 오빠는 아들 둘을 낳은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곧 새로운 아내 정순과 결혼하여 딸 선화를 낳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병으로 선화가 다섯 살일 때 죽고 맙니다. 둘째 오빠는 “당분간 재혼하고 싶지 않다. 정순이 같은 멋진 여자는 다시 없을 거다”라고 공언하지만, 오빠의 바람(?)과는 달리 정순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혼담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군요. 이러한 인기는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애정이 가득 담긴 소포가 온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실제로 어머니의 평생 과업은 북한에 있는 세 아들과 그 가족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물건과 돈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송금 걱정”에서 해방됩니다.또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에는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갈 수밖에 없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양영희에게 몇 번이나 해준 이야기에는 젊은 시절 당한 테러의 경험도 있습니다. 젊은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하얀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오사카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요. 이때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다가와 잉크를 온몸에 뿌립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외할머니가 분노에 몸을 떨며 호통을 치지만 그 범인은, 오히려 “조선인이 건방지게!”라는 말을 내뱉고는 사라져버리는군요. ‘조선인’을 차별하는 이러한 분위기는 양영희 세대에도 여전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양영희의 아버지는 멀쩡한 교사일을 그만두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딸을 향해, “일본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예술을 하니. 라디오나 TV에 나갈 수나 있다니? 꿈같은 소리 마라. 동네 사람들, 우리 딸이 미쳤어요!”라고 소리치기도 합니다.이처럼 인간적인 대우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성공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많은 재일교포들은 북송선을 탔던 것입니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어디에선가 양영희는 가족 이야기를 “계속 우려먹고 우리는 계속 곱씹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양영희의 가족 이야기에 식민지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현대사는 물론이고, 가족, 개인, 이데올로기, 국가 등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모두 담겨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박찬욱의 ‘계속 우려먹고 계속 곱씹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양영희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보다도 북에 남은 두 명의 오빠와 그 가족은 안녕한지, 그들의 후일담이 너무나 궁긍합니다.

2024-06-24

분노의 국가, 분노의 계절

날이 덥다. 그래서 주차 문제로 시비가 있었다. 날이 더운 것과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것 사이에 인과관계는 성립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가능하다. 날이 더우면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자기 안에 내재된 어떠한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것을 참아내는 것은 이성인데 가끔 이성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 지나치게 높은 기온에 놓이게 되면 이성의 만류를 뿌리치고 덜컥 화부터 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공동주택에 유난히 그런 사람이 한 명 살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주민 단체 대화방에서도 공개적으로 누군가에게 마구 화를 쏟아내더니, 오늘은 주차를 다시 해달라는 나의 요청에 분노를 쏟아내었다. 누가 주차를 잘했고 잘 못했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같은 말이라도 화를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불쾌함을 타인에게 무례하게 쏟아내는 태도이다. 장담컨대 그의 화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였을 리가 없다. 일상에 내재된 어떤 화가 분명 그의 명치 언저리에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특정인에게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분노가 지나치게 짙게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이미 화가 나 있고, 누군가 자신에게 불을 붙여주기만을 기다렸다가 뻥 하고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미처 안내문을 보지 못하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의 문고리를 붙잡았다고 상상해보자. 관계자가 달려와서 정중하게 ‘거기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라고 말하는 상황보다는 ‘어이! 거기 써놓은 것 안보여요? 출입금지라고요!’ 하며 성내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관에서 누군가의 휴대폰이 빛날 때도 ‘휴대폰 사용 좀 자제 부탁합니다.’ 하면 해결 될 문제를 화로 해결하는 경우를 빈번히 볼 수 있다. 그런 명백한 실수나 실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분노는 너무나도 쉽게 표출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실제로 옷깃이 스쳤다는 이유로 서로 눈을 흘기는 상황, 아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뭘 보냐며 성을 내는 상황이 우리 주변에는 분명히 존재한다.인터넷 뉴스의 댓글 창을 봐도 온통 분노 투성이. 물론 화가 날 만한 기사에 분노의 댓글이 달리는 것이야 자연스런 일이겠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이를 만났을 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연예인이 땅을 사고 집을 샀을 때, 응원하던 스포츠 팀이 원하는 만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 때,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스포츠 팀이 좋은 성적을 낼 때, 그냥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사람들은 손가락 끝으로 온갖 분노를 터뜨려대곤 한다.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경제, 기업경제, 가정경제 어느 하나 잘 풀리고 있는 것이 없는 나라라는 것은 이미 온 국민이 짜증거리 하나를 끌어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술술 풀리고 좋은 일만 가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분명히 조금은 더 마음의 여유를 쓸 수 있고, 너그러운 태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적인 우환이라 할 수 있는 경기침체 속의 우리 국민들의 여건상 모두의 가슴 속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도 할 수 있고 이해도 할 수 있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노를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조금 답답하고 짜증나더라도 이성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줄도 아는 존재들이다. 그게 불가능한 상태를 ‘분노조절장애’라고 한다. 자신이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은 선택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일 뿐일 것이라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배우 마동석 씨나 드웨인 존슨 같은 사람 앞에서도 조절되지 않는 분노여야 진정한 분노조절장애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자 앞에서는 조절되고 약자 앞에서는 조절되지 않는 분노는 분노조절장애의 증상이 아니라 단지 추태일 뿐이다.다시 날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참 무더운 요즘인데 앞으로는 장마와 함께 습도도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올 여름은 지난 어떤 여름보다 더울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들의 불쾌지수는 더 올라갈 것이고 더 많은 분노가 펑펑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분노로 다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꼭 그런 극단적 상황에 놓이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분노가 우리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터질 것 같지만 터뜨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사실 그런 존재들이다.

2024-06-24

독서의 기쁨과 슬픔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일종의 안부 인사라 할 수 있겠으나 가끔은 난감하다.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아서다.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봤느냐’는 질문에 ‘당연하지’라는 답을 내놓고 싶다는 허영심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다. 간단한 문제를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가 싶지만, 이를 통해 내밀한 부분을 들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설령 질문한 상대는 별생각 없더라도 말이다.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요즘의 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고전을 읽는 건 어쩐지 멋이 없어 보인다. 특히 톨스토이 같은 작가가 그렇다. 크롭티와 마이크로쇼츠가 유행하는 와중에 체크무늬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고 홍대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한국 사회는 트렌드에 민감하다. 동시대적 감각을 기민하게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가올 유행을 분석하고 한발 앞서 가는 것을 훌륭한 역량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독서의 영역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상을 받았다든가 화제의 인물이 적극 추천했다는 작품을 읽지 않으면 어떤 흐름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지만, 최근엔 그다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고전 작품을 꺼내 드는 빈도가 잦아진다.‘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러시아를 무대로 삼기 때문에 기본적인 역사 지식이 필요하다. 덕분에 나는 그와 관련된 역사 서적부터 찾아 읽었다. 본 여행을 위한 준비 과정이 꽤 길었으나 지평을 넓히는 것 또한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이윽고 페이지를 펼치자 톨스토이다운 유려한 진행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인물의 이름이 헷갈려 스토리 라인을 놓치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2024년에 사는 문명인답게 유튜브를 켜고 톨스토이를 검색했다. ‘10분 안에 톨스토이 끝내기’ 혹은 ‘톨스토이 작품 읽은 척하는 법’과 같은 영상이 우르르 쏟아졌다. 벽돌처럼 두꺼운 4권의 책을 완독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유튜브에선 클릭 한 번으로 작품의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체험을 대리하는 것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독서의 영역까지 넘어오다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나는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 것을 좋아한다. ‘파우스트’와 ‘싯다르타’는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읽는다. 몇 번을 읽었는지 손가락으로 꼽지 못할 정도다.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싶거든 꺼낸다. 특히 레빈의 풀베기 장면을 자주 찾아보는데 읽을 때마다 늘 비슷한 감동이 밀려온다. 나는 왜 이런 식의 독서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두뇌 회전이 느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명석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해 에둘러 돌아가고 하나의 현상을 미련할 정도로 진득하게 바라본다.누군가에겐 굉장한 시간 낭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러한 독서 습관을 교정할 생각이 없다. 같은 텍스트를 반복하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불편함이 없고 좋은 문장을 찬찬히 곱씹을 수 있다. 어제는 분노로 읽혔던 것이 오늘은 슬픔으로 읽히기도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무엇보다 작가가 자신만의 삶을 살며 구축한 생각이 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몸을 직접 통과하지 않은 것들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다. 어떤 슬픔을 직접 겪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독서는 대단할 필요가 없는 활동이다. 글자를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특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서는 쇼츠를 넘기는 것보다 지루하다. 깨알 같은 글자 안에서 인생의 답을 찾아보려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 순간이 더 많다.그런 면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독서에 접근하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읽는 것을 통해 뭔가를 체화했다면, 그것은 독서 이후에 생기는 것이지 이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생겨나는 일들을 떠올려도 좋겠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좌절과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기쁨 같은 것들. 직접 경험하면서 생기는 실감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며 타인의 침입이 불가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일 것이다.

2024-06-24

품격 있게 첨단산업화 시대에 앞장서자

김진국 고문 왜 TK인가. TK는 어떻게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섰는가. 도덕성을 지켜왔고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사림의 전통은 충(忠)과 효(孝), 선공후사(先公後私)다. 퇴계(退溪), 서애(西厓), 학봉(鶴峯)을 받들고, 학문을 사랑했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했다. 국난 때는 붓 대신 창검을 들고 의병으로 나서, 강산을 지켰다. 이러한 TK전통이 대한민국을 받쳐온 정신이다.윤석열 대통령은 20일 대구·경북을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성지(聖地)”라고 말했다. 정신적 숭고함에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TK는 산업화의 기관차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보릿고개를 넘는 기적을 이끌었다.윤 대통령의 표현대로 “우리나라를 근본에서부터 바꿔놓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도 청도에서 시작됐다. 포항은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의 획기적인 도약을 견인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정신이 우리 산업 발전의 토대가 돼 한강의 기적까지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많은 나라 가운데, 산업화에 성공해, 원조받는 나라에서원조하는 나라로 변신한 것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 주역이 박 전 대통령과 TK다. 조상의 영광을 자존심으로만 간직한다면 비극이다. 본지가 창간한 지 34년. 노태우 정부 이후 대구·경북(TK)의 정치적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이명박·박근혜, 두 분의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과거의 리더십은 빛이 바랬다.TK가 한국 정치의 중심을 차지하던 시대는 이제 역사가 됐다. 다른 지역에서는‘TK’를 ‘권력 지향’과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90도 큰절을 하고, 동갑내기 동료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남인의 예법, 겸양이 된 지금이다. ‘TK의 시각’이라는 말은 강경 보수 세력 편협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추락했다. 김경율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은 김건희 여사 ‘명품백’ 문제와 관련해 ‘TK의 시각’이라고 표현했다가 결국 사과했다. 어쩌다가 TK가 이 모양까지 왔을까.국민의힘이 한 달 뒤 전당대회를 연다. 그런데 TK에는 대표 경선에 나설 사람이 없다. 중앙당이 공천하면 무조건 찍어주는 게 ‘텃밭’이다. TK와 호남에 붙은 불명예다. 호남은 ‘전략적 투표’라며 지극히 실리를 챙긴다. TK는 생각이 오그라들어 도계(道界)를 넘지 못한다. TK의 전통과 정신을 다시 수립할 때가 됐다. 그걸 이어가려면 당당해야 한다. 또 어른스럽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출세를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게 아니라, 국익을 위해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윤 대통령은 “경북이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산업구조 혁신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북아 첨단 제조 혁신 허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차전지 메카, 수소 산업의 허브, 경주 소형모듈원자로 국가산업단지, 경산 스타트업 파크, 구미 시스템반도체 설계 검증을 위한 RD 실증센터 등 청사진도 나왔다.박정희 전 대통령은 맨손으로 산업화를 이뤘다. 민둥산을 울창하게 만들고, 맨땅에 제철소와 조선소와 중화학공업단지를 일궈냈다. 미래를 향한 고속도로를 깔았으며, 나라를 위해서는 미국에 맞서기도 했다.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결코 수구(守舊)가 아니었다. 개혁과 실용을 추구했다. 애민(愛民)은 국민이 배곯지 않게 하는 게 기본이다. 그의 시대에 맞춰 TK가 우뚝 섰다. 영광뿐 아니라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대구역 광장과 경북도청 공원에 박정희 동상이 건립된다. TK 전통과 정신에 다시 불을 붙였으면 한다.21세기가 벌써 4분의 1이 지났다. 밀레니엄의 꿈은 어디로 갔나. 인공지능시대에 고급 인력을 미국으로, 중국으로 빼앗기고 있다. 정치는 허구한 날 정쟁이다. 부(富)를 혐오하며, 첨단산업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경부고속도로와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서 한발도 못 나갔다. 다양한 의견과 토론은 발전의 자양분이다.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 정적을 죽이기 위한 반대는 국력만 소모할 뿐이다.경북의 시·군들이 소멸 위험지역이다. 경북도는 ‘저출생과 전쟁본부’까지 만들어 대결을 벌인다. 대구·경북 통합도 ‘잘살아 보자’는 몸부림이다. 유습만 고집하면 역사의 퇴행이다. 품격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곰방대만 두드려서는 안된다. 미래 한국을 키워갈 첨단산업의 불씨를 살리자. 그게 TK의 정신이자 전통이다. (본사 고문)

2024-06-23

다시 하지(夏至)를 보내며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해마다 6월 20일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방향을 잡는다. 벌서 3년째 그렇다. 어머니 기일이 6월 20일이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은 음력으로 정했으나, 날짜가 들쭉날쭉해서 어머니 기일은 양력으로 하기로 했다. 왕복 640km의 여정을 1박 2일에 진행해야 하기에 어느 땐 다소 고단하기도 하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든 올해가 그런 형국이다.21일 오후 햇살이 뜨겁게 내리비치는 마당에 들어오려니 잔디와 텃밭의 채소가 물을 갈구하는 듯하다. 이틀 전에 1시간 넘게 물을 듬뿍 주었으나, 땡볕과 바람으로 모두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일기예보가 내일 오전부터 강우를 알리고 있어서 물 주기는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부엌 창문 너머 동녘 하늘을 보노라니 붉은 보름달이 떠오른다.달력을 보다가 아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기일이 보름이었다. 그러니까 6월 21일은 2024년 하지이며 동시에 열엿샛날인 셈이다. 여름의 절정인 하지와 둥근 달이 떠오르는 시기가 교묘하게 겹치는 현상이 일어난 게다. 평상시와 달리 상당히 붉게 떠오른 달에서 어떤 상서로움과 기이한 천문현상을 확인함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언제부턴가 인간은 경이(驚異)로움과 경탄(驚歎)의 마음을 상실했다. 자연과학과 기술의 현저한 발달이 불러온 심각한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일상에 견고하게 자리하기 시작한 무한반복의 타성은 생의 건조함과 무의미성을 강화했다. 낯선 풍경과 사람과 인연이 매개하는 경탄과 경이의 순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계화된 회색의 일상이 들어선 것이다.살아가면서 무엇엔가에 놀라고 흥분하고 가슴 설레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기막힌 순간들이 현대인들과 영원히 작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날이 그날처럼 여겨지는, 따라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나날들이 꾸역꾸역 채워져 1년 365일의 시간이 사라지는 양상이 아닌가 말이다.그런 인간들에게 작은 축복처럼 다가온 것이 이번 하짓날에 떠오른 붉은 달이다. 한두 시간 지나면 평상시처럼 하얀색으로 변모할 것이지만,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에게는 신비로움을 선사하기 충분하다. 하지만 현대인은 하늘을 보지 않으며, 특히 도회에 사는 사람은 24시간 환한 환경 때문에 달과 별을 마주할 계기가 없지 않은가?!잠시 담장 밖으로 나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거리를 걷다가 하루살이와 모기 등쌀에 쫓기듯 돌아온다. 긴 한숨을 내쉬면서 ‘하짓날인데, 어떤 정취(情趣)도 없다니….’ 하며 혼자 혀를 끌끌 찬다. 1년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는 시점에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지난 6개월을 뭣하며 살아온 것일까, 돌이키니 웃음과 함께 아쉬움도 손짓한다.작년 하짓날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이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도 분명 무엇인가 아쉽고 그립고 안타까운 것이 있었을 터! 이런 소소한 삶을 풍성하게 해줄 경이로움과 경탄의 순간들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작은 다짐을 하면서 2024년 붉은 달의 하짓날을 보낸다.

2024-06-23

항공모함 보유국의 꿈

우정구 논설위원 항공모함의 등장은 해군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항공기를 탑재하고 이착륙시키는 항공모함은 이동성과 확장성 면에서 과거 해군의 전투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하기 때문이다.세계 어느 곳이든 투입이 가능하고 항공기, 헬기 등 다양한 군사적 자원을 탑재할 수 있어 항모 보유 수만으로 그 나라 군사력은 높게 평가받는다. 떠다니는 군사기지라 부르는 이유다.세계는 8개국이 22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다. 그 중 절반인 11척은 미국 소유다. 2022년 중국이 세 번째 항공모함을 취역함으로써 세계에서 두 번째 많은 항공모함 보유국이 됐다. 중국은 2035년까지 6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계획이라 한다.항공모함의 건조 비용은 대략 7조원 정도 든다. 국가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항공모함 보유는 사실상 힘들다.1986년 만들어진 미국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호가 22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달 말 열릴 예정인 한국, 미국, 일본의 첫 다영역 군사훈련인 프리덤 에지에 참여할 목적이라 한다.10만t급 핵추진 잠수함인 루스벨트호는 축구장 3배 크기의 비행갑판을 갖추고 있다. 미 해군 전투기 FA-18 슈퍼호넷, 공중 조기경보기, 헬기 등 총 80여 대의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다. 승조원 수만 6000명에 달하니 웬만한 나라의 공군력과 맞먹는 규모다.최근 북한은 핵위협과 함께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북러간 결속력을 과시하고 있다. 군사 합동훈련으로 한미일간의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계 6위의 한국군사력을 보강할 항공모함이 없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6-23

“TK통합과 영일만시대에 대비하겠습니다”

경북매일신문이 창간 34주년을 맞았습니다. 1990년 6월 23일 ‘맑고 정직한 신문’을 사시(社是)로 창간한 후 오늘 지령 9241호를 내게 됐습니다. 그동안 본지 임직원들은 ‘종이신문’의 위기 등 언론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서도 독자들의 식견을 넓히는 뉴스 서비스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지역사회의 현안을 제시하고, 공론화를 통해 그 해법도 제시해 왔다고 자부합니다.우리는 대구경북(TK) 지역민과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역의 위기는 반드시 지역신문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잘 알다시피, TK지역은 지금 심각한 인구소멸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매년 이 지역 청년들이 취업이나 대학진학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나가 하루가 다르게 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대구와 경북에서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19~39세)은 1만4000명이 넘습니다. TK지역 기업유치의 최대 위협요인은 인구감소입니다. 삼성·현대 같은 대기업들이 공장입지를 정할 때 해당지역의 인구구조를 우선시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인구규모가 경제성장 잠재력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TK통합 성사되면 자급자족도시 가능인구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비수도권 자치단체들은 모두 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TK행정통합 추진에 올인하고 있는 것도 인구소멸 위기에 쫓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언론도 청년들이 이 지역에서 마음 편하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행정기관과 호흡을 같이해야 합니다.한국사회 인구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수도권 집중 때문입니다. 좋은 직장과 학교를 비롯한 모든 주요 자원이 수도권에 몰려 있으니까 너도나도 서울로 향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수도권에서는 과도한 경쟁시스템이 유발되고,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아예 포기하는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도 역대정부와 마찬가지로 지역균형발전을 우선시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수도권 일극(一極)주의를 강화하고 있습니다.TK행정통합이 예정(2026년 7월)대로 성사되면 대구경북은 인구 500만의 도시가 됩니다. 지금은 서로 갈라져 각자도생을 하고 있지만, 인구 500만명으로 뭉쳐지면 작은 국가처럼 자급자족할 수 있습니다. 대구경북은 미래 도시성장을 좌우할 첨단산업 유치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도체·AI·이차전지 산업에는 풍부한 전력과 수자원, 그리고 인재가 필요한데 TK는 합쳐지면 이 모든 것을 보유한 도시가 됩니다. 2030년 군위에 TK통합신공항이 개항하면 그야말로 날개를 달게 됩니다.다양한 플랫폼으로 지역언론 사명 완성 최근 포항 근해에 막대한 양의 가스와 석유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와, 지역민들은 ‘산유국의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만약 영일만에서 석유·가스가 나오면 ‘동해안 시대’가 펼쳐지게 됩니다. 영일만은 국제적인 항구가 될 것이고, TK는 국제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포항시가 최근 ‘해양수산국’을 신설하기로 한 것도 동해안 시대에 대비하려는 것입니다. 한국석유공사는 영일만 일대에 석유·가스가 35억 배럴이상 매장됐을 가능성이 90%에 이르며, 이를 국제 메이저 석유회사인 엑슨모빌이 검증했다고 합니다.본지는 창간 34주년을 맞아 앞으로 ‘TK 통합시대’를 차근차근 준비하겠습니다. 행정통합과 통합신공항 건설, 영일만 유전개발 같은 비중있는 의제는 ‘세계속의 TK’라는 거시적 시각에서 다루어야 할 뉴스입니다. 우리는 종이 신문은 물론이지만, 유튜브(TK방송)나 ‘AI TV’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지역언론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수도권언론과 차별화되는 지역의제 취재를 위해 TK지역민과의 소통도 강화하겠습니다. 본지는 지금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독자들이 신문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성원으로 경북매일신문의 역량을 한층 더 키워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24-06-23

기업의 위기극복은 공감과 소통으로

신일철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GE(General Electric)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로, 전구와 기관차, 그리고 항공기 엔진 등으로 산업화 시대를 이끈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GE는 경영상태가 나빠져 참담한 몰락을 겪고 있다. 주력 사업들은 매각되었고 주가는 크게 하락하고 있다. 급기야 세계경제의 흐름을 알려주는 대표 지수인 다우지수에서 GE는 2018년 6월에 사라졌다. 이로써 111년만에 다우지수에서 퇴출된 것이다.1990년대 GE는 21세기형 기업혁신모델로 인정받았으며, CEO인 잭웰치의 리더십을 전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앞다투어 벤치마킹하였다. 국내에서도 삼성과 LG 그리고 포스코와 수많은 중견기업들이 GE형 6시그마 혁신모델을 도입하고 혁신을 추진하여 성과를 올렸다.워크아웃 타운 홀 미팅으로도 유명하다. 구성원들이 회사를 떠나 별도의 장소에서 전원참가하여 브레인스토밍방식으로 자유분방하게 토론하고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도출하였다. 홀 미팅 최종단계에서 리더가 의사결정하여 즉각 실행할 사항과 중요 프로젝트로 구분하고 조직 내 문제를 즉시 해결하였다. 중요한 프로젝트에는 문제해결역량을 갖춘 직원들의 참여와 지혜를 발휘하고 개선하였다. 위대한 기업의 롤모델로써, 이렇게 차별화된 일하는 방식으로 무장했던 GE가 오늘날 역사 속에서 잊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먼저 지속 가능한 기업을 지향하면서 혁신활동을 도입하고 추진했던 기업이 초심을 잃어버렸다. 에디슨의 발명품인 백열전구사업으로 1882년 창립된 GE는 제조업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룹의 모태인 제조업보다는 금융업에 집중하면서 눈앞의 성과에 집중하였다. 주주가치의 극대화를 목표로 1등이 아닌 기업은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기업을 매각하고 인력을 해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조 중심의 기업가 정신과 그 DNA를 상실하였다.다음으로는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가능성보다 성과 추구와 사업부 간 경쟁심을 촉진하였다. 지속 가능한 경영시스템 보다 수익창출을 위한 단기적 성과를 추구한 것이다. 특히 제조업 기반성장은 중단되거나 후퇴하였다. 고객지향적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재무적 성과와 인재양성을 추진하지 못한 채 지속가능성과 위기극복의 역량을 상실한 것이다.변화 관리의 대가로 알려진 짐 콜린스는 수많은 기업들 가운데 지속성장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기업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특징을 역설했다. 기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해나가기 위하여 창의성과 혁신성을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것, 고객과의 지속적인 소통으로 고객 요구를 비즈니스에 반영하는 것, 그리고 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개선 노력과 이를 위한 인재의 육성을 강조하고 있다.기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고 있는 삶의 터전, 곧 일터이다. 한 사람의 천재적인 발상보다 협의하고 토론해서 합의된 집단지성에 의한 결정이 휠씬 효과적인 것으로 여러 연구논문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조직은 이를 얼마나 잘 이끌어내는지가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지름길이다. 기업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경영층과 직원이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성장과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

2024-06-23

늘봄교실 확대가 저출생 대책이어서는 안 된다

유영희 작가 2024년 한국의 출생률이 0.68을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3대가 지나면 인구가 소멸할 것이라고도 한다. 어느 보고서를 보니, 2023년 남한의 0-4세 아이 비율이 북한의 절반이라고 한다. 북한의 0-4세는 1천763만 명이고 남한의 0-4세는 1천611만 명이라 숫자는 비슷하지만, 남한 인구가 북한의 두 배이기 때문이다.그래서인지 지난 6월 9일 윤석열 대통령은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주재하는 자리에서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공식 선언하고, 이미 신설하기로 한 ‘저출생대응기획부’의 이름을 ‘인구전략기획부’로 변경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출산 장려 정책으로 쪼이기 댄스 장려나 정관 복원 수술비 지원들이 비웃음을 샀고, 여자의 발달이 빠르니 결혼 적령기에 남녀가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여학생을 1년 일찍 입학시키는 방법을 언급한 재정포럼 5월호의 연구 논문 역시 조롱을 받은 상황이라 이번에는 효과적인 정책이 나올까 기대했지만, 19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전혀 기대에 못 미친다.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결혼 기피와 저출생의 가장 큰 이유는 주거 불안과 경력 단절 걱정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만이 답이라는 연구도 많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정부 정책을 보면,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소득 보장이 안 된 상태에서 대출을 확대하는 것은 신혼부부를 빚더미에 올려놓거나 그림의 떡인 발상일 뿐이고, 주택을 보유한 남녀가 결혼하면 세금 깎아주는 기간을 늘린다는 정책은 청년 대다수가 무주택자라는 현실을 간과하고 빈부 격차만 심화시킬 수 있는 대책이다. 학·석·박사 과정 통합하여 일찍 사회에 나가게 한다는 방안도 어처구니 없지만, 늘봄교실 보육시간을 오후 8시까지로 늘린다는 정책은 무자비하기까지 하다.지금까지 초등생이 이용하는 돌봄교실은 오후 5시까지만 운영하기 때문에 맞벌이 부부가 이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서 앞으로는 오후 8시까지 맡아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늘봄 정책이 나왔을 때도 부모와 자식이 ‘늘못봄’이 되는 정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한술 더 떠서 초등 1, 2학년생을, 점차 6학년까지 오후 8시까지 교실에서 지내게 한다는 정책이 어떻게 나왔는지 의문이다. 저녁 늦게까지 교실에서만 지내면 그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될지 눈앞이 캄캄해진다. 늘봄교실에 오후 8시까지 맡기면서 마음 편할 부모도 없을 것이다. 이번 저출생 대책 어디에도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교실에 보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아이는 부모가 늘 대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다. 부모 역시 그런 시간이 확보되어야 마음 놓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아무리 한국의 인구밀도가 높아서 저출생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도 지금의 출생률 저하 속도는 한국 사회의 위기다. 부모가 자녀를 제대로 보호하면서 키울 수 있는 장기적인 정책 제안이 시급하다.

2024-06-23

깨어진다는 말

파란 유리병은 ‘퍽’하며 깨어진다 한낮에 깨어진유리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이다 노란 유리병은깨어질 때 ‘퍽’하는 소리를 낸다 한밤중 평상심이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 달빛 소리이다빨간 유리병은 ‘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그것은 아닌 밤중에 새벽 구병산이 벌떡 일어나 제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6·25가 터지자 대포소리가 자주 구병산을 흔들곤하였다 놀란 가슴이 자주 ‘퍽’하고 깨어졌다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모래밭저 여린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가 ‘퍽’하며 제 고향 먼 바다를 엎지르다니!―강현국,‘퍽, 하며 깨어진다’ 전문(‘구병산 저 너머’, 시와반시)‘깨어진다’를 생각한다. 깨어진다는 동사 하나로 수렴되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괴물 중 목신 판(pan)이 있다. 헤르메스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판을 올림포스산으로 데려갔고, 모든 신이 판을 환대했다. 여기서 그리스어 판에는 ‘모든’이라는 뜻이 생겨났다고 한다.판은 물의 요정 님프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판을 보자마자 도망치고 말았다. 숲에 살던 판은 기분이 나빠지면 괴성을 질렀고 이 소리를 들은 인간이나 짐승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극심한 공포’나‘ 공황 상태’를 의미하는 영어의 패닉(Panic)이 바로 판이 지른 괴성이다.강현국 시인의‘깨어진다’에는 판의 공포가 숨어 있다. ‘퍽’소리를 내며 깨어진 경험은 시인이 기억하는 모든 것의 그늘이고 구석일지도 모르겠다. 깨어지는 유리병에는 평화가, 사람이, 넘어진 무릎이, 못 지킨 의자가 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유용하거나 무용하거나 채우거나 비우거나 모두 ‘깨어진다’하나로 통성한다. 무엇보다 깨어진다는 말은 고통이 낳은 상처의 언어라는 사실이다.강현국 시인에게 깨어짐의 경험은 패닉이다. “파란 유리병이 깨어진 소리” ‘퍽’의 유리 조각은 한낮의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시인의 한낮을 뒤흔들고만‘퍽’에는 은닉된 패턴이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하나의 습성일 수도 있고 잔인한 플롯일 수도 있다. 색을 보고 놀란 가슴은 붉은 것만 보아도 놀라고, 이름 한 글자에도 놀란다. 거기에 잔혹한 가시마저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그 아픔은 그 일 자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서 온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시인은 누구나 한 생을 살면서 지옥의 한 철을 만난다고 했다. 세월이 흐른다 해도 망각이란 이름으로 지워지거나 추억이란 말로 쉬이 봉합될 수 없는 아픈 상처의 한 철을 만나다고. 상처의 출처는 실존의 번뇌로부터일 수도 있고, 이념과 진영의 대립으로부터일 수도 있고, 안팎 현실과의 불화로부터일 수도 있다고. (강현국, ‘먼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이희정 시인 그런 시인에게 올림포스산이 있다. 아홉 폭 병풍이 첩첩 에워싸인 밤이면 노란 치자꽃 향기 번지는 그리움의 거처 구병산은 늘 거기 그렇게 있다고. 어머니 매달려 석 달 열흘 기도하던. 머리 위로 포성이 지나도 은하수 흘러가고 별똥별이 져도, 어느 날 궁금해서 찾아간 뒤에도.그런 구병산에 “빨간 유리병은 ‘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 그것은 아닌 밤중에 새벽 구병산이 벌떡 일어나 제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노란 유리병은 깨어질 때‘퍽’하는 소리” “한밤중 평상심이 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 달빛 소리” 먼 곳은 먼 곳이어서 닿을 수 없다고 했다.해서 시인은 그리움을 노래한다. 마치 목신 판이 사랑하는 연인 갈대가 된 님프를 악기 팬플루트로 만들어 불렀듯이 말이다. 좋은 시가 그렇듯이 “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모래밭” 시인 속에는 넘칠 듯 말 듯 조용한 그리움이 천리를 가듯 지극한 마음을 엎지르며 간다. “저 여린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가‘퍽’하며 제 고향 먼 바다를 엎지르다니!

2024-06-23

포항 발전의 새로운 도약대, POEX 건립

이강덕 포항시장 마이스(MICE)산업은 큰 규모의 회의장과 전시장 등 전문시설을 갖추고 국제적인 회의나 기업의 포상관광, 전시회 등을 유치해 지역과 국가 경제에 도움을 주는 고부가가치의 신산업을 뜻한다.숙박과 관광, 쇼핑과 교통 등 연관 산업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발생하는 파급 효과로 인해 ‘굴뚝 없는 황금산업’으로 불리며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스위스의 작은 도시 다보스는 세계 유수의 경제·정치·기업인들이 참여하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을 매년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명성을 얻었다.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150여 개국에서 4천개가 넘는 기업과 기관, 1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기술전시회 CES(세계가전박람회)등이 열리며 ‘컨벤션도시’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국제 규모의 회의·전시회가 지역을 넘어 국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지역 경제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 넣는 등 긍정적인 효과 거둔 이들 사례는 마이스산업의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로 평가받는다.우리시도 마이스산업이 커 나갈 충분한 잠재력과 경쟁력을 갖고 있다. 아름다운 바다를 활용해 환동해 중심 해양관광도시로 발돋움하고 있고, 주력 철강 산업에 이은 이차전지와 수소·바이오 등 신산업이 기업혁신파크, 기회발전특구 지정 등을 계기로 성장에 탄력을 받으면서 산업 박람회와 같은 국제 규모 행사 수요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포스코, 에코프로 등 글로벌 기업과 포스텍, 가속기연구소 등 세계 수준의 산학연 인프라에서 매년 200회 이상의 컨퍼런스와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있지만 이를 수용할 전문적인 시설은 그동안 없었다.체계적인 준비와 노력 끝에 지역 마이스산업의 구심점이자 비약적인 도시 발전의 도약대가 될 포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POEX)가 장성동 옛 캠프리비 부지에 내달 드디어 착공한다.도심 해변인 영일대해수욕장에 인접해 시원한 바다뷰를 조망할 수 있고, 방문객 이동이 편리하다는 입지적 장점까지 갖춘 곳이다.POEX는 오는 2026년 말 1단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연면적 6만3818㎡, 전시면적 7183㎡ 공간에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지어지며 컨벤션홀, 중·소회의실, 주차장, 2개의 키테넌트를 비롯해 다양한 부대시설로 구성된다.이어 비슷한 규모로 추진되는 2단계 시설에는 오디토리움, 다목적 홀, 숙박·상업·레저시설이 자리하며, 2단계 확장까지 완료되면 부산 벡스코(BEXCO)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춰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컨벤션센터로 우뚝 서게 된다.POEX건립에 발맞춰 포항만의 마이스산업 생태계 육성과 안정적인 센터 운영이 중요한 만큼, 전담 조직을 확대 개편해 컨벤션 건립과 지역에 특화된 마이스 행사 및 관광콘텐츠 개발 등 빈틈없는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특히 철강과 이차전지 등 지역 특화 산업과 연계한 융·복합 전시회를 개발해 지역과 기업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형 다보스포럼’을 꿈꾸며 탄소중립 등 글로벌 아젠다를 선도하고 도시를 대표하는 브랜드로써 포항의 위상을 드높일 국제 규모의 행사가 개최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POEX는 시민들이 평소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민 친화적인’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해 또 다른 차별성을 두고자한다. 시민, 관광객이 가족 단위로 방문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부대시설과 행사를 마련해 문턱을 낮출 계획이다.아울러 해양레저와 쇼핑, 숙박과 연계해 국제행사 개최 시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POEX 일대를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을 추진하는 등 포항을 다시 찾고 머무를 수 있는 여건을 계속 마련해 가고자 한다.이같은 노력들이 하나 둘 쌓여 건립될 포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가 지속 발전이 가능한 환동해 중심도시라 우리의 꿈이 구현되는 새로운 랜드마크이자 미래 신산업 활성화의 장, 시민들의 화합의 장으로 소중하게 자리매김하길 희망한다.

2024-06-23

대구의 퐁네프

우정구 논설위원 1991년 제작된 프랑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파리의 센강을 가로지르는 퐁네프 다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두 남녀의 치열한 사랑 이야기가 주제다. 세계적 흥행을 이끌며 이듬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우리나라서도 뜨거운 흥행을 기록하며 프랑스 영화의 붐을 일으킨다.파리의 남쪽에서 북쪽을 연결하는 퐁네프 다리가 세계적 유명 명소로 알려진 것은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덕분이다. 퐁(Pont)은 프랑스어로 다리고 네프(Neuf)는 새롭다는 뜻이다.1570년 프랑스 앙리 3세 때 다리를 짓기 시작해 1607년 앙리 4세 때 완성된 다리다.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이름과는 달리 프랑스 센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다리는 흰색 돌을 주로 사용해 만들었고 아치 형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다리 중간에는 말을 타고 있는 앙리 4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영화 속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들이 세계인들의 뇌리에 박히면서 파리에서는 젊은 연인들이 즐겨 찾는 최고의 데이터 코스로 등장했다. 또 다리 중간 중간에 설치된 둥근 석조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는 석양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도 유명해졌다.대구시가 작년부터 신천을 고품격 수변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상당한 고심 속 투자를 하고 있다. 특히 홍준표 대구시장은 파리 센강의 퐁네프 다리처럼 젊은이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프러포즈 명소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프러포즈 명소의 대략적인 디자인도 나왔다.대외적으로 내세울 게 크게 없는 대구에 퐁네프같은 명소가 생긴다면 대구시민의 자부심 고취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대구의 명소 퐁네프 탄생을 기대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6-20

사드 엔딩

홍석봉 언론인 경북 성주 초전면 소성리 마을에서 ‘사드 반대’ 집회를 주도하던 상징이 자취를 감췄다. 주민들이 시위 지휘부가 사용하던 천막을 자진 철거한 것. 사실상 사드 반대 운동의 종언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7년 동안 소성리 마을엔 사드반대 구호가 넘치고 플래카드와 깃발이 넘실대며 살풍경했다. 전자파 괴담은 괴물이 되어 성주와 김천을 휘저었다. 진압 경찰과 시위대의 함성과 몸싸움으로 치열했던 시골 마을 회관 앞 도로가 이제 일상을 되찾았다. 2017년 4월 소성리 마을 인근 골프장 부지에 사드(고고도미사일)가 배치된 지 7년 만이다.2016년 정부는 성주에 사드를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소성리 마을 회관 앞은 사드 반대 집회의 중심지가 됐다. 이곳에서 성주투쟁위, 사드반대 김천시민대책위 등이 수시로 반대 집회를 열었다. 초기에는 집회참가자만 수천 명에 달하는 등 위세가 대단했다. 인구 4만2000명의 조그마한 농촌 마을 성주가 한순간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민주당과 좌파 단체들은 “사드 전자파가 참외까지 오염시킨다”며 전자파 괴담을 퍼뜨렸다. 주민들은 사드 장비와 물품 반입을 막았다. 주민과 반대단체들은 거의 매일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시위에 나섰다. 최근엔 반대 집회도 잦아들고 참석자가 10여 명 수준에 그치는 등 열기가 식었다고 한다. 규모는 줄었지만, 시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600회 이상 집회를 했다. 지친 주민들은 하나 둘 시위에서 빠져나왔다. 반대 단체들은 시위를 멈출 생각이 없다. 진보의 집요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사드 반대시위는 이젠 힘을 잃었다. 지난해 사드 전자파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환경영향평가 결과가 나왔다. 지난 3월엔 헌법재판소에 낸 헌법소원도 각하됐다. 반대 명분이 없어졌다.사드 사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사드 배치의 본질은 국가 방위였다. 하지만, 우리는 전자파 괴담으로 안보는 뒷전인 채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국론은 분열되고 지역 민심은 찢어졌다. 주민과 반대 단체의 집회 및 시위가 장기간 이어졌다. 대규모 경찰력이 동원됐고 시위대와 충돌, 인적·물적 손실을 끼쳤다. 주민과 시위주동자는 전과자가 됐다. 철석같았던 한미 동맹에도 금이 갔다. 우리 사회가 듣도 보도 못한 전자파라는 괴물과의 싸움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얻은 것이라곤 진보의 선동과 악한 영향력을 재확인했다는 점이다. 진보의 선동은 나라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놓고도 진보는 사과 한마디 없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희생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성의 계기가 됐다.우리 사회는 그간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고’, ‘이태원 참사’ 등 심한 성장통을 앓았다. 사드앓이는 또 하나의 성장통이었다. 쉬 아물지 못할 상처를 안은 소성리가 하루빨리 평온과 안정을 되찾길 바란다. 국가와 지방정부가 도와야 한다. 북한 김정은의 도발이 자못 심각하다.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느슨해진 안보의식을 다잡아야 할 때다.

2024-06-20

영일만대로·경주 SMR산단 건설 속도낸다

경북도의 현안인 포항 영일만 횡단고속도로(영일만대교) 건설과 경주 소형모듈원자로(SMR) 국가산업단지 조성사업이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어제 경산 영남대에서 열린 26번째 민생토론회에서 영일만대교 건설과 경주 SMR 국가산단 조성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다.영일만대교는 동해안 고속도로 중 포항 북구 흥해읍과 남구 동해면 일대 바다를 연결하는 18km 구간이다. 모두 3조4000억원이 투입될 이 사업은 올해 실시설계에 들어가지만, 앞으로 사업계획 적정성 재검토, 정부와의 총사업비 협의 등 넘어야 할 관문이 많다. 그리고 지난해 3월 SMR 국가산단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경주시는 오는 2030년까지 문무대왕면 일원에 150만㎡ 규모의 국가산단을 조성한다. 정부가 SMR 분야 혁신제작기술과 공정연구 분야에 국제경쟁력을 가지게 되면 경주시는 세계 SMR 시장에서 날개를 달 수 있다.울진 원자력 수소 국가산단 조성사업과 구미 반도체 소재산업도 앞날이 밝다. 윤 대통령은 이날 토론회에서 경북을 ‘수소산업의 허브’로 키우겠다는 약속과 함께 구미산단을 반도체 소재부품의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울진 원자력·수소 국가산단 조성 사업은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되면 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다. 그리고 실리콘웨이퍼, 쿼츠웨어 등 반도체 소부장의 핵심 공급기지인 구미시는 정부가 소부장 기술개발 및 사업화를 적극 지원할 경우 국제경쟁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4·10 총선 이후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재개된 ‘민생토론회 시즌2’는 윤 대통령이 민생을 챙기고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열리고 있다. 경북도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윤 대통령이 약속한 정책과제들은 대부분 법안 정비와 국회 예산심의가 전제돼야 하는 사안이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상당수 약속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토론회에서 제기된 과제들이 실행력을 가지려면 정부와 경북도, 그리고 정치권이 야당을 설득할 협상력을 우선 갖춰야 한다.

2024-06-20

‘지역균형발전’ 빠진 저출산 해법 효과 있겠나

그저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를 주재한 윤석열 대통령이 “저출생문제를 극복하는 날까지 범국가적 총력 대응체계를 가동하겠다”며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대통령이 직접 저출산 위원회 전체회의를 연 건 지난해 3월에 이어 1년 3개월 만이다. 저출산위원회는 이날 2030년 출산율을 1명대로 높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를 위해 일·가정 양립, 교육·돌봄, 주거·결혼·출산·양육 등 세 분야 15대 핵심정책을 내놨다. 구체적으론 단기 육아휴직제 도입, 육아휴직 급여 확대, 신혼·출산 가구에 대한 주택 공급 확대, 결혼 특별세액공제 도입 등이다.그동안 저출산 문제는 수많은 전문가가 매달려 해법을 찾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투입된 정부 예산만 해도 지난 20년간 380조원에 달했다. 그러나 합계출산율은 계속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윤 대통령이 이날 회의에서 인구감소로 멸망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스파르타의 사례를 제시한 것은 한국 인구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준다.정부가 이날 저출산 대책을 다양하게 내놓았지만,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제외한 것은 아쉽다. 오히려 “수도권 그린벨트를 해제해 공공주택 1만4000호를 짓겠다”면서 ‘수도권 인구집중’정책을 대책으로 발표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윤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저출산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과잉 경쟁을 개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지방균형발전 정책을 확실하게 추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저출산 문제를 지역균형발전 정책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날 발표한 저출산 대책에서는 지역균형발전을 통해 망국적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겠다는 신년 약속은 찾아볼 수가 없다.지금 대구·경북만 해도 청년 유출현상이 심각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이 1만4000명에 이른다. 윤 대통령도 언급했듯이, 저출산 문제는 인구의 수도권집중 탓이 큰 만큼 지역균형발전 정책과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

2024-06-20

6월의 이른 폭염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하지(夏至),‘여름에 이르다’는 절기다. 태양은 가장 높이 떠서 그림자가 가장 짧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아서 태양의 에너지를 길게 받아 본격적으로 농작물이 성장하는 시기이다. 이 열기가 쌓여 한 달 후에는 가장 덥다는 대서(大暑)가 오는데, 19일 오전, 기상청은 66년 만에 가장 무더운 6월이 될 것이라고 폭염주의보를 발표했다. 체감온도 33도 이상이 이틀 이상 이어질 것이 예상될 때 내리는 주의보인데, 벌써 92개 지역에 폭염특보가 내려진 상태다.서울은 35.8도로 75년 만에 6월 최고 온도를 기록했고 가까운 경주도 37.7도를 넘었으며 경산 하양읍은 자동 기상관측장비(AWS)가 39도를 찍었다. 우리나라 전국의 한낮 기온이 35도 안팎으로 기온분포 영상을 보면 거의 붉은 색이다. 청명한 날씨에 남서풍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인체 온도보다 높은 날씨에는 온열질환을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며, 오후 2~4시 사이에는 야외 작업을 중단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장맛비가 시작되었다. ‘하지에 비 오면 풍년 든다’하였으니 농촌에는 조금은 기다리는 마음으로 모내기를 마쳤을 것이다.이번 6월 폭염은 전 지구적인 기후 현상이라고 소식통은 전하고 있다. 미국은 중서부와 북동부에 열돔(Heat Dome) 현상이 발생하여 38도 이상 치솟아 대부분 지역에 주의보를 발령했고, 중국은 지표면이 75도가 넘는 곳도 발생하였으며, 인도는 폭염 사망자가 160명 이상이 된다고 한다. 사우디에서는 성지순례기간 동안 52도의 열기 속에 550여 명이 사망했고 40도가 넘는 그리스에서는 1주일 사이에 관광객 3명이 현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엘니뇨와 라니냐의 영향으로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여 근래 세계 온도는 산업혁명 전보다 1.3도 상승했다는데 앞으로의 지구환경이 심히 걱정된다. 이러한 열파(熱波)로 올해 7월에 치러질 파리 올림픽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가뭄, 산불, 홍수 등의 기상이변도 심해지고 있으니 지구 곳곳이 난리다.그러나 이른 폭염에 너무 겁내지 말고 주변을 정리하고 마음을 시원하게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6월에 모심기가 끝나면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풍습이 있다. 땀내 나는 머리카락을 잘 다듬고 제철 음식인 감자와 옥수수, 참외를 먹는 즐거움도 가져보자. 감자는 열을 내려주는 효능이 있고 옥수수는 이뇨 작용이 탁월하다 하니 잘 삶아서 닭백숙과 같이 먹으면 뜨거운 하짓날 열기를 식힐 수도 있겠다. 그리고 민물 장어와 다슬기로 단백질을 보충하여 6월 찜통더위를 잘 이겨 나가보자.그런데 국회는 자기들만의 열기에 막혀있다.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 20여 일이 지나고 있는데도 전반기 원구성도 못한 채 여·야 대치 국면이 장기화하고 있으니 국민은 찜통 같은 답답함에 온몸에 땀이 흐를 지경이다.답답한 마음에 반바지 차림으로 밤바다로 나가 모래밭을 맨발로 걸으며 영일만을 멀리 바라보니, 머릿속에 무언가 빤짝이는 영상이 떠오르는 듯하다. 석유 시추탑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발표한 140억 배럴의 석유와 가스, 매장 가능성이 10%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꿈 ‘산유국’이 현실이 되길 빌어본다.

2024-06-20

입법독재(立法獨裁)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선거에 당선되어 임기를 시작하는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하는 선서다.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고,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되 소수 의견도 충분히 존중하고 반영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모든 의사결정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며, 모든 법안과 의제는 공평하게 심의되어야 하고,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 국회는 정당이나 외부 세력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하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입법부로서 행정부와 사법부의 권력분립을 지키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요약이다.다수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입법독재를 하고 있다는 원성이 높다. 삼권분립 제도를 채택한 국가에서 야당이 입법독재를 자행한다는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은 위에 열거한 국회의 임무와 역할에 위배되는 일일 뿐 아니라 헌정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만행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입법 폭주를 일삼는 것은 오로지 저들이 안고 있는 사법리스크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대다수 국민들은 알고 있다.국회 다수당의 폭주가 시작된 것은 문재인 정권 후기부터다. 적폐청산을 명목으로 특검을 발족해서 박근혜 정권 관련 인사들을 대거 사법처리할 때까지는 박수를 보내다가, 막상 검찰의 칼끝이 자신들을 향하자 토사구팽으로 검찰해체에 나서면서 국회가 폭거에 나섰다. 검찰무력화의 일환으로 소위 ‘검수완박’법을 제정한 것도 모자라 옥상옥으로 일컬어지는 ‘공수처법’까지 편법을 써가면서 밀어붙였다. 그래놓고 이제는 공수처도 못 믿으니 특검을 하자고 한다.하지만 대선에 패배해 정권이 바뀌자 야당이 된 다수당은 어떻게든 정권에 흠집을 내고 타격을 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일단은 국회의장을 비롯해 주요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그 무소불위의 힘으로 특검과 탄핵 결의를 남발해 정권의 발목을 잡고 검찰과 사법부와 언론을 겁박하고 장악하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단독으로 ‘방송3법’을 통과시켜 언론장악을 노골화하고, 사법리스크 모면책으로 검사와 판사를 탄핵하겠다는 것도 모자라 아예 검찰청을 없애버리는 법안을 발의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다.국회는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이다. 국회의원 각자는 개인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지지자들의 대리인 자격을 갖는다. 그래서 국회는 가장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소수의 의견도 충분히 고려하고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도 다수의석을 앞세운 야당의 파행과 폭주는 반민주적이고 반법치적인 만행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법독재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행정부와 사법부가 제 구실을 해야 하고 민심이 선거로 심판하는 수밖에 없다.

2024-06-20

탄탄이 만난 두 거장, 이문열과 박명재

얼마 전 남천주(南川州 옛 이천의 지명) 설봉산자락 마장면 장암리의 ‘부악문원’으로 발길을 향했던 적이 있다.  문원은 우리시대의 대 문호이시며 서울장안의 지대를 '황금종이'로 탈바꿈 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하시고, 이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 초명(初名)은 이열(李烈)이신 이문열 대문호(작가)께서 인세로 장만하여 자신의 집필실부터 창작인을 위한 객사까지 겸비한 곳이다. 후학도 양성하고 있어 일명 ‘이문열 학숙(學塾)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말엔 고속도로가 늘 저속도로 되어 대형 주차장이 된 듯 한 도로에서 거의 긴급한 시간을 초조하게 허비하다가 약속시간 보다 30분을 넘게 지체하여 도착을 했으니, 도로 탓으로 돌리기에도 영 체면이 서지를 않았지만, 몇 달 전부터 굳게 한 약속을 속수무책으로 준비성이 없었음에 안면이 제대로 서질 않았다. 도를 넘는 실례를 범한 것이니 멋쩍었다.  여하튼, 정원에는 참 붕어 몇 마리가 노니는 아담한 연못이며 그림 같은 낙락장송 몇 구루가 우뚝하니 서 있었고, 이미 문장으로 일가를 크게 이룬 자타공인하고 남은 두 대가이신 이문열 선생님과 영일만이 낳은 수재 동천東天 박명재 대감을 30분 넘도록 기다리게 한 위인이 바로 이 몸이었다.  동천 선생과의 지중한 인연은 예전 포항 영일만 최고봉의 암자로 소원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기도 영험처'로 경향 각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원효성사와 자장율사께서 머물던 천 년 전의 초막인 자장암에서였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던 때에 전례 없던 전염병이 창궐하여 지구촌에 돌았던 근자의 지난시절, 일기도 고르지 않던 날 한 치의 앞도 구분키 어려워 가랑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가물가물 물안개가 자욱했던 그날, 예측불허의 인생길속 같은 운제산 자락 구비구비 벼랑 끝의 암자에, 급작스럽게 지나간 한 시절엔 이름 꽤 높은 고관으로 명예롭게 예편하시고 늘 나랏일에 바쁜 현직 국회의원께서 간당간당 떨어지기 직전 제비집처럼 매어달려 아슬아슬하고 험했던 험한 길을 방문하겠다니, 그 때의 순간 부족한 이 사람은 하필 그 좋은 날 제치시고 이런 시기에 이곳을 오시어야하나 하는 오지랖 염려도 없지를 않았으나, 예전 같으면 당상관인 이조판서(제9대 행정자치부 장관)를 지내고 대제학(대학총장)까지 역임한, 일흔에 다다른 현역 국회의원이 지나는 길에 들르겠다는데, 이를 마다하는 것도 크게 예의를 벗어나는 것 같아 엉거주춤하며 맞이했던 분이 동천東天 박명재 대감이었다. 그 때의 쉼 없는 폭포수 같은 지혜의 명철대오를 각인케 해주는 감로설법에 매료되어 지금까지도 그 인연이 이어져오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 시대의 거두들인 두 어르신의 당당한 존재감을 보여주듯이 문원 푸른 정원 앞마당에는 그 사계절 푸르른 낙락송이 마치 두 분 인 양 우뚝 서있었고, 한때 박 대감이 행정자치부 장관시절 인사과장직의 중요 요직에 발탁한 여장부로 현 이천시통령이 지불한 쌀 맛, 밥맛의 질이 전국에서 내놔라하는 널리 알려진 집에서 이문열 대문호와 박명재 대감을 모시고 이밥에 질긴 나물(?)로 배를 불렸던 그럭저럭 행복한 하루였다. 또 젊은 시절 만나 평생을 교류하고 있는 두 분의 대화 속에서 진정한 우정이 어떤가를 되새겨 본 시간이기도 했다.   다시 부악문원 수 만권의 서책 앞에 눈이 휘둥그레하여 있던 찰나에 이 선생 댁 여사님께서 지나는 말씀으로 "아끼고 귀중한 물건, 그러니 이보다 양질의 책은 경상도 땅인 영양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 광산문학관에 내려 보냈는데 근자에 이르러 화마에 모두 다 타버렸다"고 하셨다. 관련 인사들의 용심부족 탓이든, 관리 소홀 탓이든 간에 이를 듣고 있으려니 울화가 치밀어 올라 터지는 듯 했다.   문원을 한 바퀴 돈 후 이문열 선생님으로부터 이런저런 내심을 들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낙향이었다. 이 대문호께서야 고향으로 내려가 말년을 유유자적하며 인생을 마무리하심도 한 생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수도권 인구에게는 아직도 이문열 선생의 고전적이고 인문주의적이며 그가 발간한 오랜 책의 그 향내가 그저 그립다. 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윽하기만 한 문체를 만나고 싶고, 일필휘지 그의 글을 통해 이 퍽퍽하기만 한 디지털 세상에선 볼 수 없는 인간 속마음을 통찰해 봤으면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직 그의 글을 바라고 기다리는 이들이 적잖다. 그러니 이 대문호께서 심호흡 한 번 크게 하시고 우리 속 심금을 시원하게 울려주길 빌고 또 빌어본다.    수도권 과밀화는,'재화가 수도권으로만 집중한 현상'도 있겠지만, 서울이 '문화공화국'이라는 것에도 기인한다. 기실, 정책의 부족함과 소홀히 만든 결과일터다. 그 문화공화국도 지금 진보 진영이 죄다 장악했다. 그들의 일방적이고 배타적 편견과 곡해로 인해 이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으로 자리매김한, 이미 대가 중에 대가인 선생도 수시로 상처가 났다.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이 세상, 그리고 평가받지도 못하는 이 사회가 지랄 같다. 사람은 누구든 일생을 통해 꼭 하고 싶은 얘기, 그러니까 평소에는 오히려 더 가슴 깊이 묻어 두게 되는 하나의 얘기를 지니고 있다고 하던데, 좀 어눌한 듯 하지만서도 이 선생께서 내뱉은 속내 한마디가 또박또박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감각적이고 즉흥적이고 일도양단 식으로 우리 편 네 편 나누어 이전투구 하듯 흑백논리만 무성한 그 ‘SNS 문체’로 어찌 우리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의 '웅장미학'을 당해낼 재간이 있을까. 1980년대 우리 세대는 책은 좀 덜 읽고 데모만 해 인문학적 사고가 다소 부족했었음을 자인한다. 근데 그 모자람은 평생 갔다. 그렇다면, 2024년 지금은 어떤가. 책은 온데간데없고 여길 보나 저길 보나 온통 SNS 광풍이 휩쓸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나불거리기만을 거듭하며 편이나 가르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 그리고 어느 새 그들이 주인공이 되가는 시대가 됐다.  이 사람이 구닥다리여서일까. 근래 들어 인문학적 사고를 사회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간혹 생각한다. 인문학이 좀 더 밝고 건전한 세상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하나 더 욕심낸다면, 그 인문학의 영역 확장 역할을 수고스럽지만 이 대문호께서 좀 해주시면 더없이 좋으련만.  아 참, 솔직히 국보 같은 아니 국보 그자체인 국민작가에게 그에 걸 맞는 대접도 좀 해주라. 우리 시절에 그이 덕분에 사색의 위대함을 이토록 깨닫지를 않았는가. 이문열 선생님께서 그날 부악문원을 떠나는 이 사람에게 들려주신 천둥소리가 지금도 쟁쟁하게 들린다. "죽으면 죽으리라". /탄탄 (전)불교중앙박물관장·현 동국대(와이즈캠퍼스) 출강

2024-06-20

대통령과 술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유대인들의 지혜를 담은 책 ‘탈무드’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술을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땐 양같이 온순하지만,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납게 되고, 거기서 더 마시며 원숭이처럼 춤을 추고, 폭주하면 토하고 뒹구는 돼지가 된다.”술에 관한 비유 중 이처럼 적절한 걸 찾아보기 쉽지 않다. 선현들은 술을 마실 때도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오죽하면 주도(酒道)란 말까지 있을까. 과하면 도리를 벗어나게 만드는 게 술이다.한국인의 ‘술 사랑’은 유명하다. 필부필부부터 대통령까지 신분에 상관없이 많은 양이건 적은 양이건 술을 즐겨왔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비교적 나이가 많아 집권했으니, 술을 크게 즐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반면 40대에 대통령이 된 박정희와 전두환은 주량이 상당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경우 촌로들과 막걸리를 즐겨 마셨고, 동시에 청와대 인근 안가에선 위스키 시바스 리갈을 즐겼다.보스 기질 다분했던 전두환은 부하 장교들과 호방한 술판을 벌이는 게 여러 영화에서 묘사된 바 있다. 1980년대 청와대에서 가족 행사를 끝낸 전두환이 취한 모습으로 동생의 부축을 받는 영상도 남아있다.현직 윤석열 대통령 또한 애주가의 면모를 드러내는 경우가 흔했다. 막걸리병 뚜껑을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보여졌고, 전통시장을 찾았을 땐 해산물을 가리키며 “이런 안주엔 소주 한잔이…”라며 웃기도 했다.다 좋다. 대통령이건 회사원이건 기호품으로서의 술을 즐기는 걸 누가 탓하랴. 다만 ‘유주무량 불급난’(唯酒無量 不及亂·마시는 양에 한정을 두지 않되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안 된다)이란 ‘논어’ 구절을 먼저 새겨야 할 터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6-19

거짓과 진심

장규열 고문 6·25가 다가온다. 74년 전 대한민국은 꺼져가는 등불이었다. 북의 기습남침 이틀 만에 대통령은 힘차게 방송하였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소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 용감무쌍한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 이겨 마침내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믿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거짓말이었다. 이를 듣고 안심했던 피난민들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필자의 선친 삼남매는 그렇게 서울에 갇혔다고 했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이미 서울 이남으로 피신한 후였던 데다, 한강 다리마저 폭격으로 끊어진 서울에서 시민들은 독 안의 쥐가 되었다. 서울 수복까지 지옥같았을 서울 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가.정치인들에게서 진심을 읽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그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나라와 국민을 마음으로 생각하는 정치가 보이는가. 술수와 정략으로 겨우 피하기만 하는 말싸움의 아수라가 아닌가. 그만하면 보일만도 한데, 국민이 만난 어려운 상황과 고단한 일상은 누구도 헤아리지 않는다. 물가가 뛰고 이자가 천정에 닿으며 환율이 고공행진을 해도 정치판은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판에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일이 무에 그리 급한지 알 길이 없다. 어려운 고개를 넘으며 하루하루를 사는 국민은 답답하다. 누구도 돕지 않는 막막한 날들을 2024년에도 만나고 있다니! 도대체 무엇으로 어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인지, 누구를 위하여 그들은 정치를 하고 있는지. 최소한 당신 자신의 영달을 위함이 아니었음은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때때로는 거꾸로 흐르는가. 국민을 말로만 주워담는 정치는 신물이 난다. 당신들이 ‘국민’을 들먹여도 눈치빠른 국민은 그 마음을 이미 읽는다. 공천과 당선에만 관심이 있으며 자신의 안위에만 전전긍긍한다는 걸. 아니라면 당신들 하는 일에 공감과 배려가 보여야 한다. 국민의 어깨가 한 치라도 가벼워져야 한다. 국민은 억장이 무너지는데, 이제는 사이다 발언에도 한숨만 나온다. 국회는 무엇 하는가. 한껏 기대하며 표를 모아 국회로 보냈더니 문도 다 못 열었다. 학생과 회사원에게 교실과 사무실이 제 자리이듯 국회의원에게는 국회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가. 수많은 나라의 법과 제도, 그리고 쉽지 않은 과제들에 지혜를 모아 만들고 풀어내라며 국민이 쉽지 않은 표심을 보태어 보내주지 않았는가. 경제가 어렵고 공동체에 병이 깊은데 나랏일은 뒷전이란 말인가. 논의든 투쟁이든 국회 안에서 실력과 기량을 발휘해 주시라.레이건(Ronald Reagan)은 ‘의회 의원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은 국민을 보호하는 일’이라 하였다. 그 국민이 어렵다. 어려움을 만난 국민을 돌아보아 주시라. 명분과 실리도 국민을 놓고 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국민을 위하는 명분 말고 당신에게 더 급한 명분은 없으며, 국민이 행복해지는 실리 외에 당신에게 다른 실리는 없어야 한다. 정치가 거짓을 지워야 한다. 정치가 진심을 세워야 한다.

2024-06-19

與 당권주자 ‘빅2’의 대결, 흥행요소 될 수 있다

국민의힘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7·23 전당대회’가 일단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과 나경원 의원 ‘빅2’의 대결로 시작되는 모양새다. 한 전 위원장은 후보 등록 직전인 23일 출마를 선언할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최고위원, 청년최고위원 러닝메이트를 조율하는 과정에 있다고 한다. 비대위시절 함께 한 장동혁·김예지·한지아 의원과 박정훈 의원 등이 러닝메이트로 거론된다. 보수 지지층에게 압도적 지지를 받는 한 전 위원장은 ‘어대한’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유리한 고지에 있다.한 전 위원장과 맞설 주자로 꼽히는 나경원 의원은 오늘(20일) 출마 선언을 할 예정이다. 친윤(윤석열)계에서 나 의원을 민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친윤계 의원들은 최근 나 의원을 포함해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과 윤상현 의원 등 3명을 지원 후보군으로 검토한 결과, 5선 중진인 나 의원을 지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나 의원은 자신이 친윤계로 비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만약 친윤계가 나 의원을 지원할 경우 최고위원 러닝메이트로는 신동욱·조지연·김민전 의원 등이 거론된다.현재 윤상현·김재섭 의원도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지만, 7·23 전당대회가 한동훈·나경원 ‘빅2’의 대결로 치러질 경우 흥행 측면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힘은 4·10 총선이 끝난 지 두 달이 넘었으나 아직까지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전당대회를 계기로 국민에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책임 있는 집권 여당의 자세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새 대표는 강력하고 혁신적인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서슴없이 3권분립을 무시하고 입법독재를 하는 거대 야당에 맞서려면 지금처럼 우유부단하게 집권당을 운영해선 안 된다. ‘여당 국회의원 전원사퇴’ 같은 사생결단식 카드도 꺼낼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용산 대통령실과는 평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목소리를 과감하게 낼 수 있는 강단도 가져야 한다.

2024-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