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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⑹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께 건국되었다. 1천년의 왕국을 유지한 신라의 출발은 사로국이다. 경주를 중심세력으로 한 사로국은 오늘날 포항지역의 근기국, 다벌국, 초팔국 및 울산의 굴이화촌 등을 병합해 고대국가로 발돋움했다. 소국들은 이과정에서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경북동해안에서 성장하던 소국들과 진한연맹에 속하였던 소국들이 복속되는 과정은 어땠을까. 쌍수 들어 환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는 이에 반발해 돌발적인 행동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도 아니면 망명길을 택해야 했다.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들 민족의 이동경로를 밝혀내는 것은 2천여년이 지난 이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또 다른 숙명이다.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 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서라벌의 여섯부락삼한(三韓)중 한반도 동남쪽에 있었던 진한(辰韓)에서 신라의 기반이 된 서라벌의 여섯 부락은 씨족 집단으로 육촌(六村) 또는 육부촌(六部村)이라고도 한다. 육부촌은 유리 이사금이 32년에 부(部)로 개편 하였다. 이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은 양부(梁部)라 하며 이씨(李氏),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은 사량부(沙梁部)라 하며 최씨(崔氏), 취산의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지촌(干珍村)은 본피부(本彼部)라 하고 정씨(鄭氏),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은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牟梁)이라 하며 손씨(孫氏),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 혹은 加里村)은 한기부(漢祇部)라 하며 배씨(裵氏),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은 습비부(習比部)라 하며 설씨(薛氏) 이다. 그러나 6촌이 곧 6부로 변천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대체로 부족사회의 6촌이 점차적으로 분화되어 단계적으로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변화되어 간 것 같다.신라의 건국과정에 대해서는 박혁거세에 얽힌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평범하게 풀이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원래 신라가 자리한 서라벌 지역에는 여섯 개의 촌이 있어 육부촌이라 불렸다. 각 촌에는 촌장이 있어 대소사를 관장하였고 6촌장들이 모인 화백회의가 있어 만장일치제로 6촌 전체의 문제를 결정하였다.기원전 69년의 화백회의에서 6촌에는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법도를 모르니 임금을 추대하고 도읍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와 이에 6촌장들이 산에 올라 서라벌 땅을 굽어보니 남산 기슭의 나정 우물가에 신비한 기운이 서려있어 모두 그곳으로 갔다. 우물가에는 흰말이 있었는데 6촌장들이 나타나자 말은 하늘로 오르고 우물가에는 큰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알에서 건장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뭇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었으며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6촌장들은 아이의 이름을 박혁거세라 칭하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은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고 스스로를 거서간으로 정했다.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후 어느 날, 샤량리의 알영 우물가에서 계룡이 나타나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여자아이는 얼굴이 아름답고 피부가 고왔지만, 입술에 닭의 부리가 달려있어 보기 흉했다. 사람들이 여자아이를 북쪽 시냇가로 데려가 씻기니 부리가 떨어지고 매우 고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아이가 자라 13세가 되자 왕후로 추대되었다. 아이의 이름 알영인것은. 사량리의 알영 우물가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는 같으며, 나라 사람들이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성인`이라고 부르며 크게 좋아하였다고 하였다.□신라를 탄생시킨 사로국이상을 종합해보면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중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한다.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연맹왕국으로 시작한 신라는 서기전 1세기부터 차츰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국 들을 정복하면서 진한 소국들을 통일해 나가기 시작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료들을 이용하여 이를 추정해보면 신라는 남동쪽 방향에 있는 소국들을 먼저 복속시켜 나가는데, 이는 내륙에 있는 강국과 대결을 피하는 동시에 주로 정복에 필요한 전략적인 자원의 조달을 위해서였다고 풀이 할 수있다. 탈해왕대에 우시산국(지금의 울산지역)을 정복하였는데 이 곳에 달천 철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탈해왕대에 지금의 동래까지 남하하여 거칠산국(동래지역)을 정복하였다. 이는 왜와의 직접 교역을 하는 동시에 낙동강 교통로의 통제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파사왕대 임관군에 의하여 굴아화촌이 정복되었는데 오늘날의 울산 지역이다. 여기의 중요성은 울산항을 장악하여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고 소금 공급 지역을 확보 하려는 전략이 숨에 있었던 것 같다. 또 탈해왕 20년에는 황산진 (현재의 양산)에서 낙동강 하류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가야와 치열한 전투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황산진이 전략적 가치는 경주와 지형적으로 장에물이 없는 곳이며, 남동으로 동래지역과 통하고, 남으로는 김해를 통하여 바다로 나갈수 있는 매우 큰 이점을 갖춘 포구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파사왕 시기에도 가야와의 전투기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가야와도 쟁패를 다투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이어서 파사 23년(102년)의 기록을 통해 볼 때에는 현재의 포항지역과 삼척지역이 포함되는 옥저에서 동예를 거쳐 가야까지 통하는 해상 교통로 분쟁당시, 무역의 주도권은 가락국이 잡고 있었는데, 사로국이 울산-동래 해안을 미리 확보하였기 때문에 가락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오히려 이 지역의 두 소국을 병합하여 포항에서 삼척까지의 동해안선을 얻게 되었다. 이 사실은 사로국 세력이 가락국의 세력을 뛰어 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마립간의 정복활동내물 마립간 (재위·356년~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로써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99년(내물왕 44년)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정하여진 것은 지증왕 4년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4년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고하여 지증왕대에 가서야 국호와 왕명이 정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동해안 소국들의 운명은한편 이러한 시기, 경북 동해안의 존재하였던 소국들의 운명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그들은 확장되는 신라 속에서 역사의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을까?울진군이 밝혀놓은 울진군의 역사에는 소국 시대, 울진에 있었던 진한12국 중의 하나인 `우중국(優中國`, 또는 `우유국(優由國)`은 진한 연맹체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였다.이후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사로국(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후 신라의 영역에 소속되어 오다가 고구려 장수왕 때 잠시(468~481)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이때 울진지역은 `우진야현`(于珍也縣), 또는 `고우이·어진(御珍)`, 평해지역은 `근을어현`(斤乙於縣)이라 불렀다. 울진봉평신라비(524)에는 `거벌모라, 남미지촌, 갈시조촌, 아대혜촌` 등의 지명이 보이며, 창녕진흥왕척경비(561)에는 `우추`(于抽)라 하였다.영덕군의 연혁에서 영해는 삼한(三韓)시대 진한의 소국인 우시국(于尸國)이라 칭하였고 고구려시대에 군(郡)으로 강등되었다가 신라 탈해왕(脫解王) 23년 (서기 79년)에 지방 관리(官吏) 거도(居道)가 반격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정유년(서기 757년)에 전국을 9주(州)로 나눌 때 주(州)로 개칭(改稱)하여 주장(州長)을 두면서는 유린군으로(有隣郡)으로 고쳐졌다고 하였다.포항시사에서는 사로국은 제5대 파사 이사금(A.D 80~112)에 이르면 경주 세력으로는 처음으로 기병(騎兵)을 사용하여 “다벌국(흥해로 추정)과 굴아화촌(울산)을 취하여 하곡현(河曲縣)과 하서현(河西懸)을 두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고 하여 신라가 안강·영일·울산등 경주의 동남편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 것은 2세기경 파사왕대의 일로 생각된다고 추정하였다.신라는 102년에 음즙벌국(안강)을 먼저 병합하였고 이어 굴아화촌(울산)을 공략했던 점을 감안하여, 2세기에 들어와 소국들이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영일만 유역의 소국들도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그리고 위에 나오는 소국들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 학계에서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병도씨가 다벌국을 대구(大丘)로 초팔국은 초계(草溪)로 본 것을 따르지 아니하고, 천관우(千寬宇)씨가 비지국을 안강(安康)으로, 다벌국을 흥해(興海)로 초팔국을 기계(杞溪)로 추정한 것을 따라, 이들 지역이 모두 경주에서 80리(里) 이내의 근거리에 자리 잡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파사왕대를 성장기로 보았을 때, 천관우씨의 설이 보다 더 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결국 사로국이 경주를 중심세력으로 하고 오늘날 포항지역의 근기국·다벌국·초팔국 및 울산의 굴아화촌 등을 병합하여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소국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09-14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⑸

이곳 경북 동해안이 부족국가를 일찍부터 형성했다는 실타래는 1966년 포항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출토된 銅印(동인:인장)에서 출발한다. 지난 66년 누군가가 이곳 흥곡리에서 10여개의 유리구슬과 함께 인장을 발굴했다. 인장을 발견한 이사람은 서울 골동품가게에 이 것을 판 것으로 알려졌다. 도굴이었는지 주웠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발견한 곳도 분명치 않다. 흥곡리 일대 산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당시 주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해 하기 힘든 대목이다. 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 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신광에서 출토된 인장의 숨은 비밀은?아무튼 이곳에서 발견된 것 만으로 사료적 가치는 충분하다. 일찍부터 이곳은 부족국가가 형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동인은 지난 71년 보물 560호로 지정됐다. 크기는 印面(인면) 2.3×2.8㎝, 高(고) 2.5㎝이다. 중국 晋代(진대)의 官印(인장)으로, 晋率善穢伯長(진솔선예백장)의 글이 새겨져 있다. 진나라가 주변국가의 지배자(제국장)에게 권력을 승인하는 징표로 준 인장이다. 쉽게 설명하면 부족장이었다는 얘기다. 줍지않고 무덤에서 발견했다면 부족장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인장외에도 더 많은 것이 묻혀 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무었이었을까.진대는 265년-420년대로 위촉오로 대별되던 삼국시대를 통일했다.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배경은 157년이다. 연오랑세오녀 신화는 진대가 부흥하기 100년전에 탄생된 것을 알수 있다.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배경이되는 포항 남구 동해를 비롯한 북구 신광 등에는 분명 어떤형태든 부족국가 있었다는 얘기다. 부족국가가 없었다면 1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권력을 잡은 진나라가 인장을 줬을리 만무하다. 부족국가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은 아닐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 일대 부족국가는 기원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곳 경북동해안에는 오래된 문명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그럼 이곳에 둥지를 튼 족속은 누구였을까. 신라와는 분명차별된다. 지금으로서는 동예인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동예는 이후 고구려 등의 침입으로 종족의 존재는 소멸되어갔지만. 예족의 삶의 자취들은 2천여년 동안 지워지지 않고 그들의 이주 지역이었던 동해안의 곳곳에 진하게 남아있다. 예족은 지금의 원산·안변 일대에서부터 경상북도 영덕(넓게는 포항까지 포함)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과 강원도 북부지방에 거주했던 고대 종족이었다.□동예는 고구려와 같은 족속(?)예족의 활동에 대하여 우리가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있는 나라는 동예이다. 동예(東濊)는 기원전 3세기 이전~3세기경에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초기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시대는 철기 시대였다. 예(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동예`라고 부르고 있다.동예가 있었던 위치는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전반 무렵 동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옥저(沃沮)와 접하고,남쪽으로 진한(辰韓)에 이어지며 서쪽으로는낙랑군(浪郡)과 접했다고 전하여 `조선의 땅`이라고 기술하였으니 오늘날의 동해안이다. 지금의 원산 부근인 안변(安邊)지방을 중심으로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 계열의 부족 사회로서, 옥저와 마찬가지로 나중에 한(後漢) 말에 고구려에 복속했다.동예의 사회모습은 인구는 2만여 호(戶)에 혼인·장례 등의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했으며, 의복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동예인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원산 부근인 안변(安邊)지방을 중심으로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 계열의 부족 사회로서,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의 군현으로 있다가 후한(後漢) 말에 고구려에 복속했다.동예의 문화는공열(孔列)토기로 대표되는 무문토기문화이다. 주민은 옥저·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며 언어·풍속도 거의 같았다. 중기 이후로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삼국지》위지(魏志)에 따르면, 호수(戶數)는 2만 정도이나 군주가 없었으며, 옥저의 삼로(三老)와 같이 중국 민족이 온 이래 후(侯)·읍장(邑長)·삼로(三老)의 관명을 사용하며 서민을 다스렸다.□긴 창 사용, 보병전에 능해특산물로는 단궁(檀弓), 문표(文豹), 나무 밑을 지나 갈 수 있는 키 3척의 말인 과하마(果下馬), 바다 표범의 가죽으로 알여진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삼베 등이 있었다.`삼국지` 동이전에서 전하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 동예의 사회상을 보면, 산과 내(川)를 경계로 하여 구역이 나뉘어 있어 함부로 다른 읍락의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다. 이를 어겼을 경우 곧 벌책을 가해 생구(生口), 즉 노예나 소, 말 등으로 보상하게 했는데, 이를 일컬어 `책화(責禍)`라 하였다.또 같은 성(姓)끼리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꺼리는 것이 많아 가족 중 한 사람이 질병으로 사망하면 곧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옮겨갔다. 또 호랑이를 섬겨 신으로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성이란 곧 씨족을 뜻하는 것으로, 족외혼(族外婚: exogamy)의 풍속을 말한다. 살인자는 죽였고, 도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주옥(珠玉)을 보물로 여기지 않았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밤낮으로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겼는데, 이 축제를 `무천(舞天)`이라 하였다. 동예인들은 긴 창을 만들어 사용했으므로 보병전에 능하였다.다른 읍락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은, 곧 읍락 내의 사람이 그의 경작지를 다른 읍락인에게 양도하려고 할 때는 자신이 속한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공유지의 존재와 경작지에 대한 읍락의 관할권은 읍락 전체의 공동체적 결속의 물질적인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족외혼의 풍속에 따른 혈족간의 유대와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는 등의 신앙 및 무천과 같은 공동의 축제와 의식(儀式)은 공동체적 유대를 강하게 지탱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예의 읍락에는 노예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사회분화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병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곧 살던 집을 버린다는 것은 터부(taboo)에 따른 것이지만, 아울러 당시 동예인들의 집이 매우 소박한 것이었으며, 부(富)의 축적도 별로 많지 않았음을 말해준다.동예의 호신신앙은 읍락 단위의 정기적인 제의로 시행되면서 읍락 내에 산재해 있던 공동체 구성원의 결속력을 강화하였는데, 집단적인 가무행위(歌舞行爲)는 제의과정의 한 부분으로 제의에 참여한 읍락민의 일체감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한족의 침략 남하는 시작되고동예지역은 처음 위만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 군현이 설치되자 동예의 북부지역이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는 동예인 들이 오늘날 경북 동해안 지역으로 남하 이주하는 일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대체로 2세기 후반 동예의 읍락들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의 동예지역 읍락에 대한 지배는 옥저의 그것과 동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읍락 내의 일은 족장으로 하여금 자치적으로 영위하게 하고, 족장을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동예는 2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는데, 245년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등이 동예를 공략하였다. 이 때 동예의 주요 읍락들이 위나라군에 유린되거나 투항하였다. 고구려가 위나라군에 수도가 함락되는 등의 패배를 당해 세력이 위축되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 아래 귀속되었다. 그 뒤 진(晉)나라의 쇠퇴와 함께 고구려가 낙랑군을 병합함에 따라 동예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의 동예는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 밖에 있었는데, 광개토왕(廣開土王, 392~412)대에 정벌전이 감행되어 많은 촌락이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당시 고구려가 정복했던 일부 동예지역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강원도 남부 이남 동해안의 동예 촌락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광개토대왕릉 비문에서 보듯 예(濊)는 5세기 전반까지도 다른 종족과 구분되는 하나의 종족단위로서 존재하였다. 그 뒤 고구려와 신라가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등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영역 내의 지역간 교류가 증진되는 등의 정세진전에 따라 동예인은 고구려나 신라의 지방민으로 편제되어 점차 융합되었다. 그러나 종족의 존재는 소멸되어갔지만. 예족의 삶의 자취들은 2천여년 동안 지워지지 않고 그들의 이주 지역이었던 동해안의 곳곳에 진하게 남아있는 것이다.□영덕 영해 칠보산은 동예의 영역동해안의 명산 백두대간의 원줄기 마지막 끝자락에 칠보산이 있는 곳 영해(寧海)는 예(濊)의 영역 일부 였다. 예족이 고구려에 정복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탈해왕23년(서기79년) 지방관리였던 거도(居道)가 군마의 마숙(馬叔) 놀이를 하다가 불시에 쳐서 신라의 영토로 만들어 복속케 하였다. 본래 우시국(于尸國)이란 이름으로 작은 소국가를 이루었는데 지금의 병곡면 병곡동 성곽이 있는 유지가 바로 그 자리라고 한다.포항시 신광면 흥곡리( 출토 당시는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에서 출토된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 이 새겨진 동인(銅印)은 전면에 푸른 녹이 두껍게 덮여 있으며, 인장면(印章面) 외곽에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방형의 인장면 위로는 네 발이 표현되어 마치 원숭이의 모습과 같은 동물형태의 손잡이로 구성되었다.손잡이의 세부형태를 살펴보면, 꼿꼿이 세운 얼굴에는 두 눈이 움푹 패었고, 입은 조금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인장면을 밟고 있는 네 발 가운데, 앞발은 조금 움추린 듯 표현되었고, 이 앞발과 뒷발 사이의 허리 아래로는 공간을 두었다.그리고 인장의 바닥면 `晋率善濊伯長`이라는 명문이 새겨져있어 이 도장이 중국 진대에 사용된 관인으로 추정된다. 이 도장들은 중국 한대(漢代) 이래 이웃 나라의 제국장(諸國長)에게 수여되었던 관인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1971년 12월 21일 보물 제560호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이 동인이 가지는 외형적인 특징보다는 출토지를 통해서 조명되는 역사적 더 큰 의미는 예족의 분포 지역이다. 그 후예들이 경북 동해안 까지 광범위 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09-07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⑷

경북동해안에 소국의 부족국가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일단 연오랑세오녀의 신화에서 출발한다. 경북동해안 포항에서는 곳곳에서 청동기 시대 유물이 발견된다. 규모를 이룬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북 동해안에는 고인돌 왕국이었던 청동기시대에 이미 군장들이 중심이되는 지배계급이 출현해 많은 유적들을 남기면서 소국들이 형성 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러 이지역 에서도 소국이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國家)가 발전해가는 차례가 먼저 소국들이 모여 연맹체를 이루고 나아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나아가는 성장 과정을 거친다. 지금까지 밝혀 놓은 학계의 생각이다. 즉 소국이란 국가 성립의 첫 단계라 보면된다. 이 소국들이 이루어진 지역에서 점차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주변 일대를 지배하였다. 이어서 철기가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면서, 철제 농기구와 무기의 보급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어 경제 기반이 확대되었고, 정복 전쟁도 활발해져 갔다. 이에 따라 부족간의 교역이 확대 되었고, 부족 사회의 통합도 촉진되었다. 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진한의 12소국여기서 정말로 경북 동해안에는 정말로 소국이 존재했을까.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진한의 12소국의 명칭이 나오는데, 12소국은 기저국·불사국·근기국·난미리동국·염해국·군미국·여담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사로국·우유국이라 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명칭과 현재 울진, 영덕, 포항의 연혁에 이와 같은 소국이 이름들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경북 동해안에서 소국으로 등장하는 울진의 우중국〔優中國, 또는 우유국(優由國)〕, 영덕 영해에 우시국(于尸國), 포항에 근기국(勤耆國) 등은 삼한(三韓)중 진한(辰韓) 연맹체의 구성원인 12소국의 일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삼한 중 가장 세력이 컸던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에 이르렀다. 그중에서 가장 큰 세력은 목지국이었으며, 목지국의 지배자는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주도하였다. 변한은 낙동강 하류의 김해ㆍ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ㆍ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4~5만 호에 이르렀다. 변한과 진한을 합치면 24국이고, 큰 나라는 4천~5천가, 작은 나라는 600~700가로 총 4~5만 호이다. 경북 동해안의 소국들의 생활상을 모두 살펴 볼 수 없는 자료이기는 하나 이것을 바탕으로 울진, 영덕, 포항에 있었던 소국들의 실상은 어땠을까.□동해안 소국 실상은 경북 동해안에서는 삼한 시대에 나타났던 그지역의 소국 성립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울진군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 한 것은 선사시대부터 였다. 북면 주인리 석수동에서 구석기시대의 석기들이 출토되어 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죽변리 유적과 후포리 유적 등 신석기시대와 봉산리 주거지와 다수의 고인돌 유적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소국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초기국가(읍락국가)시대에는 울진지역에 진한12국 중의 하나인 `우중국〔優中國, 또는 우유국(優由國)〕`이라는 소국이 형성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소국 성립의 실체를 살펴보기 위한 방법을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경상도 지역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서부터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다량의 철기를 부장하는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 유적들이 급격하게 많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점은 새로운 정치권력이 형성되어 계층분화가 이루어진 현상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덕은 원래 영덕(盈德), 영해(寧海) 양군이었던 것을 서기 1914년에 합병(合倂)하여 오늘에 이고 영해는 현(現) 영해, 축산, 병곡, 창수 4개면으로 삼한(三韓)시대에는 우시국(于尸國)이라 칭하였고 고구려시대에 군(郡)으로 강등되었다가 신라 탈해왕(脫解王) 23년 (서기 79년)에 지방 관리(官吏) 거도(居道)가 반격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여기서 소국 우시국의 명칭이 나타났는데 위서 동이전에는 표현되지 않았다.포항 시사에는 근기국은 오늘날 포항시 인덕동·호동·오천읍·대송면·동해면 및 인근지역에 형성된 읍·락들을 지배하면서 소국(小國)을 이루어 이 지방의 중심세력으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근기국 치소의 중심지는 물이 나는 계곡을 둔 높은 구릉에 축조된 고현성터(古懸珹)가 있는 고현마을(지금의 원동)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문헌상으로 영일읍지(迎日邑誌)에 근거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호동 마을 유적을 들 수 있으며, 이 유적은 높은구릉 정상부에 위치하여 거주와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고지성 마을 유적이다. 주위보다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은 위치상, 소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외에도 흥해읍 남·북미질부성과 옥성리 고분군, 청하면 덕천리 유적 등에서 당시의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이 확인된다.□근기국의 실체는근기국은 신라의 건국(B.C 57) 이전인 기원전 2세기 초에서 1세기 말경, 영일만 일대에 소국을 형성하고 군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인근에는 흥해 지역의 다벌국(多伐國, 흥해로 추정), 기계 지역의 초팔국(草八國, 기계로 추정) 등 ≪삼국지 위지≫에 진한 12국으로 표현되지 않은 소국들도 있었다고 소개하였다. 소국들이 성립된 것은 시간적 문화적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변화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국읍(國邑)에는 주사(主師)가 있으나 읍락(邑落)들이 잡거(雜居)하여 서로 잘 제어하지 못한다”고 하여 삼한의 각국은 국읍과 다수의 읍락별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국(國)은 “지배적인 읍(邑)”을 뜻하므로 국읍이란 다수의 읍락들 중에서도 중심적 기능을 발휘하는 대읍락으로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삼한의 각 국은 대·소의 읍락들로 구성된 정치집단이라 하겠다. 읍락은 소국 형성 이전부터 각지에 성립되어 있었던 개별적인 정치집단들로 서라벌 6촌 설화들을 통해 볼 때, 이들은 청동기 문화 단계의 족적(族籍)결합과 정치활동에 바탕을 둔 집단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삼한에서 각 소국이 성립된 것은 이러한 소규모 집단들이 철기문화가 확산되고 유·이민이 이동해 오면서 일어나는 정치·문화적 변화에 대응하여 지연(地緣)에 바탕을 둔 보다 확대된 정치집단으로 총합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근기국도 이런 발전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근기국의 구성단위는 읍락들이었다. 이들의 상하관계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주민이 거주하는 취락집단을 국읍(國邑)·읍락(邑落)·소별읍(小別邑) 등으로 구별한 것에서어느 정도 들어난다. 국읍이란 소국의 중심이 되는 읍락을 뜻하며 규모가 크거나 일반 읍락과 구별되는 기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근기국이란 여러 읍락들을 통합하고 조정할 수 있는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큰 규모의 읍락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소국인 것이다. 진한 지역에서는 동이전에 기록된 12국 이외에도 소규모의 독립적인 정치집단이 많이 있었다. 국읍과 소별읍 등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해도 사회적 구성이나 조직 원리면에서는 일반 읍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읍락은 대규모 주민 거주지인 읍(邑)과 촌락의 뜻인 락(落)의 복합어라는 해석도 할 수 있고, 단순히 일반 취락을 뜻하는 경우도 있으나 단순한 일반 촌락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근기국의 근거지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포항시 남구 오천읍 원동에 있는 고현성이라는 성터가 남아있어, 당시 근기국 통치의 근거지(국읍)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고현성 유적을 실측한 결과 흙으로 성벽을 쌓은 토성의 높이는 2m~1.5m, 성내에서는 우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근기국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주의 사로국, 추정을 하고 있는 다벌국(흥해), 초팔국(기계) 등과 육로.수로를 이용하여 교류 하였을 것이다.□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08-31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⑶

경북 동해안에는 고인돌이 많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이루어진 중요한 유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청동기 시대의 실상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이미지를 중단 없이 발신하고 있다. 이 의미 있는 신호들이 잦아들기 전에 바른 해석을 해두어야 하는 것, 그것은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화적 책무이다.고인돌을 말뜻대로 풀이 한다면 굄돌로 고여 놓은 돌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거대한 바위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支石)·묘역 시설·무덤방(墓室) 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외형에 의해 크게 북방식·기반식·개석식·위석식 등 4종류로 분류하고 있다.거대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들이 누렸던 권력과 부의 크기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군장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여 권위를 세웠고, 천손 사상을 내세워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였다. 이에 사회 규모는 더욱 커졌고, 국가도 출현하였다. 고조선은 이 시기에 출현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였다.이렇게 중요한 사실들을 알아볼 수 있는 고인돌들이 경북 동해안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낸 것은 왜일까.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미동도 없이 버텨내고 있는 까닭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 하는 걸까.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2)경북동해안과 고인돌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울진은울진 지역에서 나타나는 청동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바다와 가까운 해안가에 있다. 특히 주거지는 낮은 구릉상에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영동 지역과 거의 유사하다. 또 고인돌도 일부는 기반식이나, 대부분은 개석식으로 영동 지역과 남쪽 해안 지역인 영덕과 포항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과 서로 통하고 있다.경북 동해안의 북쪽 끝 울진읍 북면에서 포항시 장기면 계원리 해안의 남쪽 끝까지 경북 동해안의 중요 고인돌들을 따라 가보자. 울진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들은 발굴 조사되지는 않았다. 현재까지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70여 기의 고인돌 가운데 북방식과 위석식은 보이지 않는다. 기반식과 개석식만이 확인되었다. 울진군 북면 나곡 부구 1리 부구2리 신화1리 고목3리에 27기, 죽변면 화성리 봉평리에 2기가 있다. 울진읍의 호월2리 명도1리 읍남4리에 6기가 있다. 근남면 수산리 4지역 수곡2리 구산2리 진복 1리에 28기, 원남면 덕신 1리 2기, 기성면 삼산1리 척산3리 정명 2리에 11기가 있다.□영덕은영덕의 고인돌은 발견되어 보고된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 영덕군의 해안은 울진 보다는 훨신 넓은 평야를 끼고 있고 구릉성 산지와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강과 천 들이 있어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이 많이 축조 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영덕의 고인돌로서 지금까지 조사된 대표적 고인돌은 남산리 고인돌 등이다. 이 고인돌은 영덕읍 남산리의 농공단지 진입로 왼쪽에 놓여 있다. 고인돌은 농공단지 조성을 위하여 발굴조사를 시행하였는데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병곡면에 있는 금곡리 고인돌은 금곡리의 논 가운데에 1기가 있다. 덮개돌 윗면에서 9개의 성혈(性穴)이 관찰되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지름 9㎝·깊이 4㎝에 이른다. 주변에 있는 묘(墓)의 축대에 쓰인 돌들도 원래 고인돌의 덮개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병곡면 영리에 있는 3기의 고인돌도 덮개돌의 평면 형태는 모두 장방형이다. 영덕면 해안에서 남쪽으로 더내려오면 포항시의 해안이다.□포항은포항에는 해안쪽으로 형성된 구릉성 산지가 많고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역으로 마을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 많아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가 많이 발굴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고인돌 군이 존재하고 있다.지금까지 포항에서 조사된 고인돌은 전 행정구역 내에서 `108` 군집 총 `432`기의 고인돌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 통계와 아직도 남아 있는 고인돌 수를 보면 가히 고인돌 왕국이라 할 만 하다.이 중에서 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고인돌 군집들을 살펴보면 북구지역에서는 송라면 지경 화진 방석리에 12기 , 청하면 월포 용두 고현 미남 소동리에 19기, 흥해읍 용곡 양백 용천 금장 흥안 남송 칠포 용한 초곡 성곡리 113기, 남구 연일읍의 달전 학전 자명 중명 우뵥리에 27기, 대송면 장동 대각리에 2기, 오천읍 세계리 2기, 동해면 도구 신정 금광 공당 흥환 발산리에 38기, 대보면 대보 강사리에 11기, 구룡포읍 성동 하정리에 14기, 장기면 학계 서촌리에 12기가 있다.□정치권력집단 존재 의미이러한 현상은 경북 동해안 지역이 일찍부터 고인돌 유적을 남길 수 있는 정치권력 집단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집단의 활약은 국가 발생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 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남긴 유적 중에서 고인돌이 표지적인 유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이곳은 그러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정치적 변동이나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일어나는 변동에 따라 유·이민들이 동해안 루터를 타고 내려와 한반도의 남부지역으로 이주하여 선주민들과 더불어 여러 소국을 형성 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사회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이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북 동해안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인돌 유적은 이 지역에 형성되었던 소국의 실체를 알아 볼 수 있는 표지적 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경북 동해안의 고인돌은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지금까지 보내고 있는 신호에 대한 해명이 분명히 이루어 질 것이다. 경북 동해안의 고인돌에서는 어느 고인돌 유적에서 나왔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유물들이 다수 수습되었다. 발굴을 통하여 출토된 유물은 그 수가 적다. 수습된 유물들은 무기류로 석검과 한국식 동검, 토기류로 붉은간토기 조각과 무늬 없는 토기조각들을 볼 수 있다. 농경용으로 돌도끼, 홈자귀, 수확용인 돌낫, 반달돌칼 등이 출토되고 있다. 돌도끼, 홈자귀 등의 공구류와 고기잡이에 쓰던 그물추, 실을 뽑는 기구인 가락바퀴 등이 나오고 있다. 이 외에도 석기제작과 재가공에 쓰던 숫돌, 곡물을 가공할 때 사용하였던 갈판과 갈돌 등의 생활용구 등이 있다.청동기시대 경북 동해안의 고인돌 사회는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혈연을 중심으로 한 유력자가 출현하여 지배집단을 형성하고 수장들이 등장하였다.고인돌의 축조에 있어서는 거대한 바위를 채석하고 운반하여야 한다.□영역의 점유표시이 과정에서 수십 t에 이르는 거석을 채석해서 운반하는데,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정착생활이 필수적이며 여기에는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농경생활을 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고인돌 축조는 농경 정착생활 속의 공동체의 집단 의례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에는 안정적인 생계지원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농경지 확보에는 공동체 간의 영역 설정이 필요하였고 갈등이 심화되어 갔을 것이다. 이 영역의 점유표시로서 조상의 무덤을 고인돌로 축조하였을 것이다. 경북 동해안의 고인돌이 지역별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고인돌의 축조와 관련하여 덮개돌의 채석에서 돌을 다룰 줄 아는 전문장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 중에서도 청동검과 간돌검은 지배계층 무덤의 부장 품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가진 숙련된 전문인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간돌검은 일정한 석질을 사용하고 있어 석재의 구입과 능숙한 제작 기술자가 필요하고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제도하여야 하는 것이다.이처럼 고인돌 축조에는 다양한 기능을 지닌 전문 집단이 있었을 것이고 집단 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이에 상응하는 전문적인 항해술도 갖추었을 것으로 미뤄 짐작 할 수 있다.□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08-24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⑵

경북 동해안 지방에서 꽃피었던 철기문화를 알려면 먼저 한국의 철기시대에 대해 기본적인 요소들을 알 필요가 있다. 철기시대의 사전전 풀이는 인류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물질문화 발전 단계에서 연모를 철기로 만들어 썼던 시기로 거침없는 문화의 발전이 이어진다. 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우리는 오랫동안 북쪽지방의 철기시대 유적에서 명도전(明刀錢)이 나온 것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철기문화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했다. 명도전이라는 유물이 중국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연(燕)나라에서 만든 금속화폐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철기시대 유적들에서 위연, 강계, 덕천 등의 유적에서 명도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철기술을 갖고 있던 연나라로부터 우리나라에 철기문화가 들어온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그 시기는 기원전 3세기 무렵이라 추정된다.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는 명도전의 출토지가 랴오둥(遼東)반도에서 시작해 압록강 중류를 거쳐 청천강 유역에까지 이른점을 감안하면 연나라와의 교역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도 한다.실체적 증거를 찾는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중국제철기술과 다른 자체기술이들 유적을 초기 철기시대로 본 것은 그곳에서 나온 철기들이 자체 생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제품을 들여와 쓴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철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철기유물들의 성분을 분석해본 결과 중국의 제철기술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체 생산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기원전 5세기부터 철기시대로 들어서기는 했으나 생산도구의 일부만을 철기가 대신했을 뿐 앞선 시기의 청동기들과 함께 석기도 여전히 쓰이고 있었다. 이른바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 시기이다. 철낫· 철보습· 철반달칼· 철괭이 등 농업 생산도구들이 철로 바뀌었으나 의례와 신분을 상징하는 비실용성 도구들은 아직도 청동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청동기들은 세형 동검(細形銅劍)·잔줄무늬거울·청동방울(八珠鈴) 등이 있고 꺽창(銅戈)과 같은 무기에도 청동으로 만든 것이 있다.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철제 농기구가 사용됨으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기반이 확대되었다. 이시기의 사람들은 농업을 더욱 발전시켜 조·기장·수수 등의 밭농사와 벼농사를 행하였다. 집의 형태는 대게 장방형 움집인데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서 온돌 구조가 나타나며 농경의 발달과 인구 증가로 정착 생활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철제무기와 철제연모를 씀에 따라 그 때 까지 사용해 오던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 변하여 갔다.□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이 시기에 이르러 청동기 문화도 더욱 발달하여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동기 시대 후반이후, 비파형 동검은 한국식 동검인 세형동검으로, 거친 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그리고 청동 제품을 제작틀인 거푸집도 전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토기도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 이외에 붉은 간토기, 검은 간토기 등이 나타나고 있다.청동기 철기 시대에는 이전부터 주요한 생산도구로 사용되면 간석기가 매우 다양해지고 기능도 개선되어 생산 경제도 좀더 발달했다.이 시기의 사람들은 돌토기나 홈자귀, 괭이, 그리고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 시켰다. 농업은 조·보리·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사냥이나 고기잡이도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농경의 발달로 점차 그 비중이 줄어 들었고, 돼지,소,말 등 가축의 사육은 이전보다 늘어났다.집터 유적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된다. 대체로 앞쪽에서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북서풍을 막아 주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는 곳에 우물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취락 여건으로, 오늘날 농촌의 자연 취락과 비슷한 모습이다. 집터의 형태는 대체로 직사각형이며, 움집을 점차 지상가옥으로 바꿔 갔다. 움집중앙에 있던 화덕은 한쪽 벽으로 옮겨지고, 저장 구덩도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창고와 같은 독립된 저장 시설을 집 밖에 따로 만들기도 하였고, 움집을 세우는 데에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사회와 경제의 발달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시기의 예술을 종파나 정치적 요구와 밀착돼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사용했던 칼,거울,방패 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그림 등에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기시대는 생산력이 일정한 정도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이미 고대국가단계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북쪽에서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인 위만조선이 등장하며 남쪽에서는 삼한의 소국들이 일어나는 단계가 된다. 따라서 철기시대는 이미 역사시대로 들어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본격적인 철기시대고조선이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건국을 한 후 역사무대에 등장하면서 여러차례의 정치적 변동을 거쳐 위만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이미 철기를 사용하는 철기시대로 들어 갔으며, 고조선이 망한 후 우리 민족들은 중국 세력들을 물리치면서 부족으로부터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남쪽에는 삼한(三韓)의 새로운 국가들이 건국되었다.이 중 경북 동해안과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는 새로운 나라들은 위쪽의 옥저와 동예(東濊), 삼한 중 진한(辰韓)이다. 그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 직접 문물 교류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보는 나라들은 동예와 진한의 소국들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존재하였던 경북 동해안의 소국 명칭들은 울진, 영덕, 포항지역의 연혁에 자신들의 존재를 뚜렷이 내보이고 있다.이번 취재 지역의 역사적인 환경은 무엇보다도 소국들을 병합하고 새로운 큰나라가되는 신라(新羅)와 가까운 지리적 입지 때문에 신라의 성장과정, 즉 사로국(斯盧國·新羅) 팽창의 한 루트인 동해안 진출과 관련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역사적인 환경은 시기적으로 신라의 동해안 진출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 볼 수가 있다.신라의 동해안 진출 이전 이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은 먼저 이들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적을 통하여 성격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신라의 진출 이후의 시기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현존하는 사료들이 그 중심이다. 경북동해안에 철기시대가 꽃피었다는 증거들이다. 고인돌문화에서부터 철기시대가 만개하기까지 그 실체는 무엇일까.□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08-17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프롤로그지난달 말 포항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펼쳐졌다.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주민들이 배를 타고 창해를 건너 한반도 동쪽 끝 연오랑세오녀의 도시 포항을 찾았다. 포항은 크게 환영했고 답방으로 감사인사를 대신했다.경북 동해안과 일본 서해는 2세기 무렵 이미 항로가 개설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뱃길을 여는데 무려 2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땅은 한반도 동쪽 포항과 일본의 이즈모시이지만 어쩌면 이곳 마이즈루와도 2천년 전에는 또다른 왕래가 있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2천년전 당시 경북 동해안의 철기문화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전파됐던 것으로 신화에서는 전하고 있다. 창해를 넘나드는 해양인의 도전과 개척 DNA(유전자)가 마이즈루 항로의 개설을 가능케 만들었다는 가설은 그래서 가능하다.동해를 중심으로 한 경북인의 개척정신, 그것이 경북의 혼(정체성)이다.그 정신이 동해안의 부족국가를 세웠고 이곳에서 철기문화를 꽃 피웠다. 무역항로를 개척하고 일본에 문명을 전달했다.본지는 본지 기자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특별취재팀을 통해 경북 동해안의 혼(정체성)을 찾아 그 정체의 일단을 밝히려 한다.□글싣는 순서 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2부=무역항로 개척의 시대11)운명의 선택-기술이냐 생명이냐12)도전의 시대 무역항로는 열리고13)창해를 넘는 선박건조의 비밀-114)창해를 넘는 선박건조의 비밀-215)잊혀진 옛 항로- 116)잊혀진 옛 항로- 217)해양무역시대를 잉태하다3부=연오랑세오녀 일본 왕이되다18)연오랑세오녀는 누구였나19)바다를 정복한 민족20)신들의 고장 이즈모에서 왕이되다21)그들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22)이즈모에 남아 있는 역사유적23)연오랑세오녀 신화는 잠들고24)에필로그=경북혼이 살아 숨쉬는 동해안연오랑세오녀의 신화가 등장하는 157년. 당시 포항을 중심으로 한 경북 동해안은 삼한 가운데 하나인 진한지역의 일부였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신라의 전신에 해당하는 사로국은 진한지역의 작은 부족국가였다. 소국이었던 사로국은 인근 부족국가를 병합하면서 통일신라로서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그러나 최근 들면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동예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나아가 이곳 포항 등 경북동해안 지역은 이전부터 철기문화를 중심으로 강력한 해양부족국가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연오랑세오녀의 신화 탄생인 것이다.`연오랑 세오녀`는 어떤 사정이 있어 일본으로 갔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주는 첫째 단추는 `아달라왕 즉위 4년`에서 출발한다. 아달라왕 즉위 4년은 AD 157년이다.당시 한반도 남쪽은 격동의 시기였다. 한반도 남쪽에는 진(辰)사회 이후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 연맹체가 있고, 그 속에 각각의 소국들이 제 영역을 차지하다 삼국의 모체가 된 소국들이 다른 소국들을 통합해 강한 왕권과 큰 영역을 가진 백제, 가야, 신라의 삼국으로 재편됐다. 당시 진(辰) 사회에서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선진 철기 문명을 가진 이민족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보급된다. 이들은 토착민이 가진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삼한 사회의 생활이 곧 소국들의 생활모습이다.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天君)이 있어 제정(祭政)이 분리된 사회였다.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邑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했다. 초가지붕의 반 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면서 공동작업을 위해 두레 조직이 있었으며, 씨를 뿌리고 난 뒤와 추수기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특히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고 벼농사를 지었다.그렇다면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을까.철기생산은 대단한 자부심이었고 권력의 상징이었다. 이곳 영일만 등 동해안에는 고래가 풍부했다. 고래기름이 흔했다는 얘기다. 기름은 나무를 때면서 생산해내던 일반적인 당시 철기생산 방식을 뛰어넘었다. 철재질의 구조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철은 높은 온도에서 최고의 품질이 생산된다. 나무에 기름을 재워 고열로 만들어진 철은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그런 부족이 동해안에는 일찍부터 존재했고 이들이 이를 무기로 해외무역에서 나섰다는 것은 경북의 도전정신을 보여주는 단초다. 신라정신과 대별되는 해양문화를 잉태한 또 다른 해양부족국가의 존재 개연성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이곳에서는 일찍부터 일본 등 인접국과 무역교역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역항로가 있었다는 의미다.연오랑세오녀의 신화속에 등장하는 사료만으로도 그 정도는 가늠이 된다. 지금도 호화유람선을 타고 일본의 서해까지 20시간정도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그 당시의 선박기술과 항해수준에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당시의 항로 개척정신이 장보고를 잉태했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조선강국으로 만들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당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도전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무역강국으로 자리잡게 했을 것이라는 유추도 가능한 것이다.이를 풀어가는 것 역시 연오랑 세오녀다. 세오녀 신화는 어떻게 탄생됐을까. 연오랑 세오녀는 어떻게 일본을 건너갔을까. 이들은 일본에서 과연 무엇일까. 신화처럼 과연 이들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을까.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4년(157년)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왕국 건설의 주역이 됐다고 기록돼 있다.또 일본 이즈모시의 쓰사노 오노미코토 전설에도 신라인이 흙으로 된 배를 타고 이즈모시 하이강에 도착해 제철, 직조, 농사기술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연오랑 세오녀는 신화속의 인물이다. 바다를 건너 일본에 첫 문명을 일구어낸 한민족의 이야기다. 포항인 최초의 신지식인이자 개척정신의 상징이다.바위를 타고 갔다고 하지만 아마도 배였을 가능성이 높다. 2세기 당시에는 선박건조 기술과 항해술 등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신화를 해석해 보면 당시 연오랑 세오녀는 이미 일본의 이즈모시를 몇 차례 방문했고 이즈모시에서도 동해안을 종종 찾은 것으로 유추해석할 수 있다.이러한 시기 소국병합이라는 대 소용돌이는 동해안의 근기국에도 닥쳐왔고, `근기국 도기야`에 살고 있었던 연오랑 세오녀 부부는 일본으로 이주해 간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 선진 철기문명을 전파한 것이 아닐까?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이미 서기 전 3~2세기에 고대 한국인들은 일본 서부로 이주하여 농경민으로 정착하였다는 주장도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일본 원주민들에게 철제 기구의 사용과 논농사를 포함한 새로운 농업 기술을 선보이면서 한곳에 모여 살았는데 이는 곧 자치현(自治縣) 내지는 왕국(王國)의 규모로 발전하였다고 한다.이후 서기 2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서도 한반도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가 입지를 굳히며 점점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 가는 동안 일본에는 수많은 고대 한국인들이 건너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건너간 이후에도 본국인 한반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과연 선박건조 기술과 항해술이 변변치 못했던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해보면 가능한 일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목숨을 건 해양인의 도전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경북 동해안의 살아 있는 또 다른 혼은 무역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검푸른 파도와 싸워온 해양인의 기질, 바로 그 창해를 넘나드는 도전정신이다./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