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25)

본지가 기획한 `경북의 혼(魂)`특집 연재가 지난 8월 10일 첫회를 시작으로 2012년 세모의 길목에 선 이제 끝을 맺는다. 사계의 전문가와 본지 기자들로 구성된 특별취재팀은 지난 4개월 동안 회당 20여매씩, 25회에 걸쳐 모두 500여매의 원고를 채우는 노정을 계속 해왔다. 그 과정은 글쓰기의 물리적 어려움 보다는 의욕만 앞선 나머지 수천년 역사 속에 민초들의 땀과 피가 아로새겨진 경북동해안의 정체성을 오히려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한 시도 떠나지 않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생선 배나 따 먹는 갯가`쯤으로 비춰져온 경북동해안의 정체성에 새로운 모색과 발견의 숨을 불어넣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있는 취재였다. 물론 그 성과는 동해안은 물론 대구경북을 비롯한 영남, 그리고 오늘도 분단의 능선을 울며 불며 오르고 있는 한반도 모든 지역의 정체성들과 함께 교류할 것이며 담대하게 공유될 것임을 확신한다. 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1)프롤로그2)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3)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4)경북 동해안의 소국5)동예인들의 후예6)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7)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8)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9)고래의 고장 영일만10)철기문화의 맹아, 포스코 신화 낳다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12)연오랑세오녀, 태양신화와 문화자긍의 상징13)항해와 조선의 脈은 이어져…14)비단의 길은 서라벌에 닿아15)신라의 달빛, 아시아에 비치다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동학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4부=역동적 삶의 터전, 경북동해안21) 모여서 되찾는 삶의 의욕- 민속22) 바다로 달려간 밥상- 음식23) 구비 마다 세겨진 인물 이야기24) 부활하는 연오랑 세오녀25) 변방의 부활은 창대할지니- 에필로그 경북동해안지역 `정체성 찾기` 새 지평 개척`장기 유배지 체험촌` 관광상품화 실현 기대연오랑세오녀 일본내 흔적찾기 등 숙제 남아 □ 지역 정체성 고찰의 새 지평정체성은 왜 살피는가? 지역 등 여러 동질성을 공유하는 세력에게 어떤 특징이 있으며 이 특징은 또 다른 세력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고칠 점과 북돋워 줄 점은 무엇인지를 알아 내기 위함이다. 포항과 경주, 영덕과 울진으로 이뤄진 경북동해안은 그동안 경북 내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체성 분석의 사각지대에 놓여 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북부권이 연구와 저작에 의한 활발한 정체성 찾기를 통해 유교문화로 상징되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 자부해온 점을 고려하면 불모지대나 다름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인문학의 풍토가 강한 내륙 지역에 비해 거친 해안 풍토의 특성 상 역동성이 더 강조돼온 문화와 그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온 산업적 특성이 깊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 역사적으로도 고구려의 세력이 울진에서 포항 북구 일대에 까지 형성돼 경주 일대의 신라와 대립한 이래 4개 시군의 교류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를 전제로 할 때 본지의 이번 특집은 거친 변방의 이미지로 굳어져 온 경북동해안의 정체성 찾기에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기획은 선사시대에 정치적 세력이 통치하는 집단이 정착해 읍락과 소국, 국가로 나아가는 사회적 발전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고인돌이 이 지역에 얼마나 분포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했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을 비롯해 형산강 유역은 전북 순창과 고창, 경기 강화 등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밀집지로서 강과 들, 바다가 조화돼 그 만큼 삶의 여건이 잘 갖춰진 천혜의 땅임을 보여준다. 이어 최첨단의 소재인 철기문화가 이 지역에서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살펴 신라와 같은 최초의 통일국가가 어떻게 경북동해안에 깃들어 실크로드를 통해 서아시아 및 로마에 까지 이어졌는지를 돌아봤다. 수많은 야철지를 보유한 `쇠불이터` 포항 일대의 역사적 연원이 결국 영일만의 포스코 신화로 이어지게 된 우연 또는 필연도 빠트리지 않았다. 제2부는 경북동해안 사람들이 삶의 터전이면서도 곧 한계이기도 한 바다와 맞닿은 여건을 도전과 극복으로 활용해 문물을 교류하고 해외로 진출한 전통을 찾고자 마련됐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서 태양과 달이 상징하는 일월사상의 광명정대함, 대양을 건너 신문물을 전파하는 진취성의 표상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제3부는 항쟁사와 유배문학을 통해 국토의 변방인 이 지역이 외세의 침입에 맞선 국방의 중심이었으며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손꼽히는 유배지인 포항시 남구 장기땅에서 18년 유배의 시작을 한 다산 정약용의 눈에 비친 민초들의 삶을 돌이켜봤다. 신라 천년 수도에서 피어난 찬란한 문화유산과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피폐해진 극단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모색한 동학이 배태되는 필연적 과정도 살펴보았다.마지막 4부는 민속과 음식, 인물 등을 통해 바다와 내륙이 조화된 지리적 조건이 어떤 삶의 양식을 낳았는지를 다룸으로써 유지되거나 잊혀진 경북동해안 일상의 어느 하나도 결코 돌부리 차듯 할 일이 아님을 공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24회에 걸친 역정의 끝에서 변방의 부활을 거론한 의도는 국토의 말단에 처한 보잘 것 없는 민초의 삶과 아픔, 역사의 고난과 영광이 당대와 미래에 발전의 한 동력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하기 위한 목적이다. □ 기대되는 유배문학촌 건립이번 특집은 그동안 향토사학계를 중심으로 다뤄진 포항 장기와 영덕 영해 등 유배지에서 꽃핀 유배문학을 공론의 장으로 옮기고자 노력했다. 특히 장기면은 조선 태조 이후 모두 106명의 관료와 학자가 유배된 곳으로 수도로 부터 이격된 교통 오지이면서도 중앙의 엘리트와 지역사회가 새로운 유대를 형성하고 시련 속 문학의 산실이 된 곳이다. 때마침 포항시가 14일 오전 11시 남구 장기면 현지에서 `장기 유배지 체험촌`이라는 이름으로 용역보고를 겸한 주민설명회를 열게 돼 본지의 기획의도와 맞물리게 됐다. 이미 경남 남해군이 서포 김만중 등의 유배역사를 유배문학촌으로 관광상품화 했듯이 4개 시군도 풍부한 문화유적 등 유산을 잘 활용해 관광은 물론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교육 효과도 거두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다 못 담은 경북의 혼그 정수만 추리더라도 내용과 양에서 풍부한 한 지역의 정체성을 원고지 500매에 다 담기란 힘들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질 가칭 `속(續) 경북의 혼`에서는 포항의 부조장과 여자보부상, 울진에서 봉화에 까지 이른 보부상인 `선질꾼` 등 경제활동에 대한 고찰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또 해난사고 희생 어민의 영혼결혼식이 가미돼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강사리 일대에 전해지는 범굿 등 무속신앙, 민중의 기원과 삶이 담긴 민담과 전설, 형산강 주변의 인문지리, 포항 북구에서 울진 일대에 까지 남하한 고구려의 강역 등도 좋은 소재이다. 또 울진신간회를 포함해 `동양의 모스크바` 대구와 함께 남한 좌익의 대표적 무대가 된 이 지역의 이념 갈등 등 민중운동, 실학의 일가를 개척한 의학자 석곡 이규준 선생, 연오랑 세오녀의 일본 내 흔적 찾기도 남은 숙제이다. 이제 돌아보는 자리에 이르러 일생을 바쳐 간난신고의 연구성과를 이룩해낸 배용일 전 포항대 교수와 장기발전연구회, 각 시군의 사(史)와 지(誌) 편찬자 등 향토사학자들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보내는 것으로 특집을 일단락한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끝/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2012-12-14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24)

연오랑 세오녀라는 옛 사실은 경북의 혼을 알아내기 위해 간직해야 할 귀중한 우리의 자산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되돌아 보고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일 것이다. 과거사 속에서도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는 부분을 바로 잡아가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연오랑 세오녀의 부활은 꼭 이루어야 할 필수적인 것이다. 부활의 의미는 연오랑 세오녀를 현재의 여러 가지 방안으로 되살리는 것이다.글 싣는 순서4부=역동적 삶의 터전, 경북동해안 21) 모여서 되찾는 삶의 의욕- 민속22) 바다로 달려간 밥상- 음식23) 구비 마다 세겨진 인물 이야기24) 부활하는 연오랑 세오녀25) 변방의 부활은 창대할지니- 에필로그연오랑과 세오녀는 박인량이 지은 `수이전`에 나오는 설화인데, `수이전`은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와 `필원잡기`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고려 충렬왕 2년(1285년)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 권1 기이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됐다.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즉위 4년(157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미역을 따러 올라섰다 바위(귀신고래라는 설이 있다)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연오랑을 본 일본 사람들은 그를 신이 보냈다 여겨 왕으로 섬겼다. 세오녀는 남편을 찾다가 마찬가지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 서로 만나게 됐다.그러자 신라에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고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말에 따라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청했으나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며 돌아 갈 수 없다 하고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며 이것으로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다시 해와 달이 빛났다. 이때 제사를 지낸 곳이 영일현(迎日縣:지금의 영일만)이다.연오와 세오의 이동으로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 제사로 다시 광명을 회복하였다는 자취인 일월지(日月池)는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이 내용은 저자인 일연(一然)이 당시까지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일본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이즈모 타이사 입구.한편 연오랑이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 서술로 `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보면 “(이 때를) 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서 왕이 된 자가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이 아니다”고 주를 단 사람도 있었다.이 주를 단 사람들이 전설이나 설화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이고 있다.아무튼 연오랑과 세오녀에 담긴 내용은 가야의 중심 세력이 본격적으로 일본 열도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5세기 이전에 영일만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것이다.이 지역은 영일(迎日) 이라는 이름처럼 한반도에서 가장 해가 일찍 뜨는 곳으로 새해 첫날 1월1일에는 관광객이 새해 첫 해를 맞이하려고 온다.지금이야 해맞이를 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설화의 배경인 당시에는 태양신,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국가적 행사의 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제사 장소가 뜻으로 읽으면 도기야, 즉`으뜸가는(都) 제사(祈)를 올리던 들판(野)`이라고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귀비고는 이 제사에 소요되는 제물과 도구를 간직하던 성스러운 장소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영일현의 옛 이름이 `근오지`(斤烏支)였다라고 하였다. 근(斤)이 `큰`(大)의 이두로서 흔히 쓰였다는 점에서 `큰 오기`의 이두식 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큰 오기`와 현재 일본의 시마네(島根)현 이즈모(出雲) 지방 오키(隱岐)섬의 발음이 비슷하다.이것을 두고서 옛날 이즈모 지역이 신라였던 이 지역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음을 추정하게 하는 요소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본에는 1636년에 제작된 `이즈모 12군도` 등에서 보이듯 이즈모 지역은 원래 한반도 동남부를 떼어 붙였다는 전설이 있다.일본 설화나 지리적 요소 등과 함께 두 지역의 적지 않은 관련성을 시사한다.이러한 사실을 밝혀보고자 하면 현지에서 이루어지는 현장 조사의 필요성이 절실한 부분인 것이다.한·일 학자들 중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연오랑과 세오녀가 단순하게 신라 초기에 신라인이 일본으로 이주해 간 사실만을 알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보다 더 큰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연오랑 세오녀는 일월신화로 이들 부부가 일본 이즈모로 건너가 제철기술과 농사짓는 법, 베 짜는 법 등을 전수하고 일본의 왕이 됐다는 내용을 제 사실로 보려는 것이다.그리고 이 설화가 일식이나 월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상당한 근거를 찾아 낸 사람들도 있다. `삼국유사`가 연오랑 세오녀의 배경으로 소개한 시기는 서기 157년 중국의 뤄양(陽)에서 일식이 있었다는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을 가지고 당시 이 지역에서도 일식이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북의 혼을 찾을 수 있는 연오랑 세오녀를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근년에 와서 이뤄지고 있어, 연오랑 세오녀가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부활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설화가 단순히 신화이냐, 역사이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는데 일부 국어학자들이 전자에 중심을 두고 있는 반면, 향토사학계에는 일본 내 문헌과 각종 근거를 토대로 후자를 보강하고 있는 경향이 크다.지난 6월에는 문화 콘텐츠 발굴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불의 여인 세오녀` 창작 창극이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에 올려져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 지방문예회관 특별프로그램 개발지원사업에 선정돼 포항시시설관리공단과 지역 공연기획 단체인 전국푸른문화연대와 함께 추진하는 공연이다.연오랑과 세오녀가 창작 국악뮤지컬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2-10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23)

외세의 위세 앞에 시시각각 허물어져 가던 19세기말 조선의 민중들에게 `후천개벽 해원상생`(後天開闢 解寃相生)의 희망을 전파한 강증산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어디 있느냐`며 앞으로는 이 골목 저 거리에서 평범한 이들도 입신양명하는 시대가 올 것을 예언했다. 그의 평등한 인재관을 고려한다면 8도를 뒤져 정·재계의 유명인사들을 앞세워 인재의 고장임을 알리는 저작 또는 보도는 견강부회의 우를 범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작 밭고랑 정기를 타고 났더라도 삶과 역사의 당당한 주역으로서 가족과 공동체의 의무와 책임에 주저하지 않았더라면 이 땅의 그 어느 누구도 `장삼이사`(張三李四)라고 쉽게 부를 수는 없다. 경북동해안은 큰 족적을 남겼든, 별똥별처럼 명멸한 삶이었든, 다양한 이들의 땀과 눈물 속에 역사의 바퀴를 굴려 왔다.글 싣는 순서4부=역동적 삶의 터전, 경북동해안 21) 모여서 되찾는 삶의 의욕- 민속22) 바다로 달려간 밥상- 음식23) 구비 마다 세겨진 인물 이야기24) 부활하는 연오랑 세오녀25) 변방의 부활은 창대할지니- 에필로그□세 성씨의 시조묘, 삼태사(三太師)포항시 북구 기계면에는 파평 윤씨, 기계 유씨, 영산·영월 신씨 등 세 성씨의 시조묘를 일컫는 삼태사(三太師)가 있다.이 가운데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 공신인 윤신달의 묘소인 윤태사를 모시는 봉강재는 봉계리에 위치해 있으며 해마다 음력 10월1일 추향제가 열리면 전국에서 400~500여명의 후손이 운집한다. 윤신달 장군의 현손인 윤관은 고려 선종 당시 1107년 여진정벌 원수(元帥)가 돼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와 영주 등 9곳에 동북 9성을 쌓고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했다.삼태사 가운데 윤태사는 풍수학자들에게 명당으로 손꼽히고 있어 특히 봄과 가을에는 전국 각지에서 답사여행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고승(高僧)이 개척한 정신문화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로서 원효를 비롯한 고승이 배출된 불교 정신문화의 땅이었다. 해안선을 함께 한 포항과 영덕, 울진도 원진국사와 나옹화상, 공민왕대의 국사 배천희 등에 이어 현대에 와서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에 법맥이 이어졌다. 원진국사는 고려 명종 당시 화염경과 인심종을 품계해 이름을 떨치고 청하 보경사 주지를 맡기도 했다. 배천희는 흥해 출신으로 공민왕 당시 국사(國師)로 책봉돼 출생지인 흥해현이 흥해군으로 승격될 만큼 고려말 불교계의 거성이었으며 현재 묘소가 흥해읍 양백리 뒷산에 남아 있다. 조선조 영조대 장기 출신인 남파대사는 어린나이에 승과에 급제해 대사에 이르러 밀양 표충사 수호도총섭을 지냈다.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은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에서 출생해 원나라에 유학한 고려말의 고승이다. 울진군 원남면 금매1리에서 출생한 양성법사는 조선 인현왕후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충의의 인물들포항시 남구 오천읍민은 스스로를 `충의의 고장 사람`이라며 자부하고 있는데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가 이 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시호인 문충은 지금 문충리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수월재 김현룡은 연일현 출신으로 임란이 발발하자 친동생, 사촌동생들과 의병을 일으켜 화왕성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웠다. 남구 장기면 서학리 출신인 이대임은 임란 때 오성팔현의 위패를 석굴에 봉안한 뒤 의병을 모집해 경주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경주 출신 이장손은 화포장으로 임란 시 비격진천뢰를 만들어 경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팽수는 무과에 합격한 뒤 여러 고을에 왜구의 침탈이 심하자 서생포에서 접전을 벌여 장렬히 죽었다. 영덕 평해 출신인 손휴는 고려 예부상서로 이조혁명에 굽히지 않았다.최시창은 세종 때 삼군도진무사로서 육신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돼 아들 면과 함께 순절했다. 힘이 센 장사였던 장대룡은 인조 때 훈련원 판관으로 삼척포첨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국치 후에 청나라 왕을 암살하고자 심양에 잠입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화약고에 방화해 분사했다.□이색과 유척기 등 문신고려말의 문신 목은 이색은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외가에서 출생했다. 문과에 급제한 뒤 1353년 원나라로 건너가 향시와 정동행성의 향시에서 1등으로 합격해 관리생활을 할 만큼 특출했다. 귀국 후 1367년 대사성, 1373년 한산군으로 봉해지고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포항 기계 출신인 유척기는 문과 급제 후 서장관으로서 북경에 다녀온 뒤 사화가 일어나 홍원에 유배됐다가 11년만에 중임돼 우의정과 영의정에 이르렀다.□필공(筆工) 이호익 이호익은 1882년(고종 19년) 12월20일 울진군 북면 주인2리에서 출생해 수공으로 붓을 만들어 울진은 물론 영동에 까지 붓의 우수성이 알려졌다. 1948년 영양에 사는 정씨가 찾아와 붓을 만드는 법을 전수했으며 1951년 2월 이호익이 사망하자 정씨는 상경해 서울 인사동에서 유명한 성문당필방을 운영했다. 하지만 우리 고장에서는 후계자가 한사람도 배출되지 못했다. 이필공의 붓은 삼통필, 양통필이 특히 유명했다고 한다. 이호익의 덕택이었는지 당시 울진의 선비가 붓글씨를 잘 쓴다는 평판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근 영덕에서는 주열, 김하구, 김의봉, 송대만 등이 명필로 알려져 있다.□기인(奇人) 권달삼의 이야기본명이 천만인 권달삼은 1881년 안동에서 태어나 어릴 때 포항 흥해읍 옥성리 56번지로 이주했다가 다시 남성리로 옮겨 살았다.포항시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기인으로 명성을 가진 봉이 김선달, 하원 정수동에 버금가는 우리 고장의 해학자로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재치와 기지, 임기응변으로 숱한 일화를 남겨 삶에 찌든 뭇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또 촌철살인의 독설과 풍자로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 이 지방에는 그의 재담과 유창한 화술로 인해 `산에는 산삼, 바다에는 해삼, 육지에는 달삼`이란 속설이 전해질 정도였다고 한다.북한 인민부력부장 오진우 `포항 장기 고향설`의 진실오진우와 닮았던 창지리 주민 오주락씨가족의 월북으로 평생 곤욕 치르다 사망한때 포항 일대에서는 북한 인민부력부장을 지내다 사망한 오진우가 남구 장기면 출신이라는 소문이 제법 근거를 갖춘 채 나돈 적이 있었다.이 소문은 지난 1970년대 후반 장기면에도 텔레비전이 일반화되면서 오진우의 얼굴이 창지리 주민 오주락(가명)과 너무 닮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해지기 시작했다.소문은 구체적으로 `장기면 학곡리에서 태어난 오진우는 일제 때 만주로 떠나 포목상으로 돈을 벌어 김일성에게 군자금을 대어 일등공신이 됐다. 현재까지 창지리에는 친동생과 친척들이 살고 있으며 한국전쟁 때 인민군 장교로 경주 안강 인근에 왔던 그는 장기 쪽을 가리키며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70년대 장기면 모포리 쪽으로 간첩선이 많이 침투한 것도 오진우가 이 곳 지형을 잘 알기 때문이다`는 내용이다.이에 대해 대구지검 포항지청에 근무하는 이상준 향토사학자가 관심을 갖게 됐으며 확인한 결과 신빙성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오주락의 형인 오주승은 좌익사상에 경도돼 1952년 인민군이 약세에 몰리자 인민군 함정을 이용해 학곡리에 살던 가족을 월북시켰다. 그때 끝내 월북하지 않고 남은 동생이 오주락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 오씨는 연좌제로 인해 정보 당국의 사찰을 받았으며 집안 사람들도 공직에 진출할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어려운 삶을 살던 오씨는 지난 1992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장기면 창지리 본가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2-07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22)

사람은 자신이 먹는 음식의 영향을 받는다. 물론 심성에 따라 음식을 선택하는 이치를 보면 식성과 성격의 상관관계는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를 따지기 어려운 것과 같다. 경북동해안은 지리적으로 내륙과 바다가 조화된 곳이다. 따라서 그 먹을 거리도 농임수산물이 그 종류와 양에서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리법은 다양한 재료의 특징과 신선함을 살리기 위해 가공은 최소화하는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경북동해안 토속 음식의 정체성인 질박함의 배경에는 수행과 절제를 중요시하는 불교의 음식관, 음식에 초연하고 체면을 중요시한 유교의 전통이 가미돼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한술 퍼뜩 뜨고 노동에 나서야`하는 변방 민중들의 곤궁한 삶과 단순투박한 영남인의 기질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글 싣는 순서4부=역동적 삶의 터전, 경북동해안21) 모여서 되찾는 삶의 의욕- 민속22) 바다로 달려간 밥상- 음식23) 구비 마다 세겨진 인물 이야기24) 부활하는 연오랑 세오녀25) 변방의 부활은 창대할지니- 에필로그□ 궁벽한 벽지의 음식들`승정원일기`에는 인조 3년(1625) 8월 18일 조에 가난한 백성을 위해 세금을 거두어 보내지 않고 스스로 조정으로 부터 문책 받기를 자처하는 장기 수령의 기록이 실려 있다. 백성이 먹고 살기에도 어려운 현실을 파악한 장기현감이 왕실 몫으로 배당된 어전, 지금의 정치망에 부여된 어전세 징수를 포기하자 관청이 문책을 요구하며 계(啓)를 올린 것이다.앞서 세종 27년(1445) 10월에는 장기 일대에 유례 없는 흉년이 들어 곡식을 수확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경상도 관찰사 이계린이 세금을 감해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답(회보)하지 않았다는 의외의 기록이 나온다.이처럼 자연재해와 수탈의 시련 속에 피폐할 대로 피폐한 변방 민중들의 삶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첫 유배지 장기에서 지은 `기성잡시` 27수에도 잘 묘사돼 있다.`새로 짠 생선기름 온 집안이 비린 냄새/ 들깨도 안 심는데 참깨가 있을쏜가/ 김 무침 접시에선 머리카락 끌려나오고 / 가마솥에 지은 돌벼밥 모래가 있네 그려`. □ 포항 물회와 과메기, 밥식혜이제는 고급음식이지만 물회는 거친 바다에 붙박혀 살아야 하는 가난한 어민들의 음식이었다. 이른 새벽 그물을 걷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린 어부의 헛헛한 속은 집에서 챙겨온 고추장에 막잡은 생선회를 버물려 물에 말아 삼키지 않으면 감당하기란 어려웠다.물횟감의 생선은 원래 도다리처럼 양념이 잘 배어드는 것이 선호되므로 요즘 자주 등장하는 오징어는 제격이라고 볼 수 없다. 양념도 원형질의 포항물회라면 차라리 배를 안 넣을 지라도 첫술에 정수리가 찡할 만큼 맵디매운 고추장이 빠져서는 안 된다. 최근 몇년간 포항시가 인증해 개점한 서울지역 회식당의 포항물회는 도시 사람들의 미각에 맞춰 개량한 조리법이다. 오랜만에 고향의 맛을 볼겸 이곳을 찾은 포항 출향인들이 `맹탕`이라고 발길을 돌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포항 현지에서 물회를 맛본 외지의 초심자들은 위장을 찌르는 듯한 강렬한 맛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다.포항에서 전국, 아니 세계로 뻗어나간 향토음식의 대표는 단연 과메기다. 이제는 `관목어`라는 어원의 유례, 꽁치 이전에 청어를 썼다는 이력, 맛 있게 즐기는 법 따위는 너무 알려져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없게 됐다. 단지 문헌 상의 기록 정도가 아직은 덜 알려져 있어 소개해본다.`영일만의 토속식품 중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선정된 식품은 영일과 장기 등 두 곳에서만 생산된 천연가공의 관목청어뿐이다.`경상도읍지(1832년), 영남읍지(1871년)`매년 겨울이면 청어가 맨 먼저 주진(注津, 영일만 하구)에서 잡힌다고 하는데 먼저 이를 나라에 진헌한 다음에야 모든 읍에서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잡히는 것이 많고 적음으로 그해의 풍흉을 짐작했다.`동국여지승람 영일현 편`청어는 연기에 그을려 부패를 방지하는데 이를 연관목(煙貫目)이라 한다.`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말린 고기를 오래 두려면 연기를 띄어 말리면 고기에 벌레가 안 난다.`음식디미방(1670년경) `비웃 말린 것을 세상에서 흔히들 관목이라 하니 잘못 부름이요, 정작 관목은 비웃(청어)을 들어 보아 두 눈이 서로 통하여 말갛게 마주 비치는 것을 말려 쓰며 그 맛이 기이하다.`규합총서(閨閤叢書,1815년) 이들 음식 외에 동해안 지방의 겨울철 대표 음식인 밥식혜도 빠트릴 수 없다.주로 흰살 생선인 홑데기(횟대), 아지(전갱이), 오징어, 가자미 등을 재료로 하며 토막낸 고기에 찹쌀과 무, 배, 고춧가루를 버무려 항아리에 넣고 며칠 푹 삭혀 먹는 음식이다. 원래 이북에서 남하한 음식으로 전해지며 포항에는 10~20년 전 까지도 고추가루를 뺀 흰 밥식혜가 담가져 주로 명절이나 제사상에 올랐으나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 영덕의 대게와 은어, 꽁치젓포항이 전국적으로 최대산지이지만 영덕의 대표 특산물은 역시 대게이다. 찜과 탕으로 주로 조리해 먹으며 회는 물론 겨울철 제철에는 다리살의 껍질을 갈라 기름장을 발라 굽기도 한다.또 오십천과 영해 송천(松川)의 은어는 명물로서 조선시대에 진상했으며 요즘 들어 훈제가공돼 유통되기도 한다.어촌에서는 조석찬으로 잔생선이 상용화 돼 농촌에 비하면 단백질 자원이 풍부하다. 대게 생선을 날 것으로 한 회와 간장, 막장, 고추장 등에 지진 지짐요리 등이 보통이고 젓을 담아 쓰기도 한다. 재료는 멸치 보다 꽁치젓을 많이 쓴다. 또 꽁치를 삶거나 쪄서 걸러 채소와 함께 끓인 `집을 풀어 끓인 국`은 별미이다. 일상식으로는 노물리 등 어촌에서 장국을 끓이다 날김을 넣고 끓인 생김국이 유명하다.나물류 가운데 도라지와 부추, 고비와 무나물 등은 일상적 반찬이며 어촌에서는 생미역과 파래, 청각 등 나물을 상용한다. 청각은 삶거나 날 것으로 마늘, 고추가루, 기름, 장에 무쳐 먹는데 건조하면 저장성이 좋아 날이 흐릴 경우 하루 이틀 땅에 묻어두면 푸른색이 유지되고 잘 상하지 않는다.장류 가운데 등계(겨)장은 시금장 또는 겨장이라고도 한다. 보리를 찧을 때 나오는 고운 속가루(속겨)를 익반죽하여 김을 올려 찐 다음 뭉쳐 불에 굽는다.한반도 전역에 분포하는 젓갈은 영덕에서는 꽁치젓과 오징어젓 외에도 대구알 식혜, 백합젓, 방어젓, 광어젓, 갈치젓, 조기젓 등을 담가 저장하고 생굴은 소금에만 절이며 고춧가루를 넣는 어리굴젓은 이 지역에서는 드물다. 새우젓도 마찬가지며 노물리 등에서는 성게젓도 유명하다.□ `대두박`, `꾹죽`으로 견딘 울진산이 깊은 울진의 밥류는 주로 보리와 조가 차지했으며 감자와 고구마를 섞어먹는 범벅류도 흔했다. 대두박은 주로 민가에서 해먹었으며 콩기름을 짠 나머지 찌꺼기를 밀기울과 함께 끓여 먹던 밥이다. 공출이 심했던 30년 이후 일제강점기를 견딜 수 있었던 열악한 음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꾹죽은 민가에서 가장 널리 분포됐던 주식의 하나로 쌀이나 보리에 씨래기와 된장, 멸치 등을 넣어 푹 끓여 주로 어촌에서 흔했다.울진에서는 양념간장을 `뀌미`라 하는데 집간장에 고춧가루, 깨볶음, 파, 고추, 마늘 등을 섞어 칼국수의 간을 맞춘다. `찌지개`라 부르는 찌게는 주로 꽁치, 고등어, 가자미 등을 선호하며 영덕과 비슷하게 고등어와 꽁치를 토란, 고사리와 함께 끓여 고춧가루, 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생선장국인 `고등어(꽁치) 느리미`도 유명하다.젓갈류 가운데 명태 아가미를 재료로 `순태기 식혜`를 만들기도 했다.울진은 이밖에 태백산맥과 연접한 특성으로 인해 송이버섯 등 임산물을 활용한 특산물과 향토음식도 유명하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2012-12-03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21)

민속의 사전적 의미는 민중에 의해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온 유·무형의 전통적, 보편적 문화를 뜻한다. 따라서 경북동해안의 민속은 해양과 내륙이 만나는 지리적 특성 상 주민들이 주로 종사하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노동과 관련된 내용들이 풍부하다. 민속놀이에 주로 줄다리기 종류가 풍부한 것은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월월이청청은 남해안의 강강술래와 비견되는 경북동해안의 독특한 군무(群舞)로서 전승되고 있다. 민속신앙은 동제와 별신제, 기우제 등이 주를 이루는데 날씨에 목숨이 좌우되는 바다 일의 특성 상 샤머니즘도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양식이 됐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바탕 어울어져 펼치는 놀이 속에서 공동체의 결속은 다져지고 삶의 애환도 삭혀졌다. 글 싣는 순서4부=역동적 삶의 터전, 경북동해안21) 모여서 되찾는 삶의 의욕- 민속22) 바다로 달려간 밥상- 음식23) 구비 마다 세겨진 인물 이야기24) 부활하는 연오랑 세오녀25) 변방의 부활은 창대할지니- 에필로그□많고 많은 줄다리기예로 부터 우리 지역에 전해지는 민속놀이에는 가마싸움, 각시놀이, 고누, 그네뛰기, 깨금발싸움, 꼬리잡기, 낫치기, 널뛰기, 눈놀이, 달맞이, 닭싸움, 돈치기, 돌치기, 두꺼비집짓기, 딱지치기, 땅재먹기, 말타기, 목침찾기놀이, 방아개비놀이, 봉사놀이, 새쫓는놀이, 성냥개비싸움, 소꿉놀이, 소싸움, 수건돌리기, 숨바꼭질, 팽이치기, 풀각시, 풀장난, 버들피리불기, 화전놀이, 화투놀이 등 종류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놀이는 장치기나 줄다리기, 월월이청청 등과 같이 일제 침략기에 탄압을 받아 전승이 단절된 것이 많았다. 또 용케 살아남은 것들도 1970년대 이후 생활양식의 변화로 인해 연날리기, 윷놀이, 제기차기 등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소멸된 상태다. 대신 고무줄놀이, 줄넘기, 술래잡기, 공기놀이 등 일제침략기에 들어와 정착한 것들도 상당 수가 있다.경북동해안의 민속놀이는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계절성과 내륙과 해안 마을이 차이를 보이는 지역성이 있고, 음악과 무용의 요소가 가미돼 예술적 경지에 이른 놀이가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놀이가 발달된 점도 특징의 하나다.이 가운데 모포줄다리기는 남구 장기면 모포2리(칠전마을)에 전승되던 것이 이제 포항을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자리잡았다. 원래 매년 추석날 뇌성산 밑에 있는 밭에서 열리다가 근래 들어 바닷가 백사장으로 옮겼으며 인구가 줄어든 요즈음 들어 큰길에서 열리고 있다. 민속적 가치 때문에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87호로 지정된 모포리의 줄, 일명 칠전 큰줄은 수백년 전부터 당겨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놀이의 유래가 된 장기현감의 현몽 일인 음력 8월 16일에 행해지다가 1982년 이후 사람들이 귀향해 많이 모이는 추석 명절인 8월 15일로 변경됐다.보통 볏짚으로 만드는 줄과 달리 모포줄은 짚에다 칡넝쿨, 구피나무 껍질을 섞고 많은 사람들이 힘 주어 당겨도 끊어지지 않도록 동아줄을 여럿 합쳐 완성품에 사람이 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굵고, 길이도 하나가 50여m에 이른다. 또 모포줄은 동민의 신앙의 대상이어서 신체(神體)로서 동제당에 보관되며 흔히 암줄을 할매, 수줄을 할배라 하는데 줄을 당기는 8월 보름에는 여기에 줄제라는 제사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동쪽이 암줄, 서쪽이 수줄인데 동쪽은 바다 쪽이 되며, 서쪽은 내륙 쪽이 된다. 그래서 암줄인 동부(바다)와 수줄인 서부(육지)가 대결하는데 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연결시켜야 시작할 수 있다.북구 송라면 화진리 구진마을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앉은 줄당기기 또는 기줄당기기라고 부르는 줄다리기가 펼쳐진다. 암줄과 수줄이 각각 네 가닥으로 돼 좌우의 다리가 네개인 `기`(게의 사투리)를 닮았다고 해 `기줄당기기`라고도 하며 흔히 `동네 할뱃줄`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마을에 2~3년 마다 별신굿을 해왔는데 어느 해에 굿을 하던 무당이 굿판에서 급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점을 보러 갔는데 앞으로 별신굿을 말고 보름날 줄을 당기되 여자들만 해야 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다.이 놀이의 특징은 줄이 게의 형태이므로 게의 붉은 색과 날카로운 발이 귀신을 쫓고 무수한 알은 다산의 상징으로 인식되므로 풍요와 다산, 척사(斥邪)를 기원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삼척이나 울진, 밀양에도 게줄다리기라는 이름의 줄다리기가 있으나 구진마을과는 조금 다르며 특히 앉아서 당기는 예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두 편으로 나눈 줄을 잇는 도구인 고를 남자의 성기에 비유한다면 줄다리기에서 여성들이 고를 줄에 끼우는 것은 성행위에 비유된다. 여자들은 이 고를 쟁취하기 위해 힘을 겨루는데 앉아서 하는 줄다리기는 성행위의 상징으로 추측된다.이긴 편이 고를 메고 마을을 돌며 춤을 추는 것은 억눌려 왔던 여성의 성적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로 분석되기도 한다.울진에서는 월송큰줄댕기기와 죽변 후정 기줄댕기기, 평해 직산 기줄댕기기가 대표적이며 평해 월송마을과 후정리의 경우 큰줄이 행해지기 전에 아이들의 `애기줄``골목줄`이 벌어진다.□일제가 탄압한 월월이청청월월이청청은 영덕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포항, 북으로는 울진 후포읍까지 분포됐으며 1930년대까지는 성행했으나 일제 말기에 거의 중단됐다. 남해안의 강강술래와 같이 정월 보름날이나 팔월 한가위 달밤에 부녀자들이 하는 집단 군무이다. 포항에서는 청하면과 흥해읍, 동해면 등 해안마을에서 주로 이뤄졌다. 발생시기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추정이 불가능하나 수백년 전일 것으로 짐작된다.노래는 선창자가 `달아달아 밝은 달아`하고 앞소리를 매기면 후창자가 `월월이청청`하고 후렴을 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1970년대부터 21세기가 시작된 무렵까지의 우리 시단에서 최고의 민중시인으로 꼽히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에 실린 `달넘세`는 동해안에 전승돼 온 민속놀이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다.`넘어가세 넘어가세 논둑밭둑 넘어가세/ 드난살이 모진 설움 조롱박에 주워담고/ 아픔 깊어지거들랑 어깨춤 더 흥겹게/ 넘어가세 넘어가세 얽히고설킨 인연/ 명주 끊듯 끊어내고 새 세월 새 세상엔 새 인연이 있으리니/ 넘어가세 넘어가세 언덕 다시 넘어가세/어르고 으르는 말 귓전으로 넘겨치고/으깨지고 깨어진 손 서로 끌고 잡고 가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크고 큰 산 넘어가세/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디딜 것은 디디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넘어가세 넘어가세 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 동해안 전역에 걸친 별신제별신제는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무당이 굿거리로 행하는 마을제사를 말한다.이 별신제를 사제하는 무당은 마을과 혈연이나 지연적으로 무관하며 전문적인 직업무들이다. `별신`이라는 이름의 제의(祭儀)는 안동시 하회마을 같은 일부 내륙지방에서도 행해지고 있지만 풍어기원제로서의 별제는 동해안과 남해안의 별신제를 한정하는 이름이다.현재 동해안에서 볼 수 있는 별신제는 사실상 별신굿이다. 근래에 와서 풍어제라는 명칭이 붙으면서 어촌의 풍어기원제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동해안 지역서는 위로 강원도 거진에서 부터 아래로 부산 동래에 이르기까지 마을에 따라 3~10년 간격으로 행해진다. 1980년대 이전까지의 별신제는 계파가 다른 김석출(2005년 작고)과 김영달이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활동했으나 김영달이 무업을 중단해 중요무형문화재 82호 기능보유자였던 김석출이 주류를 이뤘다.이후 그 계파인 신석남, 이금옥, 송동숙 등이 별도의 사제집단을 이뤄 주제(主祭)하기도 한다.포항에서는 장기면 신창리 죽하마을, 청하면 이가리 등 20여개의 어촌마을에서 3~10년 간격으로 별신제를 지낸다. 울진군의 대표적 무속은 별신굿과 오구굿을 들 수 있다. 직산2리 직고동의 별신굿은 10년마다 열리는 풍어제이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2012-11-30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20)

최근 한 방송사의 교양프로그램을 통해 잘 알려졌듯이 유럽의 근세 국가 중 네덜란드를 세계 최고의 무역국 반열에 올리며 국부를 일군 주역은 바로 청어잡이에 나선 어업인들이었다. 하지만 사농공상의 신분제에 강박돼 있던 조선의 어민들은 `뱃놈`의 천대를 받으며 백정이나 다름 없는 최하위 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식솔을 건사하기 위해 험한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칼바람 속에 거친 노동을 감수해야 했으며 때론 해안선을 침략하는 외적에 맞서 항쟁의 최선봉에 서기도 했다. 고난 속에 단련된 원형질의 강인함은 이제 경북동해안 사람들의 심성에 심어져 정체성의 한 맥으로 이어지고 있다. 글 싣는 순서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 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동학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어로금지령에서 사점(私占)까지 우리 역사, 특히 산업사를 살펴보면 유독 수산업에 관한 기록이 상당한 부족함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세계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도 패총 속에서 낚시바늘과 어망의 석추 등이 발견돼 선사 시대에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어로작업이 짐작되고 있다. 특히 경북동해안 울진의 유적에서 발견된 고대 어선의 제작 시기는 세계 최고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수산업과 그 종사자들에 대한 역사적 홀대의 뿌리는 깊다.철기문화의 시작과 함께 열린 삼국시대에서 어업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고작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어량(魚梁)`을 통해 하천이나 얕은 해안에 고정적인(정치) 어구를 설치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는 백제 법왕 즉위 원년(599)에 내려진 살생 금지령으로 어로행위가 금지됐을 정도이다. `영덕군지`에 따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법흥왕 16년(529) 살생 금지와 어구 소각의 기록이 나온 것으로 보아 어업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각종 어구와 어장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개국 초기부터 토지와 마찬가지로 왕자들이나 권문세가에 하사되거나 수탈 대상이 됐다. 특히 후기에 들어서면 정치와 세제의 문란으로 권문세가가 토지를 다투어 점유하면서 어량도 포함시켜 어민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특이한 점은 元(원)나라의 다루가치가 함경도나 경상도에서 고래기름을 구했다는 기록을 통해 동해안을 중심으로 포경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이에 비하면 조선기에는 비교적 풍부한 자료가 남아 있는 편이다.건국 후 어업제도 개혁을 통해 어장의 불법 사점(私占)을 국유화 해 어세를 징수케 했으며 성종 대의 경국대전에는 빈민들에게 3년씩 어업면허와 유사한 권한을 준 것으로 보아 어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어장국유제는 또 다시 사점의 성행으로 문란해져 균역법 시행으로 재개혁되는 등 굴곡을 거듭하다가 1880년대 부터 한반도의 어자원 수탈에 나선 일본 어민들에 의해 잠식돼 갔다. 특히 정어리는 1937년 동해에서 140여만t이 어획돼 당시 단일어장에서 단일 어류로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비참한 어촌의 실상다산 정약용은 1801년 3월9일 나이 40세에 첫 배소(配所)인 포항 장기땅에 도착해 7개월 열흘 동안 머물며 18년간의 유배를 시작한다. 다산의 기록을 통해서도 당시 어촌의 곤궁한 실상은 잘 드러난다.당시 다산은 장기읍성 동문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구경했다.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해녀의 물질을 구경(`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치고/ 짠 바다 들락날락 맑은 연못같이 하`-「아가사」)했으며 잡힌 오징어 등 물고기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기도 했다. 또 그는 실학자답게 어부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 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하고 부식을 막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전해 들은 현감은 `백성이 입을 옷감을 짤 무명도 없는데 어떻게 무명실로 어망을 짜겠느냐`며 호통을 쳐 묵살했다고 한다.다산은 이처럼 어리석고 오만한 관리들이 장기의 어민들을 수탈한 상황도 `장기농사` 10수 속에 담아놓았다. `상추잎에 보리밥 싸서 파 고추장 섞어 먹세/ 금년엔 넙치마저 구하기 어렵구나/ 잡는 족족 말려서 관청에 바쳤으니`.또 다른 문헌을 통해 해난 사고에 희생되는 어민들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장기발전연구회가 발간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에 따르면 `승정원일기`숙종 37년 2월10일에는 68명이 한꺼번에 바다에 나가 빠져 죽어 휼전(恤典)을 베푼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한 근대 유럽에서도 청어잡이에 나선 어민의 3분의 1이 해난 사고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전근대적 어로 현실에 놓인 조선 어민들의 희생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제국주의의 야욕을 키워가던 일본의 어민들이 침탈의 선봉에 선 기록도 안타깝다. 1895년(고종 32·을미년)에는 장기군 근해에서 어물을 빼앗고 배와 그물을 파괴했으며 육지로 침범해 인가에 난입해 백성을 위협하고 부녀자를 잡아가는 등 작폐가 심각했다.□노동요가 위로한 어심(漁心)민요는 민중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향토성과 민족성을 담아 가락으로 표현한 양식이다.그중에서도 노동요는 의식요, 유희요와 달리 노동이 주는 육체의 고통과 불만을 덜고 노래를 통해 즐겁게 수행하기 위한 지혜에서 고안됐다.경북동해안에도 구수한 사투리를 담은 어업 노동요가 전해지는데 주로 그물당기는 소리, 고기 푸는 소리, 노젓는 소리 등이 대표적이다.이 가운데 포항의 `그물당기는 소리`는 `명사십리 해당화야 이여차/ 너 꽃 진다 설워 마라 이여차/ 명년 춘삼월 돌아오면 이여차/ 너는 다시 피건만은 이여차/ 불쌍하고 가련하다 이여차-`. `멸치 그물 당기는 소리`는 `모여 소리 나거들랑/ 동네 사람 다 붙어라/ 이여 소리만 잘하며는/ 모든 고기 다 잡힌다`의 내용이다.영덕의 어업노동요는 노물리의 창자(唱者)들의 덕분에 `영덕군지`에 잘 채록돼 있으며 내용도 풍부한 편이다.`노 젖는 소리`는 `-/ 한주먹을 누어놓고 (이하 반복)어허 저서보자/ 이자지차 잘도 전다/ 젖는 노를야 저사가고/ 노는 사람은 다틀랬다/ 일물에 일사공아/ 허리깡 화장아야/ 이차저차 저서간다/ 홍물에 화장수로구나/ 탁주 한되를 마셨으면/힘이나 벌떡나게/ 이수저수 다보내고/ 우리 고향 다돌아왔다`(천연출, 1972년).`가래노래`는 그물을 당기면서 부르는 선후창으로 `어허 가래요(선) 어허 가래요(후, 이하 반복)/ 그물코가 삼천리라도/ 걸릴날이 있다드니/ 오늘날로 걸렸구나/ 은가락지도 여게서 난다/ 온갖 색시도 여게서 난다/ 비바리도 여게서 난다/ 까끄무도 여게서 나고/ 젓아보자 젓아보자/ 육천리 먼먼길에/ 팔이 아파 우에젓노/ 젖는 노를 멈추지 말고/ 빨리 젓어보자/ 세월 봄철아 가지를 마라/ 알뜰한 청춘 다 늙는다`(김유근, 1972년).`마개노래`는 어장의 그물을 당기거나, 배를 육지로 당겨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의 선후창으로 `어허 마개야(선) 에이아라 돌려보자(후, 이하 반복)/ 고기도 고기도 많이 들었다/ 방에(방어) 카나(랑) 광에(광어)카나 많이도 들었다/ 어허 마개야/ 운반선을 맥히기 실어보자/ 우리 앞에 대어놓고/ 군사들아 군사들아/ 일을 알뜰히 알뜰히 해여보자/ 한치기만 씨리면(실으면) 술이 한말이다/ 방에 한마리 후비나라(훔쳐놓아라)/ 집에 구수가 소주 한빙 먹어보자/ 먹자주의다 먹자주의다/ 방에 한마리 천원 받는다/ 천원 받으면 술이 두말이다/ 여러기 먹어도 남는다/ 전주(주인) 보면 도둑놈 칸다/ 우리들은 먹어보자/ 그래 안된다 소주한잔 주자/ 내일일라 광에 한마리 후비자/ 그마 술먹자`(고천수, 1972년)□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1-26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19)

경북의 혼(魂)을 밝혀보는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클로즈업되는 사상(思想)은 동학(東學)이다. 올해는 동학이 창도된 지 152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 근대 태동기 사회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집권층과 지도층은 무기력했다. 계층 간의 갈등은 깊어만 갔고, 사회구조의 변동과 향촌 질서의 변화는 사회 변혁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인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여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경북동해안은 우리나라 사회변혁의 큰 획을 그은 역사적 현장이다. 글 싣는 순서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동학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수운 최제우와 동학의 교리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는 순조 24년(1824) 10월18일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비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성장해 가면서 당시 왕조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기성적 가치관이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삶을 구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나섰다. 이 구도의 길에서 민중을 구제할 수 있는 새길을 찾은 것이 동학(東學)이었던 것이다. 수운 선생의 원 이름은 제우(濟愚)가 아니었다. 원래 `제선(濟宣)`이란 이름을 `우민을 고난에서 구제한다`는 뜻으로 `제우(濟愚)`라 개명했다.최제우는 서양에서 침투해오는 서학에 대한 대항의식으로 우리 민족도 한울님인 천주의 천도(天道)를 깨우쳐서 다시 민족부흥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한다는 신념에서 자신의 `천도`를 동학이라 했다. 모든 사람이 신분차별 없이 시천주의 인간존엄 주체가 돼 성(誠)과 경(敬)의 덕을 닦으면 모두가 군자가 될 수 있다는 평민의 인간자존 의식을 깨우쳤다.한편으로 그의 동학은 왕조사회의 쇠망을 대담하게 예언하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시대가 도래한다는 이상향을 제시하고 당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척왜양이(斥倭洋夷)`의 민족자주적 저항의식을 서민들의 마음 속에 불어넣었다.왕조 해체기에 피지배층인 백성들에게 신흥종교로 탄생한 동학은 그 교세가 날로 커졌다. 이를 본 조정은 이 동학교문을 민중의 반란조직처럼 위험시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혐의를 씌워 교주 최제우를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최제우는 1864년 대구 장대에서 `사도(邪道)난정(政)`이란 죄목으로 순교하게 됐다. 민족자주, 인간존중, 만민평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민본주의사상은 그가 순교한 후 갖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나날이 번창해 갑오농민전쟁에서 3·1 독립운동에 이르는 우리나라 근대민족사의 정신적 주류가 됐다. □포항·경주에 남은 최수운의 유적경주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 10㎞ 떨어진 곳에 있는 구미산(龜尾山) 자락에 천도교의 발상지 용담정(龍膽亭)이 자리잡고 있다. 구미산은 거북 구(龜)와 꼬리 미(尾)를 합해 `오랜 뒤끝`이라 해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장소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수운 대신사는 21세 때부터 도(道)를 얻고자 10년이라는 긴 구도(求道)의 여정(旅程)을 가지고 있어 전국에 전설처럼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포항시 남구 구룡포에도 이와 관련된 유적이라 전하는 곳이 있다. 구룡포 후동리(厚洞里) 남쪽 산아래 마을에 불성사(佛聖寺)란 절이 있다. 마을 뒷산에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불을 켜` 놓고 기도를 한다고 해 `불썬바우`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는데 원효대사와 최제우가 이 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한다.1859(己未)년 10월에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서도 그의 기도는 계속되다가 경신년(1860) 4월5일 밤에 드디어 하느님의 계시를 받게 됐다. 이후 수운 대신사는 양산 천성산 내원암(內院庵), 또는 적멸굴(寂滅窟) 등지에서 49일 기도를 수행했고 마침내 고향인 경주 현곡면 구미산에 위치한 용담정에 돌아오게 된다. 용담정은 수운 대신사의 부친(최옥)이 학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수운 선생은 `불출산외(不出山外)`라는 네글자를 문 위에 써 붙이고 `여기서 도를 깨닫지 못하면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라는 굳은 맹세를 했다. 수도에 전념한지 6개월 만에 그는 `한울님이 사람의 몸에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侍天主)`를 깨닫게 된다. 그 날이 바로 수운(최제우) 대신사가 무극대도를 받은 1860년 4월5일이다. 이와같이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은 장소인 `용담정`을 천도교에서는 최고의 성지로 꼽고 있다. 그러나 수운 대신사 순도 이후 용담정은 방치돼 왔다. 그후 중건과 퇴락을 거듭하던 용담정은 1974년 경주국립공원에 편입됨으로써 성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고 천도교인의 성금으로 1975년 오늘의 모습을 갖춘 용담정을 준공했다. □ 포항에 은거한 해월 최시형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선생의 동상은 황성공원에 세워져 그가 태어난 황오동을 향해 있다. 그는 최치원의 후손으로 토박이 경주 사람이다. 초명은 경상이고, 호는 해월(海月)이다. 해월 선생은 청년이 돼 동학을 알게 됐고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이어 받은 뒤 평생을 숨어 살며 동학 사상의 기반을 닦고 키워나간 불굴의 혁명아였다. 선생은 심한 탄압 속에서도 포교활동을 통해 교세를 확장하면서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했다. 동학을 크게 성장시킨 선생은 교조신원운동과 갑오농민전쟁에도 참여했다.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해월 선생은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7세에 현재 포항시 북구 흥해읍 신광면 기일동에 있었던 조지소(造紙所)의 고용공이 되었다. 19세에 밀양 손씨를 맞아 결혼한 뒤 처가가 있는 흥해에서 살았다. 그는 용담정에 있었던 수운 선생이 은거해있을 집을 주선해 흥해 매곡리(지금의 매산리) 손봉조라는 신도의 집을 소개했다. 해월은 현 포항시 신광면 마북리의 검곡(속칭 금등곡)에 살았다. 이때 수운선생은 접주제를 확립하고 16개 지역의 접주를 임명했는데 경주, 영덕, 영해, 영양, 청하, 연일, 장기 등 현재의 경북 동해안 지역이 모두 포함됐다.28세 때 마북에 이사해 농사짓던 최시형은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6년동안 소임을 수행했는데 일을 잘 처리해 마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해월은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철종 12년(1861) 6월 37세 때에 동학에 입교했다. 한달에 3~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설교를 듣고 의범(儀範)을 배웠으며 집에 있을 때는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기에 힘써 하늘의 소리를 듣는 등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체험했다고 한다. 1875년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는 데 있으니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며 이름을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한 뒤 1898년 3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했다. □ 영덕 이필제의 난1871년 음력 3월10일(교조 최제우의 순교일) 영덕군 창수면(옛 영해부 서면) 신기2리(우정동) 병풍바위에서 전국의 동학인 600여명이 모여 천제를 지내고 횃불과 죽창을 들고 영해부성에 입성한 뒤 부사를 처단하는 일이 일어났다. 영해부 입성을 성공한 다음날 오후 동학교도들은 자진 철수했다.이 사실은 갑오농민전쟁보다 23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여기에는 해월 선생이 참가하고 이필제가 선봉이 됐다. 관변기록의 참가자수가 600여명이니 실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 이것은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농민군이 대규모로 거병한 혁명적 사건이었다.그 후 관군의 대대적인 탄압이 계속돼 참가했던 50여명이 체포돼 죽임을 당하고 이필제는 그 해 8월 문경에서 열린 유생들의 모임에 갔다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뒤 지금의 서울시청 뒤 무교동에서 처형됐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1-23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18)

역사 속의 고려와 조선에는 많은 정변이 교차하면서 권력에서 내쳐진 죄인들은 죽음만 면했을 뿐 왕의 처소와 격리되는 고난 속에서 연명해야 했으니 바로 유배였다. 그 유배자 중에는 권력다툼의 패배자로 전락해 실의에 빠진 채 성은(聖恩)만 학수고대한 파락호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처럼 유배의 고난과 좌절을 한민족 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학문으로 승화시킨 불굴의 도전자도 적지 않았다. 거친 해풍의 풍토에다 왕도(王都)로 부터 섬이나 다름 없이 격리된 경북동해안은 상처 받은 이들을 보듬어 민초들과 새로이 교류하거나 문학을 배태시키는 장이 되었다. 글 싣는 순서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동학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절해고도와 다름 없는 유배지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조선시대 이름난 유배자들의 이야기와 그 유배의 현장을 답사한 사진들로 꾸며 최근 발간돼 화제를 모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유배의 고난 속에서 `낙관이냐, 낙담이냐`의 두 유형으로 대별되는 유배자들의 처신이 한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중죄인의 경우 방구들조차 성하지 않은 허술한 오두막에다 탱자나무로 좁고 높게 애워싸게 해 하늘 조차 잘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고 개구멍으로 밥을 넣어주는 위리안치의 형벌. 아무리 고관대작이었더라도 아전이 고약한 마을에 처해지면 온갖 구실로 제재를 받고 평민에게 조차 행패를 당하기 일쑤였던 당시의 기록들이 유배의 처지를 실감케 한다.유배지의 비참한 현실이 왕의 침소에 까지 이르렀던지 영조 때는 몇몇 예를 제외하면 흑산도처럼 험하거나 무인도에는 유배를 금했다.하지만 이 책에서 유배지는 주로 제주도, 백령도 등 섬이며 심지어 남해의 거제도도 등장하는데도 우리 경북동해안 일대는 어떤 언급도 없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영덕, 영해 등 일대에 숱한 유배인들의 이야기와 작품들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도 이 책은 간과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에 와서 과거 유배지로서 우리 지역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정약용과 같은 `걸출한 유배 종결자`의 이야기를 전남 강진군에 선점당한 채 압도돼 스토리텔링으로 재해석하거나 문화관광의 요소들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한 책임도 있을 것이다.포항 남구 장기면과 영덕군, 경남 기장은 고려의 수도 개성과 조선의 한양에서 3천여리의 거리이므로 유배형 가운데 가장 엄중한 죄인이 주로 보내졌다. 오죽했으면 조선 태종대에 대속(代贖), 이른바 유배의 거리 대신 돈으로 대체가 가능해지면서 이 지역의 액수가 2~3위에 오르게 됐겠는가.□ 중세가 선호한 유배지, 장기▲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 송시열이 심었다고 알려진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포항 장기 출신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 한 교수와 고위 관료, 군 장성과 기업인들이 수두룩하다. 장기사람들은 향토사 연구에도 포항 전역에서 인정 받을 만큼 남다른 열의를 보여 지난 2006년에는 장기발전연구회가 향토사 연구총서인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를 발간했다. 이 책은 장기에 우암 송시열에서 다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현량과 학자가 머물고 갔으며 그 영향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됐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물론 한국사 전체에서 장기는 인접한 월성이 신라의 근거지로서 천년동안 누렸던 융성의 혜택을 가장 많이 나눈 곳이었음을 감안할 때 지나친 겸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니면 고려와 조선에 들면서 신라의 터전이 차별로 인해 뛰어난 철기문화와 천년 수도의 배후지로서 축적한 문화가 쇠퇴했다가 다시 부활했다는 언급을 생략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여하튼 장기는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귀화 위구르인 설장수가 정몽주 피살 당시 일파로 몰려 유배된 기록을 시작으로 지금의 검찰총장인 대사헌 홍여방은 유배됐다가 사면돼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단종 복위운동 당시 형조참판이던 사육신 박팽년의 인척들은 관노로 영속돼 장기현의 관노로 내려왔다. 연산군 대에 대사간 양희지가 사초문제가 발단이 된 무오사화에 휘말려 유배됐으며 기사환국 때 영의정 김수흥, 신임사화 때 판서 신사철 등도 고초를 겪었다.이밖에 왕의 잘못을 간하는 언론의 역할을 하는 직무 특성상 미움을 받기 일쑤였던 종3품 사간 가운데 이세진, 정술조, 송영 등은 파직돼 유배나 다름 없는 장기현감으로 온 인물들이다.□다산 정약용과 우암 송시열▲ 다산은 지금 장기중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느티나무 숲을 거닐며 시 `유림만보`를 지은 것으로 전한다. /장기발전연구회 제공다산은 18년에 걸친 유배의 생애에서 7개월 10일(약 220일)을 장기에서 첫 시작한 뒤 17년을 강진에서 보냈다. 그는 첫 유배가 주는 부담과 고통으로 인해 가장 혹독한 경험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장기에 머문 동안 빼어난 사실주의 시인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강진에서 이뤄낼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불후의 저작을 예고했다. 장기 땅에 첫 도착한 그의 마음은 기성잡시의 한수를 통해 전해진다. `산머리에 쓸쓸한 민가 마흔 채/ 기울어진 성문이 시든 꽃 속에 있네/ 물 마실 샘은 한 곳도 없어/ 성에다 줄 매달아 수차를 쓰라 하네/ 조해루 용마루에 저녁놀이 붉게 물들 무렵/ 관리가 나를 몰아 동쪽으로 나왔네/ 시냇가 자갈밭에 초가집 한 채/ 늙은 농부 만나서 주인 삼았네.`그는 장기에서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수, 고시 27수 등 130여 수의 리얼리즘 한시와 남인의 예론에 관한 시비를 논한 기해방례변, 한자 발달사를 다룬 삼창고훈, 한자 자전류 이아술 6권, 농어민의 비참한 질병치료를 돕고자 한 의서 촌병혹치 등을 남겼다. 이곳에서 한양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도 세편 전한다. 다산의 사실주의가 돋보이는 장기농가 10수 중 제5수에서는 특유의 근면성과 휴머니즘에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에서 언급된 고약한 현지 아전이나 백성과는 다른, 장기사람들과의 정도 옅보인다.`새로 깐 병아리 작기가 주먹만해/ 여리고 노오란 털이 어여쁘기 짝이 없네/ 그 누가 어린 딸 공밥 먹는다고 말하는고/ 꼼짝 않고 붙어 앉아 솔개 쫓는 것을.`촉망받는 개혁가의 꿈이 좌절된 다산은 변방의 민초들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정작 그들은 지치고 불안했을 서울내기 유배 초년생을 경계하지 않고 보듬었다.일국을 좌우한 우암 송시열은 다산보다 120여년 앞서 장기에 보내졌다. 사단법인 포항지역사회연구소가 펴낸 `한권으로 보는 포항의 역사`는 두 사람의 장기 유배를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비교했다. `다산의 자취는 오직 시문에만 남아 있지만 우암은 토호들의 손으로 세운 생사당인 죽림서원으로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이는 다산의 `기성잡시`를 거론한 것으로 `죽림서원이 마산리의 남쪽에 있으니/(중략)/촛불 들고 멀리서 찾아가도 반기지 않고/시골 사람들 아직도 송우암만 이야기하는구나`는 내용이다.장기발전연구회의 노력으로 인해 지금 장기에는 노론의 거두 송시열과 대표적 남인인 다산이 시기를 달리한 앙숙임에도 한 자리에 두 개의 사적비로 남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또 다른 유배지 영덕▲ 다산사적비의 모습.`영덕군지`에 따르면 영영승람과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50여명이 유배지 영덕을 거쳐 갔다. 대표적 인물은 고려 예문관 대제학 윤신걸, 신돈의 전횡을 비판한 신현, 정도전과 남은 등에 대한 권력 집중을 비판한 변중량, 단종 3년에 세조에 의해 관노가 된 김처선 등이다. 조선의 대문호 윤선도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제대로 못 모셨다는 죄로 8개월 간 유배되는 동안 시와 부 20여수를 남겼다. □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1-19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17)

한반도의 20세기는 1905년 을사늑약, 1910년의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식민의 굴욕으로 부터 그 질곡의 시대가 예고됐다. 해방과 내전,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의 골짜기에서 변방 민초들의 삶은 더욱 팍팍했다. 하지만 백성을 돌볼만한 여력이 없는 나라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의병의 기개가 이땅 곳곳에서 터져 나왔기에 오늘 우리는 감히 민족혼을 이야기할 수 있다.또 남북이 갈라진 내전의 땅에 학도병들이 흘린 눈물과 피는 저 대로를 활보하는 청년들의 웃음 속에서 아름답게 부활하고 있다.글 싣는 순서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19)새 세상을 하늘에 빌다- 정신문화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 포항 기개의 상징, 산남의진경상도의 대표적 의병전쟁인 영양 일월산 전투에는 포항 출신 의사들이 참여해 큰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흥해 곡강 출신 최세윤은 뒷날 산남의진(山南義陳)의 3대 대장으로서 포항은 물론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산남은 문경새재 이남의 영남을, 의진은 의병의 군대를 일컫는데 아들의 의로운 죽음을 아버지가 이어받고(정환직 부자), 장남과 지아비의 연이은 죽음에 어미마저 동행한 충절(최세윤 가족)이 펼쳐졌다. 거의(擧義)의 시작은 삼남(경상, 전라, 충청) 도찰사 등을 역임한 시찰사 정환직(1844~1907)이 고종 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라고 적힌 밀지를 받게 되면서 부터다.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를 통해 고종은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이에 1905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정환직은 장남 정용기(1862~1907)에게 뜻을 전하고 고향에 내려가 가문을 보존하라고 했다. 하지만 의로운 아들이 순순히 따랐을 리는 없었다.광무 10년(1906) 2월 정용기는 62세인 아버지를 대신해 3천여명의 의병을 규합해 대장으로 추대됐으며 군호는 산남의진으로 정했다. 의병들은 영천, 신령, 청송, 진보, 흥해, 청하 등 곳곳에서 일병기지를 습격해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1907년 9월1일 북구 죽장면 입암리 주막에서 식사하는 일병들을 급습했다가 주변에 매복해 있던 영천수비대에 포위돼 정용기 등 의병 40여명이 전사했다. `산남의진 입암지변`으로 명명된 이날의 비극은 민가 수십채를 방화하고 수십명의 양민들을 학살한 침탈로 이어져 의병전쟁사에서 최초의 민간인 참화로 기록되고 있다.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2대 대장이 된 정환직은 크고 작은 전과를 거뒀으나 1907년 12월 청하면에서 체포돼 영천 교외에서 총살당했다. 1908년 3월 3대 대장이 된 최세윤은 포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하지만 매 전투마다 의병수의 30% 이상이 전사하는 참상 끝에 그해 7월 경주시 양북면에서 체포된 최세윤은 10년형을 언도받은 뒤 1916년 8월 11일간의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 윤영덕은 천리길을 걸어 시신을 모셔와 반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뒤를 따랐으며 아들 산두는 일병의 모진 고문 끝에 부모를 따랐다. □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경북의 후기 항일의병전쟁은 대개 1906년 봄부터이다. `태백산의 호랑이`로 불리며 일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신돌석은 1906년 3월 영덕군 축산면 도곡2리에서 영해진을 기병했다가 영해와 강릉을 의미하는 영릉의병으로 개칭했다. 신돌석은 영덕, 영해, 울진, 영양, 진보, 청송과 강원도 삼척, 강릉, 원주까지 진출해 일병을 공격했다. 그 명성이 전국에 떨쳐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에 모인 전국의 의병장들은 `13도 의병 창의대진소`를 결성하며 그를 교남창의대장으로 선출했다. 신돌석 의병의 공적은 독자적인 전투에 더불어 산남의진 등 인근의 의병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함으로써 더욱 전과를 올린 것으로 평가된다.신돌석은 1908년 후반기 들어 일병의 토벌이 강화되고 겨울이 되자 부대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혹한을 피하도록 했다. 몇몇 측근들과 잠행을 계속하던 장군은 1908년 12월12일 지품면 눌곡리 두집매(집 두채가 있다는 뜻)에서 예전의 부하이던 김상호, 상열, 상태 삼형제에 의해 31세의 나이에 피살됐다. 영덕군지에는 일병의 피살 보고서에 이들 이름 대신 기록된 김도룡, 김도윤이 본명일 것으로 추정해 기록돼 있다. 장군의 묘는 1971년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열쇠, 장사맥아더 장군은 6·25전쟁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군사전문가들 조차 성공 확률을 `5천분의 1`로 점치며 만류했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그리고 `성동격서`의 양동작전용으로 영덕 장사 해안 상륙을 선택했다.1950년 8월24일 대구, 밀양에서 대부분 중·고교생인 772명의 대원으로 창설된 독립 제1유격대대, 명부대는 15일여간의 기초훈련만 받은 채 9월13일 LST 문산호로 부산항을 출발했다.다음날 새벽 4시 30분 장사해안에 도착한 문산호는 태풍 케지아로 인해 좌초됐지만 오후 2시 50분 상륙에 성공, 적군의 주 보급로인 포항~영천 방면 국도를 완전 차단하고 17일까지 적군 2군단 정예부대 2개연대의 북상 공격을 격퇴했다. 이어 19일 오후 3시30분 해상철수용 LST 조치원호로 철수를 완료했지만 미처 승선하지 못한 유격대원 40여명은 끝까지 저항하다 전원 전사했다.장사상륙작전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으며 유격동지회원 38명이 생존해 있다. 좌초된 문산호의 선체 대부분은 주민 등이 고철로 팔아 넘겼으며 해저에는 아랫부분만 잔해가 있는 것으로 파악돼 있다. 장사상륙작전은 포항·안강지역 전투의 적 김무정 군단 예하 제5사단에서 정예부대 2개 연대와 4대의 전차를 장사로 분산하게 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총 반격의 계기가 됐다. 또 적의 전투력 약화는 국군 제3사단이 형산강을 도하하여 북진하는데 크게 일조했다는 군사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하지만 오랫동안 `잊혀진 전투`였던 장사상륙작전은 이제 역사속에서 부활했으며 정부는 학도병들의 넋을 기리고 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해 장사상륙작전기념공원 건립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전략의 요충, 형산강 공방전▲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의 7번국도 변에 건립돼 있다가 현재는 철거된 안강전투승전기념관.사단법인 포항지역사회연구소가 포항과 경주 일대를 무대로 지난 2002년 발행한 역사인문지리서인 `형산강`에는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 인동리 동쪽산에 건립돼 있다가 수년전 철거된 안강전투 승전비의 비문이 인용돼 있다. 8월9일 침공해온 적 제7사단은 (포항)기계에 침입한 뒤 17일까지 필사적으로 공세를 되풀이했으나 우리 수도사단과 제17연대의 피어린 역습으로 이를 좌절시켰다. 22일부터 병력을 증강해 다시 내습한 적에 15일간 결사적인 지연전을 감행했다. 달포에 걸친 이 지구의 전투에서 적 294명을 사로잡고 전차 2대 격파, 사살 2천328명의 전과를 거뒀다.포항 형산강 일대 전투는 1950년 8월11일 학도의용군 전투, 형산강 방어전 등 포항지구 전투, 포항 비학산전투, 기계 탈환전으로 구분되는 기계·안강 전투로 요약된다.포항은 항구시설을 갖춘 교통 요지로 이를 점령하면 영천, 대구, 경주 방면 진출이 가능해 포항지구는 피아에 그만큼 중요했다. 이 가운데 8월11일 제3사단의 후방지휘소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벌어진 학도병들의 혈투는 영화 `포화 속으로`와 서울 동성중 3년생 이우근의 피 묻은 편지 등을 통해 부활하고 있다.의성지구에서 9일 저녁 도착해 있던 학도의용군 71명은 이날 새벽 4시께 인민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들은 영일비행장에 주둔 중이던 미 해병대에서 구해온 M1소총 68정, 수류탄 3발, 탄환 2만발로 무장해 북의 정규군과 혈투를 벌인 끝에 김춘식 등 57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미해병 비행대와 북한군이 접전한 포항 중심부는 폐허로 변했으며 결국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1-16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16)

경북동해안은 바다를 중간에 두고 일본과 마주 한 지리적 특성 상 고대에서 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왜의 노략질과 전쟁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신라 천년 동안에는 수도 방위의 최전선이었으며 한낱 변방의 신세에 처한 조선에서도 국토 수호의 보루이자 중심무대였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려말에는 포항에 통양포수군만호진이, 조선시대에는 영일진이 설치돼 수군이 주둔했으며 오늘날에는 최정예 해병대의 고장이기도 하다.칼날 같은 샛바람을 맞으며 높은 파도를 헤치고 단련된 경북동해안의 민초들은 거듭되는 외침의 시련 속에서도 한반도의 등뼈를 지켜냈으며 그 자부심은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글 싣는 순서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 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19)후천개벽을 도모한 땅- 동학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임란의 격전지, 포항 골곡포(骨谷浦)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나타나는 왜적의 동해안 침입은 수십회에 이르는데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까지 왜구 및 왜병의 진격로이자 격전지가 바로 포항이었다. 내물왕 38년(393) 5월에는 5일 동안 금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왜적들이 굳건한 옹성에 막혀 퇴각하다 이를 추적한 보병 4만명에게 포위돼 독산(포항 북구 신광면 소재지)에서 대패하고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개포(포항 북구 월포리)는 신라 이래로 수군진(鎭)이 설치돼 병선이 배치되고 3곳에 해자를 설치했는데 바닷바람이 너무 심해 고려 우왕13년(1387)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되면서 통양포(포항 북구 두호동)로 이동한다. 문헌에 따르면 통양포만호진에는 병선 8척, 수군 218명이 배치돼 있었다.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남지역은 초기의 치욕적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전직 문관이나 유생들이 선봉에 서서 의병을 결성했다. 이는 관북지방의 의병장이 주로 전·현직 무관인 것과 대조가 되는데 충성심과 자존심이 강한 영남의 사림들이 무장항전의 지도자로 나선 결과이다. 당시 경주부 관할이던 포항지역 의병장은 남구 대송면 사정리 출신의 수월재 김현룡과 그 형제들, 임란 후 북구 신광면 우각리에 은거하며 종군 경험을 용사일기(龍蛇日記, 용=조선, 뱀=왜)에 남긴 오의정 이의온, 해일당 이설, 남강 이여랑 등이 대표적이다.이 가운데 창의장군(倡義將軍)으로 불린 수월재는 5형제가 의병장으로 나서 우정과 우호, 두 사람이 전사하는 아픔을 `형제산 남쪽의 강물은 푸르구나. 혼이여 혼이여 돌아가기 더디지 말게. 몸을 가벼이 여겨 순국하였으니 유감 없으리. 효도는 집에서만 아니고 충으로 옮겼구나.`라는 시 `서천초혼가`를 남겼다.포항 북구 송라면 화진해수욕장은 대표적 격전지이다. 왜의 보급부대가 백사장에 침입해 주둔하자 이 지역 의병들이 송라면 대전리 대동숲에 매복해 있다가 야간에 급습해 새벽까지 3전 3승의 혈전을 거듭했다고 한다. 임란 이후 이 일대를 골곡포(骨谷浦)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마을 북쪽에서 벌어진 격전으로 전사자들의 유골과 활촉이 지난 1930년대 이전까지도 간간이 발견됐다고 전한다.이후 북구 청하면 일대의 지역 유지들은 해마다 6월 6일 현충일에 화진해수욕장에서 위령제를 열어 호국의 원혼들을 위로하고 있다.□의병항쟁사의 기념비, 경주성 탈환20만의 왜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침입해 21일에는 영남의 거진(巨鎭)인 경주읍성을 함락시켰다. 왜군은 좌로, 중로, 우로의 세 길로 나눠 한양을 향해 북상했는데 경주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담당한 좌로에 위치한 격전지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공성 작전 끝에 9월 8일 탈환한 경주성 전투의 영웅은 문천회맹(蚊川會盟)을 중심으로 한 경주부 일대 의병과 함께 비격진천뢰를 활용한 장수 박의장의 공이 컸다. 그가 쓴 관감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9월초 7일에 용감한 군사만을 뽑아서 밤중에 성을 덮쳐 진천뢰(震天雷)를 터뜨리니 적병이 불에 타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적이 넋을 잃고 소리지르며 당황하더니 이튿날 밤에 부산으로 도망쳐가거늘 추격하여 30여명을 죽이고 성을 탈환했다. 성안에는 아직 창고에 곡식이 4만여 석이나 있었다`.조선군은 경주성 탈환으로 국토의 동로(東路)를 확보하게 돼 왜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는 성과를 이뤘다. 국왕이 국토의 끝 의주로 피하고 왜군이 평양성과 회령에 진출한 상황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의병과 관군은 고립 상황에서 자력으로 왜군을 격퇴함으로써 경상좌도에 생기가 돌게 됐다.임란이 끝난 뒤 조정은 공을 세운 9천60명을 표창했다. 특히 의병들에게는 선무원종공신록권을 1, 2, 3등급으로 나눠 주었는데 경주부원은 1등 13명, 2등 33명, 3등 63명 등 109명이 포함됐다. 경주 의병활동에서는 한 집안에 의병장이 여럿 있었다는 점이 특이한 점으로 평가되고 있다.□임란 명장들을 배출한 영덕영덕은 임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들의 출신지이다.경주부 판관으로 경주성 수복을 이뤄낸 박의장 장군은 영해 원구 출신이다. 개전과 동시에 부산성에서 정발 장군 휘하의 중위장으로 참전해 전몰한 장희식 장군은 영덕읍 화개리 출신이다.또 하양전투에서 공을 세운 박홍장 장군, 영해의 군기시판관 남의록, 영일현령 김난서, 김제군수로서 공을 세운 뒤 전사한 영해 출신 정담 장군 등이 대표적이다.또 의병 가운데 찰방 조현, 생원 이함, 유학 백현룡 등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화왕진에 합류해 활약했다.왜군은 평해 백암과 영해 서쪽 창수면 삼계리와 수리 쪽으로 진격해 왔는데 영해 경계에는 1592년 음력 7월 25일 이후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영해에 침입한 왜군은 모리길성과 추월종장, 고교원종 등 장수의 부대로 서울을 점령한 뒤 강원도로 침입한 일부가 동해안으로 남하했다.영해전투는 해흥 백인국, 신규년, 배태원 등의 의병장이 참전했다. 이들은 남하하는 적을 맞아 관군과 함께 창수면 위정계곡에 매복해 적을 습격하려고 했으나 왜군의 선발대를 본진으로 오인해 공격하다가 대병력에 역포위돼 신규년을 비롯한 대다수가 전사했다.이밖에 영덕 출신 김기하, 성하 형제는 정유재란 때 울산 서생포 근처의 창암에서 김기하가 전사했지만 김성하는 명장 마귀와 함께 왜적에 대승을 거뒀다. 왜군의 주력부대 통과지점이며 후방보급로인 대구의 공산성 전투에서도 영해 출신 이함, 백인경 등이 공을 거뒀다.□마분동에 새겨진 울진의 항쟁울진에 왜군이 침입한 것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왜군이 서울을 벗어나 일부가 경상도 해안으로 퇴각한 시기로 추정된다. 울진의 향토사가들은 임진왜란전황도를 통해 왜군이 강릉과 삼척을 거쳐 영해까지 내려간 점에서 이를 유추하고 있다. 왜병의 공격에 김언륜은 고산성에 주둔하던 주호 장군을 찾아가 의논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또 갈령을 넘은 왜군이 부구와 죽변으로 치닫자 덕천리 마분동 십장곡에서 김천상 등의 부장을 모아 작전을 세웠다.하지만 적을 매복작전으로 급습한 김장군은 반격작전에 휘말려 28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이때 역전분투했던 이 골짜기를 분투곡(奮鬪谷)으로, 사람과 말이 수없이 죽어 쌓였다 하여 마을이름이 마분동(馬墳洞)으로 붙여졌다고 전한다. 대장을 잃은 휘하 장수 김천상 등 9명은 고목리 구장곡에 모여 통곡하다가 손가락을 깨물어 받은 피를 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린 뒤 선조가 파천한 의주로 향했다고 하지만 이후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울진읍 고성리 구만동 출신인 주호는 서면 소광리의 안일왕산성에 피신했다가 돌아와 300여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8월말에 왜병들이 `남무묘법연화경`의 주문을 쓴 깃발을 앞세우고 쳐들어 오자 옹성하면서 끝까지 싸우다 몰사했다고 전한다.그 부인 장씨는 왜군이 능욕하려 하자 끝까지 기개를 지키며 맞서다 순절했는데 한 왜군이 기록을 전함으로써 7년 전란이 끝난 뒤 선조 36년(1603년) `봉열대부사재감첨정`의 벼슬이 주호에게 하사되고 장씨 부인에게는 영인(令人)이라는 작위가 주어졌다고 전한다.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 때는 기성 사람 김응선이 아우 응남과 함께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하던 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에 통곡하다가 의병들을 해산시키고 귀향했다. 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타인과 접촉을 끊고 지내다가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1-12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⒂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화주의에 바탕한 무모한 쇼비니즘(국수주의)이 현재는 물론 미래에 까지 미칠 해악을 간과한 역사적 과오로 전락할 숙명이다. 당대의 특정한 이익을 위해 왜곡된 역사는 동시대인들, 특히 지식인들의 양심을 좀 먹고 공범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를 배운 학생들에게 축적되는 지식은 차라리 무지 보다 열등하며 후대에 조작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국가적 역량은 또 얼마나 낭비되는지를 우리는 현대 일본에서 목격하고 있다. 식민사관으로 인해 한국사는 심하게 왜곡됐고 신라의 삼국통일이 일국의 제패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오욕(汚辱)의 거울처럼 폄훼된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신라는 한반도의 빛나는 문화의 정수와 서역의 선진문물까지 융화시켜 다시 세계 속으로 내보낸 문화 강국이었다.글 싣는 순서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 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12)연오랑세오녀, 태양신화와 문화자긍의 상징13)항해와 조선의 脈은 이어져…14)비단의 길은 서라벌에 닿아15)신라의 달빛, 아시아에 비치다 □한국의 첫 세계인, 혜초(慧超)신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는 다른 서역의 선진문물을 직간접으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서기 668년 삼국통일의 시기를 전후해 선각자들은 당과의 교류를 넘어 실크로드로 진출했다.이 가운데 오아시스 도시인 돈황 석굴에 남아 있는 신라의 흔적은 오늘에 까지 전해지고 있다. 프랑스 고고학자 폴 펠리오가 1908년 돈황 막고굴의 17호 석굴, 이른바 장경동(藏經洞)에서 수습 또는 약탈해간 문서에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돼 있다.승려 혜초가 경주를 출발해 이란 동북부의 니샤푸르에 이르기 까지 4년간 `다섯 천축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기록`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저작은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이다.뿐만 아니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보다 약 550년 앞선 역작으로서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혜초의 뛰어난 지식과 식견으로 인해 오늘날 세계는 8세기 당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풍습과 문화, 경제, 정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갖게 됐다.많은 동서양 학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이 신비한 승려의 실체를 몰라 연구를 거듭하던 중 결국 일본의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에 의해 신라승임이 규명됐다.혜초 외에도 도축승(渡竺僧), 즉 천축국(인도)으로 건너간 승려는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현태(玄泰), 원표(元表) 등 9명에 이른다. 또 도당승(渡唐僧) 중 신라 왕손인 원측(圓測)은 현장의 수제자였으며 지장(地藏)은 중국 4대 불교 성지의 하나인 구화산 성지의 창시자이자 안휘성에 벼농사를 전파하는 등 중국 내에서도 추앙받은 신라인이었다.돈황석굴에서는 혜초 뿐만 아니라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박원홍과 원장 형제와 관계된 계약문서가 발견됐으며 석굴 220호(642년), 335호(686년), 332호 등 몇군데에는 신라인이 직접 묘사돼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미지의 세계, 서역으로 나아간 신라인들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다.□중세 아랍에 비친 신라인 아랍인들에게 신라는 이상향과 `황금의 나라`로 기록돼 있다.마끄디시의 `창세와 역사서`(966)에는 적힌 신라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동쪽에 신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이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이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신라인 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중세 아랍을 대표하는 세계지도의 작성자 이드리시(1091~1166)는 `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에서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해 다시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한 바, 심지어 그곳 주민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지도에서 신라를 섬으로 기록한 수준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는 기록인데 이는 직접 신라를 다녀간 서역인이나, 세계로 나아간 신라인이 각기 제 경험을 과장한 결과일 것이다.분명한 것은 신라는 기원을 전후 해 1천여년동안 알타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황금문화대의 동단에서 전성기를 구가했음을 이 기록과 유물들에서 알 수 있다. 황금문화는 고차원의 문화로서 그 향유 민족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금관의 나라` 신라의 위상은 세계 고대 금관 10구 중 6구가 신라(1구는 가야)의 것임에서도 알 수 있다. □세계에 진출한 신라의 수출품아랍, 이슬람세계에 수출된 신라의 물품은 비단과 검, 도기와 담비 가죽, 사향, 마안(馬鞍), 범포, 육계(肉桂), 키민카우, 쿠란잔 등 11종(6~7종 토산품, 2~3종 외래품)이었다. 그리고 일본 정창원(正倉院)의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11년(752) 일본에 수출된 각종 향료와 약재, 안료와 염료, 기물 등 품목이 약 45종이었으며 그 중 일부는 중개무역품이었다.경북대 주보돈 교수 등에 따르면 신라문화의 중심지 경주는 내륙과 바다가 만나는 교차로로서 북방과 남방의 문화 등을 호수처럼 받아들였다.그 결과, 4세기 경에는 북방적, 고조선적, 낙랑적, 해양적 요소 등이 신라문화의 실체를 이루고 고구려의 영향이 가미됐다. 이러한 통합성에다 특유의 독창성이 가미된 신라문화는 다시 해양을 통해 세계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 터키 개최경주실크로드 프로젝트 야심찬 추진경북도는 내년 8월31일부터 9월22일까지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을 터키 현지에서 개최한다.지자체로서는 전례가 없는 이 같은 해외문화교류는 `아시아 역사문화의 자존`과 `유럽 문화의 수도`라는 해외 두 지자체 간 자부심을 바탕으로 하며 그 근거를 경주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 정립하려고 한다.경북도는 한국문화의 모태인 신라문화를 재조명함으로써 경상북도를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만들어 글로벌 브랜드 파워를 높이고자 이번 기획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중동 및 비교문화 전문가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정수일 박사 등 각계 전문가들로 경주실크로드 프로젝트 기획위원회를 구성해 기획회의를 거듭 열었다. 이어 지난 10월 31일에는 경주에서 경북도 경주실크로드프로젝트 업무협약식을 열고 본격적인 사업의 시작을 공표했다.구체적인 기본틀은 학술적 재조명과 스토리텔링,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경주 실크로드학을 정립함으로써 신라 마케팅, 신 한류문화 창조, 경제영토 확장의 3대 목표를 이루겠다는 전략이다.이를 위해 학술 부문에서는 논문공모와 데이터 베이스 구축, 국제 학술대회를, 미디어 제작에서는 탐방기 및 기행문 발간, 다큐멘터리 제작 및 방영을, 국제협력에서는 중국 섬서성 시안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와 자매결연, 미국 실크로드 프로젝트 재단과 공동사업을, 마케팅 부문에서는 기획탐사, 요요마 초청공연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학술부문은 학술대회와 세미나를 타슈켄트와 카이로, 테헤란에서 개최하고 유물과 복식, 음식과 건축물 등 전 분야의 학술지를 발간할 계획이다. 미디어 제작은 경주실크로드 대감을 편찬하고 황금과 철을 포함한 금속문화와 불교 등의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국제협력에서는 해외 자매도시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실크로드 지도에 경주를 표기하는 등 수정을 협의하고 거점도시 5개국과 공동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한다. 마케팅 부문은 한국해양대 실습선 한바다호의 졸업 항해와 연계해 실크로드 탐사단을 운영하고 실크로드 포토챌린지대회를 열고 이스탄불 현지에서 심사를 통해 우수작품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또 중장기 과제로서 경주실크로드재단을 설립하고 국립경주실크로드문화관을 200억원 전액 국비 투입해 오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경주문화엑스포공원 내에 건립할 계획이다.□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1-09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⒁

옛 사마르칸트국 아프라시압 도성터 벽화에는 각국에서 모여든 사절단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이 가운데 황색 예복과 바지를 입고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을 비롯해 삼국 사신의 모습이 눈길을 끄는데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당영립왕회도, 이른바 왕회도로 불리는 작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근거는 삼국이 중국을 넘어 이른바 서역 국가들과도 교류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세력을 키운 후발주자의 한계를 넘어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유독 두 나라와 다른 독특한 대외관계를 펼쳐 나갔다. 고구려와 백제는 비교적 중국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신라는 초원의 길을 통해 중국 못지 않은 서역의 문물을 직접 수입했다.글 싣는 순서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12)연오랑세오녀, 태양신화와 문화자긍의 상징13)항해와 조선의 脈은 이어져…14)비단의 길은 서라벌에 닿아15)신라의 달빛, 서역에 비치다 □ 동북아에 꽃핀 로마문화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유리공예가 중 한사람인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67). 그는 지난 2002년 317쪽 분량에 원색 사진을 다량 수록한 `로마 문화의 왕국 - 新羅`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 날개표지의 광고 문구는 정작 역사의 당사자인 우리들이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단정을 내려 눈길을 끈다.`고대사가 바뀐다! 동아시아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로마 문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라다! 출토유물과 신발견의 고대 기록사료 등, 실제 자료에 의해 신라의 수수께끼를 해명한다.`저자는 삼국 중 경쟁 두 나라와 달리 중국을 우회해 로마 문화를 직수입하고 있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문물이 선진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갈파한다. 요시미즈는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 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초원(草原)의 길을 통해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다고 주장한다. 또 이런 흐름을 타고 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건들 뿐만 아니라 정신과 사고 등을 포함하는 로마 문화가 유입됐다는 것이다.이후 476년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로마 식민지가 황폐됨으로써 문화 교류의 상대가 사라지면서 신라는 중국에 조공하고 중국의 문물을 적극 수입하게 됐다. 요시미즈는 신라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나오는 정의를 내림으로써 책의 끝을 맺는다.`신라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당과 밀접한 교류를 함으로써 약소국이면서도 곧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통일했다. 소국 신라가 가졌던 이러한 반도통일의 에너지는 과거 로마 문화를 수용하던 시대에 쌓아 올려 중국 문화와는 다른 에너지를 잠재적으로 축적했기 때문이었다.`신라 예찬가 요시미즈가 관련 저작에 이르게 된 계기는 1974년 발굴된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에 대해 듣게 되면서 부터이다.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간 요시미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초상옥(肖像玉)으로서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라고 단정했다. 이후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로마의 액세서리가 전해진 경로를 연구해 신라가 로마문화의 왕국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경주에서 발견되는 서역의 흔적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동 98호 남분 및 북분 등 경주 일대에 산재한 5~6세기 신라고분에서는 20~80여점의 각종 유리기구가 발굴됐다. 요시미즈가 격찬한 인면유리구슬인 `미소짓는 상감옥`을 비롯해 이들 유물은 4~5세기경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후 서역계 상인들에 의해 흑해와 남러시아에서 스텝로, 이른바 초원의 길과 해로를 통해 신라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인숙 경기도박물관 관장 등 학자들은 이들 로만 글래스의 직수입과 별도로 유리구슬용 진흙재(材) 틀 등 유리 제작 관련 유물들이 출토된 사례를 토대로 수입된 유리 원자재를 가공해 한국형 구슬도 제작됐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보석류로서는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지방에서 산출되던 슬슬(瑟瑟)과 호탄 일대의 옥이 서역상인들에 의해 신라에 까지 도입돼 사용됐다. 특히 일반적으로 에머랄드로 해석되는 슬슬은 귀족의 부인들로 부터 수요와 애착이 높아 급기야 법령이 공포돼 진골녀와 육두품 여자들의 빗 장식에 대한 사용이 금지되기에 이른다. 앞서 통일의 안정기조에 안주한 신라 귀족층은 7세기 문무왕 대를 전후해 수입품 등의 사치와 향락에 탐닉했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당시 신라 수도 금성은 풍요로운 당나라 장안 생활을 모방하려는 사치풍조와 무분별한 수입 개방으로 도시문화가 오염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결국 흥덕왕 9년(834년)에 사치외래품을 금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법령이 공포됐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양모로 짠 페르시아 카페트나 깔개 종류도 신라에 전해졌다. 삼국사기에는 문양 있는 모직 카페트나 모직 담요를 지칭하는 `구수`와 사찰이나 왕실의 상과 옥좌에 사용한 모직깔개인 `답` 등을 육두품이나 오두품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 기록이 나온다.서역 상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해 신라와 고구려인들을 직접 접촉했다는 근거들도 확인된다.7세기 중반의 경주 고분에서는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는 투르크계 중앙아시아인 형상의 토용이 여러 점 출토됐다. 또 일본서기에는 한반도의 삼국이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낙타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 경주실크로드는 동서문물의 교섭 루트로서 그 역할이 3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문명사는 사막의 길, 초원의 길, 바다의 길로 나뉘어진 실크로드를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동쪽 끝은 신라였다는 사실이 그동안 끊임 없이 근거를 확보해 왔다.이희수 교수에 따르면 신라 절정기인 8세기에 실크로드를 통해 경주에 문화가 전파되는 속도는 1년 남짓이었다. 신라고승들이 새롭게 편찬되거나 소개된 불경들을 중국에서 구해보는데는 1개월여가 걸렸다.평균 100마리의 낙타를 포함한 규모의 오아시스 캬라반이 20~30t의 화물을 싣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에 까지 이르는 시간은 6~7개월로 추정하고 있다. 8천500km에 이르는 거리를 하루 40km씩 이동할 경우 7개월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이희수 교수는 동서 실크로드를 관통하는 4대 도시를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압바스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 그리고 그 끝에 위치한 신라 수도 경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이탈리아의 첨단 패션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시스템처럼 천년전에도 첨단을 걷는 세계문화인식과 유행이 존재했다는 상상력에 이를 수 있다.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신라 문화가 곧 한국 고대문화를 대표한다고 정의했다. 또 불국사나 석굴암과 같은 독창적인 문화적 총체를 배태할 수 있었던 역량은 여러 문화 요소를 축적하고 융합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경주 남산 일대에 존재하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문화유산도 신라인들의 개방성과 독창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그는 단언했다.신라의 1천년에 걸친 서역 선호 풍조는 차츰 퇴조했으며 중국 문화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서역과 직접 접촉하며 쌓은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기량은 한국의 저 빛나는 민족문화를 살찌우고 여전히 우리 핏속에 이어지고 있다. 경주는 아시아의 동쪽에서 세계와 교류하며 여러 문화를 자기화 해내는 용광로였으며 한반도에 세계의 도시, 국제도시를 구현해냈다.□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1-05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⒀

본지가 그동안 독자들과 나눠본 연오랑 세오녀의 세계는 역사이든, 신화이든 우리 지역의 정체성이 선진 문물의 바다 건너 전달과 교류의 한 상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명확한 역사의 세계에서 우리 지역의 사람들이 어떤 과학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 세계와 교류하고 경쟁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볼 때가 됐다. 그 과학의 원리를 작동시킨 시작은 마땅히 현실적 동기가 우선이었다. 신라를 둘러싼 주변국들과 외교를 통해 세력을 불리고 물산을 위해 교역하는 한편 선진문물의 수용을 위한 유학의 항로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바다 너머의 세계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호기심이 최초의 씨앗이었음이 분명할 진데 경북동해안에 터전을 마련한 이 땅의 사람들은 험하게 일렁이는 대양을 돌파할 용기와 지혜 또한 갖고 있었다.글 싣는 순서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12)연오랑세오녀, 태양신화와 문화자긍의 상징13)항해와 조선의 脈은 이어져…14실크로드, 한반도 동쪽에 이르다15)잊혀진 옛 항로- 116)잊혀진 옛 항로- 217)해양무역시대를 잉태하다□신라의 항해술과연 신라인에게는 저 화려한 문화예술적 안목과 유물을 오늘에 남겨 놓은 것처럼 세계에 내놓을 만한 항해술이 없었을까?이 물음에 대해 서기 838년 바다를 통해 당나라에 입당한 일본의 유명한 유학승 엔닌은 미국의 한 동양학 교수에 의해 하나의 기록 또는 해답을 남기고 있다.라이샤워 교수가 `입당구법 순례행기`(入唐求法 巡札行記)를 번역한 `엔닌의 당나라 여행`(Ennin`s Travels in Tang China)에 따르면 세계사적 견지에서 볼때 9세기 경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신라와 왜 등 3국간 국제해상교역은 당대의 첨단을 걸었다. 또 그는 장보고를 `한국 무역 황태자`(Korean merchant prince) 라고 표현했으며 당시까지도 동북아 바다의 주인공들은 아직 신라 사람들이었다고 적고 있다.라이샤워가 당시 신라 사람들이 바다의 주인공이라고 한 것은 비단 동북아 해상교통의 중심이 청해진에 있었고, 국제무역의 주도권을 장보고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속에는 신라인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항해술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이 책에는 신라와 일본 뱃사람의 항해 역량에 대한 비교도 눈길을 끈다.엔닌이 당나라까지 바다를 건너 갔다가, 일본 배를 타고 산동반도 남해안까지 이르는 동안 항해는 매우 파행적이었다. 하지만 귀국 때 그를 태운 신라 선박들은 일본까지 8일만에 도착하는 등 큰 대조를 보였다. 또 다른 차이는 일본 사절단의 귀족들은 일본에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 60명의 신라인 타수(舵手)와 선원들을 고용했다.최근식 교수의 `신라해양사연구`는 신라의 뛰어난 항해술을 뒷받침하는 항해계기로 나침반의 원리인 지남기(指南器)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특히 장보고 선단의 항해사는 지문항법·천문항법·수문항법 등을 모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문항법은 육상이나 섬의 모양과 목표물을 보고 항해하는 것이고 천문항법은 해와 별자리 등 천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수문항법은 물의 깊이나 색깔을 파악해 위치를 알아내는데 장보고는 이들 항해술로 해류와 바람이 다른 한반도 남해와 서해, 남중국해 등을 자유자재로 다녔다.당시 신라와 당과의 무역로는 두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 방면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상하이(上海) 방면으로 통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남양만에서 황해를 건너 중국의 산둥반도 덩저우(登州)로 가는 길이었다.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자 덩저우 일대에서 양쯔강 하구의 연안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여, 이 지역에는 신라인들을 통괄하며 자치를 맡아보는 신라소라는 관청이 설치되고 도회지에는 신라인의 자치구역인 신라방이 형성되기도 했다.신라의 항해술로 인해 아랍인과의 교역도 가능했다. 물론 육로 교류도 활발했겠지만 무역상들이 개척한 바닷길로 인해 고구려, 신라, 가야, 왜, 백제 등 5국 가운데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로마풍의 유리구슬과 로만 글래스, 석류석, 황금보검, 정밀 세공된 금 부장품등이 발견되고 있다.□신라의 조선술지난 8월 삼한매장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09년 4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울진군 죽변면 등대 일원 도시계획도로 부지 내에서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7천500년전 신석기시대 목선(木船)과 노() 조각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울진의 목선 유물은 경남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됐던 환목선(丸木船)에 이어 두번째 세계최고 수준의 목선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전문가들은 또 소재는 단단한 녹나무로 만든 판재상의 목선편(板材狀木船)으로 추정되며 낚시(釣針) 축부(軸部, 몸체) 등의 유물 등과 동해안의 지형적인 여건 등을 감안할 때 목선을 이용한 어로행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경북동해안에서 일찌기 발달한 조선(造船)의 역사는 비록 뭍에서 물놀이용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경주 임해전(臨海殿)에서 발굴된 목선으로 이어졌다.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백제의 조선술을 계승·발전시켜 조선술이 더욱 발전했다. 839년 일본 조정에서는 신라에서 큰 풍랑도 능히 견뎌내는 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신라 배를 주문하도록 했다. 또 840년 기록에는 일본의 대마도사가 풍랑으로 한 해에 4번이나 조공 공물을 바다 속에 빠뜨리자 일본 조정이 가지고 있던 신라 배 6척 중 1척을 나눠줄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보아 신라 배는 우수한 기술로 일본에 여러 척 수출되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하지만 장보고의 암살 후 신라의 동북아 제해권이 소멸된 것처럼 신라의 조선술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낮은 편이다. 하지만 최근식 교수는 신라의 해양사 연구를 통해 신라 무역선이 중국 선박을 모방했다는 인식에 반기를 들고 신라만의 독창적인 `신라선`형 범선이 엄연히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신라선`이 일본의 국가사업에도 사용됐다는 점에 주시한다.대양항해에 적합한 첨저형(尖底型) 구조로 만들어진 것은 물론 유럽에서는 겨우 13세기 초에 나타났다는 선미타(船尾舵)라는 조타장치를 이 범선에 이미 설치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술의 발달 정도를 그대로 보여 준다는 것. 무역선은 목적항으로 직항하여 항해 일수와 정박 일수를 줄이고 가동률을 높여야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데, 신무왕의 즉위 사실이 지방에까지 즉각 전달된 것이나 외국으로의 선박의 운항 일수가 오늘날의 정기선 운항 일수와 비슷하다는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신라무역선이 이미 직항로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학설이다.엔닌도 `신라 배는 작지만 날렵하고 강하다. 또 동남풍과 서남풍을 이용해 남쪽으로 항해하는 역풍항해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포항 일대의 선박과 해운업1924년 부산항 화물 중 전국 2위동빈내항 일대 선박수리업 등 성업▲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복원해낸 신라배의 모습.지난 7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포항의 동빈내항 일대 부둣가에서는 선미가 특이하게 둥근 모습에 흰색 페인트를 칠한 대형 목제 상선들이 물길을 거슬러 오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 수송선들은 당시 일본에 까지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사진 마저도 구해 볼 길이 없는 추억이 됐다.포항시사에 따르면 포항항의 대일본 무역액은 1934년에 651만2천668원이었으며 주요 품목은 쌀과 사과, 방어, 전복, 대구, 청어 등 농수산품과 석탄, 비료 등이었다.1924년 통계에 따르면 부산항에 출입하는 화물 중 포항 지방의 것이 마산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를 차지해 포항항이 경북의 관문이자 주요 무역항이었음을 알 수 있다.당시의 선박들은 지금처럼 터빈기관이 아닌 소구(燒球, hot bulb)기관, 이른바 `야끼다마`를 사용했다. 당시의 기술 수준에서 선박의 기관 고장이 잦았던 만큼 대형 선박들은 수리를 위해 동해안 각지에서 포항의 조선소까지 와야만 했다.또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선박 관련 산업도 형성돼 일본에서 매입한 중고선들을 현해탄을 건너 몰고 와서는 낡은 기관을 수리해 멀쩡하게 둔갑시키는 몇몇 기관사들은 여러 선주들이 앞다퉈 모셔가느라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소구기관에서 터빈으로 넘어가는 선박기술을 습득하는 시기를 놓침으로써 어부나 일용직 건설노동자 등으로 사회계층이 강등되기도 했다.이와 함께 포항의 동빈동 일대 부둣가는 이들 조선소의 하청을 맡아 부품들을 전문 수리하는 이른바 `철공소`들이 밀집돼 호황을 누렸으며 아직도 일부가 남아 있다.경북동해안은 강원도에 까지 명성을 날린 목제 어선 목수들이 이른바 `배를 모으(제작)며`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계원2리와 구룡포읍 병포리, 울진군 죽변항 일대에는 국내산 소나무나 일본산 수입 스기목을 재료로 하는 소형 조선소들이 오랜 기간 동안 성업했지만 이제는 연안 어업의 쇠퇴와 FRP 재질의 선박에 밀려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1-02

삼국유사 첫 설화 `연오랑 세오녀`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다.하지만 삼국사기 조차 왕들의 정확한 대수를 정리하기 힘들었을 만큼 초기 신라왕실은 안정화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연은 `제8대 아달라왕 4년`이라며 자신있게 기록했다. 이는 운수납자 (雲水衲子)로 바람과 구름처럼 전국을 떠돈 승려였던 일연이 지금 포항 오천읍의 천년 고찰인 오어사(吾魚寺)에 머물렀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민속학자처럼 주민들로 부터 인근에 전해오는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듣고 취재했을 것이며 자신이 쓴 역작에서 첫 설화로 싣기에 이르렀다.`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가 바다로 나가 해조류를 채취하다가 갑자기 바위가 그를 업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하길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다”라며 왕으로 세웠다(일본 제기帝紀를 살펴 보면 그 전후로 신라 사람이 왕이 된 자가 없으므로 이것은 변방 읍의 소왕이지 진짜 왕은 아닐 것이다). 세오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찾으러 갔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았는데 역시 그 바위에 오르자 그 바위가 또한 그녀를 싣고서 전처럼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뢰며 왕에게 바쳐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이때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으니 일관이 아뢰길 “해와 달의 정기가 내려와 우리나라에 있었으나 지금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괴이한 일이 초래된 것입니다”하니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오도록 하였다. 연오가 말하길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짐의 왕비가 짠 고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하면서 곧 그 비단을 주었다.사신이 돌아와 아뢰고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해와 달이 그 전처럼 되니 그 비단을 어고에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 이름을 `귀비고`라고 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낸 장소 이름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3권 영일현조 김종직(金宗直)記`등을 인용한 `일월사적비`에 따르면 (포항의)일월지(日月池) 근처에 일월신을 모시는 천제당(또는 일월사당)이 있어 신라 때는 조정에서, 고려·조선 때는 영일현감이 친히 제사를 올리고 이 사당에 모신 신위를 일월신이라 부르고, 이 신위가 연오랑 세오녀 신위라고 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해병부대 내에 3천여평의 일월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매년 9월 중양절에 일월 제의를 행했으나 강점기 때 제단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2012-10-29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⑿

전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 뿐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일본이 근현대를 통틀어 세계를 주름잡는 선진국 대열에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편입된 후 최정점에 섰던 역사를 본다면 만용에 가까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의식에 뿌리내린 우월감에는 선진문물을 공급했다는 문화적 자부심이 자리잡고 있음은 분명하다.삼국유사에 실린 작은 설화에 불과한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 속에는 영일만을 중심으로 한 경북동해안의 선진 문물 전파의 역사와 함께 태양 숭배 사상이 암시돼 있다. 이를 통해 오늘의 우리는 결국 이 지역이 풍부한 문화가 깃든 삶의 터전이며 민족적 자긍심의 한 근거지임을 알 수가 있다.글 싣는 순서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 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12)연오랑세오녀, 태양신화와 문화자긍의 상징13)창해를 넘는 선박건조의 비밀-114)창해를 넘는 선박건조의 비밀-215)잊혀진 옛 항로- 116)잊혀진 옛 항로- 217)해양무역시대를 잉태하다학자들, 한일 교류 통로로 포항 영일만·경주 감포 등 꼽아日, `이마지 유래기`에 섬 최초 도착자로 옛 신라 남녀 기록포항 등 고구려 영향권 답게 삼족오의 태양사상도 연관□ 선진 문물의 전파자포항대학 배일용 전 교수가 사학자 천관우와 이홍식, 김정배 등의 자료를 연구한 결과 등에 따르면 사로국은 2세기 중반 아달라왕대에 이르러 영일만 일대를 실질적인 지배영역으로 복속하여 포항의 흥해에서 울산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이에 따라 연오랑과 세오녀를 중심으로 한 (포항이 근거지인) 근기국의 토착세력은 압박을 받게 되자 신라에 대한 복속을 피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일본서기와 고사기 등 일본 역사서를 재인용하더라도 일본고대사는 고대 한국인의 이주와 문화전파에 결정적으로 영향 받고 있다. 따라서 배용일 등은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의 이즈모시를 중심으로 한 산음(山陰)지역 변읍의 왕과 왕비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고사기(古事記)`는 진구(神功)황후에 대해 한반도에서 건너간 `천일창`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지 사료에 따르면 천일창은 자신의 아내를 찾는다는 구실로 일본에 상륙해 정벌한 것으로 기록돼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연관성이 분석되고 있다.이는 이영희교수의 `노래하는 역사`에서도 확신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데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2세기 중엽을 전후해 경북 동해안의 태양숭배 집단 등 토착세력이 비단과 제철 등 선진 기술문화를 갖고 일본의 출운(出雲) 지역이나 북구주(北九州)지방에 진출한 것이 유력하다. 특히 일본 학자는 연오세오고(延烏細烏考)를 통해 부부의 출발지를 영일현으로 보고 도착지를 일본 은기국(隱岐國)의 지부도(知夫島)로 파악하기 까지 했다.□ 신화인가, 설화인가?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 경주에서 동해로 내왕하는 주요 통로는 포항 영일만, 경주시 감포, 울산만의 세가지 항로가 있다. 고대 한일 양국이 영일만을 통해 교류하던 길은 거리와 항, 조류와 풍향의 영향을 고려할 때 필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영일과 같은 위도 36도 선상에 있으며 현 시마네현의 현청 소재지인 마쓰에시의 한 박물관에는 구니비키(국인·國引) 전설 그림이 전시돼 있다. 지난 1999년 포항문화방송의 특집프로그램에서 현지 전문가는 이 그림이 신라의 호미곶을 인용한 것으로 파악하며 한반도의 문명과 재화가 일본으로 전파되기를 염원한 것과 연관 있다고 인터뷰 한 바 있다.결국 학자들은 연오랑세오녀는 신화나 설화가 아닌 역사의 인물로 결론내리고 있다.많은 근거 가운데 해류와 바람을 이용할 때 포항에서 출발하면 자연스럽게 닿게 되는 시마네현에 남은 흔적들도 인용되고 있다. 이 중 시마네현 본토에서 배로 두시간 거리의 오키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파악된 `이마지 유래기`에는 최초로 섬에 도착한 사람이 가라의 사로국(신라의 옛 이름)에서 온 목엽인 남녀로 기록돼 있다. 학자들은 이를 통해 오키섬의 선조가 연오랑 세오녀라고 보고 있다. `포항市史`에 따르면 시마네 현 이즈모 시는 `신들의 고향`으로 불린다.이곳에 고대왕국을 건설했다는 스사노오미코토는 일본 천황가의 시조로 추앙되는 아마테라스의 동생으로 행실이 나빠 고천원에서 신라국 소시모리로 쫓겨났다. 하지만 곧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돌아와 이즈모 지역에 왕국을 세웠다.물론 이설(異說)도 있다. 포스코 미래창조아카데미 이영희교수는 연오랑이 간 곳은 이즈모가 아니라 다파나국, 즉 지금의 효고현을 중심으로 한 교토부 및 우쿠이현 일대와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호 서북쪽 마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신화가 역사가 될 때 그 속의 인물은 역사 속에서 더 구체성을 띠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한 현실은 실타래가 풀리듯 이해의 골을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연오왕 추모제일본 이즈모시에는 매년 음력 10월에는 일본의 신이 전부 모인다는 이즈모다이사가 열린다. 이때는 일본 창세기의 신을 모셨다는 히노미사키 신사 안에 있는 한국신사라는 현판이 붙은, 포항 방향의 왼쪽으로 향한 작은 신사에서 연오왕 추모제가 열린다. 이즈모시 카라가와쵸 산정에 있는 카라카마 신사의 카마는 가마솥이라는 의미로 용광로를 상징하고, 연오랑이 돌배를 타고 왔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암선`(岩船) 옆에는 이를 설명하는 게시판이 설치돼 있다. □영일의 정신적 뿌리는 일월 신앙연오랑 세오녀에는 모두 까마귀를 뜻하는 오(烏)가 포함돼 있다. 또 삼국사기에 기록된 설화에는 태양에 관한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포항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사실 등이 종합돼 예로 부터 일월향으로 불리어왔다.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포항을 삼족오 일월신화와 일월신앙의 중심지로 규정하고 있다.영일만이라는 양곡(暘谷)이 고대 한민족 문명권의 삼족오태양 신화가 이동 전승된 귀착지로서 한국의 대표적 태양(일월)신화의 성지라는 것이다.삼족오 신앙과 관련해 삼족오 문양 중 태양 안에 삼족오가 세발로 서 있는 것을 `일중삼족오`라 하며 태양 안에 날아가는 모습을 `금오`라 할 만큼 삼족오는 곧 까마귀이며 태양이다. 역사적으로 신라지역인 경북동북부의 영풍, 안동, 봉화, 청송, 울진, 영덕, 영일지역에서 고구려 지명이 나타나 있다. 이는 상당한 기간 동안 고구려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으로 영일의 북쪽인 청하와 흥해는 5세기경까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또 영일만 지역은 태양과 삼족오를 뜻하는 烏와 日月 관련 인명과 지명이 2천년 동안 현존하고 있다. 무엇보다 연오세오, 일월, 영일, 도기야, 오천, 세계, 일월지, 일광, 중명 등이 그것이다. 배용일 전 교수는 일생을 건 연구를 통해 영일만은 새로운 양곡의 개척지, 즉 일본 건국신화의 출발지라는 이데올로기를 세우기에 이른다.□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0-29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⑾

고대의 연오랑세오녀에서 부터 시작해 신라의 대외 진출 해상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한반도의 해안선을 괴롭힌 왜구의 출몰, 근대사의 일제 수탈에 이르기까지 경북동해안은 일의대수(一衣帶水)로 이어진 일본과 끊임 없는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 과정에서 반도에서 대양으로 나아가는 도전정신과 진취성, 새 문물을 주고받는 주역으로서의 개방성을 체득해나갔다. 또 외적의 침략에는 변방의 전사로서 항쟁의 대열에 나서기도 했다. 본지는 기획특집 `경북의 혼` 제2부에서 문물 교류와 해양 진출의 교두보가 돼 온 경북동해안에 이어진 역사적 연원과 그 정체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2부=해양개척과 도전정신의 터 11)해양교류와 개척의 기지(基地)12)도전의 시대 무역항로는 열리고13)창해를 넘는 선박건조의 비밀-114)창해를 넘는 선박건조의 비밀-215)잊혀진 옛 항로- 116)잊혀진 옛 항로- 217)해양무역시대를 잉태하다□일의대수(一衣帶水)의 땅흔히 한국과 중국, 일본의 관계, 특히 한일 간 애증의 역사를 거론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 `일의대수`이다.어원은 중국의 역사서인 `남사(南史)`의 `진본기(陳本紀)`에서 찾을 수 있다. 수(隋)나라의 문제(文帝)가 진(陳)나라를 공격하면서 양국 사이를 흐르는 양쯔강(양자강)을 두고 한 말로서 `한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고 할 만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대한해협을 현해탄이라 하지만 그 폭이 넓지 않아 두 나라 정치인들이 의원 외교 석상에서 단골처럼 등장시키는 수식어가 돼 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일본과 마주 보고 선 경북동해안에게 연오랑 세오녀 대(代)에 꽃핀 대 일본 교류와 우호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으며 저항과 극복으로 점철됐다.국내 연오랑 세오녀 연구는 주지하다시피 배용일 전 포항대 교수에 의해 새로운 지평들이 개척돼 왔다. 그의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등의 저작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까지도 영일만지역에는 `왜(倭) 가는 배 같다`라는 말이 전하고 있었다. 이는 배가 수십척씩 선단을 이뤄 지나가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오래전에도 일본과 해상로를 통한 이주와 교류가 얼마나 빈번하고 규모가 컸는지를 짐작케하는 비유인 것이다.이처럼 지리적 여건과 항해의 역사적 배경으로 판단할 때 영일만과 인근의 경주, 영덕과 울진 등 경북동해안은 고대로부터 일본과 울릉도, 남해 등지와의 해상교류 통로가 돼 왔다. 특히 영일만과 가장 가까운 일본 지역은 거의 같은 위도인 북위 36도 상에 있는 오키섬과 이즈모, 마쓰에 등이다. 신라에서 이곳으로 가는 항로는 첫째 영일만-대마도-이키시마-하카다만-오키섬-이즈모 구간, 둘째 영일만-오키섬-이즈모 구간 등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지난 1999년 포항MBC의 보도에 따르면 영일만에서 해류를 이용해 실험을 한 결과 부유물이 두번째 해로를 통해 표류했으며 실제 우리 동해안의 각종 쓰레기가 오키섬의 구니가 해안으로 떠내려가고 있다.이를 근거로 할 때 영일만 등 경북동해안과 일본 간 왕래의 기착지인 오키섬은 고대에 역사와 지리적으로 한국과 일본 문명을 이어주는 중계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필원잡기`와 `동국여지승람`의 문헌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자들도 오키섬이 한반도 이주민이 정착을 주도해 이룬 고장이라고 인정하고 있다.□풍부한 어염(魚鹽) 등 물산본지는 지난 2009년 5월 11일 발견된 포항중성리신라비를 특종 보도함으로써 현존하는 최고 신라비로 인정받는데 한 역할을 한 바 있다. 중성리비의 존재가 확인되기 전에는 지난 1989년 4월 6일 발견된 영일냉수리신라비가 현존 최고 신라비로서 국보 264호로 지정됐다. 이 두 비석에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을 종합하면 재산 분쟁에 관련된 내용들이 확인되고 있다.경북 동해안에서 재산 분쟁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재화가 이 지역에서 생산됐음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이 재화를 두고 여러 연구가 있지만 결국 동해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어염(魚鹽)과 해산물이 주요 대상이 됨을 알 수가 있다. 일찍이 고구려가 동예 지역의 어염 확보를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신라 또한 동해에서 생산된 물산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이는 당시 신라왕실 및 귀족들 간에 매우 첨예한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잘 알 수가 있다. 또 비옥하고 넓은 농경지에서 생산된 양곡도 신라 왕경에 상당한 재화를 제공했음을 각종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지난 2009년 10월 포항시청에서 열린 포항 중성리 신라비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에 실린 논의 경작 면적을 분석한 결과 경주가 약 1천70결, 포항이 약 1천36결로 나타났다. 고대부터 해안지역인 포항이 내륙인 신라의 수도 경주의 관문지역으로서 거의 비슷한 농지를 보유했다는 사실은 신라 국가와 귀족들의 재정 유지를 위한 최적의 인접 배후지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 정복신라는 중고(中古)기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을 하며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동북방 진출은 동해안 연근해 해로를 최대한 활용하여 북방의 거점 확보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동해안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다. 신라는 이를 통해 최전방 군사기지에서 한반도 중부의 동해바다로 나가는 출항지를 확보해 우산국 정복의 기반을 구축했다. 왕실 출신 진골 귀족으로 유능한 이사부는 귀족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원하고 동해안 진출과 가야 정복 등 무인의 역할과 국사 편찬 등 문인의 역할로 신라가 후진의 열세를 극복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는 업적을 남겼다.우산국은 당시 신라에 조공을 거부할 만큼 동해상에서 하나의 독립된 해상세력으로 상당한 위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와 왜와의 해상교통로 중간 경유지에 있는 우산국의 정복으로 신라는 양자의 교섭을 차단하는 이익을 확보했다. 이로써 신라는 동해의 중북부 해역을 무대로 하여 연해주로 부터 한반도 동해안, 일본 열도까지 포괄하는 관계 속에서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또 하나, 우산국을 정복할 당시 이사부 수군의 출항지에 대해 울진지역설, 강릉과 삼척 등 강원도지역설 등 이론이 있지만 현재 울릉도와 독도가 경상북도에 속한 만큼 별도의 언급은 생략한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0-26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⑽

▲ 조선시대의 풍수학자 이성지가 예언한 대로 영일만 모래바람 속에 세워진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의 항타 파일은 흡사 대나무의 모습이다.본지는 지난 8월부터 기획특집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를 연재해 경북동해안에 내재된 역사문화사회적 원류를 고찰함으로써 경북의 정체성에 또 하나의 곶간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에 나섰다. 이를 위해 지난 8회에 걸쳐 `제1부 경북동해안 철기문화를 꽃 피우다`를 통해 선사시대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를 무대로 초기 국가들의 명멸(明滅)과 정치경제문화의 발전에서 鐵器(철기)가 첨단소재의 정점에 서는 과정을 짚어봤다.이제 본지는 포항을 중심으로 싹튼 철기문화의 씨앗이 포스코의 영일만 신화를 통해 숙명처럼 실현되는 과정에 이름으로써 제1부를 마무리하고자 한다.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1)프롤로그2)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3)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4)경북 동해안의 소국5)동예인들의 후예6)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7)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8)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9)고래의 고장 영일만10)철기문화의 맹아, 포스코 신화 낳다조선 풍수학자 이성지, 현재 제철소 인근 유람하다“대나무가 나면 수만명 살 곳… 모래밭 없어져” 예언영일만 척박한 환경 극복 `한국 근대화` 상징 우뚝□ 쇠부리터의 고장 영일만본지는 이번 특집을 통해 경북동해안에서 포항의 철기 유적과 유물이 북구는 흥해읍 옥성리, 마산리, 학천리, 성곡리, 대련리, 냉수리 등에서 발견됐음을 거론했다. 기록에 의하면 북구에는 이밖에 죽장면 상옥리 무쇠골의 철광산, 기북면 성법리 일대의 철물 생산이 기록돼 있으며 남구에도 호동 고분군의 철기유적과 도심이 들어선 이동의 무소마을, 대보면 대보리 단야(鍛冶) 유적지 등이 산재해 있다.또한 블루밸리 산업단지가 들어설 예정인 장기면 일대에도 이른바 쇠부리터(야철지, 冶鐵址)로서 방산리 불미골이 추정되고 있다. 지난 2006년 향토사학자 이상준씨 등 장기발전연구회가 발간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등의 자료에 따르면 `불미`란 `풀무`의 사투리로서 대장간이나 제철소에서 용철로(熔鐵盧)의 연소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공기를 분사하는 장치이므로 제철소가 있던 골짜기임을 짐작케하는 근거이다. 장기에는 또 계원2리 적석(赤石)마을이 철이 생산된 곳으로 전하며 산서리 월산마을에는 1960년대까지도 수연(水鉛, 몰리브덴, 스텐레스강 등의 합금재료) 광산이 있어 `쇠점이`즉, 쇠붙이를 판매하던 점포라는 마을이름이 있었다.역사나 신화적으로도 연오랑세오녀 신화 등을 통해 이미 영일만 일대가 남구 동해면 도구리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철기문화를 일본으로 전파하는 요충이 됐다는 학설이 근거를 더하고 있다. `노래하는 역사`의 저자 이영희 포스코 미래창조아카데미 교수는 예로부터 형산강과 남구 오천읍 일대는 사철(砂鐵)을 건져 낸 무쇠의 내였고, 신화의 무대인 청림동 일월지(日月池)는 쇠부리터의 중심지며, 그 우두머리가 연오랑과 세오녀라고 주장해왔다.□ 철강산업 맹아론에 대한 경계이처럼 포항이 제철의 중심으로서 오늘 대한민국 철강의 산업기지가 됐다는 맹아론(萌芽論)에는 경북동해안에 철강산업을 위한 천혜의 조건이 갖춰져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분명히 확인된다. 또 그 취지 만큼이나 학계는 물론 산업계 연구소들의 고증도 상당한 성과를 낸 덕에 포항은 국내 철강사의 보고로서 충분히 자리잡고 있다.하지만 향토사학자 강호진씨(포항 영일중 교감)가 지난 1988년 계간 `포항연구`창간호에 실은 `영일 호동 폐고분군 조사보고`에 따르면 국내에는 과거 영일군 오천면의 `연일57호`를 비롯해 영남에만 모두 24곳의 철광산과 야철지 등이 산재해 있다. 구체적으로 경주 전곡면, 경산군 남천면, 달성군 거창면, 경남의 양산군 물금면, 김해군 대동면, 하동군 악양면, 동래구 망미동 등이 그곳이다.따라서 곳곳에 철광산이나 그 유적이 산재했다는 근거만으로 이곳이 현대 제철산업의 부지로 천혜의 땅임을 강조하는 맹아론이라면 견강부회라는 반박에 빌미가 될 수 있다. 특히 이 땅에 꽃핀 철기문화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중세봉건제 하 조선을 거치면서 퇴락할 대로 퇴락하고 일제는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은 조선에서 황해도 겸이포와 청진을 낙점하고 제철소를 가동했다.□포스코, 신화가 현실이 되다결국 찬란했던 민족문화와 제철 과학기술은 끊어질 듯 명맥만 유지한 채 이어지다가 마침내 지난 1960년대 포항종합제철의 건설로 혁명과 같은 전기를 맞게 된다. 자생적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척박한 시기에 토목과 금속 등 당대 한국의 일류 공학자들과 함께 제철소 후보지를 검토하던 박태준에게 영일만이 선택된 것이다. 그에게 모래 바람이 불어대던 경북동해안의 한 포구는 제품과 원료 수송선 접안을 위한 깊은 수심과 부지 면적 등 제반 조건은 물론 북한의 공격권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최적의 입지로 확정됐다.이는 근대적 세계관에 어느 만큼 근접했을지 알 수 없는 조선의 한 풍수학자에 의해 일찍 예견됐다는 흥미로운 일화로 전해진다. 조선 숙종 때, 관상감에 근무하며 천문, 지리, 지상, 잡학의 대가였던 이성지(李聖至)가 친구를 만나고 유람도 할 겸 어룡사(魚龍砂) 부근에 찾아온다. 어룡사는 형산강 하류를 중심으로 남과 북, 즉 포항제철소 부지와 포항 송도해수욕장 전역의 옛 지명이다.그는 현지의 선비들과 함께 이 일대를 둘러본 뒤 `서편의 운제산이 십 리쯤만 떨어졌어도 수십만의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며 `이만한 지형이라도 좀 늦어지기는 하겠지만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지방선비들이 `풀 한 포기 없는 백사장에 어찌 수십만의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라며 믿으려 하지 않자 다음과 같은 시를 뇌었다.`竹生魚龍沙 可活萬人地 西器東天來 回望無沙場 (죽생어룡사 가활만인지 서기동천래 회망무사장)`즉, `어룡사에 대나무가 나면 가히 수만 명이 살 곳이니라. 서쪽 문명이 동방에 오면, 돌이켜 보니 모래밭이 없어졌더라`는 뜻이다. 그의 예언 대로 하늘을 찌를 듯한 제철소 굴뚝이 대나무처럼 우뚝우뚝 서고 포항은 이제 인구 53만명의 특정시로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모래바람을 극복한 경북의 혼하지만 이 같은 신화에 이르기까지 영일만의 척박한 환경은 포스코의 시작에 큰 걸림돌이었다. 건설 요원들은 사막전의 병사와 같았고 건설사무소는 독일군 영웅의 야전지휘소를 연상케한다며 애칭이 `롬멜하우스`였다.1968년 6월15일 부지 성토 및 정지 착공식 이후 포항제철의 창업 주역과 영일만의 해풍에 단련된 경북동해안의 건설 역군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농어민의 아들과 함께 `산업의 쌀`, 철강을 생산하는 제철소 건설에 매달렸다. `보릿고개의 나라`, 한국의 근대화는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라는 국가적 모험이 성공함으로써 식민지배에 이은 한국전쟁 60여년 만에 `세계 7대 무역대국,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기적을 낳게 됐다. 이로써 먼 옛날 신화의 세계가 암시하고 선사와 역사의 유적으로 배태된 철기문화는 영일만에서 현실이 됨으로써 경북의 혼 속에 첨단의 경쟁과 도전·극복의 기질이 숨쉬고 있음을 증명해냈다.1부 끝□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0-23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⑼

경북을 나타낼 때 웅도(雄道)로 표현한다. 雄의 한자를 풀면 `수컷, 씩씩한, 강력한`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남자들의 거친 야성과 씩씩하고 강하다는 인상이 연상된다. 역사적으로 경북 동해안 주민들은 끊없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냈고 임진왜란과 일제압제의 국난을 맞아서는 곳곳에서 의병활동을 벌이는 등 구국의 일선에 섰다. 경북은 또 한국전쟁 마지막 보루로 남아 분연히 나라를 지켜냈다. 남자다운 기백과 용기로 표현되는 웅도의 혼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다.거친 남자의 야성은 바로 해양인의 기질로 대변된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끊임이 도전해 가는 바닷가 사람들의 기질이다.경북은 335km에 달하는 긴 해안선을 따라 바람 잘난 없고 파도가 세기로 유명한 동해를 마주하고 있다. 웅도의 기백은 바닷가 사람들이 수 천년 동안 일궈온 해양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기잡이 어부들이 만들어 놓은 해양문화 가운데서도 고래잡이는 해양문화를 꽃피우고 해양인의 기질을 길러준 으뜸 문화로 평가할 수 있다.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 □고래의 고장 고래는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지구상에 존재했고 현재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큰 동물로 분류되고 있다.외형은 어류와 비슷하지만 내장기관은 육지 포유류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폐로 호흡을 하고 자궁에서 태아가 자라고 배꼽이 있다. 암컷은 하복부에 1쌍의 젖꼭지와 유선이 있고 귀까지 있다.고래를 몸이 두꺼운 지방으로 싸여 있어 수온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항온동물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빨의 유무에 따라 이빨고래아목과 평생 이빨이 나지 않는 긴수염고래아목으로 크게 분류된다. 수염고래아목은 현재 4과6속 11종, 이빨고래아목은 9과34속70여종이 있다.긴수염류는 거의 대형종으로 이빨이 없어 플랑크톤이나 멸치와 같은 작은 어류를 수염으로 걸러 먹는다. 이빨고래류는 오징어와 새우, 게, 물고기 등을 잡아먹고 산다.고래는 세계 모든 연안에서 서식하고 있으나 한국 근해에는 3과 8종이 알려져 있다. 동해에는 주로 밍크고래와 돌고래가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세계적으로 한국 이름을 단 고래도 있다. 한국계 귀신고래(Korea Grey Whale)로 수천년 동안 동해에서 참고래와 함께 가장 흔한 고래였고 `귀신처럼 신출귀몰하다`해 귀신고래로 이름지어졌다. 미국의 과학자가 1912년 울산에서 이 고래를 연구하고 학계에 처음 보고하면서 알려져 고래류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남획으로 멸종위기를 맞으며 지난 70년대 중반 이후 동해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국립수산과학원은 현재 귀신고래 개체 복원을 위해 포항 호미곶 앞바다를 중심으로 귀신고래를 추적 조사작업을 벌이고 있다.고래는 18~20세기에 전세계적으로 남획되면서 멸종위기에 놓이자 고래자원 보호와 포경업 규제를 위해 1946년 국제포경조약이 체결됐다. 이후 1982년 상업포경 전면금지를 가결한 뒤 1985년 원양포경 전면금지에 이어 1986년 연안포경까지 전면금지됐다.동해안 어민들과 가장 친숙한 고래는 역시 돌고래와 밍크고래이다. 동해안은 포경이 금지되기 전 구룡포와 장생포항이 고래잡이 주어항으로 명성을 얻었다. 구룡포보다 도시규모가 크고 포경선단 세력이 우세한 장승포가 아직까지 우리나라 최고 고래잡이 어항으로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동해안 출현하는 고래류는 귀신고래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빨류고래류는 주로 오징어와 새우류, 게, 회유성어류와 먹이사슬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동해안 고래도 먹이사슬에 있는 어류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포경이 금지된 이후 대부분의 고래는 그물이나 통발 어구 등에 걸려 죽은 채로 잡힌 것을 시중에 유통, 식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어구에 잡힌 고래는 경찰에 신고한 뒤 혼획(죽은 채 잡힌 것) 또는 포획여부 조사를 거쳐야 판매할 수 있다. 해양경찰서에 혼획신고된 고래류 위판 결과에 따르면 대개 3~5월, 9월~11월 사이에 가장 많이 잡힌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고래의 주된 먹이사슬인 오징어의 회유경로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오징어는 동지나해역에서 산란을 하고 동한난류를 따라 동해로 이동을 하면서 성어가 된다. 보통 3~5월께 동해안을 지나고 여름철 동안 러시아연안까지 북상한 뒤 9월부터 동해안쪽으로 다시 남하를 하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동해안 어민들은 오징어가 동해안을 북상, 남하하는 시기에 오징어잡이 성어기를 맞는다. 오징어와 함께 고래는 동해안 어민들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을 하며 독특한 해양문화를 형성했다. □동해안 해양문화 해양문화는 어민들이 거친 바다와 싸우며 만들어낸 바닷가 사람들만의 생활방식이다. 대양에서 어군을 찾고 고기를 잡는 일상을 통해 모험과 도전, 개척과 진취성이 주민 정서로 정착됐다. 바닷가 사람들은 당장 먹을 식량이 없어도 기가 죽거나 걱정을 하지 않는다. 바다에 나가 고래와 같은 대형 어류를 잡거나 그물 가득 고기만 걸면 모두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일견 무모하고 한탕을 노리는 지나치게 투기성의 호기로 치부될 수 있으나 모험가적 기질 또는 남자다운 호방함으로 달리 볼 수도 있다.고래잡이는 이러한 해양기질과 해양문화를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했다.고래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큰 동물로 무게가 최고 14t에 이르는 대형동물이다. 육지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의 최대 무게 5t의 거의 3배에 가깝다. 현대 문명은 사냥기술의 개발로 발전해 왔다. 바닷가 사람들은 고래사냥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켜왔다고 볼 수 있다. 고래는 워낙 크기 때문에 일반적인 그물 어구 등으로 포획이 불가능하다. 밧줄을 단 대형 창으로 고래를 찌른 뒤 고래가 힘이 떨어지거나 죽을 때까지 기다려 포획하는 방식이다.대형 고래를 쫓기 위해 기동성이 뛰어난 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조선술을 발전시켰다. 또 포유동물인 고래가 호흡을 위해 수면으로 올라오는 순간을 포착하거나 추적을 하기 위한 항해술 개발도 필수다.포획된 고래는 식품으로도 사용하지만 고래의 몸을 싸고 있는 두꺼운 지방층에서 얻는 어유(고래기름)의 쓰임새가 크다. 고래기름은 식료품과 화장품, 비누, 양초 원료 등 다양하게 사용됐다. 고래기름은 양초로 이용될 만큼 연소성이 우수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석유나 휘발유 등 화석연료나 전기가 개발되지 않았던 시대에 고래기름은 뛰어난 연료 기능을 했을 것이다. 강도가 높은 철기를 제작하는 제련기술개발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함으로써 선진문명을 창조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이렇게 형성된 선진 철기문명의 토대로 동해안에 강력한 부족국가를 건설하고 무역항로를 개발해 일본에 선진 문명을 전파했다. 거친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고래를 쫓았던 해양인들의 도전정신과 고래잡이에서 얻은 조선기술 및 항해술, 제련기술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 조선강국, 철강대국을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는 가정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동해안은 다양한 고래잡이 문화가 현존하고 있다. 바닷가 마을마다 `고래돌`이란 바위명이 있다. 고래가 호흡을 위해 수면에 떠있는 모습을 연상해 주민들이 지어놓은 바위이름이다. 고래를 부위별로 해체하는 전문 직업도 있고 고래고기 전문식당도 있다. 어릴적 고래고기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고래고기 식당을 즐겨 찾는다. 동해안은 예나 지금이나 고래의 고장이다. 해양인들의 도전과 모험은 웅도 경북의 혼으로 스며있다.□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10-12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⑻

영일만 인근은 철 생산의 보고였다. 원삼국시대 이전 고대로부터 이곳은 철생산의 최적지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문헌상으로 잘 나타난다. 문헌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근대에 이르기 유적이 전해지는데 흥해읍 근처 양덕동의 조선시대 야철지, 구룡포읍 후동리의 병기를 만들던 주철장, 눌태리의 불미골, 동해면 금광리 구리와 갈탄, 백탄생산지 장기면, 죽장리 구리생산지, 흥해읍 금장동의 금생산지, 죽장면 가사리의 일제시대 백탄과 솥을 생산하던 곳 등이다. 또 구전으로 전해지는 곳은 장기읍 금오리에 쇠가 많이 남으로, 쇠골로 부른 곳이 있는데 쉬어가는 골짜기가 변하여 쇠골이 되었다는 설도 있어서 확실치가 않다. 하여간 영일만 지역에서 일어난 기록과 구전을 종합해 보면, 영일만은 입지나 기록으로 보아도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철기문화의 발생지로 최적지임을 시사하고 있다.글 싣는 순서 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철기문화 입지로서의 영일만고대 철기문화 발상지는 철광석을 녹여서 쇠를 만드는 제련로 유적과 1차 가공한 중간소재로 공구와 무기류를 만드는 단야로 유적으로 구분된다. 제련로 유적은 온도, 목탄투입 등 노와 관련된 작업이 중심이 되다보니, 주위에 강이나 소하천을 낀 곳이 많다. 반면 단야로 유적은 주거지의 노지주변에서 작업을 함으로써 주거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것이 고려시대 이후가 되면 단야로 유적은 단위 작업장인 소규모 공방지로 변하고 있다.제철유적은 시대에 따라서도 입지를 달리하고 있는데 원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철의 경제적 효용성과 야철장인의 사회적 지위로, 철광산에서 멀지 않은 평지나 전망이 좋은 구릉상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던 것이 고려시대 이후가 되면 사람의 왕래가 어려운 깊숙한 산지나 골짜기로 스며들고 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연료의 효율적 공급이란 설과 정부의 철장제 실시로 제철을 다루던 장인들에게 과다한 조세부담을 시킨 설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영일만은 동쪽의 장기곶을 중심으로 부근에는 해안단구가 발달하고, 행정적으로는 흥해읍, 동해면, 구룡포읍, 대보면, 장기면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만의 남서쪽에는 형산강과 넓은 충적평야가 있고, 만의 북서쪽은 내연산, 보현산, 향로봉, 비학산 등 비교적 높은 산들과 함께 능선사면을 따라서 울창한 산림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또 그곳에서 발원한 곡강천을 비롯한 여러 소하천들은 곡간평야를 거쳐서 동해로 유입되고 있다.영일만의 이러한 자연입지는 고대 제철로의 입지조건들과 흡사하여, 제철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실질적으로 죽장면 상옥리 무쇠골에는 신라시대 철광산, 남구 이동의 무소마을에서는 수철이 생산되었고, 그 외 일대의 바다와 강으로 볼 때 사철 생산도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되어 향후 이 지역에서 제철유적의 발견 가능성을 더해 주고 있다. 또 영일만 근처의 울창한 산림지역은 제철 연료공급처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이러한 제철유적 입지조건 때문인지, 영일만 일대는 제철및 기타금속과 관련된 유적이 오래전부터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실물기록은 포항 대보면 대보리 95호 석곽묘에서 집게, 망치, 모루 등 단야공구가 출토된 유적이 있다. □실체적 영일만의 철기문화는영일만은 이처럼 북서쪽의 능선과 형산강변의 충적평야를 배경으로, 일찍부터 고대인들이 철기문화와 그와 관련된 유적들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철기문화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청동기유적으로는 주거지, 지석묘군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지석묘유적은 당시 지배자 계층의 묘로 회자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출토된 홍도, 마제석검, 석촉 등은 당시의 높은 기술수준으로 제작된 유물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가진 영일만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대보면, 구룡포읍, 동해면 등에서 확인되며 이 지역은 그 다음 시대인 초기철기문화의 태동지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초기철기시대의 영일만에는 만에서 멀지 않은 흥해 학천리와 마산리 등에서 이 당시의 무덤인 석관묘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의 특징은 암반층을 파고 판석과 할석으로 조립한 석관을 만들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는 것이다. 석관묘 유물로는 검파두식, 동검, 동경, 석촉, 석착 등으로 청동기와 함께 석기가 부장되던 무덤이기도 하다. 석관묘를 만든 사람들은 청동기시대 석기와 토기를 제작하던 높은 기술 수준을 배경으로, 청동광석을 녹여서 청동기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철기제작도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실제 동해안 지역을 제외한 타지역에서는 석관묘 단계부터 청동기와 함께 철물도 부장되고 있다.초기철기시대 이후인 원삼국시대부터는 영일만의 철기문화가 보편화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성행한 목곽묘와 그 무덤에서 출토되는 많은 철제유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목곽묘는 판재형 목곽에 장신구를 장식한 주인공과 토기류, 철제유물을 함께 묻고 있다. 장신구류는 금 은, 비단은 아직 사용하지 않았지만, 수정, 마노, 호박과 같은 옥과 구슬은 옷에 궤메거나 귀걸이, 목걸이 등으로 장식한 유물을 가지고 있었다. 토기류도 특이한 기형들이 묻혔으니, 주머니호와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장경호, 화로형 토기 등이 대표적 유물이다. 철기류는 농공구류와 무기류가 주류를 이루는데 농공구류는 다비, 보습, 쇠스랑, 낫, 괭이 등 농어업과 관련된 유물이다. 이에 비하여 무기류는 철검, 대도, 쇠창(철모), 철촉 등 실제 전투에서 사용한 유물들로서 당시의 전쟁상황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무덤과 유물들은 영일만 주변인 흥해 옥성리, 마산리, 학천리, 성곡리 지역에서 확인됨으로, 원삼국시대의 영일만 지역은 철기문화의 보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국시대 보편화하는 철기문화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영일만의 철기문화는 대보면 대보리를 비롯한 대각리, 도구리 등의 무덤에서 발굴된 자료들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무덤의 모양은 비록 소형 석곽들이지만, 무덤마다 경질의 토기류, 장신구류와 철기류가 들어 있었다. 이 가운데 철기류는 농공구류, 마구류, 무기류, 생활용구 등으로 재구분할 만큼 다종다양해졌다.토기류는 고배류, 호류, 장식류 등이 묻혀서 그 당시의 생활상과 정신세계를 들여다 몰 수 있다. 철기류는 앞시기의 다비, 보습, 쇠스랑에 이어서 쇠도끼(철부), 쇠낫(철겸), 도자, 철착, 꺾쇠 등 농공구류와 재갈, 등자 등 마구류, 대도, 철검, 철모, 철촉 등 무기류 등이 무덤마다 빠지지 않고 묻히고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 영일만 철기문화가 소형석곽에도 묻힐 만큼 보편화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이 철기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영일만의 고려, 조선시대 철기문화는 삼국시대에 이어서 계속된 흔적이 곳곳의 야철지와 목탄지 등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유적 주변에서는 목탄편과 불을 맞은 돌, 슬레그 등도 수습됨으로 이 지역이 철을 다룬 곳임을 증명한다. 그런가하면 영일만 주변인 기북면 성법리는 일제강점기까지 주물소로 운영된 곳이라써 영일만의 철기문화가 주변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일만은 시대별 철기문화의 상황에서도 고대로부터 철기문화가 발전하기에 최적지였음을 입증하고 있다.□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09-28

경북의 혼(魂)을 찾아서 ⑺

철은 신소재였다. 당시로서는 하늘이내린 선물로 여겨질만했다. 청동기를 사용하던 고대인들에게 철은 강인하고 실용적인 측면 때문에 지배도구로서의 역할도 가능했다. 철기시대 초기에는 무른 재질의 운철을 사용했다. 기술의 발달로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들어 내면서 본격적인 철기시대를 맞게 됐다. 이 시대의 철을 가진자는 철을 이용하여 무기와 농공구류를 만들어 세상을 지배했다. 철제품은 국가의 전매사업으로 교역에 이용되기도 했다. 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글 싣는 순서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2)경북동해안과 고인돌3)경북 동해안의 소국4)동예인들의 후예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8)고래의 고장 영일만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한반도 제철기술은 중국으로부터 두차례정도 전래되었는데. 한국식동검문화를 기반으로 하던 BC 4-3세기경 중국 연나라 제철기술이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이 때 한반도에서는 무기류, 의기류 등은 여전히 청동기로 만들고 있었지만, 농공구류는 신소재인 철로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BC 2-1세기경의 전한(前漢) 말기에는 일시적으로 철전매제가 폐지되면서 제철기술이 다시 한번 한반도에 전래되었고, 이때부터 한반도의 철기사용이 보편화됐다.한반도 남부지역 철기문화는 전한 말 제철기술이 전래되는 시점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 때는 지금껏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던 것을 철제 농공구류와 함께 무기류도 단조철기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철기를 가진 자들은 철제 농공구류를 이용하여 목제농기구와 선박 등을 제작함으로써 농어업의 생산성도 높였다. 이러한 생산성을 배경으로 철을 가진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사회통합과정을 이루어갔고, 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해갔다.□제철기술의 발달과 신라의 성장제철기술의 발달은 국가형성과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와 교역에서 중심에 서기도 한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변진에서 철이 생산되어 마한, 동예, 왜가 와서 사가고, 낙랑과 대방에는 철을 공급하였다란 기사가 있다. 이것은 당시 변진한이 철을 주요 교역품목으로 할 만큼 대규모시설을 갖춘 지역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대규모시설이란 철광석을 녹이는 제련로를 비롯한 연료제작용 목탄가마, 철을 재가공하는 용해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단야로 등 여러시설중 상당부분의 시설을 갖춘 곳을 말한다.현재까지 영남지역에서 확인된 대규모 제철유적은 경주 황성동과 밀양 사촌리유적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밀양 사촌리 제철유적은 6-7세기경의 유적으로 철광산, 제련로, 목탄가마 등을 갖추고 철을 직접 생산하던 대규모시설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은 유구와 출토유물을 분석한 결과, 선철을 녹이는 용해로, 주물, 단야로 등을 갖춘 또 다른 대규모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라는 경주 인근인 황성동에서 철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지만, 울산 달천광산 등에서 1차 가공된 철을 가져와 완제품의 철기를 생산하던 대규모 제철시설이었다. 이러한 제철시설을 신라의 중심권 가까이에 둠으로써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힘의 원천이 된 것이다.□신라의 동해안 진출이전의 정치적 상황신라가 동해안 진출이전에 이 지역에는 울진 우중국(優中國), 영덕 우시산국(于尸山國), 포항 근기국(勤耆國) 외에 안강 읍즙벌국(音汁伐國), 삼척 실직곡국(悉直谷國) 등 문헌에 등장하는 소국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국들의 정치적 상황은 문헌과 고고자료의 태부족으로 현재로써는 알 수가 없다. 다만 AD 2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신광토성, 북미질부성, 남미질부성 등이 소국과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가 동해안 진출이전의 이 지역의 생활상과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만한 자료로는 주거지, 무덤, 출토유물 등으로 짐작할 따름이다.먼저 주거지는 울진 오산리에서 확인되었는데 땅을 파고 만든 네모난 집의 한쪽 벽을 따라서 형성된 쪽구들이 확인되었다. 쪽구들의 구조는 철을 가진자들이 철 생산에 사용된 고화도의 제철로 원리를 주거환경에 변용시켜서, 난방에 이용한 것이다. 또 무덤유적인 포항 흥해읍 옥성리, 마산리, 학천리, 성곡리 등에서 발굴된 자료를 보면. 땅을 파고 판자형 목곽을 설치한 후 내부에 토기와 철물, 장신구 등을 부장하던 목곽묘가 성행하고 있다. 목곽묘에는 다종다양한 철물이 묻혔는데 쇠도끼(철부)를 비롯한 농공구류와 쇠창(철모), 유자이기, 화살촉(철촉) 등과 같은 무기류가 함께 묻혔다. 이처럼 목곽묘의 주인공이 농공구류와 무기류를 같이 가지고 있다가 묘에 묻혔다는 사실은, 당시 철을 많이 가진 자가 지배자였음을 시사한다.특히 동해안 지역은 원삼국시대 초기부터 철을 가진자가 세력을 떨치던 지역이라서 철을 가지는 열망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철과 철제품이 어디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경로로 그들이 철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당시 주거지에서 제철과 관련된 고화도의 불을 이용한 점, 목곽묘의 다종다양한 철물이 묻힌 점 등은 신라가 이 지역에 진출하기 전부터 이곳은 철을 다룰 줄 알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신라의 동해안 진출 이후의 정치적 상황신라의 동해안 진출은 소국 정벌과 함께 AD 3세기 경에는 고구려, 동예 등 북쪽의 이민족들과 영토분쟁을 벌리면서 정치적으로 급박한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4세기경 이후에는 삼척, 강릉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신라가 이 지역에 대하여 정치적 안정화를 이루면서 지역발전에 힘쓴 모습들이 울진 봉평비와 포항 냉수리, 중성리비 등 동해안 지역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나타나고 있다.신라가 동해안에 진출하여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룬 증거이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과거 이 지역의 수장을 지방 통치자로 임명하거나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고 있다. 그 결과가 울진 봉평리, 읍남리, 영덕 덕곡리, 괴시리, 포항 냉수리, 대련리 등의 대형무덤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묻힌 토기류, 철제유물 등도 중앙의 유물과 기형이나 재질면에서 유사성을 보임으로, 이 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신라가 동해안 진출 이후에는 철기를 가진 자들이 유물의 기형과 질, 양적 면에서 중앙관리와 별차이가 없다. 그뿐 아니라 포항 대보면 대보리 95호 석곽의 단야공구인 집게, 망치, 모루 등은 이 지역에서도 자체철기를 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신라가 동해안 진출이후에 만든 소형무덤에서 조차 철기와 철기 제작도구가 출토되는 것을 보면, 철기문화가 보편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일련의 증거들이 당시 이 지역에서 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하여 제철에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2012-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