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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팬덤 신드롬

김병래시조시인신(神)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왕과 제사장은 물론 로마 총독까지 엄존하는 당시의 유대 땅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심지어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같은 경건주의자들보다도 세리나 창녀 같은 하층민들이 오히려 구원받기 쉽다는 말까지 했으니 어찌 무사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한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것이지 세상의 부나 권력의 평등을 말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 간에도 서열이 있다. 무리의 질서를 유지하고 우수한 형질을 유전하는 등의 종족보존본능에 따른 것이다. 인류도 처음에는 거기서 출발했으나 문명의 축적에 따라 우두머리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온갖 수단이 동원되어 종교나 정치의 지도자를 신격화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 권세를 옹위하고 떠받치는 무리들이 있게 마련이고, 일반 백성들은 권력자를 추앙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심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했다.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절대존엄’이라고 통치자를 우상화하는 집단도 있지만 대다수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표방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다. 선출된 지도자들은 국민의 계속적인 지지와 호응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할 것이고, 개중에는 포퓰리즘이나 프로파간다 같은 극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히틀러나 스탈린은 물론 대다수 독재자들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듯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패망으로 몰고 가는 지도자를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어떤 대상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팬덤(Fandom)이라 한다. 유명 운동선수나 인기 연예인이 주로 팬덤의 대상이 되는데, 팬덤을 형성하는 심리적인 이유나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기세를 떨치고 있다. 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반목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지지하는 정치성향의 인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가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갖 비리와 부정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거나 고발을 당한 자들을 지지하는 무리들이 자행하는 맹목과 광기에 가까운 행태는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름께나 있는 인사들까지 앞장서서 불법과 비리와 파렴치를 옹호하고 나서면 같은 편의 패거리들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 반대편이나 사법체계를 조롱하고 위협하는 무법천지를 연출하고 있다.조국일가의 비리나 울산시장 부정선거 혐의자들, 최근에 불거진 정의기억연대의 비리의혹 등은 일말의 상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진상을 철저히 밝혀야 할 일이지 무조건 편들고 두둔할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팬덤의 무리들에겐 법치도 상식도 윤리의식도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유일한 판단 기준일 뿐이다. 더구나 저들이 지지하는 인물과 세력이 정권과 함께 사법부와 입법부, 언론과 교육과 문화계까지 장악을 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국이다.

2020-05-21

장미꽃 등교

불가리아 카잔루크에서는 매년 5월말∼6월초에 걸쳐 장미축제가 열린다. 1903년 지역축제로 출발한 이 축제는 지금은 전세계인이 즐겨 찾는 장미축제로 성장했다. 불가리아 대통령이 참석하는 최고의 축제이자 최고의 관광자원이기도 하다.이곳의 장미 생산량은 세계의 80%를 차지한다. 행사장에 마련된 1만5천종의 장미 전시회는 놀라운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전통적 방법으로 추출한 세계 최고 수준의 장미오일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장미꽃으로 기획한 다양한 이벤트가 장미축제의 화려함을 더 빛내주는 행사다.계절의 여왕 5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맘때쯤이면 전국 각지에서 장미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전국 장미축제 대부분이 취소돼 많은 사람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5∼6월에 피는 장미는 야생종만 200여종에 이른다. 원예종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장미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장미만큼 꽃말이 많은 꽃도 없다. 색깔과 개수에 따라 꽃말도 서로 다르다.붉은 장미는 열정적 사랑, 흰색 장미는 순결, 분홍색 장미는 우아함, 검은색 장미는 이별 등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장미 한 송이에도 의미를 따로 붙였다. 붉은장미 한 송이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뜻이고 노란색 장미 한 송이는 “당신을 향한 나의 감정은 순수하다”는 뜻이다. 만약 붉은장미 여섯 송이를 누군가에 주었다면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뜻이라 한다.코로나19로 80일 만에 등교하는 학생들의 장미꽃 등교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등교 첫날 32명의 확진자가 나오면서 학생들의 등굣길이 마치 살얼음판 같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 온 국민의 바람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5-21

아쉬운 20대 국회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지난 20일, 국회는 여야가 합의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비롯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법안, n번방 방지법, 공인인증서제도 폐지를 위한 전자서명법 개정안 등 100여 건의 법안을 통과시켰다.이날 기준으로 계류된 20대 국회 법률안 1만5천262건은 20대 국회 임기만료일인 29일 기점으로 모두 폐기된다. 통과된 법안 가운데는 논란거리도 있고, 박수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이날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안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민식이법이었다. 지난해 9월 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초등학생 김민식 군 사건 이후 국민적 관심 속에 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사고 처벌을 강화한 이른바 ‘민식이법’은 기준 속도보다 천천히 달려도 사고가 나면 무조건 운전자를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해 과잉 처벌이란 논란을 불렀다. 결국 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이어져 30만명이 넘게 동참했고, 청와대가 해명에 나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또 텔레그램 등의 메신저 앱으로 ‘스폰 알바 모집’같은 글을 게시해 중학생 등 미성년자들을 유인한 다음, 성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유포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인 ‘n번방’사건을 막기위해 ‘n번방 방지법’역시 실효성 논란을 빚고 있다. 관련업계에서는 n번방 방지법이 국민의 사생활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왔다. 더구나 방송통신위원회의 해명처럼 이 법이 공개정보에만 적용된다면 텔레그램에서 발생된 n번방 사건도 막을 수 없어 n번방 방지법 자체가 의미 없다는 지적도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다만 이날 통과된 과거사법 개정안과 김관홍법은 때늦었지만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우선 과거사법으로 인해 2010년 임기만료로 해산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새로 출범하고, 형제복지원 사건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등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발생한 국가 인권유린 사건들에 대해 진상을 조사할 수 있게 됐다. 4·16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에 나섰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민간 잠수사를 피해 구제 범위에 포함하는 법안인 ‘김관홍 잠수사법’ 역시 시대의 아픔을 보듬은 법안으로 평가된다.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 잠수사들은 3개월여 사투를 벌여 희생자 235명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으나 골괴사 등 잠수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지방의회 사무처 직원 인사권독립 및 정책지원 전문인력 확충, 자치단체 부단체장 증원, 특례시 제도운영 등에 관한 내용들이 포함돼 있는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과 자치경찰 보강을 통한 자치기능확대를 보장하는 통합경찰법개정안 등이 또 다시 폐기되고 말았다는 점이다.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분권형 개헌’이 무산된 후 국가균형발전정책의 후퇴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당초의 국정목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대한 국회의 관심을 촉구한다.

2020-05-21

마늘과 어머니

이순영수필가마늘을 얻었다. 김장철도 지났고 햇마늘이 날 때도 아닌지라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다. 한손으로 들어도 빈 바구니 같았다. 푸석푸석 먼지가 나는 마늘 한 접을 집으로 가져와 베란다에다 두고 며칠 밤을 지냈다. 빨래를 널고 청소를 하면서 눈에 띌 때마다 근심덩어리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갈무리를 해 두어야만 될 것 같았다. 미루어두면 버려야 할 형편이 될 일은 뻔했다.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어머니는 김장철이 되면 집에서 가꾼 마늘을 틈이 날 때마다 햇살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장만하셨다. 깐 마늘을 수북하게 모아 두었다가 김장양념장을 만들 때쯤이면 마당 귀퉁이 감나무 아래에 있는 돌절구에 마늘을 찧으셨다. 지난 초겨울에도 어머니의 마늘 까는 일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 양이 줄어든 것과 방안에 앉아서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통에 마늘을 찧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어머니의 성품은 때로는 온화하셨고, 때로는 매우 강직하셨다. 이런저런 모습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신문지를 활짝 펼치고 마늘을 깔 준비를 했다.두고 보니 이 많은 마늘을 언제 다 손질할까. 긴 한숨이 나왔다. 받아오지 말걸, 식구도 적은데, 곧 햇마늘이 나올 터인데…. 친정에 가지고 가서 어머니께 맡길까. 그러려면 오고가는 시간과 머무는 시간을 합하면 서너 시간은 걸릴 텐데. 그 정도면 내가 혼자서 모두 손질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나는 어머니를 뵙고 오는 즐거움이 있어 좋고, 어머니는 심심해하던 차에 일거리가 생겼다고 반가워하실 지도 모르지….나만의 계산법으로 나에게 돌아올 득과 실을 따지면서도 깐 마늘을 담을 그릇과 껍질을 담을 비닐봉지를 챙겨서 옆에 두었다. 어머니가 하신 것처럼 쭈그리고 앉아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볼품없이 말라 푸석거리던 껍질 속에서 하얀 마늘이 보석처럼 발라져 나왔다.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시작한 일인데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왔다. 어깨와 목덜미, 손목이 뻐근해지고 눈도 따가웠다. 온몸이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하얀 마늘이 통에 소복하게 모아지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릇 위에 봉긋하게 솟은 하얀 보석들을 쓰다듬으니 촉촉한 속살이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한편 비닐봉지 속에는 흙이 묻은 뿌리와 버썩 마른 껍질들이 가득해졌다. 부풀어 오른 봉지를 손등으로 누르자 풀썩 내려앉았다. 붕긋하던 봉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자, 몇 해 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벽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 계시던 어머니. 마당이며 부엌과 방, 집 안팎 어느 한 곳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윤기가 흐르게 하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변신은 믿어지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 없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시고 사람을 보면서도 아무런 표정이 없으셨다. 때로는 한참동안 두 눈을 힘껏 감으시고 입을 꾹 다물고 계시기도 했다.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으시니 마치 그림 같았다.너무나 낯선 어머니였다. 바스라질 것만 같아 어머니를 부둥켜안을 수조차 없었다. 어머니 옆에 가만히 앉아 어머니처럼 벽과 천장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만 했다. 그러기를 몇 개월이 흐른 뒤 멈추었던 어머니의 시간은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조금씩, 아주 조금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는 마치 아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 같기도 했다.삶을 온전히 바쳐서 우리들을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귀로(歸路)로 향하셨지만 나는 어머니께 해 드린 것이 없다. 오늘도 오랜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서 해야 하는 힘든 일을 어머니께 맡기려고 하지 않았던가.네 시간도 더 걸려서 마늘은 모두 갈무리가 되었다. 비록 껍질은 불태워지더라도 알맹이는 적재적소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마늘이 함유하고 있는 성분을 따져서 무엇 하리. 음식에 향과 맛을 더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건강에 이로움을 주면서도 그 형태를 잘 드러내지 않는 마늘, 그 품성이 꼭 어머니 같다.

2020-05-20

깔끔하게, 담백하게

수목원 나들이를 갔습니다. 변덕 앓는 제 맘과 달리 꽃 피고 지는 일은 어쩜 저리 한결 같은지요. 숲 천지 꽃 잔치, 신록이 한창입니다. 오월 동산에 취한 것도 그만인데, 운 좋게 샤스타데이지까지 만났습니다. 전망 좋은 언덕, 한울타리 가득 흰 꽃을 피워 올립니다.데이지 종류는 제가 좋아하는 꽃입니다. 경계가 분명한 꽃이지요. 뒤집어 보지 않는 한 드러나지 않는 꽃받침이며, 꽃 필 자리보다 한참 밑에 자리 잡은 이파리, 가시 없는 줄기마저 곧게 뻗어 꽃송이와 부수적인 것들이 뒤섞이지 않습니다. 심지 곧고 깔끔하며 소박한 꽃이지요.데이지와 달리, 꽃송이와 잎사귀가 뒤섞여 피는 꽃들이 화려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너저분한 인상을 주는 면이 있어요. 하지만 데이지는 꽃송이는 송이요, 줄기는 줄기요,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각각 제 자리를 지켜 핍니다. 튤립이 그러하고 양귀비꽃도 비슷하긴 해요. 깔끔하기로만 따진다면 그 둘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두 꽃은 어쩐지 고고한 느낌이 있어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요. 그에 비해 데이지꽃은 적당히 소박하고 알맞게 단정한 모습이지요. 산뜻하지만 가볍지 않고 소담스럽지만 격조를 잃지 않는 꽃입니다.환대의 시늉도 없고 포장의 허례도 없는 꽃. 향기 아래 가시를 박지도 않고, 미소 뒤로 우울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꽃송이보다 큰 꽃받침으로 꽃 본연을 갉아먹지도 않고, 넘치는 향기로 꽃잎을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담박하게 피어 있을 뿐입니다. ‘나 이런 꽃이니 알아주시오.’ 하지도 않습니다. ‘나 그냥 이렇게 피었소.’ 하고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진중한 위엄이나 날렵한 멋을 품고 있다고나 할까요.사람도 마찬 가지예요. 데이지꽃만 보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어요. 학창 시절, 의기소침하면서도 질척댔던 저에 비해 담백한데다 넘치지 않았던 그 친구를 참 좋아했었지요. 심지가 곧으니 포장할 필요가 없고, 사심이 없으니 과장할 이유도 없는 그런 성정의 친구였어요. 얼핏 보면 그녀는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단체 미팅을 했을 때였지요. 누가 봐도 괜찮은 남학생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 남학생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친구는 그저 덤덤하기만 했어요. 성격 상 호들갑을 떨거나 적극성을 비칠 친구가 아니었어요. 그것이 도리어 그 남자를 도발했나 봐요. 친구에게 꽂힌 남학생은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를 찾아 왔어요. 물론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요. 지나치다싶을 만큼의 무덤덤함이 오히려 남학생을 울릴 만큼의 매혹이 되었다는 것을 그 친구는 알지 못했어요. 소식조차 모르는 그 친구를 지금 만난다 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천진스럽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하지만 단호했던 그 면을 제가 좋아했던 거지요. 아마 남학생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지 않나 싶어요. 복잡할수록 핵심에서 멀어지잖아요. 단순함과 깔끔함은 같은 집안 아니겠어요.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데이지꽃 같은 이미지의 글을 선호합니다. 그러려면 덜어냄의 미학이 우선 되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칼럼도 너무 기네요. 글의 본질은 주제에 있어요. 전하고 싶은 게 선명하면 말에 꼬임이 없습니다. 알면서도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 맘이 허욕으로 들떠 있을 때입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손끝에 힘이 들어차니 글이 무거워집니다. 덕지덕지 붙이고 켜켜이 쌓는 순간 형체는 모호해지고 끝내 글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마감에 내몰릴 때면 정도는 더 심합니다. 며칠 지난 뒤 보면 버릴 것투성이입니다. 퇴고의 명약은 시간이라는 걸 느끼는 부끄러운 순간이지요.김살로메소설가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심장이 무거운 날이면 데이지꽃을 떠올립니다. 에너지를 소진하는 잡념부터 없앱니다. 쓰잘머리 없는 곁가지 치기에 집중합니다. 더하기는 쉬워도 빼기는 왜 이리 어려운지요. 그럴수록 한 줌 덜고 두 말씀 닫는 연습을 하는 거지요.오후로 가는 수목원, 한밭으로 깔린 데이지 언덕에 오월 바람이 나부낍니다. 여백 깃든 저 꽃처럼 소담스레 피어날 글꽃들을 그려봅니다. 꽃송이와 주변부의 조화를 생각하며, 줄기는 곧게 이파리는 조금 멀리 플롯을 짜봅니다. 꽃잎 아래, 보일락 말락 배경으로 들일 꽃받침도 잊지 않지요. 덤덤한 듯 정갈한 글 꽃 한 송이, 꽃대를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미소 짓는 아침입니다.

2020-05-20

사람과 사람 사이

김규종경북대 교수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격의(隔意) 없는 유대관계에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격의 없는’이라는 어휘가 좋다. 양자가 속마음을 툭 터놓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이나 마음의 장벽이 없는, 문자 그대로 흉허물없이 속내를 모두 드러낼 수 있는 사이가 격의 없는 관계다.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을 우리는 친구나 동지라고 부른다.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현대 사회에서 격의 없는 유대관계는 희귀하며, 이런 현상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집단 따돌림으로 자살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로 자발적인 유폐를 선택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혼술과 혼밥과 혼산을 생각해도 날로 소원(疏遠)해지는 인간관계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을 위로하고 대화상대가 돼주는 인공지능 로봇이 나오는 세상이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격의 없는 사이가 아니라면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통해 네 가지 인간관계를 조명한다. 45센티미터 이내의 친밀한 거리 (포옹과 키스), 45∼120센티미터까지 개인의 거리 (악수), 120∼360센티미터까지 사회적 거리 (모임), 360센티미터 이상 공적인 거리 (관람).우리가 누군가와 친구나 연인 혹은 지인 관계를 맺을 때 순서를 생각해보면 홀의 지적에 자연스레 동의하게 된다.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거리를 좁히고, 악수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소수의 인간은 포옹과 키스하는 친밀한 거리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친밀한 거리로 넘어가는 경우는 영화에서만 가능하다.정보통신이 현저히 발달한 현대에서는 인터넷상의 거리도 문제가 된다. 누군가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무단으로 틈입(闖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면서 이런저런 댓글을 달기도 하고, 무언가 충고하는 글을 남기기도 한다. 글 쓰는 본인이야 스스로가 대견하고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고통이자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뭐지, 또 들어왔나, 왜 저런 거야, 누구 허락을 받았나?!’본인이야 격의 없는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싶기도 하겠지만, 상대방은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것이 예의고 염치다. 격의 없는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옳다. 싫다는 사람을 끈덕지게 추적할 때 인간관계는 피로와 짜증과 분노로 아수라판이 되고 만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것은 옛말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았던 시절은 완전히 지나갔다. ‘스토커 처벌법’이 그래서 나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스토커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인터넷상에서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댓글로 얼마나 많은 연예인이 고통받고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적절한 거리를 생각했으면 한다.

2020-05-20

탁상교육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이팝나무는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고봉으로 봄을 지었다. 이는 곧 있을 꽃궁기 전에 실컷 꽃으로 마음을 채우고 여름을 잘 이겨내라는 5월의 배려이다. 이와 더불어 5월은 사람들에게 여름을 준비할 시간을 준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은 올해가 관측 이래 가장 더운 해가 될 확률을 74.7%로 예측했다. 관련 뉴스다.“역대 가장 더웠던 해는 2016년이었는데, (중략) 올해는 강한 엘니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더울 거란 예상이 되고 있는데요. (중략) 관계자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비정상적인 상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온난화이다. 더 심각한 것은 다음 내용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 된다면 그 심각성은 코로나 19와는 비할 바가 안 된다.“이대로라면 50년 내에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의 거주지역이 사막이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우리는 대책이 무엇인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편안함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를 실천할 생각이 없다.최고의 무더위도 무더위이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탁상교육(卓上敎育)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교육 당국은 탁상교육이 만들어 낸 입시 공화국의 민낯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교육부가 고등학교 3학년의 등교수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학교 입시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지금까지 교육 당국은 “학생 중심 수업, 학생 역량 강화 교육, 창의융합형 인재 육성” 등 그럴싸한 말들로 입시 위주의 교육을 은폐(隱蔽)하고 있었다. 이제 교육의 실체가 드러난 이상 교육부와 교육청은 학생과 학부모를 이상적인 말로 기만해서는 안 된다.필자는 교사이면서 고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이다. 2020년도 달력이 장을 넘길 때마다 느끼는 부담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래도 필자보다 더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를 위해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독서실 갔다 올게.”등을 덮고도 남을 큰 가방을 메고 아이는 현관을 나섰다. 가방은 가방이 아니라 짐이었다. 아이의 등을 휘게 할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지운 이 사회가 싫었다. 하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스크를 챙기라는 말뿐이었다. “마스크 꼭 해!”“알았어, 그런데 하루 종일 마스크 하고 있으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 속도 안 좋고.”교육을 받을 당사자인 학생들의 고통을 교육 관료들은 알기나 할까? 책상에 앉아서도 학교 현장의 모습을 다 볼 수 있다는 탁상교육의 달인들은 그 고통을 절대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만 하면 다 된다고. 그러니 잔말 말고 그냥 따르라고.이 나라 교육판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다. 그것은 소통이다. 웃기는 것은 소통할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소통이라는 것이다. 탁상교육의 달인들, 그들의 전지전능한 능력이 참으로 부럽다.

2020-05-20

코로나19와 공유경제

코로나19가 공유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생활수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비대면접촉이 ‘함께 나누는’공유경제에는 직격탄으로 작용하고 있다.실제로 미국의 3대 공유경제 업체로 유명한 위워크, 우버, 에어비앤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위워크는 사무실 공유업체로 세계 여러나라에 120개 이상 도시에 진출해 800여개 이상의 대형 건물을 빌려서 수만개 스타트업체에 재임대하는 공유사업을 펼쳐왔다. 이 사업이 코로나19의 만연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다. 공유공간에 대한 불안감이 사무실 공유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면서 공유시장환경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 우버는 차량공유업체로 기존 택시시장의 장벽을 허물고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이 역시 코로나19가 다른 사람과의 차량공유를 꺼리게 만들면서 사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최근 이용횟수가 70~80%까지 감소해 위기를 맞고있다. 이미 우버는 직원 14%에 해당하는 3천700명을 해고했다. 에어비앤비는 숙박시설 공유업체로 미국과 유렵에서 인기를 끌면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미국과 유럽 여러나라에서 감염자와 함께 적지않은 사망자를 내면서 타격을 입고 있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이 입국금지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항공산업과 함께 매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역시 직원 25%인 1천900명을 해고했다. 문제는 코로나가 물러간 이후 공유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인가다. 대답은 회의적이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등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비대면접촉을 강조하는 한 공유경제의 미래에는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울 수 밖에 없어 보인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5-20

둘이서 하나가 되어

장규열 한동대 교수삼십 년을 훌쩍 넘겼다. 달달하게 찾아왔던 사랑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함께 건너온 세월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얼굴들 가운데 아직도 곁을 지키고 있는 우리는 어쩐 일일까. 셀 수도 없을 이야기들 가운데 늘 등장하는 당신은 내게 누구란 말인가. 살을 맞대고 살아도 속속들이 다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당신은 누구인가. 사람이 생겨난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오묘한 것이 부부라는 이름의 관계가 아닐까. 아이들까지 있고 보면 둘이서 만들어온 세계가 신통하기도 하다. 울고 웃으며 놀라고 분도 내지만, 얽히고설킨 사연들 가운데 만들어온 시간의 흔적은 부인할 방법이 없다. 내 탓이고 당신 덕이며 함께 걸어온 발자취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만 한가득이다.둘이서 이루지만 하나인 듯 살아야 하는 게 부부라고 한다. 부부의날이 21일인 것도 둘이서 하나를 만들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박자가 맞기는커녕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는 당신과 내가 아닌가. 솔직히 하나가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게 아니었을까. 차라리 끝내 하나는 안 될 것이니 참고 견디며 살아가겠노라는 소박한 다짐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적당히 포기하고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선 심정이 되어 체념하고 그냥 일상을 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공연히 부딪히지 않고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며 남도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듯 그렇게 그렇게 지내는 게 서로에게 이롭지 않을까. 다치지 말고 침범하지 말고. 사랑은 아예 꺼버리고 관심도 전혀 주지 않으며 한 울타리에 사는 당신과 나는 부부인가 아닌가.‘부부’인 까닭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아이들 탓에 억지로 산다는 건 그거야말로 억지가 아닌가. 이왕 함께 사는 김에 뭐라도 만들어가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도 끈끈한 감정이 있지 않은가. 넘치는 열정이 식었는지 몰라도 끊임없이 샘솟는 호기심이 있지 않은가. 치열한 질투는 혹 잊었어도 잔잔히 흐르는 관심이 거기 있지 않는가. 핏대어린 싸움을 이제는 못하겠지만, 호수같이 너른 마음에 담지못할 미움도 이제는 없다. 부부가 되어 함께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세상이 저기 있지 않은가. 부부가 되어 마음모아 일으켜 세울 다음 세대가 거기 있지 않은가. 뜨겁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겹게 나누어줄 넓은 아량이 이제는 생겨야 하지 않을까. 서로를 바라보기 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어.부부의날에 한 번씩 돌아보았으면 한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이제 서로에게 무엇을 선사할 것인지 새겨보았으면 싶다. 받으려고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나누기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당신의 목소리를 이제는 들어주는 내가 될 수는 없겠는지. 세상에 완벽한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어째서 애써 부인하며 살았는지. 어차피 부족하여 늘 도우며 살아야 했음을 왜 이제야 깨닫는지. 격려하고 북돋우며 응원하고 일으키는 당신이 되고 부부가 되시길. 부부의날, 파이팅!

2020-05-20

흑산도 공항의 황당한 울릉도 핑계

김두한경북부‘섬의 고향’ 신안이 발칵 뒤집혔다. 울릉공항이 올해 하반기 착공할 것이라는 소식이 최근 전해진 것이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뉴스였다고 중앙언론이 보도했다. 울릉공항은 비용 대비 편익이 흑산도공항보다 떨어지고, 총 비용도 훨씬 더 많이 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흑산 공항이 안 되는 것과 울릉공항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물고 늘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비용대비 편익을 말한다면 할 말이 너무나 많지만 남 핑계를 대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중국, 북한, 일본 해안을 아우르는 한가운데 위치하고 정점에는 독도가 있다. 우리나라 안보의 요충지라는 뜻이다. 울릉도에 군 관련 시설만 9곳이 넘는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육지에서 독도에 접근하려면 가장 가까운 죽변이 216.8km고 공항이 있는 포항과는 257km 떨어져 있는데, 일본과 독도는 오끼 군도에서 157.5km 거리에 있다. 오키섬에는 대형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이 있다. 전쟁이 난다면 선점을 일본이 먼저 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따라서 울릉공항 건설에는 국토방위의 개념도 포함돼 있다.관광적인 측면에서 봐도 흑산도, 홍도, 가거도는 모두 합쳐 연간 30만명이 방문하지만 울릉도는 단독으로 40만명이 찾는다. 인구 역시 울릉도는 1만여명으로 대흑산도 2천여명의 5배다.특히 울릉도는 동해의 깊은 수심 때문에 연간 여객선 운항이 100일 이상 통제되는 지역이다. 이런점을 염두에 둔다면, 단순히 건설하는 비용이 적게 든다고 우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흑산도의 공항 건설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흑산도의 여건을 잘 살려 필요성을 설득하고 장점을 부각시켜 공항이 건설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울릉군민들은 흑산도 공항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같이 건설되기를 염원했다. 공조하기도 했다. 다만, 울릉도 주민들은 흑산도 주민처럼 핑계를 대지는 않았기에 이번 흑산도 공항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kimdh@kbmaeil.com

2020-05-19

음악 같은 행복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녹음방초(綠陰芳草) 짙어가는 젊음의 계절 5월이다.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푸르싱싱한 초목이 활개치는 여름날로 치닫고 있다. 아침나절 우짖는 멧새들의 지저귐은 맑기만 하고, 한낮의 뻐꾸기 울음소리는 한가롭기만 하다. 또한 저녁답의 어스름을 타고 흐르는 소쩍새의 독창은 올해도 풍년을 점치며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다. 초록의 캔버스에 색채와 향기를 드리우고 물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새소리의 추임새까지 더해가는 자연은 미술과 음악을 곁들인 일종의 예술 종편을 연출하는 듯하다.산이나 들, 강이나 바다 주위를 소요하며 이따금씩 접하는 자연의 소리는 무슨 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때에 따라선 향기가 들리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소리가 보이는 것 같으며, 가만히 몰두하면 색깔이 만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자연 속에 원천적으로 내재한 종합예술을 인간이 미술과 음악의 이름으로 표현해내고 문학과 문화의 매체로 통역하며 재창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가운데 청각적 인식에서 비롯되는 음악은 인간의 매우 뛰어난 감성적인 공감능력의 한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주로 음률로 나타내는 소리예술로 정의되는 음악은 가창, 기악, 성악, 선율, 리듬, 화음 등 장르와 표현방식이 다양하다. 세계 공통언어인 음악은 일종의 ‘패턴 찾기’의 즐거움이며 반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음악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육체적, 정신적 회복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며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가령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면 힘든 상황에서 서로 돕고자 하는 유대감이 형성되고, 좋은 음악 속에는 우울증과 스트레스의 악순환을 돌파하는 힘이 존재한다. 그래서 정신과 신체건강을 유지, 복원시키며 향상시키는 음악치료라는 예술치료분야가 고대로부터 활용되지 않았을까?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온갖 소음과 잡음, 불협화음에 노출되고 시달릴 때가 많다. 그런 때일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심신을 달래나간다면 마음건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자주 듣곤 하는데, 출퇴근길이나 산악 라이딩을 하면서 즐겨 듣는 음악의 장단에 맞춰 몸을 들썩이며 페달을 밟다 보면 힘도 그다지 들이지 않고 미끄러지듯 신나게 달려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반복으로 인한 음악의 세밀한 선율과 리듬에 집중할 수 있고, 그러한 음악이 연료처럼 작용해 몸이 저절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음악은 지친 일상의 고단함을 풀어주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보약같은 효능이 있다. 콘서트나 음악발표회로 햇살같은 선율이 피어나야 하는데, 코로나19 시국으로 인해 울림마저 감금당하고 있다. 그러나 침울한 마음이 치유되고, 소통하는 공감으로 상생과 화합의 메아리가 조만간 울려 퍼지리라. 작은 생의 아픔 속에도 아름다움은 살아있듯이 삶이란 그 무언가의 기다림 속에 오는 음악같은 행복이니까….

2020-05-19

Z세대들의 “라떼는 말이야….”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인정사정없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습격에 안전지대가 있을 리 없었다. 정도나 형태에 차이가 있을 뿐 이 시대를 함께하는 모두가 엄청난 내상을 입었다. 그러나 위기마다 강했던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역시 감내하며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의료진, 소상공인, 어르신들, 직장인들, 모두가 ‘덕분에’를 들어 마땅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생의 꽃인 학창시절을 하필 지금 지나고 있는 Z세대들에게 연민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칭찬과 격려의 박수를 드리고 싶다.Z세대란 밀레니얼 세대의 다음 세대로,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세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유치원, 초·중·고교생, 대학생까지를 포함한다.선생으로 그들 가까이 있어서일까? 코로나바이러스가 Z세대에게 유독 가혹해 보여 그들이 특히 안쓰럽다. 개학은 3차례나 연기되었고, 급기야 초유의 ‘온라인 개학’, ‘랜선 등교’라는 낯선 상황을 준비도 안된 채 경험했다. 졸업식도 입학식도 치를 수 없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들께 후배들이 드리는 꽃다발도 화면 넘어 마음으로만 나누어야 했다. 입학식은 고사하고, 담임선생님도, 새로 같은 반이 된 친구들 얼굴도 아직 보지 못했다. 수업은 모두 인터넷 강의나 원격 화상학습, 과제제출로 대체되었고, 교실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즐거워야 할 시간, 아이들은 집안 컴퓨터 화면 속에서만 선생님을 겨우 만난다.물론 이전에도 ‘인강’, MOOC, 사이버대학과 같이 온라인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수업은 있었다. 스마트 기술을 이용하는 게 어려워서도 아니다. 한창 친구가 좋아질 나이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 아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꼭 필요한 선생님과의 심리적 유대감, 라포(Rapport)의 형성도 온라인 수업만으로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의 기지로 드라이브인 입학식이 열렸다거나, 학교에 못 나오는 아이들을 위해 교장선생님이 코믹한 동영상을 찍어 선물했다는 소식이 미담으로 알려지는 상황이 무슨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져 씁쓸할 지경이다. 준비 덜 된 상황과 불편한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Z세대들은 변화된 상황에 너무나 빠르게 잘 적응해 주었고, 여전히 밝게 웃으며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듬직하게 버텨내 주고 있는 것이다.80~90년대 X세대의 학창시절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시대 사건들을 특유의 유머코드로 들려준 ‘응답하라 시리즈’는 2012년 이후 지금까지도 재방송이 계속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40대의 치열한 삶을 감내하느라 드라마에 무관심했던 X세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덕에 그들을 TV 앞으로 소환했고, 그 시대를 모를 후배들에게 소싯적 얘기를 하게 만들어 ‘라떼는 말이야….’ 신드롬도 일으켰다. 10~20년 후, ‘응답하라 2020’을 감상하며 자기 후배 세대들 앞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외칠 중년이 된 Z세대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무용담이 멋진 해피엔딩이 되게 힘을 보태리라 다짐해 본다.

2020-05-19

떨어진 꽃 보기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넘게 피는 꽃은 없다. ‘권불십년(權不十年)’. 10년을 넘기는 권력은 없다.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권세 역시 10년 넘게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이다.주역의 이치를 들지 않더라도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로 받아들인다. 아침 산책길에 철 보내는 꽃들이 이곳저곳 떨어져 있다. 몇몇은 즈려밟힌 자국들이 선명하다.화려한 날은 가고 사람의 발자국이 주홍글씨처럼 찍혀 있음에 울먹이는 것 같아 산책 내내 떨어진 꽃들이 눈에 밟힌다. 사람의 발에 밟히고 눈길에 외면당한 꽃의 말년이 안타깝기까지 하다.모진 긴 겨울 남몰래 버티고 새봄에 잠시 폼 좀 잡은 날이 겨우 10일이라니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듯하다. 사람들은 꽃이 겪은 지난겨울 인고의 시간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화려하게 핀 모습을 즐길 뿐이다. 다가와 향을 맡는다.배경삼아 사진을 찍는다. 고운 자태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것 같이 그 가벼운 친근감을 맘껏 즐겼다. 짧은 몇 날이 가고 계절을 재촉하는 비바람에 뚝뚝 떨어져 길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언제 그랬냐는듯 사람들의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사람 마음이 다 그런거려니 받아들이기엔 아쉬움과 회한이 밀려온다.하지만 이 또한 세상 이치다. 정승집 개가 죽은 경우와 정승이 죽은 경우가 다른 것이 세태다. 명심보감에 ‘주식형제 천개유(酒食兄弟 千個有), 급난지붕 일개무(急難之朋 一個無)’란 말이 있다, 술 마시고 밥 먹을 땐 형동생 하는 사람이 천 명이 넘는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같이할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말이다.잘 나갈 때는 너도 나도 친분을 과시하다가 정작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땐 사람이 썰물처럼 다 밀려가고 없다는 말이다. 세상인심으로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평소 너의 행실도 문제가 있어 그런 것 아니냐고 되받는다면 더욱 할 말을 잃고 비참함만 느끼게 될 뿐이다.인생살이도 꽃처럼 한 때 만개할 때가 있다. 나의 화려한 날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만개한 꽃이 시들거나 떨어지듯 어느 시점엔 퇴락의 때를 맞이한다. 물론 때가 되어 물러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혜는 자신의 몫이다. 자연스러워야 할 퇴장의 시간이 백세시대를 맞아 때 이른 퇴장그늘로 짙게 드리우고 있다.정신적·육체적 활동 능력이 아직은 청장년같은 사람들이 퇴장의 긴 시간들에 시달리고 있다. 근교 산에 평일 등산객으로 출몰(?)한다. 출근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산책로가 붐빈다. 평일 골프장 내장객으로 퇴장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제법 호사를 누리는 부류에 속한다. 아직 자녀들 교육과 독립을 위해 이곳저곳 2진으로 뛰어들어 남은 구간을 뛰는 처지가 되면 말년 삶이 신산함을 넘어 처량해진다.이제 나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맡기 위해 몰려들던 상춘객은 어디에도 없다. 시들고 떨어진 꽃이지만 한 번 더 바라봐 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한 때는 당신들이 좋아하고 열광했던 꽃이었으니 한 번 더 눈길을 줬으면 한다.

2020-05-19

신라왕경

왕경(王京)은 임금이 거주하는 수도다. 현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역사적 용어라 하겠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왕경이라 했고, 고려사에는 개경을, 조선왕조실록에는 한양을 왕경으로 지칭했다.경주는 신라의 왕경으로 역사적으로는 서라벌 혹은 금성으로 불렸다. 삼국사기 기준으로 보면 약 991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 존속했다. 한 나라의 수도가 1천년 가까이 한 곳에 유지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적지라는 점에서 경주는 역사문화 도시로서 가치가 특별한 곳이다.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8세기경 최고 번성기를 누렸다. 그 당시 경주에 거주한 가구가 17만9천호에 달했고 인구만 100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나 당나라 수도 장안성 등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도시였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천년동안 간직했던 신라왕경의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13세기 몽골군의 침입으로 신라왕경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지금은 주춧돌 등을 제외하면 당시의 왕경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우여곡절 끝에 신라왕경 발굴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당시의 모습을 잘 재현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왕경의 발굴복원 사업으로 경주의 문화유물적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풍부해 질거란 기대감은 고무적이다. (재)경주문화엑스포가 경주엑스포공원 경주타워 1층에 설치된 신라왕경 모형을 13년 만에 리뉴얼해 공개했다. 역사문화적 고증까지 거쳤다. 신라시대 유적지와 유물,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공간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감흥이 기대된다. 상상 속에 머물렀던 도시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으로 관광도시의 흥미는 더 높아질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5-19

작은 것에 감사하며… 군위 지보사(持寶寺)

해발 437미터의 선방산(船放山)은 마치 배를 띄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선방산 꼭대기에 배를 띄우고 놀 만큼 큰 못이 있었지만 당나라 장수들이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기고는 못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설화를 간직한 그곳에 지보사가 있다.지보사(持寶寺)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할 뿐 그 이후 근대까지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그 옛날에도 그리 큰 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만 지보사에는 이름처럼 세 가지 보배가 있었다.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 맷돌과 사람 열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가마솥 그리고 청동향로이다. 향로 대신 단청의 물감으로 쓰이는 오색 흙을 꼽는 경우도 있지만 향로만 은해사 성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송홧가루 날리는 오월,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텅 비어 있는 주차장을 두고 극락교 앞 그늘에 차를 세운 후 다리를 건넌다. 큰 나무 그늘이 내 발등을 서늘하게 적셔주고 곧게 뻗은 길은 다시 돌계단으로 이어진다.“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을 좌우한다.”계단 입구에 새겨진 글이 마음 밭을 돌아보게 한다. 첫 느낌이 가지런한 절이다. 계단 위에서 은행나무가 사천왕처럼 내려다볼 뿐 한낮의 풍경은 모든 게 멎어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은행나무 뒤로 아담한 루(樓)가 막아서는 작은 뜰, 한쪽에는 삼층석탑 하나가 투명한 햇살에 몸을 씻고 있다.가지가 휘어지도록 핀 불두화, 막 씻고 나온 듯한 순백의 얼굴빛과 마주하며 나는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무언가로 꽉 찬 절은 비밀의 화원처럼 조심스럽다. 저들만의 따스한 언어들이 두런두런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작고 경이로운 세계로 초대받은 이 순간조차 우연과 필연으로 예정된 약속이었으리.불두화 한 그루 심고 잠들었던 어제 일을 떠올린다. 이토록 많은 불두화를 만날 운명이었을까. 종자를 맺지 못하는 애잔한 불두화, 그 순결한 아름다움에 빠지노라면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숨소리 낮춰가며 사진을 찍고 한참을 서성인다. 주지 스님이 어떤 분인지 뵙지 않아도 그려진다.작은 소읍에 위치한, 적요처럼 말간 추억들이 꿈꾸듯 살아가는 절, 어디선가 스님이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나는 오월의 품에 안겨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별 기대없이 찾아온 내게 절은 빛바랜 고향처럼 푸근하다.조각미가 뛰어난 고려시대 석탑, 보물 제 682호 삼층석탑의 시선도 부드럽다. 대웅전을 비켜나 두 단 아래 서 있지만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구석구석 시선 닿은 곳마다 부처님의 섬세한 눈길이 머물고 커다란 은행나무는 대웅전만큼이나 든든하다. 섬세함과 고요함, 소박함까지 갖춘 지보사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향수가 어룽거린다.욕심 없는 평온함이 경내를 가득 메우는 이 시간, 현판도 없는 작은 루에 올라 시집을 읽으며 한껏 여유를 부리고도 싶다. 산 아래 정경도 궁금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조심스럽다. 절은 열린 듯 편안하고 비밀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햇살이 따가운 줄도 모르고 행복에 취해 마당을 거니는 이 소박한 특권은 누가 보내주셨을까. 작은 자갈돌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풍경이 간헐적으로 울다 멈추는 처마 아래에서 나는 한량없는 감사함에 젖는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키 재기를 하며 살아왔던 눈 먼 날들,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있어 지금의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 아는지도 모른다.대웅전 법당에 들어가 석조아미타여래 삼존불 앞에서 백팔 배를 시작한다. ‘비록 적게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종무소 입구에 걸려 있던 글이 법당까지 따라왔다. 손에 잡히지도 않은 것들을 끝없이 좇으며 쉼 없이 달려왔던 가여운 내 육신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은 언제나 작고 소박한 것들이었다.삼존불 옆으로 보이는 일타 큰스님의 인자한 미소가 빈 법당을 더 푸근하게 밝힌다. 법당 문 앞에 고여 있는 투명한 햇살, 더 이상 울지 않는 풍경, 모두가 숨을 죽이고 참선 중이다.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안기듯 자리 잡은 루(樓)의 처마 끝에는 빛바랜 염원들이 걸려 있다.조낭희 수필가그 아래로 조금 전 내가 들어왔던,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는 출구가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면 출구는 다시 입구가 되어 바쁜 시간 속으로 이어지리라. 지보사에서 만난 오월의 말씀들은 까마득히 깊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아주 낮은 자세로 걸어오던, 작아서 혹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말씀들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해마다 오월이 오면 지보사를 찾으리라. 내 안에 든 영원성을 잊고 만족할 줄 모를 때, 손 안에 움켜쥔 젖은 아픔들이 되살아날 때도 지보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나의 기도는 언제나 한결같기를 바란다.“교만하지 않고 작은 일에 감사하며, 여름 풀냄새 같은 기도로 살아가게 해 주소서.”

2020-05-18

여름, 시 읽기를 위한 짧은 제목의 수사학

날이 따뜻해져 완연한 여름이 되면 몸도 마음도 조금씩은 활동적인 상태가 된다. 이번 여름에야말로 책을 좀 읽고자 마음이 동한 분들도 적지 않으시리라. 눈에 띄게 한산해진 서점에 들러 서가를 살펴보면, 이 계절에 읽기에 좋은 시집이며, 소설집들의 제목이 적잖게 눈에 띈다. 요즘 나오는 문학책들은 대부분 한 번 들으면 그야말로 쉽고 재치 있는 제목들을 갖고 있어 선뜻 쉽게 꺼내볼 수 있다.예전 시인들은 분명 시어의 메타포, 즉 은유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여,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에 달라붙어 있는 풍부한 의미들을 살리고자 애썼다. 반면, 요즘 시인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독자의 공감을 부른다. ‘진달래꽃’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 인간이 살아온 삶과 그 분위기, 욕망 등이 다 담겨 그 가벼움 속에 둔중하고 두터운 의미들이 들어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진달래꽃’이야 그저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 것이라는 시대도 있는 법이니 어느 쪽이 더 낫다거나 더 시의 본질에 가깝다거나 할 수는 없다.최근 일본 정부 환경상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90CE)의 독특한 화법이 여기저기에서 화제였다. 인터넷에는 재밌는 밈(meme)으로 다뤄져 여기저기서 인기를 얻고 있는 한편,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그의 화법 중 흥미로운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지금대로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야말로 일본은 지금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말하고 있는데, 그 원인과 결과가 동어이다. 논리적인 언어 사용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아한 기분이 들 만하다.물론 정부각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겠지만, 시를 좀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이런 어법이 그리 낯설지 않은 분이 많을 것이다. 1993년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실 무렵, 남기셨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한 마디의 말은 우리 사회 전반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또한 이 말을 산이 산이며, 물은 물이라는 그대로의 말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또 있을까.우리는 하나의 말이 단지 하나의 의미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말 속에는 그 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온갖 의미들이 착 달라붙어 있다. 때로는 비꼼 같은 대상에 대한 태도가 언어에 포함되기도 하고, 그것을 위해 반어나 역설 같은 수사법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하나의 단어에서 들려오는 화성과도 같은 울림은 바로 그 시가 펼쳐놓은 은유와 상징의 그물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기형도의 ‘빈집’에서 온갖 종류의 음색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처럼 인간의 언어 사용이 고도화된 시대 속에서는 자칫 고색창연한 언어적 전통이 무겁게 내려앉기 쉽다. 윗사람의 한 마디를 이리저리 곱씹으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의를 파악해야 했던 사회의 분위기는 얼마나 무거운가. 분명 그런 시대의 시는 그 고도화된 언어를 더 나은 방향으로 풍요롭게 표현하여 방향을 틀거나 오히려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말해버린다. 모두가 하나의 말을 듣고 하나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대에는 하나의 당연한 말이 잔잔한 물 위의 파도가 되는 것이다. 앞서 일본의 환경상은 말의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에서 말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니, 그런 어법을 ‘잘못’ 이용했던 셈이고, 웃음거리가 될 만하다.다시, 서가에 꽂혀 있는 시집들의 제목을 쭉 눈으로 훑는다. 어떤 제목은 무언가 풍부한 함의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아서 눈길이 가고. 어떤 제목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어서 눈길이 간다. 시의 언어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때의 내 기분과 계절의 냄새가 있을 뿐이다./홍익대 교수

2020-05-18

부부의 날을 기념하여

고광영국민연금공단 포항지사장국민연금은 1988년 시행 이래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연금수급자 500만명 시대를 열었고, 2025년에는 연금수급자가 700만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지난해 국민연금은 496만명의 수급자에게 약21조원의 연금을 지급했으며, 올해로 33돌을 맞은 국민연금은 제도가 무르익으면서 부부가 함께 국민연금에 가입해 노후에 각자 노령연금을 받는 부부수급자가 35만쌍을 돌파했다.연금액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데, 개인최고 연금액은 월 220만2천원이고 부부합산의 경우 월 364만4천원에 달해 국민의 행복한 노후를 책임지는 사회안전망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국민연금연구원에 의하면, 노후에 부부가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월243만원이 필요하고, 최소 생활비는 월 176만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노후대비의 의존도는 결국 본인 스스로 해결해야하는데 정부가 기초연금 등 노후복지 관련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의존은 10% 미만이며 배우자에 대한 의존은 20%, 자녀는 5%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본인의 책임은 60%가 넘는 것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82.7세를 넘었고, 이는 선진국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노후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결론은 부부가 함께 국민연금에 가입하면 노령연금을 각자 받기 때문에 노후는 2배로 든든하다. 한편, 사람의 생명은 유한하므로 부부가 모두 노령연금을 받다가 배우자가 먼저 사망하면, 국민연금 중복급여 조정규정에 따라 둘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자신의 노령연금을 선택하면 노령연금에다 유족연금의 30%를 추가로 받을 수 있고, 유족연금을 선택하면 유족연금만 받는다.국민연금을 많이 받으려면 가입기간과 납부금액을 늘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업주부, 학생 등 소득활동을 하지 않아 의무가입대상은 아니지만 본인 희망하여 자발적으로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임의가입제도를 활용하거나 반·추납신청 등으로 가입기간을 늘릴 수 있으니 국민연금에 대해 궁금한 사항은 전국 국민연금공단 지사(국번없이 1355)로 문의하면 된다.

2020-05-18

코로나19 이후 세계정치경제의 향방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코로나19의 세계적 팬데믹(pandemic)은 세계정치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예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가 “폭풍은 지나가고 인류는 살아남을 테지만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 것”이라고 한 것처럼, 이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세계 각국은 감염병 확산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국 우선주의와 각자도생(各自圖生)전략을 채택하였다. 세계정치질서를 주도해 왔던 미국의 리더십은 크게 실추되었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 상대방에게 코로나 확산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향후 전략적 패권경쟁이 더욱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유럽을 표방했던 EU회원국들 역시 위기상황에서는 국익과 자국민 보호가 우선이었고, 강대국의 재정지원에 종속되어 있는 WHO는 국제기구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코로나는 경제세계화의 상징이었던 물자와 인력의 자유로운 왕래를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진출기업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이는 이른바 ‘리쇼어링(reshoring)’을 촉진하고 있다. 그 동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수반되어 온 부작용과 취약성이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post­corona)시대의 세계정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코로나의 대처과정에서 글로벌 파워(global power)인 G2의 리더십이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견국(middle power)들의 역할공간이 확대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료시스템의 부실이 드러남으로써 선진국들의 신화가 깨어졌고, 코로나 진원지인 중국의 강압적·음성적 대응방식은 결코 방역모델이 될 수 없다. 반면에 최소한의 통제 속에서 민주적이고 투명한 대응으로 선방하고 있는 한국과 같은 중견국들의 역할과 책임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현행 ‘세계화 분업체계’의 위험성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제공급망의 재편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특히 과학기술이 낙후한 후진국들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점에서 경제적 남북문제도 민감한 이슈로 부상될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19와 같은 세계적 감염병 확산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정치경제질서의 향방은 상당히 유동적이다.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경을 초월하는 질병·마약·환경·테러 등의 초국가적 인간안보(human security) 이슈들에 대처하는데 있어서 각자도생 전략은 한계가 있다. 더욱이 우리는 GDP대비 무역의존도가 70%에 달하는 개방경제이기 때문에 국제교류협력이 생존과 번영의 길이다. 따라서 IT강국으로서 향후 새로이 형성될 세계정치경제질서의 논의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국력과 빈부의 격차를 넘어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바탕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의 표준, 즉 ‘뉴 노멀(new normal)’은 우리의 국익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인류의 미래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2020-05-18

저무는 공인인증서 시대

공인인증서는 인터넷상에서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자정보로, 국가에서 지정한 공인인증기관이 발급한다. 1999년 시행된 ‘전자서명법’에 기반해 도입됐다. 금융결제원·코스콤 등 국가에서 지정한 공인인증기관(CA)에서 실명 확인을 토대로 발급하며, 은행·증권사·우체국 등의 등록대행기관에서도 발급 신청이 가능하다. 사용범위는 인터넷 뱅킹·온라인 증권거래·보험 가입 등의 금융 서비스, 기업 간 전자 입찰·계약·세금계산서 발행 등의 전자상거래 관련, 세금 납부·전자송달·증명서 발급·등기 업무·실적 신고·수출입통관·예비군 등의 정부 민원, 전자문서 전달·전자출원·전자처방전·인터넷 청약 등 다양하다.도입 초기에는 전자상거래 활성화 등에 기여했으나 시장독점을 초래하고, 까다로운 발급절차로 전자서명 기술과 서비스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2018년 9월 정부가 공인인증제도를 폐지하고 다양한 전자서명 수단을 활성화하는 내용의 ‘전자서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공인인증서 폐지를 골자로 한 전자서명법 개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오는 20일 열리는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상정, 처리될 전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정하는 공인인증기관과 공인인증기관에서 발급하는 공인인증서 개념을 삭제하고, 공인·사설 인증서를 모두 전자서명으로 통합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공인인증서가 도입된 지 21년만에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공인인증서의 독점적 지위가 사라지면 향후 인증플랫폼 시장의 급성장이 전망된다. 생체정보, 클라우드, 블록체인 등 다양한 전자서명 기술 경쟁을 활성화해 국민의 생활이 더욱 편리해질 것으로 보인다. 국민을 불편하게 하는 규제는 하루라도 빨리 개선돼야 마땅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5-18

시민단체 출신들의 ‘정치 먹튀’

강희룡 서예가역사 속에는 수많은 인생을 희생시키며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냥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한 많은 인생이 수도 없이 많다.조선 역시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졌고, 19세기 말 마지막 왕조의 어지럽던 정치상황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한제국으로 고쳤으나 14년을 지탱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5년의 긴 세월 일제강점기라는 어둠의 터널에서 허우적대다 1937년 시작된 전쟁이 1945년 원자폭탄의 위력에 무릎 꿇자 해방됐다. 이 기간 중 한반도 백성들은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했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됐다. 이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근로정신대라고 모집해 놓고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성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1990년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진실규명과 힘들게 사는 생존자 할머니들을 지원하려는 37개 여성단체들이 모여 만든 연합체가 바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다.이 단체는 2015 한일합의무효화와 일본군성노예제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100만 시민들의 참여로 2016년 설립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2018년 7월 통합해 현재는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되었다.이 시민단체 출신들을 적극 기용하기 시작한 노무현정부부터 이들의 존재감이 급격히 커진 원인은 위안부 단체 활동 자체가 진보진영에서 여성운동의 상징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 출신 간부들이 장관, 국회의원, 청와대 인사 등 적잖게 배출되면서 일각에선 시민운동의 순수성에 의심을 둔지도 오래다. 실제로 상당수 피해 할머니들은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자신들을 이용한 정대협 출신 정치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표시해 왔다.위안부 피해자 모임인 세계평화무궁화회 소속 할머니 33명은 그해 ‘위안부 두 번 울린 정대협은 문 닫아라.’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이미 정치인으로 둔갑한 정대협의 전, 현직 관계자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 관련 의혹을 폭로한 이용수 할머니 역시 윤 당선인의 국회입성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자신들을 이용해 정치인으로 탈바꿈하는 윤 당선인을 향한 이용수 할머니의 지적은 2000년대 초부터 고수하고 있는 다른 할머니들 입장과 사실상 판박이다. 허영구 전 민노총 부위원장 말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는 당사자가 아니라 대리인, 거간꾼들이 조직의 고난을 거치며 쌓아 온 성과를 낚아채 정치적 대표가 되는 ‘정치 먹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직위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회원이나 후원자들이 그들의 지위를 팔아서 국회의원 배지 달라고 말한 적도 위임한 적도 없다. 참 시민단체는 그냥 순수한 목적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단체일 뿐이다.

2020-05-18

균형발전은 ‘서울화’가 아니다

김주일한동대 교수우리나라 국토계획의 역사는 큰 정책 전시관과 같다. 국토 균형발전과 관련된 정책은 더욱 그러하다. 각종 지방경제 진흥 정책에서부터 수도권을 억제하는 정책, 그리고 최근 수도권의 행정기능과 공기업을 지방으로 이전시키는 정책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유형의 정책이 동원돼 왔다.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균형발전에 대해 목말라한다. 균형발전은 신기루와 같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인가. 아니면 우리가 뭔가 잘못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사실 우리나라에서 균형발전이란 지방의 ‘서울화(Seoulization)’로 이해되어온 듯하다. 지방에서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그렇다. 제한된 시간 속에 사업을 따오고 결과도 얻어야 하는 지방의 입장에서 가장 손쉬운 선택은 다른 곳의 사례들을 가져오는 것이다. 지자체는 항상 인력, 아이디어 부족에 허덕이고, 결국 벤치마킹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곳의 사업을 모방하곤 한다. 당연하게, 모방의 대상은 주로 수도권과 대도시들이다. 이런 ‘카피캣’ 현상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선거다. 총선, 지선을 막론하고는 대표 공약은 대부분 ‘우리지역에 이런 저런 사업을 도입하겠다’는 것들이다. 마치 지역을 수도권처럼 만들어줄 것 같은 공약이 많다. 이러다 보니 지역 발전 정책은 ‘서울화’ 내지 ‘서울 따라가기’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형태상으로 서울을 따라간다 해도 도시의 활력은 복제될 수 없다. 결국 정책의 효과는 기대를 채우지 못하고 지방은 또 다시 좌절하게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혁신도시, 기업도시와 같은 정책에도 함정이 있다. 수도권의 일부를 지방으로 양보하는 통 큰 정책이지만 여기에도 ‘서울화가 곧 균형발전’이라는 코드가 들어 있다. 아무리 좋은 균형발전 정책이라도 지방의 독자적인 노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금싸라기 같은 수도권의 기능이라 해도 그것이 서울의 중력권을 떠나는 순간, 그 효능은 예전과 같지 않다. 지방의 자체적인 혁신이 아닌, 주어진 혁신도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서울화가 균형발전의 방향성이 될 수는 없다. 서울화 정책들은 단기적으로는 그럴듯 해보일지 몰라도 결국은 지방의 자발성, 독자성을 잠재운다. 시간과 노력이 좀 더 들어가더라도 지방 도시들이 스스로의 발전 방향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지방의 자율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의 지원사업이 구상되고 있는 점은 의미가 크다. 지방이 독자적으로 정책 사업을 기획·제안하는 가운데, 중앙정부는 장려·후원하는 방식의 균형발전 정책이다. 사업의 형식과 내용, 결과물 모두에 있어 지방이 독자성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깊고 깊은 지방의 위기를 충분히 살펴보고 고민할 수 있도록 사업기간도 가능하면 제한이 없으면 좋겠다. 인구가 감소하고 지방 소멸의 우려가 나오는 시점에 각 지역의 독자적 생존력은 어차피 선택이 아닌 필수다. 앞으로도 이런 접근을 통해서 탈 중심화, 그리고 지역 자립으로서의 균형발전 정책이 정착돼갔으면 한다.

2020-05-18

가게 문을 다시 열기 전에

이제야 약간이지만 도시가 깨어나 몸을 뒤틀기 시작하는 듯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마스크를 한 사람들의 표정도 다소 풀린 것 같다. 생활방역체계로 이행한 이후 거리에 사람이 조금 늘어난 것도 같고, 택시기사님 목소리에도 활기가 돌아오고 있다. 다만, 일찌감치 승강기에 비치한 손 소독제를 없앤 곳이 있고, 마스크도 하지 않은 채 좁은 승강기에서 통화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에는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걱정부터 앞선다. 정부가 궁여지책으로 국민을 믿고 생활방역체계로 전환한 것이지, 우리나라가 코로나19라는 무서운 전염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님을 모두 마음속에 새겨두어야만 한다. 전문가들은 당장 내년이라도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여하튼 포항 지역에서도 코로나19 이후의 지역경제 회복을 위해 많은 지원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안도하여 안일하게 지금까지 닫아두었던 가게 문을 그저 열기만 해서는 V자 회복이 아닌 L자 회복에 그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만에 하나 코로나19가 아닌 또 다른 전염병-20, 전염병-21이 발생한다면 지금처럼 가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여는 상황만 반복할 가능성도 크다. 물론 그때도 지금처럼 정부가 있는 자금 없는 자금을 끌어모아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재정자금을 투입할지는 미지수다. 상황에 따라서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주 국부적인 어쩌면 국내 한정 나아가 특정 지역에만 한정한 전염병이 있을 수도 있다. 일례로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피해지역이나 대상이 좁혀지겠지만 여전히 전통시장, 골목 정육점, 관련 식육을 취급하는 식당과 마트 매출은 떨어질 것이고, 해당 지역 방역을 위한 출입통제로 관광 관련 업종도 피해에서 벗어날 수는 없게 될 것이다.결국, 어떠한 위기 그중에서도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게 되는 전염병과 관련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소비자의 행동 패턴은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게 나타날 것이다. 당연히 위기 발생과 그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될 소상공인들은 이번 코로나19사태에서 보여주었던 방식을 답습하기 쉽다. 이와 같은 위기와 대응과정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변화를 바란다고 해서 굳이 새로운 획기적인 어떠한 경영방침이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지는 않다. 단지 신뢰를 쌓는 것뿐이다. 가게와 손님 간의 신뢰. 평소 자신의 가게를 찾아오던 손님들이 이번 코로나19사태로 발길을 끊었다면, 그렇지 않은 가게도 분명히 있었다. 가게 매출이 급감한 원인을 무조건 세계적인 코로나19 때문이라며 외부에서만 범인을 찾지 않았으면 한다. 최소한 1%라도 일부 원인이 자신의 가게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객관적인 판단을 하였으면 한다. 단골손님들이 굳이 말하진 않았으나 평소 자신의 가게가 비위생적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출입구가 너무 좁아 드나들 때 손님들과 부딪치기 쉽다고 여겨 이번 사태에 아예 발길을 끊었을 수도 있다. 다른 가게는 평소에도 전화 주문이 가능하여 집으로 배달해준 다음 배달원이 지참한 카드결제기로 결제하고 있었기에 이번 사태로 가게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일부 매출이 있었던 반면, 자기 가게는 신용카드의 사용도, 배달도 불가능하였기에 가게 문을 닫아 피해가 더욱 컸었을 수도 있지는 않았나 근본부터 생각해보아야만 한다.최근 정부는 적어도 1가구당 40만 원 정도의 소비 여력을 만들어 주었다. 일정 지역 범위 내에서만 쓸 수 있고 사용기한도 정해진 특별조치다. 분명히 가게 문을 연다면 이번에 소비자 지갑에 들어간 돈 중 다소 얼마라도 거래해 왔던 인근 소비자를 통해 가게 매출이 일어날 가능성은 생겨났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을 무작정 바라고 가게 문을 연다고 해서 지금 비상시국 전환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경기회복 조치에 따른 수혜가 자기 가게까지 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금은 사태가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이며, 소비자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와 위생, 최대한의 비접촉, 비대면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게 문을 열기 전에 어떻게 해야만 할까.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다음과 같이 일부 방향성만큼은 받아들여 앞으로 펼쳐질 비대면, 비접촉의 시대에도 가게를 지켜나가겠다는 마음가짐을 더욱 굳건하게 다져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첫째, 그동안 카드수수료가 들고, 당장 현금화하기 어렵다는 등 여러 이유로 오직 현금결제만을 선호하였던 가게라면 최소한 고객이 신용카드 정도는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 이번 정부지원금만 하더라도 현금 지급 대상이 많지 않고 상품권보다는 오히려 신용카드, 체크카드, 선불카드 등을 선택하는 소비자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역소비자 대부분은 신용카드를 중심으로 정부지원금을 사용하기 쉬운데 자기 가게만이 현금결제를 고수한다면 가게 문을 열지 않은 것과 별다른 차이가 생겨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자기 가게도 온라인 판매망을 갖춘다면 최상이겠지만 그러려면 돈도, 시간도 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일정 금액 이상을 산 고객에게는 집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는 쉽게 도입할 수 있다. 현대 소비자에게 택배, 배달은 일상화된 지 오래다. 지금은 ‘신뢰’하는 가게에 전화로 ‘회’까지 주문하여 배달받아 먹고 있는 시대다. 하물며 썩지 않는 공산품을 취급하는 가게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종전까지 찾아가야만 하던 가게에서 전화로 배달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다시 위기가 오더라도 가게가 입는 피해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 것은 분명하다. 셋째, 음식점이라면 더욱 앞으로의 변화를 수용할 태세를 갖추어야만 한다. 철저하게 자기 가게의 특성에 맞추어 서비스를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 음식점은 상시 방역합니다’라고 적어둘 필요도 있다. 가능하다면 테이블마다 칸막이는 물론이고 아예 자리를 한 방향으로만 배치하는 방법도 좋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투명 안면 마스크를 주방은 물론 홀서빙 직원들까지 착용을 의무화해야만 할 것이다. 손님들은 일일이 주인에게 지적하지 않는다. 안가면 그뿐이다. 앞으로 음식점의 성패는 이처럼 적어도 가시적인 위생 수준의 확보가 매출을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각자의 수저가 모두 넘나드는 전골류를 서비스하는 가게라면 1인당 뚝배기로 배식하는 방법도 필요할지 모른다. 예전에는 고급음식점이나 직원들에게 모자를 쓰도록 했다면 이제는 골목 식당도 그래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왔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넷째, 전통시장에서는 여전히 모든 손님이 한 번씩은 만져보고 일일이 필요한 무게만큼 저울에 달아야만 전체 가격을 알게 되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작은 분량별로 미리 분리 또는 포장해두고, 가격도 킬로그램당이 아니라 소량으로 구분해둔 분량별 가격을 표시해둔 곳일수록 손님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옛날처럼 주인과 흥정하고 일일이 가격이나 원산지를 물어야만 하는 곳일수록 비대면 비접촉시대에는 살아남기 힘들다. 신용카드가맹점임을 밝힌 가게일수록 생존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택배까지 된다면 금상첨화다.이상과 같은 가게의 변화는 시청공무원이나 시민들이 도와주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가게의 흥망성쇠를 책임지는 가게 주인만이 결정할 수 있다./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

2020-05-17

두꺼비 대이동

두꺼비는 개구리목의 두꺼비과로 분류되는 개구리와 비슷한 양서류다. 몸길이 80∼120㎜정도로 개구리 중에는 가장 크다. 주둥이는 둥글고 둥에는 불규칙한 돌기가 많이 나 있다.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몽골 등지에 주로 분포돼 있다. 저산지대의 밭이나 초원에 서식하는 동물이다. 요즘 같이 도시화한 곳에는 이제 보기 드문 동물이 됐다.두꺼비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개구리와 두꺼비가 뱀을 먹는 사건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선조들은 신령스런 동물로 여겼다. 두꺼비와 연관된 설화나 민담도 많다. 민가에서는 집지킴이 혹은 재복의 상징으로 삼았다.크고 튼실하게 생긴 갓난 아이를 “떡두꺼비 같다”고 한다거나 금두꺼비를 만들어 가정에 재물이 들어오길 바라는 민가의 풍속이 이런데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올해도 대구 수성구 망월지에서 새끼 두꺼비의 대이동이 시작됐다는 소식이다. 욱수동 망월지에서 산란을 거쳐 성장한 새끼 두꺼비 수백만 마리가 서식지로 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새끼 두꺼비의 대이동은 자연생태계의 모습을 그대로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을뿐 아니라 생태 가치 측면에서도 보존할 만한 일이다.매년 2월 성체 두꺼비 수백 마리가 욱수산에서 망월지로 내려와 산란을 하고 돌아간 지 60∼70일 만에 나타나는 이 모습은 매년 전국적 화제를 뿌리고 있다. 2010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했다.그러나 이곳도 망월지를 메우자는 일부 지주의 법정소송으로 개발과 보존의 문제로 진통 중이다. 두꺼비의 대이동 내년에 또 볼 수 있을까. /우정구(논설위원)

2020-05-17

‘태종·세종’이 왜 거기서 나와?

안재휘 논설위원정치권이나 정치 논객들이 종종 써먹는 비판 용어 중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는 비유가 있다. 용비어천가는 원래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6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다. 정치 이야기에서 이 말은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이 특정 실세 보스를 향해 비판의식을 거세하고 과장된 수사법으로 칭송만 일컫는 현상을 비꼬기 위해서 주로 동원된다.지난 4·15총선 결과와 관련해 여당의 대승을 진작 예견했다는 반응이 없지는 않지만, 뜻밖이라는 표정도 상당수다. 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라는 탄식이 많다. 그 정서를 타고 일부의 메아리 없는 ‘부정선거’ 주장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개헌선에 육박하는 숫자의 거대한 ‘범여권’ 의석을 당당히 거느리게 됐음은 역연하다.느닷없이, 여당 정치권에서 듣기 민망한 문비어천가(文飛御天歌)가 잇따르고 있다. 강원도지사에서 영어(囹圄)의 신세로 전락했다가 와신상담 끝에 국회로 돌아온 민주당 이광재 당선자가 시작했다. 그는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특별방송에서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은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과제를 만드는 태종 같다”며 “이제 세종의 시대가 올 때가 됐다”고 말했다.그러나 그 며칠 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3년 동안 태종의 모습이 있었다면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참모로서의 바람”이라고 고쳐 말했다. 이광재 당선인이 문재인 대통령을 노 전 대통령에게 ‘끼워팔기’하듯 표현한 일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는 문 대통령에게 ‘태종+세종’ 이미지의 화려한 포장지를 붙였다.정세균 총리까지 칭송대열에 동참했다. 정 총리는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3년은 대통령님의 위기극복 리더십이 빛난 시기”라고 찬사를 띄웠다. 이쯤 되면 정부·여당 내의 작금 분위기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총선 압승 결과를 만들어낸 최대의 공신으로 불가사의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일궈낸 문재인 대통령이 꼽히는 분석은 부인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그 시혜를 풍성히 받아든 여권 인사들이 감탄을 외치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태종+세종’은 너무 심했다. 왕권강화로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과 백성을 사랑한 불세출의 군주 세종을 함께 묶어 붙이는 찬송가는 좀처럼 소화하기 버겁다. “나라가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는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의 촌평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가 만개한 나라에서 왜 하필이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봉건시대 군주들의 이름을 줄줄이 소환하는지 께름칙하다. 총선 대승이 아무리 흥겹더라도 꼭 기억해야 할 덕목은 있다. 내리막길에 정말 필요한 것은 액셀러레이터가 아니라 브레이크라는 교훈을 아주 망각하지는 말기를 부탁한다. ‘태종·세종’이 왜 거기서 나오나.

2020-05-17

미래통합당이 개혁에 성공하려면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정당은 정치적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선거에 승리하는데 기본 목적이 있다. 지난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은 처절하게 패했다. 선거 참패 원인을 갑작스런 코로나 재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야당의 무능 때문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물론 180대 103이라는 민주당의 승리는 국정운영을 잘해서 얻은 결과는 결코 아니다. 야당의 시대에 뒤진 당의 정체성, 조직과 운영 방식, 총선 전략이 실패한 초래한 결과물이다. 미래통합당은 총체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이러한 보수 야당의 위기는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래다. 박근혜 정부의 탄핵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파적 이해에 침잠한 당 지배구조, 대통령의 불통의 리더십, 친박의 오만과 부패는 반동의 정당으로 당 위상을 추락시켰다. 대통령과 당 지휘부는 광화문의 수천만 누적된 촛불 함성에 적절히 대응하지도 못했다. 보수 당내의 친박과 비박이라는 계파적인 갈등은 위기 수습은커녕 책임 전가로 일관하였다. 결국 탄핵에 가담한 비박은 신당을 만들고, 친박은 반성은커녕 탄핵에 동조한 탈당파를 비난하는 형국이 연출되었다.미래통합당은 먼저 당 개혁을 위한 당의 정체성부터 확립하여야 한다. 미래통합당은 합당 후에도 당의 정체성은 오리무중이다.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유승민 의원의 주장은 아직도 당의 발전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당내 강보수의 주류는 돌아온 비박을 아직도 배신자 프레임으로 가두려고 한다. 탄핵당한 대통령 시의 총리가 당 얼굴이 될 때 당의 정체성은 더욱 위기에 봉착했다. 보수 정당은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야당은 ‘개혁 보수’, ‘참 보수’에서 당의 정체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주호영 새 원내대표는 당 조직을 개편하여 정당을 역동적으로 운영할 책임이 있다. 세계 선진 보수 정당은 당 조직과 운영을 새롭게 정비하여 보수층의 지지를 회복하였다. 미래통합당은 전통 보수 정당인 미국의 공화당과 독일 기민당의 역동성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 위상이 G20에 이르고 4차 산업시대 진입했는데도 한국의 보수정당은 아직 ‘개발 독재 시대’의 환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탈 이념화 시대가 도래한지 오래인데 반공과 냉전적 사고에 갇혀있다. 야당은 영남 지역 당, 노인당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야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 미래통합당은 ‘뇌가 없는 무능 정당’이라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한국 야당의 이러한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역동적인 한국 정치는 급변하는 민심처럼 요동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등락을 반복하는 것도 한국 정치의 한 단면이다. 2022년 지방선거와 대선은 아직 약 2년이 남았다. 미래통합당은 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중도 보수 세력의 지지를 회복해야 한다. 위기 시마다 처방전으로 썼던 비상 대책위원회 만으로 병의 근원은 다스릴 수 없다. 김종인 신드롬에 너무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야당은 ‘미래도 통합’도 없는 당명부터 바꾸고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2020-05-17

요즘 마음이 어때요?

김현욱시인예술인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문가인 참마음심리상담센터 원장이 권한 ‘내 마음 들여다보기’를 일주일 단위로 실천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떠오른 감정과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 그에 따른 행동을 일주일 동안 기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전거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딸에게 새 자전거를 사줬다. 기념으로 영일대해수욕장에서 효자 시장까지 제법 먼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다. 아직 위태위태하지만 제힘으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대견하고 한편으론 안쓰럽다는 감정이 들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우리 딸이 다 컸구나’, ‘함께 자전거를 타니까 참 행복하구나’, ‘그래 이런 게 소확행이지’, ‘딸과 이런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 겠다’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딸에게 응원과 격려의 말과 행동을 많이 해주었다. 중간에 크게 한 번 넘어졌을 때도 내가 일으켜주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도록 기다려주었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 단위로 내 마음을 기록했다. 기록지를 들고 문가인 원장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돌이켜보면 우리는 제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가 별로 없다. 우리의 눈과 귀는 쉴 새 없이 미디어와 스마트폰에 노출되고 잠식당한다. 붓다의 표현으론 “끊임없이 불타고 있는 것”이고, 메리 파이퍼의 표현으론 “미디어는 우리에게 피상적으로 살라고 부추기고, 우리는 생각, 감정, 행동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자기 분열에 이르는 교육을 받고 있고, 우리의 문화는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고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는다. 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 같은 것은 미디어에서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어딘가 아프고 패배한 사람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일각에 남아 있다. 정작 진실은 그 반대인데도 말이다.정혜신의 책 ‘당신이 옳다’에는 만나는 사람에게 “요즘 마음이 어때요?”라고 묻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 글을 보고 ‘누가 나에게 요즘 내 마음이 어때요? 라고 물은 사람이 있었던가! 나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요즘 마음이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었던가!’하는 회한이 들었다.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되는 게 인생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 불씨처럼 살아나는 게 인생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모질고 날카로운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나. 학교에선 아이들에게 집에선 가족에게 말로 입힌 상처가 너무나 크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말의 삶이다. 말이 남는다. 내가 한 말, 당신이 한 말들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이다.내 마음 들여다보기를 실천하면서 가끔 지인을 만나면 “요즘 마음이 어때요?”라고 물어본다. 이 말은 분명 힘이 있다. 분열의 말이 아니라 통합의 말이고 차가운 말이 아니라 따뜻한 말이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도 그런 말이다. 메리 파이퍼는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을 “아름다운 존재가 성장하고 싶어 하는데 다른 어떤 존재가 그것을 저지할 때”라고 말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존재를 성장시킨다.

2020-05-17

국민을 위한 적극 행정…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곽용환고령군수올해 본격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적극행정 정책’이 공직사회에 자발적 자세와 능동적 사고의 바람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공복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행정문화를 지칭하는 ‘적극행정’은 공직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나, 아직까지도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대표되는 공직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우리 스스로 겸허히 반성하고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렇기에 소극행정 혁파, 적극행정 공무원 책임 면책, 우수 공무원 선발 및 인사상 우대조치를 담고 있는 적극행정은 시대적 소명으로서 국민 모두가 체감할 수 있도록 공직사회 구석구석, 국민의 삶 곳곳에 퍼져 나가야 하며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다가와야 하는 순리와 같은 일이기도 하다.고령군에서도 정부정책 추진을 기회로 삼아 적극행정 추진 계획을 수립하고 다양한 정책을 시행·보완해 공직사회에 ‘적극행정’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나가고 있으며,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적극행정은 우리 국민의 아픔을 보듬어 안고 함께 나누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령군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 상황을 맞아 경제 살리기 비상대책 TF팀을 구성해 군민 생계 안정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예비비 등을 포함한 예산 92억원을 신속 투입해 중소기업·소상공인 정책자금 지원, 피해업종 긴급지원, 취약계층 긴급 복지 등의 정책을 차질없이 수행해 나가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특집판 대가야소식지 발행, 경제활성화를 위한 긴급 제안 실시 및 선정, 전국 최초 드라이브 스루 농산물 판매, 전 군민에게 마스크 및 손소독제 배부, 대구·경북 최초 제로페이 연계 모바일상품권 도입 등 우리사회에 어둡고 짙게 드리운 코로나19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규제를 개선하고 절차를 간소화하여 업무를 처리하는 적극행정 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단계는 아니지만 인접도시에서 신천지 사태 등으로 확진자가 크게 늘어날 때 집단시설의 신속한 코호트 격리 조치와 관리직 직원 200명 전원에 대해 군비를 투입해 검사를 진행하는 등 선제적 방어망을 구축하고 코로나 확산 차단에 적극 매진한 결과 현재 지난 4월 2일 미국 유학생을 마지막으로 확진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그동안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방역체계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체계로 일부 완화되고 어느 정도 정점을 찍었다고 판단되는 현 상황에서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우리 국민의 삶을, 그리고 군민 모두의 경제적 어려움을 절실히 느끼며 철저한 방역체계를 유지한 채 경제를 살리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 도출되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구체적인 방안의 중심에는 적극적인 공직자의 자세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우리 마음속 소명의식처럼 공직자 모두가 선봉에 서줄 것을 주문한다.분명, 아직까지 코로나19가 드리운 지역경기 침체의 그늘이 깊은 것이 사실이나 “구내식당 운영을 중단한 채 외부식당을 이용하여 외식업 살리기에 앞장서고 급여 일부를 떼 고령사랑상품권을 구입해 관내 농산물 소비 등에 적극 앞장서고 있는 고령군 공무원의 모습은 모범적인 지역경제 활성화 사례”라는 어느 군민의 고마운 말씀처럼 우리 공직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국민들에게는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어두운 터널일수록 그 끝에는 언제나 밝게 빛나는 햇살을 머금고 있기에 고령군정을 책임지는 군수이자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군민 행복을 위한 적극적인 행정 추진의 선두에 서고자 한다.아울러, 오늘 우리가 뿌린 새로운 희망과 도약의 씨앗이 행복의 열매로 다가 올 그날을 위해 600여 고령군청 공직자들과 함께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고령군의 내일을 위한 약속! 적극행정은 시대적 소명으로서, 우리 공직자 모두의 삶에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다가와야 하는 순리와 같은 명제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2020-05-17

장기숲의 봄

이윽고 따스한 햇볕 사이로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온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봄이 몸 안으로 퍼져간다. 소나무들도 새순을 내밀고, 온 마을에 노랑 이불을 덮으러 나서면 이팝나무도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 올린다. 이래서 봄은 ‘동사’이다.봄이 한창인 장기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숲이라 부르기엔 어색한 공간이다. 학교 교문으로 들어서야 하니까 말이다. 지난해 이맘때 같으면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두런거렸겠지만 올 해는 햇살만이 교정을 가득 채웠다. 운동장 한편에 200년의 세월 동안 품을 키워온 이팝나무가 있다. 꽃이 피기 전에는 이팝나무라고 선뜻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왜냐면 이렇게 큰 키를 보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록이 무성한 오월, 흰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면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그 밑으로 들어가니 그늘이 넓고 편안해 탄성이 절로 나온다.이팝나무의 학명은 치오난투스 레투사(Chionanthus retusa)인데,‘하얀 눈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송이가 사발에 소복이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 ‘이밥나무’라고 했으며, 이밥이 이팝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늦봄에 핀다 해서 ‘입하(立夏)목’ 또는 ‘이암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그렇지 않은 해는 흉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장기숲에는 활엽수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팝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큰키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밑에 탱자나무, 신나무, 산사나무, 꾸지뽕나무 등 작은 키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도록 했다. 그 밑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 어찌나 시원한지 발이 시려 오래 담그지 못 했다고 한다. 이처럼 복층 형태로 숲을 가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기가 어려워 숲속에 들어가면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해 동네 사람들도 길을 잃곤 했다고 기록에 전한다.김순희수필가예부터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 온 장기는 신라 때부터 중요한 군사기지로 자리했다. 장기읍성에 올라서면 지금은 성 아래 논으로 된 장기들판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나무들로 가득한 장기숲이 있었다.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숲은 길이가 7리, 너비가 1리 였다고 하며 면적이 지금 단위로 19㏊였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에서 내린 왜구 무리들이 거대한 숲의 장벽 앞에서 멈칫한다. 그 순간 요란한 총포 소리와 함께 나무 틈에서 화살이 쏟아져 나온다. 당황한 일부 왜구들은 숲속에 뛰어들었지만 탱자나무 가시에 찔려 오도가도 못 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다 붙잡힌다. 장기숲에서 벌어졌을 법한 상황이다.하지만 장기숲은 광복 후 장기중학교 건립과 새마을운동으로 농사짓는 경작지로 개간되면서 숲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교정에 십여 그루의 거목들이 남아 여기가 숲이었던 시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베어진 나무는 입찰을 통해 매각되었다고 하는데, 주로 숯장사들이 사들여 현장에서 바로 나무를 베어다 숯을 만들었다고 한다.몇 해 전부터 장기면 주민들은 장기숲복원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킨 뒤 장기숲의 옛 모습이 배경에 있는 ‘추억의 사진전’을 여는 등 숲 복원운동에 적극 나섰다. 숲을 가꾸어 간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또 하나의 마을 숲을 되살린다는 범주가 아니라 지역 문화를 발굴하고 알려 가치를 높여야 다음 세대에도 유효한 자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니체는 머리가 아프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산책밖에 없다고 했다. 나무 그늘에 들어가는 것이 쉴 휴(休)자이니 동·서양이 같은 방법으로 마음을 쉬었다. 뭉싯뭉싯 하얀 구름을 얹은 이팝나무를 바라본다. 왜 바라보기만 해도 기운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르겠다. 200년 동안 지녀온 세월의 기운을 내게 주는 걸까. 코로나, 다 지나간다. 걱정 말아라. 장기숲이 나를 위로한다.

2020-05-17

청출어람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교권을 존중하고 스승을 공경하자는 뜻에서 지정된 기념일이다. 때마침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수업으로 선생님과 대면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스승의 날을 맞는 마음이 편치가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제간의 만남조차도 갈라놓은 듯해 고약하다는 생각도 든다.청출어람(靑出於藍)은 “푸른색은 쪽빛에서 나왔으나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비유한 말이다. 성악설을 주창한 순자의 권학편에서 유래했다. 순자는 학문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나올 수 있다며 학문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그 사례로 북위(北魏)의 이말과 공번의 관계를 들었다. 원래 이말은 어려서 공번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했다. 그의 학문 발전속도가 빨라 몇 년이 지나 스승의 학문을 능가하게 되었다. 공번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그를 스승으로 삼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친구들이 훌륭한 제자를 두었다 하여 이를 청출어람이라 불렀다.우리 속담에 “나중에 난 뿔이 우뚝하다”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논어에 나오는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후배는 장래성이 있으니 가히 두려운 존재”라는 뜻이다. 세상의 일은 반드시 순서대로 정해진 것은 없다. 노력하면 선생님이나 선배를 언제든지 뛰어 넘을 수 있다. 그것이 허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청출어람이 가지는 본뜻은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많이 나오길 기대하는 데 있다.철학자 니체는 “제자로만 남으면 스승에게 누를 끼친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승의 마음은 다를 바 없다. 스승의 날을 맞아 청출어람의 뜻과 스승의 은혜를 한번 새겼으면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5-14

조국 방패론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힘써온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 출신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을 둘러싼 공방이 정치권에서 뜨겁다. 심지어 윤미향 당선자는 페이스북에 “딸이 여러 언론의 취재를 받고 있다”면서 “6개월간 가족과 지인들까지 탈탈 털린 조국 전 장관이 생각나는 아침”이라고 적어 ‘조국 방패’를 내세웠다. 조 전 장관 때처럼 해명과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인데, 이런 의혹들에 대해 조목조목 해명하기보다 일부 언론과 미래통합당이 만든 모략극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양상이다.한마디로 정치적인 공세라는 주장으로 맞서겠다는 의도다. 이처럼 진보진영에서 위기에 처하면 조국 전 장관을 방패로 소환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도 지난해 1월 조국 전 장관의 의연한 모습을 보고 총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으로 편지글을 띄웠다. 진보 진영에서 목소리가 큰 조국 전 장관 지지자들의 지원을 기대한 것으로 분석된다.정치부 기자로서 오랜 세월 지내온 필자는 정치권이 서로 상대방 주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에만 열을 낼때면 속내가 뻔히 들여다 보이는듯한 느낌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과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공금횡령이나 비리의혹이 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하면 되는 지 방법이나 절차는 너무 뻔하다. 객관적인 3자의 검증을 거쳐 의혹을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있는 대로, 그렇지 않으면 않은대로 처리하면 된다. 그게 상식이다. 다른 길로 빠질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정치판에서 한쪽 당 구성원이 당 이미지를 크게 깎아먹을 만한 사고를 쳤을 경우 상황은 확 달라진다. 구성원이 했다는 잘못에 대한 즉각적인 진상조사나 당사자의 사과 등의 조치가 이어질 것이란 기대는 접어야 한다. 오히려 잘못을 부인하는 당사자의 주장을 옹호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아예 여러 의원들이 함께 나서서 성명서 등을 통해 상대 당쪽의 주장은 정치적 공세에 불과하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상대방이 잘못을 구체적으로 꼬집어 지적해도 거기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지 않고 그런 것은 추후 수사당국 등에서 조사하면 밝혀질 일이니 이러쿵저러쿵 뒤집어 씌우지 말라고 부르짖는다. 그런 공방 와중에 여론이 조금 수그러들면 슬그머니 사고친 당사자에게 가벼운 징계를 먹이고, 수습을 시도한다. 뜨겁던 비난열풍이 식었을 때 쯤이면 언론에서도 새삼스레 악을 쓰며 비난하기 쉽지않다는 걸 노리는 것이다. 이런 물타기 전략은 정치권에서 매우 흔한 반면 유용하다. 윤미향 당선인의 기부금 횡령의혹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 역시 이같은 도식에 너무 잘 들어맞는듯 보인다.14일에도 더불어민주당 현역의원과 21대 국회의원 당선인 등 16명이 윤미향 당선인과 정의연을 둘러싼 각종 의혹 제기에 대해 공세 중단을 촉구했다. 야당이 제기한 회계 부정 논란에 대해서는 ‘제도적 개선 대상’이라고 치부했다. 과반을 훨씬 넘어선 여당의 조국 방패가 너무 두껍고 단단해보인다.

2020-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