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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연오랑 · 세오녀는 日 개국신화의 모태

Ⅲ. 역사적 배경1. 근기국 형성과 신라로의 편입1) 근기국의 형성근기국의 읍기는 고현리(古縣里)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포항시 남구 오천읍 원리(院里:院洞)지역이다. 고현은 오늘날 포항 남부지역의 젓줄인 형산강과 냉천 사이의 중심지역으로, 양쪽 하구 부근에 어미들, 제내들, 송내들 등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포항시 남구 인덕동, 동북쪽으로는 일월동과 청림동을 접하여 영일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연해지역과 내륙을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선사시대부터 주거생활의 중심지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일찍이 근기국을 신라시대의 근오지현(斤烏支縣) 지역이었던 경북의 영일지역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음운상으로도 근기(勤耆)-근오기-근오지(斤烏支)로 변함이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근기국은 고현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포항시 남구의 오천읍, 연일읍, 동해면, 대송면 등의 지역을 지배한 소국을 형성하면서부터 이 고장의 역사는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 신라로의 편입과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탄생근기국은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세기초 경 소국을 형성하였다가 신라 건국 이후 2세기경 고대국가에 편입되었다. 신라 고대국가의 형성기인 제5대 파사왕(80~112)때에 전쟁을 수행하여 안강·흥해·기계를 복속하여 울산까지 동해안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 후 신라 고대국가 형성의 큰 정치사적 사건인 근기국 복속이 제8대 아달라왕(154~183)대에 이루어진다. 연오랑세오녀 신화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아달라왕대 고대국가의 영역 확장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신화가 탄생된 왕 즉위 4년(157)이 주목되며, 「2월에 감물·마산의 두 현을 처음으로 두었고, 3월에 왕은 장령진으로 순행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모든 정병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3월에 지난 해(왕 3년)의 계림령에 이어 죽령(竹嶺)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과 실천은 아달라왕대에 이르러 영일만 일대를 실질적인 지배영역으로 복속하여 흥해에서 울산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지역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신라 2대 남해왕 3년에 시조묘를 세운 후 7대까지 한 차례씩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으나 8대 아달라왕대에 와서 두 번이나 시조묘 제사를 올리며, 시조묘를 중수했다는 사실은 건국의 시조신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통합하여 신라 고대국가의 확립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오랑과 세오녀를 중심으로 한 근기국의 삼족오일월숭배 집단(사제자·귀족·직조·제철기술자 등)은 전통적인 천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사로국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자 신라의 복속에 불응하고 도기야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양곡의 땅 신천지 일본지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영일만의 근기국세력이 일본 변읍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신라의 정치적 상황과 연계된 것으로 이 후 전개되는 모국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한다.2. 선진문화 전파와 일본과의 교류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대 한국인의 일본이주와 문화이식이 일본고대사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음은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선사시대부터 관계를 맺어 고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문화가 대량으로 일본에 유입 전수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일본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B.C 4세기~A.D 3세기)문화는 토기·청동기와 묘제·주거양식 등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진한과 신라는 철과 철기를 생산하여 당시 동북 아시아에 널리 공급하던 철국이었으며, 그 흔적으로 영일 호동(虎洞:현 포항시 남구) 폐고분군(廢古墳群)에서 B.C.2세기~A.D.2세기경의 초기 철기시대의 철부(鐵斧)·철모(鐵?)·철도자(鐵刀子)·철촉(鐵鏃) 등의 철제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근기국의 치소 인근에서 활발했던 철생산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실체는 고고학적 성과를 더 기다려 확인되어야 할 것 같다. 일찍이 이홍직(李弘稙)은「신라 지방과 이즈모지방과의 긴밀한 척식(拓殖)관계를 전하는 일본측 고전으로서는 ‘이즈모풍토기(出雲風土記)’가 있다.」,「진한(辰韓) 지방에서 동해를 건너서 일본의 일부 지방의 지배자가 된 신화는 우리나라 고전에도 남아 있다... 이것이야 말로 태고시대에 정말 있을 수 있는 역사를 반영한 전설로 볼 곳이며, ‘연오랑(延烏郞)’이야 말로 일본 전설의 ‘스사노오노미코도(素잔嗚尊)’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라 하여 양국의 교통과 문화교류 등 이 방면 연구에 큰 시사를 주었다.연오랑세오녀 세력들이 배를 타고 떠난 곳은 영일만 출입의 요해처인 임곡진으로 비정되며, 그들이 도해하여 개척한 곳은 영일만 지역과 가장 가까운 일본 지역으로 거의 같은 위도인 36。에 있는 오키(隱岐)섬과 이즈모(出雲)·마쓰에(松江)지역을 들 수 있다. 영일과 출운 지역은 가까운 거리, 항만, 조류와 풍향 등의 자연의 지리와 환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일본의 천일창(天日槍) 설화는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동점하여 이루어진 태양신화의 이동으로 보는 연구와 함께「도기야(都祈野)는 근오지(斤烏支)의 ‘오지’(烏支)와도 음이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연오랑세오녀가 건너가 옛땅 오기(迎日)의 이름을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보는 연구는 태양신화 동점의 민속학적 접근과 지명의 언어학적 접근으로 눈길을 끈다. 계속

2007-11-09

포항은 한국 일월신화의 대표적 聖地

Ⅱ. 신화의 지리적 배경과 지명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의 명증(明證)은 앞의 문헌자료 외에도 포항 지역의 특성을 밝혀주는 연(영)오·세오의 인명과 근기국, 근오지(斤烏支), 오천, 일월·영일·도기야·일광·세계·夫山(부산 또는 扶桑)·광명 등 해와 달, 해맞이, 빛을 상징하는 밀집 분포된 지명을 통해 밝힐 수 있다.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없었더라면 일월·빛과 관련된 수많은 인명·지명의 역사적 배경을 온전히 구명할 수 없고, 반면에 이러한 명칭들이 남겨지지 않았다면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지리적 배경을 구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一 즉 二’ ‘二즉 一’로서 서로의 정체성을 보완하고 밝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1. 영일현과 도기야《삼국유사》에서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한 것에 대해 필자는 넓게는 영일현(당시의 근기국과 근오지현의 영역), 좁게는 도기야를 지칭한 것으로 보았다.선사시대부터 사용되었을 두 명칭 중 영일은 근기국 수립시의 치소 명칭과 신라 편입후 고을명인 근오지·오천·오량우·임정 등의 명칭으로 변하였으나, 도기야는 초기와 같은 ‘해돋는(크게 비는)’ 신성한 들(野)의 이름, 제장명(祭場名)으로 오랫동안 불리워지다가 점차 마을이 형성되어가면서 마을명으로 변천했다고 본다. 2. 일월지, 천제당, 연오랑세오녀의 거주지 ‘당평’(塘坪)마을 현재 일월지는 오천 해병부대 내에 소재하고 있으나, 본래는 도기야 지역에 속해 있었다. 주위보다 높은 언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저수지로서 주변의 여러 작고 큰 들을 끼고 있어서 비록 바닷가 지역이지만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데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일월지의 못 위’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일월지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해석을 좀더 폭넓게 하여, 일월지 못둑 위 가까운 지점에서만 제천지나 제당을 찾지 않고, 좀 떨어진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연오랑세오녀가 살았던 세계동의 당평 마을이 제천지와 일월사당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고자 하였다. 세계동은 ‘당평(안마실, 안마을)’, ‘중흥’, ‘등위(신흥)’, ‘원세계’, ‘장터’ 등의 자연부락을 합쳐 이루어졌다. 이 동네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천제당(天祭堂)’이 있어서 매년 정월 초 정일(丁日)에 연오랑·세오녀 일월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당집 내부 앞 벽면에는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가 서로 마중하는 시늉을 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과거 천제당 자리였으므로 아마도 연오랑세오녀 부부를 상징한 그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천제당이 있었던 당평마을에서 동해바다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길목 언덕에 ‘당옆’이란 자연부락이 있다. ‘당옆’마을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 바로 이 당옆마을에 연오랑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연오랑세오녀의 집인 ‘당(堂)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3. 연(영)오·세오와 삼족오 포항지역의 일월과 관련된 명칭 중에 ‘오(烏)’자가 든 지명인 斤烏支·烏良友·烏川·斤烏兄은 삼족오태양(일월)을 상징하는 양곡(暘谷:해가 가장 먼저 돋는 곳)의 고을명이다. 延烏와 細烏 역시 삼족오태양(일월)을 상징하는 인명이다. 해 속의 세발 까마귀 삼족오(日中三足烏)는 달 속의 두꺼비(月中蟾?)와 함께 쌍을 이루고 있다. 삼족오는 음양론에 따라 해의 상징으로 양의 뜻이고, 두꺼비는 달의 상징으로 음의 뜻이다. 이러한 인명과 지명들은 영일만 양곡이 고대 한민족 문명권의 삼족오태양신화가 이동 전승된 귀착지로서 한국의 대표적 일월신화의 성지임을 밝혀주고 있다. 천손의 나라 한민족의 태양숭배사상과 조류숭배사상의 연합토템으로서의 우주관, 일월의 음양조화사상 및 천제적 제의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이 상징화되고 체계화된 것이 삼족오라 할 수 있으며, ‘하느님숭배’·‘태양숭배’·‘삼신(三神:환인·환웅·단군)숭배사상의’ 상징적 표현양식의 하나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월지정(日月之精)이라는 의미와 함께 일월신화의 이동 경로에 나타난 삼족오의 ‘烏’자가 든 인명이 주목된다. 연오랑세오녀는 일월지정의 양오(暘烏)이며, 천강지자(天子) 왕(태양)의 안내자임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오이(烏伊), 백제의 시조도 오간(烏干) 등의 보필로 나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연오랑과 세오녀도 근기국과 신라의 왕을 보필하는 지배세력의 유력한 인사(사제자,왕족, 귀족, 고급기술자 등)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왕을 대신하여 태양의 빛을 온 나라와 백성에게 안내하고 밝히던 높은 직분의 인사였을 것이다.삼족오 문양은 고구려의 벽화 뿐만 아니라 1986년 익산(益山) 입점리(笠店里) 백제고분의 금동관에서도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지난 1985년 출토된 순흥읍내리 고분벽화에서도 양광(陽光) 즉, 양수지조(陽燧之鳥)와 흡사한 삼족오의 전신(前身)을 상징하는 일상(日象)이 발견되었다. 신라지역인 경북 동북부의 영풍·안동·봉화·청송·울진·영덕·영일·영일지역에서도 고구려 지명이 나타난 점으로 보아 상당한 기간 고구려의 세력이 이들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삼족오태양 관련 유물 연구와 지금까지 살펴 본 지명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지리적·역사적 특성 구명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나라 일월신화와 삼족오태양신앙의 종착지인 포항 영일만 지역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될 것임을 기대한다. 계속

2007-11-02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배용일(포항1대학 초빙교수)이 글은 배용일 초빙교수(포항1대학)께서 지난 10월 8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제7회 일월문화제 기념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일월사상)에서 발표한 주제 논문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포항 정체성 탐구와 포항문화브랜드화를 중심으로- ”를 요약한 것이다.(각주는 지면 관계로 생략) /편집자 註 머리말 포항지역의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일월신화(日月神話)는 단군신화를 수록하여 유명한《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어 일찍부터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남선이 단군신화는 한국문화 일체의 종자라고 했듯이 연오랑 세오녀 신화는 포항문화 일체의 종자이며 원형질이다. 지금까지 ‘연오랑 세오녀 설화’라고 일컬어 온 것을 2007년 포항의 문화제 명칭을 영일만축제에서 이번 제7회 ‘일월문화제(日月文化祭)’로 개칭한 것을 기념하는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 개최를 계기로 ‘연오랑 세오녀 신화’로 명명하였다. 그 이론적 근거는 본고의 지리적 배경, 역사적 배경 및 신화적 구조를 통해 구명하였다. 이번 연구에서 연오랑세오녀가 실존 인물임을 밝히는 귀중한 사료를 발견하여 포항 정체성 탐구에 큰 전기를 맞으며, 일월신화 1850년의 신비로운 베일을 한 겹 벗길 수 있게 되었다.이 논문의 궁극적 목표는 연구 결과 얻은 포항문화의 정체성을 브랜드로 상징화하여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의 창조적 가치를 재창출하는데 큰 뜻을 두었다. Ⅰ.연오랑 세오녀 사료연오랑 세오녀 신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와《영일읍지》의 ‘세계동(世界洞)’의 내용을 소개한다. 1.《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제 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 -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 제기(帝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 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日官)이 말했다.「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그런 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三國遺事》권1, 紀異, 원문생략) 2.《영일읍지》의 ‘세계동’예로부터 세곡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누을(또는 혜곡)이라고 불렀다. 세 구역(원신흥·중흥·세계)을 합하여 세계동이라고 했다. 신라 아달라왕 때 영오랑·세오녀가 세계동의 못둑 위의 들에 집을 지어 살았던 곳이나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남쪽에는 춘덕보가 있어 일월지로 통하고, 동쪽에는 순제가 있어 앞들에 물을 대고, 북쪽에는 옥령이 있고, 서쪽에는 도덕곡이 있다.(金鎔濟,《迎日邑誌》권1 ‘世界洞’ 원문생략) 《삼국유사》에서는 연오랑(延烏郞)이라 했으나《영일읍지》는 연(延)자를 영(迎영)자로 써서 영오랑(迎烏郞)이라 다르게 표기했다. 그러나 ‘연(延)’과 ‘영(迎)’은 음과 훈이 흡사하여 조선시대에는 영일현(迎日縣)과 연일현(延日縣)을 혼용해 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같은 명칭이다. 《영일읍지》‘세계동’에서는 영오랑 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던 세계동 마을과 주위의 못·재·골짜기 등 구체적인 지형적 환경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일월지와 제천지(祭天地) 및 연오랑세오녀 거처를 비정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당시 부부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세계동〉의 마을명과 주변의 못·재·골짜기의 명칭이 지금까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동국여지승람》의「일월지 못 위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은 일월신화의 발생지역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신화는「동해 바닷가에 사는 해와 달의 정(精)인 연오랑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도일(渡日) 건국 사실이 자연환경의 지역성과 고대 신라왕국 성립기의 역사성을 토대로 상징화된 것이다. 즉, 당시 전개되었던 근기국(勤耆國)의 신라로의 편입, 선진문화의 일본전파 및 신라와 일본과의 문물교류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화한 것으로 추단된다. 특히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탄생지를 에워싼 여러 지명들과 이 지역의 가장 빠른 연중 일출시각 등은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포항지역만이 일월신화의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계속

2007-10-26

‘충효의 고장’ 영천

2월이 다가기전에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충효의 고장 영천’, ‘관광 영천’의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여행의 참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해 보는 것이 어떨까. 영천에는 우리나라 3대 천문관측소 중의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와 정각 별빛마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임고서원, 국내 최고 수준의 시안 미술관, 국내 최대 한약재 거래지역인 영천한약약령시장, 7천평 규모로 산 정상에 자리한 사일관광온천,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있는 영천댐 등이 가볼만한 곳을 2회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주 보현산 천문대 태양플레이어 망원경 보유 먼저 보현산 천문대를 찾아 겨울철 별자리를 찾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정각리 별빛마을에 들러 상큼한 고로쇠 수액도 맛볼 수 있다. 국내 3대 천문관측소 중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는 보현산 정상에 위치해 있어 밤하늘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진다하여 ‘별빛 나라’로 불리고 있다. 보현산 천문대는 천체의 움직임과 변화를 관측하며 우주의 생성과 진화를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국내 최대의 천체망원경(렌즈구경 1.8m)과 태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태양플레이어 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100만 배 이상 관측이 가능하고, 12km에 떨어져 있는 100원짜리 동전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해상력이 높다. 천문대에 오르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야간 개장 때에는 별도 함께 관측할 수 있어 청소년 견학지로 좋은 곳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망원경을 비롯해 천체관측 시설을 직접 둘러보고 별과 우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4월부터 10월까지, 매월 네 번째 토요일 주간 공개행사를 열고 있다. 행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전에 전화(054-330-1000)로 예약을 해야 한다. 보현산 천문대 방문객센터에 있는 전시관에는 각종 천체사진들이 전시돼있으며, 간단한 기념품들을 구입할 수 있다. 야간에는 천체관측이 이뤄지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일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야간공개 행사는 연 중 보현산 별빛축제 기간 중에 한 차례 열린다. 행사시간은 오후2시부터 밤11시까지다. 부대행사로는 유명가수 축하공연, 불꽃놀이, 별빛 패션쇼, 별빛 가요제, 별빛 퀴즈대회, 심야과학영화상영, 별빛 동요왕 선발대회등도 열린다. 보현산 천문대는 1996년4월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 있는 보현산 정상일대 9천122평(3만156평방미터) 부지에 세워졌다.(문의 : 054-330-1000) ◎ 가는 길 영천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청송방향으로 약 20km 지나면 자천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자천과 과적차량 검문소를 지나면 천문대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우회전해 ‘옥계교’라는 다리를 건너 10여분 정도 가면 왼편으로 정각교회가 보이고, 곧 정각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정각 별빛마을을 가로질러 보현산 천문대(9km)로 향하면 된다.   정각별빛마을 밤하늘 쏟아지는 별빛 감상 이름만 들어도 신비스러운 별빛마을에서는 연중 흐린 날을 제외하곤 머리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별빛마을은 보현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사, 양촌, 신리, 절골 등 4개의 부락 산골마을로 보현산 천문대 입구에 있다. 행정동으로는 정각(正覺 : 바르게 깨닫다)리다. 별빛 마을은 해발 1천124.4m의 웅장한 보현산이 거대한 병풍처럼 우뚝 솟아 정각리 별빛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한 가운데를 관통해 바위틈을 비집고 흐르는 맑은 물은 횡계천으로 향하고 있다. 밤하늘을 쳐다보면 머리위로 얹혀 있는 듯 한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별빛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아마추어 천문캠프가 설치되고 별빛마을 농촌체험이 운영돼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영천시는 이곳에 20억원을 들여 지상2, 지하1층 연건평 200평 규모로 보현산 천문과학관을 착공, 올해 말 문을 열 예정이다. 천문과학관은 주관측실, 보조관측실, 전체투영실, 천문관측 전시실, 시청각실 등으로 꾸며진다. 천문관측관이 들어서면 관광객들이 연중 천체관측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각리 별빛마을에는 모두 55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미나리와 고로쇠 수액, 사과 등이다. 미나리는 14농가가 참여, 매년 3월5일부터 한 달 동안 1억3천2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리며, 고로쇠 수액은 2월18일부터 40일간 5천10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요즘 이곳을 찾는다면 별빛을 머금고 자란 고로쇠 수액을 구입할 수 있다. 고로쇠 수액은 20리터 한 통에 5만원 정도.(문의 : 허성수 이장, 010-6595-3773)   임고서원 선현들 배향 사설교육기관 임고서원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죽음으로서 절의를 지킨 시대의 충신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임고서원은 1553년 조선 명종 8년에 창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3년 선조 36년에 중건됐다. 1643년 인조 21년 여헌 장현광과 1727년 영조 3년에 지봉 황보 인을 배향했으나 1871년 고종 8년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다. 1965년 복원했고, 1990년대부터는 성역화사업을 추진해 기존 서원 옆에 새로 서원을 세워 큰 규모를 갖추었다. 임고서원 소장전적 및 포은 정몽주 영정이 보물 제1109호, 11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다. 높이 20여m, 둘레 5.95m의 이 은행나무는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됐다.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22m, 남북 방향으로 21m에 이르고 있으며, 생육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여기서 서원에 대해 간단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여행 중에 더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어려서 처음 가는 교육기관은 서당이며, 서당에서 기본적인 유학서들인 ‘동몽선습’, ‘격몽요결’, ‘명심보감’ 등을 익힌다. 지금의 사립초등학교라 생각하면 된다. 서당을 마치고 다음으로 진학하는 교육기관이 서원과 향교이다. 서원과 향교는 유학의 선현들을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던 똑같은 기능을 하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국가교육기관인 향교는 대성전을 두어 공자를 배향하는데 비해 사설교육기관인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들을 배향했다. 향교나 서원에서는 ‘소학’을 시작으로 사서삼경을 배웠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과거를 보거나 성균관 입학시험을 보았다. 대원군의 서원(당쟁의 뿌리 역할) 철폐령 이후 남아 있는 오늘날 서원들은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문묘의 기능만 하고 있다.   정몽주 선생 · 조양각 영남 3대 루 중 하나 조양각 ◆정몽주 선생 호는 포은. 1337년 고려 충숙왕 6년에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성리학을 세계관으로 한 고려 말 신진사대부 중 온건파의 수장으로서, 고려를 보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급진파인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였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1392년 공양왕 4년 4월4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됐다. 이때 나이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자리에서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이름을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후 조선 태종 원년(1401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 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를 문충공이라 했다. 포은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생활이 검소했고, 벼슬에 있을 때 청렴, 근신했다. 이방원의 하여가의 답가로 유명한 단심가를 남겼으며, 의창과 5부학당, 향교 등을 세워 빈민구제 및 성리학 보급, 사회윤리 확립, 교육진흥에 힘썼다.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고, 그의 굳은 충성을 읊은 시조 ‘단심가’가 전해지고 있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영천IC에서 빠져나와 시청방향으로 진입해 안강, 포항 방면 26번 국도 조교삼거리에서 임고 방면 69번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4.5km 정도 가다보면 임고 삼거리가 나오는데 바로 왼편이 임고서원이다. (054-335-2864) 여기서 곧장 가면 보현산 천문대가 보인다. ◆조양각 진주 촉성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루 중 하나인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성리학의 원조 포은 정몽주 선생과 당시 부사이던 이용, 향내 유림들이 합심해 지은 건물이다. 조양각은 명원루, 서세루라고도 한다.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의 문장가 한퇴지의 시구(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에서 왔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15년(1637)에 조양각이라는 이름으로 중건했으며, 누각 안에는 포은의 청계석벽을 비롯 율곡, 사가, 노계 등 명현, 풍류객들의 시구가 새겨진 현판 80여개가 걸려 있다.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루 중에 하나이며, 경내에는 백신애 문학비와 황성옛터 노래비, 영천지구 전승비 등이 있다. 계속 /김규동·장병욱기자

2007-02-23

“마고할멈 전설 · 忠婢단량 · 貫目魚등 다양한 역사 간직”

이삼우포항향토사가더 이상 갈 곳 없어 ‘이제 그만’이란 탄식에서 유래된 ‘구만리’청어 관목어에서 비롯된 과메기, 지금은 세계속 먹거리로 발전사랑하는 님 만나려고 마고할멈이 놓은 바닷속 돌다리 ‘교석초’■ 구만리의 유래동해안에 별스럽게 툭 불거져나온 작은 반도 그 끝 부위를 장기곶이라 한다. 고산자는 이 나라의 지형이 호랑이 같다며 이 일원을 호미등(虎尾嶝)이라, 곧 호랑이꼬리짬으로 표현했다.해맞이 공원이 있는 대보면소재지 보천마을 북쪽으로 KBS송신소가 자리하는 언덕배기 전체를 구만등(九萬嶝)이라 한다. 구만리라는 단어 그 자체가 한없이 넓다는 뜻을 품는다. 혹자는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던 지역이라고 龜滿, 혹은 언덕이 질펀하다하여 丘滿이라는 설도 있다. 그 다 일리 있는 풀이이겠지만 ‘이제 그만이구나’라고 외친 한 여인의 절규에서 발생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여겨진다.세종때 영의정에 올라 훗날 단종을 보필하던 충신 황보 인 정승 가문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몰락할 때였다. 단량(丹良)이라는 여종이 정승의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한양을 빠져나와 산 넘고 물 건너 낯선 길 천리를 걸어서 봉화군 닭실마을로 황보 인의 사위 윤당(尹塘)을 찾아가 노잣돈을 마련하여 은신처를 찾아서 이 곳까지 내려온다.이제 더 달아나 숨을 곳이 없는 허허로운 구만등 언덕에 이르러 한숨지으며 외쳤던 절규가 ‘이제 그만이구나’이었다. 이 ‘그만’이 ‘구만’으로 와전되어 이두식 한자표기로 구만(九萬)이라 불려지게 되었다는 설이다.더 나아갈 땅길이 없음에 그녀는 아기를 다시 들쳐 업고 눈을 피해 장곡봉수대(봉화봉 130m)가 있던 고금산(일명 馬峯산) 골짜기 집신골(집성골)로 숨어든다. 그 곳은 해변에서 불과 1㎞ 남짓 떨어진 그리 높지 않은 산이요 깊지도 않는 골이건만 외지고 깊숙하기가 심산유곡 같아서 숨어 살기에 적지였다. 그 곳이 곧 황보 집안의 맥을 다시 잇게 하는 은둔처였으니 4대를 칩거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름이 집성골[集姓 골]이라 불러지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 대곡(大谷) 저수지가 축조되어 550여 년 전의 그 뼈아픈 흔적들을 물속에 묻어 담고 유유하기만 하다.훗날 세상이 밝아지고 곤혹의 역사가 희석되면서 그 후손들은 장기면 모포리 뇌성산성 뒷자락, 지금의 구룡포 성동(城洞)마을로 이주를 하여 세거(世居)할 터를 잡고 다시금 핏줄을 늘리며 가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숨어 산지 290여년 만에 자유와 명예를 되찾게 된다. ■ 깔구리개와 과메기의 전설대보 마을에는 ‘봄 샛바람에 목장 말 얼어 죽는다’는 말이며 ‘내밥 먹고 구만등 바람 쐬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3면이 탁 트인 바다요 바람막이 숲도 없는 언덕배기 지형이라 바람거세기가 가히 살마적(殺馬的)인 곳이다.그 구만등 끝자리에 깔구리개라는 작은 포구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종종 깔구리로 고기를 끌어 모아야 했던 풍경들 때문에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그도 보통 고기가 아닌 청어였다. 개는 浦-개 자다. 옛날에는 음력 정월이면 이 연안으로 청어 떼가 몰려오곤 했는데, 몹시도 풍랑이 거친 지역이라 몰려다니던 고기 떼들이 거친 파도에 떠밀려서 이 마을 포구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여서 이를 주민들이 깔구리로 긁어모았던데 연유한다.과거 영일만 호시절 까지도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어였었다니 족히 가능한 이야기다.교석초 일원은 암초투성이다. 물밑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난파선도 잘 생기는 별난 자리다. 그래서 풍랑이 거친 날에는 고기떼가 방향을 잘못 잡아 골탕을 먹고서 뭍으로 밀려 나둥그러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한 북새통 속에 어떤 녀석은 해변 나뭇가지에 걸리고 어쩌다 꺾어진 나뭇가지에 눈이 꿰뚫려 걸린 상태로 피둥피둥 건조되기도 하였다. 한자로 쓰니 곧 ‘꿰뚫을 관(貫)’ ‘눈 목(目)’이라, 즉 관목어(貫目魚)가 된 것이다.어느 추운 날 가난한 한 선비 나그네가 이 해변을 거닐다가 그렇게 방치된 고기를 챙겨 주막에 들어가 술을 사 마실 때 안주로 했던 것인데, 그 맛이 특이하고 좋은지라 신상품이 개발되니 이에 관목어(貫目魚)라 이름 한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방언의 습성이 작용하여 ‘과메기’가 된 것이라 한다.그 후 과메기는 발달을 거듭한다. 옛날에는 꽁치가 아닌 청어두름을 부엌 환기창 밖에 걸어두고서 말리게 되어 있었다. 부엌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가 훈제역할을 하여 방부효과를 내게 하기 위함이요,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면서 건조되게 하기 위함이다.그것도 등이 아래로 향하게 거꾸로 메어 달게 된다. 그래야 온도의 고저에 따라 애간장이 녹아내려서 서서히 몸체에 스며들어 깊고 오묘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惡化(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과메기 원조는 까마득히 사라지고 꽁치과메기가 기승을 부린다. 어쨌거나 경향각지로, 마침내 세계로 까지 판매망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꽁치팔자도 시간문제였나 싶다.깔구리개 앞 바다 속으로는 겉과는 달리 험하기가 설악이나 금강산의 어느 바위산지느러미 능선 같다고 한다. 수중 험한 산봉우리들의 정수리가 해수면위로 노출된 부분이 북쪽 축산을 향해 거대한 디딤돌 놓이듯 돌출 배치되어 있어 교석초(橋石礁)라 한다. 태고적에 마고(麻姑)할멈이 영덕군 축산으로 사랑하는 님을 만나러 가려고 밤새 놓다만 돌다리라는 전설을 갖는다.1907년 9월9일 일본 동경수산대학의 전신이던 수산실습소 실습선 가이요마루(쾌응환·快鷹丸)라는 범선이 이 지점에서 좌초, 조난하면서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거친 파도에 휩쓸려 죽은 것을 기념하는 비가 이 일원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있어 그 정황을 짐작케도 한다.이 지점이 겉보기에는 육지의 한 끝이지만 해저지도에 의하면 바다 속으로 울퉁구불 이어지는 큰 산맥이 있어 영덕의 축산과 연결된 형국이라 한다. 바다 속에도 산맥이 있고 분지며 평원이며 단애며 밀림이며 갖가지 형상의 지형이 있게 마련이다.곧 이 해중(海中) 산맥 때문에 동해로 흘러드는 각종의 오염물질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마침내 조개 한 톨 건저 먹을 수 없는 죽은 바다로 변한다는 학설이 있어 우리를 경악케 한다. 환경부 발간 환경백서에 의하면 포항과 경주, 영덕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우행을 지속한다면 불과 20년 이내에 그렇게 된다는 경고다.특히 우리 포항은 해양 도시로 발돋움하여야 할 운명인데 바다가 죽으면 함께 죽어갈 것이 뻔 하기에 걱정이 된다.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주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과메기에서 벌어들인 순수입에 해당하는 재원부터 몽땅 바다 살리기 투자로의 전환을 기획하는 것도 불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이제 ‘포항의 역사이야기’ 연제의 그 끝을 본다. 필자가 써 내린 글 들 중에 더러는 誤記(오기)며 文弱(문약)함에도 핀잔 없이 격려와 공감대로 함께해준 애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하고 향토 사랑의 깊은 정이 확산되므로서 품격 있고 아름다운 포항이 건설되기를 빌어본다.끝

200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