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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뿌리가 깃든 곳, 인각사에서 만난 삼국유사 이야기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11-27 16:29 게재일 2025-11-2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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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극락전과 군위인각사삼층석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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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 발굴조사 출토 부재: 인각사를 정비하려고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것들을 전시해두었다.

민족의 뿌리를 담은 삼국유사의 기운이 남아있는 곳, 대구 군위군 삼국유사면에 위치한 인각사에 다녀왔다. 한때 고려 말의 위태로운 시대를 견디며 역사의 빛을 모아 삼국유사를 정리한 자리이자 그 기록의 주인공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 인각사다. 인각사는 주변 풍경과 어울리는 소박 규모와 잔잔한 분위기로 고요한 인상을 남겼고, 정말 이곳이 방대한 역사가 기록된 인각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담했다. 오히려 이런 부분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단연 일연이다. 고려 경산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출가한 그는 스물두 살에 승과에 급제할 만큼 이른 시기에 명망을 얻은 승려였다. 그러나 그의 삶이 오롯이 수행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몽골 침입이 거듭되며 나라가 흔들리고 백성들의 삶이 무너지던 고려 말의 시대를 지내면서, 그는 승려이자 지식인으로서 역대에 대한 기록의 사명감을 더 깊이 품게 되었다.

삼국유사는 정사(正史)에 포함되지 못한 이야기들, 민간에서 전승되던 설화와 신화, 지역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백성들이 바라본 세계관까지 두루 담아낸 기록물이다. 삼국사기가 왕과 나라 중심의 시각으로 삼국 시대를 정리한 책이라면, 삼국유사는 인물과 지역, 민간의 전통을 중심에 놓고 당시의 정신과 감정을 함께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인각사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인각사는 삼국유사 말고도 느낄 수 있는 문화재가 남아있다. 국보 제244호인 보각국사가 있다. ‘보각국사’는 일연의 시호인데, 그의 생애와 업적을 적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고려 말 조각미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보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가까이서 마주하면 비석의 크기보다 글자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단정한 기운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 비문의 글씨를 쓴 이는 이암, 찬문을 지은 이는 권준이다.

경내에는 삼국유사와 일연을 소개하는 작은 전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고판본과 해제 자료, 당대의 불교 문화와 관련된 설명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삼국유사가 어떤 시대적 흐름 속에서 태어났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시판 앞에 서서 삼국유사 목차를 다시 훑어보니, 그 속에는 단군 신화부터 연오랑·세오녀, 선덕여왕, 원효와 요석공주까지 한국인의 정신 DNA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단단하게 뿌리내려 있었다.

인각사 주변의 암자 터에는 일연이 직접 머물며 교정을 했다고 전해지는 자리가 남아 있는데, 비록 당대의 건물은 소실되었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이 절의 중요한 흔적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인각사를 천천히 거닐다 보면 ‘기록의 흔적’이라는 것이 건물이나 유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공기와 동선, 사찰의 배치, 그리고 남겨진 분위기 자체에 스며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일연이 왜 이 고즈넉한 산중에서 마지막으로 붓을 들었는지 잠시 느낄 수 있었다.

삼국유사의 가치를 떠올리면 그 무게가 한층 더 깊어진다. 삼국사기가 정치 중심의 기록이었다면, 삼국유사는 민중의 숨결을 구조화한 기록이었다. 사라지기 쉬운 목소리와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모아 미래로 건넨 책이었고, 동시에 한국 불교사와 고대사 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문헌이기도 하다. 삼국유사가 지켜낸 이야기는 결국 우리 민족의 기억을 잇는 뿌리와 같다. 그리고 그 뿌리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인각사다.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인각사에서 나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김소라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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