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br/><2>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에 관한 궁금증들
튀르키예가 터키로 불리던 13년 전 여름. 1개월쯤 그곳을 여행했다. 서쪽은 유럽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 도시로 변화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터키 최대 도시’로 불리던 이스탄불이 그랬다.
반면 동쪽으로 갈수록 이슬람문화의 색채가 짙었고, 주민들 또한 보다 완고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 나라에서 다양한 문화·종교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 여행이 끝나갈 무렵. 터키와 이란 접경에 자리한 아라라트산(Ararat Mt.)을 찾았다. 무언가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듯한 눈 덮인 산봉우리를 보며 무신론자인 기자도 잠시잠깐 외경(畏敬)을 느꼈다.
실제로 아라라트산은 간단찮은 역사와 장대한 설화를 동시에 간직한 공간이다. ‘종교학대사전’을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터키의 동쪽 끝, 이란의 국경 근처에 솟아있는 화산이다. 터키 최고봉이며 터키어로는 알 다아(Agn Dagl)라고 부른다. 아라라트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나뉘는데, 대(大)아라라트산은 5165m다. 만년설로 덮여 있다. 소(小)아라라트산은 3925m. 1829년 독일인 F. 파로트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전설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가 그 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산 인근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에게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국민의 단결과 통일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대접받는다. 아라라트는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전 8세기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왕국의 명칭으로서도 사용됐다.”
아라라트산 기슭엔 흙으로 만들어진 매력적인 성(城)도 있다. 그 성 아래 조그만 마을 숙소에서 이틀을 머물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경북에도 전설과 더불어 역사를 품은 성스러운 산이 있을까? 있다면 어디일까?”
단석산 마애불상군 제외 가장 큰 규모
신라시대와 중국 북제-수대 양식 혼합
무열왕릉 등 서악리 고분 내려다 보여
650년 전후 조성·양식 특징 등 고려
주도자로 무열왕·문무왕 가설 무게
◆아라라트산 이상의 감흥을 선물한 경주 선도산
귀한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선 수고와 고생이 필요하다. 때는 폭염이 시작되던 시기. 무열왕릉이 자리한 선도산 입구에서 ‘마애여래삼존불’이 우뚝 선 정상 부근까지는 꽤 오랜 시간 산길을 올라야 했다.
기자는 물론 동행한 사진기자까지 포악한 흰줄숲모기로 추정되는 것들에게 수없이 목덜미와 팔을 뜯기고, 가져간 수건을 땀으로 온통 적시고서야 마침내 바위에 새긴 거대한 석불(石佛) 앞에 설 수 있었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을 본 첫 느낌은 ‘아, 이곳은 튀르키예 아라라트산 못지않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성산(聖山)이겠구나’라는 것.
세월이 마모시킨 불상의 모습은 온전치 않았으나,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aura·예술품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와 격조)는 1400년의 시간을 무색하게 했다. 힘겹게 만난 불상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는 사이 등으로 흘러내린 땀이 서늘하게 식었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은 ‘선도산 아미타삼존상(仙桃山 阿彌陀三尊像)’으로도 불린다.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며 현재 보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도산 불상은 신라 불상 중에서 단석산 마애불상군을 제외하면 조성 규모가 가장 크고 신라 불상의 고유한 특징과 함께 중국 북제-수대(北齊-隋代)의 다양한 불상 양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불상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서악(西岳)이라 불리며 선도성모(仙桃聖母·선도산의 성스러운 어머니)의 주재처로 숭상 받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선도산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하여 서악리 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처럼 조성되어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
이로써 기자가 당시 받았던 느낌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과장된 감정이 아니란 게 증명됐다.
신라 불상 중 조성 규모가 두 번째로 크고, 서라벌 사람들이 숭배하던 여신(女神)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야기되며, 통일제국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이름 높은 무열왕의 유택(幽宅)을 내려다보는 곳에 만들어졌으니.
◆중국 화산(華山)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앞서 ‘튀르키예의 명산’으로 불리는 아라라트산을 살펴봤으니, 가까운 나라 중국이 내세워 자랑하는 산 가운데 하나도 잠시 돌아보자. 화산(華山)은 ‘중국의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으로 불린다. 선도산이 신라의 서악이라면, 화산은 거대 대륙 중국의 서악인 것.
중고교 시절 무협소설을 읽으며 지냈던 지금의 중년이라면 화산을 어떤 방식으로건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아래 상상출판에서 펴낸 ‘중국 시안 여행’ 중 이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한다.
“중국 무협에 관심 있다면 화산은 가장 궁금한 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김용의 ‘소오강호’에서 영호충이 화산 검종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장면, ‘신조협려’에서 북개 홍칠공과 서독 구양봉이 서로 내공을 겨루는 장면이 묘사되는 곳은 바로 화산과 화산 일대. 화산은 친링(秦嶺)산맥 동단에 최고 2437m까지 솟아 있고, 옆으로는 위수(渭水)가 흘러 웅장하게 느껴진다. 화산은 중국 도교의 성지이자, 무협의 근본이기도 한 오악(五岳) 가운데 서악(西岳)으로 불린다. 오악 중 가장 높고, 전체가 바위산의 분위기라 험준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화산의 등산로는 외줄기로 등산객들 사이에서 난코스로 유명하다.”
사실 무협소설은 과장된 상상력과 허풍을 재료로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재미가 있다.
우리가 통상 ‘설화’ ‘전설’ ‘민담’이라 부르는 것들도 마찬가지. 거기선 현실에서의 존재 가능성과 실현 가능성이 거의 제로(0)에 가까운 인물과 사건이 나오고 전개된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게 아닐까? 인간에게서 상상력을 거세한다면 삶이 얼마나 무료해질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그러니, 성경 속 ‘노아의 방주’가 실재했다고 강변하는 종교인들과 축지법과 공중 부양이 무시로 등장하는 중국 무협소설을 마냥 “비현실적이라 한심하다”고 힐난하는 건 합리를 가장한 독선일 수도 있다. 어쨌건.
◆마애여래삼존불의 불사(佛事)는 누가 주도했을까?
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어인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로 돌아가자.
고대 신라인들이 부처가 다스리는 이상향 서방정토(西方淨土)로 인식했던 선도산 일대. 그 공간 가장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굽어보던 마애여래삼존불은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들었을까?
아주 기초적인 의문이다. 이 질문에 최미경의 논문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조성시기와 목적에 관하여’가 친절하게 답해준다.
“조성시기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7세기 중엽으로 막연히 인식했으나 양식적 특징을 살펴본 결과 650~67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선도산 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하여 조성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 살핀 결과 이는 ‘사자(死者·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한 추선(追善·죽은 사람 넋의 괴로움을 덜고 명복을 축원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공덕(功德·선한 행위로 쌓은 덕)으로 사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 하겠다.”
여기까지가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 만들어진 시기와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논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러한 대규모의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 불상은 무열왕대에 선대(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로써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조성 불사’ 주도자는 둘로 좁혀졌다. 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 서라벌 역사의 궁금증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