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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며칠 뒤면 산과 들에 물이 오른다는 물오름달 3월이다. 날이 차츰 풀리면서 봄 기운이 조금씩 감돌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난데없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 지역사회, 나라 전체, 아니 온 세계가 코로나19로 명명된 신종 바이러스 감염과 여파에 불안해하며 바짝 긴장하고 위축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첨단디지털과학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해가는 4차혁명시대에 전염병이 돌연 창궐하다니 믿기지 않은 일 같지만, 근 3개월째 중국 우한에서 발생된 신종 바이러스는 인근의 국가는 물론 세계 30여개 나라에 무서운 전염력으로 퍼져나가 세계인들을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언제까지 이런 가공(可恐)의 난국이 이어질지 심각하고 우려스럽기만 하다. 지구상의 유기체와 구성원들은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곧 하나의 생물체처럼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며, 생명 현상의 기본은 생물체를 구성하는 물질과 조직화의 과정이 어떤 특정한 질서·결합 상태가 유지돼 고유한 평형과 발전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예컨대 자연계의 먹이사슬이나 인간의 사회생활 등은 상호 유기적인 조합과 체계로 균형을 이루며 유지된다고나 할까? 이러한 기저에서 어떤 유기체와 구성요소 간의 기능과 역할에 괴리가 생기고 모순이나 흠결로 부조화가 나타나면 결국 생태계의 불균형과 혼돈이 초래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작년 말에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도 균제된 유기체에 대한 교란과 부주의로 파생된 경고로 본다면 필자의 편협한 소견일까?이 세상에는 상보적(相補的)인 관계나 자생적인 노력없이 저절로 이뤄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물 한 방울 공기 한 점도 공것이 없고 흙 한 줌 풀 한 포기도 아무렇게나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그런데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당연한 듯한 무관심(?)속에서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 순간 하나하나 너무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들이 많은데, 사람들은 그저 모든 것들이 그냥 저절로 나타나고 이뤄지고 지나가는 것으로 여기는 지도 모른다.그러나 세상과 자연은 그렇게 만만하다거나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이번의 일련의 바이러스 확산 사태를 보면서 하루를 무사하고 온전하게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당연하고 무관심하게 여겨졌던 일들도 자신이 상황에 직면해서는 누구라도 긴박하고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수년 전부터 미세먼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마스크를 쓰던 시민들이 이제는 독감이나 신종 바이러스에 대비해 마스크를 상용(常用)해야 할지도 모를 판이다.어쨌든 이런 때 일수록 우리는 더욱 신중하고 차분하게 대응체계를 면밀히 세우고 예방수칙을 잘 지켜야 한다. 방역과 행동수칙에 적극 협조 참여하고, 이동과 다중 시설 이용 자제, 개인의 위생과 건강관리 등으로 면역력을 높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가 자중하고 배려와 지혜로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희망의 새봄을 맞이하기를 학망해본다.

2020-02-25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

최미경동화작가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선생이란 직업도 하지 않으면 불리지 않을 것이고 작가라는 명패도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지만 ‘엄마’는 내가 아무것도 하질 않는다고 해도 떼어낼 수 없었다.그리고 그 ‘엄마’의 무게란 게 불리는 횟수와 부르는 머릿수에 비례하는 듯해서 첫째를 낳고도 크게 느끼지 못했던 무게가 둘째를 낳고서 조금씩 무거워지더니 셋째가 생기고서는 세 아이가 동시다발적으로 부르는 ‘엄마’ 소리에 나는 고꾸라져 넋을 놓기 일쑤였다. 처녀 적에는 꼴딱꼴딱 잘도 새던 밤샘작업이 엄마가 되고서부턴 꿈도 못 꿀 일이 되었다. 그렇게 뭘 좀 써볼까, 하다 아이들보다 먼저 잠드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어느 새벽에 홀로 깨어 잠든 아이 셋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나’라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그렇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돈벌이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가르치는 일이 개중 잘하는 일이었으니 수업료의 크고 적음에 관계없이 가르칠 수 있으면 시작했다.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셋째를 맡길 때가 마땅찮아 초등학교 2학년 새학기가 막 시작된 첫째에게 학교를 일 년만 쉬면 어떨까, 라고 물었던 때도 있었다.사내아이만 셋이라 먹는 양도 횟수도 달랐다. 눈만 뜨면 “배고파, 엄마.”라고 했으니 달걀은 서른 개짜리 다섯 판이 기본이고 20kg 쌀은 두 주면 바닥이 났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입에서 “배불러”라는 말이 나오면 모든 엄마 역할을 다 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옷은 어떤가. 아니 양말부터. 10켤레에 만 원 하는 모양 무늬 똑같은 시커먼 양말 다섯 뭉치를 사다 놓으면 열일곱 살, 열 한 살, 열 살. 세 놈이 번갈아 신어대서 어떤 놈이 구멍을 냈는지 모르는 오른쪽 양말이 다음 주가 되기 전에 다른 놈 왼쪽 발에 신겨 있었다.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 빨래를 돌리면 다섯 식구 양말이 35켤레, 다섯 식구 팬티가 35장이었다. 그래서 빨래 개는 걸 도맡아 하던 첫째의 제안에 따라 몇 년 전부는 옷장에 개어놓지 않고 빨래건조대에서 걷어입고 있다. 물론 첫째의 업무는 빨래 개기에서 세탁기 돌리기로 이전되었다.그렇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하지만 꾸역꾸역 밀려오는 이미지와 심상은 시어와 어휘는 ‘엄마’라는 말에 폭삭 젖어있어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전전긍긍 댔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몸이 아팠다.그래서 막내가 예비 초1이 되었던 그해부터 개학 1주일 전 아침 식탁 앞에서 ‘새학년맞이’ 덕담을 가장한 일관된 부탁의 말씀을 줄줄이 읊어댔다. 게다가 올해는 코로나19로 전국 모든 유치원, 초·중·고 개학이 1주일 연기되었다는 소식에 한숨을 토해내며 한 번 더 강조했다.“올 한 해 무조건 건강할 것”이젠 뭘 좀 아는 것 같은 열일곱 첫째와 아직 뭘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은 열한 살 둘째와 아무것도 몰라도 될 것 같은 열 살 셋째가 나란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조금 쉬고 세 아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셋째가 발랄하기 묻는다.“아침 뭐 먹어?”그렇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

2020-02-24

지금 행복합니까?

김현욱 시인표준국어대사전에는 ‘행복’을 ‘생활에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고 정의한다.불면증으로 고통 받던 사람이 어느 날 꿀잠을 자게 되면 더없이 감사하고 행복해진다. 직장에서 동료와 불화하던 사람이 진통 끝에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젊은 나이에 난데없는 불치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인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밤이면 우리 가족이 건강한 것만으로 큰 만족과 감사를 느낀다. 송사에 휘말리기 전에는 ‘송사에 휘말려서 좋을 것 하나 없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체감하기 어렵다. 영혼이 너덜너덜해지는 송사가 끝나면 ‘범사에 감사해라’를 뼈아프게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일견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큰 성취보다는 작고 소소하고 자잘한 것이 우리가 실제로 누리는 행복이다. 합격, 취직, 승진, 당선, 인기, 명예, 당첨, 성취 등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망하는 행복이다. 하지만, 불가에서는 그런 것들이 가짜 행복이라고 일갈한다.모든 종교는 진짜 행복, 영원한 행복의 길을 제시한다. 반면 붓다는 ‘나의 모든 가르침은 괴로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말했다.붓다는 괴로움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했다.“첫째,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생로병사), 싫어하는 것(사람)과 만나는 일, 좋아하는 것(사람)과 헤어지는 일,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일은 일반적인 괴로움이다. 둘째, 영원하지 않는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 셋째,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 이어서 붓다는 괴로움의 원인으로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진리로 ‘욕망의 완전한 소멸(해탈)’,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 가지 길의 진리로 ‘팔정도(八正道)’를 설했다.정리하자면, 붓다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8가지 소멸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과학적인가! 정리하자면,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가 불교(佛敎)의 알맹이다.‘장부경’에서 붓다는 수행 방법에 의심이 많은 수밧다에게 위빠사나 수행의 중요성을 설했다. “내 나이 29세에 출가하여 5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나의 가르침인 사념처 위빠사나를 수행하지 않고서 구경각 아라한과에 도달한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네. 위빠사나의 실천법인 팔정도(八正道)가 있는 한 아라한들은 계속 출현하고 승가는 끊임없이 발전하리라.”거창 붓다선원 진경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아나빠나사띠(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를 수행 한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직장에서도 틈날 때마다 10분씩, 20분씩 아나빠나사띠를 수행했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잘 때까지 호흡이 들어가고 나감(숨보기)을 알아차리려고 애썼다. 아나빠나사띠 선정수행은 위빠사나 지혜 수행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된다고 하셨다. 생활 속에서 생명을 해치지 않고 삿된 마음을 먹지 않겠다는 ‘계(戒)’를 세워 실천 중이다. 지금까지 가짜 행복을 좇아 허망하게 살아왔다. 괴로움을 행복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계(戒), 정(定), 혜(慧), 여기 진짜 행복으로 가는 8가지 길이 있다.

2020-02-23

‘기생충’ 소고(小考)

김병래시조시인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미국 아카데미상 4개 부문까지 휩쓸어 각종 매스컴이 모처럼 잔치분위기였다. 감독과 출연자들의 영광을 넘어 세계만방에 국위를 선양한 쾌거라 할 만하다. 작년 여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아 일약 유명해진 영화라 궁금하던 차에 때마침 무료로 상영하는 곳이 있어 관람을 했다. 같이 영화를 본 지인은 기대와는 달라 좀 실망스러운 표정이었고, 나 역시 벅찬 감동보다는 씁쓸하고 착잡한 기분이었다. 영화가 타작이어서 실망했다는 게 아니라, 주제랄까 스토리에 가슴 뭉클한 감동이 없었다는 얘기다. 언젠가 텔레비전으로 ‘울지 마 톤즈’란 기록영화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런 감동과는 거리가 먼 영화였다.나는 영화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작품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를 못한다.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극찬을 한다니 그런가보다 할 따름이다.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영화의 작품성이란 인간승리나 인정미담이 주는 감동으로만 따질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내가 느낀 착잡한 감정 역시도 그 영화의 뛰어난 작품성이 유발한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한 편의 영화가 전 세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을진대 거기에는 분명 그만한 까닭이 있을 터이다.기생충이란 회충이나 촌충처럼 다른 동물에 기생하는 벌레를 말한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위의 영화에선 전원이 백수로 반 지하 단칸방에 살다가 사기를 쳐서 부잣집에 들어가 살게 된 기택의 가족들이 기생충인 셈이다. 기택의 가족은 경제적으로만 전략한 것이 아니라 인격까지도 파탄지경에 이른 사람들이라는 점이 보는 사람을 씁쓸하게 한다. 봉준호 감독은 이런 인격을 가진 자들이 비단 이 사람들뿐이겠는가를 말하려 한 게 아닐까. 사흘을 굶고 남의 집 담을 안 넘을 놈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이 드러내는 본성에 양심 따위는 없다는 것인가?사실 이 영화에는 바람직한 인격이나 성품을 가진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의 양극화와 계층이동의 단절이 가져오는 폐단이 일차적인 사회문제이자 원인이라 할지라도, 그렇듯 양심이나 도덕성이 마비된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여간 씁쓸하고 서글픈 일이 아니다. 근자에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소위 ‘조국사태’가 말해주듯이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학벌이나 지위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지성이나 정의감은 고사하고 부정과 비리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나 부끄러움도 없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스토리의 개연성을 뒷받침해주는 셈이다. 우리가 어쩌다가 양심이나 도덕성, 정의로움 따위를 진부하고 공허한 개념이나 가치로 치부하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부도덕과 몰염치가 판을 친다 한들 그것을 정당화 하고 일반화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기분이 착잡했던 소이다.

2020-02-20

교육 백신 4 - 초등학교 7학년?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코로나 19’와 같은 대형 사건들이 여럿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올해의 가장 큰 뉴스는 ‘겨울 실종 사건’이다. “내 인생 90년 만에 이런 겨울은 처음이다.” 내복 없이 겨울을 나셨다는 어느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올겨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패턴은 앞 숫자만 다를 뿐 똑같다. 필자 또한 이런 겨울은 난생처음이다. 아무리 바빠도 겨울방학에 아이들과 스키장은 꼭 갔는데, 올해는 필자도 필자이지만 아이들이 스키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겨울 추억 하나 갖지 못하고 봄꽃을 보는 느낌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가 깨어난 것과 같은 기분이다. 영화를 보면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흡사 요즘의 필자 모습이다. 겨울답지 않은 겨울을 보내는 지금이 필자는 너무 고통스럽다.겨울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전면 시행을 앞두고 있는 ‘중학교 자유학년제’이다. EBS는 작년에 “2020년까지 전면 시행되는 자유학년제, 당신의 아이는 준비되었나요?”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유학년제를 다음과 같이 미화하였다. “평소에 공부에 관심이 없고 진로에 목표가 없던 자녀가 다양한 체험을 통해 적성을 찾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중략) 학생의 변화에 대해 평가하고, 취약 부분과 보완할 점에 대하여 기록하는 방식으로 학생에게 학습 동기까지 심어주는 평가방식 (….)”마지막까지 쓰고 싶었지만, 필자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생략한다. 정말 1년 만에 학생들이 이렇게 변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언제나 희망은 희망일 뿐이다. 자유학년제의 이론만 놓고 보면 이상적인 교육제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 현실은 어떤가? 교육 이상주의자나 어용(御用) 정치 교육 관료 말고 자유학년제의 내용을 믿는 국민은 과연 얼마일까?다른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필자가 절대 믿지 않는 것은 평가 관련 내용이다. 과연 이 나라 교사들은 학생의 변화에 대해 평가할 능력이 있을까? 아니 그 방법은 알기나 할까? 몇 번의 교사 연수로 그런 능력이 길러질까? 생활기록부 기재요령에 갇혀 단어 하나 때문에 벌벌 떠는 사람이 이 나라 교사인데 과연 그들이 어떻게 학생의 취약 부분과 보완할 점에 대하여 기록을 한다는 말인지 필자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초등학교 7학년! 이 말은 학부모는 물론 학생들이 자유학년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필자는 이 말을 3년 전부터 듣고 있다. 다음 학부모님의 말을 교육 관료들이 제발 마음으로 듣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더 고통받기 전에 자유학년제를 중학교 3년 전 과정에 걸쳐 실시하든지, 아니면 과감히 수정하기를 강력히 건의한다.“(….) 자유학년제인 1학기를 순탄하게 보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2학기에 접어들면서 전체적인 학교 분위기가 시험과 입시로 흐리기 시작하면서 아이가 목적의식 없이 방향을 못 잡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학부모로서 자유 학년제의 모순을 직접 경험해봄과 (중략) 현재 학교 환경에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은 아이에게 의미 있는 학교생활을 찾아주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입학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2020-02-19

개문만복래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겨울 같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니 뒤뜰의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꽃샘바람’이라던가. 어젯밤부터 바람이 쌀쌀해지더니 오늘은 강추위가 예보되었고, 아침에 창을 여니 진눈깨비까지 흩날려 입춘절이 언제 지나가기는 했던가 싶다. 지난 입춘에는 오랜만에 친한 친구로부터 입춘첩을 받았다. ‘원화소복 일신무강’.입춘첩(立春帖)은 입춘 날 대문이나 들보, 기둥, 천장 등에 써 붙이는 글귀로 ‘입춘대길’이나 ‘건양다경’이 대표적이며,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땅을 쓸면 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복이 온다.)도 자주 쓰이는 편이다. 그런데 개문만복래라…. 과연 그런가? 대문에 입춘첩을 써 붙이던 시절은 주로 농사일을 하던 때였으므로 부지런한 사람의 집은 대문이 먼저 열렸을 것이고, 그 부지런함 덕분에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개문만복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인지 요즘은 하루 종일 대문을 꽁꽁 닫아둔다. 외출이라도 했다가 귀가하면 대문이 잘 닫혔는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다. 물론 도둑이나 잡상인 같이 꼭 막아야 할 자들도 있으나 이웃 간의 소통까지도 단절하고 마는 극도의 개인주의가 팽배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만큼 남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가 되어버린 까닭이다.문은 원래 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 문이 끝내 닫히고 말면 벽과 다름없이 된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물도 소화, 배설되기까지는 여러 개의 문을 거친다. 입을 통과한 음식물은 식도를 지나 분문(噴門)을 통과해야 위로 갈 수 있으며,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가려면 유문(幽門)을 지나야 하는 등 여러 개의 관문을 통과하여 항문으로 배설이 잘 되어야 육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따뜻한 마음의 문을 열고 이웃과 잘 소통해야 건전한 사회가 형성되어 정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꼭꼭 걸어 잠근 문을 열기 위해서는 열쇠, 카드키, 비밀번호, 지문인식 등 여러 가지 수단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따뜻한 마음이다. 소통을 게을리 하면 불통이 되고, 그 불통의 낙인이 주는 패널티는 엄청나게 가혹하다.제21대 총선 투표일이 코앞에 다가왔다. 늘 그랬듯이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투쟁인지 언론은 온통 난장판이고, 국민들의 피로감은 안중에도 없는 듯 스스로의 이득을 쫓아 이합집산하는 후진적 행태는 여전하다.그 혼돈의 와중에서 후보들은 제각기 당선이 되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공약을 발표할 것이다. 신선한 약속이 있는가 하면 허황된 공약도 횡행하기 마련인데, 소통하고 화합하겠다는 공약은 모든 출마자들의 공통된 약속이다. 어떤 후보가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소통하여 서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비전을 가지고 봉사할 것인가를 잘 가려서 투표하는 시민들의 감식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2020-02-18

능력을 갖춘 시스템과 친절함으로 다가온 경찰

조현명 시인나의 아버지는 올해 여든여섯, 치매도 없고 건강하다. 단지 무릎이 나빠 먼 길은 자전거로만 다니신다. 오후 세시쯤 자전거로 사시는 연일읍 한 바퀴 돌고 여섯시에 귀가 하는 게 하루 즐거움이다. 그런데 며칠 전 밤 열시가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으셨다.노모와 가족들은 큰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찾아 나섰다. 그러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몸에 신분을 확인할 만한 것은 없었다. 혹 신원미상으로 응급실에 있을까 해서 큰 병원 응급실에 전화문의도 해보았지만 그런 내원자는 없다는 대답이 왔다.20년 전 쯤 할아버지가 치매로 길을 잃어버린 일 대한 기억이 겹쳐서 매우 힘이 들었다. 그때 경찰에 신고해두었지만 거의 연락이 없었고 가족들은 일주일간 구역을 나누어 주변 지역을 헤매고 다녔었다.이번에도 역시 경찰에 신고하고 난 뒤 가족 모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연락을 기다렸다. 그런데 경찰에 신고단계에서부터 옛날과는 차원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친절함은 물론이고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해서 도움을 주어야하겠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또한 시스템의 공조를 통해 CCTV를 확인 동선을 추적하고, 직접 나가 주변을 탐문하고 얻어진 정보를 연락해왔으며 초조해하는 가족들과 늦은 시간까지 함께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드디어 새벽 2시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옛 효자검문소 앞에서 길을 잃고 쓰러져있던 아버지를 지나가던 사람이 지구대에 제보해준 것이었다. 연락하고 집근처까지 데려온 경찰은 치매노인 신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안내하고 돌아갔다. 아버지는 치매가 아니지만 오랜만에 의욕적으로 시내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어두운 길에 늦게 집으로 돌아오시다가 효자삼거리에서 그만 길을 헷갈린 것이었다. 마침 그날 밤 이상하게도 추위가 없었기 망정이지 매서운 추위가 있었다면 객사하실 뻔 했다.돌이켜보면 제보해준 분에게도 감사하지만 밤늦도록 근무 중이었지만 친절하게 자신의 가족이 당한 일같이 함께해준 경찰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이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경찰의 대민봉사의 수준이 매우 높아진 사실이었다. 특히 실종 신고를 대하는 자세가 매우 달라져있었다. 근년에 일어난 여러 사망사건들을 통해 밝혀진 사실은 실종은 초기 대처가 매우 중요하다. 정상인이 실종되었다면 어떤 사고에 연루되었을 지도 모르고, 범죄에 노출 되었을 수도 있어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된다.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초기대처를 잘하면 쉽게 범죄를 예방하고 위험에서부터 사람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실종자에 대한 대처는 초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경찰의 초기대응은 아무리 민감해도 과하지 않을듯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찰 조직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민감함과 능력을 갖춘 시스템이란 것을 확인했다고나 할까. 거기다가 친절함까지 갖추고 있었다.우리지역의 경찰이 가진 특징이 아닌 것이 이번 일을 통해 경찰 시스템과 조직의 철저한 매뉴얼에 따른 대처 같은 것을 느낌으로 감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과 소통하는 따뜻하고 믿음직한 경찰로 국민과 함께 하겠습니다’는 슬로건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2020-02-17

시답잖은 겨울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도무지 겨울답잖은 날씨다. 겨우내 평년기온을 웃돌던가 싶더니 어느새 입춘이 지났다. 연중 가장 춥다는 소한(小寒)에 장마같은 비가 내리고 대한(大寒)마저 양광에 맥을 못추니, 엄동설한이 무색하게 겨울날이 실종된 듯하다. 한반도 동장군의 직무유기(?) 탓인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점차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겨울인데도 날씨가 그다지 춥질 않으니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고 형산강 둑길로 출퇴근하는 필자는 올 겨울 들어 내복 한번 입은 적이 없어도 거의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과 초·중등시절을 보내면서 겨울이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칼바람에 얼굴과 머리를 꽁꽁 싸매고 다녀도 눈물 콧물을 흘리기가 일쑤였다. 더욱이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 갈 때는 장갑마저 변변찮아 쇠죽 끓인 아궁이에 묻어 놓은 뜨거운 돌을 종이에 싸서 요즘의 손난로처럼 들고 가며 추위를 달랬으니 오죽했으랴. 그렇게 추위가 혹독해도 뛰놀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학교를 오갈 때는 나름의 방법으로 방한의 슬기를 찾으며 추위와 시련에 내성(耐性)을 키워왔었다.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얘길 하면 춥고 어려웠던 시절의 소설같은 일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말겠지만-.그래도 동장군은 체면이라도(?) 세우려는지 막바지 겨울에 바싹 추위의 고삐를 당기고 있지만, 이미 봄날은 저만치서 기웃대는 듯하다. 추워야 할 겨울에 이상고온의 영향으로 인해 농작물 경작이나 각종 행사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겨울철 기온이 높아지면 해충이 쉽게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일찍 싹을 틔운 작물의 경우 갑작스러운 꽃샘추위에 냉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한다.또한 지역의 특색있는 축제가 비상이 걸리거나 일정이 축소되어 끝난 곳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날씨였다. 하긴 이런 현상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 수년 아니, 십 수년 전부터 차츰 나타났었던 기후변화이니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날씨로 인한 차질과 피해가 우려되고 예상되는 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미리 세우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시답잖은 겨울날씨 탓인가? 요즘 정치권이나 사회적인 판세가 날씨만큼이나 갈팡질팡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여는 여당답지 못하고 야는 야당답지 못하다. 또한 진보는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의심의 눈총을 받고 있고, 보수는 아집만 내세우는 생떼의 보수인가 의아하게 만들고 있으니, 시민과 국민은 과연 무엇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이념과 견해는 개개인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진실과 정의, 공익과 공동선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그 궤를 같이해야 하지 않을까?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제 맛이듯이,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답게 처신해 나갈 때 우리 모두는 개개인의 조화로운 삶의 양태 속에서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020-02-16

겨울 들판을 읽다

김병래시조시인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날마다 들판으로 산책을 나간다. 산책을 하노라면 들판은 살아있는 책이다. 철마다 새롭고 풍성한 내용으로 발간되는 계간지인 셈이다. 종교인들이 날마다 경전을 독송하듯이 하루에 한 페이지씩 신간 겨울호를 읽는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지만, 자연이라는 살아있는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충전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수시로 정신의 배터리도 충전을 해야 몸과 마음이 정상작동을 할 것이다.오늘의 페이지엔 수백 마리 청둥오리들과 오십여 마리 고니들이 운집해 있다. 청둥오리들은 보통 몇 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오늘처럼 수백 마리가 모여 있는 건 드문 일이다. 아마도 이 인근의 청둥오리들이 총집결을 한 것 같다. 거기다가 고니들까지 다 모여 시끌벅적 야단법석인 걸 보니 뭔가 중대한 의논이 있는가보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읽어보아도 그들의 사정까지는 독해(讀解)가 되지 않는다. 자연의 독법에는 모범답안 같은 게 없다. 저마다 안목과 기분에 따라 읽히는 대로 읽으면 그만이다. 저 철새들에 대해서 내가 뭘 아는 척 속단을 하거나 사람이라고 우월감 같은 걸 가져서도 안 되겠다는 것이 오늘의 독후감이다.이번 겨울은 그다지 춥지가 않아서 산 채로 월동하는 풀들이 많다. 자세히 보면 양지에는 냉이, 광대나물, 별꽃, 봄까치꽃 등이 겨우내 꽃을 피우기도 한다. 벌이나 나비가 날지 않는 계절에 꽃을 피운들 열매를 맺지는 못할 터이니 한갓 무모하고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계산 따윈 하지 않고 사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있는 것이 생명의 본질임을 읽는다. 어느 철학서나 경전의 말씀보다도 절실하고 생생하게 읽히는 생명의 메시지다.하지만 이 겨울들판의 주역은 마른 풀대들이다. 억새와 갈대는 물론 쑥, 명아주, 망초, 씀바귀 등 마르고 억샌 풀대들이 덤불을 지어 겨울풍경을 이룬다. 비록 생명이 다 빠져나간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이 들판의 생태계에서 그들의 역할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겨울 들판을 지키는 파수꾼이랄까, 바람막이 역할이라도 하다가 새 풀들이 자라나면 삭아서 거름이 될 것이다. 살아서 월동하는 풀들과 마른 풀대들은 별개의 사물이 아니다.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끝과 시작이 맞물려 있는 이 계절의 진면목을 읽을 수가 없다. 삶과 죽음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원리나 설명이 아닌 현상으로 보여주는 거라고나 할까.겨울 들판은 마르고 앙상한 논리도 아니지만 비유나 추상도 아니다. 숨기거나 가린 것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들려준다. 왜곡이나 오류가 없고 넘치거나 모자람도 없는 존재와 생명의 자명한 진실일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난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제대로 잘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욕심이나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오독이나 곡해를 할 수도 있고,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읽거나 휴대폰에나 코를 박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하루라도 산 책을 읽지 않으면 영혼이 방전된 좀비가 된다.

2020-02-13

교육 백신 3 - 풍선 효과 차단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농부들은 감(感)을 잃은 겨울 날씨에 올 농사 걱정이 태산이다. 병충해도 병충해이지만 나무는 물론 대지가 철을 잃지 않을지 여간 걱정이 아니다. 아직 겨울 속에서 한 해를 살 힘을 비축해야 할 꽃눈들이 가지마다 한가득 자리 잡았다. 이미 매화는 1월 중순에 남쪽에서 개화를 시작했다. 또 대지는 입춘도 오기 전에 3월 들꽃들을 쏘아 올렸다.철을 지키려는 자연의 임계점이 극에 달했다. 자연이 철을 잃으면 그 결과가 어떨지 우리는 잘 안다.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대재앙을 예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경고를 들을 귀가 없다. 또 지금 다음을 볼 눈이 없다. 더 안타까운 것은 눈앞의 이익에 빠져 인류의 위기를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길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껏 하는 말은 “예방”을 잘하자는 것뿐이다. 과연 예방이 어디까지 인간을 지켜줄 수 있을까?영하 14도를 기록한 지난달 30일, 올해 들어 처음으로 맛보는 겨울 날씨가 필자를 이런저런 생각에 빠뜨렸다. 그러다 문득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딸 아이였다.“아빠, 부모님들 학교 교문 안으로 못 들어온대. 알았지!” 앞뒤 없는 통보에 필자는 잠시 당황했다. 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마음에서 가시기 전에 최근 본 뉴스가 생각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제○○회 졸업식은 각 교실에서 진행됩니다. 학부모님께서는 교실 및 건물 출입이 불가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바뀐 졸업식 풍속도이다.필자 또한 고민이 컸다. 하지만 필자는 학부모님과 전교생이 모인 졸업식을 선택했다. 학교를 믿고 3년이라는 시간을 전국에서 영천까지 보내주신 학부모님들의 정성 때문에라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전체 졸업식을 거행했다.산자연중학교 졸업식의 메인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직접 쓴 감사장을 졸업식장에서 읽고 부모님께 전해드리는 것이다. 이 시간만 되면 학생들의 자세는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이 쓴 감사장을 끝까지 읽는 학생은 거의 없다. 학생들은 첫 줄도 잘 읽지 못하고 흐느낀다. 아이와 마주 선 부모님들은 아이가 감사장을 읽기 전부터 손수건을 꺼내신다. 그렇게 3년 동안 서로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눈물로 나누고 나면 학생도, 학부모도 더 큰 희망을 얻는다.그걸 보면서 필자는 풍선 효과를 생각했다. 지금 학교 모습은 균형을 잃은 시소이다. 교육의 본질적인 면보다 비본질적인 면이 훨씬 강하다. 한쪽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지면 반대편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교육의 경계는 무한대가 아니다. 교육을 이루는 대표 요소는 학생, 교사, 교육부(청), 학부모이다. 이 네 가지 요소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학교는 교육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그런데 지금 학교를 풍선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힘이 빠진 쪽은 교사이다. 그다음은 학생이다. 그 결과 공교육은 붕괴하였으며, 사교육은 날개를 달았다. 교육의 직접 대상은 교사와 학생이다. 물론 학교의 잘못도 크다. 그래도 좀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교육의 재건을 위해서 학원을 믿듯이 학교와 교사, 그리고 학생들을 믿어주면 안 되는지?

2020-02-12

마스크 단상

박화진전 경북지방경찰청장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지구촌이 신음하고 있다. 뚜렷한 백신이 없어 개인위생과 접촉차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개인위생 유지와 접촉차단에 효과적인 방법이 마스크착용이라고 한다. 급작스런 마스크 수요 폭증으로 일부에서 사재기 조짐까지 일고 있어 공동체 의식도 더욱 절실할 때다.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이 보인다. 활기찬 거리 모습이 사라진 것 같다. ‘눈 먼 자들의 도시’ 같은 영화 속 음산한 도시의 모습을 연상케 된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다. 침묵의 도시로 변하는 게 아닐까하는 괜한 걱정까지 해본다. 마스크가 입을 막고 있으니 전염병재난을 넘어 소통재난까지 몰고 온 것 같다.따져보니 그동안 세상이 너무 시끄러웠다. 참다못한 조물주가 무분별하게 말들을 내뱉는 인간의 입을 잠시 봉하려고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 같다는 엉뚱한 상상이 문득 들었다. 참이든 가짜든 말들이 범람하고 있다.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다. ‘그 입 다물라’고 제지했다가는 민주주의 공적으로 몰릴 것이다. 그러나 말에도 절제와 책임이 따르게 된다. 특히 가짜 말을 하고도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말들이 난무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말의 성찬 세상이 되었다. 넘쳐나는 정보와 빠른 지식습득으로 사람들이 똑똑해진 탓이다. 말은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제 맛이다. 사람 몸에 입은 하나요, 귀가 두 개인 것도 듣는 것을 많이 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남의 말은 잘 들어주지 않은 채 자신의 말만 늘어놓게 되면 불통의 싹이 튼다. 좋은 토론회 여부는 상대의 말을 잘 듣는지 살펴보면 된다. 상대의 말은 건성으로 듣고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할 말을 생각하고 있으면 겉도는 토론이다. 시끄러운 말 싸움터로 변질될 수 있다. 회의진행 모습을 보면 그 조직의 발전가능성이 보인다고 한다. 상사나 의사결정권자의 발언시간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어떤 조직이든 현실적으로는 자유로운 의견개진이나 토론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회의가 윗사람의 일방적인 지시사항 전달에 불과한 상사만의 말경연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청득심(以聽得心)’을 지휘방침으로 내건 경찰지휘관이 있었다. 군이나 경찰조직과 같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하는 조직일수록 부하는 마스크를 착용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부하직원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의지의 피력이었던 것 같다. 남의 말을 듣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잘 듣지도 않고 내 말이 나오는 그때부터 그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말은 많아지며 세상은 시끄럽게 된다.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다. 내 생각과 의지를 들어달라는 선량후보자들의 말과 확성기 소리들이 곳곳에 나부낄 것 같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제대로 된 말을 듣고 선택해야겠다. 물론 침 튀기며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말을 하는 것은 피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우주의 기운(?)을 모아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다.“조물주님! 말조심하겠으니 마스크 빨리 벗게 해주십시오.”

2020-02-11

농촌의 미래, 여성농업인 창업에서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현재 농업 및 농촌의 환경변화에 따른 영향력은 첫째, 경쟁력 있는 고부가가치 농업으로 구조조정과 농산물 수입증가 및 수출시장이 확대된다. 둘째, 과학기술발전으로 인해 첨단기술 수용의 격차 확대, 정밀농업 발전, 농산물 상품화, 유통체계와 지속가능한 환경농업이 발전될 것으로 보인다. 셋째, 농촌어메니티 활성화, 농촌관광과 귀농·귀촌 인구 증가와 전원생활 수요가 증가한다. 넷째, 농업 생산력의 증가세 둔화와 농촌사회의 초고령화, 고령친화 실버농업의 부상, 청장년 전업농업으로 주력화 된다. 이와 같은 환경변화 아래 지역 농업은 고령자와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우선 과제일 것이다.그리고 농업은 제1차 산업 중심의 성격을 벗어나, 외식산업 그리고 식탁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제2차 산업인 가공식품을 포함한 식품산업의 발전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문화·서비스업 등의 제3차 산업부분도 농업발전의 중요한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농촌현장 가공식품산업은 일거리 창출, 일자리 제공 그리고 제1차 산업부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공식품산업은 농가소득 증대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실정이며, 여성농업인 참여가 다른 영역에 비해 많은 양적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여성농업인의 사회적 지위향상과 전문농업인력 확보 교육, 노동가치 평가 등에 대한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현장에서 느껴지는 그 체감도와 실효성은 아직도 미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때문에 새로운 영역인 여성농업인 창업 활성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첫째, 여성농업인 창업과 관련한 특성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창업으로 이어지게 되는 이유와 창업 형태, 그리고 창업 시 필요한 요소들에 대하여 적절히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관련 정책 및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할 필요가 있다. 여성농업인의 창업 지원 체계를 구현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젠더적 측면에서 가질 수 있는 특성 뿐만 아니라 지역의 특수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지역 여성농업인의 창업은 차별화, 특성화 및 소득화를 달성할 수 있는 체계적인 지원 프로그램 및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창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대부분 가업 혹은 주변에서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아이템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창업이전 단계에서부터 진행되어야 할 차별화, 특성화 및 소득화 등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상태에서 창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이에 여성농업인 창업과 관련하여 현장감 있는 교육과 컨설팅이 연계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농업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특히 보수적인 농업사회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농업인을 육성하고 사회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여성농업인 스스로의 비전 제시도 필요하다. 지역사회와의 동반성장에 관한 중장기적인 방향을 도모할 수 있는 내적 여건도 함께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20-02-10

헬렌 니어링의 삶

김현욱 시인책은 인간관계와 비슷하다. 어떤 책은 항상 가까이 두고 자주 보고 싶지만 또 어떤 책은 몇 장 넘기다 이내 멀리 던져둔다. 이사를 다녀도 꼭 챙기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이때다 싶어 분리수거장으로 내다버리는 책도 있다. 첫사랑 같은 책이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꺼내 읽으며 위안을 받는 오랜 친구 같은 책도 있다. 내 돈 들여 사는 꼭 사야하는 책이 있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책이 있다. 모서리를 접거나 삼색 볼펜으로 정성스레 밑줄을 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잡지책처럼 설렁설렁 훑어보고 덮어버리는 책이 있다. 책과 인간은 참 많이 닮았다. 인간을 통해 다른 인간으로 나아가듯 책을 통해 다른 책으로 나아간다. 최근에 읽은 헬렌 니어링(1904∼1995)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가 그러하다.헬렌의 삶을 이해하려면 인도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와 경제학자 스코트 니어링을 알아야 한다. 헬렌은 한때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었다가 스물네 살에 스코트 니어링을 만나 평생을 함께 한다. 스코트는 헬렌보다 스물한 살이나 많았다. 1928년 스코트가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헬렌은 스코트의 든든한 반려자가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1932년 버몬트 숲으로 들어가 농장을 일구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원칙을 지키며 스무 해를 살았다. 그 보석 같은 삶의 기록이 바로 ‘조화로운 삶’이다. 소로우의 ‘월든’(1854)과 함께 인간 문명의 위선과 인간다운 삶,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고전이다.‘조화로운 삶’, ‘조화로운 삶의 지속’을 읽으며 꼿꼿한(?) 스코트 보다는 유연한 헬렌에게 더 큰 호감을 느꼈다. 헬렌이 없었다면 스코트는 백 살 생일 때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었다.”라는 마을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 살이 된 스코트 니어링은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음으로 삶을 완성했다. 스코트가 죽고 8년 뒤에 헬렌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을 펴냈다. 헬렌의 삶은 ‘친절과 배려, 사랑’으로 압축할 수 있다.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 하라는 것이다.”라는 올더스 헉슬리의 말에 헬렌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헬렌은 스코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며 아메리카 토착민의 노래를 조용히 읊조렸다고 한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스코트는 “좋…아. 하….”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마흔 중반을 겨우 넘기는 와중에 뒤늦게 스코트와 헬렌은 만났다.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삶을 당장 어찌할 도리는 없다. 바꿀 수 있는 건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뿐이라고 헬렌과 수많은 성자들이 말했다. 삶의 나침반을 ‘소박한 삶’으로 맞춰본다.

2020-02-09

양비론의 오류

김병래시조시인서로 충돌하는 두 의견을 모두 틀렸다고 하는 이론을 양비론(兩非論)이라 하고, 그 반대말은 양시론(兩是論)이다. 상당한 경우 대립하는 주장들이 나름의 근거와 타당성을 가지고 있고 복합적인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또 한편, 대부분의 논쟁이나 토론에서 대립하는 양측의 주장은 모두 한계나 모순, 단점, 불합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만약 한쪽 주장에만 모순이나 단점, 불합리성, 한계가 있고 다른 쪽 주장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애초에 문제가 없는 주장이 당연히 정론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니 논란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논쟁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양시론이나 양비론이 나올 여지도 있는 것이다.얼핏 보면 양비론이나 양시론이야말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중도(中道)인 것처럼 보인다. 불가의 팔정도(八正道)가 그러하듯 중도란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이 아니라 엄정한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양비론은 사태의 본질에 대한 천착과 성찰의 부족이거나, 쟁점을 흐리고 물타기 하려는 불순한 의도일 때가 많다. 아니면 매사에 냉소적인 태도를 가졌거나 세상사의 시비나 논쟁을 초월해 홀로 고고한 척 하는 사람들이 자기우월감의 표출 수단으로 양비론을 펴기도 한다.건축을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수평계(水平計)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울이면 유리관 속의 물방울은 반대쪽으로 이동한다. 수평계의 물방울이 가운데를 가리킨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분명히 기울어졌는데도 물방울이 가운데 있다면 그 수평계는 고장이 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위의 배가 한 쪽으로 기울면 중심축은 반대쪽으로 가기 마련이다. 이때 배에 실은 물건이나 사람들이 그 기울어진 쪽으로 몰리게 되면 배는 전복하고 만다. 전복을 막으려면 오히려 반대쪽으로 이동해서 무게중심을 바로 잡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다.올바른 지성(知性)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회현상에 대해 수평계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가 한쪽으로 기울면 금방 알아채는 직감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지성인이라 할 수 있다. 요트를 타는 사람이 배가 왼쪽으로 기울면 반사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이동해 중심을 잡는 것처럼, 양식과 정의감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가 한 쪽으로 기울면 반발과 저항의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지금의 정권은 지나치게 좌경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는 물론 언론과 사법부, 교육계, 노동계, 문화계 전반을 걸쳐 좌파성향의 코드 인사들이 장악하여 전복의 위험성을 보이고 있다.이런 판국에도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논객들 중에는 점잖게 양비론을 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시국이 분명 심하게 좌측으로 기울었는데도 위기의식을 못 느낀다면 고장 난 수평계처럼 상황판단 능력을 상실한 것이고,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거라면 이권이나 보신을 위해서 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있는 것이다.

2020-02-06

교육 백신 2 - 폐교 탈출론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계절을 잃은 1월이 어영부영 다 갔다. 겨울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바이러스들은 파죽지세로 인간 공격에 나섰다. 그 기세에 눌려 전 세계는 허겁지겁 대응책을 발표하지만, 두 글자로 요약하면‘예방’뿐이다. 인간이 바이러스와 싸울 방법이 예방뿐이라니 슬플 따름이다. 아무리 빅데이터 시대라고 하지만 괴(怪) 바이러스의 출몰 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을 인류는 아직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뻔뻔한 인류는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전 세계 과학자들이 전하는 인류 멸망 시나리오라는 글에는 인류 멸망의 10가지 원인이 나온다. “(10위) 핵전쟁, (9위) 감마선 폭발, (8위) 인공지능의 발달, (7위) 이산화탄소의 배출, (6위) 기후변화, (5위) 환경오염, (4위) 소행성 충돌, (3위) 꿀벌의 멸종, (2위) 전염병과 바이러스, (1위) 아무도 모르는 시나리오”.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인류가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인류 멸망의 시간은 인류가 놀랄 만큼 앞당겨져 있는지도 모른다.그런데 필자는 위에 든 10가지 원인보다 인류 멸망을 앞당길 더 강력한 원인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인구절벽이 만든 ‘폐교 쓰나미’ 이제 서울까지 덮친다”. 지난주 신문 기사 제목이다. 학생이 없어 문을 닫는 학교, 한때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통계청은 초등학교 입학생 수가 2025년에는 올해보다 10만9천633명 줄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초등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초등학교 입학생 수는 폐교 도미노 게임의 시작이며, 게임의 끝은 국가 소멸이다.정부에서는 인구절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붓고 있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부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4B 운동 등이 더 활성화되고 있다. 4B(비·非)란 ‘비연애, 비성관계, 비혼, 비출산’을 뜻하는 신조어이다.출산 억제 정책까지 펼쳤던 우리나라가 왜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출산 포기 원인 중 가장 핵심은 자녀 교육이다. 정부만 인정하지 않을 뿐 이 나라 교육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국민은 다 안다.다시 학교 교육이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행복하게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자유학년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유학년제를 중학교와 고등학교 3년 전 과정에 걸쳐서 하지 않고서는 오히려 자유학년제는 독이 될 뿐이다. 만약 이것이 어렵다면 학교를 다양하게 해야 한다. 대안학교를 원하는 학생들은 대안학교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그런데 교육부와 교육청은 학생이 없다고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모를 뿐 대안학교를 부정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주 교육청에 전화를 했다. “저희 학생들과 선생님들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육 공모전에 참가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교육청에서 돌아온 답이다. “대안학교라서 안 됩니다.” 이게 교육 관료들의 교육 의식 정도이니, 교육 붕괴를 막을 답 역시 없다.

2020-02-05

노숙인과 비둘기

박화진전 경북지방경찰청장지인과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했던 날입니다. 식사 후 식당주변 커피 집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골목 어귀에 앉아 컵라면을 먹던 노숙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세먼지가 뒤섞인 차가운 공기에 온기가 가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 같았습니다. 노숙인의 초라한 행색과 비린 체취에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가던 행인들을 피해 비둘기 한 마리가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갔습니다. 노숙인은 물끄러미 비둘기를 바라보더니 라면 몇 가락을 던져주었습니다. “이거 먹어”라며 비둘기에게 채근하였습니다. 경계심으로 머뭇거리던 비둘기는 던져진 라면 몇 가락을 쪼아 먹고 슬그머니 그의 주변을 서성였습니다. 길바닥 식탁과 바람을 반찬삼아 노숙인과 비둘기는 거나한 오찬(?)을 즐겼습니다.돌아오는 차안에서 둘의 식사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지난해 정년퇴직을 앞두고 몇 년을 해오던 구호단체 기부금을 끊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적은 액수였지만 퇴직 후 씀씀이를 줄인다는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몇 권의 책을 내면서 인세를 기부하며 으쓱해 했던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남을 도우는 일은 결코 풍족할 때 하거나 폼을 잡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숙인은 컵라면 한 개를 쉽게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의 주린 배가 다가온 비둘기에게 눈길을 돌리게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먹이를 찾아온 비둘기를 외면치 않았습니다.고궁이나 광장에서 한가로이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던져주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기념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그들이 던지는 모이는 자신들이 꼭 먹어야하는 양식도 아니고 없어도 되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사리 던져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먹는 비둘기들을 바라보며 좋아라 합니다. 제가 했던 어쭙잖은 기부행위가 광장에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던지는 행위나 다름없었던 것 같습니다.매월 일정액 기부나 책 인세기부 같은 것들이 저 자신을 위한 폼 잡기용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남을 위해 기부하는 것은 내게 남아도는 것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들은 도움을 받아야할 처지의 사람에겐 더욱 간절하게 필요한 것일지 모릅니다. 노숙인은 자신의 허기를 채우기에도 부족할지 모를 컵라면을 먹으며 주린 비둘기에게 쾌척(?)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못한 처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남을 도울 수 있음에 생의 의미도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알량한 소액의 기부금조차 끊어버린 저의 처사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남을 도우는 일은 내가 쓰고 남아서 하는 것은 고궁의 비둘기에게 모이를 던져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나라 안이 이런저런 일들로 을씨년스럽지만 컵라면 몇 가락을 던져주던 노숙인의 어깨 뒤로 겨울햇살 한줄기가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다시 구호단체에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해야 되나?’

2020-02-04

쥐의 사랑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올해는 경자년, 쥐의 해이다. 작년엔 ‘황금 돼지’띠라며 난리였는데, 올해는 흰 쥐띠라고 곳곳에서 ‘화이트’ 마케팅이 한창이다.하얀색의 크림치즈볼이 통째로 들어간 ‘폴인크림치즈징거버거’(KFC), ‘해피 치즈 화이트 모카’(스타벅스커피코리아), 하얀 크림치즈 아이스크림인 ‘우리끼리’(배스킨라빈스) 출시 등 흰색 잔치 한 바탕이다. 이는 경자년의 ‘경(庚)’이 십간(十干: 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 중 7번째로, 음양오행설에 따라 흰색을 상징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흰 쥐가 모두 ‘먹거리’와 관련된 것은 재미난 현상이다. 사실 ‘쥐띠는 평생 먹을 걱정 없는 띠’란 말이 있다. 천지창조 신화에는, 미륵이 태어나 물/불의 근원을 모를 때, 쥐가 이를 가르쳐 주었고 그 대가로 세상의 뒤주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이와 관련 있어 그런지는 모를 일이다.쥐는 사실 먹거리와의 관련성 외에도 우리의 고전 속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 사람으로 둔갑해 주인 행세를 하거나 인간사의 부조리를 비판하는가 하면(‘서동지전’), 달리기 시합 중 소 등에 타고 가다 결승점에 와서야 소등에서 뛰어내려 1등을 했다는 이야기들이 그 대표적이다. 문화권에 따라서는 밤을 상징하기도 하고(인도), 파멸·죽음을 상징하기도 했던(그리스) 쥐,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재미, 재치, 얌체의 동물이자 풍요, 다산, 번영의 동물로 인식되었다.그런데 문학 속의 이러한 쥐는, 사실 알고 보면 모성애가 매우 강한 동물이다. 어미 쥐는 새끼를 낳으면 열심히 핥아 주는 습성이 있다. 열 마리의 새끼 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어미 쥐와 함께, 다른 그룹은 어미 쥐로부터 떼어 놓았더니, 전자의 그룹은 모두 성장했고 성장 호르몬 수치 또한 높았는데, 후자의 그룹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어미 쥐의 혀처럼 생긴 붓으로 붓질도 해 보고, 성장 호르몬을 주입해 보았어도 별 효력이 없었다.이처럼 어미 쥐의 사랑은 경탄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때론 이 사랑이 지나쳐 자식을 죽일 때도 있다. 얼마 전 학회 일로 신년교례회에 참석했더니, 마침 원로 교수 한 분이, 쥐의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용인즉슨, 쥐가 모성애가 강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새끼 쥐가 몸에 상처가 나 피가 나면 그것이 애처로워 어미 쥐는 계속 핥다가 결국에는 상처가 아물 틈이 없어 마침내 자식을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는 것이었다.내 편만을 극히 감싸고돌고, 네 편은 백안시하는 게 다반사가 된 세상이다. 하지만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알고, 내 편만 감싸고 편의를 봐주고, 상대편은 괄시, 무시, 배척하곤 하다가 결국엔 서로 생채기만 남기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렇게 핥아대다 죽어버리면 아무 소용없는 것을. 바야흐로 올 경자년에는 상업적인 ‘화이트 잔치’도 좋고, 풍요와 다산, 쥐의 재치를 꿈꾸어 보는 것도 좋지만, 지나친 ‘쥐의 사랑’이 결국,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죽이고 고스란히 나의 ‘상처’로 남게 된다는 사실 또한 한번쯤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다.

2020-02-03

바닷가 카페, 새로운 일상이 되다

조현명 시인포항 칠포리에서 오도리까지 해안 길을 따라가노라면 가장 뜨거운 장소가 카페들이다. 높은 곳일수록 경치가 좋다. 낮아도 갯바위와 파도소리 그리고 수평선이 보이면 충분하다. 시원한 망망대해를 굽어보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열린다. 거기에 갯바위와 갈매기 그리고 햇살이 부서지는 파도라니 평온함이 커피 한 잔과 함께 몸에 충만해진다. 단연 공기와 향기 또한 좋아서 오래 머무르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경치 좋을만한 곳곳에 새로운 카페가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나는 특히 이 해안 길을 좋아해서 주말이면 거의 갈매기처럼 한 바퀴 휘휘 도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도심에서 먼 곳까지 사람들이 많이 올까 싶지만 생각보다 많다. 게다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이 눈에 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신혼의 남녀나 한참 연애중인 남녀나 할 것 없이 이상하게 젊다. 간혹 중년이 끼어있긴 하나 그들은 곧바로 자리를 뜨고 카페에 오래 앉아 풍경 속에 살기나 하듯 소일하는 것은 젊은 부부다. 하도 이상해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어보기까지 했다. “집은 좁은데 여기는 넓고 시원하고 좋잖아요. 주말이라 할 일도 없고 아이와 남편같이 시간 보낼 겸 나왔어요.”, “사진 찍을 데가 많잖아요. 이런 곳에 왔다고 자랑도하고”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랬다. 새로운 트렌드인데 내가 그걸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특별히 겪고 있는 결핍이란 문제를 가려서 해소해주려 한 것이 카페가 성업인 비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공간의 결핍, 내속에 오래 전 자리 잡았던 동경하던 분위기 그리고 환상과 꿈에 대한 결핍, 꼭 가지고 싶었지만 잠시만 누려도 기분 좋은 그런 것들…. 한마디로 꿈과 환상을 잠시 동안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카페라면 누구에게라도 대환영일 것이다. 거기다 평소에 풀어놓지 못한 수다라니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가볼만한 곳이 된 것이다. 심지어 아저씨들도 술보다 커피를 마시며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늘어나고 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풍경 속에 앉아 웃고 떠들며 시간 속을 거닌다는 것은 왠지 삶의 품격을 높여주는 것 같다. 아니 모든 결핍을 잊게 해주는 힐링의 시공간이 열리는 것 같다. 아이들과도 같이 앉아 이것저것 나누면서 햇살과 바람을 즐기듯 앉아있는 젊은 부부와 곁눈으로 흘낏거리며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남녀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별 의미는 없겠지만 끝없이 해안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떠드는 사람들, 바닷가 카페에 가면 그것이 새로운 일상이 된다. 한마디로 일상을 즐긴다는 표현이 맞지 싶다. 그러다보니 신종 매니아도 생겨났다. 요즈음 카페를 순회하면서 평을 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올리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폰으로 사진을 찍고 글을 올리는 SNS가 늘어난 것도 한몫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결핍이 있다. 그것을 이용해서 유혹하든지 말든지 나는 이 동화 같은 바닷가 카페에서 작은 꿈을 수평선과 파도에 실어 놓고 놀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2020-02-02

확실한 행복

김병래시조시인살다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하는 일이 잘 풀리거나 분주할 때는 그럴 겨를이 없지만, 삶이 여의치 않아 고달프거나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했을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는 각자의 처지와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다. 종교인들이라면 신의 뜻이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최선으로 칠 것이고,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을 삶의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재물이나 권세, 명예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대다수 사람들은 성공하고 출세했다는 사람들을 롤모델 삼아 그들의 성공전략과 처세술을 배우고자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고 출세하지는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절박한 질문에 맞닥뜨린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할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고 삶의 명제라는 것이 성인 현철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기에 앞서 왜 사는가를 물어야 한다. 목적이 있고서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왜 사는가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한 마디로 줄이면 ‘행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바란다고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못한 것을 비관하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살아 있는 한 행복해지려는 바람과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막상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아무튼 행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행의 요인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으로 버려야 할 것은 탐욕이다.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행과 비극은 대부분 탐욕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노력은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울수록 갈증이 더 심해진다고 한다. 욕망이란 채울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서 절제를 할 줄 알아야 불행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다음으로 버려야 할 것은 타인과 비교하거나 지나치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버릇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보다 경제수준이 훨씬 낮은 나라에 비해서 행복지수가 낮고 자살률이 높은 것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라고 한다. 나보다 풍족한 사람들과 비교를 하고, 그들의 눈에 초라하게 보일 것을 비관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매사에 남과 비교를 하고 남의 이목을 살피기에 급급하다 보면 소위 자아상실의 상태가 된다. 세상을 다 얻고도 자신을 잃어버리면 공허할 뿐이다.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곁에 있다고 한다. 요즘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한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이라 한다. 주변이나 이미 가진 것 중에서 찾은 행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얘기다.

2020-01-30

교육 백신 1 - 교사 재교육부터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바이러스의 대공습이 시작됐다. 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공포에 갇혔다. 사스, 메르스 등 과거의 바이러스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예방백신이나 치료 약은 없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못 보던 변종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료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인류 과학 기술은 바이러스의 진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신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그때서야 인간들은 야단법석이다. 우한 폐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다 국가봉쇄령이 내려지지 않을지 이미 바이러스의 공포는 경제성만 따지는 돈벌레 인간을 이겼다.바이러스들이 인간이 가진 단어 중에서 제일 우습게 생각하는 단어는 면역력이다. 이 단어가 사어(死語)가 되기 전에 그 뜻을 적어본다. “사람이나 동물의 몸 안에 병원균이나 독소 등의 항원(元)이 공격할 때, 이에 저항하는 능력”. 그런데 적어보니 얼마나 인간 위주의 이기적인 단어인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또 이 말만 보면 인간은 방어만 하는 존재라는 착각마저 든다. 인간이 면역력을 가졌다면 바이러스는 내성(耐性)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과연 이 둘을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강할까? 우한 폐렴만 봐도 내성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이러스가 공포로 느껴지는 이유이다.문제는 지금이 아니다. 인류 문명이 현재처럼 인간 편의로만 흐른다면 가까운 때에 상상도 못 할 바이러스의 대공습에 인류는 초토화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재난 영화처럼 지하로 숨어들어 살아야 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러기 전에 인류는 인간만을 위한 이기적인 발전을 멈춰야 한다. 인간 간의 상생을 넘어 자연과의 상생을 위한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교육뿐이다. 교육만이 대위기에 처한 인류의 희망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교육다운 교육을 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닌 인류 생존을 위한 필수 의무사항이다. 교육다운 교육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안다.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는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다운 인간이란 인성교육 핵심 덕목에 잘 나와 있다.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교육이 이 덕목들만 학생들에게 잘 인지시키고, 학생들이 실생활에서 이들만 정확하게 실천한다면 세계는 이토록 혼란치 않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이 나라에는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할 교사가 없다는 것이다. 학교 교실에서 교사가 진지하게 인성 이야기를 한다면 학생들은 어떤 반응일까?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할 교사도 없지만, 듣는 척이라도 해줄 학생은 더 없다. 시험과 성적이 교육 전부라고 생각하는 교사들을 학생들은 신뢰하지 않은 지 오래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교육이 더 무너지기 전에 교육을 살려야 한다. 그 시작은 교사 재교육이며, 그 방법은 인성교육이다. 과연 이 나라 교사들의 인성 지수는 얼마나 될까? 교사들이 먼저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인성의 사표(師表)가 된다면 교사들에게 등을 돌렸던 학생들도 다시 신뢰의 눈으로 교사를 볼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바이러스가 대공습을 멈추는 시간이다.

202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