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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상가지구(喪家之狗) 유감

박화진전 경북지방경찰청장죽음 앞에는 모든 이들이 경건합니다. 원수처럼 싸우던 형제도 부모의 상사(喪事)를 계기로 화해하기도 합니다. 혼사는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가는 것이 부자연스럽지만 상사에는 초대받지 않더라고 가게 됩니다.​​​​​​​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그만큼 다른 어떤 일보다 엄숙하고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분의 상사를 호상(好喪)이라 합니다.호상을 치르는 상갓집은 때로는 잔칫집 분위기같이 떠들썩하기도 합니다. 호상이라도 황망한 죽음을 맞이한 슬픔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는 유족의 마음은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그래서 문상객은 복장에서부터 언행에 경건함을 잃지 않아야하는 것이 기본예의입니다. 장례의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가정에서 이뤄지던 장례식이 결혼식처럼 식장에서 이루어져 상갓집이라는 말이 틀릴 수도 있겠습니다. 문상 후 모처럼 만난 지인들끼리 새벽까지 이어지던 화투판도 사라졌습니다. 건전한 장례문화로 바뀐 것입니다. 문상은 고인이나 유족과의 인연으로 하게 됩니다.문상객의 규모나 면면이 죽은 자나 유족의 사회적 지위를 가름하게 합니다. 문상은 고인과 유족에 대한 추모와 애도행위입니다. 더하여 얽히고설킨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사회관계망이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얽음으로 함께 자리하면서 고인에 대한 추념보다는 그동안 바쁜 사회생활로 못다한 문상객끼리 만남의 장이 됩니다. 세상살이 이야기 경연장이 됩니다. 직장 상사, 친구, 거래처 등 스펙트럼이 넓은 만남의 장입니다. 얼마 전 모 기관의 사람들이 상갓집에서 업무적인 견해로 상하간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상갓집에서 가족끼리 언쟁이 일거나 죽음에 대한 부당함이나 억울함으로 유족이 고성을 지르는 일은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문상객으로 온 사람들이 말다툼을 해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 기관의 고위 공무원들이었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반영하듯 소속 장관이 힐난을 하며 경고를 할 정도였습니다. 공적인 일이라도 사석에서 논의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때와 장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회적 민감 이슈에 대해 감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고성으로 장례식장에서 말다툼을 했습니다. 특종을 놓친 언론은 후속 기사를 위해 장례식장에 뒤늦게 뛰어들었을 겁니다. 망자가 누구인지? 말다툼을 한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지 등등. 조용하고 경건해야할 상갓집이 북새통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참 개가 웃을 일입니다. 상을 당한 유족은 그 기관과 관련된 사람일 것입니다. 경건하게 추모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남의 상사를 망치는 행위를 했습니다. 말다툼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이없는 일입니다. ‘상가지구(喪家之狗)’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되며 드나드는 상갓집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개라는 말입니다. 춘추전국 시절, 노력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알아주지 않는 공자의 처량한 처지를 빗댄 말입니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을 상갓집 개 취급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찮게 취급받는 상갓집개로부터 한 소리 듣게 되었습니다.“잠 좀 자게 남의 초상집에서 쌈질하지 마시요. 왈 왈”

2020-01-28

스물두 번째 일기장

김현욱 시인작년 6월,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은유는 지금까지 스물두 번째 일기장을 쓰고 있다. 권수보다는 은유가 1년 6개월 동안 날마다 꾸준히 일기를 써왔다는 점을 자주 칭찬하고 격려해주었다. 일기 쓰는 때가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은유는 주로 저녁 8시쯤에 습관적으로 일기를 썼다. 일기를 써야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일기를 쓰는 것은 날마다 식사 후에 양치를 꼼꼼히 하는 것처럼 분명 좋은 습관이다. 나쁜 습관은 저절로 자라는 잡초처럼 가만두어도 무성해진다. 좋은 습관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고 돌보아야만 거둘 수 있는 열매 같은 것이다. 세상 농사 중에 자식 농사가 가장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자식에게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뜻이다.‘우리 아이 독·토·글(독서, 토론, 글쓰기) 습관 기르기’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2003년부터 학교에서 영재교육원에서 도서관에서 수많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토론하고 글쓰기를 했던 경험들을 담은 것이다. 2011년에 딸, 은유가 태어나면서 부모로서 자녀에게 독·토·글 습관을 길러 주기 위해 노력했던 이야기도 담았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유전도 환경도 부모도 그렇다.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다. 다만, 독·토·글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교사나 부모의 인내와 꾸준함, 모범보이기와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우리 아이에게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일기 쓰는 습관을 길러주고 싶다면, 부모도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글을 써야 한다. “일기 써라!”는 오래 먹히지 않는다. “같이 쓰자!”가 오래 간다. 우리 아이의 오늘 일기거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맞장구를 쳐주고 거들어주고 꾸준히 칭찬과 격려를 해줘야 한다. 은유가 일기 쓸 때, 나는 옆에 앉아서 시를 필사했다. 시를 필사하니 은유가 시에 관심을 가졌다. 가끔씩 일기장에 시를 쓰기도 한다. 겨울방학 과제로 자작 동시집을 만들어가겠다고 계획을 세운 것도 참 기특한 일이다.1월 7일부터 22일까지 운영한 영일도서관 겨울방학 프로그램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 것도 은유와 내게는 참 뿌듯한 일이다. 그림책 읽어주기와 보드게임을 합친 도서관 수업은 아이들이 무척 재미있어 했다. 은유는 몇 번이나 도서관 수업 이야기를 일기로 썼다. 그러면서 아빠에게 당부했다. “아빠, 올해도 포은도서관 도서관 수업 꼭 신청해줘!” 매년 포항시립도서관(포은, 대잠, 오천, 석곡)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도서관 수업을 운영한다. 선착순으로 모집하는데 웬만한 클릭으로는 어림도 없다. 1분 안에 완료된다. 올해도 그 긴장감을 맛 볼 준비를 하고 있다. 역시나 그 긴장감과 과정, 결과는 나만의 비밀 일기장에 기록할 것이다.은유가 열두 살을 넘어서도 꾸준히 일기를 쓸지는 미지수다. 그때는 그냥 은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좋은 습관의 힘을 느꼈다면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2020-01-27

겨울이 교육에게 말하다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겨울을 지내보아야 봄 그리운 줄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겨울의 다양한 의미를 잘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 속담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 의미는 겨울은 성찰과 준비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하늘은 성찰과 준비에 집중하라고 기온을 점강적으로 내려 자연의 성장점을 잡는다. 그러면 나무를 비롯한 자연은 겨울로 거울 벽을 만들어 면벽 좌선에 들어간다.면벽에 든 겨울나무의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겨울은 더 엄동(嚴冬)으로 향한다. 무념무상에 든 자연은 겨울을 보낸 힘으로 봄을 그린다. 욕심 없는 자연이 그린 그림은 겨울을 난 모습 그대로이다. 바로 이것이 봄이 아름다운 이유이다.그런데 그런 겨울이 사라졌다. 겨울 실종 소식으로 전국이 야단이다. 겨울 축제를 준비한 지자체와 단체들의 울상은 통곡 수준이다. 이상 기후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그 심각성이 위험 수준을 넘었다. 겨울 추억이 바뀔 날도 멀지 않았다.필자는 2020년 1월 7일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그날 필자는 한겨울에 여름 장맛비를 보았다. 이튿날 모든 뉴스의 머리기사는 겨울 홍수 피해 소식이었다. 정말 물 폭탄이 따라 없었다. 더 놀란 건 그날의 기온이었다. 그날 밤은 분명 겨울이 아닌 봄이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기온은 영상 16도를 웃돌았다. 세찬 비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었는데 그 바람은 모든 봄꽃이 만개한 5월 하순의 따뜻한 바람이었다. 1월에 느끼는 5월은 낯섦이 아니라 공포였다. 그런데 우리에겐 실종된 것이 또 있다. 바로 교육이다. 겨울다운 겨울이 없듯이 우리에겐 교육다운 교육이 실종된 지 오래다. 정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교육은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누더기가 되었다. 본질을 잃어버린 교육은 흉기로 둔갑하였다. 정부가 휘두르는 교육 흉기에 학생과 학부모들이 치명상을 입고 있다. 필자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된다. 종잡을 수 없는 교육정책은 학생들을 사교육 현장으로 내몰았다. 많은 학원이 자리가 없을 정도로 방학 특수를 누리고 있다.필자는 교육에 상처받은 많은 이들과 지난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든 공교육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수도권에서 산자연중학교를 찾은 한 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에게 학교는 무엇인가요?” 학생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고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학교는 무섭고, 불안하고, 슬프고, 재수 없는 곳이요.” 학생의 눈엔 살기에 가까운 증오가 가득했다.아프지만 필자는 그 눈빛이 낯설지가 않다. 우려되는 것은 눈빛의 강도가 매년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지금의 학생 문제와는 비교될 안 될 끔찍한 사건들이 우리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지 않을지 걱정이다. 유난히 따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1월 중순, 인간들의 이기심에 본질을 잃어버린 겨울이 정치 편향 교육 관료들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학생 없이 지내봐야 학생 그리운지 아는가! 억지 교육 정책들로 학생의 봄을 빼앗지 말라!”

2020-01-22

스마트폰 세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참으로 편리해진 세상이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손가락 하나로 세상 만물과 지구 곳곳을 더듬어볼 수 있으니, 과연 문명의 총아답게 스마트폰은 생활의 이기(利器)를 넘어 삶의 필수품이 아닌가 여겨진다. 유선에서 무선전화로, 이동전화에서 스마트폰으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생활양식과 사회문화, 사람들의 세태는 눈부신 변모와 판이한 양상을 띠게 됐다.요즈음의 남녀노소 대부분 하루하루 휴대폰에 사로잡혀(?)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눈 뜨고 활동하다가 눈 감고 자기 전까지 항상 옆에 있거나 갖고 다니는 휴대폰.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정보를 얻고 지인들과 연락을 하고 게임이나 오락을 즐기며 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쇼핑을 할 수도 있으니, 휴대폰은 현대인의 지극한(?) 애용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 10명 중 9명이 보유한 휴대폰을 하루에 보는 시간이 평균 3시간 이상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20대는 하루 4시간 이상이나 된다 하니 수면시간을 제외한 하루 활동시간의 1/4을 휴대폰에 얽매여있는 셈이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문자를 주고 받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식사를 하면서까지 틈만 나면 저마다 각양각색으로 스마트폰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스마트폰 사용 인구가 4천만명을 넘어서고 사용 시간도 길어져서 스마트폰 없이는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스마트폰이 단 몇 시간만 곁에 없더라도 60% 이상이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열어보는 것이 습관화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에 중독되거나 의존하는 정도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필요하거나 궁금해서, 심심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수시로 휴대폰을 열어보는 횟수가 하루 평균 80여회, 직장인의 경우 150~200회까지 된다 하니, 과연 스마트폰은 시공(時空)의 감초라도 된다는 말인가.‘손 끝의 토닥거림에 별천지가 열리는/문명의 진화는/편리함의 덫이다/갈수록/메말라가는 정(情)/고립을 자처한다//말 수가 줄어들고 생각조차 얕아져/단조롭고 귀찮음/모나게 길들여져/저마다/웅얼거리며/낚는 것은 그 무엇?’ -拙시조 ‘스마트폰 세태’ 전문스마트폰과 인터넷, 첨단 디지털 기기의 등장으로 사회의 비약적인 변혁과 획기적인 기술의 진보가 이뤄졌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과잉과 편리함의 이면에는 부작용과 폐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으로 눈의 피로도가 증가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효율성이 떨어지며 인간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자극적이고 충동적이며 대화가 줄어들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느리게 변화하는 현실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결국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 갇혀 무미건조한 쳇바퀴질을 일삼으며 고독한 군상이 돼가는지도 모른다.문자 대신 엽서나 손편지를 써보고 스마트폰 대신 책을 드는 시간을 늘려보면 어떨까? 풍경을 바라보며 걷기와 사색을 즐기고, 현재 하는 일에 몰입하기, 대화로 마음 챙기기, 주변 환경 인식하기 등의 활동으로 마음 근육을 키워나갈 때 핸드폰을 사용하고픈 충동은 현저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2020-01-21

유아교육,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수원계명대 교수·유아교육과유아교육이 중요함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다만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유아교육의 중요성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서 본 지면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유아교육은 때론 조기교육이란 단어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어리면 어릴수록 교육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특히 영·유아기는 마치 물을 흡수하는 스폰지와 같이 언어를 습득하는 시기이며 습득하는 어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이다. 하지만 이를 잘못 이해하여 어린 시기부터 한글 철자를 익히거나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앞서 이야기한 대로 영·유아기에는 특정 정보에 민감한 성향이 있어서 이 시기를 민감기라고 부른다. 태어나서 두 돌이 지나기 전에 모국어의 기초적인 문법을 깨우치며 식사나 놀이와 같은 일상경험 관련된 어휘를 배우기 시작한다. 물론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거나 ‘가’와 ‘이’와 같은 조사 사용에서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휘와 문법을 과일반화해 생긴 오류이다. 보다 더 많은 언어 경험이 쌓이면 이 오류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스폰지와 같은 영·유아의 특성과 민감기는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논의할 때 근거가 된다. 유아교육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어떻게 유아교육을 해야 할 것인지는 늘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최근 뇌 발달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어떻게 유아교육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신체 운동이 뇌 구조 발달과 관련이 있으며, 많이 뛰고 신체 활동이 활발한 아이의 뇌와 신체 움직임이 적어 과체중이나 비만인 아이의 뇌는 다르다는 것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신체 움직임이 뇌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또한, 뇌 발달 연구에 의하면 방임이나 학대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3세 유아의 뇌 용적은 일반 동년배 유아의 뇌 용적보다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학업으로 인한 좌절이나 스트레스 역시 유아를 위축시켜 뇌 발달에도 영향 미치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고 정서적으로도 건강한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함을 역시 유추해 볼 수 있다.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사설 외국어 교육기관은, 놀이를 통해 외국어를 가르친다고 홍보한다.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문제점은 아이들이 일상생활 언어와 사설 기관에서 배우는 학습 언어가 다르므로 외국어 동화를 듣고 외국어로 동요를 부른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것을 놀이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놀이를 가장한 학습은 유아 입장에서 어른의 지시에 의해 해야 하는 일이고 따분하여 지속할 수 없어서 결국 좌절하게 되는 일이다. 놀이를 가장한 학습에서 아이들의 신체 움직임이 억압되고 스트레스가 유발될 가능성이 높다.누구를 위한 유아교육인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어른들의 불안을 해소하거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2020-01-20

모두 행복한 것 같아, 나만 빼고

김현욱 시인영화 비트는 1997년 5월 3일에 개봉했다. 당시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대구 동성로의 한 극장에서 영화 비트를 봤다. 1997년은 정초부터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부도, 도산하며 한국 외환 위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해였다. 12월 3일, 한국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의 혹독한 관리에 놓이게 된다. 경제 관료와 재벌, 정치인, 언론, 기득권층의 도덕적 해이와 위선으로 수많은 서민이 영문도 모른 채 해고와 실업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니까, 1997년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무가 큰 도끼에 찍혀 휘청거리던 해였다. 크고 작은 벌레들은 배를 불렸지만, 가냘픈 나무초리와 이파리들만 우수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하지만, 한국 영화계는 1997년을 기점으로 명작들을 쏟아낸다. 비트, 초록물고기,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박하사탕, 공동경비구역 JSA, 동감, 파이란, 번지점프를 하다, 봄날은 간다, 친구 등이 그것이다. 영화 제목만 보고도 그때 그 당시의 장소와 상대를 추억으로 소환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특히, 영화 속 명대사는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접속의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는 수십 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명대사다.최근에 영화 비트를 다시 보다가, 로미(고소영)의 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먼저야.”와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 나만 빼고.”였다. 97년 당시에는 감각적인 영상에 휘둘려 대사를 음미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십여 년이 흘러 다시 보니 곱씹어 볼 만한 명대사, 명장면이 많았다. 입시지옥에서 친구를 잃은 우등생 로미는 요양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돈을 벌겠다는 목표로 분식점을 차린 환규(임창정)는 사기를 당하고 인부를 칼로 찌른다. 감옥에서 나와 환규가 다시 한 일도 역시나 포장마차를 여는 것이다. 폭력 조직에서 중간 보스로 승승장구하던 태수(유오성)도 배신을 당하고 끝내 죽음을 맞는다. 태수를 구하러 갔던 민(정우성)도 만신창이가 된다.그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 없는 영화다. 1997년의 청춘과 2020년의 청춘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명문대에 진학하려는 이유도, 돈을 벌려는 이유도, 조직에서 승진하려는 이유도 모두 행복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명문대에 진학하면, 돈을 많이 벌면, 승진하면 행복할까? 그때도 “모두 행복한 것 같아, 나만 빼고.”라고 아니 말할까? 지인의 SNS를 훔쳐보면서 부러움과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들보다 더 자랑거리가 많아지는 것일까?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말, ‘행복’일까?

2020-01-19

겨울 유희(遊戲)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꽝꽝한 빙판을 보면 지치고 싶어진다/ 팍팍한 세상살이 껄끄러운 마찰을 잊고/ 유착도 고착도 없이 미끄러지고 싶어진다// 숫눈의 들판을 보면 밟으며 걷고 싶다/ 낡고 찌든 세상을 덮은 순백의 전인미답/ 신생의 벅찬 설렘으로 마냥 걷고 싶어진다// 바싹 마른 풀숲에는 불 지르고 싶어진다/ 조바심으로 서걱이는 마른 풀에 불을 댕겨/ 이 세상 한 귀퉁이를 방화하고 싶어진다// 산과 들 쏘다니며 나이도 무엇도 잊고/ 걷다가 지치다가 논두렁에 불도 놓으며/ 한 마리 산짐승처럼 참 생생한 하루였다’- 졸시 ‘겨울 유희’골목에 아이들이 없다. 시골 동네에는 아이가 사는 집이 거의 없다. 간혹 아이들이 있어도 골목에 나와 놀지 않는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던 시절에 비한다면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집집마다 네댓은 보통이고 일곱이나 여덟인 집도 적지 않아서 방학이면 하루 종일 골목이 시끌벅적했다. 오죽하면 “시끄럽다, 딴 데 가서 놀아라!”라는 꾸중을 듣곤 했을까.아이들이 많다 보니 놀이도 참 다양했다. 술래잡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썰매타기, 비석치기, 자치기, 땅따먹기, 딱지치기, 공놀이, 고무줄놀이, 공깃돌놀이, 원수놀이, 전쟁놀이, 눈싸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칠 줄 모르고 놀아도 놀 거리가 달리지는 않았다. 놀이에 소용되는 도구도 거의가 스스로 만들었다. 돈을 주고 사는 것은 구슬이나 고무공 정도였고, 초등학교 상급반이면 팽이를 깎고 연이나 제기, 썰매를 만들 줄 알았다.지나고 보니 그 때 그 놀이를 통해 많은 것을 얻고 배웠던 것 같다. 우선은 마음껏 뛰고 구르고 노는 일이 자유롭고 즐거웠다. 방학숙제 따위 까맣게 잊고 노는 일에만 열중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먹고 입는 것이 열악해도 그것 때문에 슬프거나 괴로울 겨를이 없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단벌옷으로 겨울을 나도 방구석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놀이를 통해 우정을 쌓고 협동과 단결을 배우고 도구를 만드는 손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그때 배운 기술과 지혜를 바탕으로 국민소득 백 불 미만의 최빈국을 세계 십위 권 경제대국으로 밀어 올리는 기틀을 마련했다.겨울방학 동안만이라도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하자. 과외니 학원이니 하는 족쇄를 풀어주고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기도 던져놓고 동무들과 어울려 술래잡기도 하고 팽이치기, 연날리기도 할 수 있게 하자. 시골의 학교를 이용해서 방학동안 놀이교실이라도 열 것을 제안한다. 일주일이나 2주일쯤 도시의 아이들이 합숙을 하면서 마음껏 놀 수 있게 놀이를 가르치고 놀이기구를 손수 만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를 바란다. 제 손으로 만든 연과 썰매, 제기, 팽이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면 그보다 좋은 체험학습이 없을 것이다. 저절로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고 정서도 넉넉해져서, 행복지수 OECD 꼴찌에다 5명 중 1명꼴로 자살충동을 경험했다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기쁨과 활력을 회복하기 바란다. 아이들은 잘 놀아야 건강해진다.

2020-01-16

졸업이 무서운 아이들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아, 망했다!” 2020년에 대한 느낌을 묻는 말에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반응이다. “왜? 중학생이 되잖아!” “중학교 왜 있어요? 꼭 가야 해요?”필자는 초등학교 입학을 학수고대하며 입학식 전날까지 가방을 안고 자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그런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된다는 세월의 빠르기에 숨이 막혔다. 비록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대가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원망으로 바뀌었지만, 뭐든지 긍정적인 아이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절망에 가까운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처음이라 몹시 놀랐다.필자의 놀람은 금방 걱정으로 변했다. “중학교 가면 서열이 있대요. 인기 있는 애들은 선배들이 처음부터 챙겨주고, 혼자 다니거나 인기 없는 애들은 학교에서 찐따처럼 지내야 한대요. 또 선배나 친구들에게 한 번 찍히면 끝이래요! 1학년 때는 자유 학년제라 시험을 안 쳐서 다들 학교에서는 놀고, 학원 가서 공부한다는데 왜 중학교 1학년이 있어요?”서열, 찐따, 자유 학년제, 학원 등 필자가 들어도 마음이 무거운 단어들인데, 중학교 입학도 전에 이런 단어들에 노출된 아이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심상치 않은 중학교 분위기가 상상되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3년 내내 또 의미도 없는 졸업장을 따기 위해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할 아이를 생각하니 부모로서 아이의 중학교 입학이 망설여졌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부모들이 이해갔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와 같이 그들을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못 되기에 아이에게 미안했다.지난주 산자연중학교에서는 2020학년도 입학과 전학을 위한 예비학교가 2박3일 동안 열렸다. 올해도 제주도에서부터 서울, 대전 등 전국에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왔다. 비록 학년은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뭔가에 잔뜩 주눅든 모습이었다. 무엇이, 또 누가 저 아이들을 저토록 주눅들게 했는지 필자는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청와대에도, 정부에도, 그 어디에도 없다.글 오염에 가까운 사회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영혼 없는 신년사가 남발되는 요즘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2020 경자년 희망찬 새해”라고 말한다. 과연 그들은 희망(希望)이라는 말의 뜻을 알기나 하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뻔뻔해도 최소한 이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새해 앞에 “희망찬”이라는 수식어는 절대 붙이지 못할 것이다.절망만 가득한 이 나라와 이 나라 교육에 제일 필요한 단어는 희망이다. 그런데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고는 2020년도도 2019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희망이 부재한 이 나라 교육계는 신입생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까? 필자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아이는 믿지 않는다.혹시 대통령께서 “이 나라 중학교에는 왕따, 학교폭력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학생이 즐겁고 행복하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중학교입니다”라고 말하면 아이가 믿을까? 그런데 슬프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 이 나라에는 없다.

2020-01-15

복세편살과 安分知足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새해 새날의 여명 속에 경자년이 밝았다. 찬란한 태양이 온 누리 밝고 푸른 희망의 빛살로 다시 떠올랐다. 새해 첫날이 열리는 해를 보며 사람들은 한 해의 소망이나 다짐을 하곤 한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사람들은 처음과 새로움에 대한 느낌과 의미를 부여하며 새해는 보다 희망적이고 발전적이기를 빌고 기대를 해보는 것이다.작년에 이어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와 바닥권 경기, 사회적인 갈등 등으로 올해도 여전히 격동과 변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질 것으로 짐작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각자의 처한 위치에서 차분하게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알고 동요되지 않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추스려야 한다고 본다. 서로의 관계와 이해, 협업과 상생의 고리를 지속적으로 엮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여겨진다. 나의 관념이나 주장만 고수하고 선과 악, 득과 실의 타산만 따지는 편중된 사고방식이나 흑백논리는 직장이나 시민사회, 나라에 있어서 융화와 호전 보다는 해악과 퇴보만 끼칠 따름이다.이른바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과 안분지족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 필자는 하루하루를 안분과 지족으로 살아가면 저절로 복세편살이 되리라고 본다. 안분(安分)이란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분수, 즉 자기 신분이나 능력, 한도에 맞게 처신하며 욕심 없이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즐겁게 살면 그 자체가 복세편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세편살과 안분지족은 긍정과 배려, 감사를 실천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잡다단한 세상을 나름 편하게 살려면 작더라도 자기의 생활에 만족해야 하고, 사소한 것에라도 긍정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매사에 만족할 줄 알고(知足), 분수를 알며(知分), 멈출 줄 아는(知止) 지혜야 말로 긍정과 감사,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현(先賢)들은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족상락(知足常樂)의 삶을 늘 추구하지 않았을까?시대의 가치와 변화의 격랑이 심해질수록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작은 것에 만족해하며, 주어진 환경에 고마워 하고 맡은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타인을 신뢰하고 배려하며 동료들과 협력해나가는 노력이야 말로 융합의 시대에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본다. 단순하지만 개인의 안분지족과 복세편살이 가정을 화목하게 가꾸고 사회를 안정시키며 나라를 평화롭게 만드는 근간이 아닐까 여겨진다.삶의 변화란 나부터, 주위의 가까운 곳에서부터 찾고 이뤄나가야 한다. 삶의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인식하며 서먹하고 무관심했던 사람들과의 진정성 있는 소통과 교감을 통해 자신과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안분지족의 마음으로 작은 베풂과 나눔, 긍정과 감사를 실천하고, 복세편살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추구해 나갈 때 우리 모두가 보다 밝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경자년의 부신 햇살이 모두에게 꿈과 희망의 빛살로 비춰 일년 내내 웃음과 기쁨이 가득하기를 기원해본다.

2020-01-14

쥐구멍에 볕들 날

박화진전 경북지방경찰청장202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떠오르는 새해 첫날의 해를 맞으며 새해에는 더 나은 삶을 소망해 봅니다. 연례행사 같은 해맞이를 하면서도 새해 첫날 아침은 늘 설레고 기대를 가져봅니다. 우리 가족은 물론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새해 첫날의 다짐과 소망들이 꼭 성취됐으면 합니다.올해는 10간의 일곱 번째 ‘경’(庚)과 12지의 첫 번째 ‘자’(子)가 합쳐져 경자년(庚子年)입니다. ‘경’(庚)은 흰색을 의미하고 ‘자’(子)는 쥐를 상징하기 때문에 ‘흰쥐 띠’의 해라고 합니다. 쥐 중에서도 흰 쥐는 우두머리 쥐이자 매우 지혜로워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생존 적응력까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실, 근면, 지혜, 총명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성실하고 근면한 우리 민족의 기질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해인 것 같아 기대를 해봅니다. 하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있어 들뜬 기대만큼 마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습니다. 민생을 책임져야할 정치권은 선거를 앞두고 대화와 타협보다는 극한 대립으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밝지만 않은 경제전망들은 골목안 자영업자의 긴 한숨을 새해에도 잦아들게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청년들의 핏발서린 눈을 보듬어줄 희망찬 정책들도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매주말이면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누어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고 외치는 쪼개진 민심은 언제쯤 봉합될지 종잡지 못하겠습니다. 남북간 긴장과 대치상황도 제대로 풀리게 될까하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어 남아있던 희망조차 흐릿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마냥 주저앉아 체념과 낙심에 빠져 있을 수만 없습니다. 저 멀리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돌이켜 볼 것도 없이 우리 국민은 금모으기 운동이란 경이적인 한마음 한뜻 운동으로 그 어렵다던 IMF체제의 파고를 넘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놀란 월드컵축구 4강의 신화를 이룬 대한민국입니다. 쥐의 해를 맞이하여 생각나는 속담이 있습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속담입니다. 몹시 고생을 하는 삶도 좋은 수가 터질 날이 있다는 뜻입니다. 고난 속에 희망을 갖게 하는 속담인 것 같습니다. 쥐구멍은 아주 작은 공간을 빗댄 말입니다. 햇볕도 잘 들지 않아 동물이 서식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쥐는 그 속성처럼 근면과 성실성으로 생존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좁은 공간으로 볕이 들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찮은 동물의 삶에도 희망의 끈이 있는데 세계를 놀라게 한 저력의 대한민국이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흰쥐처럼 근면, 성실은 물론 지혜와 총명으로 헤쳐나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 때 유행했던 ‘해뜰 날’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새해에는 반드시 ‘쨍’하고 해뜰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오늘도 어김없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런 마음을 다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태양이 내려주는 밝은 빛과 따스한 온기를 그늘진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 이웃과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0-01-13

명상 중인 철학자

김현욱 시인요즘 렘브란트 그림에 푹 빠졌다. 유명한 그의 자화상보다는 ‘명상 중인 철학자’(1632년)를 보고 한눈에 매료되었다. 구두장이 눈에는 구두만 보인다더니 명상 초보 눈에는 명상만 보이는가보다.‘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년), ‘야간순찰’(1642년)은 렘브란트가 전환기에 그린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밝음과 어둠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야간순찰’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와는 달리 각각의 인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야간순찰’은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다르다.바로크 양식을 기반으로 한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의상에서 볼 수 있는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 빛과 어둠의 대비가 명확하다. 시신과 튈프 박사, 수강생들을 충실히 표현했다. 비스듬한 다이아몬드형 구도는 해부학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긴장을 잘 드러낸다. 이에 비해 ‘야간순찰’은 렘브란트의 독자적인 구성과 표현이 엿보인다. ‘야간순찰’은 빛과 어둠 속에 인물들을 차별화하여 표현했다. 어떤 인물을 조명을 받은 듯 굉장히 환하고 자세히 그린 반면에 어떤 인물은 어둠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게 표현했다. 가로 4m, 세로 3m 이상의 거대한 크기인 ‘야간순찰’은 등장인물인 군인들이 각자 초상화 비용을 부담해서 제작되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충실히 그리지 않고 새롭게 연출하여 단순한 집단 초상화를 넘어 인물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표현하고자 하였다.렘브란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을 보면 태양이 떠오르는 여명에서부터 마지막 빛을 발하고 사라지는 하루의 삶을 인생에 비유하여 표현한 한 편의 연극을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는 ‘명상 중인 철학자’에서도 깊이 있는 공간을 상당히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부드러운 색채가 햇살의 느낌을 잘 담아냈다. ‘명상 중인 철학자’에서 빛은 정신을 밝히고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관람자는 철학자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화면에서 보여주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에서 인생의 즐거움과 슬픔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제 나도 습관적으로 아침에 일어나 창문으로 햇빛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을 바라본다. 빛이 방뿐만 아니라 내 영혼으로도 스며드는 느낌을 받는다. 빛의 신비한 기운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옛 성인들은 이른 아침 동녘을 바라보고 앉아 일출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명상 중인 철학자’를 보면 렘브란트가 왜 ‘빛의 화가’인지 알 수 있다.렘브란트의 ‘엠마오의 저녁식사’(1629년)에서도 빛과 그림자의 사용이 좀 더 극적으로 강조되었다. 예수의 얼굴이나 몸 같은 세부적인 부분은 어둡게 묘사하고 예수의 뒤에서 비추는 빛만 강조하고 있다. 예수 앞에 순례자를 그리지 않고, 아주 깊은 어둠으로 표현하여 관람자가 그 자리에서 예수를 마주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올해는 도서관만큼 미술관에도 자주 갈 작정이다.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제로(ZERO) 전시회가 한창이다.

2020-01-12

후안무치(厚顔無恥)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일찍이 맹자(孟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측은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더불어 사람의 착한 본성인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단초가 되는 마음의 하나인 수오지심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이 옳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남의 잘못을 모른 척 하는 것도 의(義)가 아니라는 것이다.지금 정권의 관계자들과 추종하고 비호하는 세력들의 행태를 볼진대 후안무치란 말이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다. 저들의 비리와 부정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악담과 조롱을 퍼붓고 수사하는 검찰까지 겁박하는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들의 뻔뻔함이 국민들의 도덕적 불감증까지 확산시키는 폐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다. 신년 벽두부터 쓴 소리를 하는 것은 정치권에서 멀리 떨어진 일개 서민이 보기에도 현 시국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난 70여년 온갖 간난신고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땀 흘려 이룩한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는 정권에 대해서 방관하고 침묵한다면 그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하겠는가.이 정권은 시작부터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대법원장, 비서실장, 장관, 국정원장 등 지난 정권 관련 인사들을 탈탈 털어 100여 명이나 사법처리했다. 그리고 그 적폐청산의 선봉장이었던 중앙지검장을 야권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우리 총장이라고 추켜세우며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를 않았다. 그런데 막상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리가 불거져 수사가 시작되자 태도를 돌변해서 검찰개혁을 들고 나왔다. 비리 혐의자인 민정수석을 내치기는커녕 오히려 법무장관에 임명하여 검찰을 압박하려는 무리수를 자행하였으나 빗발치는 반대여론에 밀려 취임 35일 만에 사퇴를 하는 촌극을 연출했다.검찰개혁이 필요한 이유는, 검찰이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편향된 법집행을 하거나 수사권의 남용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고 있는 지금의 검찰은 검찰개혁의 취지대로 잘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정권이 노골적으로 검찰을 압박하는 한편 여당은 국회의장까지 가세를 해서 제1야당을 제외한 군소정당들과 야합하는 꼼수와 편법을 동원해서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통과시키기에 급급한 것은 너무나 속보이는 처사가 아닌가. 조금이라도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둘러 공수처법을 통과시킨 것은 검찰은 물론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넣어 정권의 방어막과 안전장치로 삼으려는 속셈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반대 하는 목소리엔 귀를 막고 동조하는 세력들만 국민이라는 이 정권의 도를 넘는 오만과 후안무치를 막을 길은 오로지 선거를 통한 심판밖에 없다. 다가오는 4월의 총선에도 견제할 힘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국은 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2020-01-09

선생님의 용기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처럼 물리적 시간으로는 새해이지만 정치를 비롯해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새해는 한참 멀었다. 분명 보신각종은 울렸는데, 그 효험이 예전 같지 않다. 한때 사람들은 보신각종 소리에 절망적인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희망의 결심 대신 절망의 복수에 중독되어버렸다.성난 군중의 모습은 홍콩만의 일이 아니다. 오만과 독선에 빠진 정치인들의 작태에 이 나라 국민도 단단히 성이 났다. 촛불이라도 들고 싶지만, 이념으로 변질된 촛불은 오히려 국민의 눈과 마음을 멀게 하기에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이념에 갇혀 도로를 오염시키는 무리가 될 수는 더 없다. 자정 능력을 잃은 사회를 사는 방법에 대한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그 사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외면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정말 죽을 각오로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방법은 희망 고문에 불과하다. 답이 없는 사회에 오로지 내 답만이 정답이라고 외치는 무리 때문에 우리 사회의 혼돈은 단군 이래 최고다.네거리를 지나다 어느 정당에서 내건 “국민의 힘”이라는 문구가 적힌 불법 가로펼침막을 보았다. 특정 정당의 홍보 수단이 되어버린 “국민”이라는 단어가 참 아팠다. 국민을, 그것도 국민의 힘을 저렇게 함부로 써도 될까는 생각에 화가 났다. 지정된 장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불법으로 내걸린 특정 정당 홍보물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 이 나라 국민의 실정이다.도대체 이 나라엔 국민(國民)이 있을까? 교과서에서는, 그리고 지금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은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했다. 진정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교과서도 그렇고 대통령도 그렇고 국민을 기만(欺瞞)한 것이 확실하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과 국민은 정치의 도구요 수단,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국민 정치 로봇이라는 용어가 역사에 기록되기 전에 더 이상 이념 정치인들에게 농락되어서는 안 된다.그것은 교육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도, 교사도 아니다. 지금 학교의 주인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교육 관료들이다. 그들의 말 한마디면 학교 정책들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SKY 캐슬’에 이어 최근 ‘블랙독’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거기서 어느 기간제 선생님의 말씀이 필자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애들 보기에 쪽팔리지 않습니까!”과연 지금처럼 간다면 2020학년도의 학교 모습은 어떨까? 달라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학생들은 의미도 없는 줄세우기식 시험에 갇혀 하늘 한 번 못 볼 것이다. 또 공시생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어른들의 편견에 떠밀려 명문대학교 진학을 위해 밤을 낮으로 삼을 것이다.정말 학생들 보기에 쪽팔린다. 더 이상 우리는 학생들을 명문대라는 말로 유혹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초에 교사들이 용기를 내어 교육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 첫걸음은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다.“학생 여러분, 교실에, 교과서에, 시험에 가두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2020-01-08

무명가수 K형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2020년 경자년 새해가 밝았지만 지난해 송년회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날은 대낮부터 송년모임이 있었다. 연협(연예협회) 회원들의 송년회였다. 예총의 9개 예술단체 중 가장 힘겨운 한 해를 보냈을 협회가 바로 연협이다. 지자체의 보조금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사정이라 모든 행사를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회비로 운영하였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례행사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송년파티는 알차게 준비하였다. 행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가요발전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노력하다 안타깝게 갑자기 먼 길을 떠난 K형에게 묵념’을 드렸는데, 그에 대한 추억으로 가슴 한켠이 아릿하였다.구랍 20일 경, 이른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고 K형이 타계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불과 며칠 전, 예총이 주관한 ‘예술인한마당’에서 특유의 활발한 무대매너로 ‘시골총각’을 멋지게 부르던 모습이 생생한데,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돌아보면 아쉽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을까마는 K형과의 이별이 특히 안타까운 것은 그와의 추억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한, 두 살 위인 그는 누구보다 웃음이 많았고 긍정적인 성정을 가진 인정 많은 이웃이었다. 그는 평생을 밝은 얼굴로 웃고 노래하며 봉사하는 무명가수의 삶을 살았다. 40여 년간 대중음악의 한 길을 걸으며 무대 위에서나 현실의 삶에서 언제나 웃는 모습이었고, 불귀의 길을 떠나기 전날에는 모친상을 당한 후배의 문상을 위하여 먼 길을 마다않고 다녀온 정 많은 시골총각이었다.아침 일찍 빈소에 도착하니 망자임을 알리는 모니터 안에서 가족이라고는 딸 둘의 이름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의 대표곡인 ‘시골총각’이 나직하게 들리는 분향소에서 연협의 지인들에게 들은 그의 삶은 평생을 혼자서 외롭게 노래하며 살아온 외길이었다. 핑크색셔츠를 즐겨 입었고, 돋보기안경 너머의 큰 쌍꺼풀, 구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뒤에 웅크린 고독의 무게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심장에 지병이 있었으나 경제력 부족으로 고가인 심장박동 보조기를 착용하지 못하여 위험요소를 늘 지니고 있었으니, 40년을 한결같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심장의 고통을 안고 고독과 빈손으로 맞서왔다 생각하니 대중예술인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가를 짐작할 수 있는 단면을 본 것 같았다. 밤늦도록 쓴 소줏잔을 기울이며 그를 추억한 동지들은 예술과 현실의 삶이라는 엄혹한 경계에서 고뇌하는 연예예술인들의 삶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품을 떠나 서른을 넘긴 두 딸은 어렵게 연락이 닿아 장례식에 겨우 참석하였고, 연협 동료들이 곁을 지키던 외로운 유해는 고인의 평소 바람대로 화진해수욕장 앞바다에 뿌려졌다. 부디 저승에서는 튼튼한 심장으로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기를.함께했던 대만여행에서 입었던 귀여운 빨간조끼, 그 모습이 새삼 그립다. 이제 우리는 멜빵바지에 핑크색 넥타이를 매고 돋보기안경 너머로 큰 쌍꺼풀의 맑은 눈으로 환하게 웃으며 부르는 무명가수의 ‘시골총각’을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2020-01-07

베트남의 박항서, 그리고 한국의 정치 리더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번역학 전공인천공항에서 베트남 하노이의 노바이 공항까지 비행기로 대략 5시간이 걸린다. 베트남은 우리에게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다.2019 동남아시아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이 인도네시아 축구팀을 3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베트남이 60년 만에 동남아시아 축구게임에서 우승한 것이라고 한다. 우승으로 들뜬 베트남에서는 시민들이 수백 대의 오토바이들이 떼를 지어 베트남 국기를 달고 경적을 울리며 시내를 달린다.작년 2018년 8월 필자는 호치민 벤탄시장 앞에서 거대한 오토바이 물결에 휩쓸린 적이 있다. 2018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경기 4강전 경기가 있던 날로 기억되는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이 인상적이었다.베트남은 한국에게 비즈니스의 나라, 사돈의 나라, 한국은 베트남에게 축구 스승의 나라가 되었다.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의 승리비결은 선수들의 체력과 기량, 정신력, 그리고 지역감정의 극복이라고 한다.베트남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긴 나라이다. 남북으로 길이가 1천650㎞에 달한다. 베트남에도 북부, 중부, 남부 사이에 지역감정이 존재한다고 한다. 박항서 감독 이전의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 감독은 선수의 선발과 기용에 있어 출신 지역에 따른 편중이 심했고, 심지어 선수들도 다른 지역의 선수들에게는 경기 중 패스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항서 감독은 고질적인 관행으로 이어온 지연을 뛰어넘어 실력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고 기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선수들의 체력과 기량은 하드웨어적인 속성이다. 정신력과 지역감정의 극복은 소프트웨어적인 속성이다. 하드웨어적인 속성과 소프트웨어적인 속성을 박항서 감독은 리더십으로 조화롭게 융합하였다.바야흐로 시대는 소프트웨어적인 사고를 필요로 한다. 7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는 하드웨어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공단지역 여기저기 높게 솟은 공장 굴뚝에는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남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와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그것이 맞았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는 소프트웨어적인 사고가 지배한다.‘소프트(soft)’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부드럽고 조화로운 사고, 함께 어울리는 사고가 바로 소프트웨어적인 사고이다.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정치 리더는 지금 베트남의 박항서 감독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동서의 지역감정을 넘어 화합과 조화 속에서 남북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리더는 부드러운 사고와 혜안의 암묵지, 그리고 포용력을 지닌 자이어야 할 것이다.바로 ‘소프트 파워(soft power)’‘소프트 거버넌스(soft governance)’ 내지 ‘소프트 카리스마(soft charisma)’이다.

2020-01-06

당신의 첫 기억

김현욱 시인어머니에게 듣기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두호동, 오천읍에서 살았다고 한다. 기억은 없다. 내 최초의 기억은 포항시 청하면 서정1리에서 시작된다. 서정1리 마을회관, 약방과 슈퍼를 겸했던 옆집, 포도, 돼지 농장, 안심저수지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내 유년의 고향은 서정리다. 그곳에서부터 내 첫 기억이 메모리에 저장되었다. 가을이면 지천에 갈대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당(돌무더기가 많은 하천)과 안심저수지에서 자주 놀았고, 포도와 참외, 수박 서리를 하다가 붙잡혀 혼나기도 했다. 친구들과 북한으로 가겠다고(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가방에 간식을 챙겨 산을 넘다 하늘에 헬리콥터가 지나가자 여기가 북한이구나, 화들짝 놀랐던 장면도 떠오른다. 마당이 넓은 집에 살았는데 아버지랑 평상에 마주 앉아 구구단을 잘 외운다고 칭찬을 받았던 일, 여동생이 변소에 빠졌던 일, 숨바꼭질하다가 넘어져 눈가가 크게 찢어진 일, 일요일 아침마다 마을회관에 청소하러 나가야하는데 그게 싫어 숨었던 일,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포대기에 갈비(소나무 이파리)를 가득 담아 메고 내려왔던 일 등이 떠오른다.주저리주저리 유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내 인생의 첫 기억이 궁금해서다. 뇌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첫 기억이 재구성된다고 한다. 기억의 속성이 그러하듯 끊임없이 편집,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렬했던 내 인생의 첫 기억은 메모리카드에 쓰기 금지를 해놓은 것처럼 잘 보존되었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안심저수지에서 실컷 놀다 저녁 어스름, 갈대밭 사잇길을 돌아 집으로 오는데, 바람에 한들거리는 갈대와 코스모스와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리 마을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합일감, 자연의 충만함을 느꼈다. ‘나’라는 경계가 지워지고 사라지면서 이상한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내 삶에 환기되었다.작년부터 아나빠나사띠(들숨날숨에 대한 마음 챙김) 명상을 꾸준히 하면서, ‘나’가 사라졌던 내 인생의 첫 기억을 자주 마주친다. 여태 살면서 나는 ‘나’가 너무 진해지고 강해지고 딱딱해졌음을 느낀다. 콘크리트 같은 아집과 망상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내가 참 불쌍하고 안쓰럽다. 콘크리트를 깨부수려면 강력한 압쇄기가 필요하다. 명상이 그것이다. 나는 명상이 아집과 망상이라는 콘크리트를 깨부수는 압쇄기라고 생각한다. 깨부수고 나오고 싶다. 그때의 어린 나에게로. 자연과의 충만한 합일로.전현수 박사는 ‘생각 사용 설명서’에서 “첫 기억은 그 사람 인생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준다. (중략) 일반 사람의 경우에도 첫 기억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삶의 중요한 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첫 기억도 내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첫 기억과 지금의 내 모습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도 나를 있는 그대로 아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2020년에 벽두에 묻는다. 당신의 첫 기억은 무엇인가?

2020-01-05

근하신년(謹賀新年)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새해 첫날 아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이 세상 이토록 장엄이고 충만인데/ 무슨 소원이 더 필요하랴//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것으로/ 완성이었다’- 졸시 ‘원단일출’# 새해 첫날입니다. 동해 바닷가에서 일출을 보았습니다. 삼백예순다섯 날이 든 선물 보따리를 뜨겁게 받아 안은 마음입니다. 그게 다 내 몫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하루하루가 다행과 감격의 날들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살아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저토록 찬란하게 열리는 하루를 무상으로 받는 것보다 더 큰 축복과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벅찬 황송과 감격 앞에 모든 탐욕과 사악함과 어리석음은 부질없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여생(餘生)의 첫날입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오늘의 강이 어제의 강물이 아니듯 어제와 똑 같은 오늘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오늘은, 전인미답의 설원처럼 설레고 떨리는 첫날입니다. 첫날에는 과거가 없습니다. 어제의 그늘이 없고, 아무것도 연연할 것이 없습니다. 첫날에는 새롭지 않은 것이 없고, 꿈과 희망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시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몇 날이 더 남았는지는 몰라도 이 아침, 눈부시게 찬란한 남은 생의 첫 해가 떠오릅니다. 이 한 해가 모든 분들에게 감격과 황홀의 선물보따리기를 바랍니다.# 나무도 짐승들도 함께 맞는 새해입니다. 나무나 짐승들은 달력이 따로 필요없지만, 나는 새해라고 지난 달력을 내리고 새 달력을 걸었습니다. 직사각형 칸 속에 커다란 고딕체 숫자들이 빼곡한 달력입니다. 새 달력 속의 숫자들은 아직 사용하지 않은 배터리인 셈입니다. 하루에 하나씩 갈아 넣는 365일분 새 배터리입니다. 돈이 많거나 힘이 세다고 더 주지는 않는 딱 일 년 치인데, 중간에 본체가 파손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수입니다. 나무와 짐승들에게 달력이 따로 필요없는 것은 그 몸이 달력이기 때문입니다. 몸속에 시계와 달력이 들어 있어서 안 보고도 시간과 계절을 아는 거지요. 사람도 원래는 그랬지만 한눈팔다 잃어버리고 부랴부랴 달력을 만들고 시계를 만든 것이지요. 나무와 짐승들이 맨몸으로 가는 길을 시계 차고 달력 보면서 허둥지둥 쫓아가는 꼴이라고 할까요.사람들은 새해를 맞는 법도 잊어버렸습니다. 해맞이다 뭐다 부산을 떨지만 원래는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지요. 나무들과 청둥오리들이 어떻게 이 아침을 맞는지를 보면 알지요. 겨울나무와 청둥오리들이 어떻게 혹한의 밤을 견디는지는 우리도 발가벗고 하룻밤 밖에서 지내보면 알 일이고요. 각자가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일 년 치 배터리를 받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보고 배울 이웃이 있다는 말로 새해 덕담을 대신합니다. 배터리 하나하나의 수명은 24시간이지만 전력은 제한이 없답니다.# 보다 맑은 세상을 바랄진대/ 내가 한 줄기 샘물이 되어야 하고/ 보다 밝은 세상을 바랄진대/ 나부터 작은 등불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 정의도 평화도 자유도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

2020-01-02

9와 0사이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우여곡절 끝에 9에서 0으로 넘어왔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이 끊이지 않았던 2019년! 누군가가 제대로 “아홉수”에 걸렸다고 했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아홉수”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국론을 보면 대한민국은 아홉수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 아홉수에서 아홉은 9를 의미한다. 그럼 9는 어떤 의미와 기운을 가졌기에 이 나라가 이다지도 어려울까? 9라는 숫자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지금의 시국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설명이 있어 인용한다.“숫자 9는 분열, 성장하게 하는 양수의 마지막 변화 단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달이 차면 기울듯이 성장의 끝에는 반드시 반대되는 기운이 올 차례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큰 충격이 생기게 되는데 현자들은 이 시점에 세상에 큰 변국이 닥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이 나라에는 큰 변국(變局)이 닥쳤다. 혼란스러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에 국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기고만장의 정점에 있는 정치인들의 눈에 국민의 힘듦이 보일 리 만무하다. 그런 정치인들이 국민 운운(云云)하니 분통이 터진다.벌써부터 목 좋은 곳에는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려는 철새 정치인들의 대형 선거 홍보물이 내걸렸다. 여태까지 어디에서 무엇 하다가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기인(棄人)도 아마 이런 기인(奇人)은 없을 것이다. 오로지 당선을 위해 네거리에서 기계처럼 손 흔들며 영혼 없는 인사를 할 그들의 역겨운 모습을 생각하니 새해 기분이 다 날아 가버렸다.분명 달력은 9에서 0으로 넘어 왔다. 그런데 어찌 이 나라는 아홉수 덫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을까? 이런 걸 보면 역사는 발전한다는 논리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필자는 최근 들어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라는 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단언컨대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정(正)으로 나아간 만큼 딱 그만큼 반(反)으로 후퇴해 합(合)은 결국 제자리이다. 역사는 발전하는 게 아니라 반복될 뿐이다. (중략) 역사의 주체가 달라지지 않았으니 역사가 발전할 까닭이 없다.(….)”필자의 저 깊은 내면에는 위의 말을 부정하는 소리들이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나라 돌아가는 상황이 내면의 절규를 덮어버렸다. 2019년의 사람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았는데 2020년의 나라 모습이 바뀔까? 역사가 반복된다면 우리의 2020년 모습은 어떨까? 언제나 그랬듯이 선거 이후에는 더 극심한 혼돈이 있었다. 희망을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아픈 신년 벽두다.비록 구태의연한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가 아직 아홉수에 갇혀 있지만, 교육과 국민이 9를 밀어내고 0의 새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0은 시작점을 나타낸다. 국민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국민들이 희망 안에서 희망의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더 큰 희망 만들어갈 그런 시작점이 될 2020년, 대한민국, 교육을 바란다.

2020-01-01

학년말 학생부 쓰기 격무의 늪에 빠진 교사

조현명 시인학기와 학년이 마무리되면서 선생님들은 전에 없던 노동에 시달린다.그것은 학생부 작성이라는 가중된 업무이다. “원래 선생님들의 업무가 아니냐?” 라는 물음에 답을 하기 싫을 정도로 격무가 되었다.웬만하면 이것 때문에 담임을 맡기 싫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예전 손으로 쓰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도 나름 어려움은 있었다. 흑색 볼펜으로 써야하고 오기나 잘못쓰기라도 하면 수정이 어려워 아예 다시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자 수는 지금에 비하면 몇 자 적은 것도 아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되는 수준은 아니었다.그런데 지금은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도 자율 활동, 동아리 활동, 봉사 활동, 진로 활동의 특기사항에다 과목별 세부능력특기사항과 종합의견란으로 써야하는 항목이 늘어났다. 게다가 기록을 구체적으로 해야 대입에 도움이 된다고 하기에 없는 글을 짜내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이런 변명을 하면 관리자나 교육청에서는 미리 관찰기록을 작성하고 누가기록을 바탕으로 쓰면 쉽지 않겠느냐며 반문한다. 그러나 누가기록을 놓고 보아도 막연할 때가 많다. 글쟁이인 내가 그런데 글쓰기에 능숙하지 못한 선생님들은 어떤 심정일까 생각이 든다. 올해부터는 또 거짓으로 꾸며 쓴 내용이 있으면 징계하겠다고 엄포까지 공문으로 전달받은 상태이다. 이러고 보니 진퇴양난이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부탁과 성화에 좋은 글을 짜내어 없는 것도 좋게 꾸며내야 할 판인데 감사가 겁이 나서 함부로 거짓으로 꾸밀 수도 없고 적당히 에둘러 적다보면 구체적이기보다는 두루뭉수리하고 추상적인 내용일 수밖에 없다. 어떤 학생이든지 성실하고 적극적이고 열심히 노력하고 훌륭하며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멋진 학생이다.복사하기 붙여넣기를 하다 보니 문장이 같아지는 학생이 많아지면 그것도 지적사항이 된다. 수업 장면에서 학생의 능력을 좋게 써주려고 하다 보니 교육과정을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면 지적사항이다.해마다 같은 내용을 하는 동아리의 기록을 달리해야 하다 보니 순서나 행사들을 나누어 적기도 한다. 그러다가 같은 문장이 3년 반복되어 지적되기도 한다. 오타나 말도 안 되는 문장, 길게 늘어져서 읽기가 거북한 문장, 자율 활동에도 나오고 진로 활동에도 나오고 종합의견에도 나오는 똑같은 문장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지적된다. 그럼에도 이것을 가지고 대학입학사정관들은 점수를 매긴다. 대입의 당락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선생님의 글 솜씨에 의해 학생들의 당락이 좌우된다니 그냥 글쓰기가 아니다. 신경을 바짝 써야하는 어려운 글쓰기이다. 이런 격무는 대한민국에서나 있는 일이다.그래서 몇 해 전 해외토픽에도 오르기도 했다. 이후 교육부가 학생부의 공정성을 위해 글자 수를 줄이고 항목도 줄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학생부종합전형이 그대로 유지되는 이상 없어지지 않을 격무다.게다가 이것으로 학교 수업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삼겠다는 발상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그대로 유지될 격무이다. “누가 여기서 좀 구해주시오”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격무의 늪에 빠진 교사들을 다 외면하고 지나쳐 갈뿐이다.

2019-12-30

시울림이 있는 학교

김현욱 시인요즘 학생들이 가장 자주 접하는 매체는 책보다는 스마트폰 동영상과 모바일 게임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 틱톡과 같은 동영상 전문 앱과 범람하는 수많은 모바일 역할수행게임(RPG)들이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정보통신기술 시대에 우리 학생들은 무분별한 동영상과 현란하고 잔인한 게임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 이밖에도 영화, 텔레비전, 광고와 같은 휘황찬란한 동영상 매체가 우리 학생들의 삶과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이로 인한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긴 글을 읽지 못하고, 짧은 글이라도 맥락을 알지 못하며, 평소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고, 교묘하고 영악한 방법으로 친구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은따, SNS를 이용해 비방하고 험담하는 카따까지 우리 학생들의 영혼은 심각한 수준으로 병들고 있다.유년시절부터 청소년시절에 이르기까지 우리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혼을 고양시키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시와의 만남이다. 시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시의 아름다움을 통해 언어의 고귀함을 느끼며, 따뜻한 인성과 상상력, 창의력을 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류 문화의 정수다.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선행되고 바탕이 되어야 할 교육은 코딩이나 정보통신, 5G같은 기술이 아니다. 우리 학생들이 시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내면에 숨어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신헌재 교수는 “시를 감상하는 것은 낱말, 소리, 그리고 독특한 방식의 리듬, 창조적 언어 사용 방법들을 발견하게 하여 학생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고 하였다. 시는 늘 우리 삶을 노래한다. 시를 통해 학생들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통찰하며 경험을 확장시킨다. 시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 낭송(암송)과 시 쓰기이다. 윤여탁 교수는 “시는 시다워야 하며, 시는 읽혀야 한다. 또 시를 설명하면, 시는 다친다”고 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시를 재미없고 지루해한다. 잘못된 시 교육 때문이다. 신비평과 구조주의에 바탕을 둔 시 교육은 시의 비유, 상징, 운율, 함축된 의미를 설명하려고 하고, 학생들에게 그것을 찾아내게 한다. 학생들이 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시는 분석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자전거처럼 타고 달리는 것이다. 자전거를 칠판에 걸어놓고 분석하고 설명하고 문제풀이까지 하면 자전거를 좋아할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다. 활동 중심의 시 낭송(암송) 활동을 통해 시에 흥미와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는 그 자체로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즐거운 시 낭송(암송)과 삶을 가꾸는 시 쓰기를 ‘시울림’이라고 한다. 시를 낭송하면 몸이 떨린다. 시를 외면 영혼이 떨린다. 시를 쓰면 삶이 떨린다. 그리하여 떨림은 울림이 된다. 임종식 경상북도교육감이 ‘시울림 학교’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2019-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