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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교권보호, 교사 스스로는 안 되는 시대

조현명 시인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싸움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P선생님이 달려가서 지도하고 훈계했다.그날 오후 선생님에게 멱살이 잡혔다고 학부모가 학생을 데리고 와서 항의했다. 그 학부모의 눈에는 교사 모두가 다 자신의 아들을 멱살 잡은 깡패로 보이는지 소리 지르고 막무가내였다. 불려온 K선생님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결국 책임자가 CCTV 화면으로 확인해보자고 했다. 확인해보니 멱살은커녕 아무 일도 없었다.마침 그 방향 쪽으로 화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학부모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증거 앞에서는 사과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씁쓸하기도 하지만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미 사회에서는 교사가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낸 세금이나 등록금으로 월급을 받아가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체육 시간 후 씻고 온 얼굴과 손을 커텐에 닦는 것을 지도하는 선생님에게 ‘이거 우리 부모님이 낸 돈으로 산 건데 어떻게 쓰든지 선생님이 간섭하지 말아요’라고 하는 학생이 생겨날 정도가 되었다.학부모가 교권에 대해 침해하는 사건이 2018년 기준으로 210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한국교총 2019년 5월 발표). 그것도 드러나고 문제가 된 사건의 경우이고 앞에 적은 것처럼 사소하고 그냥 지나간 사건들은 훨씬 더 많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조사 발표에 의하면 학생들의 교권침해 사건은 2018년 기준으로 2천244건으로 역시 증가하고 있다. 교권 침해사건은 교육활동 부당방해와 상해 폭행이 가장 많고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가 다음 순이다. 성적굴욕감이나 공무방해, 협박, 손괴, 성폭력 등도 일어났다.세세한 사례들을 다 읽다보면 놀랄만한 내용도 많다. 그중 언론에서 온통 떠들썩했던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 만해도 도대체 2000년대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가 의아하기까지 하다.결국 대부분의 국민이 선생님을 존경하던 시대는 이미 끝나 버린 것이다. 사실상 그와 궤를 같이하여 가르침과 배움이 학교에서 끝나버린 듯하다. 그러나 교사를 존경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은 아직도 있긴 있다. 그 학생과 학부모들은 스스로 상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교사를 존경하는 학생이야말로 스스로 좋은 교육을 받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잘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깡패 쯤으로 여기고 자신의 노예처럼 여기고 하면 결국 스스로 깡패에게 배우는 것이고 노예에게 배우는 셈이 된다.해마다 교권보호주간을 시행하라고 공문이 오고 그래서 교사들로 하여금 교문에서 띠를 두르고 플래카드를 걸게 하고 캠페인을 하게 한다.그것은 교권보호를 교사 스스로 해야 한다 말하고 싶은 어떤 행정가가 만들어내었는지 모르지만 시대에 한참 모순됐다. 이제 교권을 교사 스스로 높여야 할 시대는 끝났다.학부모 학생이 막무가내이니 교원지위향상법과 교권침해에 대한 처벌을 더 심각하게 높이는 수준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이런 수준으로 가다가는 앞으로 교사, 공무원 기피사유 1번이 민원인들의 권리와 인격 침해가 될 것 같다.

2019-11-27

보리가 패는 교실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11월 말, 학생들이 분주하다. 몇몇 아이들은 필기도구를 들었고, 또 몇몇 아이들은 붉은 장갑을 꼈다. 간혹 장갑을 낀 아이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기도 했다. 아이들은 논쟁의 정석(定石)을 보여주었다. 한 아이가 문제를 제기하면 다른 학생들은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문제 제기가 끝나면 학생들은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묵언의 시간과도 같았다.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학생들은 먼저 눈으로 서로의 상태를 확인했다.그리고 대화 시작을 위한 동의를 구했다. 제일 먼저 동의를 구한 학생이 자신이 생각한 해결방법을 설명했다.말하는 어조에서는 성숙함이 풍겼다.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인들의 말하기와는 수준부터 달랐다. 공손한 자세로 상대의 입장에서 말하는 모습은 말하기의 정석이었다. 정석은 정석을 불렀다. 듣는 학생들도 말하는 학생의 생각을 공감하며 말하는 학생이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잘 듣는 것이 잘 말하는 것이라는 화법의 정석을 실천하였다. 훌륭한 논쟁은 협동과 협력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창출한다는 것을 학생들은 활동을 통해 스스로 체득했다.학생들이 그토록 공을 들이는 작업은 바로 교실에 보리밭과 밀밭을 만드는 일! 학생들은 지난 주 목요일 아침 보리와 밀을 심을 미니 텃밭을 손수 만들었다. 학생들이 아름다운 논쟁을 펼친 작업 단계는 흙의 높이를 정하는 부분이었다. 학생들은 보리와 밀의 뿌리를 생각해서 각자의 학급에 맞게끔 밭을 만들었다.학생들은 개성 있게 보리와 밀을 심었다. 과연 학생들은 무엇을 바라고 보리와 밀을 심었을까? 물론 학교 교육 프로그램으로 한 활동이지만 분명 학생들의 모습은 달랐다. 억지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학생들에게는 생명을 심는다는 경이로움만 있을 뿐이었다.11월 말, 학교는 참으로 혼돈의 시기이다. 입시에 성공한 학생들과 실패한 학생들이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시간. 유종의 미에 대한 배움과 실천보단 입시를 끝낸 학생들은 학교에서 방치되는 시간. 1학년과 2학년은 학기말에 몰아치는 수행평가와 곧 있을 기말고사에 영혼이 탈탈 털리는 시간. 유의미한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학교의 11월 말이다.잠시 시간을 내어 보리나 밀 등이 심겨진 학급 텃밭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보리가 심겨진 반에서 한흑구 선생의 수필 ‘보리’를 같이 읽어 보면 어떨까! 그래서 혹독한 겨울 같은 힘든 시기를 이겨내야 할 우리 학생들의 마음 밭에 인내와 희망의 보리를 심어주면 어떨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보리를 보며 가슴 뭉클해 하는 산자연중학교 학생들과 수필 ‘보리’를 읽는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의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해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

2019-11-25

오직, 책 읽어주기를!

김현욱 시인기해(己亥)년도 어느덧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12월은 갈무리하는 달이다. 갈무리는 정리, 저장, 마무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한국어 대사전 예문으로 ‘어머니는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의 갈무리 때문에 바쁘셨다’나 ‘갈무리를 제대로 못 하면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로 쓰인다. 12월은 ‘시작이 반이다’보다는 ‘석 달 장마에도 개부심이 제일’이라는 속담이 어울린다. 개부심은 큰 장마가 끝난 후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퍼붓는 비를 말한다. 아주 새롭게 하는 것을 뜻한다. 마무리가 중요함을 빗된 속담이다.올 한 해 ‘책 읽어주기’ 강의를 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선생님과 학부모와 아이들을 떠올려 본다. 지난주에는 경주 감포초등학교 학부모와 선생님을 만났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책 읽어주기 연수는 9시 30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쉬는 시간도 없이 책 3권을 읽어드렸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 고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집 한 글자 사전이 그 주인공이다. 언제나 그랬듯 책 읽어주는 시간은 순수한 웃음과 따뜻한 공감이 넘치는 시간이다. 책 읽어주는 시간은 재미와 감동, 눈물과 성찰이 촛불처럼 타오르는 시간이다. 자신과 타인과 가족과 세상을 동시에 발견하는 시간이다. 아, 이토록 소중한 시간을 함께한 그리운 이들에게 축복을!많은 부모가 자녀를 책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한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줄 안다. 그렇지 않다. 방법이 아니라 실천만이 있다. 집에 책이 많으면, 교실에 학급문고가 많으면, 학교도서관이 훌륭하면, 공공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면, 자녀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한 것뿐이다. 책이 많다고 도서관이 좋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읽어주기다. 뉴먼(Neuman)의 연구에 따르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생후 6개월 정도부터 낮잠을 잘 때나 잠자리에서 부모가 매일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 이야기에 대해 토의하는 활동을 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한다.부모와 교사의 책 읽어주기는 우리 아이의 리터러시(읽고 쓰는 능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집이나 학교에서 꾸준히 책 읽어주기를 경험한 아이들은 독해력과 어휘력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잠자리에서 엄마나 아빠의 품에 안겨 책 읽어주는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교실에서 매주 책 읽어주는 선생님의 눈빛과 목소리는 아이의 영혼에 그대로 아로새겨진다. 책 읽어주기는 우리 아이에게 햇빛을 쫴 주는 것과 같다. 생명수를 떠 먹여주는 것과 같다.막상 해보면 쉽지 않다. 책 읽어주기는 실천이 제일 어렵다. 강연장에서 만난 학부모와 교사들의 고충에 십분 공감한다. 퇴근하면 쉬고 싶다. 묵언하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꾸준히 책 읽어주기를 실천하는 위대한 부모와 교사들이 있다. 그들을 보고 힘을 내자. 우리도 할 수 있다. 오직, 책 읽어주기를!

2019-11-24

사는 데까지 살아있는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벼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파랗게 싹이 돋았다. 머지않아 닥쳐올 추위에 얼어 죽기 마련일 터인데, 물기가 조금이라도 있는 논마다 제법 생기롭게 자라나 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풀은 베어내면 금방 또 새싹을 낸다. 절기 따위 아랑곳없이 최소한의 조건만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벼 그루터기 뿐 아니라 풀을 깎은 논둑에도 때아니게 새 풀들이 자라고 있다. 식물이 생장을 하는 목적이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이라면 이런 늦가을의 새싹이란 한갓 무모하고 부질없는 게 아닌가.사람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수긍하는 교훈이다. 그래야 보다 가치 있고 보람된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목적도 없는 삶은 무의미한 허송세월일 뿐이라고 지탄한다. 맞는 말이다. 사회나 개인이나 발전하고 성취하려면 뚜렷한 목표와 굳센 의지가 필요하고, 거기에 부단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목표의 유무를 따지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어떤 목표를 갖느냐다.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이 될 것이므로. 보통은 남보다 많이 가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걸 출세라 하고 거기에 이르는 걸 성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열심히 태교를 하고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스펙을 쌓고 학업에 매진한다. 그러나 그것이 출세라는 목표에 도달할 확률을 높이는 건 사실이지만 해피엔딩까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드물지 않게 본다.소위 출세를 위해서 희생하고 쏟아 부은 것에 비해 성취감이나 만족도는 충분하지가 못한 경우가 많다. 더 많이 차지하고 보다 높이 오르기 위한 욕망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그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방송 드라마의 스토리가 대부분 그런 것이고 매스컴에 오르는 사건사고 대다수도 그런 범주의 일들이다. 근자에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어느 가족의 경우를 보더라도 삶의 목표 설정에는 올바른 선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인생의 목표에는 몸과 마음의 건강이 기본이라는 생각이다. 우선은 몸을 상하는 일을 말아야 할 것이고, 그것에 못지않게 마음(정신)의 건강도 챙겨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취미와 소질과 능력에 맞는 목표를 정하는 일이 바람직할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정신으로 성취한 것은 결국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늦가을 들판의 벼 그루터기에 돋아난 새싹들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또 다른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 삶이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란 것, 매순간 살아있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완성이라는 것, 그래서 대자연을 호흡하며 살아있는 데까지 살아있는 것이야말로 장엄한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살아서 내 몸에 와 닿는 햇볕과 바람과 눈비를 체감하는 일이 가장 절실하고 궁극적인 삶의 성취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차다.

2019-11-21

목련화 같은 내 인생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입시공화국인 이 나라 입시에 또 하나의 나이테가 새겨졌다. 선 굵은 나이테를 위해 찬란한 학생시절 전부를 시험에 바친 수험생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마음만 전한다, 제발 이 사회를 요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흥청망청하는 어른들을 흉내 내지 말기를!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진정한 성년의 길에 선 예비 사회인들이 더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한다. 그래서 나라를 참담하게 몰고 가는 구세대들을 견제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시험 만능주의에 빠진 이 나라의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변명 같지만 필자의 외침은 이제 공허한 메아리도 못 된다. 우리 사회의 중추인 수능을 끝낸 수험생들이 나서서 참혹했던 학교와 시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의미 없고 오로지 경쟁만 부추기는 시험의 폐단을 알려야 한다.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암기식 시험 때문에 학교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한다.그런데 필자는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지난 12년 동안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의 대부분이 시험을 위한 죽은 지식이라는 것을! 과연 학생들이 배운 것이 이것 말고 뭐가 있을까?자유롭게 주어진 시간 앞에서 몹시 당황하는 것이 우리 학생들의 현실이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과연 교사들 중에서 큰 시험이 끝난 학생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 아닌 삶의 지혜로 가르칠 교사가 얼마나 될까? 설령 그런 내용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가 해도 학생들이 마음으로 배우고 따를 교사가 있을까?학교교육의 불신의 정점은 수능이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는 순간 학생들은 더 이상 학교와 교사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동안 교사와 학생들을 연결해준 것이 수능이기 때문이다. 수능이 끝났다는 것은 학생들이 학교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수능 이후의 학생 생활지도가 불가능하다. 학교에서는 자신들이 학생들에게 한 짓은 모르고 학생 탓만 하기 바쁘다. 의미 없는 대학 탐방, 더 의미 없는 체험 학습은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만 더 키운다는 것을 교육 관계자들은 꼭 알아야 할 것이다.수능이 끝나면 언제나 수험생들을 위하는 글들이 홍수를 이룬다. 모두 좋은 말이지만, 정작 수험생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런 글들의 공통점은 학생들을 옭아맨 수능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은 없고, 무분별한 격려만 있다는 것이다.이 글도 그런 글이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홀로서기 앞에 망설이는 학생들을 위해 칠순을 넘기면서 새로 공부를 시작한 자친(慈親)께서 얼마 전에 쓴 시(박화자, ‘목련화 같은 내 인생’)를 졸업 선물로 전한다.“집 가에 서있는 목련화 한 그루 / 어느 날 아침 나를 부르는 듯 / 곱게도 피어 나를 반기더니 / 밤새 그만 꽃잎 끝이 다 말라 시들어져가네 // 가만히 눈 깜박하고 나니 / 세월의 흐름 따라 꽃 같은 내 앞날도 / 다 시들어져버렸네 //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오 / 슬기롭게 잘 받아들여 / 예측 못 할 남은 인생을 / 행복과 보람 찾아 즐겁게 보내보련다”

2019-11-20

떠날 때를 아는 것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번역학 전공이낙연 국무총리의 동생인 이계연 삼환기업 대표가 사의를 표명하였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두 차례나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삼환기업을 흑자로 전환하고 신용도를 제고하는 등 회사를 안정화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영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무총리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사퇴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삼환그룹 계열사의 기업 대표라면 연봉이 모르기는 몰라도 엄청날 터인데 용단을 내린 것 같다. 연봉이 아깝지는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아까운 생각도 든다. 솔직히 필자에게는 연봉이 얼마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하지만 형님인 국무총리나 사회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크지 않았을까? 아마 이 말이 떠올랐을 게다.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즉, 오이가 익은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않고,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않으려는 뜻일 것이다. 정치색을 떠나 잘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자. 한 마디로 깔끔하다.필자가 두 번째 떠올린 것은 바로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落花)’의 한 구절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요즘 우리 사회에는 염치없이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도 불구하고 가야 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그 때를 모르고 그 자리에서 버티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물러날 때에 제대로 물러나지 못하는 것은 권력욕과 자리욕심일 것이다. 그 자리에 있을 때 주어지는 여러 가지 특전, 영어로 ‘Perk’라고 한다. 한번 그 꿀맛을 보면 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기중심의 아집과 고집도 톡톡히 한 몫을 한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휩싸여 쉽게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기업인들은 물러날 때와 나설 때를 잘 안다. 기업의 언어는 회계이다. 차변과 대변으로 이루어지는 대차대조표, 아니 요즘에는 재무상태표로 바뀌었다. 재무상태표의 대차평균의 원리를 알고, 총수익에서 총비용을 빼면 손익이 나오는 손익계산서를 아는 사람들이 기업인들이다.세 번째로 내년 총선이 떠오른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새 인물, 정치신인을 영입하려고 애쓴다. 현역의원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바람몰이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지역구에 공천을 두고 신인의 참신함과 다선의원들의 경험이 충돌한다. 정치의 목표는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 게다. 국민의 행복 지수는 재무상태표나 손익계산서로 수치화하기 곤란하다. 그래서일까! 떠날 때를 잘 아는 정치인은 드물다.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으면서, 혈세를 낭비했다면, 어영부영했다면, 떠날 줄 아는 염치가 필요할 성 싶다.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 하지만 때가 되면 꽃은 다시 피고 달도 다시 차오른다.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이는 떠날 때를 알고 떠난다. 지금 가면 아주 가는 것도 아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 겨울이 오는 것을…. 어디서 무엇을 하든 국무총리의 동생이 아니겠는가? 이 사회가 공평한 눈으로 봐줄 수 있을까? 그의 건투를 빌어본다.

2019-11-19

진정한 자유학기제의 의미를 살리려면

조현명 시인막 교직에 들어온 한 여선생님과 자유학기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것을 잠시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체적으로 같이 동의했었다. 그런데 여자의 편에서 보면 남자들이 부럽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군대라는 인생의 자유학기제가 주어지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말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은 그때 가장 많은 고민과 자기성찰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고 제대 후 현실적이 되고 많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면 여자는?” 이란 질문에 “글쎄요. 굳이 말한다면 걸으면서 생각한다는 정도로 보면 될까요.”라고 말했다.중학교 1학년에 자유학기제가 도입 된지도 6년째가 되었다. 중학교 교육과정 중 한 학기를 학생들이 중간·기말고사 등 시험부담에서 벗어나 꿈과 끼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그에 따라 수업 운영을 토론, 실습 등 학생 참여 중심으로 개선하고 진로탐색 강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체험 활동이 가능하도록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운영했다.결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유지되어왔고 또한 자유학년제로 확대할 예정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먼저 취지에 맞으려면 고등학교에 도입되어야 하지만 대입이라는 큰 걸림돌 때문에 중학교에 편성되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자유학기제의 의미를 담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앞에서도 남자들은 군대에서나 진정한 자유학기제를 가진다고 말해지고 있는 걸로 보면 생각해볼 점이 있다. 남자가 군 복무하는 시기는 자신을 성찰하고 꿈을 말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감이 있기 때문이다.또한 중학교에 도입된 자유학기제는 일부 학생에게 매우 치명적인 학습기초부진을 낳고 있다. 최근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서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이 증가하고 있다. 기초학력 부진 학생들의 특징은 중1부터 자유학기제에 의해 학업을 등한히 한 것이 습관화되어버린 것이 큰 원인이다.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망하는 개인이 나온다는 말은 오래됐다. 혹 자녀가 자유학기제에 들어가는 중1이라면 기초학력이 부진해지지 않도록 학습습관을 놓지 않도록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다.졸업생들이 찾아와서 한 말 중에 가장 인상적인 말이 “인생 중 가장 중요한 시기를 들라면 고등학교 3년인 것 같아요. 3년 동안의 학업의 결과가 인생을 결정해버리니 말이예요”이다.그 말을 듣고 교사로서 반성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이미 학습습관을 갖지 못하고 기초학력부진으로 진학한 학생을 교사로서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는 무능함이 첫 반성 내용이다.또 대입이라는 목표 때문에 잠시도 여유가 없는 학생들에게 꿈과 끼를 살려보자며 토론대회를 열고, 수행평가에 찌들린 학생들에게 진로체험과 온갖 진로프로그램을 강요한 것도 반성이 됐다. 물론 대입제도와 학교교육과정이 그러니 일개 교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전술한 여선생님이 “걸으면서 생각했다”면 고등학생들에게는 “뛰면서 생각해”라고 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진정한 자유학기제의 의미를 살리려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설치해야 올바를 것이다.

2019-11-18

山行을 하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몇주 전 주말 가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듯 전북 장수군의 장안산(長安山)엘 올랐다. 평소 산을 좋아하며 산행을 무척 즐기는 편인데, 그 무엇에 저당 잡혀 이다지 뜸하게 산을 찾았는지, 상기된 풍엽(楓葉)들의 두런거림이 온통 밀어처럼 들리는데 말이다.산을 찾으면 고향처럼 푸근하고 어머니 품처럼 편안하다. 낮은 등성이건 험준한 고산이건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넉넉하고 한결같은 품새로 맞이한다. 철 따라 옷을 갈아입으며 신선한 공기와 향긋한 바람과 청아한 소리를 들려 준다. 생각이 번잡하거나 세파에 찌든 사람들은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씻기도 하고, 나무숲을 거닐며 차분하게 치유 받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땀방울로 산을 오르며 자신의 의지를 단련하기도 하고, 애써 정상에 오른 이들은 담담하게 성취와 희열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렇듯 산은 찾거나 오르는 사람들을 반겨 맞고 위무하며 늘 그 자리에 서있다.가을걷이가 끝나가는 산밭을 지나 어쩌다가 산행 초입부터 길을 잘못 들어 등산로가 없는 비탈로 접어들었다. 풀섶이 발을 휘감고 잡목이 앞을 가리니, 발길은 더뎌지고 연신 힘겨움만 더해갔다. 단풍에 젖어드는 순조로운 산행을 기대했건만, 예기치 못하게 길 아닌 험로를 헤쳐가야만 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 헤매듯 올라가다가 원래의 순탄한 등산로를 찾아 가까스로 정상에 이르게 됐다. 등산은 어쩌면 모험을 시도하는 청년의 패기같은 것이다. 고지를 향하는 다짐을 눈빛으로 아로새기며 단호하게 앞만 보며 내닫는 굳건한 발걸음이다. 그러나 무난할 것만 같은 산행도 의욕만 앞서고 준비나 방향에 착오가 생기면, 이처럼 시작부터 고난을 면치 못하는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버겁고 부치는 숨결로 산마루에 서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전경에 장쾌함이 솟아난다. 역경을 이겨내고 정상에 다다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땀의 결정, 중년의 성취, 환희 같은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쓰다듬고 너울너울 구름 꽃의 환호 속에, 저 멀리 덕유산, 지리산의 산세를 조망하는 것은 흔치 않은 불역쾌재(不亦快哉)가 아닐까!‘파도의 외침으로/안겨오는 저 물살/고원에 이는 격정/무리 지어 부신데/처연한 흰 손의 나부낌/가을날은 퍼덕인다’ -拙시조 ‘사자평에서’ 첫 수(1997)1천200m 고지의 장안산 동쪽 능선으로 하산하며 드넓게 펼쳐진 억새밭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이번 산행의 덤이었다. 무엇을 향하는지, 누구를 보내는지 긴 목을 뽑아대는 억새가 자꾸만 흔들어대는 건 아쉬움인가, 아우성인가? 온통 바람기에 취할 듯한 억새의 몸부림에 자신도 덩달아 취하며 그냥 가을에 빠져들었다. 이렇듯 정상에 올라 비우고 재우고 느긋한 걸음으로 하산하며 즐기는 것은 노년의 안도와 여유가 아닐까 싶다.짧은 하루의 힘겨운 산행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낀 알찬 여정이었다. 오르고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과도 비슷한 산행, 산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경외감으로 산을 즐겨 찾아야겠다.

2019-11-17

벌써와 아직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벌써 절반이 지났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절망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에 대한 얘기다.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지난 2년 반 동안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간이었다. 정부 시작부터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웠고 정의를 사회의 전 영역으로 확산시켰다’고 자평했다. 이런 평가에 대해서도 박수를 치는 사람과 어처구니없어 하는 사람이 극단으로 갈릴 것이다.한 나라 안에서 같은 사실을 두고 이렇게 극명하게 의견이 엇갈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단순한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이념이나 진영의 논리에 따른 골 깊은 반목과 적개심의 표출이라는 것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데에는 일차적으로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본인이 취임사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을 지지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사도 존중하는 것이 통치자의 기본적인 소임이다. 날로 변하는 국제정세의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의 힘을 결집하는 대동단결이 우선과제이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국론분열의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한쪽 편의 선봉에 서서 시종 증오와 적개심을 부추기는 역할에만 집착하는 것은 참으로 국가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지금 대한민국을 가장 위태롭게 하는 것은 국가 정체성의 혼란이다. 정권을 장악한 좌파 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공연하게 부정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전복을 기도한 전력에다 사회주의자임을 천명하는 사람을 법무부 장관의 적임자라고 믿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 사람이 저질은 다른 죄까지 수사하지 말라고 검찰청 앞에 몰려가 시위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자우민주주의 체제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체제를 견지해 왔기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기반을 다지고 성장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족한 것은 보완하고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면 되는 것이지, 혁명이니 개혁이니 내세우면서 모조리 뒤엎겠다는 것은 패망을 자초하는 구시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좌파정권의 모든 실책은 종북주의(從北主義)로 귀결이 되는 것 같다. 오로지 김정은의 눈치만 살피는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심리가 경제와 외교와 안보를 망치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합리나 법치도 통하지 않는 맹신과 집착이 있을 뿐이다. 며칠 전 동해에서 나포했다는 북한 어부(?) 두 사람을 몰래 북송하다가 들통이 난 사건도 그렇다. 그들이 제 입으로 다른 선원 열여섯 명을 죽이고 넘어 왔다는 말을 했을 리는 없을 터이니, 내통한 북의 주장과 요구에 따라 강제 송환했을 거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갖는다. 사람의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충분한 법적 절차와 심의도 거치지 않고 며칠 만에 비밀리에 넘겨준단 말인가.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는 헌법도 인권도 안중에 없는 것이 이 정권의 실상이다. 이런 정권의 임기가 아직도 2년 반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2019-11-14

“교육 독립 운동”이라도!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지금 교육은 정치에 교육 주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의 입맛대로 재단되어 지금은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괴기스럽게 변해버렸습니다.한 나라의 교육은 그 나라의 희망입니다. 교육은 그 나라의 국운(國運)을 책임질 일꾼을 키우는 국가대사(國家大事)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라의 희망이어야 할 교육이 오히려 나라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정치인들 손에 교육을 계속 맡겨둔다면 우리 교육은 희망과는 영영 결별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혼돈과 혼란, 갈등과 절망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희망이 부재한 교육의 최대 피해자는 우리 아이들입니다. 학교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자신과 나라, 나아가 세계의 밝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학교생활을 해야 할 학생들이 한줄 세우기 시험에 숨도 못 쉬고 있습니다. 정치판 교육시스템에 꿈을 저당(抵當)잡힌 채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이미 많은 아이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교육 당국은 통계 숫자로 학교 밖 청소년들이 줄었다고 하지만, 글쎄요?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말합니다. “여기가 어디야?” 필자에게 내민 휴대전화 화면에는 서울대학교 정문 사진이 있었습니다. 필자는 아이의 그 다음 말이 궁금했습니다. 혹시나 거기를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을 하며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내 친구들 정말 불쌍하다. 엄마들이 억지로 가자고 해서 지금 여기에 가 있대. 내 친구들 이제 초등학생밖에 안 됐는데도 서울대 가려고 학원 엄청 다녀. 아는 중학교 언니는 학원에서 벌써 고등학교 수학한대! 이거 너무 심하지 않아!”이 말은 결코 ‘SKY 캐슬’과 같은 입시 풍자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대사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정부나 교육청에서는 선행학습 금지법 등을 들며 학교교육과정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또 사교육 현황과 같은 신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치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학교 교육을 믿고 학교에서 자녀의 미래를 준비하는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심지어 교육계 종사자들도 입시를 위해 당신 자녀는 학원을 보내는 게 이 나라 교육 현실입니다.“그래서 어떻게 하자고?”라고 물으시면, 죄송하지만 저 또한 뾰족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편향된 정치 이념에 사로잡혀 이 나라 교육을 일류, 이류 등으로 나누는 어용 정치 교육 관료들을 교육계에서 내모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만큼은 대통령도 간섭할 수 없도록 초강력 법적 장치를 만드는 것입니다.인구 절벽으로 세계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이런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교육부터 살려야 합니다. 그 방법은 교육 독립 운동입니다. 그 시작은 정치인들에게 빼앗긴 교육 주권을 되찾는 일입니다. 교육이 정치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룰 때만이 우리나라에도 새로운 미래의 희망이 싹틀 것입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외칩니다. “정치인 여러분, 강탈해 가신 교육 주권을 돌려주세요!”

2019-11-13

지역 예술의 역사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며칠 전 포항문화원 전임 원장님이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2007년 제6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7대까지 8년간 포항문화원장직을 역임하셨고, 경상북도문화원 연합회장직을 겸직하기도 하며 포항과 경북의 전통문화 계승 발전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한 그의 타계 소식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지역문화 태동기의 애환을 비롯하여 문화도시의 미래에 대한 염려까지 열변을 토하시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라 이별의 아쉬움이 더욱 각별하였다. 생자필멸은 불변의 이치니 아무리 아쉬운 일이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도시의 문화예술을 지탱하던 든든한 기둥이 빠져버린 그 빈자리는 또 누가 채울 것인가?그와의 갑작스런 이별이 당황스럽기는 하나 예견된 일이기도 하였다. 2015년 건강에 이상 징후를 발견하여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이 ‘메르스’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질병으로 전국이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입원실에서 만난 그는 늘 그랬듯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으시고는 “염려했던 질환이 아니라 담낭 쪽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수술을 성공적으로 했으니 이제 아무 염려 없다”고 하셨다. 평소 남다른 건강을 자랑하셨고, 언제나 젊은 생각으로 청춘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으니 이별의 시간이 이토록 급하게 올 줄은 예상치 못하였다.원장님은 재임 중 지역의 언어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포항사투리 경연대회를 시작하여 큰 호응을 얻었고, 경북의 23개 시군문화원을 직접 탐방하며 문화원 발전 방안의 모색과 정보교환에 힘썼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책자 ‘경북문화’를 창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기품 있는 한복을 즐겨 입으셨고, 더러 화장도 멋지게 하셨으며 혼자서 영화관을 즐겨 찾기도 하는 낭만 넘치는 멋쟁이셨다. 문화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부지런히 참석하셨는데, 인자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문화계 대표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면 크게 화를 내셨다. 소탈한 성품이었으나 문화예술을 푸대접하는 일에 대하여는 준열하게 나무라시며 선진국의 경우 문화예술인에 대한 예우가 얼마나 극진한가에 대하여 자주 얘기하셨다.예술의 향기가 없는 도시, 그 삭막한 도시를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문화예술이 생기를 잃지 않도록 마음을 모으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는 일은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지난해 직전 문화원장님의 타계에 이어 지역문화 태동기의 주역들이 유명을 달리하는 일이 이어지니 포항예술사의 편찬을 더욱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예술사 편찬을 위한 예산편성을 몇 차례 요청하였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워도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문화예술 운동의 증인들이 생존해 계실 때 지역예술사 정립을 위한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포항의 예술사 편찬은 만시지탄이나 당연지사다.

2019-11-12

양궁과 복싱, 그리고 입시제도

서정목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의 양궁은 세계 최고이다. 과거 올림픽 양궁경기에서 한국선수들이 금·은·동메달을 모조리 차지하니 결승전에서 화살의 발수도 줄이고, 활을 쏘는 시간도 줄이고 갖은 꼼수를 부려서 한국의 독주를 막고자 했다. 그 무엇보다도 한국의 양궁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엄정한 선수 선발과정이다. 과녁에 맞은 화살의 수를 헤아려 선발하니 공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복싱을 보자. 복싱의 체급은 체중에 따라서 선수들을 구분해 놓았다. 보통 헤비급, 미들급, 웰터급, 라이트급 등 십여 개의 체급으로 나뉜다. 복싱에서는 체중이 곧 파워이기 때문에 체급을 무시한 복싱경기는 불공정하다. 그래서 체급별로 구분한 복싱은 그 과정이 공정하다 할 것이다. 80∼90㎏대의 헤비급 선수와 40㎏대의 플라이급 선수가 한 링에서 시합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나름 양궁은 양궁대로, 복싱은 복싱대로 공정하다. 과거 해방 직후에는 각 대학별로 입학시험이 시행됐다. 그 이후의 예비고사, 그리고 필자와 같이 386세대의 학력고사는 비교적 단순했다. 예비고사 시대에는 예비고사, 본고사를 병행하다가 예비고사와 내신 성적으로 신입생을 선발했다. 그 이후에 학력고사로 대체됐다. 1994년부터 실시된 수학능력시험은 대학별 본고사, 내신 성적, 면접, 논술 등으로 구성되고 각 영역의 채택여부, 반영비율, 그리고 평가방법 등은 대학의 자율로 운영되도록 하였다. 시대에 따라 입시제도는 변화해 왔다.오늘날 대학입학 전형의 종류와 제도는 너무 복잡해서 대학교수인 필자도 다 알 수가 없다. 그럴 수밖에 대학별, 지역별, 전공별, 시기별로 합종연횡하다 보면 기하급수적으로 그 종류가 늘어난다. 수시전형에서는 정시전형 이전에 내신 성적, 면접, 논술 등의 시험을 통해 입학생을 선발하는 방식이라면, 정시전형이란 일제히 치러지는 대학수학능력고사의 결과를 근거로 입학생을 선발하는 방식이다. 정시전형은 양궁에서 과녁에 적중한 화살의 수를 세는 것과 같이 본인이 득점한 순서대로 합격, 불합격을 가르면 된다. 가장 공정한 시험방법이다. 그래서 최근의 입시 불공정 문제와 관련해서 정부는 수능의 정시 비중을 확대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겉으로 정시전형은 공정해 보이지만, 고소득, 고학력 가구의 자녀가 수능점수를 잘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수시전형은 기회의 균등을 제공하고 자신의 특기, 소질,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잠재력을 개발하는데 장점을 지니기는 하지만 학종, 스펙, 평가 등과 관련된 각종 부정과 비리의 가능성이 크다. 양궁과 같은 결과의 공정, 복싱과 같은 과정의 공정을 기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입시제도는 없을까! 이 정부가 풀어야 할 큰 숙제이다. 동시에 두 가지 가치를 구현할 수 없다면, 향후 어느 방안이 4차 산업혁명시대에 더 부합되는 인재를 키울 수 있을 것인가도 고려해야 할 한 꼭지이다. 이웃 일본에서는 2019년부터 수능을 폐지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사회, 문화가 가장 많이 닮은 나라이다. 이들이 왜 수능을 폐지하는지,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 눈여겨 볼 일이다. 이유가 있을게다.

2019-11-11

모나리자

김현욱 시인관점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진다. 중국의 프랑스어학과 교수 우훙먀오와 프랑스 철학자 크리스틴 카욜의 동양인은 모나리자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에서 두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두고 서로 다른 관점과 해석을 주고받는다. 카욜은 ‘모나리자’를 보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떠올리지만, 우훙먀오는 ‘모나리자는 누구인가? 주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가 더 궁금하다.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서양과 개인보다는 집단의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의 가치관이 흥미롭게 충돌한다.‘모나리자’만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고, 가장 많은 예술의 대상이 되고, 가장 많이 패러디되는 예술작품도 드물다. 나는 ‘모나리자’하면 다 빈치나 루브르 박물관이 아니라 조용필의 노래가 떠오른다. 명화의 조건은 ‘가장 고귀한 미적 가치를 제공하는 작품’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상징’이라는 관점에 동의한다. ‘모나리자’만큼 스토리텔링이 많은 그림도 드물다. 어쩌면 그 많은 스토리텔링 덕분에 유명해진건지 모른다.1911년 8월 22일,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2년 뒤에 범인이 잡히는데 놀랍게도, 청소실에서 숨어 있다가 외투 속에 숨겨서 갖고 나왔다고 한다. 범인은 루브르의 직원이었던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였다. 그 일로 루브르 박물관을 비판하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파블로 피카소까지 조사를 받는다. 페루자는 이탈리아 그림을 이탈리아에 돌려주기 위해 그림을 훔쳤다고 주장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이 일로 피해 본 사람이 없다. ‘모나리자’는 더욱 유명해졌다.”는 페루자의 변론이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이후에도 ‘모나리자’를 향해 황산과 돌멩이, 페인트, 도자기가 날아들었다. ‘모나리자’는 그야말로 수난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우훙먀오처럼 ‘모나리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일반적으로 피렌체 상인 조콘도의 부인 리자(Lisa)라는 설이 우세하지만, 다빈치의 어머니 카테리나, 동성 애인 살라이, 다 빈치 자신이라는 설도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모호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스푸마토 기법 때문이다. 스푸마토는 ‘연기’라는 이탈리아어 ‘푸모’에서 나온 말로 연기처럼 영역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미묘하게 처리하는 기법이다. 다 빈치는 ‘모나리자’를 1503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성했지만 이후에도 여러 번 덧칠했다고 한다.원병묵 성균관대 교수는 “스푸마토 기법은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를 만들어 주지만 결과적으로 이 기법을 쓸수록 얼굴 피부가 갈라지는 크랙 현상을 피할 수 없다. 스푸마토 기법의 숙명은 아름다움을 영원히 가꾸고 싶지만 노화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과 닮았다”라고 썼다.사연 많은 ‘모나리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유명해질 것이다. 사연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스토리텔링으로 가득 찬 인생이라면 괜찮지 않은가!

2019-11-10

가을의 시정(詩情)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가을은 시정이 넘치는 계절이다. 매연과 소음과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서나 시적 정취를 자아내는 사물들을 만나게 된다. 숲길에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햇빛이 투과하는 영롱한 빛깔의 단풍잎과 그 사이로 내다보이는 에메랄드빛 하늘, 서늘한 바람이 불 때마다 나비 떼처럼 팔랑거리며 내리는 낙엽들, 마지막 생기를 다해 피어있는 가을 풀꽃들…. 가을의 단풍과 풀꽃은 화사하고 청초해도 어딘가 모를 우수 같은 게 배어있다. 머지않아 닥쳐올 한파를 앞둔, 그러니까 이별을 예감하는 표정이 엿보여서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계절엔 낙엽 지는 공원 벤치에라도 앉아 시집을 읽는 것도 멋과 낭만을 누리는 일일 터이다.“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습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습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레미 드 구르몽 ‘낙엽’가을이면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시다. 낙엽이 지는 가을에도 이 시 한 구절을 읊조려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정서가 메마른 사람일 것이다. 낙엽이야 한갓 무정물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묻어있다. 시몬은 여자의 이름이라는 것, 평론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구르몽은 물론 남자이고, 젊어서 얼굴에 난 상처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칩거하다시피 살았다는 것 등이 이 시를 따라다니는 일화다.이 시를 옮겨 적기 위해 서가에서 찾아낸 시집은 1965년에 발행된 ‘잊으려도 못 잊어’라는 제목의 시선집이다. 장만영 시인이 각국의 유명 서정시들을 골라서 실었다. 이 시집에는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란 시도 있다. 가을이면 구르몽의 ‘낙엽’ 못지않게 애송되는 시다. 베를렌은 시인 랭보와의 비극적 결말의 동성애로도 유명한데, 그 때문에 아내와 자식이 떠나고 말년에는 침침한 뒷골목 습한 셋방에서 폐병을 앓다 죽었다고 한다.“가을날/ 비오롱의/ 가락 긴 흐느낌/ 사랑에 찢어진/ 내 마음을/ 쓰리게 하네.// 종소리/ 울려오면/ 안타까이 가슴만 막혀// 가버린 날을/ 추억하며/ 눈물에 젖네.// 낙엽 아닌 몸이련만/ 오가는 바람따라/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이 몸도 서러운 신세.” -폴 베를렌 ‘가을의 노래’가을은 이별과 추억과 우수의 계절이다. 보내야 할 것은 보내고, 그리운 것은 그리워하고, 쓸쓸히 혼자 걷는 것도 좋으리라. 아니면 단풍과 노을빛을 따라 불그레 취흥에 젖어 스스로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은 어떤가.“가을볕에 불콰하게 산자락이 취했다./ 석양 하늘 지나가던 구름도 취했다./ 그 취기 따라가려고 술잔 거푸 기울인다.”-졸시 ‘단풍’

2019-11-07

11월 편지 - 잊힌 길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길은 이야기 박물관이다. 이야기 종류에 따라 길의 종류도 나눠진다. 이야기가 풍성한, 또 이야기를 잘 보존하는 나라일수록 길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 길을 따라 행복한 이야기들이 문화로 재탄생하고, 그 속에서 사람은 다시 더 행복한 이야기를 낳았다.우리도 얼마 전 길이 붐처럼 일어난 적이 있었다. 올레길을 시작으로 해파랑길, 금강숲길, 지리산 둘레길 등 지역마다 길에 대한 이야기를 찾고, 그 길을 복원하기 위해 전력투구를 하는 이야기들이 뉴스의 일면을 차지하였다. 길이 복원 될 때마다 사람들은 거대한 파도를 이루어 길을 휩쓸었다. 여행사들도 앞 다투어 여행상품으로 길을 꼭 넣었다. 길의 르네상스 시대였다.어떤 길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갈 수도 없었다. 사람들의 열기에 길 주변에는 상권이 형성되었다. 그 상권을 따라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열었다. 길은 많은 이들에게 큰 희망을 선물하였다.그런데 지금은?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해도 길에 대한 그 뜨거웠던 열기는 한나절의 꿈보다 더 빨리 식어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쇠락은 융성보다 더 큰 허무함을 남겼다. 길과 주변시설들은 사람들의 무관심에 흉물로 변해가고 있다. 완전한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상처투성이가 된 길은 그래도 인간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할 시간조차 아까운 것을 아는 길은 부지런히 자연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필자는 지난 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2019 청소년 비즈쿨 페스티벌 참석차 광주에 있었다.도전정신과 창조적 문제해결력으로 대표되는 기업가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기에 잠시나마 혼탁의 도가니인 이 나라 실정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기상천외 한 아이디어와 적극적인 판매 전략으로 무장한 학생들의 모습은 분명 르네상스 중심에 섰던 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그냥 좋다!”라는 말을 필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이라는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도 그냥이라는 말이 조건 없이 좋을 때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뭔가에 몰두해 있는, 생기 넘치는 학생들을 볼 때이다. 필자는 청소년 비즈쿨 행사장을 활보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그냥 좋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육이 뭔지를 다시 생각했다.그런데 그 모습도 잠시였다. 행사가 끝나는 토요일 오후 그렇게 생기 넘치던 학생들은 바람 빠진 풍선인형으로 변했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와 마음이 먹먹했다. 필자는 며칠 간 행복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분명 꿈과 현실 속 등장인물은 같은데 표정은 완전히 반대였다. 누가 저 아이들의 힘을 빼는지 미안했다.폐장을 앞둔 부스에 혼자 앉아 있는 필자에게 건너편 부스에서 행사 기간 내내 종횡무진 했던 학생이 찾아와 인사를 했다. “선생님, 내년에 꼭 다시 뵐게요! 감사했습니다.” “그래, 너도 네가 보여주었던 활기참을 잊으면 안 된다. 내년엔 더 씩씩하게 보자!” 아이는 특유의 유쾌한 웃음을 남기고 행사장을 떠났다.필자는 이 나라 모든 학생들이 무의미한 교육에 짓눌려 각자의 길을 잊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2019-11-06

질투와 포용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며칠 전의 일이다. 늘 생글생글 웃으며 밝음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후배 한 명이, 다짜고짜 전화 와서는 팔공산 단풍 구경이나 가자고 했다. 직감적으로 또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사연인즉슨, 사내 새 프로젝트를 같이 한 팀원들끼리 언제 회식하기로 한 모양인데, 잘나가던 후배만 쏙 빼놓고 나머지 팀원들끼리 카톡방을 만들어 서로 회식 날짜를 조율하더란 것이다. 한 명이 주도해서 이루어진 일인 데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늦게 초대를 받긴 했지만, 암튼 과정을 다 알고 나니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는 것이다.예전 같으면 선배랍시고 알게 모르게 네가 혹 미운 짓 한 게 없느냐고 다그쳤을 법했다. ‘인(仁)이란, 마치 활쏘기와 같다. 활 쏘는 사람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우고 활을 쏘는데, 활을 쏘아 적중 못시키면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 않고, 도리어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을 뿐이다(仁者如射 射者 正己而後發 發而不中 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矣)’라는, 맹자 공손추의 한 구절을 들먹거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가 잘못한 것이 없다 하고, 심지어 얼마 전엔 파격적인 승진과 보너스까지 받아서 멋진 식사까지 팀원들을 대접할 때만 해도 다들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러니 본인이 더 당황스럽다고 했다.그 순간 문득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떠올랐다. ‘남의 고통을 함께 슬퍼해 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남의 성공을 진심 축하해 주기 위해서는 남다른 인격이 필요하다’라는. 사실 그렇다. 본인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어느 순간 상대가 저를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거리를 두면 그것은 100% ‘질투’일 가능성이 크다. 질투는 ‘내’가 갖거나 가져야 하는 것을 ‘네’가 갖고 있다는 데 대한 불편함, 곧 결핍의 감성이다. 그렇기에 질투를 하면 할수록 그것은 ‘나’의 결핍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일이 될 뿐이다.이와 관련해 이이가 쓴 김시습전에는 재미난 일화가 하나 전한다. 어느 날, 당시 국사(國士)로 칭송받던 서거정이 조정에 들어가려고 앞길의 잡인들을 물리칠 때였다. 거지같은 차림의 김시습이 갑자기 ‘剛中(서거정의 字)아! 너 요새 편안하구나’하며 백성들 앞에서 어릴 적 친구였던 서거정을 무안케 하였다. 그러자 서거정은 화를 내는 대신 도리어 웃으며, 수레를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니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내용이다.5세 신동이라 불리며, 후에 금오신화를 창작해 고소설사의 한 획을 그은 유명한 문인이었건만, 안타깝게도 큰 벼슬길엔 오르지 못한 김시습의 질투도 재미있지만, 이를 분노나 응징이 아닌 웃음으로 응대한 서거정의 모습도 대단히 인상깊다. 그의 이러한 대인배적인 마음이, 아마 세종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여섯 왕을 모시면서 파란만장한 정국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동력은 아니었을까?만일 살면서 질투와 질시의 대상이 된다면, 결핍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감성에, ‘분노’ 대신 서거정처럼 따뜻한 ‘웃음’을 지그시 한번 보내보면 어떨까? 아마 우리네 삶에서 스트레스가 절반은 확 줄어들지도 모를 일이다.

2019-11-05

학교 진로상담에 대한 오해와 현실

조현명 시인흔히 학교에서 진로상담은 전문상담과 같은 범주의 상담일 것이라고 오해를 받는다. 상담이란 단어 때문에 같은 것이 아닐까 치부되기도 한다.그러나 먼저 상담의 대상부터 다르다. 전문상담은 불안과 우울 혹은 정서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내담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로상담은 아직도 진로를 정하지 못했거나 정했어도 성숙하지 못한 내담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다. 게다가 출발점도 미묘하게 다르다. 전문상담은 내담자에게 말을 많이 하게 유도해서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밖으로 내어놓게 하는 게 출발점이다. 그것으로 자신을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진로상담은 역시 자기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자기이해는 깨달음과 성숙이라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라 오랜 기다림과 특별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내담자의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준다 해도 그 시간동안 깨달음과 성숙이 일어나기 힘들므로 별 진전이 없는 상담이기 쉽다.성숙하지 못한 학생에게 계속 진로상담을 하는 일은 전문상담보다 훨씬 뜬구름을 잡는 일이다. 그 학생이 직업을 가지는 때가 되어야 비로소 무언가 깨닫고 성숙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자욱한 먼지 같은 안개 속에서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직업을 가지더라도 깨달음과 성숙에 이르지 못한 경우도 있을 텐데 결과를 후회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진로상담은 ‘내담자에게 언젠가 다가올 깨달음과 성숙을 기다리며 같이 고민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요즈음 학교에서 진로상담은 진학상담에 더 치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과정보다 결과에 초점을 맞춘 상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학생의 깨달음과 성숙에 맞추어지는 순수한 진로상담은 찾아보기 어렵다.왜냐하면 내담자가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내담자의 부모나 주변 또한 그런 것은 상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대학입시설명회에 몰리는 학부모 학생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특별한 정보나 학습방법들이 진로상담의 주 내용이 되었으면 바라고 있다.최근 대통령의 국회 연설로 시작해서 교육부가 대학입시에서 정시전형을 확대하고 학생부종합전형의 공정성 확보하는 방안 등을 11월 중 발표하기로 예정하고 있다. 이렇게 대학입시가 바뀌게 되면 진로상담과 진학상담 부문은 다시 요동친다.그러면 나는? 내 아이는? 이것이 학생과 학부모가 요구하는 진로 진학상담의 내용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내 자녀에게 어떤 깨달음이 있는지? 그건 어떻게 올 수 있는지? 깨달음이 찾아온 사례가 어떤 게 있는지? 진로성숙도는 어느 정도인지? 진로성숙도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한 진로상담의 중요한 핵심의 필요성은 사라져버린다.이런 현실에서 학생들의 깨달음과 성숙을 관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진로를 설계하게 한다는 학교 진로상담의 목표는 허상이다. 전문상담과의 오해와 잦은 입시정책변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교육풍토에서 학교 진로상담과 그것을 담당하는 진로전담교사 제도는 결국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2019-11-04

‘소리’의 추억, 시심이 흐르는 거리

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 낡은 문집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소리’라는 제목의 14쪽 분량 얇은 책자였다. 발행일이 표기돼 있지 않아 기억을 더듬었더니, 1980년 후반 포항의 풍경과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손글씨에 편집은 투박하지만, 순정이 배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역의 전설, 포항의 찬가, 동명 알기, 유물과 유적을 찾아, 시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소리’는 서점 등에 무료로 배포됐다. 발행인은 20대 초반의 제철소 직원으로 필자보다 세 살이 많았다. 눈빛은 맑았고, 언행은 단아했다. 시를 잘 썼고, 해구식당 같은 선술집에서 선배 문인들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 그와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문학이 인연의 매개였던 것은 분명하다.심부름 삼아 ‘소리’를 들고 학원사, 경북서림, 종로서적 같은 중앙상가 서점에 배포하러 다녔던 기억이 어슴푸레하다. 지금 중앙상가에 서점이라곤 학원사뿐이지만, 당시엔 시민극장 앞에 종로서점이 있었고, 대로변 버스정류장 앞에는 경북서림이 손님들로 북적였다.‘소리’는 10호까지 나왔다. 그와의 만남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따금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추억으로 묻어두고 말았다. 한참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공장 작업복을 벗고 서울의 한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대학에 강의를 나가며, 번역 공동체와 영문학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다고 한다. 지인을 통해 올해 첫 시집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시집을 펼쳤더니 이런 말을 남겼다.“내 삶이 시가 된다고 자신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여전하고 뭐 그리 드러낼 만한 삶도 아니다. 그러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같이 툭툭 차이는 그런 무수한 삶 없이 세상 있을까. 그런 나와 내 이웃들의 삶에서 나오는 숨결 같은 시가 되기를 바란다.”낙엽이 뒹구는 중앙상가의 밤길을 걸으며 스치듯 지나간 한 사람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자문해보았다. 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 혼탁한 세상에 ‘나와 내 이웃들의 삶에서 나오는 숨결 같은 시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시심이 떠올랐다. 그 시심은 30여 년 전 그를 만날 때 내 마음에 무늬져 있던 것이다. 그 순수한 시심이, 그와 ‘소리’를 잊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중앙상가에는 오래 전부터 시심이 흐르고 있었다. 1950년대 말, 청포도다방을 무대로 이명석, 한흑구, 박영달 선생이 문화계를 이끌었고, 손춘익 선생이 그 뒤를 이었다. 의사인 빈남수와 최동하도 힘을 보탰다. 다방과 카페에서 시낭송회와 시화전, 회화전이 열렸고, 왕대포, 해구식당에서는 예술인들의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길게 보면 ‘소리’의 명멸도 이 흐름 속에 있었던 것이다.이제 누가 이 쓸쓸한 거리에 시심이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지만, 시심 없는 거리에 사람다운 삶이 깃들 수는 없지 않은가. 시나브로 깊어가는 가을, 그 궁핍한 시절에도 맑게 빛나던 시심이 거리에, 우리들 마음에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2019-11-03

이상(理想)과 현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를 이상(理想)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같을 수는 없을 터이니 저마다 꿈꾸는 이상향(理想鄕)도 다를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의 천국과 불교의 극락이 이상향일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재물과 권세, 명예, 건강 등이 다 충족되어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를 낙원(paradise)이라 할 것이다.하지만 그런 이상의 실현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천국이나 극락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종교인들이 얼마나 될 것이며, 이 땅의 낙원에서 살고 있다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불가에서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하고 기독교 역시 타락한 인간들의 죄악과 고통이 만연한 세상이라 한다. 이상이란 한갓 실현가능성이 없는 신기루 같은 게 아닐까.그럼에도 ‘꿈과 희망’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자 인류 역사의 원동력이었다. 인생이란 판도라 상자에서 나온 온갖 재앙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하나 희망 때문에 인생은 살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꿈과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삶과 세상을 긍정한다는 것이고,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된다. 그래서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철학자 키엘케골의 말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희망 역시 욕망의 일종이지만 맹목적이거나 무분별한 욕망과는 다르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욕망이라야 희망이라 할 수가 있다. 불의한 욕망이나 탐욕은 희망보다는 절망에 이르는 길이 된다.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열정과 욕망으로 많은 것을 이룬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것을 자주 본다. 그들의 그토록 강렬한 바람은 그러니까 희망이 아니라 욕심이었던 것이다.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상은 이상일 뿐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희망은 무모하고 부질없는 꿈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진선미에 대한 희망은 그 자체로 삶의 긍정과 활력이라는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기쁨과 보람이란 바라던 것을 성취했을 때 얻는 마음의 보상일진대, 꿈과 희망이 없는 곳에는 기쁨과 보람도 없을 터이다. 또한 꿈과 희망이 다 실현되어 더 이상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를 과연 낙원이라 할 수 있을까.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는 말도 있고,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도 있다. 꿈이라고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이란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지만, 그것이 헛된 망상이거나 그릇된 욕망이어서는 오히려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예술과 종교는 이상을 좇지만 정치는 보다 현실적이어야 한다. 사회, 경제, 문화, 종교, 예술 등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을 총괄해야 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는 이상주의자이기보다는 현실주의자라야 하는 이유다. 모든 개인의 꿈과 희망까지도 현실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 정치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치적 이념과 이상으로 나라를 망칠까 우려한다.

2019-10-31

대학서열화를 부추기는 대통령과 정부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정말 제발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필자는 교육개혁만큼은 제발 당·정·청이라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침범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했다.그런데 현실은 언제나 필자의 기원과는 반대로 움직인다. 공정이라는 말에 갇혀버린 대통령과 그의 사람들이 국민을 핑계로 교육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틀 안에 가두고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뉴스 제목이 있다. ‘특목고 일괄폐지’ 고교 평준화로 방향 잡은 고교서열화 해소! 고교서열화가 왜 생겼는지 대통령은 정말 모를까? 교육 붕괴의 주범은 대학서열화인데, 왜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할까?사회 모든 분야 중에서 가장 순수해야 할 분야는 교육이다. 어느 나라든 학생들이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따라 그 나라의 미래가 결정된다.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국민들의 삶의 질도 높고, 더불어 국가의 미래도 밝다. 반대 이야기 또한 항상 참이다.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안타깝게도 당연히 후자다. 학생들의 교육행복지수는 늘 세계 최하위이다. 그러기에 국민들의 삶의 질 또한 높지 않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출산율이다. 출산율 0%대! 출산을 포기한 사람들은 “희망은 없고, 오로지 소모성 경쟁만 존재하는 이런 끔찍한 사회에 아이를 살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불행한 삶은 우리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 어떤 부정도 할 수 없다.나라의 희망이어야 할 교육이 해가 거듭될수록 절망의 축이 되고 있으니, 출산율 0%대가 아니라 출산 수 0명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최근 결혼을 하거나 결혼을 앞 둔 지인들은 필자의 이런 슬픈 예감에 대해 증인으로 자처하고 나섰다. “선생님 도저히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지금과 같은 교육 환경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를 좋아하던 제자의 말에 필자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대통령이나 정치인 교육부 장관은 이런 사정을 알기나 할까? 일개 범부인 필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돌아가는 교육 이야기는 만담(漫談)보다 더 웃기다. 대학 입시가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정상적인 국민 여론 수렴 한 번 없이 대통령 말 한 마디에 대입제도를 바꾸겠다고 우왕좌왕하는 이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대입 무시험 전형”을 그렇게 외치던 이해찬 대표는 왜 다음과 같은 대통령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정시가 능사는 아닌 줄은 알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라는 입시 당사자들과 학부모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대통령은 능사가 아닌 줄 알면서 왜 이 나라 교육을 더 혼돈스럽게 만들까? 0교시 부활 등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혼란을 예상 못하는 걸까? “수능성적 비관 자살”이라는 안타까운 뉴스가 벌써부터 들리는데, 오로지 총선에 목매달고 있는 당정청 사람들에겐 남의 일인 것 같다.“당정, 수도권 대학 정시 확대 검토”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대학서열화를 더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또 이 말은 학생들을 입시 지옥으로 몰아넣겠다는 것이다. 정말 대통령의 악수(惡手)가 이번에도 꼭 거둬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9-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