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아무것도 안하기

류영재포항예총 회장올해의 추석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직장에 매인 몸이 아니니 평일이나 휴일이나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휴일에는 쉬는 편이다.그동안은 깜냥에 비해 많은 일을 했던지, 아니면 이제 체력이 좀 떨어질 나이가 되었는지 휴식도 일삼아 해주어야 뒤탈이 없다.이번 추석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했다. 넋 놓고 TV를 보다가 졸리면 잠자고, 잠자다 일어나면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잡초를 뽑기도 하고, 자잘한 돌멩이를 걷어차기도 하고, 공활한 가을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또 있다. 띠 동갑인 막내 동생이 와서 2박3일 동안 두런두런 옛날이야기도 했고, 마을길을 걸으며 들판의 코스모스도 함께 보았다. 막내는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나를 오빠이자 아버지처럼 따랐는데, 몇 해 전 담낭에 심각한 이상이 생겨 생사를 넘나드는 모습을 손수무책, 그냥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기억에 더욱 마음이 애틋하다. 막내는 같이 놀자고 보채는 두 마리 키 큰 멍멍이들과 공 던지기 놀이도 했고, 나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막내는 나와 같은 개띠지만 덩치 큰 개 두 마리를 무서워하였으나 그들의 줄기찬 꼬리질에 넘어가서 ‘개 고모’가 되었고, 집으로 돌아가서 도착 안부도 개안부가 먼저였다. 개보러 자주오라니 대답이 걸작이다. “개 보러 갔다가 오빠도 잠깐 보고.”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안한 게 아니라 그동안 허겁지겁 정신없이 사느라 못하던 것들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지친 심신의 휴식을 위하여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이라야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하루에 10분 남짓 시간동안 혜민 스님의 명상안내에 따라 가는 것이 고작이다.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명상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 편안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함께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것이며, 편안하게 숨 쉬며 존재를 자각하는 일이다.18일차 명상의 주제가 ‘아무것도 안하기’였다. 혜민 스님은 한결같은 편안한 목소리로 오늘은 특별한 일 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어가는 날이라며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얘기를 하셨다. 플럼빌리지는 명상을 오랫동안 가르친 틱낫한 스님이 만든 수행공동체로, 이곳에 가면 나이나 성별, 종교, 인종 등을 초월하여 다 같이 모여 앉아 명상수행을 한다.여기서 스님이 인상 깊었던 것은, 스케줄에 맞추어 열심히 명상 수행을 하다가 일주일에 하루는 ‘레이지 데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게으른 날’이다. 그날은 정해진 스케줄 없이 쉬던지 잠을 더 자고 싶으면 자도 되는 날이다. 틱낫한 스님은 내 몸과 마음에 좋은 명상도 적당히 쉬어가면서 해야지 너무 열심히 하려고만 하면 중간에 지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게으름의 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정말로 현명한 생각이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독으로 변하는 법이니까.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게으른 시간을 가져볼 일이다. 편안하게 숨 쉬고, 편안하게 내쉬고….

2020-10-12

조화로운 삶의 기술

김현욱시인세계적인 위빠사나 명상 지도자, 고엔카는 조화로운 삶의 기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로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고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평화와 조화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며, 사심 없는 사랑, 연민, 타인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함, 평정심으로 가득 찬 완전히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는 최상의 행복을 향해 나아가면서 나날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조화로운 삶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부조화의 원인을 발견해야하는데 원인은 항상 각자의 내면에 있다.위빠사나는 긴장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뿌리 깊은 집착이 있는 곳까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구조를 탐구하도록 도와준다. 자신의 실제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신과 육체의 모든 본질을 경험하고 나서야 정신과 물질 너머에 있는 궁극을 알 수 있다.그 시작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왜 호흡일까? 낱말, 주문, 형상, 특정 상황과 같은 대상은 더 강한 상상과 환상을 요구한다. 어떤 단체에서는 부수고 죽이는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데 이는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고엔카는, “호흡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의 길에서 모든 발걸음은 종파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합니다. 호흡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호흡은 알고 있는 것에서 알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호흡은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으며, 의도적일 수도 있고 자동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육체적 기능이기 때문입니다.”호흡은 본질적으로 마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걱정과 근심, 흥분과 분노로 가득 찬 마음 상태가 되면 호흡은 거칠고 빨라진다. 번뇌가 사라지만 호흡은 다시 차분해진다. 이처럼 호흡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관찰, 탐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대상이다.알다시피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못하고 항상 다른 대상으로 떠돌아다닌다. 마치 원숭이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듯이 말이다. 마음은 그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 못한다. 끊임없이 배회한다. 문제는 항상 마음이 과거 아니면 미래에서 헤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마음의 습성 때문에 우리는 후회와 불안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수행의 첫 걸음은 지금 이 순간 코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통해 현재에 마음을 고정할 때 시작된다. 지금, 여기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마음은 늘 무지, 갈망, 혐오로 덮여 있다. 환상, 망상, 갈망, 집착, 혐오, 미움으로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고통은 시작된다. 이러한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은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호흡에 마음을 완전히 집중한 순간, 순간들이 길어지면 마음의 습성을 바꿀 수 있다. 코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 현재를 알아차리면서 반응하지 않고 오로지 관찰하는 것으로 마음은 조금씩 깨끗해진다. 조화로운 삶의 기술을 배우는 첫 걸음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조용히 앉아서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시간을 가져보자.

2020-10-11

어게인 없는 교육청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여러분, 우리는 지금 별의별 꼴을 다 보고 살고 있습니다.”이 말은 모 방송사에서 추석 특집 방송으로 제작한 언택트 공연에서 주연 가수가 한 말이다. 공연 이후 반응이 놀라워 필자는 스페셜 방송을 보았다. 공연 기술도 기술이지만 교육계에서는 안 된다고만 하는 비대면 시대에 언택트 문화를 선도하는 모습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그리고 그 가수가 공연 사이 사이에 하는 말을 들을 때는 자리에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다.대표적인 말이 첫 문장에 적은 말이다. 그 말을 하는 가수가 너무 멋있었다. 아니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다. 특히 대한국민을 외칠 때는 눈물이 났다. 무엇보다 국민이 “대한민국 어게인”을 외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준 것에 존경심이 우러났다.방송을 보는 내내 필자는 여러 가지를 메모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칠 수 없었고, 그의 말과 가사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필자의 감정을 그냥 휘발되게 둘 수 없었다. 하지만 메모가 쌓이면서 메모 양은 급속도로 줄었다. 반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은 마음을 넘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의 감정이 전체 감정을 지배하였다. 그 마음은 다름 아닌 죄송함이었다. 필자의 메모는 결국 다음 이야기에서 멈췄다. 표준어로 잠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살다 보니 세월은 그냥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이왕 세월이 가는 거 끌려가지 말고 세월의 모가지를 꼭 비틀어 끌고 가야 합니다. (….)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면 세월한테 끌려가는 거고 (….) 안 하던 짓을 해야 (….)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 끌고 갑니다.”그가 대한민국 어게인을 외치는 힘을 필자는 이 말에서 찾았다. 끌려가면 안 된다는 그의 문제 인식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안 하던 짓을 해야 한다는 그만의 창의적 문제 해결 방법은 분명 별의별 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나라를 다시 세우는 힘이 될 것이 확실했다.필자가 죄송한 이유는 다른 사회 분야는 그래도 이 힘을 가지고 세상을 개척해가고 있지만, 정녕 이 힘이 가장 필요한 교육계에는 이 힘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안 하던 짓을 창의적으로 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정신을 가르쳐야 할 학교지만, 이것을 가르칠 교사가 없다.교사 편하자고 만들어 놓은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은 소위 말해 교사에게 찍힌다. 찍힌 학생의 학교생활이 어떨지는 설명을 안 해도 잘 알 것이다. 학생들은 찍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틀에 자신을 가둔다. 그러면서 또 틀에 갇힌 어른이 된다.이는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가 교육청과 교육부에 전화할 때마다 듣는 소리가 있다.“다른 교육청도 안 하는데 우리가 왜 합니까? 우리도 바꿔야 하는 걸 잘 알지만, 교육부 지시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안 해도 되는 걸 왜 굳이 하려고 합니까!”이것이 교육 당국의 별의별 꼴이며, 교육계가 교육 어게인을 절대 외칠 수 없는 이유다.

2020-10-07

새로운 秋캉스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명절맞이 풍속이 차츰 달라지고 있다. 민족의 대이동을 방불케 하던 추석연휴 귀성행렬이 줄어들고 관광지나 휴양지를 찾는 가족들이 늘어난 것이다. 전염병의 재확산을 우려한 정부 당국에서의 귀성 이동 자제 권유 등으로 예년에 비해 20% 정도 국민들의 전체 이동이 줄었다고 하지만, 갑갑해진 일상에서의 일탈 같은 마음으로 귀성 대신 기분전환 겸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수개월째 이어지는 위축되고 침체되는 일상이 조금씩 바뀌더니 급기야 민족의 대명절인 한가위를 보내는 모습조차 이색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른바 ‘추(秋)캉스’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로 사람들은 추석연휴뿐만 아니라 가을날의 여유로운 시간에 언택트 여행이나 휴가(바캉스)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 실제 지난 추석연휴 때의 숙박업소 예약률은 코로나의 와중에도 강원도가 95%, 제주도가 60%에 육박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성묘나 고향방문을 미루고 가족이나 친지들과 함께 명소를 찾아 명절을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난데없는 바이러스가 고유한 풍습마저 변모시키는 양상이다.미상불 필자도 가족과 함께 한가위 연휴를 제주도에서 보냈다. 봄날에 떠날 예정이었던 제주도 여행이 돌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을로 연기되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3년 전부터 진행 중인 아들과의 자전거국토종주 장기계획에 따라 이틀은 해안으로 조성된 제주환상자전거길을 바다와 달빛을 벗삼아 달렸고, 나머지 이틀은 가족들과 섬 속의 섬 우도 일주 등의 일정으로 라이딩과 관광을 겸해 나름 뜻있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용두암에서 출발해 애월~대정~서귀포 쪽 반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원점 회귀하는 라이딩 내내 아름다운 절경의 해안도로와 이국적인 분위기에 젖는 설레임으로 환상(環狀)자전거길은 그야말로 환상적(幻想的)으로 펼쳐지는 듯 했다. 또한 바퀴가 굴러가는 곳곳마다 올레길 트레킹과 캠핑, 카약과 낚시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말 그대로 추캉스(추석 바캉스)가 실감날 정도였다. 특히 함덕해변에는 밤에도 투명한 에메랄드빛을 띄는 수면에 잔잔하게 어리는 보름달빛을 감상하거나 서늘한 밤바람을 쐬는 여행객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자연이나 세상은 시간과 환경이 바뀜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기 마련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생활방식이나 삶의 양태는 주변 여건에 유연하게 반응하고 익숙하게 대처해 나간다. 집콕족이니 비대면 온라인 성묘, 추캉스 등과 같은 생소한 명절 풍속도도 어쩌면 새로운 환경과 특이한 변화에 순응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다만, 그러한 변화나 낯선 환경에 직면해서 우리 고유의 관습이나 전통문화가 퇴색되거나 희석되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만 하다. 변화하되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적응하되 배제해서는 안 될 것들을 잘 판단하고 챙기는 추캉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것은 곧 우리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며 명절 퓨전문화를 현실에 맞게 가꾸고 보듬어 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2020-10-06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첫걸음

박은미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1919년 국제노동기구(ILO)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선언했고, 노동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이 동일가치노동에 동일보수를 받도록 규정했다. 성별 동등한 임금을 보장하고 남성보다 열악하지 않은 근로조건을 여성에게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 성별 임금격차는 2018년 37.1%, 2019년 34.1%로 약간씩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그 격차가 30.0% 이상 불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성별 임금격차는 오래전부터 두드러진 현상이며, 그 격차 수준도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경북지역은 2018년 임금근로자 중에서 여성 월평균 임금이 170만4천원으로 남성 월평균 임금 295만3천원의 57.7% 수준에 머물고 있다(통계청, 2018). 경북지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의하면, 여성경제활동참가율이 53.0%, 남성경제활동참가율은 75.5%로 남성에 비해 여성이 22.5% 낮아 성별 격차가 큰 것으로 분석됐다(통계청, 2019).한편, 정부는 노동시장 내 성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여성노동정책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정책에서 제시한 부분은 저출생과 여성인력 활용을 위한 기반마련에만 머물고 있다. 2019년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촉진 계획에 의하면, 재직여성 등의 경력단절 예방, 경력단절여성 재취업 활성화, 보육·돌봄 인프라 강화, 일·가정 양립 환경 조성 및 협력체계 구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경력단절여성이 가질 수 있는 일자리가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로 양산되면서도 산업별, 직종별 등에 관한 차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별 임금격차에 대한 보다 전반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노동소득 양극화를 해소하고 저임금노동자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최저임금법’이 제정되고 ‘최저임금위원회’를 통해 최저임금이 결정됐다. 성별 임금격차 해소에 관한 공감과 필요성을 제시하려면, 먼저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서울시의 경우 2019년에 국내 최초로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시행해 임금격차 개선에 적극적으로 추진했다.투자 출연기관에서부터 시행해서 공공부문의 성별 임금격차를 개선하고, 성별에 따른 고용기회와 차별을 해결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해외 사례의 경우는 영국, 오스트리아, 호주 등에서 성별 임금격차 공시 및 임금 정보 결과를 논의했다.예를 들어, 영국 250명 이상 사업장은 ‘2010년 평등법’ 제78조 젠더 임금격차정보와 2017년 시행령 규정에 근거하여 젠더 임금격차가 공시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2011년에 개정된 평등대우법제 11조에 따라 일정규모 이상의 근로자를 상시 고용하는 기업에게 2년마다 임금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이젠 성별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임금 공시제도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구성항목, 공개방식, 적용대상, 공시 주기 및 시행시점 등에 관한 이해당사자 간의 합리적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020-10-05

양치기 소년의 교훈

곽지영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산학협력교수2018년 방영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스페인 그라나다를 배경으로 개발된 증강현실 게임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사용자가 스마트렌즈를 착용하면 그 위치에서 게임 속 세상으로 자동 로그인되어 현실에는 없는 게임 캐릭터들과 싸운다는 설정이다. 그러던 중 주인공과의 게임 속 전투에서 사망한 사용자가 현실에서도 죽게 되는 심각한 버그(Bug, 컴퓨터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의 오류를 의미)가 생긴다. 더욱이 사망한 사용자는 게임 속 패배할 때의 모습 그대로 망령처럼 반복해서 나타나 주인공을 죽이려 한다.얼마 전부터 나는 차량에 탑재된 스마트 AV 장치의 전원을 아예 꺼두게 되었다. 퇴근 길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꿀맛 같은 휴식 시간과 낯선 길을 운전할 때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는 네비게이션을 모두 포기하면서다. 게다가 다음에 차를 바꾸게 되면 그 회사 차는 이제 절대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소싯적부터 오랫동안 동경해 온 ‘드림 카’였을 뿐 아니라, 연비, 승차감, 주행감, 코너링 등 차의 성능 면에서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마음에 쏙 드는 차인데도 말이다.그 이유는 요즘 운전자들 사이에 골칫거리로 급부상한 차량용 DMB 재난경보 문자 때문이다. ‘삐삐삐삐삐~’ 뇌를 직접 두드리듯 거슬리는 강한 불협화음 경보음과 함께, 네비게이션 화면을 뒤덮으며 나타나는 그 문자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한국에 비상 경고 발령 / 10:39 / 알 수 없음 / 도/광역시 / 피해 지역 보기 / 취소”. 어떤 재난이 어디에 발생했다는 건지 제대로 확인 가능한 문자는 몇 없다. 재난 내용과 위치 확인이 가능하더라도 벌써 2~3주 전에 소멸한 태풍에 대한 경보이거나, 내 현재 위치와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알 수 없는 일’ 때문이다. 알함브라 게임 속 망령을 연상시키는 이 미스터리한 문자는 주행 중 TPEG 수신 상태가 바뀔 때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타난다.한 시간 주행 중 적어도 30번 이상 들리는 경보음과 지워도 지워도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오는 같은 메시지들. 견디다 못해 차단하는 방법에 대해 제조사에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알함브라 주인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버그와의 치열한 혈투를 벌인다. 자기를 희생하며 버그와 싸운 주인공의 열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네비게이션 화면을 가려버리는 문자를 지우려다 아찔한 상황을 경험한 후, 아예 시스템 전원을 꺼버리게 된 운전자들의 애타는 마음 정도는 좀 헤아려 줬으면 싶다.재난 알림은 위험한 상황에 피해를 막고 소중한 생명을 지키는 생명줄이 되어야 옳다. 늑대가 나타났다며 거짓 알림을 반복한 양치기 소년의 최후, 있지도 않은 늑대에 놀랐던 동네 사람들이 정작 진짜 늑대를 본 양치기의 외침을 외면한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양치기 소년의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2020-10-04

무상(無常)은 무상(無常)이 아니다

김현욱 시인작년 초, 동병상련(同病相憐)했던 정 많은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38세. 이름도 생소한 소장암. 병원 입원 세 달 만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황망히 눈을 감았다.병문안을 갔다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병실 밖에서 울먹거렸다. 발인(發靷) 때, 운구(運柩)에 참여해 착하고 따뜻했던 지인의 마지막 가는 길은 지켜보았다. 공자의 수제자인 증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하는 말이 착하다.’ 열 살 외동딸에게 지인이 남긴 마지막 유언은 분명 슬프고 착한 것이리라.인생무상(無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무상(無常)은 덧없음, 허무함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뜻이다. ‘주역(周易)’을 ‘역경(易經)’이라고도 하는데, 영어로 ‘Book of Changes’로 변역한다. 변화의 원리가 담긴 책이다. 무상(無常)은 변화에 가깝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니까, 괴롭다.붓다는 괴로움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 싫어하는 것(사람)과 만나는 일, 좋아하는 것(사람)과 헤어지는 일,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일은 일반적인 괴로움이다. 둘째, 영원하지 않은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 셋째,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붓다는 영원하지 않은 것, 변하는 것을 모두 괴로움이라고 설했다. 내 몸과 마음은 순간순간 변한다. 내 마음대로 어찌 할 수 없다. 이것이 무아(無我)이다.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은 영원하지 않고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에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고 고(苦)인 것이다.붓다는 괴로움의 원인으로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진리로 ‘욕망의 완전한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 가지 길의 진리로 ‘팔정도(八正道)’를 설했다.붓다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8가지 소멸의 길을 제시했다. ‘장부경’에서 붓다는 수행 방법에 의심이 많은 수밧다에게 위빠사나 수행의 중요성을 설했다.“내 나이 29세에 출가하여 5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나의 가르침인 사념처 위빠사나를 수행하지 않고서 구경각 아라한과에 도달한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네. 위빠사나의 실천법인 팔정도(八正道)가 있는 한 아라한들은 계속 출현하고 승가는 끊임없이 발전하리라.”아침저녁으로 또는 틈날 때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꾸준히 하고 있다. 누가 명상이 뭐냐고 물으면,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 자기 스스로를 보는 것, 이라고 답한다. 죄를 참 많이 지었다. 그렇게 통탄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날마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있다.몇 년 전에 아이를 위해서 했던 일이 얽히고설킨 인과(因果)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 것을 관찰명상을 통해 알아차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야 할 길이 참 멀다.

2020-09-27

바보 공부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젊었을 때는 공부란 지식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학, 철학, 종교, 예술, 역사…. 각 분야를 총망라한 지식의 체계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독서량이 늘어갈수록 인간도 우주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어서 지식의 거미줄로는 얽어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지식은 무지(無知)의 어둠을 밝혀줄 광명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과 질곡이 되어 무명에 갇히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인간의 모든 갈등과 분쟁은 무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무얼 안다는 것에서 야기된다는 걸 알았다. 모든 지식이란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부분적인 지식이란 결국 편견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편견은 독선과 아집을 불러오고, 독선과 아집은 걸핏하면 충돌해서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게 마련인 것이다. 바둑의 초보자는 열심히 정석을 익히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서는 그 정석을 버릴 줄도 알아야 진정한 고수가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지식을 쌓는 공부를 했을지라도 나중의 공부는 그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라야 한다는 얘기다.고 김수환 추기경이 아주 단순하게 그린 얼굴 밑에‘바보야’라고 쓴 자화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분이 평생을 바친 독서와 명상과 기도를 통해 마침내 도달한 것이 고작‘바보’였다니. 현자(賢者)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대성(大成)은 모자란 것처럼 보이고, 대교(大巧)는 졸렬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 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늙어서의 공부는 어리석게 보이고 모자란 것처럼 보이고 졸렬해 보이는 공부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잘나고 똑똑해지는 공부가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해져서 바보가 되는 공부라야 한다는 것이다.평생을 공부랍시고 해서 내가 얻은 것도 남다른 재주나 능력을 갖지는 못한 대신 빈털터리로 사는 것에 이골이 난 것이 고작이다. 결국 채우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였던 셈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어 죽음 앞에서도 별로 미련이 없을 터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말년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버릴 것도 없으니 다만 허전할 뿐인가.많이 벗어난 얘기지만, 요새 우리나라 아이들의 공부는 지식의 탐구는커녕 출세를 위한 ‘스펙’이 목적인 것 같다. 그러니 부모들도 자식을 위한답시고 지위나 권세, 편법과 비리를 다 동원해서 자식들의 스펙 쌓기에 이바지한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조국 사태’가 그 실상을 잘 보여주었다.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자괴감이 들었다는 부모들도 있는데, 정말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그들은 조국을 나무랄 여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보모라면 ‘봐라, 나는 적어도 너희들을 저런 식으로 교육하지는 않았다’라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해야 옳지 않은가.‘아빠가 조국이 아니어서 미안해’라거나, ‘엄마가 추미애가 아니어서 미안해’가 아니라, 적어도 그렇게는 살지 않은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부모라야 건강한 부모다. 그런 부모의 슬하에서 반듯한 자식이 나온다. 공부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2020-09-24

이참에 수행평가를!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때로는 산안개의 배웅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아기단풍의 성장기를 파노라마로 감상하기도 하는 등 가을 잔치를 펼치는 자연과 하나 되는 길! 보통 출·퇴근길을 상상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체증이다. 꽉 막힌 길,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길, 오로지 도착을 위한 맹목적인 길! 하지만 필자에게 출·퇴근길은 다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고속도로라는 것을 제외하면, 필자는 매일 자연과 함께 출·퇴근한다.아무리 바쁘고 지친 날이라도 출퇴근길에서만큼은 필자는 자연의 변화에 여유를 찾는다. 그 변화가 곧 철이다. 철의 중요성을 아는 자연은 철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장마와 태풍 등으로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갑자기 커진 일교차에 자연의 경고를 잊었다.필자 또한 차에서 내리는 순간 자연과 함께 한 시간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이번 주는 다르다. 월요일 라디오에서 나온 사연을 필자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 사연이 바로 글머리에 적은 말이다. 코로나 19는 명절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나왔다.“불효는 ‘옵’니다.” “올해 벌초하러 오면 내년에는 벌초 거리 된다.” “추석 연휴 가족, 이웃의 건강을 위해 고향 방문을 자제합시다.”코로나 19가 바꿔 놓은 가로 펼침막 내용이다. 작년만 하더라도 고향 방문을 환영하는 글이 추석의 분위기를 한껏 더했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19 예방을 위해 고향에 오는 것 자체를 막고 있다. 이러다 명절도 온라인 명절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고향길이 막히면서 휴가길이 열렸다. “황금연휴 일주일간 30만 명 몰리는 제주도” 전국 유명 여행지는 이미 예약이 마감될 정도라고 한다.이대로 가다간 온라인 명절이 아니라 명절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궤변이 넘치는 사회 특징 중 하나는 꼭 지켜야 할 것이 지켜지지 않거나, 없어져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된다는 것이다.궤변 사회의 궤변 교육 중 하나가 수행평가이다. 코로나19 전에 교육 당국은 수행평가 반영비율을 50% 이상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수행평가는 이론에서나 존재하는 평가이지 현실에서는 실행 불가능한 평가이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사들의 평가 능력이다. 과연 교사들에게 학생들의 학습 과정과 결과를 평가할 능력이 있을까?교육 당국은 과제형 수행평가는 안 된다고 지침을 내리고 있지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수행평가는 과제형이다. 그런데 그 과제를 보면서 과제를 낸 교사는 수행평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과제형과 서술형 평가는 표준 답안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교사가 제시한 표준 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얼마 전 “학생평가 반영비율 조정”이라는 공문이 왔다. 내용은 수행평가 비율을 50% 이상에서 20% 이상으로 조정한다는 것이다. 명절도 없어지는 이참에 교사 중심의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평가인 수행평가도 없애면 어떨까! 아니 없애자!

2020-09-23

풀을 내리며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추석이 가까워지면 으레 하게 되는 것이 벌초(伐草)다. 벌초란 조상의 묘에 자란 풀이나 나무를 베어내고 묘 주위를 정리하는 일이다. 처서가 지나면 풀의 성장이 거의 멈추기 때문에 추석 때의 성묘를 위해서 묘를 깔끔하게 미리 손질을 하게 된다. 일부 지역에선 벌초를 금초(禁草)라 부르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소분(掃墳)이라고도 한다. 또한 안동지방 등지에서는 ‘풀을 내리는 것’이라 하여 경건한 손길로 묘소를 다듬으며 정성을 다했다.우리나라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조상의 묘를 살피고 돌보는 일은 효행이자 후손들의 책무라 여겼다. 북망산천에 계시지만 조상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예우하였기에, 묘소가 함부로 방치되거나 흉해지지 않도록 후손된 도리로 해마다 깨끗하게 관리해왔다. 그래서 수년 간 벌초를 하지 않으면 자손이 없는 묘로 여기거나 또한 후손이 있음에도 벌초를 하지 않는 행위는 불효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풍속은 조상의 덕을 생각하여 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자기가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다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나와 내 가족이 있고 자손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도 모두 조상이라는 근원이 있고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하늘로 가는 능선/솔숲에 튼 둥지 있어/먼 산 큰 품에 안긴 안도의 칩거인가/생시의 도도한 말씀/석간수(石澗水)로 푸시네//반 평생 눈물 언덕/까만 동공 등불로/속절없는 이승길 버린 듯 가신 자리/한 움큼 익모초 줄기/서걱이며 손젓네/’ -拙시조 ‘풀을 내리며’ 중(1990)지난 주말, 올해도 어김없이 풀을 내리고 왔다. 연례행사처럼 한 해도 빠짐없이 그렇게 참여해온지 어언 35년여, 예전에는 주로 낫으로 힘겹게 벌초를 했었지만, 요즘은 거의 예초기라는 풀 베는 기계를 이용해 비교적 손쉽게 하는 편이다. 고향을 떠나 대처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던 형제나 사촌들이 약속처럼 모여들어 공동으로 벌초작업을 벌이니 우애와 협력을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벌초 후 대부분이 추석 때의 성묘를 겸해 잔을 올리면서 조상을 추모하고 섬기는 마음을 모으기도 한다.그러나 시대가 변하니 벌초의 양상도 바뀌고 있다. 바쁜 도시인들이 벌초할 시간과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대행업체에게 벌초를 맡기기도 한다. 1990년대 중, 후반부터 예초기의 보급과 함께 벌초대행업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벌초를 하기 위해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힘겹게 작업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게 됐다. 더욱이 요즘같은 비대면 시기에는 고향 방문을 미루거나 직접 벌초를 포기하는 경향이 많아져 벌초대행이 예년에 비해 30~40% 급증하고 가격도 오르고 있다고 한다.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벌초 풍경도, 명절 채비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맘때면 시골이나 도시 어귀에는 고향 방문을 반기는 현수막이 즐비했었는데, 오히려 귀성과 이동을 자제해달라는 글귀가 걸리니 묘한 느낌이 든다. 또한 온라인 성묘, 화상 차례 서비스 등의 생소한 성묘, 제례문화로 살가운 일가친척 간에도 틈과 거리가 생기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2020-09-22

야행성 인간

윤영대수필가코로나19가 우리들의 일상에 파고든 것은 지난 2월 말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큰 파도 없이 곧 끝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팬데믹 상황을 지나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도 넘어 우리 국민 모두의 생활이 변했다.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이 학교일 것이다. 1, 2학기 등교도 어려웠고 비대면 수업이라는 초유의 교육방식이 도입됐다.일반인의 일상도 확 바뀌었다. 모임이 제한되고 가능한 집에 박혀있으라니,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는데….아침이 시작되면 밖으로 나가 맡은 일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함께 움직이다가 집에 오면 가족을 보살피고 TV 보고 밤늦으면 슬슬 잠자리에 들어가서는 잠이 들곤 했었는데, 제한된 공간에서 거리두기 사회활동을 해야 하다 보니 모두에게 약간의 우울증도 생긴 것 같다.그러니 여태껏 지켜왔던 일상의 생체 리듬 즉, 아침-낮-밤이라는 명확한 시간개념이 바뀐 사람도 있으리니, 내가 바로 그러한 상태에 와있는 듯하다. 퇴직 후 꼭 아침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대로의 생활 패턴을 만들어 문화원에도 나가고 취미 활동이나 각종 모임에도 참여하여 짜여진 일상을 즐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에 휘말린 이후에는 이 모든 것이 점차 와해되더니 이제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지경이 됐다.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낮에는 온종일 소파에서 빈둥대기가 일쑤라 낮잠도 자주 자게 된다. 그러니 자연히 밤이 되어도 그냥 책을 보거나 휴대폰 화면을 뒤지며 무료히 시간을 보낼 뿐이다. 자정이 가까워도 잠들 생각이 없고 누우면 바로 잠들었던 버릇이 불을 끄고 누워도 불면증에 걸린 듯 뒤척인다.잠은 체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는 밤 11시경에 자고 아침 5~6시경에 일어나는 것이 좋다는데 그게 탈이 난 것이다. 일부러 물도 마시고 나대로의 방법으로 눈알도 굴려보고 머리 목 등도 손가락으로 눌러보며 잠들려고 애를 써도 어렵다. 자율신경이 탈이 난 듯 ‘야행성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에 대한 정의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좋은 완전한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지금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정신적으로도 이상함을 느낄 테니 비록 감염되지 않았어도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야행성이 심해져 버린 요즈음의 나를 이겨서 스스로 건강을 찾기 위해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려고 아침 운동이나 저녁 산책 등을 시도해 보지만 코로나의 광풍이 자꾸 방해를 한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시차의 부적응으로 낮밤이 바뀌어 잠시 애를 먹는 일도 있지만, 확대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아침과 밤의 행동 조절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이제 추분이 지나면 밤의 길이가 점점 더 길어질 텐데, 모두가 평소 생체 리듬을 잘 관리해 야행성 인간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20-09-21

기로에 선 대한민국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문재인 정권이 지향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 현 정부와 여권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권’이었다가 전향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그 분들이 폭로하기 전에는‘민주화운동’으로 포장된 반체제 투쟁의 실상과 내막을 대다수 국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학생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좌경이념으로 무장한 소위 ‘종북주사파’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었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었다.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항일운동과 브나로드운동(계몽운동)을 시작으로 광복 후에는 4·19혁명, 6·3항쟁, 부마항쟁 등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는 좌경이념이 학생운동의 중심축이 되면서 그 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상당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념학습과 현장 활동을 통한 사회변혁을 기도하는 운동으로 변모했다. 노동계와 교육계, 종교계 등에 침투하여 대중적 기반과 영향력을 넓혀가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정계에도 대거 진출을 했다.저들이 ‘촛불혁명’으로 일컫는 2016년 10월의 대규모 촛불시위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좌파 운동권 세력은 마침내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실현할 호기를 잡게 되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들의 이념에 의거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적 기반을 다진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다. 자유민주주의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그들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애국가도 태극기도 못마땅하고 헌법 조문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란 말을 빼려고 한다. 아무튼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지금까지의 대한민국과는 다른 체제의 나라임이 분명한 것 같다.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 중에 아직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 도처에서 불거져 나오는 그들의 민낯이 적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사회주의 체제를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는 안 된다. 위선과 파렴치가 상식이 되고 프로파간다와 포퓰리즘이 기본 정책이 되는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의 몰락이 그랬고 베네수엘라 같은 좌파정권 국가가 그래서 패망의 길을 걷고 있다.대한민국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하려는 기득권 세력에 동조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우선 실상을 알아야 한다. ‘민주화’니 ‘진보’니 하는 가면 뒤에 숨겨진 민낯도 볼 줄 알아야 하고, ‘개혁’이란 말로 포장된 불순한 야욕과 음모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내막을 아는 사람들의 증언과 폭로에 귀를 기울이는 국민들이 많아야 하고, 분별력을 가진 식자층의 사람들도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좌경이념에 영혼을 판 자들과 권력에 빌붙어 곡학아세하는 비열한 기회주자들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좌파이념에 물이 덜 든 중도층을 일깨우는 운동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2020-09-17

교육 싱크홀? 온라인 수업

이주형산자연중학교 교감“선생님은 시간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학생이 교무실로 오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당황스러웠지만, 흥미로웠다. 학교가 질문 사각지대가 되면서부터 필자 질문도 말라버렸기 때문에 질문을 받는다는 것은 즐겁다. 학생 말이다.“‘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거기에 나오는 내용 중에 시간은 금이다는 말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좋은 말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말이 때론 사람들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학생들과 시간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은 물리적 시간, 심리적 시간 등과 같은 시간의 종류에 대해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을 꼭 금처럼만 사용하라는 것은 어른들의 일방적인 강요 같아요. 시간을 금처럼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다르게 사용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학생들의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기에 필자는 학생들을 응원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기성세대와는 다른 학생들만의 시간 사용법이 있다는 것을 필자는 확신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필자는 정말 배우고 싶다. 학생들은 환한 웃음을 남기고 총총걸음으로 교실로 향했다.학생들이 나가고 필자는 시간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딸아이 말이 생각났다. 올해 중학교 1학년인 아이는 중학교 입학 전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중학교 입학 후 학교생활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온라인 수업의 과제 이야기뿐이다.“아빠, 우리 3주 동안 또 학교 안 간다. 이제는 학교 가는 게 이상해. 과제나 해야겠다.”온라인 수업은 학교의 많은 질서를 무너뜨렸다. 물론 코로나19 예방이라는 국가 방역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그 방법은 분명 크게 잘 못 되었다. 오류의 시작은 교육부가 콘텐츠 활용 중심 수업, 과제 수행 중심 수업을 무리하게 온라인 수업 유형으로 제시하면서부터다. 이 두 유형은 결코 학교 수업이 아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교육 관료들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 전국의 95%가 넘는 교사들이 쌍방향 수업을 포기했다.그런데 그 포기가 학생과 수업 포기라는 것을 교육부는 알까! 학교와 교사가 포기하지 않아도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 교육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어느 뉴스 제목이다.“학습지 교사도 이렇겐 안 해, 학부모들 원격 수업이 아니라 방치”지금의 원격 수업은 공교육 붕괴 주범이다. 말도 안 되는 원격 수업으로 학생들은 학교 수업 시간에 대한 감을 잊었다. 교사는 설명 대신 벌점으로 엄포를 놓기 바쁘다. 온라인 수업이 만든 교육 싱크홀에 이 나라 교육이 침몰 중이다. 교육이 완파되기 전에 교사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실시간 쌍방향 수업 플랫폼을 교육부 차원에서 꼭 만들기를 제안한다. 교육부(청)에 묻는다, 당신이 학생이면 지금의 온라인 수업을 들을 것인지!

2020-09-16

형산강 하류에서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태풍으로 큰물이 지고 난 형산강 하류를 찾았다. 둔치나 다리 주위 곳곳에는 온갖 쓰레기며 쓸려온 풀과 나뭇가지더미가 잔뜩 쌓여져 있었지만, 하늘엔 언제 그랬냐는 듯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바람 결에 조각구름만 한가로이 떠다닐 뿐이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서 한, 두 차례의 태풍이 일진광풍처럼 휘몰아쳤으니, 온 나라가 바싹 긴장과 우려, 안도의 시간을 보냈으리라 여겨진다.유난히 자연재난이 심했던 지난 여름날, 장마와 폭염, 연이은 태풍 등으로 막대한 피해와 손실을 가져왔다. 예기치 못한 기상이변의 정도가 컷을 테지만, 무방비와 난개발, 상황 오판에 따른 인재(人災)도 상당 부분 기인했음을 누구도 부인하진 못하리라. 해마다 되풀이되는 풍수해에 철저한 대비와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긴 하지만, 보다 근원적이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공염불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형산강 하류지역은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멈춘 듯 흐르는 물결 따라 다수의 동, 생물과 90여종의 조류 등의 생태자원이 있고 둔치에는 갈대나 억새 등의 갖가지 식물과 수목이 자라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산업화의 산실이 우뚝하게 서 있는 가운데 산책이나 해양레저로 사람들을 끌어안으며 너른 강폭만큼 친숙함을 더해가고 있다. 특히 경주를 거쳐 포항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관광, 산업 등 다양한 자원을 활용해서 지역 상생발전의 성장동력으로 추진 중인 ‘형산강 프로젝트’는, 다소 난관도 있지만 환경복원과 도시재생을 통해 시민들의 여망를 담은 친수 여가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5년째 공사를 벌이고 있다.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했던가. 시민들의 쉼과 생태체험 교육장인 형산강전망대, 수상레저타운 물빛마루, 수변 테마꽃밭 형산강장미원, 강둑으로 조성된 상생로드 자전거길과 둔치의 황토길, 에코생태 탐방로, 신부조장터 보부상길 등 시민들이 즐겨 찾고 이용하며 긍정적이고 공감하는 부분도 많지만, 지난 달 초 우여곡절 끝에 개장한 ‘형산강 야외물놀이장’은 장마와 태풍으로 벌써 두번씩이나 물에 잠겨 그야말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형산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60억원을 들여 조성한 야외물놀이장의 침수는 이미 예상됐었다. 직접 가서 보니 침수로 인해 5개의 대형풀장과 부대시설 주위엔 많은 양의 토사와 쓰레기더미가 쌓여 물놀이장의 형태마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5년여 형산강변에 살아본 필자로서는 홍수가 나면 침수피해에 시달려 2006년 오천으로 이전하기 전의 포항운전면허시험장 그 자리에 하필이면 왜 물놀이장이 들어섰을까 반문해본다. 타지역의 운영사례를 접목했다 하지만, 과연 누구와 무엇을 위한 행정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근시안적인 정책과 지엽적인 입안으로 인해 애꿎은 시민의 혈세만 낭비하는 꼴이 돼버리는 건 아닌지 씁쓸하게 여겨짐은 나만의 기우일까. 그래도 한창 공사 중인 형산강 상생인도교나 신부조장터공원, 뱃길복원사업 등을 보다 신중하고 면밀하게 검토, 보완하여 수변 친수 위락시설 이용객들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고 시민들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2020-09-15

무기력증에 빠진 당신에게

문가인참마음심리상담센터 원장심리상담도 유행이 있다. 분노조절장애(전문용어 간헐적 폭발성장애)가 유행이었던 적도 있고, 공황장애가 유행이었던 적도 있는 것 같다.요즘에는 무기력증을 호소하며 상담센터를 방문하는 이들이 많다. 아동, 청소년, 청년, 성인, 노인 가릴 것 없이 의욕이 없고, 만사가 귀찮고, 온종일 누워만 있고 싶다고 한다. 심지어 두통을 비롯해 가슴의 답답함까지 호소하기도 한다.외관적으로는 우울증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신, 환경, 미래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주로 호소하며 자살까지 생각하기도 하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은 다르다. 그들은 부정적 사고를 크게 호소하거나 죽고 싶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몸과 마음에 활력이 없다고 한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의 신체 건강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증이란 바이러스로 마음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힘없는 목소리와 흐릿한 눈동자로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생존의 욕구가 그들에게 나를 만나러 오게 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오기도 하지만 가족 중의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를 찾아온다.나는 고민한다.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무기력증에 빠진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세계적인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1964년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탈출구가 없는 상자에 갇힌 개에게 지속해서 전기자극을 주었을 때 처음에는 개가 팔짝팔짝 뛰다가 나중에는 웅크린 자세로 주저앉는다는 그 실험에서 우울증의 학습된 무기력 이론이 생겼다.우리의 지금 상황이 그렇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 우리의 대기를 떠돌 때는 당황하고 놀라고 두려워하고 분노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장기화함으로써 무기력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중에 몇몇은 심각한 우울증 등의 심리적 문제로 발전하기도 할 것이다. 그중에 몇몇은 지혜로운 방법을 스스로 찾을 것이다.마틴 셀리그먼의 실험에서도 모든 개가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탈출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이전에 학습한 개는 포기하지 않고 탈출할 방법을 찾아서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이 있다면 학습된 낙관주의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부정적인 마음도 학습될 수 있듯이, 긍정적인 마음도 학습될 수 있다는 것이다.학습된 낙관주의로 우리는 이 코로나 시국에서 탈출해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외부의 전문가를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부의 전문가들을 너무 맹신하거나 쉽고 빠른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말라.나는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그들이 심리상담 및 최면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갈 무렵, 이렇게 말한다.“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사람들은 자신이 의사인 줄 모르고 외부의 의사를 찾으러 돌아다닌다.”“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비밀의 열쇠를 어딘가에 숨겨두었다고 합니다.”“그 비밀의 열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020-09-14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김현욱시인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길어지면서 반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번밖에 못 만나고 있다. 저번에는 태풍 때문에 하루 등교하는 날조차도 온라인수업으로 전환했다.아이들 만나서 할 일이 태산이었는데, 망연자실이다. 최초로 학급 선거를 온라인으로 치러야 할 판이다. 글기지개 2권 넘어가는 아이들도 있어 진심으로 격려하고 새 공책을 챙겨줘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학기 초 꿈꿨던 많은 것들. 이를테면, 시 암송, 시 쓰기, 글기지개, 학급카페, 놀이 활동, 가정독서토론 등등이 코로나19로 물거품이 되는 꼴을 보자니 코로나 블루가 아니더라도 가슴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가장 걱정스러운 모습은 교실에 등교한 아이들 중 몇몇이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존다는 것이다. 물어보면, 십중팔구, 새벽까지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동영상을 봤다고 한다. 생활리듬이 완전히 깨진 것이다. 뭐든지 귀찮아요, 귀찮아요, 귀찮아 타령을 하는 아이도 늘었다. 학부모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또한 학부모이므로 고충을 모를 리 없다. 눈치를 살살 보면서 벌써부터 요령을 피우는 딸아이를 보자니, 이를 어쩌나, 싶다.누굴 탓하랴. 원격수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담임과 학부모가 좀 더 관심과 인내를 가지고 도와주는 수밖에. 코로나19 치료제 희소식이 들리니 아무쪼록 내년에는 마스크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어울리며 수업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오은영 교수의 ‘내 아이가 힘겨운 부모들에게’는 사춘기 아이들의 심리와 부모들의 고민을 담은 책이다.5학년 담임으로서 예사롭지 않게 읽혔다. 특히, 자녀와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시점을 ‘공부’로 잡은 것은 몸소 체험한 일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보통 공부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말을 안 들어요. 공부를 놀이처럼 즐겁게 하는 아이는 없거든요. (중략) 이렇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부터 아이와 부모는 사소한 일에 티격태격하게 돼요.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하는 거죠.”딸아이의 공부, 특히 수학과 영어를 봐주기 시작하면서 나는 딸에게 화를 많이 냈다. ‘내가 왜 이러지’란 생각을 자주 하면서. 그전에는 늘 “우리 은유 참 열심히 했네.”, “우리 은유 자랑스럽다” 이런 말들을 자주 했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 아이가 잘 못 하는 것에만 도끼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그 모든 씨앗들이 심어져 있을 것이기에//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 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박노해 시인의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라는 시를 알아도 현실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라는 시구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본다. 경험상, ‘공부는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란 말도 함께.

2020-09-13

분열의 정치

김병래시조시인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인 정부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느라 대학시절부터 줄곧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1963년엔 종신형을 받아 1990년 석방될 때까지 27년 넘게 감방과 채석장에서 복역을 했다. 석방된 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으로 선출되어 백인정부와 협상, 350여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공로로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식에 옛 교도관을 초대했는가 하면 자신을 투옥시킨 사람들을 내각에 등용해서 갈등과 상처의 치유에 힘썼다.그를 추종하는 국민들로부터 종신대통령직 제안을 받았지만, 아프리카의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지켜져야 한다며 거부하고 199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의 지지자와 피해자가 함께 일하는 광경은 보기 좋았다. 그들은 과거를 부정하지도, 현재의 의견 불일치를 감추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동의 미래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것 같았다. 그것은 만델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화해의 정신 덕이었다.” 그리고 그는 만델라에 대해 ‘오랜 수감생활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우정, 친절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썼다.그와는 정반대로 문재인 정권은 오로지 분열의 정치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분명 통합과 공존의 세상을 열어가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언명했지만, 실상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분열과 적개심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을 선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지난 정권과 상대 당을 모조리 적으로 몰았고, 반일감정을 부추겨 우파들에 토착왜구란 프레임을 씌운 것,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편을 갈라 증오와 보복의 정치를 한 것, 최근에는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이간질을 하는 비열한 행태를 보였다,정치적 책략 중 가장 비겁하고 치사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분열의 정치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좌우의 대립이 상존해 왔으므로 적당한 구실을 던져주고 프레임을 씌우면 알아서들 피터지게 싸운다. ‘대가리가 깨어져도’밀어붙이는 절대 지지층을 손쉽게 확보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 다음엔 부화뇌동하는 중도층을 포퓰리즘으로 끌어들이면 정권유지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런 전략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이 바로 지난 총선이었다. 재난지원금이란 구실로 돈을 풀어먹인 것이 주효했다.정권이 획책한 대로 대한민국은 지금 분열과 갈등의 양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 팽배한 불신과 적개심은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의 전망을 더욱 암담하게 한다. 관용과 배려의 정신은 실종되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끝장을 보겠다는 광기와 증오가 난무한다. 넬슨 만델라와 같은 현인(賢人)이 참으로 아쉬운 시국이다. 최근 들어 문제인 정권을 지지했던 일부 지식인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다. 올바른 식견과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바른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사필귀정의 결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

2020-09-10

교육과정과 따로 노는 대입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8월이 자신의 색을 거둬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들판이다. 녹색으로 일렁이던 들판에 노란색이 더 해지기 시작했다. 색이 익어가는 들판의 변화를 필자는 9월 들어서야 봤다. 그토록 눈을 부릅뜨고 다녔지만 왜 그동안 못 보았을까! 두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다는 것을 필자는 확실히 경험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마음의 여부라는 것도 분명히 알았다.욕심을 내려놓고 2020년을 겸손하게 마무리하는 들판을 보면서 공자의 말씀을 떠올렸다.“마음에 없으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 수가 없다.”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말처럼 마음은 모든 행동의 근원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같은 일도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 심지어 마음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든다. 기적 또한 간절한 마음의 결과다. 용기, 용서, 사랑, 희망과 같은 말 또한 마음의 소산이다.마음은 어떤 일의 성공 여부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자기에게 최면을 건다. 개인의 일도 이런데 하물며 회사나 국가 일은 어떤가. 리더십은 곧 지도자의 마음이다. 리더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가 속한 집단의 운명이 결정된다.그럼 우리가 속한 사회는, 또 나라는 어떤가?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아서는 리더가 마음이 없거나, 아니면 그 마음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많은 왜곡이 있음이 확실하다. 아니고서야 자연이 노(怒)할 만큼 이 나라가 어쩌면 이토록 불안할까! 지금 우리 사회 모든 리더의 공통된 마음은 탓하기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남 탓하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이 사회 많은 분야가 그렇듯이 교육계 또한 교육 리더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 이 나라 교육이 특정 정치이념 재생산의 도구가 된 것 역시 정권의 하수인이 된 교육 관료들의 불순한 마음 때문이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우리 교육은 정상에서 멀어진다. 굳이 비정상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이 말은 지금의 교육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비정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교육과정과 따로 노는 대학교 입시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 기술 창조력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라는 새 교육과정의 목표와 “문·이과 공통 과목”이라는 말에 희망을 가졌다.“2015 개정 교육과정은 흔히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고등학교에서 문·이과 구분 없이 공통 과목을 배우는 것이 2015 개정 교육과정의 핵심이라고 (….)”그리고 위의 기사 내용이 대학교 입시에 적용되어 문과 이과 구분 없이 학생이 자신의 적성에 맞추어 대학교 입시에 응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나라의 비정상적인 교육계는 이런 학생들의 믿음을 배신했다. 2021 대학교 입시에서 계열 통합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학교는 얼마나 될까? 버젓이 계열을 구분해 놓은 대학교 입시 요강에 학생들의 마음은 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2020-09-09

바람 따라 바퀴 따라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바람을 가르며 강변을 달려가는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볼 때면 생동과 활력, 낭만과 여유가 느껴져 누구라도 그렇게 타보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다.자전거는 엔진 역할을 하는 두 다리의 힘으로 바퀴를 굴리며 두 손으로 잡은 핸들의 방향에 따라 사람이 갈 수 있는 웬만한 곳이면 타거나 끌고 갈 수 있는 유익한 이동수단이다.자전거는 타는 목적이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가벼운 차림으로 안장에 앉아 느긋하게 동네 한 바퀴를 돌 수 있고,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서 볼일을 보거나 누구를 만날 수도 있다.그리고 자출(자전거 출퇴근)하면서 생활 속의 운동으로 삼을 수도 있으며, 휴일의 MTB(산악용자전거) 라이딩으로 질주와 스릴 속에 심신을 단련할 수도 있다. 또한 인천~부산까지의 국토종주나 4대강 종주 등의 원정 라이딩으로 자신의 의지를 불살라 완주의 성취감을 만끽할 수도 있다.이렇듯 자전거는 인간의 힘을 이용해 움직이는 탈것 중에선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발명품으로 사람의 두 발을 대신해 어디든지 손쉽게 누빌 수 있다. 인류가 끊임없이 진화할 수 있도록 해준 시발점이 되는 바퀴는 인류의 10대 발명품이기도 하다.필자는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중고 자전거로 20여리 신작로를 등·하교 하면서 그리도 신나게 즐겨 타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일까? 4~5년 전부터는 거의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가 하면, 아들과의 국토종주, 동료들과의 퇴근 라이딩, 섬 일주 라이딩 등을 즐기며 쏠쏠한 재미에 빠져들고 있다.80년대 초·중반 신입사원 시절에는 교통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거침없이 헤치면서까지 자전거 출퇴근을 했어야 했지만, 요즘은 건강과 여기(餘技) 삼아 여유롭게 운동하듯이 타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최근엔 주말에 두 바퀴를 굴려 친구나 지인의 집을 무작정 ‘찾아가는 라이딩’으로 자전거 타기의 또 다른 재미(?)를 누리곤 한다. 한동안 뜸했던 사람을 만나는 반가움 속에 차나 음식을 곁들여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살가운 정이 솟아나게 되고, 어떤 친구는 손수 가꾼 푸성귀를 듬뿍 뜯어 주기도 한다. 이따금씩 기계나 죽장, 청하, 경주 등지에 거처하는 분들을 만나러 가는 들길이나 농로 주위에는 민들레와 금계국, 쑥부쟁이가 환호하듯이 반겨 피고 바람의 결마저 설레어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다.숨막힐듯 왕왕거리며 들려오는 봄날의 개구리 울음소리와 초록의 논에서 한가로이 날갯짓하는 왜가리, 너른 들판에서 묻어나는 싱그러운 냄새를 맡으며 바람 따라 바퀴 따라 유유히 자전거를 저어가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풍경 속의 주인공이 되는 듯하다. 근교 라이딩으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길가의 정경을 완상하며 사람의 향기에 젖어 드는, 일종의 도락(道樂)과 교분을 나누는 일이다. 바람 따라 바퀴가 굴러갈수록 마음 따라 교유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2020-09-08

태풍을 맞으며

윤영대수필가여름의 끝, 태풍의 계절이다. 7월까지 조용하던 태풍이 1년에 3개가 한반도를 넘어가는 2년 연속 3홈런의 태풍관측 사상 드문 대기록도 세우고 있다.이들 삼형제-바비, 마이삭, 하이선은 적도 부근 태평양에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태어나 ‘아기 태풍’이 되었다가 점차 열기를 끌어들여 힘을 키우고 급기야는 서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강력한 폭군 회오리바람이 된 것이다.셋째 하이선은 고수온 지역에서 오래 머무른 탓에 초속 50미터가 넘는 초강력 태풍이 되었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찬 기운과 남쪽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충돌하여 집중호우로 엄청난 강수량을 보일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태풍 경로예측이 나라마다 약간 다르긴 하지만 하이선은 우리나라를 관통할 거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대륙 쪽에서 발달하는 차가운 공기가 매일 조금씩 동쪽으로 밀어붙여 대한해협을 빠져 동해를 북상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포항 앞바다를 가까이 지나 지난번 마이삭으로 피해를 입은 해안지역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둘째 태풍 마이삭이 오던 날 엄청나다는 바람의 세기를 느껴볼 생각으로 새벽까지 눈을 뜨고 아파트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한밤중 유리창을 마구 두드리고 정원의 나무들을 흔들어 대더니 갑자기 정전까지 시켜버렸다.아침에 눈을 떠보니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푸르른데 앞 정원의 나무는 뽑혀있고 베란다에는 물이 흥건하다. 문틀 아래로 솟구쳐 들어온 빗물에 나무마루가 젖고 있었다. 여태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라 서둘러 물을 퍼내고 닦으며 손 한번 안 대었던 난간과 밖 유리창도 이참에 깨끗이 씻었다. 태풍 덕분(?)에 앞뒤 베란다 청소도 깨끗이 했다.중국 대륙과 일본 섬 사이의 한반도는 태풍의 경로가 되기 쉽다. 태평양의 뜨거운 공기가 밀어 올리면 서해로 빠지면서 전라 충청의 논과 강을 넘치게 하고 대륙의 찬바람이 강해지면 동해로 밀려 경상 강원의 산과 바다를 뒤집으며 북쪽으로 올라간다. 세력이 비슷하면 한반도 중앙부를 관통하겠지. 우리 한반도는 어쩔 수 없이 이들 거대한 기류의 소용돌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우리나라는 지금 또 다른 태풍이 불어오고 있음을 느낀다. 코로나19의 먹구름 아래 정치권에서의 기압골이 마주치고 그사이에 민의(民意)의 강풍이 일어나고 있다. 서북쪽 기운의 사회주의 바람과 남동쪽 기운의 민주주의 바람이 큰 기압골을 형성하여 잔뜩 구름이 끼어있는 상태다. 희한하게도 태풍과 닮았다. 이 기압골이 세어지면 언젠가는 태풍으로 변할지도 모르겠지만 조용하게 안정되어 맑은 비나 뿌려 대지를 풍요롭게 적시고 밝은 하늘을 열어주었으면 한다.태풍은 나쁜 짓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양의 물기를 뭉쳐와서 마른 땅의 가뭄을 해소시키고, 대기순환으로 먼지와 스모그를 씻어주기도 한다. 또 붉은 태양의 열기로 강과 바다의 색깔이 변하는 녹조와 적조 현상을 없애 수질 개선도 해주고 범지구적 에너지 순환을 돕기도 하는 등 우리 지구의 생태계를 안정되게 변화시켜주는 혜택을 주기도 한다.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피해를 주는 사나운 태풍이 아니라 한 번쯤 시원하게 불어와서 깨끗하고 안정된 나라로 변화시켜주는 태풍은 없을까?

2020-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