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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손(祖孫)사이

권오신/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형제가 많은 집에서 바로 밑의 동생만 데리고 마실 나가려면 중간에 끼여 이래저래 푸대접받는 동생이 데굴데굴 구루면서 서럽게 울어 버리는 장면들은 지금은 아예 볼 수 없다.지금은 자녀가 셋만 되도 천연기념물처럼 보인다. 이름 끝 자가 사내 남(男)자이거나 끝 말(末) 자가 붙으면 딸부자 집이다. 여섯 일곱은 보통이고 열 명이 넘어서도 아들 가지려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이웃집 할머니는 엷은 미소를 띠울 뿐이다.지금처럼 천연기념물 보듯 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장례문화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그 옛날 형제가 많은 집에서 상제들이 한목소리로 내는 애곡소리는 너무나 듣기 좋다. 그래서 애 경사에는 형제 많은 집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자녀가 많은 집 할머니의 존재는 어머니보다 애정이 더 짙어 조손간 정의는 하늘을 찌른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은 늘 할머니 몫이다. 긴 겨울밤 장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일도 할머니 몫이다.어디서 갖고 오셨는지 손수건에 싼 곶감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별식이고 야식이다. 할머니는 단순히 하나뿐인 손자손녀가 서 너 살까지 자랄 때까지 보호막 역할에 만족하는 지금과는 너무나 틀리다.조손간에 대화가 끊어진 자리가 너무 크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금처럼 후줄근하게 비춰지는 이유는 뭘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세월을 이겨낸 산지식의 곳간이다.할아버지는 집안 내력을 가장 많이 아시는 향토 사학가이시고 할머니는 약손이시다.러시아는 마을 노인 한분이 돌아가시면 박물관이 하나 사라졌다는 속담이 여전하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가 덮쳤을 때도 마을 노인들을 따라나선 주민들은 생명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옛 어른들은 길을 나서는 자녀들에게 구불구불하게 살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어릴 적 밤 숲에서 놀다 벌에 쏘여 부풀어 오른 팔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된장을 발라주시고는 “남의 집 밤 훔쳐 먹은 적 있지”라고 반드시 물었다.아니라고 도리질하면 “주워 먹겠다고 생각이라도 한 적 있지”하시고 집요하게 벌에 쏘인 인과(因果)를 따지셨다.할머니는 시집간 누나가 남편으로부터 구박이라도 받고 친정에 들리는 날은 “너 탁발하러 나온 스님에게 시주하지 않았지” 그 것이 인과응보라면서 딸이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임을 늘 인식시켜 돌려 보내셨다.전생 현생에서 저지른 행위는 곧 업(業)이 되고 인(因)이 되어서 현세(現世) 내세(世)의 과(果)로 나타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을 들어 손녀딸이 행여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다독이는 게 할머니의 마음이다.이 사상은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핍박이 심했던 조선시대에도 할머니들의 가슴을 사로잡은 내세관(世觀)이었다.여름 비오는 날은 외출을 삼갔다. 산길을 어쩔 수 없이 걸을 때는 벌레를 밟아도 죽지 않게끔 느슨하게 삼은 짚신을 신었다. 동지섣달 이를 잡아도 죽이지 않고 대나무 통(菩薩筒)에 담아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을 만큼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시었다.이런 불교 사상은 유교·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정신이 자리 잡았으니 좋은 일· 궂은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이 저지른 업보(業報)로 합리화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선하게 살도록 자연스럽게 유도 했다.무려 1500년 전에 써진 능산리 백제고분에서 나온 목간에 새겨진 숙세가(宿世歌)에도 전생 인영과 인과를 부른 노래 말이 있었다.

2011-05-24

19세 성년 단상

권오신객원 논설위원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19세 성년이라하지만 인고력·지구력 ·담력이 없는 성년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나이가 되었지만 부모로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하다보니 부족함이 없는 세대들이어서 그런지 아낄 줄 모르고 배려할 줄 모르고 참는 정신은 거의 어린이들 수준이다.일제시대 단발령이후부터는 상투는 틀지 않는 대신 천지신명께 어른이 되었음을 고유하는 성년식의식은 남아 있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의식이기는 했으나 성년으로 가늠하는 데는 그보다 좋은 통과관례는 없을 것 같다.이른 아침 해가 솟는 시간, 외가닥으로 길게 땋아 내린 치렁 머리대신 상투를 틀고 탕건과 갓을 쓰는 관례(冠禮)를 혼인식에 앞서 치르면 성인이 된다.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남자 15살, 여자 14살로 정해져 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예외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외침이 잦고 가문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의 사회분위기에 따라 기저귀를 찬 아이끼리 정혼하는 강보(襁褓) 성년이 있었는가하면 뱃속에 든 아이들을 두고 정혼하는 지복(指腹)성인, 정혼한 양가의 부모 가운데 50살이 넘고 병들은 쪽이 있으면 12살로 낮출 수도 있었다.노동력이 아쉬울 경우는 10살 전에 20살 새색시를 맞이할 수 있을 만큼 예외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성년나이는 가족적, 사회 환경적 여건에 따라 부모들에 의해 정해 졌으나 육체보다는 정신 연령의 성숙도를 보는 관습이 유행됐다.삼한시대에서도 예비 성년들은 나라가 마련한 집단거주시설에서 나라가 성을 쌓고 나라를 지키는 군역을 하는 통과의례가 있었으며 신라의 화랑역시 고된 성년 시련을 겪었다. 조선시대 안평대군은 백운대 정상 벼랑 틈을 뛰어넘는 담력으로 성인이 되었다.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평민촌의 성인의식은 더 다양했다. 마을 숲이나 당산나무에 놓인 큼지막한 돌을 몇 번씩 들었다 놓았다를 거뜬하게 반복해야만 같은 또래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조선후기로 들면 농촌사랑채에서는 남색(男色)이 성행했다. 당시로서는 동성애 보다는 호기심 강하고 장난기가 심했던 악동 간에 벌인 남색을 주고받는 것으로 인정받았다.고통이 따르는 시련 끝에 온전히 인정을 받지만 반쯤 인정을 받으면 나이 들어서도 반품 취급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때부터 남녀 간에는 내외가 더 심해져 길에서 만나도 반말이 사라지고 얼굴을 붉히면서 길을 내준다.성인의식을 치른 조선시대 양반들은 걸음걸이부터 품위가 의젓하고 말씨는 더 의젓해졌다. 거짓말은 남을 살리고 의로운 곳에만 쓴다. 추노 꾼에 쫓기는 하인들을 살릴 순간 등 위급한 상황에 처해 질 경우에만 반대 쪽 길을 손질하는 방편으로만 쓴다.서원이나 성균관을 드나드는 유생들은 비 오는 날 길을 나설 때는 꼭 종이우산을 들고 나간다. 자신이 비를 피하기 위해서도 지녔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다.이 시절 부녀자들이 가빳빳하게 풀 먹인 적삼 등 치마저고리를 입고 마실을 나셨다가 비를 맞으면 극히 볼썽사납게 된다.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아녀자 앞에 슬그머니 우산을 던져두고 가는 게 조선 선비 정신이다.그 우산을 쓴 여인의 가슴에는 이 유생의 배려 정신이 평생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이처럼 관례를 치룬 선비들의 정신세계는 높고 고고했었다. 그러니 조선시대 500년을 살았던 여성들이 가장 흠모하는 층이 유생이었다.1973년 정부는 4월20일을 성년의 날로 정했다가 1975년부터는 5월6일로, 1985년부터 셋째 월요일로 다시 바뀌었다.

2011-05-17

기적 같은 인연

권오신 / 객원 논설위원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오늘 만난 모든 사람들은 억겁의 세월을 건너 내게로 왔다. 끝이 없는 우주공간. 이런 우주 공간에 같은 시간대, 같은 땅에 살아가는 인연의 확률은 제로(0)를 초월하니 기적이상이다. 지난 생의 인연이 닿지 않으면 옷깃도 스쳐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이보다 더한 인연과 인간 사랑의 표현을 없을 것이다. 우리민족에겐 `인연`이란 것은 인간 사랑의 지독스런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인연의 정신을 뛰어넘는 `이웃사촌`이라는 삶의 정서도 있다. 유럽과는 달리 `휴머니즘` 시대를 체험한 적이 없는 민족이긴 하지만 인연과 이웃사촌의 정신이 시대와 사람의 끈을 이어 왔다고도 볼 수 있다.내 삶이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건 놓아 버려야 할 것들을 잔뜩 움켜잡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린 간절한 소원이란 이름을 붙여 탐욕을 키우고 사랑이란 이기심을 늘 쥐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불같은 화를 내 속에 키우기도 한다.마음의 거울을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면 된다. “가끔 끔직한 업을 보게 된다 해도 집착하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불성(佛性)이란 본래 생각이 끊어진 자리다.자기생각, 판단하기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참으로 편안하다. 변사또에게 이몽룡은 너무나 나쁜 사람(놈)이다. 춘향에게 집착하는 그 생각이 프리즘을 통과해 봤자 딱 그 기 까지다.변 사또의 집착으로는 이몽룡의 참 생각을 보기 힘들 뿐 아니라 자신의 진면목도 읽지 못한다. 내 집착의 프리즘을 통해서는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편견의 안경을 쓰고는 세상을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성서에서 나온 선악과의 비유로 보면 더 선명해 진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선과 악의 개념을 갖는 것, 그자체가 시작일 뿐이다.에덴의 회복은 선악 이전의 세계로 가는 것이고 시비와 분별의 세계를 넘어 서는 것이지만 세상은 이미 놓쳐버렸다.세속 잡사를 놓아버리고 죽음을 극복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이치를 깨닫는 일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인도 뿌나에 자리 잡은 라즈니쉬(1931~1990) 아쉬람(명상센터)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나는 결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이 세상을 다녀갔을 뿐이다”힌두나 불교는 윤회정신이 가장 이채롭다.현세의 내 모습은 지낸 생과 붕어빵으로 치면 된다. 내세는 현재 처신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나눔을 잘하면 부자로 태어나고 화를 잘 내면 못생긴 얼굴로 태어나는 게 윤회 속의 인과의 법칙이다. 남을 시기하고 죄를 지으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니 참 무서운 법칙이다.신라 승 혜초보다 50여년 앞서 히말라야를 넘은 당나라 현장법사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북인도 보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세월의 덧없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현장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나의 생명체는 어디에 있었을 까. 그는 북인도에서 당나라로 돌아왔을 때는 가장 낮은 경지에서 서있는 자신에게로 다가갔다.삶은 원래 한바탕 꿈이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生滅法)은 꿈이고 환영이며 물거품이고 그림자와 같다.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다고 했다.(금강경)인연과 윤회를 뛰어넘은 부처님의 32가지 신체 특징은 세속인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귀는 길게 늘어트려져 중생들의 고민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고 혀는 길게 내밀면 얼굴을 감싸고 그 혀끝은 귀 털을 덮었다. 부드러운 혀는 뛰어난 지혜와 심금을 울려주는 대단한 웅변가를 상징하는 말이다.부처님 오신 날 2555주년을 맞아서 다시 생각해보면 오대양 육대주를 섭렵하신 석가모니의 마음크기가 너무 부러울 뿐이다.

2011-05-10

골프

권오신 /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우리나라 5월은 골프치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다. 일주일에 한번쯤 골프장 잔디를 밟는 것 같은데 싱글핸디를 유지하는 주말골퍼일 경우는 반드시 남이 하지 않은 준비물이 있다. 커닝페이퍼 같은 일기장을 갖고 있다. 티샷하기 전 그 골프장 18홀 코스의 특성을 깨알같이 적은 커닝페이퍼를 가슴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골프코스를 정확히 알고 공략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그런 골퍼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프로 골퍼가 명언으로 남긴 골프격언도 줄줄 외우고 다닌다. “대지(大地)를 그립으로 생각하라”, “하늘 위에 떠있는 저 구름을 치시지요” 잔뜩 겁을 먹고 스윙하는 사람과 작전을 중요시 여기는 프로골퍼의 조언이다.미국 LPGA투어에서 15년간 72승을 올린 애니카 소렌스탐은 “기록의 여제”로 불린다. 2008년 홀연히 은퇴를 할 때까지 올해의 선수상만 8번을 받고 수많은 기록을 갈아치워 여왕이 아닌 `여제`란 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노트북을 열면 데뷔 첫해인 1987년부터 경기관련은 물론 골프장의 특성, 자신이 실수한 순간까지 촘촘히 기록돼 있었다.LPGA투어 생활 첫해의 라운드 당 평균 77.57타를 쳤던 소렌스탐은 88년 69.99타를 쳐 마(魔)의 70타 벽을 깰 수 있었던 과정이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보물 1호`가 됐으며 여제란 찬사를 받게 한 입신(入神)의 무기였다.그렇지만 말처럼 되지 않는 게 골프의 마력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이지만 초보시절 1번 홀 드라이브 샷은 입사시험을 볼 때 보다 더 떨린다. 프로는 절제 넘치는 각이 살아있는 반면 주말골퍼의 공은 알을 밴 개구리처럼 잔디밭을 데굴데굴 구른다. 특히 첫 홀을 잘 넘기기가 쉽지 않다.이런 골퍼에게는 `나토(Nato)`에 가입하라는 농담 반 위로반의 권유를 어김없이 받는다. 골프장에서의 나토는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아니라 “결과에 매달리지 말라!”(Not attached to outcome!)는 영자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요즘 만들어지는 골프장에는 골퍼들에게 정신적으로 쉬고 갈 수 있도록 다양한 조형물을 설치해 두었다. 해저드 어귀에 둔 남근(男根)석은 웃고 갈만하다. 정신적 섹스를 통해 가볍게, 즐겁게 공을 치도록 유도하는 시설물이다.우리나라 골프장에는 금잔디 등 난지형이 주로 심어져 있다. 난지형은 잔디조직이 강해서 볼을 받쳐주기 때문에 걷어 쳐도 되나 국내에서 양잔디로 통하는 한지형은 볼을 받쳐주는 힘이 약해서 골프공이 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이럴 경우는 찍어 쳐야하기 때문에 주말골퍼는 이런 골프장에 가면 점수가 서너 점 더나온다. 걷어 칠 때 보다 힘이 더 들고 뒤땅을 치기 때문이다.골프는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기술로 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심연(深淵)에 침잠(沈潛)하는 것. 그래서 골프공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고 몰입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골퍼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진다.골프 황제로 대접받던 아널드 파머는 공격적인 코스공략으로 이름을 날린 반면 잭 니클라우스는 파머와는 대조적인 스타일로 유명하다. 지금도 80을 넘긴 파머의 샷은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격적이다. 연습 스윙도 거의하지 않고 시원스런 샷을 뿜어내는 반면 잭은 신중함이 지나쳐 연습 스윙을 서너 차례나 해 골프 팬이 적었다.골프선수라면 누구나 메이저대회에서도 상금이 많고 가장 화려한 PGA 마스터스대회에 나가고 싶어 한다. 출전의 기회를 얻은 선수들에겐 세기적 가슴 벅찬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대회가 얼마 전에 끝난 미국 조지아 주 오거스타 내셔날골프장에서 열리는 마스터스다. 이 대회에서 잭 니클라우스, 아놀드파머, 닉팔도, 타이거 우즈 등이 그린 자켓을 입으면서 세기적 명성을 얻었다.한국인 일부는 이런 좋은 운동을 하면서도 욕을 먹는다. 필리핀에서는 한국 관광객 70%가 도박 골퍼나 섹스 관광객으로 취급받는다. 실제로 한 골프장은 한국인의 회원권 점유율을 20%를 넘기지 않겠다는 원칙을 두고 있을 정도다. 베이징 공항 근교의 한 골프장이 한때 한국인 입장을 금지시킨 사례는 지금까지 회자되는 얘기다.한국인 골퍼는 떠들고 내기를 해야 되고 캐디를 경기보조원으로 보지 않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

2011-05-03

탐욕

권오신객원 논설위원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지금 한국인의 70%는 부패를 걱정하고 있다. 법규는 많을수록 도둑이 들끓고 무기가 많을수록 사회적 불안이 더 커지고 만다.(노자 도덕경) 탐욕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귀신도 물리치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의 욕망이 지구창조의 원동력이긴 했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는 부패가 걱정스럽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뇌물을 받다 적발되면 중죄로 다스려 졌다. 뇌물이 엽전 1천냥 정도면 장(杖)70대를 맞아야 하고 엽전 40관이면 장 100대에 3년간 노역을, 80관이 넘으면 교수형(絞首刑)에 처했다.뇌물을 받아먹다 처벌을 받으면 벼슬살이를 평생 못할 뿐 아니라 자손들의 벼슬길까지 막았다. 한번 걸리면 집안이 망할 만큼 가혹했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많이 문란해져 흥선 대원군의 형인 흥인군(興寅君)은 권좌(權座)에 있을 때 아홉 곳간에 가득 쌓인 재물을 둘러보고서야 아침을 들었다고 한다.우리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청백리도 많았다. 중종 임금시절 청백리였던 김정국(正國)은 늘 다섯 가지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실은 세 가지 찬뿐이었다.어느 날 시골에서 올라온 유생이 이를 보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은연중 꼬집었다. “숨겨 놓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이지. 밥상이 올라오면 식기 전에 먹으니 따뜻함이 하나요. 시장할 때 먹으니 시장이 또 다른 반찬일세”전라도 황룡강변 수연산 여우목 굽어진 소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비목처럼 외롭게 백비(白碑: 높이 150cm, 폭 40cm)가 서 있다.묘와 백비의 주인은 조선 명종 때 당대의 청백리 관원인 정혜공(貞惠公) 박수량(朴守良)이다. 명종이 사후에 세워준 국내에서는 하나뿐인 백비(비문이 없는 비)다.박수량은 중종 9년(1514년, 24세)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 주학에 올라 중종·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호조, 공조, 예조, 대사헌까지 지내다 명종 9년(1554년) 64세로 청백리로서의 지조 높은 생애를 마쳤다.박수량이 중종 25년에 올린 상소문을 보면 올곧은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첫째 임금에게 여자를 가까이 보이는 것은 정사를 어지럽게 하는 시초이고 뇌물은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둘째 아첨하는 관원은 변방에 보내고 멀리해야 한다. 셋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동요하면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재물을 남용하면 국고가 비어 백성이 해롭고 청탁은 모든 일을 그르치니 사사로운 정을 두면 공도(公道)가 망한다”고 적었다.그는 유언에서 무덤 봉분도 크게 만들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 박수량의 죽음을 애통해 한 명종은 비석에 그 행적을 새기는 것이야 말로 청백리 표상을 해치는 일이니 비문이 없는 흰 돌(백비)을 찾아 세우라는 어명을 내렸다.명종 때 정승을 지낸 상진(尙震)의 증조부 상영부(尙英孚)는 당시로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재물을 모았는데 만년에 들어 사방 백리에 걸친 농민 들에게 놓은 장리 벼 증서 등 모든 증서를 산처럼 모아 놓고 불살라 버렸다. 그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는 것을 보고 반드시 좋은 후손이 날 것이라고 했다. 이 집에서 태어 난 사람이 상진 정승 이었다.연초에 가진 장관 인사 청문회를 두고 `처갓집 청문회`라는 신문가십이 나온 적이 있다. 친가· 부모 형제는 쏙 빼고 처갓집 식구들하고만 부동산과 돈거래를 했는지 놀랍다. 정치인 관료로 높이 올라 갈수록 낳고 길러주고 공부시켜준 아버지·어머니 형제는 쏙 빼고 처갓집만 찾는 세태가 부패 시대를 고고히 외롭게 살아가는 청렴한 아버지를 더 외롭게 만들어 버린다.`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 한다`고 했다. 처가는 원래 가까웠다.장가(丈家)는 장인(처가)의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고구려부터 시작된 처가살이 전통은 조선중엽 성리학의 발달로 남성 중심의 가계가 개편되면서 금기시 됐으나 지금 같은 그런 형태는 아니었다.

2011-04-26

해동 명필 김생과 한영구

권오신 / 객원 논설위원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8세기를 살았던 해동 신라인 김생(知瑞 711~791)은 동아시아에서 글씨하나로 정상에 올랐다. 청량산 인근에서 태어나 청량산 `김생굴`에서 10년 수련 끝에 해서(楷書)도 아니고 초서는 더더욱 아닌 독특한 서체를 득필 했다. 같은 지역에서 50년을 붓만 잡고 살아온 심천 한영구선생 역시 고졸하고 강건한 필체를 완성해서 새로운 서예시대를 열었다.8세기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명필로 이름난 서예가는 당나라의 안진경체를 만든 안진경(顔眞卿·709~785)과 해동 신라가 낳은 김생 등 세 사람이었다.글씨의 본 고장이라 할 당나라에서 붓을 잡고 글씨께나 삐치는 학인들조차 김생의 글씨를 볼 때마다 천둥 벼락이 치는 떨림 현상이 왔다고 전한다. 왕희지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서 한수 얕잡아 보았던 반도출신 김생의 글씨를 인정했다.당나라 대부들은 해서(楷書)도 초서로도 볼 수 없는 김생의 독특한 글씨를 보고 천둥과 벼락이 치는 떨림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는 서평을 쏟아냈다.5체를 넘나드는 글씨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해동서성(海東書聖) 또는 신라의 왕희지로 추앙받았다. 이런 연유로 해서 김생의 글씨는 국내에는 단편적으로 남아있으나 중국에 더 많은 분량이 있다고 전한다.신라인 김생김생은 부모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서 그 가문이 전래되지는 않으나 신라 성덕왕 10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김생굴과 안동 문필산, 경주에서 지낸 80생애를 오직 붓만 잡고 살았으며 충주 `북진애`에서는 승려가 되어 두타행을 닦았다.청량산 김생굴은 이 산(山) 금탑봉 왼편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직각암벽 밑에 지금도 남아 있다. 9년을 수련한 김생이 하산을 준비하던 날밤 젊은 여인이 나타나 “도령이 이 산에서 글을 쓰는 것처럼 소녀도 길쌈을 해왔다. 서로 닦은 솜씨를 겨루어 보자”고 제안을 했는데 제안이 당돌하기도 했었으나 김생역시 자신의 실력을 자부하는 터라 불을 끄고 글을 썼다.이윽고 불을 켜고 보니 여인이 짠 천은 올 하나 틀리지 않고 고르게 짜 졌는데 김생의 글씨는 천처럼 고르지 못했다. 여인은 웃으면서 “도령은 명필이 되겠다고 하더니 실력이 이 정도이군요.”김생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1년을 공부, 10년을 채워 세상에 나와 명필의 명성을 얻었다. 아쉽게도 국내에는 그가 직접 쓴 글씨는 남아 있지 않다. `이차돈비`와 `백련사액` 등 비문이 있을 뿐이다.추사 김정희같은 서예대가도 김생의 글씨 앞에서는 감히 호를 쓰지 못했을 만큼 자신을 낮추었다고 한다. 금석학의 대가이신 추사 김정희는 제주귀양에서 풀려나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김생의 글씨를 보기위해 경주 무장사까지 내려와 남산자락 옥룡암에서 상당기간 체류했다. 추사는 경주에서 묵는 동안 옥룡암에 일로향각(一盧香閣)이란 현판을 흔적으로 남겼다.서예인 심천 한영구신라 왕릉은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늘 편안하게 느껴진다. 몸은 비록 잿빛 현대도시에 머물고 있지만 사람들은 늘 어머니의 젖무덤같이 편안한 고도를 그린다. 경주의 부드러운 능선(線)과 부처님의 땅 남산은 정신적으로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마음을 풀 수 있는 곳이다.대가라는 칭호를 얻기 무섭게 서울로 떠나버리지만 심천은 천년 고도를 떠나지 않고 외롭게 지켰다.한학과 조선시대 사대부 문화에 정통한 마지막 남은 학자이시기도 하다.심천은 오늘부터 25일까지 경주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그의 `고희전`에 나온 40폭 병풍(2천300자) 보문품을 쓰기 전 이른 새벽 백률사 길목 이차돈 순교성지에서 올라 관음보살 명호를 천 번 씩이나 외우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붓을 잡았다고 한다.추사체는 마치 강철을 오려 놓은 듯 획이 곧고 강직한 흐름이 있는 반면 심천의 서체는 잔잔한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 나오는 것처럼 유연하고 고졸하게 느껴진다. 이 서체는 아마도 선생이 형산강의 발원지에서 태어나고 항상 경주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서체를 가다듬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지금 김생으로부터 이어지는 영남 서예의 본고장 경주에 한·중·일 서예가들의 작품을 볼 전시공간을 마련하는 게 새로운 꿈이다.

2011-04-19

손목시계와 만년필

권오신객원 논설위원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남자는 시계·만년필, 여자는 명품 백으로 완성한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뒤로는 몸에 지닌 장신구가 가치 측정의 요소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인들에게는 노출 빈도가 24시간인 시계나 자동차가 부의 필수품이어서 더 중요시 되고 있다. 한 때 가짜 명품 파동으로 잠잠했던 고급 손목시계판매가 다시 늘어나는가하면 가짜분위기에 휩쓸려 장롱 속에 넣어 두었던 고급시계를 다시 차는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다.손목시계는 마주 앉은 사람의 시선을 단밖에 끌 수 있다. 손목시계가 지닌 시간·기능보다는 재력과 시기능이 더 효과적이다.역사상 최고의 변치 않는 명품시계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금딱지도 아니고 손목에 찰 필요도 없다. 북두칠성의 여섯째와 일곱 번째 별이 시침(時針)역할을 한다.옛 사람들은 밤하늘에서 반작이는 시침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가를 보고 술시(戌時) 해시(亥時)인가를 짐작했으니 느긋하고 기다릴 줄 아는 멋도 서려 있다. 5분을 기다리지 못하는 현대인들과는 다른 멋이 분명 그 시절에는 스며있었다.그러나 손목시계가 휴대전화에 밀리는 현상도 사실이다. 이런 조짐은 젊은 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시계를 차지 않은 직장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2005년부터 노동부가 인정하는 국가기술자격인 시계수리기능사 검증제도는 폐지됐다.서구역사에서 시계를 발명한 사람을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으니 기계식 시계가 사용되기는 서기 1300년 전후로 추정되고 손목시계는 20세기 초에 출현, 1차 세계대전이후 크게 유행했으니 100년쯤을 넘겼다.생활문화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사람이 몸에 지니거나 차고 다니는 장신구의 트렌드 수명은 100년 안팎일 때가 많다고 본다.한국사회에서는 1977년 우리나라 100가구당 손목시계 보유현황(통계청)은 신사용이 89.8개, 숙년용이 63.8개로 나왔으나 20년 뒤(1997) 보유율은 93.4%까지 올라가 그 즈음 절정을 이룬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이런 조사를 하지 않는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00손목시계가 정각 11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시보(時報)의 스폰서도 손목시계가 휴대폰에게 자리를 넘겨 준지도 오래됐다. 대신 고가의 예물이거나 유명인의 사인이 들어간 기념품은 여전히 애용되고.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도 2005년부터 시계 및 귀금속류의 가계지출이 연 4%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시계는 디지털 사회로 전환이 되기 시작한 중동이나 러시아에선 여전히 인기다.손목시계란 개념은 점점 엷어지고 휴대시계로 전환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우리의 머릿속엔 손목시계, 만년필은 여전히 남아 있다.만년필은 남자를 말한다. 편리함과 실용성을 제 1미덕으로 여겼던 현대인들은 만년필(萬年筆)대신 볼펜을 잡은 지가 이 삼 십 년이 훌쩍 흘렀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대명사인 만년필은 디지털시대에서도 여전히 사랑받는 애장품이 되고 있다.VIP스타일의 절정을 장식하는 것은 고급 옷도, 가방도, 신발도 아니고 손에서 노는 필기구다. 비즈니스 만남에서 말끔한 슈트 안주머니에서 꺼내든 고급스러운 만년필은 그 사람의 격과 가치체계를 높여준다.역사를 바꾼 결정적인 현장에서는 꼭 만년필이 등장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90년 헬무트 콜 서독총리와 디메제이로 동독총리가 `통일서약서` 서명순간에 사용된 만년필은 `몽블랑 마이스터틱 149`였다. 유럽연합(EU) 통합 비준안 서명 때는 `오로라 탈렌륨`을, 작곡가 푸치니는 `파커`로 유명한 `라 보엠`을 작곡했다.경제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대량생산보다는 소량생산 하는 수제품이 인기다. 고급만년필의 대명사인 몽블랑의 걸작(傑作) `마이스터스틱`라인은 1924년 첫 출시 후 한번도 특유의 고급스러움과 은근한 세련미의 형태가 바뀌지 않았던 것이 세계적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만년필은 몽블랑 솔리테어 로열라인의 1천250만원 짜리다.

2011-04-12

人時代(노인시대)

조물주는 참 현명하시다. 나이 들면 눈 귀를 멀게 해서 아는 것이 비워지도록 조절했다. 가뜩이나 아는 것이 많아서 앞으로 잘 나서는 노년의 심성을 미리 방비하신 현명함이 묻어 있다. 나이가 많아지고 여생이 평안해질수록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재색명리를 탐하다 추한 모습으로 떨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젊은 날 존경을 한몸에 받았지만 나이 먹어 노추의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해 세상을 실망시키는 일들이 인생 황혼기(晩節)기에 겪는 가장 뼈아픈 일이다. 18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다산 정약용은 다시 18년을 살면서 시(詩)와 저술(著述) 차(茶) 생활에 몰두함으로써 가장 곱고 아름다운 노년을 보냈다. 다산이 노년에 지은 시`밤(夜)`을 보면 길고 긴 겨울밤의 정취를 그리고 가난한 삶을 어떻게 바꿀 계책이 없건만 등잔불 비추는 데서 책 읽는 재미에 아무런 지장이 없음을 읊었다. 재색명리에 집착, 자신과 자녀 제 식구 안위에만 집착하는 천민부자와는 달리 다 같이 잘사는 것을 걱정한 다산의 정신세계를 흉내라도 내는 이가 지금 세상에는 몇 명이나 될까. 처칠이 노년에 그린 그림은 지금 시가로 6억 원에 넘나들 만큼 유명하다. 노년을 그림 그리기에 빠진 처칠은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처음 100년은 그림 그리는 데 쓰고 싶다”고 했을 만큼 아름답게 빠졌다. 저지난해 타계하신 김준성 경제부총리도 63살에 생활의 수레바퀴였던 관직을 떠나면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인 소설 쓰기에 몰두, 10여 편의 장 단편을 썼다.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38세)을 했지만 행원 생활로 문학의 꿈을 접었기 때문이다. 좀 일찍 공직에서 물러난 아버지가 낚시에 빠지는가 싶었다. 어느 날 산으로 발길을 돌려 정년도 정원도 없는 산길을 미친 듯이 헤매다 60이 넘어서야 서실을 찾고 찻그릇도 갖추어 시간을 한가하게 쓰는 가했는데 어느 사이 마당 한쪽에 철 따라 피는 꽃을 심어 집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동양정신에는 씨를 뿌리고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 자체가 자연의 순환이치나 영혼의 존재이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나이가 더 들면 단풍잎처럼 살 것을 주문한다. 단풍은 곱기도 하지만 삭풍이 불면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葉歸根)게 이치다. 티베트의 노인들은 중국에 구속받고 히말라야에 갇혀 절절히 외롭게, 가난하게 살지만 늘 베푸는 삶이니 정신건강이 아주 좋다. 그래서 티베트에는 치매를 앓는 노인도 없고 더욱이 우리처럼 노인을 외롭게 보내는 일은 없다. 노인은 많아서 좋은 점도 있고 불편스런 점도 있다. 동양정신에서 보면 노인은 존경의 대상이어서 중국에서는 노백성(百姓)이라 부른다. 백성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노사(師)로, 퇴계(退溪)를 더 높이 부를 때는 퇴로(退老), 목은(牧隱)을 목노(牧)라 했다. 지금 노인의 자화상은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귀찮은 존재로 밀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우리나라 농촌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다. 전국 평균 추세로 가더라도 올해 태어난 아이가 서른 살이 되면 적어도 노인 1명을, 10년이 더 가면 1.2명을 부양해야 하는데 아이는 갈수록 낳지 않아 올해 출산율이 1.12명까지 떨어질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낡은 것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자연의 윤회가 순조롭게 이루어져야만 건강한 사회가 될 터인데 지금 우리 사회는 노인이 사회적 부담으로 되어 가니….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럴수록 노인은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보다는 지금 사람과 더 친하게 지내고 버리고는 채우지 말아야 하는 순환의 이치대로 살아야 한다. 문화 중고등학교에서 지난 34년간 교목(校牧)으로 지내시면서 후진교육에 평생을 바친 강대권(姜大權) 목사가 초로(初老)가 되어 학교를 떠난다. 이런 분은 사회적 짐이 되지 않고 여전히 우리 사회를 밝게 이끌 것 같다.

2009-08-25

경주가 살려면

알은 시작을 알리는 첫 순서다. 알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성장은 삼국을 통일시키고 세상을 놀라게 할 단초가 되는 출발을 의미한다. 경주는 알의 신화로 출발해서 삼국을 통일시켰다. 경주는 천 년 신라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역사책 같은 도시다. 예술의 가치는 더 커 우리나라 역사에 신라와 신라 예술을 빼고는 어떤 자랑거리도 없다. 신라와 경주를 가장 상징적으로 내놓을 수 있고 그 다음이 서울이다. 석굴암 본존불은 당시에도 뛰어났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도 세계적으로 빼어난 불교 예술 작품이다. 석굴암을 조성하는 데 쓰인 화강암은 활화산 최고의 열에 의해 결정체가 된 불국지대 장항석이어서 경주 최고의 돌이다. 다른 옷을 걸치고 다른 석재를 썼다고 생각해보면 이런 예술의 가치가 나오겠는가. 간다라 불상의 색깔이었으면 누구도 찾지 않았을 것. 신라 돌 예술은 질박한 단순미가 예술의 결정체이며 결기가 넘친 거친 면은 자연이 알아서 해결해 주었으니 누가 말하지 않아도 끌어안고 만지고 싶어진다. 어머니의 정감 같은 것이 작품에서 느껴지기 때문이었을까. 천 년을 넘게 어루만져 석탑의 모서리나 불상의 허리, 뺨 부분은 반들반들 윤이 난다. 이것이 예술의 생명이자 신라 예술이 위대하다는 증거다. 신라인들은 학문과 예술은 물론이고 생사윤회를 일상처럼 훤히 들여다보는 불교 철학 등 어느 것 하나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경주의 미래 천 년 경주에는 지난 천 년이 있다. 도시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과거 천 년도 더 없이 중요하지만 미래 천 년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얼마나 있는가에서 생명력은 판가름난다. 지금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선덕여왕과 화랑들의 풍류도나 김동리 박목월의 스토리가 있었다면 미래 천 년을 이어줄 이야기는 바로 덧칠이 된다. 한국정신을 가장 강하게 표현해 내는 소산 박대성(小山 朴大成)미술관 건립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줄 장치이니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이참에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지홍 박봉수(知弘 朴奉洙), 내고 박생광, 청강 김영기, 청마 유치환 등 경주출신이거나 거쳐간 예술과 문학인들의 당대 최고 작품이나 유품들을 상설전시 할 공간을 두는 것이 날로 다양해지는 관광객들의 취향을 살리는 길. 또 한 두 시간 내에 둘러볼 사적지와 유료주차장은 무료화시켜 관광객들이 돌아서면 돈을 내는 짜증스러움에서 벗어나게도 해주게 하자. 심지어 철책 너머 한눈에 들어오는 사적지까지 푼돈에 가까운 입장료를 받는다. 이러니 시비가 있다. 경주시는 직접 걷는 방식 대신 영업이 잘되게 해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좋겠다. 감포(甘浦)는 달 감자를 쓴다. 감포 앞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는 감칠맛이 절로 나는가 하면 이 일대에서 나는 양파나 감자 고구마의 당도는 다른 지방에서 나는 것보다 한 단계 높다. 요즘 추세는 보는 관광, 먹는 관광이다. 경상남도가 난중일기에서 나오는 `이순신 장군 밥상`을 재현하는 것처럼 경주 고유음식을 재현하는 것,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을 행정 당국이 지금껏 놓치고 있다. 자립형 사립고 설립 반대하지 마라 한수원이 추진할 것으로 알려진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 설립은 빠를수록 좋다. 이런 학교의 설립이 한참이나 늦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답일 것이다. 지금 시대의 교육은 국경이 없는 무한경쟁지대. 포스코가 들어선 포항은 경주에 비해 인구나 경제규모 면에서는 크게 앞섰지만 교육만은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었다. 포항교육이 지역을 벗어나 전국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원인은 당시 포철이라는 튼튼한 재단에서 설립한 포철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 경주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인재기 나오는 데서 보장된다.

2009-08-18

광남서원 후손들의 깊고 깊은 고민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는 5백년을 살아온 영천(永川) 황보(皇甫)씨 집성촌이다. 아직도 마을주민 대부분이 조선의 문신 지봉(芝峰)공의 후손들일 만큼 집성촌으로서의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 구룡포읍 성동리 주민들의 깊고 깊은 고민은 정부가 정한 `국가산업단지 계획안`이 발표되고서부터다. 지난 6월2일부터 구룡포읍에서 가진 `환경영향평가서`안을 보면 마을 전체가 산업단지에 들어가 있다. 성동리는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 의해 척살된 충정공 지봉 황보(皇甫) 인(仁)을 봉안하고 그의 장자인 찬판공 황보 석(錫)과 둘째 장공 흠(欽)을 배향하기 위해 후손과 유림(儒林)들이 1791년 정조 15년에 세운 광남서원을 중심으로 1, 2, 3리에 나눠져 1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최근에는 `녹색농촌 체험마을` `메뚜기 마을` `전통 혼례청 마을`로 지정되어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곳이 됐다. 광남서원 지킬 후손이 필요하다 누대에 걸쳐 성동 3리에 살아온 황보 기(皇甫 祺, 70)씨는 “이 마을을 떠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광남서원을 공양할 후손자체가 없어지는 거 아니 냐”고 분개하고 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양반마을을 5백여 년을 지켰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된 유래 역시 드라마틱하다. 1387년에 태어난 황보 인은 조선 태종 14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8년에 병조판서가 됐으며 1440년 북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북방 6진을 김종서와 함께 개척하였고 문종 2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 때 김종서 등과 함께 척살되는 화를 입었는데 당시 노비였던 단량(丹良)이 공의 손자를 물동이에 넣어 대보면 집신골로 피난했다가 뇌성산 허리를 낀 성동으로 옮겨 집성촌을 이루었다. 충비(忠婢) 단량의 비(碑)가 서원 마당에 남아 있다. 창건 당시 세덕사로 불려 지다가 순조 31년(1831년)에 광남서원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고종 5년(1868년) 훼철되었다가 광무 4년(1900년) 후손들이 유허지에 다시 복원, 1941년에 묘우(廟宇)를 중창했다. 구룡포읍 침체 가속 더욱이 이 계획안은 구룡포 읍민들의 자존심도 많이 건드려 놓았다. 철거민들을 동해면 공당리 일대로 이주시킬 경우 구룡포읍 행정 마을 수는 28개에서 25개로, 인구 역시 1만1천명으로 줄어들게 된다고 한다. `포항 블루밸리 조성 주거지역 지정 건의서`에 따르면 1942년 구룡포는 읍으로 승격될 당시의 인구 3만5천 명에서 쇠락을 거듭했는데 성동리 마저 떨어져 나가면 지역 침체에 가속도가 붙어 4개 읍면 균형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 동해 구룡포 장기 일대에 건설될 국가산업단지는 당초 계획규모보다 30%가 축소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땅값이나 입주업체 유치 등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또 정부의 말처럼 성공할지도 미지수다. 특히 일본 기업인들은 한국 진출에 앞서 한·일 관계에 대한 눈치를 많이 본다. 한·일 관계가 늘 그렇듯 현해탄에 파고가 일 때마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으니 기업으로서도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 집성촌을 살리는 정책도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한국은 도시화에 밀려 우리가 진정으로 아껴야 할 옛것이 무차별 헐려나가고 있다. 황보(皇甫)씨의 마을까지 사라지면 집성촌이 포항에 몇 군데나 남게 되는지 살펴보라. 집성촌이 사라지면 고유문화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름다운 농촌마을마저 볼썽사나운 시멘트 상자 도시로 만들지 말고 빼어난 해안경관을 가진 산과 산 사이, 다랑이 논을 비켜간 산허리에 마을을 숨겨 놓는 고급스러운 정책을 통해 옛것과 전통도 보존하고 주민들의 삶도 융숭하게 만드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권유해 본다.

2009-07-28

중국 병마용 발굴 재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한꺼번에 등재되었다고 우리가 즐거워할 사이 중국은 고구려의 수도와 무덤까지 포함시켜 무려 38건이나 올렸다. 더욱이 중국 문화재 당국은 1985년 이후 중단했던 원산원 여산 야산에 있는 진시황(秦始皇:BC 259~210)병마용 발굴 작업을 지난달부터 재개했다. 중국 문화재 당국이 이번 발굴에서 노리는 문화재들은 병마용보다 역사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빼어난 가치를 인정받을 유물을 출토시킬 마음을 내심 품고 있는 것 같다. 1985년에 출토된 병마용과는 달리 시황이나 장군용이 발굴된다면 기원전 고도로 발전된 중국의 역사 문명을 알리고 출토 유물의 고고학적 가치를 통해 세계를 흥분시킬 금세기 최고의 발굴이 될 수 있다. 이미 첫 발굴 당시에 보지 못했던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와 채색을 한 병마용 들이 출토됐다면서 중국 언론들이 기사를 톱으로 키우는 등 흥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기원전(2200년) 시안에서 이미 채색을 한 용기를 인간이 사용했음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다. 더욱이 병마용에 입혀진 채색 안료가 자연계에선 한 번도 발견된 사실이 없는 화학 합성물질이어서 중국 고대문화의 깊이를 상상할 수 없게 한다. 병마용은 지난 1974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30km쯤 떨어진 여산(驪山) 산자락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1m쯤 아래 잘 다져진 적토 층을 뚫고 내려갔으나 물은 나오지 않고 팔다리를 닮은 도기(陶器) 조각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 농부는 사람 꼴이 갖춰진 도기를 새 쫓는 허수아비로 썼을 정도여서 숱한 병마용들이 국내외로 밀반출됐으며 허술한 발굴 작업이긴 했었지만 8천여 병사와 말의 모습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20세기 세계 최고의 발굴이 돼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쫓았던 진시황의 사후세계가 조금씩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경주에서 보는 신라고분과는 달리 야산 전체를 봉분으로 하고 있으니 여기저기에 매장돼 있을 문화재 규모는 워낙 방대해서 짐작할 수 없다.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 편을 보면 신화시대를 벗어나 실제 역사시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진시황(秦始皇)은 13살 진왕(秦王)에 오를 때부터 능묘 건설 공사에 들어가 6국을 통일 하기까지 37년간 공사를 벌였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49살에 죽었다. 능묘 건설 당시 가장 많이 인부가 동원됐을 때는 70만이 넘었다고 한다. 현재 밝혀진 무덤의 길이는 76m다.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200m쯤의 계단을 설치, 규모만 짐작하고 있을 뿐 진시황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등 주곽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할 만큼 방대한 규모다. 사기에 따르면 내와 강을 이룰 엄청난 양의 수은을 이용, 지하궁전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미뤄 도굴이 힘들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병마용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주장이 최근 나와 중국 고고학계를 시끄럽게도 했다. 건축학자 천칭위안(69)은 진시황릉과 병마용 발견지점이 거리가 너무 멀고 병마용 갱이 고대 황릉과는 달리 시황의 동쪽에 위치한 점을 들어 별개의 유물이라고 주장했었다. 어쨌든 이번 발굴을 통해 진시황과 고고학적 최고 가치에 이를 부장품을 발견했을 경우 황하문명의 우월성을 내세우면서 중국은 다시 거들먹거릴 것이다. 황하, 그 강은 유라시아의 황토 문화를 만들어 낸 땅인 동시에 중화제국의 상징이 되겠지만 황색 넘실거리는 물줄기가 거쳐 가는 땅마다 그 물을 마시고 살아온 이민족들에게는 삶과 문화의 무거운 질곡이기도 했었다는 점을 알아야 세계로부터 중국은 진정으로 존경받을 것이다.

2009-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