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관리들이 뇌물을 받다 적발되면 중죄로 다스려 졌다. 뇌물이 엽전 1천냥 정도면 장(杖)70대를 맞아야 하고 엽전 40관이면 장 100대에 3년간 노역을, 80관이 넘으면 교수형(絞首刑)에 처했다.
뇌물을 받아먹다 처벌을 받으면 벼슬살이를 평생 못할 뿐 아니라 자손들의 벼슬길까지 막았다. 한번 걸리면 집안이 망할 만큼 가혹했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많이 문란해져 흥선 대원군의 형인 흥인군(興寅君)은 권좌(權座)에 있을 때 아홉 곳간에 가득 쌓인 재물을 둘러보고서야 아침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청백리도 많았다. 중종 임금시절 청백리였던 김정국(正國)은 늘 다섯 가지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실은 세 가지 찬뿐이었다.
어느 날 시골에서 올라온 유생이 이를 보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은연중 꼬집었다. “숨겨 놓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이지. 밥상이 올라오면 식기 전에 먹으니 따뜻함이 하나요. 시장할 때 먹으니 시장이 또 다른 반찬일세”
전라도 황룡강변 수연산 여우목 굽어진 소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비목처럼 외롭게 백비(白碑: 높이 150cm, 폭 40cm)가 서 있다.
묘와 백비의 주인은 조선 명종 때 당대의 청백리 관원인 정혜공(貞惠公) 박수량(朴守良)이다. 명종이 사후에 세워준 국내에서는 하나뿐인 백비(비문이 없는 비)다.
박수량은 중종 9년(1514년, 24세)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 주학에 올라 중종·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호조, 공조, 예조, 대사헌까지 지내다 명종 9년(1554년) 64세로 청백리로서의 지조 높은 생애를 마쳤다.
박수량이 중종 25년에 올린 상소문을 보면 올곧은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첫째 임금에게 여자를 가까이 보이는 것은 정사를 어지럽게 하는 시초이고 뇌물은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
둘째 아첨하는 관원은 변방에 보내고 멀리해야 한다. 셋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동요하면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재물을 남용하면 국고가 비어 백성이 해롭고 청탁은 모든 일을 그르치니 사사로운 정을 두면 공도(公道)가 망한다”고 적었다.
그는 유언에서 무덤 봉분도 크게 만들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 박수량의 죽음을 애통해 한 명종은 비석에 그 행적을 새기는 것이야 말로 청백리 표상을 해치는 일이니 비문이 없는 흰 돌(백비)을 찾아 세우라는 어명을 내렸다.
명종 때 정승을 지낸 상진(尙震)의 증조부 상영부(尙英孚)는 당시로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재물을 모았는데 만년에 들어 사방 백리에 걸친 농민 들에게 놓은 장리 벼 증서 등 모든 증서를 산처럼 모아 놓고 불살라 버렸다. 그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는 것을 보고 반드시 좋은 후손이 날 것이라고 했다. 이 집에서 태어 난 사람이 상진 정승 이었다.
연초에 가진 장관 인사 청문회를 두고 `처갓집 청문회`라는 신문가십이 나온 적이 있다. 친가· 부모 형제는 쏙 빼고 처갓집 식구들하고만 부동산과 돈거래를 했는지 놀랍다. 정치인 관료로 높이 올라 갈수록 낳고 길러주고 공부시켜준 아버지·어머니 형제는 쏙 빼고 처갓집만 찾는 세태가 부패 시대를 고고히 외롭게 살아가는 청렴한 아버지를 더 외롭게 만들어 버린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 한다`고 했다. 처가는 원래 가까웠다.
장가(丈家)는 장인(처가)의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고구려부터 시작된 처가살이 전통은 조선중엽 성리학의 발달로 남성 중심의 가계가 개편되면서 금기시 됐으나 지금 같은 그런 형태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