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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라 종묘전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경주에는 사직단이 없다. 문중마다 묘당묘우는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나라를 열고 정신문화의 시조를 모실 사직단이 없다. 물질문명이 풍요로워지고 수출 7위, 세계 13위 경제대국이 될수록 출발의 기본과 정신문화의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경주는 정신문화의 고향이다. 한국 문학의 성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곳이 경주이기에 더 그렇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과정이 가려졌을 뿐 경주에는 여전히 해동의 빛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곳이다.우리나라하면 신라와 경주를 가장 상징적으로 내놓을 수 있고 다음이 서울이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걸작 예술 체계를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이자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국적인 예술을 간직한 역사도시다. 그래서 경주사람들과 신라 육성 후손, 범 신라김씨 후손들이 신라종묘전과 역사 문화관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신라 종묘전과 역사문화관 건립추진위원(위원장 장윤익)회는 남산이나 신라 왕경 주변 35만㎡의 부지에 전통 한옥 골기와 집(연면적 7천218㎡)을 짓기로 했다.영역별로는 먼저 화백회의를 탄생시킨 사로국 6부촌장전과 신라 56왕전을 비롯해 역사문화관 등 18채를 4년에서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준공할 계획이다. 이같은 성역화 대역사에는 398억원이 들어간다. 추진위원회측은 국책사업으로 추진해 줄 것을 정부 당국에 건의했다.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뜻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의 시원은 신라로 볼 수 있다. 민족의 시원을 신라로 보는 학술적 근거는 우리나라 성씨의 대부분이 경주중심의 신라 성씨에서 비롯됐다. 경주는 알의 신화로 출발해서 삼국을 통일시켰다. 알은 시작을 알리는 첫 순서다. 알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성장은 삼국을 통일시키고, 세계를 놀라게 할 단초가 되는 출발을 의미한다. 예술의 가치는 더 크다. 우리 역사에 신라와 신라 예술을 빼고는 어떤 자랑거리도 없다. 더욱이 신라가 통일을 한 이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계보는 사라졌다. 역사학자 이종욱 교수는 “현재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민족의 기원이 단군이라고 돼 있지만 이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신라 화백회의는 기원전 57년 전 일이다. 박혁거세 치세기간이었던 BC 58년은 서양에서는 로마의 영웅 카이자르가 로마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미미한 시기였지만 신라는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신라향가가 우리근대 문학사에서 되살아나듯 신라의 지배층은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의 귀족으로 남았고, 조선의 양반사회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봐서 신라사는 우리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석굴암 본존불은 대중을 향해 공손한 표정도 있고 부처로서 갖는 위엄과 자애로움을 모두 갖추었는가 하면 인체의 비례가 뛰어나 예술적 가치마저 백미에 이르렀다. 석재의 질감과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 불상이 간다라에 쓰인 붉은색 석재를 썼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예술의 가치가 나올 수 없다. 신라 예술이 세계에서 으뜸이 될 바탕이고, 혼이 담긴 불(佛)이다. 간다라에서 출발한 불상이 해동의 끝, 신라에 와서 완벽하게 태어났다.화엄학을 해동에 내놓은 원효스님이나 지금도 대문장가로 추앙받는 최치원을 비롯해 해동 필신(筆神) 김생, 김유신 등 숱한 인재가 나고 불국사 첨성대 등 나라를 대표할 문화유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역사의 현장은 여전히 잡초에 묻혀있고, 성벽과 초석은 담 모퉁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하면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고분은 역사적 가치조차 상실한 채 천대를 받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역사문화관은 이런 신라를 찾아내고 새롭게 정신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할 곳이다. 그러나 400억원 예산 확보가 문제다. 서해안 현수교 예산의 절반이 되지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막막할 뿐이다. 대통령 선거도 끝났으니 어디에다 기대볼꼬.

2013-01-08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술은 원래 신성한 음식이다. 인간과 신을 연결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제사장이 신에게 바쳤던 신성한 음식이자 음복(飮福)에서 빠질 수 없는 매개체로, 인간과 신이 하나로 되도록 하는 연결체다. 제사장이 신에게 올리는 술의 기원은 기원전부터다. 조상을 기리는 제사상에 술을 올리는 역사도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는 것을 보면 삼한 이전부터 술은 민중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우리 조상들은 새해 첫날이나 정월 보름날 아침에는 귀 밝게 술을 마시도록 했다. 반가운 손님이 왔을 때는 술을 빠뜨리는 적이 없었다. 술은 합일 정신을 가리킨다. 옛 혼례에서는 신랑신부가 술을 마시는 의식이 들어있고, 포도주를 마시는 천주교의 성스러운 종교의식은 천년을 넘게 이어졌다.조선시대 반가의 필수적인 덕목이 4대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에 대한 대우다. 반가(班家)일수록 4대 봉제사를 잘 모시는 것이 지체 높은 집안이 갖추어야 할 품격이었고,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 또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최대 배려로 보았다. 두 가지 일에는 반드시 술이 따랐다. 손님이 오면 사랑채를 지키는 가장은 술상을 봐 올 것을 안채에 시킨다.우리나라가 11년 째 고급위스키 소비 1위 국가라고 한다. 위스키의 본고장 사람들보다 더 마셨다는 통계다. 지난 한해 우리보다 6배나 인구가 많은 미국이 47만 상자를 소비한 데 비해 한국은 무려 69만 상자를 마셨다.우리나라 술 회사들의 매출규모도 만만치 않다. 연간 7조원에 이르고, 술과 관련된 산업의 매출 규모는 30조원에 이른다. 마시는 사람이야 하루 한 두병이지만 하루 100만 병의 술을 쏟아내는 대형 양조장이 있다고 한다(허시명의 `주당천리`, 2007년 출간).쌀이 귀했던 시절, 다산 정약용은 쌀을 허비하는 주범으로 술을 지목하고, 소줏고리를 없애자고 했었지만 지금은 창고에 쌓인 쌀을 가장 손쉽게 없애는 방법이 술이 됐다. 마을 전통주와 사라진 가주를 재현하는 데 정부 돈을 지원해주고, 품평회와 술 축제를 여는 세상으로 바뀌었다.막걸리 붐도 일었다. 막걸리를 마시면 다이어트에도 탁월한 효험이 있고, 건강에 좋다 해서 너도나도 막걸리를 찾고 있다. 일본인들마저 막걸리를 즐겨 마신다 해서 연일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덕에 지난해 막걸리 점유율이 12%까지 올라서기는 했으나 농민이 갖는 소형 양조장이 아니라 자본이 넉넉한 대형 양조장의 몫이 돼 버린 게 문제다. 막걸리 붐은 쌀을 사용하면서 품질이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황에서 빠져 나가려는 지혜도 숨어 있다. 만 원이면 두 사람이 거뜬하게 배를 채울 수 있고, 건강 지키기 트렌드에도 부합되는 장점이 있다.우리 술은 원래 가정에서 빚는 것이고, 허가를 받는 것은 일제 강점시대 유산이다. 일본의 `사케`처럼 지방마다 특색 있는 술을 내는 것이 죽어가는 농촌을 살리는 길이다. 이미 공주지방 밤 막걸리는 명품이 됐다.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가양주(家釀酒)를 만들었으니 천 가지는 넘었을 것이다. 지금도 300종류는 만들 수 있으니 전통술을 다양화시키고 품질, 외모를 고급화해서 마을산업으로 키우면 남아도는 쌀도 소비하고, 농가 소득도 높이고, 전통도 이을 수 있어 모두가 좋다.양조장과 마을 비주로 이원화시키고, 인터넷 판매 등 유통과정도 현대화시켜 볼 만하다.그렇지만 한국이 술 소비대국으로 비치는 것은 좋지 않다.알콜 중독, 도박, 인터넷, 마약 등 4대 중독국가로 부상되는 것은 극히 좋지 않다. 오죽했으면 경찰이 주폭(酒暴)과의 전쟁을 선포했을까. 4대 중독이 모두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수치이긴 하지만 유독 주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국인이 우스개 꺼리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칠까 두렵다.

2012-12-18

무속(巫俗)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요즘 가수 싸이가 세계적으로 뜨고 있다. 마치 접신(接神)이 된 것처럼 세상 가요계를 지배하고 있다. 가수 싸이를 보면 상식으로는 그 많은 관중을 이끌고 흥분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온다. 세계적 아티스트 백남준도 무속에서 작품의 소재를 건졌다. 접신은 자기가 전공한 분야에서 신의 경지에 들어갔을 만큼 최고가 되었다고 칭송하는 말이다. 신라 시조 왕 박혁거세나 남해 차차웅이란 이름도 접신을 한 제사장을 가리킨다. 갑골문이 탄생한 배경도 신으로 행세한 제사장에 의해 부호로 표기되는 것이 시작이었다.경주에는 원래 창조의 신이 많은 곳이다. 가냘픈 무녀(巫女)가 60관이 나가는 돼지를 한손으로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신의 경지에 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경주 삼릉계곡을 한참 오르다보면 장육 삼존불에 이른다. 지금은 이곳에서 무속(巫俗)행위를 할 수 없지만 60~70년 대에는 무속들이 벌이는 굿거리가 수시로 열렸던 곳이다. 절정에 오른 무녀가 작두를 타고 하늘로 솟구칠 때는 장육삼존불 허리까지 외씨버선발이 치고 올라가고 내린다. 상식으로는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무녀가 더 높이 뛰어 오를수록 굿판은 신비스럽고, 흥겨워져 여기저기서 복채가 많이 나온다.3000년 이전 하·은 나라가 황하유역에서 자리 잡았을 시기, 거북의 등껍질에 난 금을 보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쳤다. 중국 신화시대가 지나고 역사시대로 넘어 갈 시기이었으니 인간의 점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채도(彩陶· 채색도기)가 출토된 앙소 유적지나 용산 문화지대(중국 역사시대 유적지)에서는 등껍질보다는 거북 배 바닥에 난 금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이 등껍질보다 훨씬 영험이 더 서렸다고 한다. 은나라 지역에서 출토된 갑골은 기원전 3000년 시대라는 주장도 있다.미신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자기와 얽힌 행운에 대해서는 의외로 집착한다. 소득이 높은 국가일수록 더 먹혀서 홍콩이나 싱가포르, 미국 LA, 상해에서마저 큰 건물을 지을 때는 풍수로부터 조언을 받는다고 한다. `미신의 심리학`저자 수튜어트 바이즈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기 위한 일종의 자기 암시가 미신”이며 “어떤 행위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열심히 따른다면 좋은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우리나라에선 3이 행운의 숫자여서 무엇이든 세 판이라야 분이 풀린다. 어째든 우리는 4가 나쁜 숫자인 반면 서양에서는 7이, 중국에서는 8이 반가운 숫자다. 미국의 학생 39%가 중요한 시험을 칠 때마다 자신이 믿는 물건을 지니거나 종교적 주술 등 특별한 행동을 한다는 것도 자기 암시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꿈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신 부모 모습은 열흘쯤 지나면 잘 나타난다. 술 담배로 정신이 흐려진 남자보다는 영성이 맑은 여자 꿈에 잘 나타난다. 사업가들을 보면 큰 꿈은 여자가 잘 꾼다.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시절 풍수지리와 관상학에 깊이 빠진 적이 있었다. 공부 수준이 상당히 깊이 들어갔으나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던 어느 날 주역을 뒤적이다가 마음을 훤히 밝혀주는 글귀하나로 그 동안의 공부(易)를 놓아 버렸다고 한다. `빈부귀천(貧富貴賤)이 재어사주(在於四柱)니, 사주(四柱)가 불여(不與) 관상(觀相)이요, 관상(觀相)이 불여(不與) 심상(心相)`이라는 대목이었다. 그는 크게 깨치고 풍수(風水)와 관상학(觀相學)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귀(富貴)빈천(貧賤)이 사주에 나와 있다고 하나 그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뜯어 고치는 주체는 마음에 달려 있다.어느덧 연말이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무인(巫人)이 내놓은 계사(癸巳)년 나라의 점괘는 “내년에는 어려운 한해가 될 거다. 내 후년이 되며 바늘구멍 같은 빛이 보이다가 3년 후면 나라 운이 활짝 필 겁니다.”올해도 힘든 한해였지만 내년은 더 어려울 모양이다.

2012-12-11

광개토왕비(2)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암각화에서 제사장이 탄생시킨 갑골문자는 세월을 두고 꾸준히 발전해서 오체를 만들었다. 갑골문이 가장 잘 나타난 금석문은 요동 벌을 호령한 고구려 19대 광개토왕 비석에서 볼 수 있는 비문이다. 선이 가늘지만 힘이 있고 고졸하고 변화무상하다. 갑골문에서 발달된 전한(前漢)대 오체가 가장 잘 살려졌다. 임신서기석이나 포항시 신광면 냉수리비, 울진 봉평리 신라 고비보다 더 수려하고 힘이 넘치는 글 획으로 채워져 있는 우리나라 최고 문화재이자 동아시아의 역사서이다. 고졸하고 뼈다귀 골격이 살아 숨 쉬는 광개토왕능비의 수준은 안진경체를 넘는 것으로 4세기 고구려 문화가 정점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서는 환원의 이치까지 후세에 남겼다. 더욱이 고구려 신라 비는 조선시대 비보다 더 강한 돌을 써서 문화재적 가치도 높다. 국내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초기 비의 음각된 글자가 풍화작용에 마멸 정도가 심한 것은 상대적으로 석질이 무른 돌을 썼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구려·신라 비의 글 선이 천년 풍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석질이 강한 돌일수록 글 획을 깊이 파고, 글 선을 살리기 힘든 것을 극복한 장인정신이 깃들었기 때문이다.우리 서예 역사를 살펴보면 광개토왕비의 글씨를 환생시킨 후생이 해동 서성(書聖)김생이다. 김생 이후로는 기교만 살린 글이 난무하다 조선시대 말에 가서야 추사 김정희 대에 가서야 김생환원이 됐다.8세기 당(唐)대를 살았던 학사들은 해동 신라인 김생의 글 앞에서 절을 올리고 친견을 했다고 한다. 글체가 얼마나 힘이 있고 수려했던지 천둥 벼락 치는 느낌이 내면에서 솟아오른다고 적었다. 해동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탄생했지만 당나라 학자들이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물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신라(김생), 당(왕휘지), 왜에서 살았던 세 명의 걸출한 학사 가운데 당도, 왜도 신라의 김생을 으뜸으로 꼽았다. 한국 서예의 전형(典型)을 처음 세운 김생(金生·711~791)을 통해 우리 서예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내일을 살펴 볼 수 있게 된다.글체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도 있었다. 왕조시대에는 당나라나 해동 모두 초서보다는 해서 예서 같은 얌전한 글씨가 발전했다. 신하가 왕 앞에서 글 획이 자유스럽고 삐침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초서를 당연히 쓸 수 없는 반면 왕이나 황제의 글씨는 초서가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무장의 글씨는 눈치 안보는 초서가 많다.퇴계 이황이나 서애 유성룡의 글체는 너무나 얌전하다. 이런 전통은 중국 공산당 모택동까지 이어졌다. 모야 자신이 황제나 마찬가지였으니 초서를 갈겨써도 탓할 관료가 없었을 것이다.서법이 있고 그림은 법이 없다. 노송일지도(松一支圖)에서 세월을 머금고 비뚤어진 관솔가지가 글씨의 한 획이 될 수 있었던 반면 동양화는 장강만리를 장지 한 장에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서(書)는 법이 따르고, 화(畵)는 여여 하여 절제의 미(美), 숨겨진 언어(메타포)가 필요한 것이 다르다.그림이나 글씨모두 여백이나 선을 중요시하는 것을 빼고는 한번 붓 간곳은 다시 고칠 수 없고, 붓 길의 속사의 이치는 같다. 얼마든지 다시 고치고 그리는 서양화는 달리 힘들고 발묵하는 기교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김생의 금석문 연구를 새로 시작하고 글씨 재현에 몰두하는 소산 박대성 화백은 오는 12월26일 필신(筆神)김생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안동에서 탄생 1300년을 기념하는 해동서성김생특별전(海東書聖金生特別展)을 연다.

2012-12-04

광개토왕비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중국 길림성 집안현(集安縣)에 세운 선왕 광개토왕(고구려 19대왕, 375~413)비는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비석이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도 100비 내에 올리고 자기네 동북아 역사편년에 넣고 있다. 전혀 다듬지 않은 화강암(높이 6.39m, 너비 1.38~2m)에 전서에 가까운 예서 1천775자가 음각돼 더 거대하다. 글씨체는 전한(前漢)시대다. 호태왕비는 청나라 봉건주의가 몰락되었던 조선후기까지 확인되지 못함으로써 신묘년조 논란에다 155자 가량이 무리한 탑본으로 판독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광개토왕비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시조 동명성왕이 나라의 기틀을 세운 기록이다. “천제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며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나면서부터 거룩한 △을 갖추셨다.중략 비류곡(沸流谷)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1천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성을 고구려 영토에 편입시킨 광개토왕의 정복전쟁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능비의 건립을 밝히는 마지막 부분은 3면8행부터 4면9행까지이다. 이런 역사기록이야말로 4세기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 사회 문화현황을 연대별로 알 수 있을 진실한 기록물이어서 중국에서도 절대가치를 인정하는 국보로 보호 받는다.이곳을 방문했었던 한국화가 소산(小山) 박대성(朴大成) 화백은 집안에서 압록강을 바라보는 광개토왕능비를 처음 보는 순간 작은 산이 가린 것처럼 거대하게 보였다고 한다. 갑골문에서 나온 전 예서체의 글체를 보고 더 놀랐다고 한다. 글을 쓴 선지식이 밝혀졌다면 8세기 동아시아의 서성(書聖)으로 평가받았던 신라 김생의 수준을 뛰어넘었을 것이라고 했다. 비석의 글체는 한 자 한 자 뼈가 살아있고 고졸한 느낌이 들다가도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기가 서려 있고, 글 획 마다 제비꼬리 같은 아름다움이 살려진 글체가 천둥 벼락이 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소산화백은 그날 이후부터 금석문 등 글체 연구에 더 빠져 들었다고 한다.일찍이 해동 대문장가로는 고운 최치원(857~경주 사량부)이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지은 `황소의 난` 격문은 지금도 유명하다. 고운의 격문을 본 반란의 주인공, 황소는 양심의 가책으로 비틀거리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그런 최치원도 신라에 돌아와서는 6두품 벼슬로 천대받았다. 중국 양주에는 최치원 기념관과 최치원 마라톤, 백일장이 해마다 열린다. 중국에는 공자가 없고, 한국에는 최치원이 없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김생은 글씨로 해동서성(海東書聖)에 올랐다. 400년을 앞서 김생을 능가하는 또 한 사람의 서성(書聖)이 고구려 땅에 있었지만 비문 말미에 이름을 남기지 않아 필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아쉬울 뿐이다. 금석문에 푹 빠진 한국화가 소산은 동아시아에 크게 알려진 안진경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호태왕비의 글체가 빼어나다고 지적했다. 당시 고구려에서 유행했을 글체는 동 아시아의 권력구도와 문화를 집대성한다. 광개토왕이 동아시아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도 문화적 힘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 역사의 흐름이 이를 증명해 준다.호태왕 비는 인간의 손이 전혀 미치지 않은 자연석이다. 원래는 부부(夫婦)석이었다. 어느 날 현몽에서 백발의 신령이 나타나 이 돌은 국가의 미래를 밝히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바로 집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로서는 집채보다 더 큰 거석을 옮기는 기술이 없었으니 탄생부터 강대한 고구려의 기운을 받았던 신령스런 돌이었다. 문자는 상은시대 암각화에서 출발, 제사장(祭司長)이 갑골문을 탄생시켰다.

2012-11-27

금장대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지난 여름 경주 금장대(藏臺, 한옥단청누각 154㎡)가 준공됐다. 강변도로를 달리던 사람들이 차를 세워두고 다시 보고 갈만큼 명소가 됐다. 신라 사람들은 질 좋은 돌(화강암)에 서원할 내용을 쓰고, 성스러운 산마루에 세우거나 묻었다. 1935년 경주보통학교(계림초등학교 전신) 교장과 경주 고적보존회(국립 경주박물관) 회장을 지낸 오사까 긴따로(大阪金太郞)가 금장낙조로 이름난 이곳 나들이에서 글씨가 음각된 비석을 주웠다.글자를 판독해 보니 신라의 두 청년이 “임신년 6월 두 사람은 하늘에 맹세한다. 3년 동안 나라에 충성하고 큰 일이 없기를 빌며,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하늘이 큰 벌을 내려도 감수하고, 난세가 되더라도 이 약속은 지킬 것”을 서원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었다. 신라인들의 희귀한 정신문화재다.금장대는 신라의 영산(靈山)이다. 산 밑에는 남천·북천·서천 물이 모아지는 여울목이 있고, 산꼭대기에 오르면 신라 오악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1976년에 발견된 암각화(방패·고깔·나무 잎)로 보면 선사시대부터 경주인들의 삶과 내세가 연결되는 성스러운 곳이 됐다.근세에 들어서는 김동리를 세상에 드러내게 한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되어서 더 유명해 졌다.-모화 집 마당에는 예년과 다름없이 잡풀이 엉기고, 늙은 개구리와 지렁이들이 그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거의 굿을 나가지 않고, 매일 그 찌그러져가는 묵은 기와집, 잡초 속에서 혼자서 징 꽹과리만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화가 인제 아주 미친 것이라 하였다. 그녀는 다만 “우리 아들을 예수 귀신이 잡아갔소”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까운 모화 굿을 언제 또 볼꼬?” 사람들이 모화를 아주 실신한 사람으로 치고 이렇게 아까워하곤 했다. 이러할 즈음에 모화의 마지막 굿이 열린다는 소문이 났다. 읍내 어느 부잣집 며느리가 `예기소`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녀는 “흥, 예수 귀신이 진짠가 신령님이 진짠가 두고 보자” 이렇게 장담했다. 굿이 열린 백사장 서북쪽으로는 검푸른 소물이 깊이 비밀과 원한을 품은 채 조용히 굽이돌아 흘러내리고 있었다.모화는 김씨 부인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사연을 한참씩 넋두리 하다가는 전악들의 젓대, 피리, 해금에 맞추어 춤을 덩실거렸다. 밤중이 되어서였다. 혼백이 건져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랑이들과 작은 무당들이 몇 번이나 초망자(招亡者) 줄에 밥그릇을 달아 물속에 던져도 밥그릇 속에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김씨가 초혼에 응하질 않는 모양이라 했다.모화는 조금도 서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넋대를 잡고 물가로 들어섰다. “일어나소 일어나소, 서른세 살 월성 김씨 대주부인, 방성으로 태어날 때 칠성에 복을 빌어” 모화는 넋대로 물을 휘저으며 진정 목이 멘 소리로 혼백을 불렀다. “삼단머리 흐트러져 물귀신이 되단 말가” 모화는 넋 대를 따라 점점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옷이 물에 젖어 한 가락 몸에 휘감기고, 한 자락 물에 떠서 나부꼈다. 검은 물은 그녀의 허리를 잠그고 점점 부풀어 오른다…. 그녀는 차츰 목소리가 멀어지며 넋두리도 허황해지기 시작했다. 모화의 몸은 그 넋두리와 함께 물속에 아주 잠겨져 버렸다.(김동리 소설 `무녀도` 중 예기소에서 굿하는 장면)-무녀도는 김동리(金東里, 1943~1995)가 쓴 단편소설이다. 금장대(藏臺)는 신라 화랑세기에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기록이 된 것으로 봐서 그 때부터 애기소와 어우러진 금장대의 빼어난 배경으로 인해 신국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선비나 풍류객들이 짙푸른 소를 바라보며 시를 지은 곳이다. 특히 1450~1600년까지 많은 시인이 다녀간 흔적이 시가로 남아있다.한옥누각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현판이다. 금장대 현판은 경주가 낳은 영남 명필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선생이 썼다. 현판글씨는 건물의 격(格)과 조성한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어 당대의 명필만이 붓을 잡기에 유명하다.

2012-11-20

나오지 못하는 땅 타클라마칸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헛꿈을 많이들 꾼다. 자고 밥 먹고를 되풀이하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런 헛꿈을 꾸는 사람들로 세상이 채워지고, 자신의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몸을 던져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는 보통 삶으로만 채울 뿐이다. 몸을 던져 일상을 깨어버린 성철(1912~93) 스님의 구도열정은 위대하다. 이보다 더 위대한 분이 신라 혜초 스님이다.21세기의 실크로드는 자동차로 달리고 비행기로 적당한 지점에 내려서 며칠 쉬었다가 갈 수도 있다. 중국 둔황에서 현대문명의 이기를 빌려 사막을 넘어도 온몸이 마르고 헉헉거리면서 며칠을 가도 사막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생의 삶이다.먼저 간 구도자의 해골바가지가 나침반과 길 표준으로 삼았던 혜초는 해동 최초의 해외 여행가이자 진취적 선인(先人)이어서 지금처럼 사는 사람들은 접근조차 어려운 삶을 살았던 분이시다. 함께 배로 천축 땅을 밟았던 80명의 도반을 잃고, 당나라에 돌아온 신라 승이다.혜초가 남긴 두루마리 여행기에 담긴 시는 국문학적 가사로서도 높이 평가 받는다. 혜초 등 구도자들이 걸은 길은 광활한 사막뿐이다.정말 이 먼 세월, 살아남은 것은 오직 사막뿐이고, 살아있는 것은 지나가는 나그네일 것이다. 벌레는 전갈에게, 전갈은 나는 새에게 먹히고, 먹히는 모두가 죽을 운명에 처한 곳이 사막이다. 죽어 바짝 마른 빈껍데기가 되지만 이 세대가 가고나면 다음 사람이 오는 곳, 이것이 불변의 윤회 법칙이다.사는 모습이 가지가지이듯 죽는 방법도 여기저기 이사람 저사람 그저 그렇게 보일뿐이지만 살아있는 것은 모두 떠나고 만다. 겸익(백제승으로 추정), 아발도, 법현, 현장, 혜초 스님도 지났을 땅이다. 숱한 세월동안 사람은 지나갔지만 결국 남는 것은 광활한 이 사막이다. 베푸는 나와 베풂을 받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同體慈悲)이 아니라 아낌없이 온몸을 던져 이 너른 땅을 지킨 사람들이다.중국 둔황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거친 사막을 건너기에 앞서 여장을 점검하고 체력을 추스르는 마지막 주유소 같은 곳이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불법을 세운 땅(천축)이자 석굴사원으로 가는 머나먼 구법(求法)여행을 위해 수도승(修道僧)들은 둔황에 묵으면서 화엄학을 세상에 내놓은 해동 성사(聖師)원효의 `대승신기론소`를 암송하고, 무탈 여행을 염원했을 것이다.타클라마칸은 위구르어로 `오래된 안식처`또는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하는 땅`이란 뜻이 담겨 있다. 너무 넓고 험한 사막, 동에서 서쪽으로, 서에서 동쪽으로 가든 목숨을 걸고 걸어야 하는 곳이다.타클라마칸에서 자주 만나는 낙타는 영물. 이 낙타는 사막의 한 가운데서 내 등에 탄 사람을 흔들어 버리면 모래밭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물이다.낙타를 부리는 위구르 사람들은 오아시스에 닿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고 심한 매질을 하고는 머리에 쓴 터번이나 모자를 던져주어 인간의 냄새를 기억하게 만든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어젯밤에 쌓인 낙타와의 원한을 씻을 먹이를 풍부하게 주어서 인간을 태우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이치를 알게 한다는 것.물론 지금은 여행자를 멀지 않은 거리를 태워주고 생활비를 챙기고 있으니 예전과 같은 위험한 길은 없다.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세월을 두고 이들이 터득한 방법이다.걷는 것은 희망을 주고,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힘들게 했던 순간들을 정리하는 방법이다. 걷기에 딱 좋은 계절이니 모든 걸 던져버리고 동네길이라도 걸으면서 자신을 정리해 볼 늦가을이다.

2012-11-13

그리운 금강산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금강산 그림은 겸재 정선(鄭敾:1676~1759)만큼 잘 그린 사람은 우리 역사에는 없을 것이다. 삼성 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국보 217호 금강전도(1734년, 종이에 엷은 채색 94×130.6cm)나 고려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금강도(剛山全圖:絹本淡彩 34×28.5cm)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한 송이의 꽃으로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림 상단에 빼곡하게 쓴 제발(제사(題辭)와 발문(跋文)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도 겸재만이 갖는 시각이 표현돼 있다. 경상도 청하현감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내연산 폭포(리움소장)도 절벽을 휘감는 물길모습이 금강전도의 아름다움에 비길만하다. 17세기를 살았던 겸재가 금강전도에서 새로운 기법을 등장시킨 것은 당시 유행했던 실학과 국문학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겸재가 우리 자연에 대한 관심은 중국전통회화를 답습하는 시대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움직임이다.일설에는 16세기 후반 가사문학(歌辭文學)을 일구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63~1594)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나오는 외금강 가사가 겸재를 끌어 들였을 것이라고들 했다.며칠 전 골동상을 40년 넘게 들락거린 지인이 “내게는 왜 겸재의 그림이 손에 닿지 않았을까하는 회한이 늘 사무친다”고 말하면서 겸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네 환쟁이의 금강산그림이 어렵사리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장지바닥에 담채로 그려진 금강도는 직선화법의 봉우리 모습이 겸재의 진경산수 전통화법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조선시대 민화에서 나타나는 익살스런 맛이 봉우리마다 달리 그려져 민화수준을 뛰어넘는 그림이었다고 한다.당시에도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민초들의 애환을 장지바닥에 옮겨 그 한들을 풀어 주었던 것 같다. 금강산은 그만큼 유명하다.겸재보다는 한참 늦게 태어난 최북(崔北·1712~?)은 내금강 구룡연을 둘러보다 돌연 천하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며 뛰어내렸으나 죽지는 않았다. 중국 회화에서 우리 것을 고집했던 최북(일명 최칠)은 만년에 들어서 자신을 환쟁이로 보는 세상이 싫어서 자신의 눈을 뽑아버리고, 기행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진 그 시대의 불우한 선지식이었다.경주 배동에서 삼릉능지기로 자처하면서 살아가는 소산 박대성 화백의 금강도는 현존 작가로서는 가장 유명하다. 소산은 금강전도를 어안도로 그렸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인간의 근원지인 집이라는 상징물을 절묘하게 들어 앉혔다. 먹과 붓이 뒤섞이며 강렬한 에너지가 그림을 흔드니 이것이 수묵이 갖는 카오스다.명산이 있어 천하명인(天下名人)이 태어나는 법이다.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이 이 산의 아름다움을 그렸고, 21세기에 들어서는 먹 하나를 붙들고 40년을 치열하게 산 박대성 화백이 천하명산을 재조명했다.금강산은 사계절마다 풍악산 개골산으로 이름이 달리 붙는 것이 또한 천하(天下)명산(名山)답다.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 해동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는 화엄경(華嚴經)에서 유래했다.불교적 명칭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조선시대 유생들이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삼신산의 이름을 하나 더 붙였으니 봉래산이다. 금강산에 대한 간절함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의 문턱이 될 만큼 강렬하다.필자는 처음엔 배타는 것이 싫어서 미루었고, 두 번째는 국제로타리에서 아프리카 아시아를 돕는 자원봉사에 빠져 육로로 가는 여행조차 놓쳐 버렸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벌써 4년째다. 12월 대선이 끝나고 남북관계가 풀려 금강산 가는 길이 열리면 이번에 맨 먼저 신청서를 쓰겠다.

2012-11-06

우리는 근세사를 잊어버리면 안된다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뼈아픈 기억은 일제 강점기 36년간이다. 아직도 그 뒤처리를 말끔히 하지 못하고 있다. 강제 징병과 징용, 정신대의 상흔이 가슴깊이 남아 있는가하면 그 원혼들이 만주 땅과 연해주 남태평양의 정글에서 지금껏 떠돌아다니지 않는가.같은 말을 주고받는 동포끼리, 부모 형제가 서로 총질을 했던 한국전쟁의 비극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다.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의 슬픔도 쉽게 아물지 않을, 깊고 깊은 상처다.한 시대를 먼저 살다 가신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역사는 말을 하지 않지만 역사는 무한의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지혜의 눈과 용기의 입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말을 하게 한다”고 말했듯이 인류는 길고 긴 세월동안의 역사를 교훈삼아 미래의 행복을 추구한다.세계 역사를 보면 지도자는 위기에서 더 빛이 난다. 영웅은 전쟁 이상 가는 난세에서 태어난다고 했었지만 우리 근세사를 되돌아보면 불행하게도 그런 영웅이 없었다. 25살 나이의 원세개가 청군 800명을 이끌고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개화파를 사흘 만에 전격 진압한 역사적 사실만도 그렇다. 친일, 친청, 친러로 나누어 패 갈림으로 허구한 날을 허비했던 19세기, 구한말을 지나던 우리 지도자들은 왜 그리도 못났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사실 축구경기에서 스트라이커의 화려한 경기는 누구도 탐낼만한 하지만 어시스트를 잘해주는 동료선수가 있어 가능하다. 한국인의 정치나 사회질서가 어려운 것도 이런 민족성 때문일 수 있다.진정하게 앞서가는 길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하는 것.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하듯이 평등을 무등·무서열로 잘못이해하면 안된다. 머리가 강을 건너야만 꼬리가 닿는다. 호랑이를 이길 진돗개의 영리함과 기개를 갖추었지만 같이 달리면 끝은 보나마나하다.지금 대선 판을 보면 정치적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앞을 밟고 나가는 행동이 대를 잇고 있다. 이런 판이 되풀이 된다면 인적쇄신이 이뤄져도 한번 불신감에 빠져든 국민들의 마음을 다시 얻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갈수록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변화 물살이 너무 거세지고있다. 세계의 싱크탱크들이 경쟁적으로 내놓는 향후 10년의 예측 상황 보고서들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것들을 간추려보면 흥미롭기도 하지만 마음이 편치 못한 부분도 더러 있다.우선 2015년에 가면 한국은 3대 현안에 직면하게 된다고 한다. 이미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거론된 남북한의 대칭구도가 있다. 중국이 굴기(屈起)하고 일본이 욱일승천(旭日昇天)하면 그 사이에 낀 한반도는 언제나 위태위태했던 구한말과 같은, 과거 역사에 나타난 국가의 운명이다.또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다. 중국은 이미 국민총생산 5조 달러를 달성, 지난 100년간 뒤처졌던 일본을 추월했다. 그런데 이 중국이 2015년에 가면 10조 달러를 넘어서 미국의 19조 달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물론 미국의 상대적 우위는 여전히 선명하지만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수직 상향으로 올라갈 전망이다. 미국은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지금처럼 군사비를 계속 삭감할 것이고, 우린 2015년으로 연기됐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점에 들어선다.김정은의 북한체제 또한 우리의 가장 큰 고민거리이자 부담이다. 핵과 선군정치는 남한사회에 천안함 사태 같은 고통을 안길 것이다. 한국은 북한이 어떻게 나오든 생존 전략을 도와야 한다. 개발 독재성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후유증으로 국론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고, 성장과 복지, 노사문제도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 대통령선거는 무척 중요하다. 근세사 100년을 마감하면서 국민 모두에게 꿈을 키워주고, 미래에 대한 약속을 지켜주면서 부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필요하다.

2012-10-30

수필가 박원의 내공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장 임기를 막 끝낸 수필가 박원은 경주를 가장 잘 아는 고수이다. 경주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야가 없다. 그만큼 내공이 깊은 문학가다. 박원의 말을 빌리면 경주는 한국문학의 성지다. 일찍이 고대국가의 도읍지였으며, 반만년 역사의 뿌리가 되는 땅이자 우리문학의 싹을 틔운 정신문화의 고향으로, 밝은 얼굴과 핏줄의 뜨거움을 갖는 도시가 되었단다.신라 향가 가운데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는 나라의 기강이 되는 정치적 원동력을 알게 했으며, `처용가`한 구절로써 그 시대 사회상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원앙생가`를 통해서는 시공을 초월하는 신라인들의 종교관을 이해할 수 있었고, `제망매가`에서는 높은 문학성을, `찬기파랑가`에 비친 화랑의 기개도 대단하지만 내면적 성찰은 오늘날까지도 교훈이 되었다. 이렇듯 `헌화가``혜성가``모죽지랑가`와 같은 현존하는 신라향가 14수는 우리민족의 DNA를 인식시켜주는 교과서적 경전이라는 해설을 달고 있다.박원 선생은 김시습에도 빠져있다. 아마도 설잠의 방랑벽이 그를 일깨웠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의 사회적 정변을 뒤로 하고, 팔도를 유람했던 김시습의 내면세계나 박원 선생이 겪었던 부산일보 사회부기자, 언론사 사장 등 금전과는 늘 일정 거리를 두었던 산림처사(隱人)의 행장(行狀)으로 보면 질곡의 세월은 시대만 달랐을 뿐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설잠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경주 수필가협회(회장 김형섭) 문우들과 더불어 서남산 용장사 산방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한 설잠 김시습의 문학행사를 여는 것이 또 하나의 소박한 꿈이다.박원은 현대사를 발굴하는데도 내공이 깊다. 토함산 해맞이로 아침을 여는 동남산 작은 절집 옥룡암(玉龍菴)이 `청포도`의 산실이 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해 냈다. 민족적 저항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육사(陸史)가 시(詩)작에 몰두했던 시기, 수봉재단 설립자의 3세손인 이식우(경주고등학교 교장)선생과 당시 생불(生佛)로 추앙받았던 만석 스님이 주석했던 옥룡암에서 육사를 숨기고 후원했던 사실이 하마터면 역사에 영원히 묻힐 뻔 했다.만석 스님으로 말하자면 성철, 청담, 경봉스님과 함께 일찍부터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화두(話頭)를 붙들고, 면벽수행을 했던 학덕 높은 선승이었다. 육사는 이 작은 절집, 비 새는 요사채 섬돌아래서 귀뚜리 울음을 벗 삼아 명시(名詩) `청포도`를 지었다. 육사의 병구완과 조섭을 도운 신석초(申石艸), 김범부(金凡父)의 얘기도 눈물이 가리는 시대의 아픔이다.박원은 글씨를 보는데도 조예가 깊다. 8세기를 살았던 김생의 글씨는 당나라의 서예가 왕휘지를 앞섰다. 당시 당나라의 학자들은 김생의 글씨를 보고, 벼락 천둥이 치는 느낌을 한자 한자 삐침이 나오는 글 획에서 받았다고 하며, 글체가 얼마나 고졸하고 떨림을 주었던지 절을 올리고 보았다고들 한다.이런 김생의 글체를 이은 분이 조선시대 후반기를 살은 추사다. 김생의 글씨는 실존하는 것을 보기 힘들지만 추사체를 보고 싶으면 옥룡암 작은 초당에 걸린 현판 `일로향각`을 보러 가면 된다.이렇듯 경주 남산은 그가 가장 즐겨 찾는 곳이며, 삼화령에서 칠불암에 이르기까지 호흡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남산을 태백줄기의 마지막 자리로 보는 그는 많고 많은 유적에서 역사와 정신을 찾고, 문학의 터전으로 삼는다. 소나무와 잡목이 뒤엉킨 금오산의 품에서 오늘도 새 천년을 이어갈 문학을 찾는 이인(異人)이시다.그가 꿈꾸는 한국문학의 성지작업이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더라도 여전히 문학을, 성지를 외칠 것이다. 신라인들의 통찰력 높았던 예술의 향기를 꿰차고 다니는 그가 있어 경주는 문학을 관광 경주의 브랜드적 가치로 접목시키는 그의 혜안(慧眼)대로 더 아름답게 빼어난 고도가 될런지도 모른다.

2012-10-23

기적 같은 인연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지금쯤 몽골 초원에 누워보면 내 눈앞으로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별들이 아까워 잠 들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오지 지역에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이 정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유독 지구별에 올라 탄 것도 기적 중에 기적이다. 지구별이 속한 태양계만 살펴봐도 수·금·화·목·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 9개의 행성에다 32개의 위성, 1천600개에 이르는 소행성이 사이좋게 태양을 돌고 있다. 이 별들 가운데 지구는 크지 않은 별이다. 토성의 762분의 1, 목성에 비해서는 1천318분의 1, 주별 태양에는 130만분의 1이다. 사실 지도를 펴고 보면 우리나라 땅 덩어리는 지구면적의 0.1%, 미국 인디아나주 정도의 크기이지만 5천만명이 부대끼며 살아간다. 이런 작은 땅에 200만년 직립인류사에서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인연이다. 길을 스치는 누구와도 끌어안고 얼굴을 맞대도 쑥스럽지 않은 인연들이다. 하지만 이 기적 같은 인연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인생의 빠르기를 부싯돌에 이는 불꽃같다고 했다.빠른 것은 세월뿐이 아니다. 태양을 도는 지구의 속도는 인생의 빠르기를 초월, 아찔할 정도다. 초속 18마일(28.8km)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총알의 8배로 날아간다. 우리들은 이런 무시무시한 속도로 태양을 도는 지구별에 편안하게 얹혀 온갖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재색명리를 탐하고 사는 것이다.인간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태어나는 것부터가 기적이다. 그 확률을 의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60조분의 1이여서 재미있고 놀랍다. 의학적 의미에서 살펴보면 인간이 평생 갖는 성관계는 보통은 3천번, 체력이 좋은 사람은 4천번 쯤 된다고 치면 한 번에 1억마리에서 5억마리의 정자를 사출한다. 1억마리(1회)로 계산했을 경우도 오직 한 마리만 간택되니 세상에 나오는 것부터가 그렇다. 여자는 한 달에 하나씩, 일생동안 400여개의 난자를 생산한다. 이때 정자는 여성이 가진 짧은 나팔관을 시속 120km라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야 한다. 여성의 난자는 가장 튼실한 정자를 씨앗으로 삼는다고 하니 선택되는 것을 기적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횟수와 여성의 배란기, 난자 생산 능력 등을 감안했을 경우 1등을 맞는 그 성공확률을 의학적으로 계산하면 60조분의 1로 당첨된다는 가설이다. 그러니 인간이 태어난 것 자체가 운명적이고, 기적이다.남자는 하루에 대체로 5천~6천마리의 정자를 생산한다. 이 정자는 쓰지 않으면 죽어버리기 때문에 늘 소비처를 생각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원시시대 때부터 종족번성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워 못된 짓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신문 사회면을 도배하는 성범죄와도 결코 무관치 않다.인간세상과 마찬가지로 정자의 세계에서도 생존경쟁이 존재한다. 로빈 베이커(영국 진화생물학자)가 쓴 `정자전쟁`에 나온 얘기다. 로빈은 종족 보존 본능에 따라 여성의 몸속에 서로 다른 남성의 정자를 넣어 보면 5억마리의 대군이 서로 편을 갈라 격전을 벌인다는 것.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으로 남기기 위해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인다고 한다. 인간의 번식 욕심은 너무 강하다.미국의 불임부부들이 기증받은 정자로 인공수정을 통해 출산시키는 아기는 한해 3만~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 남성이 정자 기증으로 129명의 생물학적 자녀를 출생시켰다는 사례도 있다.어째든 이런 귀중한 삶이 백수시대로 가긴 했지만 여전히 아쉽고 금쪽같다. 60도 넘어 지금은 100세 시대에 사니 참을 수 없는 행복이다. 볼을 꼬집어보고 생전해보지 않았던 “사랑한다”는 말을 연발, 부인을 깜작 놀라게 해주고 싶다. 기적을 최고의 꽃으로 피우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당연히 나눔이다. 한국인은 소득 2만불 시대에 살지만 늘 불행하다고 여긴다. 가슴에 나눔이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한 자선기관이 조사한 한국인의 봉사지수는 조사대상국 153개국 가운데 53위였다. 태국(9위) 라오스(10위)보다 처지니 가슴에 행복이 자리 잡을 수가 없을 것. 나눠보라. 입가에 미소가 절로 핀다.

2012-10-16

경주읍성을 원형대로 복원했으면

▲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경주시 동부동에서 북부동을 잇는 경주읍성은 사적 96호로 지적돼 있었을 뿐 신라문화재에 가려 상당기간 그냥 버려져 있었다. 최근 들어서 그 중요성을 알고 복원작업에 나선 경주읍성은 조선시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의 기능을 함께 했던 돌 성이다.경주읍성은 근세까지 가장 잘 보존된 성이었지만 문화재의 중요성을 잘 몰랐던 시기와 나라전체가 전쟁의 폐허로 혼란을 겪었을 즈음 인근 주민들에 의해 파손됐다. 지금도 성 주변의 민가 담장에 박힌 돌들은 읍성을 허물어 가져다 쓴 돌이다. 성 돌은 일차적으로 한번 다듬어져 있어 담장을 쌓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더 빨리 파손되었을 것이다.경주는 또 국보급 신라 문화재가 수두룩한 고도여서 조선시대 유적이 천대받았던 원인도 있을것 같다. 경주 읍성이 다른 도시에 있었다면 벌써 복원이 돼 그 지방 최대 관광지로 대접 받았을 것이다. 경주는 석굴암·불국사·남산유적지 등 우리나라가 외국에 내놓는 대표적 문화재들이 줄지어 있는 곳이니 조선시대에 조성된 읍성이 복원 우선순위에 들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그래도 읍성의 가치는 크다. 개발에 밀려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찾아내고 100% 복원해야 경주는 천년에서 이어진 도시로 품격을 갖출 수 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읍성은 극히 일부분이다. 문화원으로 사용중인 동헌과 경주 객사를 중심으로 서부동에서 계림 초등학교에 이르는 범위는 확인됐다. 문제는 해자를 근거로 한 사실복원이다. 경주시 서부동 우방 아파트 뒤편은 해자에서 흐르는 물을 모아두는 곳이다. 이곳에서 출발한 해자는 남문자리였던 횟집과 제일교회를 거처 구 경주극장 앞 읍 청사를 끼고 흐르는데, 도시행정가의 짧은 안목이 복개란 큰 잘못을 저질렀다. 어느 땐가는 해자도 복원해야 할 것으로 본다.196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던 경주읍 청사 정원에 심어진 500년 생(추정) 느티나무는 그 당시 최고의 휴식자리로 주민들의 쉼터였다. 더욱이 느티나무를 두 줄로 휘감고 올라간 등나무는 500년 고목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이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왔던 학생들이 패싸움을 벌이다 달아나던 학생이 가끔은 해자로 떨어져 패싸움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그 시절 읍성에서 나온 장대석, 주초석은 물론 축조 때 사용된 돌들을 대부분 집을 짓는 데 사용했거나 외부로 유출돼 담장 용도로 사용됐다. 이 때문에 복원공사를 할 경우라도 윤기가 있고, 특유의 경주 돌 색을 지닌 석재를 제대로 맞추기가 힘들게 됐다.경주성은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로도 유명하다. 1592년 선조 25년 9월1일 판관 박무의공이 경주를 수복할 때 조선의 발명가이자 화포장이었던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성 밖에서 발사해 큰 효과를 보았다고 선조실록이 기록하고 있다.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쏘자, 이것이 뭔지 몰랐던 적들이 구경하느라고 서로 밀고 당기며 만지다가 포가 터져서 적장을 포함한 20명이 즉사를 해 이튿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했다고 한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대완포구(大碗砲口)에 넣어 쏘면 500~600 걸음 밖 성안에 떨어졌다.경주 읍성은 불편한 진실도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불교 석조유물들이 타깃이 돼 엄청나게 많은 유물들이 파손됐다. 실제로 동부동 성루에 쌓인 돌들을 들여다보면 부서진 석탑과 장대석들로 성루 가운데 공간을 채웠을 만큼 많은 불교석조유물들이 파괴됐다. 모두 다 신라 사찰에서 옮겨온 것들이어서 파손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경주는 미래 천년을 내다봐야 한다. 지난 천년을 이으려면 더는 미루지 말고 신라 조선을 잇는 문화벨트를 잘 간직해야 한다. 그것이 미래 천년을 맞는 법이다.

2012-10-09

미인의 기준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한국인 뿐만은 아니다.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데 돈과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는가를 따져 보았더니 49.76%로 나타났다는 보도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미인 지수는 세상 살기가 각박해질수록 더 심해질 수는 있지만 결코 내려갈 수치는 아니다.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두꺼비에게 미모를 물었다 하자. 귀 밑까지 찢어진 긴 입하며 툭 튀어나온 두 눈, 뒤뚱거리는 배를 가리킬 것이다”찰스 다윈 역시 인간을 포함시킨 동물에게 미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했다.동양인의 전통적 미의 기준은 삼백(三白) 삼흑(三黑) 삼홍(三紅)이다. 살결·이빨·손은 희고, 눈동자·눈썹·머리칼은 검어야 하며, 입술·볼·손톱이 붉으면 구색(九色)을 갖춘 미인이 됐다.그렇지만 요즘은 다르다. 서양 미인을 쫓는 여성들로 거리가 넘친다고 한다. 삼백 삼흑 삼홍 사람들이 붉은 머리와 황새다리같이 마른 여인을 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던 조선시대에는 엉덩이가 작으면 아이 들어설 공간이 작고, 유방이 작으면 아들의 자양분이 적다하여 무자상(無子相)취급을 받아 시집가기가 어려웠다. 그 시절이었다면 요즘의 마른 여자들은 세월 건네기가 참 어려웠을 것 같다.당나라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못 나들이를 할 때다. 모두들 아침에 핀 흰 연꽃을 보고 감탄사를 늘어놓자 “연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 말을 알아듣는 해어(解語)만은 못하지”라고 현종은 양귀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때부터 해어화(解語花)는 미인을 가리키는 어원이 된 것 같다.당대의 시인 백거이가 양귀비를 두고 “얼굴을 돌려 한 번 웃으며 백가지 교태가 일어난다”고 `장한가`에 적었을 정도로 타고 난 미인이었다. 무색(無色)하다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궁궐 여인들이 아무리 분으로 가꾸어도 양귀비 앞에서는 얼굴빛이 제대로 날 수가 없었다.오나라 서 씨는 얼마나 미인이었던지 빨래터에서 서 씨를 훔쳐보던 물고기가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려 바닥에 가라 앉아 버렸다고 한다.20세기 들어 미국 등 구미는 미인의 조건을 따지는데, 분석적이고 구체적이다. 피부·이빨·손은 희고 입술·뺨은 붉고, 허리 손 발 세 개는 가늘고, 입술·가슴·엉덩이는 풍부해야 된다고 했다. 아프리카나 카리브는 걸을 때 뒤뚱거릴 정도로 살이 찐 여성일수록 미인으로 친다.미인이 오래 사는 경우는 드문가 보다. 미국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모델을 했던 여성들 가운데 50을 넘긴 경우가 드물다는 외신 보도를 보면 미인박명(美人薄命)은 동서양이 비슷한 것 같다.마릴린 몬로는 1962년 36살에, 제인 맨스필드는 34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페이지 영은 약물사고로 죽었다. 미녀는 남자들의 관심이 되는 건 시대를 불문하고 동서양이 같다. 남자들이 스스로 견디도록 놔두지 않고 도화(桃花)살이 끼게 만드는 것이다.세월이 변해서 여초 시대에서는 미인계 쓰면 오히려 혼이 날 수 있다.시대정신으로 보면 미인이 되면 바로 대중 스타가 되니 모두가 가꾸는 것이다. 인물이 좋다는 것은 직장에서도 남다른 자신감을 갖는 데 영향력을 미치니 뜯어 고치는 게 집수리하는 것보다 쉬운 시대다. 그렇지만 학문과 지성이 뒤따라야만 자기 운명대로, 또 때에 따라서는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아도 지닐 수 있다.육신의 아름다움은 찰나다. 꼿꼿하던 등이 굽어지는 것도 탄력으로 넘치던 우유 색 피부에 버짐이 붙고, 잡티가 피는 것도 찰나다. 요즘말로 치면 S라인 몸매(앞태)를 보다가 뒤태를 보고 굽어보다가 휘어보고 하지만 세월이 가면 그 단단한 육신도, 얼굴도 흐물흐물해지는 게 인간의 몸이 아닌가.자신을 탄탄하게 가꾸는 것이 신문 사회면을 도배하는 성범죄 난리에서도 이길 수 있는 비법이다.

2012-10-02

현판 글씨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 겸 발행인현판 글씨는 건물의 격(格)과 조성한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어 당대의 명필만이 쓴다. 지난 4일 준공식을 가진 경주 금장대(藏臺, 한옥단청누각 154㎡)의 현판글씨는 경주가 낳은 영남 명필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선생이 썼다. 심천 선생이 전서로 쓴 서쪽현판은 글 획에 실린 기운이 부족하고, 도로에서 볼 수 있는 동쪽 현판은 글씨가 작아 추석 전에 다시 써 달기로 결심,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심천 선생은 글자 한자 한자에 풍부한 근육과 단단한 뼈가 들어있고, 글 획들이 서로 어우러져 전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 흐르도록 이번엔 전서보다는 해행(楷行)체로 쓰기로 결심하고, 대 붓(마모필)을 다듬고 있다. 글자 한자 크기가 1m가 넘으니 금장대(藏臺)엔 폭 4m가 넘는 현판이 걸리게 됐다. 심천 선생은 금장대 현판을 새로 쓰기에 앞서 먼저 머릿속에서 글을 앉힐 자리와 천둥 벼락이 치는 느낌이 저절로 들도록 글 획의 삐침 자리까지 정하고서야 붓을 들겠다고 한다. 글 세자를 쓰는데 드는 먹물이 큰 사발로 한사발이나 되어서 먹을 가는데, 만 하루가 완전히 걸리니 작품의 크기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선생이 쏟는 마음은 선승이 쌓는 불심(佛心)같다.심천 한영구 선생은 고희(古稀)전에 나온 보문품을 쓸 때도 이른 새벽 백률사로 오르는 사면석불을 찾아 관음보살 명호를 천 번이나 외치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부처를 현신하는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고 한다.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체는 마치 강철을 오려 놓은 듯 획이 곧고 강직한 흐름이 있는 반면 심천 서체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고 고졸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선생이 형산강의 발원지에서 태어나고 항상 경주를 가로질러 흐르는 형산강을 바라보면서 서체를 가다듬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금장대 같은 유명 건물의 현판글씨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글이어서 서예인이라면 누구나 꼭 쓰고 싶어 한다. 상량(上樑)문도 글은 한학자 조철제 선생이 짓고, 선생이 썼다. 금장대는 신라역사가 잠든 경주를 대표할 수 있는 정자여서 70평생 붓 한 자루로 외길을 걸은 심천 선생으로서도 영예스럽고, 현판자체가 또 하나의 경주 명물이 될 것이다.권법(拳法)으로 유명한 중국 하남성 숭산 산문(山門)에 걸린 `소림사(小林寺)`란 현판도 지금 명물이 됐다. 어느 해 큰 불로 대웅전이 불타버리자 주지가 중창 불사를 일으켰다. 주지는 마지막 과정인 산문 현판을 만들기 위해서 빛깔이 좋고, 수령이 백년 넘은 자단목(紫檀木)을 구하긴 했는데, 글씨를 쓸 만한 마땅한 명필이 없었다. 마침 명필로 이름난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재를 지내러 절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지는 이 때다 싶어 황제가 오는 날 스님들을 산문 앞에 보내어 글을 쓰게 했다. 평복 차림의 강희제가 산문을 지나다 보니 스님들의 필력이 가관이었다. 삐뚤삐뚤하기도 하고, 짐승그림 같은 글씨를 보다 못한 강희제가 “지금 무얼 하십니까”하고 묻자 스님들이 “주지 스님 지시로 산문 현판 글씨를 쓰는데 권법연습하기보다 이건 더 힘들군요”하고 답했다. 황제는 스님으로부터 붓을 받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少林寺`라고 써 내려갔다. 강희제는 스님들의 꾀에 걸려 글을 쓴 것을 알아차렸지만 탓하지 않고, 옥새를 가져와 `림(林)`자 위에다 낙관을 했다. 이후 소림사 현판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보물이 되었다고 한다. (최종세 `중국 시·서·화 풍류담`에서)전서로 쓴 경주 옥룡암 현판 `일로향각`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유배에서 풀려나 금석문에 빠졌을 시기에 암곡리 무장사 답사 언저리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쓴 은해사 현판이 주요 관람코스가 된 이치도 이와 같다.심천 선생은 경주에 한· 중· 일 서예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공간이나 영남서예를 전승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만년에 가진 최고의 꿈이자 희망이라고 한다.경주시가 석장동 동국대학교 부근에 구상하는 새 화랑 체험관(3만㎡)이 들어서면 서예인재들을 모아 영남서예의 맥을 잇도록 후학을 살피는 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2012-09-25

김치역사와 우리음식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발행인채소를 소금에 절여 적당히 발효시켜 먹는 김치이야기는 3천년 전부터 중국역사서에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처럼 즐겨먹는 김장김치가 완성된 것은 1천800년대에 들어서부터다. 그 전에는 소금 등 기초 양념만 입히는 절임김치였을 것이다.고추가 들어온 것이 임진왜란(1592~1598)때로 알려졌고, 배추 겉잎이 안으로 오그라드는 결구(結球)배추는 1천700년대 중반쯤 중국서 종자가 들어왔다.결구배추라야 젓갈이나 무채 낙지 해산물로 속을 채울 수 있어 김치보쌈이 만들어진다.예전엔 겨울 김장이 반년 양식이라 했고, 배추김치 반포기를 썩썩 찢어 얹으면 고봉밥 한 그릇도 너끈히 비울 수 있었다. 동짓달이면 동네주부들이 품앗이로 김장을 했다.김장독을 땅에 묻어두면 이듬해 초여름까지 반찬걱정을 덜 수 있었다.김치냉장고가 아무리 다양한 기능을 발휘해도 군내가 살짝 피는 초여름 김치 맛을 살릴 수 없다. 배추가 맛좋고 영양가 풍부한 것은 배추벌레가 먼저 알고 달려든다.배추엔 농약을 적당하게 뿌려주지 않으면 좀 나방 배추흰나비 진딧물 등 워낙 벌레가 달라붙어 잎을 갉아 먹는가하면 그대로 두면 속이 짓물러 터지는 `꿀통배추`를 만들어서 그해 농사를 망친다.외국여행을 하다보면 사나흘만 지나면 속이 니글거려 김치 생각이 간절해 진다. 뱃속이 평소 식생활습관과는 다른 음식이 들어와 혼란을 일으키면 김치생각에 걸려 여행재미도 놓쳐 버리는 게 한국인들이다.임금님 밥상에 올라가는 김치는 새우젓, 전복, 오징어, 낙지, 조개, 소라, 큰새우 작은 새우 등등 13가지나 된 해물이 들어가 어(御)딤채로 격상시켜지니 그 맛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궁중 김치는 해물이 상하기 쉬운 계절에는 담지 않지만 봄·가을 수랏상에는 내야하니까 보관방법도 수월치 않다.이런 음식을 먹고 나면 살고 싶은 욕망이 더 생긴다.사대부가로 시집을 가면 그 집 법도에 맞는 장 담그는 법과 김치 담그는 법, 가전비주를 빚는 방법을 전수받아야 한다.장을 담그는 법이나 가전비주 빚는 법은 우리 정신문화와도 연결된다. 우리 전통가주는 “주안상을 본다”라고 말하듯 음식으로 분류되었다. 술의 냉기를 없애고, 밥 반주로 애용됐던 우리 술은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려는 일제의 책략으로 인해 거의 사라졌다.이른 봄 살림살이를 모르는 새댁이 장독 뚜껑을 열어 놓으면 장맛이 없고 쉬어버린다. 봄이면 공기 속 염도가 낮아져 장독을 열어두면 염도가 하늘로 날라가 버리기 때문이다.상추쌈은 눈을 홀기지 않을 크기로 싸고, 치마저고리는 신체선이 드러나지 않게 넉넉해야 하며, 종의 고된 삶을 보채지 말아야 하는 등 시집가기 전 과외가 만만치 않았다.한국음식은 김치나 떡볶이 등 단일 음식으로는 대표로 내놓을 수 없다. 칠첩 반상기에 담긴 다양한 맛과 냄새·색감·상위에 오른 음식이 갖는 온도 등 조화로움이 가득한`밥상`이 대표한다. 길거리에서 주로 판매되는 떡볶이와 같은 단일음식보다는 밥상에 담긴 조화로움과 정성이 한국 것이고, 한식의 매력일 것이다.대구장아찌 전복장아찌도 유명하다. 오이채와 돌미나리, 첫순 부추를 적당하게 썩고 감식초로 만든 초장을 친 `다슬기(사고동)무침`은 더 일품이다. 다슬기는 간에 좋고, 눈도 밝아지는 우리고유 약용음식이다.예부터 음식 잘 만드는 것도 타고난 식신생재(食神生財)라고 했다.나이드니 철학 위에 먹는 거라는 말이 참말처럼 들릴 때도 가끔은 있으니 식신생재가 식탐이라기보다는 가을 날씨에 빠지고 음식에 빠지는 경우를 일컬어서 하는 말인 것 같다.서양인들이 사상적 혼동을 느끼면 희랍고전을 꺼내든다는 비유보다는 식신생재가 더 맞는 비유이다.

2012-09-18

심성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발행인북경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은 우리 민족의 심성(心性)을 `좁쌀`로 비유한 적이 있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싸우고 송사를 일으키는 편협하고 각박한 처신을 두고 한 말이다.생각에 갇혀서 안절부절 할 때가 많다. 해와 달은 그 무량한 빛으로 차별 없이 세상을 구석구석을 두루 비춘다.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생각을 가질 때라야만 비로소 스스로도 풍요로워 질 것인데도 말이다. 세상사는 일이 하루같이 지지고 볶는 일이다. 흡사 불난 집(火宅)이다. 지식은 하루하루 늘어나 쌓이지만 도는 하루하루 덜어야 이룰 수 있다. 원효의 일통(一統)사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원효의 화엄경도 넓게 유추해보면 일통사상이다. 원효가 화엄경을 쓰던 시대적 상황은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해동의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서로를 치고 죽이는 민족 간의 다툼으로 해가 지는 줄 몰랐던 시기이다. 원효는 철이 들어서 보니 겨자씨보다 적은 내면의 세계에서 마음을 가져온 것을 알았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기 마음을 꺼내 오기까지 밑바닥에서 피 땀을 흘리면서 내공을 쌓는 치열한 삶을 통해 화엄학이란 큰 깨달음을 세상에 내놓은 해동 성자다. 이미 깨달음을 얻고 대 철학자가 된 원효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 간에 죽이고 죽는 일은 덧없는 짓거리였을 것이고, 이때부터 일통(一統)사상이 가슴깊이 자리 잡았을 것 같다.석가모니가 설한 8만4천 법문 가운데는 훌륭한 인격, 도를 이루려면 나를 비우고 버리는데서 출발한다는 말이 있다. 나를 버리는 것이 인격완성의 지름길인 셈이다. 마음을 비우려면 자신이 지난 시절에 쌓았던 지식과 경험, 번뇌를 불러 들일 갖가지 기억들을 지우는데서 출발한다. 인간은 14세 소년·소녀 때부터 정신에 때가 끼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 때부터 쌓인 모든 기억(좋고 나쁨)들을 우주로 던져버리면 쉽게 해결나지만 그것이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고민이 생기고, 성격 파탄이 뒤따르고, 고통스럽다.숨겨진 관념 속에는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들이 더 숨어 있다. 이걸 버리는데는 명상이라고도 하고,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어두운 부분을 싹 씻어내는 관념세정((觀念洗淨)이라고도 한다. 수도관에 끼인 물때나 거친 녹은 쉽게 지워지지 않으나 한번 해 볼만 하다.무념(無念)이라는 것은 나눠줬다는 마음이 없는 자리다. 무아(無我)는 안으로 나(我)라는 마음이 없는 마음을 일컫는다. 부처의 법문인 팔만대장경도 따지고 보면 무념(無念)과 무아(無我)의 세계를 이중 삼중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불성은 본래 실타래처럼 길고 긴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다. 법구경은 “생각을 한곳에 모아 욕심이 동하게 하지 말고, 뜨거운 쇳덩이를 입에 머금고 목이 타는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인생 40이면 세상일에는 잘 흔들리지 않게 된다 해서 불혹세대라고 말한 공자는 “자신에 대하여는 깊이 책망하고 남에 대하여는 가볍게 책망하면 원망은 멀리된다”고 했다.요즘 정치인들이나 사회 지도자들이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소통 역시 심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쉽지 않다.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속마음으로 들어오도록 해라”고 했다. 인간의 삶은 산 능선이나 강줄기처럼 곡선으로 뻗어 있다. 능선을 타는 사람은 사는 것 자체가 풍요하니 수월할 수 있지만 계곡을 타는 사람의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다.조병화의 한 줄짜리 시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것이다” 결국이란 부사엔 너무 늦은 깨달음,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감상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면 심성은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우주로 가려는 마음공부에선 나를 공격하는 적의 정체가 알고 보니 나였다는 얘기였다.

2012-09-11

동정부부(童貞夫婦)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발행인성(性)과 관련된 극악한 뉴스들이 도배를 하는 세상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환경에도 이만큼 바르게 자라준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간다. 천주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던 조선시대 말 천주교에 귀의해 신앙생활에 몰두했던 처녀들이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흠모, 결혼을 거부하고 동정을 지키는 수행으로 온갖 고통을 이겨냈던 얘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전주의 순교자 가문의 요한 유중철(柳重哲)은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주선으로 한양의 순교자 가문 출신 루갈다 이순이(14)와 결혼했다. 둘은 사랑은 하지만 육신은 범하지 않는다는 순결 서약을 굳게 한 동정부부가 됐다.루갈다는 옥중 생활에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부부생활을 이렇게 밝혔다. 순결을 지킬 것을 천주님께 명세한 이들 부부가 시집가던 날부터 남편과 함께한 시간은 밤 아홉시까지였다. 4년 동안 마치 오누이처럼 살아오는 동안 여러 차례 성적 시련을 겪었으며, 하마터면 동정부부를 깨뜨릴 위기도 열 번 쯤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둘은 서로 맞붙들고 엉엉 울면서 그 악마의 순간을 빠져 나온곤 했다는 것. 요한 유중철과 루갈다 이순이는 그 후 순교했다.천주교 신자로 여주에 살았던 정순매(鄭順每)는 시집을 가라는 주변의 성화에 견디다 못해 기혼자로 보이도록 쪽진 머리로, 이정희(李貞喜)는 거짓 앉은뱅이 행세로, 동정서약을 한 김유리타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삭발해 혼담을 피했다.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시절이었지만 천주교에 귀의한 조선의 처녀들은 성모 마리아를 흠모, 결혼을 피하고 동정을 지키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신앙심을 키웠다. 엘리사벳 정정혜는 성적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서 스스로 매를 들었다고 한다. (故 李圭泰의 글에서)혼전순결을 지키기는 그런대로 쉬운 편이지만 요한 루갈다 부부같이 결혼을 하고 한방에서 맞부딪치면서 살아가기란 신앙적 수행보다 더 가혹했을 것이다.무려 15년간 동정부부로 살았다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할 때에 자신에게 순결을 지키게 해 준 남편(조 베드로)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망나니의 칼을 받은 권 텔레지아 얘기도 유명하다.한국사회는 지금 성에 관련된 얘기를 빼고는 더 들을 것이 없는 것처럼 방송과 신문 사회면에 도배를 하는 처지다. 희생자는 미성년자에서 학생, 가정을 지키는 부녀자 등으로 다양하다. 지난해에 일어난 성범죄가 1만9천건이다. 노출되지 않은 사건들도 많았을 것이니 성범죄공화국이라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성 관련 사건사고들이 많다는 뜻이다.계절적 영향이 커서인지 성희롱사건은 이제 관심에서 제외될 정도가 돼버렸다. 젊은 여성들이 거리에 입고나온 옷은 이삼십년 전에 비하면 거의 속옷수준이다. 짧은 바지와 소매없는 상의로 허벅지와 어깨까지 노출한 자태다. 신체 선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조선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노출이 지나치면 성범죄를 불러오는 단초가 된다. 여름에 성범죄가 늘어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여성들의 신체 노출은 40%정도가 가장 아름답기도 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여성들의 이런 노출은 가을바람이 내리기 시작한 9월에 들어서도 여전하다. 신체 선을 드러내지 않는 무명옷을 입었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은데 이젠 까마득하게 느껴진다.한국인의 정신세계 표본이 되었던 견우직녀의 정신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세상이니 순결은 고전이 되어버린 것 같다. 너도나도 이혼이고, 이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가 됐다. 결혼도 마치 물건을 사고파는 일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게 오늘을 사는 우리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이러다가 한 여자 한 남자를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이 될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는 사람이 필자뿐일까.

2012-09-04

소금이 `웬쑤`?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공공이미지 코디네이터인체를 도는 물기는 염분 0.9%, 당분 0.1%로 구성돼 있다.체내 소금 농도가 떨어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저체온증이다. 반면 당도가 높아지면 혈류가 굳어져 각종 질환이 닥친다. 이러니 좋은 소금은 건강을 다스리는 천연 약이다. 너무 싱겁게 먹어도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인류는 지금까지 소금보다 더 좋은 방부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나무 속에 소금을 넣고 아홉 번을 구워내는 게 죽염이다. 죽염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1천500℃의 불에서 소금이 정제되는 것을 보면 소금이 태양에서 날아 왔다는 말이 참말처럼 느껴진다는 것.소금은 신이 사람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이자 태양에서 날아온 인간생활의 가장 훌륭한 식재료다. 소금에 절인 배추나 음식은 쉽게 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소금은 갯벌에서 태양빛으로 만들어내는 천일염이다. 소금사용에 대해 이설을 많이 만들어 내고 있는 미국의 소금은 천일염과는 달리 암염 또는 정제염이다. 암염이나 정제염은 미네랄이 없는 염화나트륨이다. 인간의 몸에는 미네랄이 풍부한 천일염이 좋지만 체내의 염도가 0.85~0.9%를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니 적정량은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겨울철의 별미는 단연 동치미다. 소금이 적당히 풀린 동치미 물을 마시고 시원하다는 비음을 연신 내뱉지 않는 사람이 있을 까. 심심한 동치미 물은 우리 선조들이 만든 최고의 음료수다.이 소금이 위기를 맞았다. 과학자들은 건강을 해치는 주범으로 소금을 꼽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20년까지 우리국민 하루 나트륨 섭취량 20%(소금 2.5g)줄이기 운동을 벌인다고 한다. 세계 주요 선진국들 가운데 나트륨섭취량이 가장 많은 국가이기 때문이다.상수도가 들어오기 전 포항 영덕 울진 등 바다를 끼고 사는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내륙사람들에 비해 짧았던 주범도 간기를 머금은 우물물과 염분을 잔뜩 품은 바닷바람의 영향이 크다. 사실 우리 식단은 간이 많이 들어간다. 된장 국, 여름철 입맛을 다잡아주는 장아찌가 그렇다. 김치도 그렇고 우리가 즐겨먹는 젓갈류와 찌개 구이 등 밑반찬의 대부분이 나트륨 함량이 많다.맛있는 음식점은 짜다는 느낌이 드는 집이다. 맛있게 먹을 때는 몰랐는데 한두 시간 지나면 갈증이 나고, 물만 찾을 경우가 그렇다. 찌개 볶음, 생선 찜 등을 계속 넘길 경우에 오는 현상이다. 이럴 경우 다음날 아침에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무거워 보인다. 경상도 음식이 더 그렇다. 두 겹씩 정겹게 껴안은 안동 간 고등어나 여름날 보리밥 반찬으로 최고를 치는 돔 배기, 멸치 젓갈은 소금에 묻혀버렸다. 소금과 고추 가루를 많이 넣다보니 음식이 맵고 짜다.그렇다고 인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짠지 소금구이 간판이 달린 집이 있는가하면 석쇠 판에 갈비 살이나 삼겹살, 꽁치 등을 얹고 막소금을 뿌려 구워드는 집이 북적거린다. 아마도 이 현장을 보면 과학자들이 기겁을 했을 것 같다.차(茶)인들이 차를 즐겨 마시는 경우도 간과 무관치 않다. 생 고추를 장에 찍어먹고, 국 한 사발, 김치를 섞어 먹다보면 배속에 들어간 소금 섭취량이 바닷물 간기를 따를 만큼 의외로 많다. 이를 희석하는 데는 차만한 좋은 방법이 없다. 차인들은 한 자리에 앉으면 3가지 이상의 차를 마신다. 이 때 한사람이 먹는 물의 량은 대체로 1.8℃ 이상을 마신다고 하니 음식을 통해 위속에 모인 소금성분을 철저하게 희석시킨다고 볼 수 있다.과학자들은 지금까지는 건강에 좋지 않은 것으로 단 것과 지방을 꼽았지만 이제부터는 소금도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건강을 위해서는 내 몸에는 약간 부족한 듯 느낌이 들게 먹어야 하는 게 소금이다. 굴곡진 삶마다 적당하게 간을 맞추어 주는 것도 소금이다.

2012-08-28

물은 미래다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발행인물은 별이 되고, 생명이 되고, 미래가 된다. 5년 째 극심한 가뭄을 겪는 사헬지역은 물 자체가 곧 행복이다. 아프리카 가뭄은 특히 사헬지역(북 사하라 사막에서 남쪽 수단에 이르는 아프리카 영역을 이르는 아랍어)이 심하다. 먼지가 풀풀 이는 땅에서 곡식을 심을 수는 없다. 보이는 것은 모두 말라 비틀어 졌으니 인간은 물론 가축도 죽어간다. 하루 끼니로 죽 한 그릇 얻어먹기가 어려운 상황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유니세프)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경우 내전은 지난해 끝났지만 난민촌은 여전하다. 우간다에 미국 로타리클럽 회원들의 도움으로 펌프가 생겼다. 오랜만에 어린이가 맑은 물로 목욕을 하고나니 마음까지 깨끗해 졌다고 했다.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물이지만 10억 명이 물 부족으로 고난의 날을 보내고 있다.서울 백화점 물 값은 이미 살인적이다. (750ml 3만8천원, 350ml 2만9천원) 인류는 지구촌을 후손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으니 마땅히 깨끗하게 물려주어야한다. 물은 발원지에서 출발, 하류에 닿아서 일생을 마치면 발원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니 곧 환원(還元)이다. 흘러가는 것은 다 그렇다.좋은 물을 마시면 3분 내에 뇌에 도달하지만 오염된 물은 아이들의 눈까지 멀게 했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상당수 지역이 50년 전 전 우리모습과 흡사하다. 국제로타리 3630지구 포항여명로타리클럽이 간이상수도를 설치해준 히말라야 산동네는 누나가 물을 길러 와서 아침을 짓고 동생까지 돌봐야한다고 했다. 그러니 학교 첫 시간은 빼먹기 일쑤였다.수질학자들은 지구 환경변화속도와 맞먹을 만큼의 빠른 속도로 물 재앙이 다가오고 있으니 인류는 물 재앙을 피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 원인은 선진국들의 오남용으로 인한 오염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미래학자들은 20세기의 전쟁은 철이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서지만 21세기는 물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생명 같은 대접을 받는 게 물이어서 이미 세계 곳곳에서 물을 둘러싼 분쟁이 붙었다. 우리나라도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회원국 가운데 물 부족 가능성 1위 국가다.미국에서 열린 세계미래회의(World Future Society, 2008년)에서는 10년 내에 물 값이 기름 값 만큼 오르고 물 때문에 전쟁이 일어 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버려진 땅 북극이 최대 분쟁지역이 될 것이라 했다.물과 불은 사람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큰 수레바퀴이며, 물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야만 생명이 지탱된다. 지난 100년 사이 인구는 세배나 늘어났고, 같은 기간 물의 사용량은 산업사회의 발달과 오남용으로 인해 무려 여섯 배나 증가되었다.인류는 이미 사용 가능한 물의 절반을 쓰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오는 2025년이면 인류는 마실 물을 다 써버리거나 4분의3을 쓸지도 모른다. 지구표면은 70%가 물로 뒤덮여 있으나 자연이 인간에 허락한 민물은 1%가 되지 않는다. 빙하나 만년설이 2%쯤 차지하나 인간이 가져다 쓰기에는 쉽지 않으며, 97%는 바닷물이다. 허락된 1%의 물마저 23%는 미시간 등 북미 5대호에 담겨 있어 선진국이 사실상 50%가까이를 점유하고 있다.물은 한정적 자원이어서 항상 취약하다. 물의 한정성을 보면 공룡들이 살았던 시기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영적인 산은 티베트의 카일라스다. 카일라스는 중국(양자강, 황하)과 인도(갠지스) 메콩강 발원지다. 30년쯤 더 가면 카일라스 빙하 군이 80%가 사라질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이미 히말라야 산 기슭에는 만년설이 없다. 명산 킬리만자로(탄자니아)정상도 그렇다. 빅토리아호 수심은 1m나 낮아 졌으며, 아프리카 야생 고릴라는 멸종된 지 오래됐다. 이대로 가면 2020년이면 깨끗한 물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수질학자들의 예측이다. 우리 국민들은 5분의1의 인구가 심각한 물 부족 고통을 받는 중요한 현실을 잊은 채 물을 물처럼 쓰고 있다.

2012-08-21

채식

▲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발행인세상에서 힘이 가장 세고 몸집이 큰 동물인 코끼리와 황소는 육식을 전혀 하지 않고 풀로 배를 채운다. 채식만 해도 덩치가 가장 크고 힘이 세다는 얘기다. 인간의 몸을 유지시키는 세포는 자기 정화작용을 한다. 세포 하나하나가 몸속의 우주이고, 독립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생명체다. 암세포는 같이 가지 못하는 게 속성이다. 고기는 그런 걸 가속시켜 병근을 악화시킨다.건강해지려면 신선한 공기와 좋은 물을 마음껏 마시고, 세상이 알아주는 야채를 먹으면 신체 건강이 좋아지는 게 이치다. 색에 따라 기능이 달라지는 만큼 동양 오행(五行)에 맞추는 것도 좋은 식단을 짜는 방편이다.푸른색은 눈과 간에, 검은 색은 신장과 방광에, 황색은 위장과 비장, 흰색은 폐와 대장, 붉은 색은 심장에 좋다. 복분자(覆盆子) 구기자처럼 끝말에 자(子)가 붙으면 신장에 좋다는 것.채식이라 해서 야채가 전부는 아니다. 버섯도 영양가가 풍부하고 곡물류, 견과류, 줄기음식, 열매도 포함된다. 검은콩, 흰콩, 울타리에서 열리는 완두콩 등 나는 시기나 수확시기가 다르고, 효능도 각기 틀리지만 이 콩에서 나는 단백질은 고기보다 뛰어나다.가지바람도 만만치 않다. 탱탱하고 윤기가 나는 보랏빛 껍질과 촉촉하고 보드라운 속살을 지닌 가지가 암 억제에 탁월하다는 일본 식품연구소 연구결과가 나와 항암 식품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가지와 시금치 브로콜리를 갖고 시험해본 결과 브로콜리는 70%, 가지는 10%나 많은 80%이상의 암 억제효과가 있었다는 것.신이 동양에만 내린 들기름은 불포화지방산의 함유량이 높고, 비타민 A, C, E, F가 풍부해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한다. 이런 들기름을 가지요리에 넣으면 가지의 폭신한 속살이 들기름을 흡수해 고혈압을 조절하고, 콜레스테롤을 내리는 효과를 가져와 암 예방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속궁합이 잘 맞는 청정 음식이다.채식해서 병 낫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욕심을 비워버리는 방편으로 가다보면 건강이 따라오게 된다. 음식궁합은 동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뜨거운 음식을 피하고, 생선회나 과일처럼 찬 음식을 드는 것이 좋다. 식탁에서 얘기를 나눌 때도 냉온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아일랜드 출신 극작가이자 소설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노벨상을 받고난 뒤에 더 완숙한 문학가가 되었다. 그는 정치·종교·섹스 같은 뜨거운 주제는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고, 굳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찬 음식이 나왔을 때 꺼내는 게 건강에 좋다고 했다. 그는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적어 사후에 더 유명해 졌다. 국제로타리는 매주 갖는 회합에서, 그리고 요즘 화제가 되는 해외신간의 저자도 식탁예절 수칙 1호로 “정치와 종교이야기는 피하라”고 했다.선인들의 장수십결(長壽十訣)은 고기를 적게 먹는 대신 야채를 많이 먹고, 짜게 먹지 말라는 당부다. 최근 부쩍 많이 나온 얘기지만 하루 350g의 야채를 먹는 것이 좋다고 한다. 짜게 먹지 말고. 걱정을 줄이는 대신 많이 걷는 것도 장수에 도움이 된다고 적었다.걱정을 놓고 즐겁게 사는 것이 뜻대로 되진 않지만 찾아보면 주변에 그런 환경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여자의 일생을 쓴 모파상(1850~1893)은 1889년 에펠탑이 파리에 등장한 다음날부터는 점심은 에펠탑 아래에서 먹었다. 에펠탑을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해골`로 여겼던 작가는 탑 아래가 유일하게 탑이 보이지 않는 장소라고 여기고, 점심을 즐겼다고 한다. 쥘 베른(과학소설의 선구자 1828~1905)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에펠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즐겼다. 그 곳에서는 에펠탑은 보이지 않고 파리의 빼어난 경치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식 먹는 장소를 선택하는 데는 쥘 베른이 모파상보다 한 수 위다.

2012-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