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자녀가 셋만 되도 천연기념물처럼 보인다. 이름 끝 자가 사내 남(男)자이거나 끝 말(末) 자가 붙으면 딸부자 집이다. 여섯 일곱은 보통이고 열 명이 넘어서도 아들 가지려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이웃집 할머니는 엷은 미소를 띠울 뿐이다.
지금처럼 천연기념물 보듯 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장례문화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그 옛날 형제가 많은 집에서 상제들이 한목소리로 내는 애곡소리는 너무나 듣기 좋다. 그래서 애 경사에는 형제 많은 집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자녀가 많은 집 할머니의 존재는 어머니보다 애정이 더 짙어 조손간 정의는 하늘을 찌른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은 늘 할머니 몫이다. 긴 겨울밤 장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일도 할머니 몫이다.
어디서 갖고 오셨는지 손수건에 싼 곶감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별식이고 야식이다. 할머니는 단순히 하나뿐인 손자손녀가 서 너 살까지 자랄 때까지 보호막 역할에 만족하는 지금과는 너무나 틀리다.
조손간에 대화가 끊어진 자리가 너무 크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금처럼 후줄근하게 비춰지는 이유는 뭘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세월을 이겨낸 산지식의 곳간이다.
할아버지는 집안 내력을 가장 많이 아시는 향토 사학가이시고 할머니는 약손이시다.
러시아는 마을 노인 한분이 돌아가시면 박물관이 하나 사라졌다는 속담이 여전하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가 덮쳤을 때도 마을 노인들을 따라나선 주민들은 생명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옛 어른들은 길을 나서는 자녀들에게 구불구불하게 살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어릴 적 밤 숲에서 놀다 벌에 쏘여 부풀어 오른 팔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된장을 발라주시고는 “남의 집 밤 훔쳐 먹은 적 있지”라고 반드시 물었다.
아니라고 도리질하면 “주워 먹겠다고 생각이라도 한 적 있지”하시고 집요하게 벌에 쏘인 인과(因果)를 따지셨다.
할머니는 시집간 누나가 남편으로부터 구박이라도 받고 친정에 들리는 날은 “너 탁발하러 나온 스님에게 시주하지 않았지” 그 것이 인과응보라면서 딸이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임을 늘 인식시켜 돌려 보내셨다.
전생 현생에서 저지른 행위는 곧 업(業)이 되고 인(因)이 되어서 현세(現世) 내세(世)의 과(果)로 나타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을 들어 손녀딸이 행여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다독이는 게 할머니의 마음이다.
이 사상은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핍박이 심했던 조선시대에도 할머니들의 가슴을 사로잡은 내세관(世觀)이었다.
여름 비오는 날은 외출을 삼갔다. 산길을 어쩔 수 없이 걸을 때는 벌레를 밟아도 죽지 않게끔 느슨하게 삼은 짚신을 신었다. 동지섣달 이를 잡아도 죽이지 않고 대나무 통(菩薩筒)에 담아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을 만큼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시었다.
이런 불교 사상은 유교·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정신이 자리 잡았으니 좋은 일· 궂은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이 저지른 업보(業報)로 합리화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선하게 살도록 자연스럽게 유도 했다.
무려 1500년 전에 써진 능산리 백제고분에서 나온 목간에 새겨진 숙세가(宿世歌)에도 전생 인영과 인과를 부른 노래 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