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지역에서 50년을 붓만 잡고 살아온 심천 한영구선생 역시 고졸하고 강건한 필체를 완성해서 새로운 서예시대를 열었다.
8세기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명필로 이름난 서예가는 당나라의 안진경체를 만든 안진경(顔眞卿·709~785)과 해동 신라가 낳은 김생 등 세 사람이었다.
글씨의 본 고장이라 할 당나라에서 붓을 잡고 글씨께나 삐치는 학인들조차 김생의 글씨를 볼 때마다 천둥 벼락이 치는 떨림 현상이 왔다고 전한다. 왕희지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서 한수 얕잡아 보았던 반도출신 김생의 글씨를 인정했다.
당나라 대부들은 해서(楷書)도 초서로도 볼 수 없는 김생의 독특한 글씨를 보고 천둥과 벼락이 치는 떨림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는 서평을 쏟아냈다.
5체를 넘나드는 글씨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해동서성(海東書聖) 또는 신라의 왕희지로 추앙받았다. 이런 연유로 해서 김생의 글씨는 국내에는 단편적으로 남아있으나 중국에 더 많은 분량이 있다고 전한다.
신라인 김생
김생은 부모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서 그 가문이 전래되지는 않으나 신라 성덕왕 10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김생굴과 안동 문필산, 경주에서 지낸 80생애를 오직 붓만 잡고 살았으며 충주 `북진애`에서는 승려가 되어 두타행을 닦았다.
청량산 김생굴은 이 산(山) 금탑봉 왼편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직각암벽 밑에 지금도 남아 있다. 9년을 수련한 김생이 하산을 준비하던 날밤 젊은 여인이 나타나 “도령이 이 산에서 글을 쓰는 것처럼 소녀도 길쌈을 해왔다. 서로 닦은 솜씨를 겨루어 보자”고 제안을 했는데 제안이 당돌하기도 했었으나 김생역시 자신의 실력을 자부하는 터라 불을 끄고 글을 썼다.
이윽고 불을 켜고 보니 여인이 짠 천은 올 하나 틀리지 않고 고르게 짜 졌는데 김생의 글씨는 천처럼 고르지 못했다. 여인은 웃으면서 “도령은 명필이 되겠다고 하더니 실력이 이 정도이군요.”
김생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1년을 공부, 10년을 채워 세상에 나와 명필의 명성을 얻었다. 아쉽게도 국내에는 그가 직접 쓴 글씨는 남아 있지 않다. `이차돈비`와 `백련사액` 등 비문이 있을 뿐이다.
추사 김정희같은 서예대가도 김생의 글씨 앞에서는 감히 호를 쓰지 못했을 만큼 자신을 낮추었다고 한다. 금석학의 대가이신 추사 김정희는 제주귀양에서 풀려나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김생의 글씨를 보기위해 경주 무장사까지 내려와 남산자락 옥룡암에서 상당기간 체류했다. 추사는 경주에서 묵는 동안 옥룡암에 일로향각(一盧香閣)이란 현판을 흔적으로 남겼다.
서예인 심천 한영구
신라 왕릉은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늘 편안하게 느껴진다. 몸은 비록 잿빛 현대도시에 머물고 있지만 사람들은 늘 어머니의 젖무덤같이 편안한 고도를 그린다. 경주의 부드러운 능선(線)과 부처님의 땅 남산은 정신적으로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마음을 풀 수 있는 곳이다.
대가라는 칭호를 얻기 무섭게 서울로 떠나버리지만 심천은 천년 고도를 떠나지 않고 외롭게 지켰다.
한학과 조선시대 사대부 문화에 정통한 마지막 남은 학자이시기도 하다.
심천은 오늘부터 25일까지 경주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그의 `고희전`에 나온 40폭 병풍(2천300자) 보문품을 쓰기 전 이른 새벽 백률사 길목 이차돈 순교성지에서 올라 관음보살 명호를 천 번 씩이나 외우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붓을 잡았다고 한다.
추사체는 마치 강철을 오려 놓은 듯 획이 곧고 강직한 흐름이 있는 반면 심천의 서체는 잔잔한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 나오는 것처럼 유연하고 고졸하게 느껴진다. 이 서체는 아마도 선생이 형산강의 발원지에서 태어나고 항상 경주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서체를 가다듬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지금 김생으로부터 이어지는 영남 서예의 본고장 경주에 한·중·일 서예가들의 작품을 볼 전시공간을 마련하는 게 새로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