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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남서원 후손들의 깊고 깊은 고민

슈퍼관리자
등록일 2009-07-28 22:10 게재일 2009-07-2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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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는 5백년을 살아온 영천(永川) 황보(皇甫)씨 집성촌이다.

아직도 마을주민 대부분이 조선의 문신 지봉(芝峰)공의 후손들일 만큼 집성촌으로서의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

구룡포읍 성동리 주민들의 깊고 깊은 고민은 정부가 정한 `국가산업단지 계획안`이 발표되고서부터다.

지난 6월2일부터 구룡포읍에서 가진 `환경영향평가서`안을 보면 마을 전체가 산업단지에 들어가 있다.

성동리는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 의해 척살된 충정공 지봉 황보(皇甫) 인(仁)을 봉안하고 그의 장자인 찬판공 황보 석(錫)과 둘째 장공 흠(欽)을 배향하기 위해 후손과 유림(儒林)들이 1791년 정조 15년에 세운 광남서원을 중심으로 1, 2, 3리에 나눠져 1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최근에는 `녹색농촌 체험마을` `메뚜기 마을` `전통 혼례청 마을`로 지정되어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곳이 됐다.

광남서원 지킬 후손이 필요하다

누대에 걸쳐 성동 3리에 살아온 황보 기(皇甫 祺, 70)씨는 “이 마을을 떠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광남서원을 공양할 후손자체가 없어지는 거 아니 냐”고 분개하고 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양반마을을 5백여 년을 지켰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된 유래 역시 드라마틱하다. 1387년에 태어난 황보 인은 조선 태종 14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8년에 병조판서가 됐으며 1440년 북도 관찰사가 되어서는 북방 6진을 김종서와 함께 개척하였고 문종 2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 때 김종서 등과 함께 척살되는 화를 입었는데 당시 노비였던 단량(丹良)이 공의 손자를 물동이에 넣어 대보면 집신골로 피난했다가 뇌성산 허리를 낀 성동으로 옮겨 집성촌을 이루었다.

충비(忠婢) 단량의 비(碑)가 서원 마당에 남아 있다.

창건 당시 세덕사로 불려 지다가 순조 31년(1831년)에 광남서원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고종 5년(1868년) 훼철되었다가 광무 4년(1900년) 후손들이 유허지에 다시 복원, 1941년에 묘우(廟宇)를 중창했다.

구룡포읍 침체 가속

더욱이 이 계획안은 구룡포 읍민들의 자존심도 많이 건드려 놓았다.

철거민들을 동해면 공당리 일대로 이주시킬 경우 구룡포읍 행정 마을 수는 28개에서 25개로, 인구 역시 1만1천명으로 줄어들게 된다고 한다.

`포항 블루밸리 조성 주거지역 지정 건의서`에 따르면 1942년 구룡포는 읍으로 승격될 당시의 인구 3만5천 명에서 쇠락을 거듭했는데 성동리 마저 떨어져 나가면 지역 침체에 가속도가 붙어 4개 읍면 균형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

동해 구룡포 장기 일대에 건설될 국가산업단지는 당초 계획규모보다 30%가 축소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땅값이나 입주업체 유치 등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또 정부의 말처럼 성공할지도 미지수다.

특히 일본 기업인들은 한국 진출에 앞서 한·일 관계에 대한 눈치를 많이 본다.

한·일 관계가 늘 그렇듯 현해탄에 파고가 일 때마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으니 기업으로서도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

집성촌을 살리는 정책도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한국은 도시화에 밀려 우리가 진정으로 아껴야 할 옛것이 무차별 헐려나가고 있다.

황보(皇甫)씨의 마을까지 사라지면 집성촌이 포항에 몇 군데나 남게 되는지 살펴보라. 집성촌이 사라지면 고유문화가 없어지는 것이다.

아름다운 농촌마을마저 볼썽사나운 시멘트 상자 도시로 만들지 말고 빼어난 해안경관을 가진 산과 산 사이, 다랑이 논을 비켜간 산허리에 마을을 숨겨 놓는 고급스러운 정책을 통해 옛것과 전통도 보존하고 주민들의 삶도 융숭하게 만드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권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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