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생의 인연이 닿지 않으면 옷깃도 스쳐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이보다 더한 인연과 인간 사랑의 표현을 없을 것이다. 우리민족에겐 `인연`이란 것은 인간 사랑의 지독스런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연의 정신을 뛰어넘는 `이웃사촌`이라는 삶의 정서도 있다. 유럽과는 달리 `휴머니즘` 시대를 체험한 적이 없는 민족이긴 하지만 인연과 이웃사촌의 정신이 시대와 사람의 끈을 이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내 삶이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건 놓아 버려야 할 것들을 잔뜩 움켜잡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린 간절한 소원이란 이름을 붙여 탐욕을 키우고 사랑이란 이기심을 늘 쥐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불같은 화를 내 속에 키우기도 한다.
마음의 거울을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면 된다. “가끔 끔직한 업을 보게 된다 해도 집착하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불성(佛性)이란 본래 생각이 끊어진 자리다.
자기생각, 판단하기 이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참으로 편안하다. 변사또에게 이몽룡은 너무나 나쁜 사람(놈)이다. 춘향에게 집착하는 그 생각이 프리즘을 통과해 봤자 딱 그 기 까지다.
변 사또의 집착으로는 이몽룡의 참 생각을 보기 힘들 뿐 아니라 자신의 진면목도 읽지 못한다. 내 집착의 프리즘을 통해서는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편견의 안경을 쓰고는 세상을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
성서에서 나온 선악과의 비유로 보면 더 선명해 진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선과 악의 개념을 갖는 것, 그자체가 시작일 뿐이다.
에덴의 회복은 선악 이전의 세계로 가는 것이고 시비와 분별의 세계를 넘어 서는 것이지만 세상은 이미 놓쳐버렸다.
세속 잡사를 놓아버리고 죽음을 극복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이치를 깨닫는 일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인도 뿌나에 자리 잡은 라즈니쉬(1931~1990) 아쉬람(명상센터)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나는 결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이 세상을 다녀갔을 뿐이다”
힌두나 불교는 윤회정신이 가장 이채롭다.
현세의 내 모습은 지낸 생과 붕어빵으로 치면 된다. 내세는 현재 처신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나눔을 잘하면 부자로 태어나고 화를 잘 내면 못생긴 얼굴로 태어나는 게 윤회 속의 인과의 법칙이다. 남을 시기하고 죄를 지으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니 참 무서운 법칙이다.
신라 승 혜초보다 50여년 앞서 히말라야를 넘은 당나라 현장법사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북인도 보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세월의 덧없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현장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나의 생명체는 어디에 있었을 까. 그는 북인도에서 당나라로 돌아왔을 때는 가장 낮은 경지에서 서있는 자신에게로 다가갔다.
삶은 원래 한바탕 꿈이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生滅法)은 꿈이고 환영이며 물거품이고 그림자와 같다.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다고 했다.(금강경)
인연과 윤회를 뛰어넘은 부처님의 32가지 신체 특징은 세속인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귀는 길게 늘어트려져 중생들의 고민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고 혀는 길게 내밀면 얼굴을 감싸고 그 혀끝은 귀 털을 덮었다. 부드러운 혀는 뛰어난 지혜와 심금을 울려주는 대단한 웅변가를 상징하는 말이다.
부처님 오신 날 2555주년을 맞아서 다시 생각해보면 오대양 육대주를 섭렵하신 석가모니의 마음크기가 너무 부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