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나이가 되었지만 부모로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하다보니 부족함이 없는 세대들이어서 그런지 아낄 줄 모르고 배려할 줄 모르고 참는 정신은 거의 어린이들 수준이다.
일제시대 단발령이후부터는 상투는 틀지 않는 대신 천지신명께 어른이 되었음을 고유하는 성년식의식은 남아 있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의식이기는 했으나 성년으로 가늠하는 데는 그보다 좋은 통과관례는 없을 것 같다.
이른 아침 해가 솟는 시간, 외가닥으로 길게 땋아 내린 치렁 머리대신 상투를 틀고 탕건과 갓을 쓰는 관례(冠禮)를 혼인식에 앞서 치르면 성인이 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남자 15살, 여자 14살로 정해져 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예외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외침이 잦고 가문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의 사회분위기에 따라 기저귀를 찬 아이끼리 정혼하는 강보(襁褓) 성년이 있었는가하면 뱃속에 든 아이들을 두고 정혼하는 지복(指腹)성인, 정혼한 양가의 부모 가운데 50살이 넘고 병들은 쪽이 있으면 12살로 낮출 수도 있었다.
노동력이 아쉬울 경우는 10살 전에 20살 새색시를 맞이할 수 있을 만큼 예외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성년나이는 가족적, 사회 환경적 여건에 따라 부모들에 의해 정해 졌으나 육체보다는 정신 연령의 성숙도를 보는 관습이 유행됐다.
삼한시대에서도 예비 성년들은 나라가 마련한 집단거주시설에서 나라가 성을 쌓고 나라를 지키는 군역을 하는 통과의례가 있었으며 신라의 화랑역시 고된 성년 시련을 겪었다. 조선시대 안평대군은 백운대 정상 벼랑 틈을 뛰어넘는 담력으로 성인이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평민촌의 성인의식은 더 다양했다. 마을 숲이나 당산나무에 놓인 큼지막한 돌을 몇 번씩 들었다 놓았다를 거뜬하게 반복해야만 같은 또래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후기로 들면 농촌사랑채에서는 남색(男色)이 성행했다. 당시로서는 동성애 보다는 호기심 강하고 장난기가 심했던 악동 간에 벌인 남색을 주고받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고통이 따르는 시련 끝에 온전히 인정을 받지만 반쯤 인정을 받으면 나이 들어서도 반품 취급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때부터 남녀 간에는 내외가 더 심해져 길에서 만나도 반말이 사라지고 얼굴을 붉히면서 길을 내준다.
성인의식을 치른 조선시대 양반들은 걸음걸이부터 품위가 의젓하고 말씨는 더 의젓해졌다. 거짓말은 남을 살리고 의로운 곳에만 쓴다. 추노 꾼에 쫓기는 하인들을 살릴 순간 등 위급한 상황에 처해 질 경우에만 반대 쪽 길을 손질하는 방편으로만 쓴다.
서원이나 성균관을 드나드는 유생들은 비 오는 날 길을 나설 때는 꼭 종이우산을 들고 나간다. 자신이 비를 피하기 위해서도 지녔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이 시절 부녀자들이 가빳빳하게 풀 먹인 적삼 등 치마저고리를 입고 마실을 나셨다가 비를 맞으면 극히 볼썽사납게 된다.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아녀자 앞에 슬그머니 우산을 던져두고 가는 게 조선 선비 정신이다.
그 우산을 쓴 여인의 가슴에는 이 유생의 배려 정신이 평생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관례를 치룬 선비들의 정신세계는 높고 고고했었다. 그러니 조선시대 500년을 살았던 여성들이 가장 흠모하는 층이 유생이었다.
1973년 정부는 4월20일을 성년의 날로 정했다가 1975년부터는 5월6일로, 1985년부터 셋째 월요일로 다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