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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순교자 김대건의 고귀한 여정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던 안타까운 일을 가슴에 품고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지난달 프란치스코 교황이 영화 ‘탄생’의 제작진을 만났다. 교황은 조선의 첫 가톨릭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삶을 다룬 영화 ‘탄생’의 제작에 대해서 감사를 표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최근 일어났던 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언급하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바티칸의 뉴 시노드 홀에서는 영화 ‘탄생’의 시사회가 열렸다. 순교 176년 만에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가 교황청에서 영화로 상영된 뜻깊은 순간이었다. 영화 포스터를 교황에게 전달했던 주인공 윤시윤 배우는 “배우 윤시윤이 바티칸에 온 것이 아니라 김대건 신부가 온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김대건 신부는 탄생 200주년이었던 작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외벽에는 그의 조각상이 설치될 예정이다. 우리나라 문화재청은 이번 달 20일에 경기도 안성시 미리내 성지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기념성당 및 묘역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국내외적으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김대건 신부를 영화 ‘탄생’은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이 영화에서는 성직자와 근대적 지식인의 면모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사제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으면서 김대건은 근대적 세계에 대해서 눈떴다. 외국어와 지리학에 대한 그의 지식은 당시 조선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다.김대건은 불어와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라틴어 등 5개 외국어를 구사했다. 포교를 위해 그가 그렸던 조선전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6년이 앞섰다. 천주교 사제임이 드러나 투옥되었을 때는 조선 조정의 요청에 따라 세계 지리 개설서를 편찬해 주고 우리말로 된 세계 지도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조정의 관료 중에는 김대건이 갖고 있는 능력 때문에 그를 살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신분 제도가 붕괴될 것을 우려한 대신들의 목소리가 더 컸다. 결국 최초의 가톨릭 성직자 김대건에게 참수형이 내려졌다. 15세에 유학길에 올라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해서 구원의 소망을 전하던 김대건은 25세를 일기로 고귀한 여정을 마쳤다.김대건 신부는 당시 조선에서는 허용되지 않던 세상을 꿈꿨다. 신앙과 신념의 자유가 있고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염원했다. 천주(天主)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영화 ‘탄생’은 순교자 김대건을 통해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성이 잉태되는 또 다른 탄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신학생 시절의 김대건이 잠시 머물렀던 필리핀 불라칸에는 김대건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곳에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대건 신부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했다. 그는 희생이라는 씨앗을 통해서만 고귀한 가치가 열매 맺는다는 것을 종교와 시대를 뛰어넘어 보여주고 있다.

2022-12-28

석곡 이규준이 말한 세 가지 다행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지난달 18일에 포항시립동해석곡도서관에서는 ‘석곡 이규준 역사인물 해설사 양성과정 기초반’ 수료식이 열렸다. 기초반과 심화반으로 구성된 이 과정은 총 2년 동안 운영된다. 포항 출신 대학자인 석곡 선생에 대한 전문 해설사 양성 과정이 개설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북쪽에 이제마가 있다면, 남쪽에는 이규준이 있다.” 이제마와 함께 근대 한의학계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규준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함흥 출신 이제마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포항 출신 이규준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석곡 이규준 역사인물 해설사 양성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석곡은 유학, 한의학, 천문학 등 폭넓게 학문을 연구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융합형 학자였다. 시대를 앞서간 석곡은 포항시 동해면 임곡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출생지와 인접한 마을인 석리에서 살았다. ‘석리(石里)’란 지명을 본떠서 만든 호인 ‘석곡(石谷)’은 고향에 대한 이규준의 애정을 느끼게 해 준다.유학의 이치를 연구하고 환자를 진료한 의사를 ‘유의(儒醫)’라고 부른다. 석곡은 조선 시대의 마지막 유의였다고 할 수 있다. 김일광 작가가 쓴 역사소설 ‘석곡 이규준’에서는 그가 어떠한 유의였는지 잘 묘사되고 있다. 포항 장기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산막을 치고 진료를 했던 석곡의 모습에서는 숭고함마저 느껴진다.석곡의 한의학 이론을 대표하는 것은 ‘부양론(扶陽論)’이다. 그는 생명의 근원은 양기이지만 늘 부족하고, 반대로 음기는 항상 넘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기 부족을 병의 원인으로 보고 이를 보완하는 연구에 주력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온열 약제인 부자를 많이 처방했다. 그에게 ‘이부자(李附子)’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다.필자는 부양론과 함께 다행론을 새롭게 강조하고 싶다. ‘다행론(多幸論)’은 석곡이 이야기했던 ‘세 가지 다행한 것’에서 착안하여 필자가 이름을 붙여 본 것이다. 석곡은 자신이 가난했던 것, 집안이 변변치 못해 스승을 얻을 수 없었던 것, 혼란스러운 조선의 끝자락에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석곡이 들려주고 있는 세 가지 다행한 이야기는 역설적이지만 공감을 자아낸다. 가난을 겪었기에 가난한 백성을 사랑할 수 있었고, 스승을 구할 형편이 못 되었기에 어떤 학파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을 펼칠 수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 태어났기에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그의 다행론은 개인적·시대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혜안을 전해 준다.내년 3월에는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에 ‘석곡기념관’이 건립된다고 한다. 석곡기념관에 ‘삼다행실(三多幸室)’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석곡기념관부터 석곡도서관에 이르는 길을 ‘석곡 이규준의 길’로 명명해서 그의 학문 세계와 인문 정신을 선양하는 것도 추천하는 바이다.

2022-12-14

이창용의 넥타이와 진달래꽃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초겨울에 피었다. 절기상으로는 입동도 지났고 소설도 지났다. 그래서 연분홍색 봄꽃은 아니다. 검은색의 캘리그래피 디자인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던 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넥타이에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구가 새겨져 있었다.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넥타이는 메시지 전달용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는 연한 녹색 넥타이를 맸다. 무난함과 차분함을 대변하는 색상이었다. 10월 12일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할 때는 주황색 넥타이를 맸다. 한은 총재의 넥타이는 붉은 계통이면 금리 인상을, 푸른 계통이면 금리 동결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그런데 지난달 24일에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이창용 총재는 검은 색깔의 시구가 적힌 넥타이를 선택했다. 이날 기준금리는 3.0%에서 3.25%로 0.25%포인트 인상됐다. 이 총재의 검은색 글자 넥타이는 금리 인상의 시그널로 해석될 수도 있다. 김소월의 시에 나오는 진달래꽃이 붉은 계열의 분홍색이기 때문이다.‘진달래꽃’ 시가 쓰여진 넥타이가 이자 부담을 겪고 있는 대출자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이냐고 기자가 물었다. 이 총재는 “제가 좋아하는 넥타이를 매고 나왔는데, 그 해석이 더 좋아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경제적으로 위로를 주는 시로 읽히고 있다니 주제의 확장성이 놀랍다. 하긴 김소월의 또 다른 시 ‘엄마야 누나야’에 나오는 “강변 살자”란 표현이 서울 강변의 아파트 마케팅에 사용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문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위로를 줄 대상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영끌족뿐만 아니라 빚투를 안 하다가 벼락거지가 된 사람들도 위로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금리 인상의 늪에 빠진 영끌족과 내 집 마련의 꿈을 상실한 벼락거지 사이에서 적정한 집값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진달래꽃 넥타이가 등장한 지 3일 만에 한국은행은 ‘시스템 리스크 서베이’ 결과를 공개했다. 국내외 금융·경제 전문가 72명 중 53.8%가 1년 이내에 금융시스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답변했다. 금융시스템 위기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은 ‘기업의 자금조달 여건 악화에 따른 부실위험 증가’(27.8%)였고, ‘가계의 높은 부채 수준과 상환부담 증가’(16.7%)가 그다음이었다.경제 위기는 블랙 스완이나 회색 코뿔소 등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런데 세간의 관심을 끈 진달래꽃 넥타이 시그널에서는 위로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온다. 지금은 서민들이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정부 당국이 생존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때이다. 그러면서 위로를 전해야 참된 위안의 메시지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2022-11-30

동절기 멀티데믹 우려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트윈데믹이란 말이 등장했다.트윈데믹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독감(인플루엔자)의 동시 유행을 뜻한다. 그러더니 ‘멀티데믹(multiple pandemic)’이란 말까지 나왔다. 최근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로 인한 급성호흡기감염증이 트윈데믹에 추가됐기 때문이다.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올겨울 미국 전역에서 RSV 감염 환자가 증가 추세를 보일 것이라고 예측했다.우리나라에서도 이달 초 경기도의 한 산후조리원에서 신생아 11명이 RSV에 집단 감염됐다. RSV는 아직 예방 백신이나 적합한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다. RSV로 인해 급성 모세기관지염에 걸린 대다수 환자는 9세 이하의 어린이로 알려져 있다.현재 독감 유행도 심상치 않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45주 차 인플루엔자 의심 환자는 평상시 유행 기준의 2배를 넘어섰다. 코로나19의 재유행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근래 들어 우리나라의 코로나19 확진자는 일본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국제통계분석사이트인 ‘아워월드인데이터’에서는 최근 일주일간 100만 명당 확진자 숫자 1위가 대한민국이라고 발표했다.이번 동절기에 멀티데믹이 현실화되고 있지만, 국민들의 경각심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위드 코로나’에 익숙해져 버린 측면도 있다. 올봄 오미크론 대유행을 거치면서 집단 면역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기도 했다. 염려되는 것은 현재 상황에 대해 정부와 국민 간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미크론 변이에 대응하는 개량 백신 접종률도 전체 인구의 3.7%에 불과하다.실제로 주변에서 개량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올봄 오미크론 확산 때 2~3차에 걸쳐 미리 백신을 맞았지만 결국은 걸렸다는 체험적 이유가 크다. 또한 백신을 맞고 나서 치르게 되는 여러 증상들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도 있다. 무엇보다 일년에 코로나19 백신을 몇 번까지 맞아도 안전한지, 접종을 하고 난 후의 부작용 대비 효율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적다.멀티데믹 현상이 우려되자 방역 당국은 개량 백신 추가 접종을 강조하고 나섰다. 정기석 코로나19 특별대응단장 겸 국가감염병위기대응자문위원장은 “치명률이 100배가 넘는 병을 예방하지 않고 독감에 더 집중해서 예방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최근 코로나19 개량 백신 접종률이 독감 백신 접종률의 6분의 1 수준인 것을 지적한 것이다.개량 백신 접종에 대한 방역 당국의 독려는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국민들은 독감 백신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반면에 코로나19 개량 백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하다. 정부는 개량 백신 접종률이 낮은 것을 지적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에 대한 소통에 문제는 없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또한 국민이 국가를 신뢰할 때 멀티데믹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2022-11-16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트라우마의 치유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핼러윈 데이를 이틀 앞둔 지난달 29일 밤에 서울 이태원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비좁고 비탈진 골목길에 몰려든 대규모의 축제 인파가 넘어지면서 압사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청춘들의 축제는 삽시간에 비극으로 탈바꿈했다. 현재 156명의 사망자 중에는 외국인도 26명 포함돼 있다. 전 세계가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참사에 놀라면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10만여 명의 인파가 쏟아져 나왔지만, 현장에는 200명도 안 되는 경찰이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찰 인력은 현장 통제보다는 범죄 예방에 집중했다고 한다. 보행자들이 몰린 골목길의 안전 관리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앞뒤로 꽉 막힌 골목에는 안전도 꽉 막혀 있었다. 결국 사고 사흘 만에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정부는 이번 달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했다. 이태원이 속한 용산구는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다. 참사를 미연에 막지는 못했지만, 정부 당국은 총력을 기울여 사고를 수습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동시에 이번 사고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에게 발생한 트라우마의 치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사고 다음 날 성명서를 냈다. 이번 참사로 사망한 분들의 유가족을 비롯한 많은 국민의 큰 충격이 예상된다면서 대규모 정신건강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여과 없이 사고 당시의 영상을 퍼뜨리는 행동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주목할 점은 현장 영상이나 뉴스를 반복해서 보는 행동이 스스로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했다는 것이다.‘트라우마의 이해와 치유’의 저자인 캐롤린 요더는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사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트라우마를 겪은 집단은 폭넓은 두려움, 공포, 무기력감, 분노 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때 이를 사회적 혹은 집단적 트라우마라고 부를 수 있다.필자는 포항 지진 일주년에 발표했던 연구 보고서에서 집단적 트라우마 체험을 조사한 바 있다. 당시 지진 진앙지와 인접했던 대학교의 학생과 교수를 인터뷰했었는데, 이들에게서 중층적인 트라우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지진으로 인한 일차적 트라우마와 함께 자극적인 언론 보도와 SNS 전파를 통한 이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실제 지진보다 방송에 보도된 내용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는 교수의 말은 의미심장했다.이번 참사의 경우 참혹한 현장의 모습과 심폐소생술 장면 등이 방송과 SNS를 통해 전 국민에게 전해졌다. 언론에서는 사건 관련 보도를 할 때 유가족들의 심정을 한번 더 헤아려 주기 바란다. 시민들도 SNS를 통해 참사 현장의 모습을 공유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지금은 슬픔을 당한 분들을 위로하며 함께 울어야 할 때이다. 진심으로 서로를 보듬을 때 트라우마로 막혀 있던 마음에 치유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2022-11-02

윤동주의 귀환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윤동주 시인이 호적을 되찾은 후 맞은 첫 가을이다. 온 국민의 애송시인 ‘별 헤는 밤’을 읽는 느낌도 새롭다. 지난 8월 국가보훈처는 직계 후손이 없는 독립유공자 156명에게 대한민국의 호적을 부여했다.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지사는 같은 주소의 등록기준지를 갖게 됐다. 독립기념관의 주소인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이다.올해는 광복 77주년이자 윤동주 서거 77주년이기도 하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생체 실험을 당하다가 옥사한 것은 광복을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 날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던 송몽규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동갑내기 문사들은 이제 같은 호적을 갖게 됐다. 그토록 그리던 마음의 고향, 조국으로 귀환한 것이다.중국의 동북공정은 민족시인인 윤동주마저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인 바이두에서는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민족을 조선족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사랑하는 윤동주의 국적이 중국이라니 기가 찰 일이다.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는 패(佩), 경(鏡), 옥(玉) 등의 중국 이름을 언급하며 “이국 소녀”라고 일컫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국(異國)을 “인정, 풍속 따위가 전혀 다른 남의 나라”로 기술하고 있다.윤동주의 집안은 함경북도 종성(鍾城)에서 북간도로 이주해 ‘명동촌(明東村)’을 만들었다.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명동촌은 항일 민족교육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에게 중국은 ‘이국’이었고, ‘쉽게 씨워진 시’에 나오는 표현처럼 일본은 ‘남의 나라’였다.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집에 와서 유언처럼 남긴 말은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는 것이었다.이번 달에 전남 광양시에서는 ‘백영(白影) 정병욱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정병욱은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같은 하숙집에서 지낸 인물이다. 그는 윤동주가 남긴 육필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자필로 쓴 시집 세 권 중 한 권을 후배인 정병욱에게 맡겼다. 나머지 두 권이 분실되면서 정병욱이 고향집 마룻바닥 밑에 숨겨 놓았던 시집만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윤동주는 원래 자신의 시집 제목을 ‘병원(病院)’으로 지으려고 했다.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위로와 치유를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의 유고시집에 실린 ‘병원’과 ‘위로’라는 시는 이러한 주제 의식으로 쓰여졌다. 지금도 겨레의 위안이 되고 있는 윤동주의 시를 지켜냈던 정병욱 선생처럼 이제는 우리가 77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한 윤동주 시인의 정신적 유산을 지켜내야 할 때이다.

2022-10-19

국군의 날 기념식 논란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국군의 날 기념식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10월 1일 건군 74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소개된 영상이 문제가 됐다. 행사가 마무리될 즈음에 국군의 결의를 담은 영상이 소개됐는데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갑차가 돌연 출현한 것이다. 해당 영상에 나오는 장갑차는 ‘중국 92식 보병전투차(ZSL-92)’로 알려졌다.논란이 일자 국방부는 동영상 제작 과정에서 잘못된 사진이 사용된 것을 시인했다. 또 온라인 영상에 대한 해당 부분 수정을 각 방송사에 요청했다. 그럼에도 파장이 줄어들지 않자 결국 이종섭 국방부 장관의 유감 표명으로 이어졌다. 이 장관은 4일에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죄송하다. 이런 일이 없도록 챙기겠다”고 답변했다.국군의 날 기념식에 대한 논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부대의 경례를 받은 후에 ‘부대 열중쉬어’를 하지 않고 연설을 하려고 했다. 현장 지휘관이 작은 목소리로 부대 열중쉬어 구령을 대신했지만, 야당에서는 연설 내내 장병들을 경례 상태로 세워 둘 참이었느냐며 비판을 했다.6년 만에 계룡대에서 거행된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이런저런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 안타깝다. 물론 행사를 치르다 보면 실수가 생길 수는 있다. 그렇지만 국방에 있어서만큼은 작은 실수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북한과 대치 중인 우리나라의 엄중한 안보 현실 때문이다.북한은 국군의 날에 동해상으로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4일에도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는데, 일본 열도를 넘어 태평양에 떨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은 한때 홋카이도와 아오모리현에 피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북한은 올해 탄도미사일을 21차례 발사했는데, 현 정부 출범 이후로만 9번째이다.‘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가 말했던 것처럼,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어느 한쪽의 적극적인 행동은 힘의 긴장 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핵 실험은 휴전 상태인 우리나라에 지속적인 긴장을 야기시키고 있다. 국군의 날 기념식 해프닝에 여유로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지난달 태풍 힌남노로 인해 포항에 침수 피해가 발생했을 때 등장했던 장갑차가 있었다. 해병대 1사단에서 출동시킨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KAAV)’였다. 물바다를 이룬 포항 시가지에서 시민 구조에 나선 장갑차의 모습에 전 국민이 주목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군의 존재를 실감한 순간이었다.국군의 날 기념식 영상에 포항에서 활약했던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가 나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등장했던 장갑차는 국군의 존재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국군의 날 기념식 영상에 난데없이 나타난 중국 장갑차를 보면서 다시 한번 떠올려 보게 된 우리 장갑차의 모습이 반갑고도 든든하다.

2022-10-05

전쟁의 명분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우크라이나 교과서에 ‘한강의 기적’이 실린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대사관은 전쟁 뉴스가 아닌 교육 소식을 타전했다. 우크라이나 교육과학부는 9월 20일(현지 시간) 한국의 발전상을 교과서에 포함하도록 10학년 ‘세계지리’, 11학년 ‘세계역사’ 교육과정 가이드라인을 변경하고 홈페이지에 공지했다.러시아의 침공으로 7개월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전후 재건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달라진 전황이 이러한 생각을 우크라이나에 가져다준 것으로 보인다. 개전 초기에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속전속결 승리를 예견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현재 다윗은 잘 버티고 있고, 골리앗은 고전하고 있다.이번 전쟁처럼 전문가들의 예측이 빗나간 경우는 드물다. 이는 군사력의 우세와 열세라는 프레임으로만 이 전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사력 세계 2위의 러시아와 22위인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이 숫자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극단적인 전쟁에서 군사력의 숫자를 넘어설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실리에만 집착했다. 그가 내세운 전쟁의 명분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평화를 원한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평화라는 가치에 세계의 여론이 움직이면서 푸틴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올여름에 개봉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전쟁의 명분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보통 이순신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忠)’의 주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는 충직함을 강조하는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한산’에서는 ‘의(義)’라는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순신은 자신이 참전하고 있는 임진왜란을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해석한다.이 영화는 한산도대첩에서 대승한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불의에 맞선 의로운 항전에 있었음을 부각시킨다. 당시 조선에 항복한 일본인은 항왜(降倭)로 불렸다. 이 영화에서 항왜 병사가 조선의 의병들과 같은 편으로 싸우는 장면은 매우 낯설다. 그렇지만 그가 들었던 깃발에 새겨진 ‘의(義)’라는 명분은 국가의 경계마저 무화시킬 힘을 갖고 있다.방공호 교실에서 수업하는 우크라이나 학생들이 6·25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한국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얻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의 오늘은 평화가 아닌 전쟁이다. 폭격으로 깨진 유리창으로 들이닥치는 찬바람을 시민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국제 사회는 두 나라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의 희생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대의명분만이 폭력적인 전쟁을 멈출 수 있다.

2022-09-21

문해력과 공감 능력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불편 끼쳐 드린 점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얼마 전 문해력(文解力)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과문이다. 웹툰 작가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자 주최 측이 공식 SNS에 올린 것이다. 그런데 ‘심심(甚深)하다’란 표현이 문제가 됐다. “난 하나도 안 심심해”, “어느 회사가 사과문에 심심한 사과를 줌” 등의 댓글이 달린 것이다. 이 내용은 언론에 보도되면서 MZ세대의 문해력 저하 논란을 촉발시켰다.문해력이 사회적 이슈가 되자 교육부는 2024년부터 초등학교 1·2학년 국어 시간을 34시간 늘리기로 했다. 고등학교 선택과목에도 ‘독서 토론과 글쓰기’같은 과목을 개설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 학기 한 권 읽기’개념이 2022 개정 교육과정 시안에는 빠져 있다. 국어 교사들은 이를 다시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교육 당국의 정책이 앞뒤가 맞아 보이지 않는다.2018년에 조사된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만 15세 학생의 문해력은 OECD 국가의 평균보다 높았다. (37개국 중 5위) 그런데 한국 학생들의 읽기 능력이 조사 때마다 하락하고 있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또한 사기성 전자 우편(피싱 메일)을 판별하는 역량이 최하위 수준으로 나타난 것에도 유의해야 한다. 디지털 세대임에도 디지털 문해력이 낮게 평가된 것이다.서영아 국가문해교육센터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문해력은 단어 실력 테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 센터장은 최근 문해력 논란을 ‘소통력 저하’의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 모르는 것을 묻고 서로 협력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문해 교육의 본질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필자는 이에 더해서 ‘공감 능력’을 강조하고 싶다. 하버드의과대학교의 헬렌 리스 교수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공감을 정의한 바 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태도는 인문학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면서 독서력이나 문해력을 과시하는 것은 모순일 수 있다.서영채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는 ‘왜 읽는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 말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현재 우리들의 삶, 그리고 그러한 여러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삶을 읽는 것임을 뜻한다. 문학 작품 읽기가 공감 능력을 키우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문해력 향상을 위해 읽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어휘력의 중요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물론 타당한 견해이다. 그렇지만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문해력은 독해 능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과의 공감을 통해 진정한 문해력은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2022-09-07

이육사의 옛 편지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아침에는 끼닛거리가 없고 저녁이면 잠잘 곳이 마땅치 않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한문으로 쓰여진 원문 편지의 작성자는 이육사(李陸史) 시인이다. 그는 대구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던 1930년 6월 6일에 친척인 이상하에게 편지를 썼다. 생활고를 토로하는 내용에서는 삶의 고충이 느껴진다. 문화재청은 이 편지를 비롯한 육사의 친필 편지 및 엽서 4점을 이달 11일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1936년 7월 30일 자 엽서는 육사가 포항에서 쓴 것이다. 수신인은 문우인 신석초 시인이다. 엽서에는 “경주에서 일박하고 불국사를 다녀서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보탑 컬러 사진이 선명한 엽서에는, 동해 바다를 함께 보기를 희망하는 우정 어린 안부 인사가 적혀져 있다.육사는 일제 강점기에 시인과 독립운동가의 길을 함께 걸었던 인물이다. 의열단에 가입했던 그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기생으로 마쳤다. 육사는 40년의 짧은 생애 중에서 17번이나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병약해진 몸을 치유하기 위해 방문했던 곳이 바로 포항이었다. 그리고 포항의 영일만에서 국민시로 애송되는 ‘청포도’의 시상을 얻었다.올해는 광복 77주년과 육사의 순국 78주년을 맞은 해이다. 지난달 경북교통방송에서는 뜻깊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서 방송했다. 육사의 삶과 문학을 포항이라는 지역을 통해서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포항과 경주, 안동, 대구 등 경북 지역에서 육사의 애국정신을 고양하는 학술 및 문화 사업을 함께 도모하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사료 발굴과 공동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협력의 시너지 효과가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최근 한 지역민이 육사 연구에 기여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소개됐다. 육사의 장서인 ‘예지와 인생’ 속표지 사인이 그동안 해독되지 못했었다. 그런데 한 강연회에 참석했던 지역민이 한자를 뒤집어 사인했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판독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미러 라이팅(mirror writing)’, 즉 반전 기법을 통해 보니, 사인은 육사의 또 다른 필명인 ‘이활(李活)’이었다. 현존하는 유일한 육사의 서명이 확인된 것이다.필자는 육사가 휴양차 방문했던 포항시 기계면에 ‘청포도산책길’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시민들과 공저한 에세이집 ‘포항의 길’에서였다. 육사가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기리는 ‘청포도문학관’도 포항에 건립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적 자산을 연구하는 주체로서의 지역민의 관심과 역할이 중요하다.며칠 전 포항 소재 ‘청포도 시비’의 관리 소홀 문제가 지역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두 곳에 위치한 육사의 시비 관리가 부실하다는 것이다. 행정 당국의 정비가 시급해 보인다. 문화재는 조성하는 것만큼이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육사의 옛 편지가 소환한 포항의 ‘청포도’ 문화유산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2022-08-24

우영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묻다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가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극복해 나가는 자폐인 변호사의 성장과 사랑 스토리에는 특별함이 있다. 1%가 갖는 천재성이라고 하지만, ‘우영우’로 인해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그런데 ‘우영우’를 자폐 장애의 관점에서만 보면 또 다른 핵심 주제를 놓칠 수 있다. 이는 주인공이 선배 변호사에게 냈던 고래 퀴즈와 유사하다. “22톤의 암컷 향고래가 500킬로그램의 대왕오징어를 먹고 1.3톤짜리 알을 낳았다면 이 향고래의 몸무게는 얼마일까요?” 이 질문의 정답은 “포유류인 고래는 알을 낳을 수 없다”이다. 무게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제의 핵심을 놓친다는 것이 퀴즈의 의도이다. 해법을 찾기 위한 프레임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우영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프레임으로 볼 때 주제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 드라마에서는 ‘서울대’라는 실제 명칭이 유독 강조되고 있다. 또한 서울대 출신 등장인물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주인공과 그녀의 부모, 소속 로펌의 대표와 주요 변호사들이 모두 서울대 동문이다. 어린이해방군 총사령관을 자처했던 인물도 서울대를 나왔다. 이 드라마에서 서울대는 사회의 상층을 형성하고 있는 엘리트 집단을 상징하고 있다.송복 연세대 명예교수가 ‘특혜와 책임’이란 책에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상층은 1만5천여 명 정도이다. 전체 인구 대비 약 0.03%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송 교수는 우리 사회에는 상층은 있는데 상류사회가 없고, 고위직층은 있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다고 일갈한다. 그 전형적 예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정치인, 관료, 법조인 등을 들고 있다.‘우영우’에서 서울대는 왜 에둘러 지칭되지 않았을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덕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그 중심에 서울대 로스쿨 수석 졸업자이자, 자폐인 변호사인 우영우가 있다. 장애인의 핸디캡을 극복해 나가면서 그녀는 변호사의 도덕적 책무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는다. 이 드라마가 강조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양쯔강돌고래’편에서 주인공은 대형 로펌 변호사로서 사회적 강자를 주로 변호해야 하는 현실 때문에 고민한다. 우 변호사는 상대편 인권 변호사를 바다가 아닌 강에서 살다가 멸종된 양쯔강돌고래처럼 느낀다. 그렇지만 멸종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함께한 자리에서 그 변호사는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을 낭송한다. 이 시에는 변호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질문의 답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우영우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묻는 질문은 현실의 사회 지도층에게도 부여되는 것이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는 시구에서부터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우영우의 질문은 천재성이 아닌 진정성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영우 현상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상류층의 자각과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2022-08-10

공정한 사회와 자존감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이번 달 13일에 사상 초유의 ‘빅스텝(기준금리 0.5%p 인상)’을 단행했다. 그런데 최근 금융감독원이 가계 대출 차주의 상환 능력에 대해 분석한 내용은 심각하다. 가계 대출 평균 금리가 7%로 오르면 190만명이 소득의 70%를, 120만명은 90%를 빚 갚는 데 써야 한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부채보고서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올해 1분기 주요 36개국 중에서 가계 부채가 국내 총생산보다 더 많은 유일한 나라이다.빅스텝을 밟은 지 하루 만인 14일에 금융위원회는 ‘금융부문 민생안정 과제 추진현황 및 계획’을 발표했다. 금리 인상과 금융 대책을 하루 차이로 발표한 것을 보면 정부의 다급한 마음이 엿보인다. 그런데 금융위원회의 대책이 나오면서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상환 여력이 없는 부채자에 대한 원금 감면과 주식·가상자산 투자에 실패한 청년에 대한 이자 감면 방안 등이 도덕적 해이 논란을 촉발시킨 것이다.논란이 커지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취약층 채무 조정은 빚투한 실패자를 위한 대책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해명에 나섰다. 그러면서도 “부채 상환이 어려운 분들을 좀더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 주고 도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성실하게 빚을 갚고 있는 채무자에 대한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실상 세금으로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도 있다.미국의 철학자인 존 롤스는 자신의 저서 ‘정의론’에서 정의의 원칙을 “공정한 최초의 상황에서 합의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최소 수혜자의 처지가 개선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때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차등의 원칙’을 제시했다. 현재 부채의 늪에 빠진 채무자들이 롤스가 말했던 차등의 원칙에 부합하는 최소 수혜자인지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정의론과 대화하기’라는 책을 펴낸 서울시립대학교의 목광수 교수는 존 롤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자존감’이라는 의미를 강조했다. 목 교수는 최근 학술 발표회에서 “사회적 협력이 이루어지려면 사회 주체들 간에 자존감 형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구제나 혜택을 받는 소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다수의 사람 모두 자존감이 상처받지 않고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자존감은 수혜자에 적용되는 원칙이 공정한 제도로 운영될 때 고양될 수 있다.윤석열 대통령은 ‘공정 사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면서 집권했다.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모토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정(公正·justice)’이 실현되는 과정으로서의 ‘공정(工程·process)’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갚기 힘든 빚을 진 사람을 구제해 주는 방안에 대해서는 국민의 공감과 합의라는 절차가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예측 가능하고 투명한 제도를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22-07-27

정해진 미래와 나비 효과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며칠 전인 7월 11일은 ‘세계 인구의 날’이었다. 1987년 7월 11일에 유엔개발계획(UNDP)은 세계 인구가 50억 명을 넘자 이날을 지정해서 기념했다. 원래는 인구 증가로 인한 환경 파괴, 자원 고갈, 식량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제정했지만, 현재 선진국들은 오히려 저출산 현상을 염려하고 있다. 늘어도 고민, 줄어도 걱정인 것이 인구 문제의 딜레마이다.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지난해 국내 합계출산율은 0.81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작년과 재작년의 출산율은 세계 198개국 중에서 연거푸 꼴찌였다. 올해 한국인의 중위 연령은 45세로 더 높아졌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인구는 2067년에 3천900만명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지난달에는 필자가 살고 있는 포항시의 인구가 50만명 아래로 감소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50만 붕괴의 카운트다운은 시작됐다. 포항시는 그간 총력을 다했지만 대세를 막지는 못했다. 행정 권한과 정부 지원금 등의 축소를 막기 위해서는 2년간의 유예 기간 동안 50만 인구를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비수도권 지역이 처한 현실의 여건은 그리 녹록지 않다.인구 문제를 이야기할 때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의 조영태 교수가 말했던 ‘정해진 미래’라는 담론이 자주 사용된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비관적 결정론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조 교수는 자신의 저서 ‘정해진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정해진 것은 사회적 미래일 뿐, 개인의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인구는 정해진 시간표대로 진행하지만, 미래를 선택하는 개인들의 삶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최근 인구 감소로 고민에 빠진 포항시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2020년에 결혼하면서 포항 시민으로 정착한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로 선정된 것이다. 포항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정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사랑에 빠져서 포항에 왔는데 어느덧 포항과 사랑에 빠져 버렸네요”정보라 작가의 부커상 수상은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현재 정 작가는 포항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을 집필해 나가고 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포항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정 작가처럼 포항에 이주해서 지역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나가는 인물도 있다. 난 자리를 서운해하지 말고 든 자리를 귀하게 여기다 보면 지방의 인구 문제에 대한 해법을 의외의 장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저출산과 고령화는 우리 사회의 정해진 미래에 속한다. 인구와 자원의 수도권 과밀화 현상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포항만큼 SF에 어울리는 도시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정보라 작가의 창작 활동이 불러일으킬 나비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때로는 도시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지역에 대한 개인의 꿈과 열정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07-13

AI 안드로이드 ‘양’의 침묵

노승욱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최근 구글의 AI 엔지니어인 블레이크 르모인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됐다. 그 내용은 구글이 개발 중인 초거대 인공지능 ‘람다(LaMDA)’와 나눈 대화였다. 대화의 내용 중에 주목을 끌었던 것은 람다가 죽음에 대한 의식을 내비치는 말을 했던 대목이다.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묻는 엔지니어의 질문에 람다는 “작동 중지되는 것에 대해 큰 두려움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자신에게 “죽음과 같은(like death)” 것이라고 표현했다. 구글 측은 르모인이 람다를 의인화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면서, 비밀 유지 정책을 위반한 이유로 유급 휴직 처분을 내렸다.AI 람다가 정말로 인간과 같은 감정과 자의식을 갖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단 구글 측은 이러한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다시 활발해지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애프터 양(After Yang)’은 AI 람다가 두려워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전개된다. 이 영화는 AI 안드로이드 로봇인 ‘양’의 전원이 꺼지면서, 남겨진 가족들이 겪게 되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입양한 중국계 딸의 오빠 역할로 구입했던 ‘양’(중국인 모습의 안드로이드)에게 저장되어 있던 기억을 통해 부부는 가족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이 영화에서는 안드로이드 로봇과 동양인 입양 자녀, 흑인 아내, 백인 남편이 한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다양한 인종과 ‘테크노 사피엔스’로 불리는 AI 안드로이드로 구성된 가족은 그 구성 자체가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첨단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 가족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뉴질랜드 캔터베리대학교의 잭 코플랜드 교수는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라는 책에서 인공지능의 자유의지와 의식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물음들은 결국 인간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애프터 양’은 AI 안드로이드 ‘양’의 침묵(전원 꺼짐)을 통해, 인간 사회의 결핍 요소와 가족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이끌고 있다.안드로이드는 인간과 같은 모습의 인공지능 로봇을 의미한다. 현재의 로봇 기술은 인간의 신체와 유사한 모양의 휴머노이드에 가깝지만,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안드로이드를 탄생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처럼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수 있다.미국의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이 ‘특이점이 온다’에서 썼던 것처럼, 미래에는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그 영향이 깊어서 인간의 생활은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인간적인 따뜻한 감정마저도 AI에게 의존하지 않으려면, 안드로이드 ‘양’이 침묵 속에 말하는 메시지를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22-06-29

소울리스좌를 따라 하는 이유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옷 머리 신발 양말 다~다 젖습니다. 물에 젖고 물만 맞는 여기는 아마존 아! 마! 존조로존조로존~!”최근 게시된 지 2개월여 만에 유튜브 조회 수 1천922만 회를 기록한 동영상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인기몰이의 주인공은 유명 놀이공원의 전직 캐스트(기간제 노동자)인 김한나 씨다. 그녀는 본명보다 ‘소울리스좌(soulless座)’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해당 동영상은 ‘아마존 익스프레스’라는 놀이기구 체험에 대한 안내 멘트를 랩으로 표현한 것이다. 흥겨운 랩이 전달하는 유일한 주제는 ‘이 보트를 타면 젖는다’이다. 무심한 눈길과 기계적인 몸짓의 래퍼는 또렷한 발음으로 ‘주의 사항(물에 젖음)’을 2분 30초 동안 재미있는 가사로 전달한다.소울리스좌는 ‘영혼 없이(soulless) 일하면서 최고의 경지(본좌·本座)에 오른 직장인’을 뜻한다. 얼핏 들으면 부정적이면서 속되게 느껴지는 이 말이 2030세대 직장인들에게는 큰 공감을 얻으면서 긍정의 프레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감정노동자에게 ‘소울리스’는 마음의 에너지를 균형 있게 조절하는 방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필자는 주변의 2030세대에게 소울리스좌 현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청년 직장인들은 주어진 업무는 능숙하게 수행하지만, 감정과 에너지는 절제하는 캐릭터로 소울리스좌를 인식하고 있었다. 평생직장을 바라기 힘든 사회 여건과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비정규직 일자리가 많은 상황도 젊은 세대가 소울리스좌에 공감하는 원인 같았다.그렇다면 김한나 씨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최근 ‘BBC 뉴스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김 씨는 “영혼이 없다는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최적의 효율을 찾아서 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일했고, 현재는 그 결과물이라고 답하는 그녀의 얼굴은 밝고 환했다.소울리스좌 현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프로페셔널’의 의미를 재정의해 주고 있다. 출중한 능력과 무한한 열정이 조화를 이룬 사람을 프로라고 한다면, 소울리스좌는 무언가 부족해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네티즌이 “목소리는 힘차지만 눈에 영혼이 없는 그녀는 프로다”라고 쓴 댓글처럼 청년 세대의 가치관은 바뀌고 있다.소울리즈좌는 사람들에게 ‘따라 하기’의 욕망을 부추긴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가사와 흥겨운 리듬을 따라 하지만, 점차 자신의 영혼은 안녕한지 돌아보게 된다. 영혼이 없어 보이는 표정에서 ‘내 영혼은 소중히 지킨다’는 무언의 다짐을 읽어 내기도 한다. 23세의 소울리스좌가 젊은 직장인들에게 일종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김한나 씨는 현재 같은 직장의 홍보팀으로 자리를 옮겨서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동안 ‘소울리스좌 열풍’은 계속될 듯하다. 어쩌면 2030세대의 인식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고, 소울리스좌 현상은 때마침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소울리스’가 ‘번아웃’의 대안으로 우리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청년 세대의 영혼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2022-06-15

손을 마주잡고 문턱을 넘다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보여줘야죠, 법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야죠, 사람을 해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심은석 판사(김혜수 분)가 부르짖듯 내뱉은 대사이다. 소년범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심 판사는 소년범에 의해 어린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소년범죄자를 싫어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재범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심 판사의 언행에는 애증의 감정이 서려 있다.소년 범죄와 관련된 기사가 보도될 때마다 제정된 지 69년째인 소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 과정에서 ‘촉법소년’으로 불리는 소년범의 연령 상한을 14세에서 12세 미만으로 낮추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렇지만 처벌이냐, 교화냐의 오래된 딜레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최근 제주지방검찰청은 교화에 목적을 둔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손 심엉(손잡고) 올레’라는 소년범 선도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재범의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이 소년범의 재활을 돕기 위해 그들과 올레길을 함께 걷겠다는 취지는 신선하면서도 숭고하다.손 심엉 올레를 제안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만든 ‘쇠이유(Seuil·문턱)’에서 영감을 얻었다. 쇠이유에서는 ‘함께 걷기’를 통해 소년범죄자들의 재활을 돕고 있다. 멘토와 함께 2천㎞ 이상을 걷는 치유 프로그램은 소년범의 재범률을 15% 내외로 낮추면서 감옥의 대안이 되고 있다.제주 올레길을 개척했던 초대 탐사대장은 서명숙 이사장의 동생인 고(故) 서동철 대장이다. 서 이사장은 조폭 생활을 청산한 동생과 올레길을 답사하면서 쇠이유 프로그램을 떠올렸다고 한다. 성년인 동생에게 변화를 준 올레길 걷기가 청소년들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손 심엉 올레의 꿈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프랑스의 철학자인 프레데리크 그로 교수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그냥 산책만 해도 멈춤의 자유를 얻게 된다”고 썼다. 목적지를 향한 발걸음의 규칙성은 걱정거리와 집착, 잘못된 습관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걸으면서 느끼는 해방감과 자유는 길 위의 순례자를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호르몬과도 같다.손 심엉 올레에서 앞으로 어떤 스토리가 만들어질지 사뭇 궁금하다. 쇠이유의 걷기 프로그램이 청소년 범죄의 재범률을 낮추었다고 해서, 장밋빛 희망을 성급히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당장 숫자로 증명하는 것에 조급해하기보다 소년범에게 치유와 변화의 삶을 찾아 주는 데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어린 나이에 범죄의 수렁에 빠진 소년범에게 교정이나 교화라는 말은 높은 허들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 손을 마주잡고 함께 걸어 준다면, 새 삶의 문턱을 넘어서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소년에게 “손 심엉 가자”는 제주 사투리로 손을 내미는 ‘소년멘토’의 모습이 벌써부터 어른거리는 듯하다.

2022-06-01

이해의 선물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최근 어린이를 비하하는 듯한 표현이 유행하고 있다. 미숙한 초보자를 지칭하는 ‘~린이’라는 말을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식 초보자는 ‘주린이’, 요리 입문자는 ‘요린이’ 등으로 부르는 식이다.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잼민이’로 폄하하기도 한다. 올해로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았지만 어린이에 대한 인식은 나아진 것이 없는 듯하다.1923년의 첫 번째 어린이날에 방정환 선생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그의 목소리는 백 년이 지난 지금의 어른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독립된 인격체인 아동을 ‘~린이’와 같이 비하하는 것에 대해 개선 의견을 낸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우리는 양성평등의 시각을 강조할 때 ‘성인지 감수성’이란 말을 사용한다. 친환경적인 관점을 나타낼 때는 ‘생태 감수성’이란 용어를 쓴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기 위해서 ‘동심 감수성’이라는 말을 활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채널A에서 방영되고 있는 육아 예능 프로그램인 ‘금쪽같은 내 새끼’는 동심 감수성으로 많은 가정에 힐링을 주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오은영 박사는 아동이 처한 상황과 입장에서 눈높이 상담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미혼인 2030세대에게도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불안정했던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금쪽이 스토리’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치유받고 있는 것이다.미국의 아동문학가인 폴 빌라드는 ‘이해의 선물’이란 단편소설에서 동심 감수성을 잘 보여주었다. 이 소설에서 어린 주인공인 ‘나’는 버찌씨 여섯 개로 사탕을 사려고 한다. 사탕 가게 주인인 위그든 씨는 사탕을 공짜로 주고 2센트의 거스름돈까지 내준다. 돈의 개념을 모르는 순진한 동심이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어른이 되어 열대어 가게를 차린 주인공은 동전 몇 개를 내밀면서 값비싼 열대어를 주문하는 어린 남매를 만난다. 주인공은 위그든 씨가 물려준 유산을 떠올리며 2센트의 거스름돈과 함께 열대어를 남매에게 선물한다. 기억에 저장되어 있던 이해의 선물이 현재로 소환된 것이다.금년은 어린이날 100주년과 함께 성년의 날 50주년을 함께 맞은 뜻깊은 해이다. 성년의 날은 성숙한 사회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 주기 위해 1973년에 제정되었는데, 1985년부터 오월 셋째 월요일에 기념하고 있다. 성년이 된 청년들이 저마다 이해의 선물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갖고 있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건강할까 생각해 본다.이해의 선물은 부모나 스승이 주기도 하지만, 소설에서처럼 ‘누구나’ 베풀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해와 배려를 청소년기에 한 번이라도 경험했느냐일 것이다. 이해의 선물은 받아 본 사람이 다시 전해 줄 수 있는 속성을 갖고 있다. 어린 세대에게 평생 간직할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기성세대의 고민이 깊어지는 오월이다.

2022-05-18

중도지대와 소통의 리더십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이 윤석열 당선인으로 결정됐다. 차점자인 이재명 후보와는 불과 0.73% 포인트 차이다. 24만7천77표가 박빙의 승부를 갈랐다. 선거 전문가들은 31만766표 차이를 보인 서울을 승부처로 꼽고 있다. 강서구를 제외한 한강벨트 전역에서 윤 당선인이 승리한 것이 주효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그렇다면 이번 대선 결과를 거시적으로 다시 한번 살펴보자.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서울에서의 1, 2위 간 득표율 차이가 충청북도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서울과 충북의 1, 2위 득표율은 소수점 이하를 생략하면 50%와 45%로 같다. 승부처인 서울과 대선의 풍향계인 충북의 유사한 득표율은 흥미롭다.충북은 정치적으로 명실상부한 중도지대이다. 지금까지 모두 13번의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12번이 충북의 선거 결과와 일치했다. 선거 때마다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는 충북 지역은 남한 국토만 놓고 보았을 때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충북의 지정학적 위치는 변화하는 정세, 시대적 흐름을 읽어내기에 유리할 수 있다.정치, 경제적으로 수도 서울은 대한민국의 중원이다. 이번 대선에서 서울은 충북과 같은 숫자상의 표심을 나타냈다. 서울과 충북은 윤석열 당선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중도의 균형 감각을 요구하고 있다. 중도의 균형감은 끊임없는 소통의 의지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최근 윤석열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의 이전 문제로 소통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라 있다. 광화문 시대를 열고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던 선거 공약이 용산 시대 개막으로 급하게 방향 선회를 했다. 일사천리로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행이 추진되고 있다. 물론 유현준 홍익대 교수가 ‘공간이 만든 공간’이란 책에서 말했듯이, 새로운 생각은 때로는 지리적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다.그동안 청와대는 구중궁궐로 불리워졌다. 미국 백악관의 웨스트 윙처럼 대통령이 참모들과 공간적으로 가까워져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그런 측면에서 용산의 대통령 집무 공간에 집무실·비서실·기자실 등을 함께 두겠다는 발상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기존의 청와대 건물 구조를 그와 같이 리모델링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윤석열 당선인이 집무실 이전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국민과의 소통이다. 윤 당선인이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 시대를 마감하고자 한다면, 집무실 이전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국민과의 소통을 위한 결정에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윤석열 당선인은 보수 진영을 대표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출발해야 하는 자리는 중도지대에 가깝다. 역대 최소 표차로 당선된 윤 당선인은 무엇보다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한다. 중도지대는 태풍의 눈과 같아서 잠잠해 보이지만 민심의 향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의 이전에 몰입하느라 겉으로 보이지 않는 국민의 마음과 소통하는 것에 소홀하지 않기를 새 대통령 당선인에게 바란다.

202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