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초겨울에 피었다. 절기상으로는 입동도 지났고 소설도 지났다. 그래서 연분홍색 봄꽃은 아니다. 검은색의 캘리그래피 디자인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던 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넥타이에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넥타이는 메시지 전달용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는 연한 녹색 넥타이를 맸다. 무난함과 차분함을 대변하는 색상이었다. 10월 12일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할 때는 주황색 넥타이를 맸다. 한은 총재의 넥타이는 붉은 계통이면 금리 인상을, 푸른 계통이면 금리 동결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난달 24일에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이창용 총재는 검은 색깔의 시구가 적힌 넥타이를 선택했다. 이날 기준금리는 3.0%에서 3.25%로 0.25%포인트 인상됐다. 이 총재의 검은색 글자 넥타이는 금리 인상의 시그널로 해석될 수도 있다. 김소월의 시에 나오는 진달래꽃이 붉은 계열의 분홍색이기 때문이다.
‘진달래꽃’ 시가 쓰여진 넥타이가 이자 부담을 겪고 있는 대출자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이냐고 기자가 물었다. 이 총재는 “제가 좋아하는 넥타이를 매고 나왔는데, 그 해석이 더 좋아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경제적으로 위로를 주는 시로 읽히고 있다니 주제의 확장성이 놀랍다. 하긴 김소월의 또 다른 시 ‘엄마야 누나야’에 나오는 “강변 살자”란 표현이 서울 강변의 아파트 마케팅에 사용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문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위로를 줄 대상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영끌족뿐만 아니라 빚투를 안 하다가 벼락거지가 된 사람들도 위로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금리 인상의 늪에 빠진 영끌족과 내 집 마련의 꿈을 상실한 벼락거지 사이에서 적정한 집값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
진달래꽃 넥타이가 등장한 지 3일 만에 한국은행은 ‘시스템 리스크 서베이’ 결과를 공개했다. 국내외 금융·경제 전문가 72명 중 53.8%가 1년 이내에 금융시스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답변했다. 금융시스템 위기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은 ‘기업의 자금조달 여건 악화에 따른 부실위험 증가’(27.8%)였고, ‘가계의 높은 부채 수준과 상환부담 증가’(16.7%)가 그다음이었다.
경제 위기는 블랙 스완이나 회색 코뿔소 등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런데 세간의 관심을 끈 진달래꽃 넥타이 시그널에서는 위로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온다. 지금은 서민들이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정부 당국이 생존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때이다. 그러면서 위로를 전해야 참된 위안의 메시지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