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지나니 바람결도 가볍다. 물기 털어낸 바람을 집안에 들이려 창문부터 연다. 장롱 문도 활짝 열어 제습기 바람대신 뽀송한 자연바람을 들인다. 눅눅한 시간을 견딘 이불이며 옷이 무사한지 모르겠다. 이불장을 가득 채운 침구며 옷걸이에 켜켜이 걸린 옷들을 살피는데 너무 빽빽하다. 바람 드나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자꾸 사서 채우기만 하고 비우는 일을 게을리한 탓이다.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는 지구처럼 장롱도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오래 입은 적 없는 옷 어딘 가엔 좀이 슬고 곰팡이 꽃이 피지 않았을까 걱정된다. 날 잡아 답답한 장롱 정리부터 해야겠다.지난 8월 1일은 ‘지구 생태 용량 초과의 날(Earth Overshoot Day)’이었다. 인류가 지구 자원을 사용한 양과 그 배출 규모가 지구의 생산능력과 자정능력을 초과한 날이라는 뜻이다. 이는 8월부터 12월까지 다섯 달은 미래의 지구에서 빌려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 생태 용량 초과의 날은 나라마다 다르다. 2024년 EOD를 보면 미국 3월 14일, 캐나다 3월 15일, 호주 4월 5일, 독일 5월 2일, 프랑스 5월 7일, 이탈리아 5월 19일, 일본 5월 16일, 중국 6월 1일, 영국 6월 3일, 우리나라 지구 생태 용량 초과의 날은 평균보다 훨씬 이른 4월 4일이었다. 한국인은 미래의 인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지구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1970년 이후 인류는 꾸준히 지구 생태 용량을 초과해 왔다. 1970년 12월 21일이었던 것이 2000년에는 9월 23일로, 2019년 7월 29일, 2020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3주 정도 늦춰진 8월 22일이었다가 올해 8월 1일로 앞당겨졌다. 지구 하나만으로는 지나치게 소비를 일삼는 인류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다. 지난해는 산업혁명 이후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되었다. 폭염은 갈수록 더 자주 더 길게 이어지고 더 뜨거워지고 있다. 의학 저널 ‘란셋’에 의하면 2019년 한 해 동안 폭염으로 사망한 지구인은 48만 9000명이었다고 한다. 구미시 전체 인구수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폭염뿐 아니라 지구별 어느 한 곳에선 커다란 물난리가 나고 또 다른 곳에선 대형 산불이 발생한다. 해마다 이러한 악순환은 돌림병처럼 되풀이되고 있다.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거리엔 피서를 떠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집이 통째로 딸린 카라반을 타고 떠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바다를 만끽하기 위해 차 꽁무니에 요트를 매달고 나선 이도 더러 있다. 나라 바깥으로 떠나는 무리도 적지 않고 트렁크 가득 물놀이 기구며 먹거리를 채워 가족 단위 여행을 하는 이들도 숱하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만날 땐 신음하는 지구별을 대신해 고마운 인사라도 대신 전하고 싶어진다.잘 쉰다는 건 미래를 위한 투자라 할 수 있다. 휴가에서 얻은 좋은 기운으로 남은 시간들을 건강하고 기쁘게 보내기 위해 사람들은 휴가를 떠난다. 더구나 일 년에 한 번뿐인 여름휴가는 가족이 더욱 돈독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이미 지구 생태 용량을 초과해서 살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휴가를 떠나기도 전에 우리가 사용할 일 년 치 생태는 다 써버린 상태다. 미래를 가불해서 살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들뜬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일수록 소비는 늘어나고 거기에 비례해 쓰레기의 양 역시 감당 못할 정도로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다 같이 자전거 여행을 떠나진 못하더라도 탄소발자국을 줄이려는 마음은 지니고 가야 한다.숯불 바비큐는 때로 여행을 떠나는 목적이 되기도 한다. K 바비큐는 외국인들도 인정한 특급 메뉴다. 가족 혹은 지인들끼리 둘러앉아 숯불구이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는 낭만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휴가의 백미다. 요즘에는 소고기와 양고기 소비도 꾸준히 늘고 있다 들었다. 일 년 중 휴가지에서 소비하는 고기 양은 얼마나 될까. 이 시간에도 엄청난 양의 고기가 휴가지 불판 위에서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가축의 방귀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는 지구 가열화의 주범으로 알려진 지 오래다. 지구별 온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육식을 하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식용을 목적으로 한 가축 사육 역시 멈출 수 없는 일이다. 휴가철뿐 아니라 각 가정의 식탁에서도 고기 먹는 날을 조금씩 줄여가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박월수 수필가
이불장 문을 연다. 속에 든 걸 모두 꺼내 놓으니 산더미다. 빛바랜 베개부터 낡은 이불까지 버려야 할 것도 많다. 포장조차 뜯지 않은 이불도 있다. 쓸 것도 아니면서 모아 두는 건 낭비보다 더한 욕심이다. 옷장 안도 마찬가지다. 몇 년째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수두룩하다. 먼지 앉은 가방이며 모자도 만만찮다. 가벼워지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솟구친다. 더운 것도 잊고 버릴 것과 나눔 할 것을 분류해 내어 놓는다. 미련 없이 치우고 나니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개운하다. 한결 헐거워진 장롱이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아 보기 좋다. 가득 채우기보다 덜 채우는 걸 배우는 것도 지구에 빚진 자가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수필가 박월수
2024-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