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대마에 거는 기대

60년대까지 청송엔 대마 농사가 성행했다. 집집마다 씨앗을 뿌려 대마를 길렀다. 대마 채취가 끝나면 마을 사람 모두가 나서서 삼굿을 했다. 삼 껍질이 잘 벗겨지도록 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장작을 깔고 그 위에 돌을 얹어 삼을 재고 풀과 흙을 덮은 후 불을 지폈다. 삼굿은 힘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마을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삼굿이 끝나면 푹 삼긴 삼을 꺼내 차가운 계곡물에 식혔다가 건져내어 껍질을 벗겼다. 삼에서 뽑아낸 실을 꼬아 삼을 삼고 베를 매고 짜는 일은 대부분 섬세한 아녀자들 몫이었다. 삼베가 완성되면 잘 짜진 베는 팔아 살림에 보탰고 올이 굵은 베로는 가족들 옷을 지어 입혔다. 밤이고 낮이고 베틀에 올라앉아 베를 짜던 아낙들이 이제는 텃밭 농사도 힘에 부쳐서 경로당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주왕산 마을 여든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 삼 농사지어 베 짜던 시절 얘기를 주절주절 풀어놓는다. 삼굿이 끝나고 차갑게 식힌 삼 껍질을 벗길 때 집집이 해 온 밥을 펼쳐놓고 거랑가에 둘러앉아 먹던 때가 어제 일처럼 선하단다. 어느 댁은 계추리(황저포)를 잘 짰고 어느 댁은 열세로 치는 계추리는 아니라도 일곱세는 짰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그 시절을 지나오지 않은 내 귀에는 무슨 암호처럼 들린다. 눈치 빠른 어르신이 설명을 보탠다. 계추리는 삼의 겉껍질을 긁어버리고 만든 고운 실로 짜는데 부드러워서 삼베 중에 최고로 치고 올이 굵은 삼베는 다섯세, 여섯세도 있었단다. 어렴풋이 귀가 열린다. 한창 삼을 삼고 베를 짤 무렵 어르신들 손가락 끝이 얼마나 아렸을까 싶어 멀쩡한 내 손끝이 저려온다. 정작 직접 짠 고운 삼베를 오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는 어르신 얼굴엔 자부심만 한가득이다. 온몸으로 세월을 건너온 어르신들이 지구 생태에 건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고나 계실까. 어머니가 들려준 외조모 얘기도 주왕산 어르신들 못지않다. 외조모는 손이 매워서 삼베는 물론이고 무명이며 명주 짜는 솜씨가 유달리 좋았다고 한다. 마을의 부자로 통했던 외조부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다 날리게 되면서 외조모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집안이 망했다고 낙담할 사이도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웠다. 누에에서 실을 뽑아 몇 날 며칠 베를 짠 후 공인된 허가증을 목에 걸고 명주를 팔러 나섰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통에 아무리 먼 길도 걸어 다녔다. 가지고 간 베를 다 팔 때까지 남의 집 고방에서 묵는 일은 예사였고 끼니를 굶는 일도 숱했다. 무거운 명주를 이고 지고 발품을 팔아가며 번 돈으로 자식 공부를 시켰다. 쓰러졌던 외가는 억측이었던 외조모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외조모에게 뽕나무와 누에와 명주는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것이었고 그분은 몰랐으나 그로 인해 지구 한 귀퉁이는 맑았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값싼 화학섬유로 만든 의류가 시장을 지배했다. 경제개발이란 미명하에 품이 많이 드는 삼베며 무명이며 명주는 우리 주변에서 밀려났다. 경지 정리된 논에는 대마와 목화와 뽕나무 대신 소출이 많다는 벼가 심겼다. 사람들은 더 이상 비싼 값을 들여 몸에 좋은 천연 섬유로 짠 옷을 입지 않았다. 베틀은 쓸모가 없어졌고 대마는 아편처럼 중독성이 있다는 불명예마저 안게 되었다. 시골 구석구석 흔하게 자라던 대마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십여 년 전 청송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 빈 집 울타리 안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대마가 저절로 자라는 걸 본 적 있다. 이곳 토박이들의 오랜 역사를 만난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얼마 안 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 뿌리라도 키우면 불법이라는 걸 마을 사람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게 된 까닭이었다. 안동은 안동포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요즘 들어 대마 농사를 짓는 농가도 늘고 있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주 작목인 고추 농사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반면 대마 농사는 수월함과 수익성을 모두 갖춘 때문이란다. 대마는 밭을 갈고 씨만 흩뿌려서 흙을 덮어주면 3개월 동안에 2미터 이상 자랄 정도로 잡초보다 성장이 빠른 작물이다. 비료 없이도 잘 자라고 1년에 2 모작이 가능하다. 병해충에 강해 농약을 칠 필요도 거의 없다. 이러한 이점 덕분에 최근엔 대마 농사를 짓기 위해 멀리서 알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단다. 섬유용 대마는 옷부터 건축자재, 자동차 내장재까지 다양한 산업분야에 활용될 정도로 미래 산업가치도 뛰어나다. 몸에 좋은 대마종자유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외국에서는 새롭게 떠오르는 작물이기도 하다. 박월수 수필가 나무는 온실 가스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성장이 빠른 대마를 심는 일은 뜨거워지는 지구별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값싼 방법이라고 생태환경 운동가들은 말한다. 자연분해가 가능하고 독성이 없는 대마를 이용해 플라스틱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니 석유화학물질에 대한 의존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대마가 합법적으로 재배되고 있다는 건 지구별의 입장에선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지구의 내일을 위해 중독성 없는 대마를 재배하는 일이 어디에서나 가능해지기를 바라본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

2024-09-24

못생긴 사과가 좋다

햇사과가 익어간다. 과수원마다 일꾼들 손길이 분주하다. 볕이 따가운 한낮에도 품 일을 하는 사람들은 쉴 줄을 모른다. 서둘러 열매 주변에 잎을 따주어야 볕이 고루 스며들어 빛깔 좋은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여기저기 바람풍선도 나부낀다. 키다리 풍선이 양팔을 치켜들고 종일 새를 쫓는다. 전기로 바람을 일으키는 풍선이 툭하면 태업을 일삼지만 잽싸게 일으켜 세우는 것도 농부 몫이다. 돈을 사야 할 탐스런 열매를 새에게 빼앗기긴 억울해서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여름 사과 출하준비를 하느라 과수농가들은 신경이 예민해진다. 추석 대목에 미처 내보내지 못한 여름 사과는 제 값을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해서다. 사과를 수확하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단계가 하나 더 있다. 나무 아래 은박 필름을 깔았다가 걷어내는 일이다. 은박지를 까는 일은 여간 품이 많이 드는 게 아니다. 낮은 자세로 기다시피 해야 하는 작업이라 몇 배로 힘이 든다. 과수 농사에 어지간히 이골 난 사람들도 은박지 설치 작업만큼은 피하고 싶어 한다. 해마다 은박지를 구입하는 데 드는 돈도 만만찮다. 또한 강한 빛으로 인해 낮게 달린 사과는 화상을 입기도 한다. 사과를 따는 동안에는 작업자의 눈이 부셔서 미리 걷어내야 하는데 이 또한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한다. 햇볕을 받지 못한 사과 밑동까지 골고루 색이 들어야 좋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먹던 사과는 국광과 홍옥 정도였다. 홍옥은 이름만 떠올려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일만큼 새콤한 맛이 으뜸이었다. 어머니는 마을에 하나뿐인 과수원에서 홍옥 한 포대를 사서 머리에 이고 오는 것으로 추석 준비를 시작하셨다. 어린 남매가 달콤한 사과를 먹으며 기대에 부푼 채 명절을 기다리길 바라셨는지 모른다. 포대에 담긴 홍옥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에 군데군데 푸른빛이 도는 것도 섞여있었다. 어느 것이든 맛은 일품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매일 조금씩 꺼내주는 홍옥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다. 하루는 아무도 몰래 다락에 올라가 껍질째 쓱쓱 문질러 물리도록 먹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잘 차려진 저녁상을 마주 하고도 이가 시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과는 어릴 적 몰래 먹었던 홍옥이다. 수년 전, 유럽 여행을 하며 마켓을 들를 일이 생길 때마다 과일을 눈여겨보았었다. 특히 우리 지역 특산품인 사과에 눈길이 가곤 했는데 하나같이 작고 허술해 보였다. 식당에서 맛본 사과들 역시 어른이 된 내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커다랗고 빛깔 좋은 사과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청송에서 맛본 것처럼 과육이 단단하지도 않았다. 유기농을 중요시하는 그들은 제품의 겉모습에 마음 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볼품은 없지만 안전한 먹거리가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나아가 후손의 건강에까지 직결된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아가 그들은 지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여행한 이들 중엔 한국 사과 맛에 길들여진 탓인지 탐탁지 않아 하는 이도 있었다. 청송에서는 여름 사과 생산량이 가을 사과에 훨씬 못 미친다. 부사가 익어 가는 가을은 들판이 빨갛게 물들 정도다. 농가에서는 잎 소제며 은박지 깔아줄 품을 구하느라 부산하다. 주말이면 농가 일손을 돕기 위해 청송으로 향하는 출향인들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자체에서 외국인 인력을 공급하고 있지만 지원에는 한계가 따른다. 그렇듯 몸과 마음이 초조해지는 시기에도 초연한 사람들이 있다. 황금 사과를 재배하는 농가들이다. 노란빛이 탐스런 황금사과는 열매 주변의 잎을 따주거나 나무 아래 은박지를 까는 따위의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사과밑동까지 노란빛이 자연스럽게 스며있기 때문이다. 황금사과 재배 농가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품값과 자재 값을 한꺼번에 아낄 수 있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맛 역시 뛰어나서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최근 들어 황금 사과를 재배하는 농가가 부쩍 늘어난 것도 이러한 이점이 두루 있어서다. 박월수 수필가 어릴 적 초등학교 가는 길에 과수원이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힐끔힐끔 들여다본 과수원 바닥엔 은박지 같은 건 깔려있지 않았다. 잎을 따 주거나 하는 것도 못 보았다. 겨우 병해충 방제를 위해 약을 치고 가지치기며 풀베기 작업을 하는 게 전부인 것 같았다. 꼬맹이들이 가끔 울타리를 비집고 들어가 풋사과를 훔쳐 먹고 배앓이를 하는 일도 있었으나 익을 만큼 익어서 제 때에 딴 사과는 모양이 예쁘지 않다거나 색깔이 곱지 않다고 맛이 덜하지는 않았다. 사과 수확 철이 다가오면 과수원마다 은박지 물결이 춤을 춘다. 관리 소홀로 바람에 날려가 하천 주변이나 야산을 떠도는 은박지도 숱하다. 바람에 날리는 은박지는 전선 줄에 걸려 자연발화되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일회용이어서 해마다 은박지는 생산되고 소비된다. 밑동이 빨갛게 물들지 않은 사과도 맛은 훌륭하다. 환경오염을 부추기는 은박지 사용을 그만둘 때다. 몸살 중인 지구별을 위해 농가와 소비자가 마음을 모아야 한다. /박월수 수필가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2024-09-03

추억 지우기

좋은 추억은 영혼의 허기를 달래준다. 오래 묵은 편지는 추억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물건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 건네주었던 편지들을 꺼내 읽는다. 삐뚤빼뚤 적힌 연필 글씨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더위에 지쳐 사라졌던 입맛이 금세 돌아올 것 같다. 빛바랜 편지마다 빠짐없이 들어있는 사랑한다는 말이 마음을 촉촉하게 한다. 성적이 떨어져서 미안하다며 쓴 편지도 지나고 보니 사랑스럽기만 하다. 세상에서 엄마가 최고라는 말은 읽을수록 기운 난다. 어버이날마다 편지와 함께 받았던 안마 이용권은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넣어두기만 했었다. 지금 보니 까무룩 넘어가도록 좋다. 아이가 철이 들어 남의 나라 여행 가서 보내온 편지는 어찌나 절절한지 코끝이 시큰하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 소중해서 마음 안에 오래도록 품고 싶은 보물이다.메일함을 연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광고며 스팸 메일이 수두룩하다. 수신인이 원하지 않는데 마구잡이로 보내는 건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차단하기 바쁘게 발신인을 바꾸어 다시 보내는 데도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수시로 버리지만 쌓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읽고 버리지 않은 메일도 가득 쌓여있다. ‘디지털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일 중엔 메일함 비우기도 있다는 걸 알고부터 언젠간 몽땅 비워야지 했다. 그런데도 하루 이틀 시간만 보냈다. 지구별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끄럽게도 내 게으름을 따라잡지 못한 탓이다. 받은 메일함의 숫자를 살펴본다. 천 개가 훌쩍 넘는다. 게 중에 꼭 보관해야 할 중요한 메일은 몇이나 될까.받은 메일함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니 2004년 4월에 온 것부터 저장돼 있다. 이미 이십 년 전부터 손 편지 쓰기를 그만두었다는 확실한 물증이다. 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던 어쩌면 삭막한 시대에 디지털카메라를 옆에 끼고 어릴 적 꿈꾸던 작가 공부를 시작했다. 보낸 이를 훑어보니 가까이 지내던 수필가며 사진 선생님에게서 받은 메일이 대부분이다. 그 무렵엔 좋아하는 수필가의 홈을 들락거리며 글 얘기와 사진 얘기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홈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메일로 주고받았다. 각 문예지에서 처음으로 받은 원고청탁서며 별것도 아닌 내 글을 읽고 여기저기서 보내온 격려 메일도 숱하다. 정성껏 꾹꾹 눌러쓴 펜글씨는 아니라도 언제든 위로가 되어주는 고마운 글이다. 게 중에 아껴가며 보고 싶은 것들만 추려서 보관 메일함으로 보낸다.보낸 메일함 역시 만만찮다. 행사 때마다 글쓰기 동인들의 사진을 찍어 일일이 보내주고도 지우는 게 귀찮아 그대로 둔 게 태반이다. 여기저기에 보낸 원고들도 버려야 할 것들이다. 후배 작가들이 부탁한 습작품에 도움을 준 글들도 꽤 있다. 선배 역할에 충실하느라 다정한 인사도 잊지 않고 빼곡히 적어 놓았다. 종이 편지였다면 이미 내 것이 아닐 것들이 전자 편지라서 남아 있다는 게 괜히 무겁게 느껴진다. 다만 한 사람, 나를 무채색의 세상에서 꺼내 준 아름다운 수필가에게 꼬박꼬박 보낸 메일만은 따로 챙겨둔다. 두고두고 다시 읽어도 그녀에게 빠진 내 마음이 배어있어 향기로울 거라는 걸 안다. 나머지는 눈 딱 감고 삭제 단추를 누른다. 후련하다.내게 쓴 메일함이 남았다. 수업 자료를 저장했다가 출력하는 목적으로 이용하는 요긴한 곳이다. 청소를 싫어하는 아이처럼 소용이 끝난 후에도 제 때 비우지 않아 눈덩이처럼 쌓였다. 제목도 없는 내용들이 그득하다. 처음의 자료가 뭘까 열어보니 박성우 시인의 ‘오이를 씹다가’란 시가 들어있다. 이 시를 암송할 때만 해도 아직 푸릇한 나이였다는 착각을 하며 잠시 추억에 잠긴다. 퍼뜩 마음을 다잡고 한꺼번에 삭제 단추를 눌러나간다. 박월수 수필가 메일함 전부를 비우는 데 꼬박 여덟 시간이 걸렸다. 제때 정리하지 않은 까닭에 버려야 할 것과 보관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이십 년 동안 쌓아두고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개인의 사소한 기록을 보관해 주느라 지구 한 귀퉁이는 병들고 있었다는 늦은 자각이 든 때문이다. 우리가 인터넷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동안 데이터 센터에서 내뿜는 온실가스 발생량은 계속 증가할 게 뻔하다. 메일함을 비우는 일은 어쩌면 추억을 지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별을 생각한다면 소소한 것들은 버릴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것들은 마음 안에 간직하면 될 일이다.환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디지털 탄소발자국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인 ‘스몸비족’이란 말이 유행한 지도 꽤 되었다. 현대인들은 잠시도 스마트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도 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뿐 아니라 폐기할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양은 엄청나다고 들었다. 환경오염 따위 먼 나라 얘기라는 듯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바꾸기보다 십 년째 같은 폰을 쓰는 이가 많았으면 싶다. 낡은 스마트폰을 들고 메일함을 자주 비우며 쓰지 않는 코드는 뽑아 놓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지구별은 반짝이지 않을까. /수필가◇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2024-08-20

우리는 빚진 자

장마 지나니 바람결도 가볍다. 물기 털어낸 바람을 집안에 들이려 창문부터 연다. 장롱 문도 활짝 열어 제습기 바람대신 뽀송한 자연바람을 들인다. 눅눅한 시간을 견딘 이불이며 옷이 무사한지 모르겠다. 이불장을 가득 채운 침구며 옷걸이에 켜켜이 걸린 옷들을 살피는데 너무 빽빽하다. 바람 드나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자꾸 사서 채우기만 하고 비우는 일을 게을리한 탓이다.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는 지구처럼 장롱도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오래 입은 적 없는 옷 어딘 가엔 좀이 슬고 곰팡이 꽃이 피지 않았을까 걱정된다. 날 잡아 답답한 장롱 정리부터 해야겠다.지난 8월 1일은 ‘지구 생태 용량 초과의 날(Earth Overshoot Day)’이었다. 인류가 지구 자원을 사용한 양과 그 배출 규모가 지구의 생산능력과 자정능력을 초과한 날이라는 뜻이다. 이는 8월부터 12월까지 다섯 달은 미래의 지구에서 빌려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 생태 용량 초과의 날은 나라마다 다르다. 2024년 EOD를 보면 미국 3월 14일, 캐나다 3월 15일, 호주 4월 5일, 독일 5월 2일, 프랑스 5월 7일, 이탈리아 5월 19일, 일본 5월 16일, 중국 6월 1일, 영국 6월 3일, 우리나라 지구 생태 용량 초과의 날은 평균보다 훨씬 이른 4월 4일이었다. 한국인은 미래의 인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지구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1970년 이후 인류는 꾸준히 지구 생태 용량을 초과해 왔다. 1970년 12월 21일이었던 것이 2000년에는 9월 23일로, 2019년 7월 29일, 2020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3주 정도 늦춰진 8월 22일이었다가 올해 8월 1일로 앞당겨졌다. 지구 하나만으로는 지나치게 소비를 일삼는 인류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다. 지난해는 산업혁명 이후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되었다. 폭염은 갈수록 더 자주 더 길게 이어지고 더 뜨거워지고 있다. 의학 저널 ‘란셋’에 의하면 2019년 한 해 동안 폭염으로 사망한 지구인은 48만 9000명이었다고 한다. 구미시 전체 인구수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폭염뿐 아니라 지구별 어느 한 곳에선 커다란 물난리가 나고 또 다른 곳에선 대형 산불이 발생한다. 해마다 이러한 악순환은 돌림병처럼 되풀이되고 있다.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거리엔 피서를 떠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집이 통째로 딸린 카라반을 타고 떠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바다를 만끽하기 위해 차 꽁무니에 요트를 매달고 나선 이도 더러 있다. 나라 바깥으로 떠나는 무리도 적지 않고 트렁크 가득 물놀이 기구며 먹거리를 채워 가족 단위 여행을 하는 이들도 숱하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만날 땐 신음하는 지구별을 대신해 고마운 인사라도 대신 전하고 싶어진다.잘 쉰다는 건 미래를 위한 투자라 할 수 있다. 휴가에서 얻은 좋은 기운으로 남은 시간들을 건강하고 기쁘게 보내기 위해 사람들은 휴가를 떠난다. 더구나 일 년에 한 번뿐인 여름휴가는 가족이 더욱 돈독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이미 지구 생태 용량을 초과해서 살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휴가를 떠나기도 전에 우리가 사용할 일 년 치 생태는 다 써버린 상태다. 미래를 가불해서 살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들뜬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일수록 소비는 늘어나고 거기에 비례해 쓰레기의 양 역시 감당 못할 정도로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다 같이 자전거 여행을 떠나진 못하더라도 탄소발자국을 줄이려는 마음은 지니고 가야 한다.숯불 바비큐는 때로 여행을 떠나는 목적이 되기도 한다. K 바비큐는 외국인들도 인정한 특급 메뉴다. 가족 혹은 지인들끼리 둘러앉아 숯불구이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는 낭만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휴가의 백미다. 요즘에는 소고기와 양고기 소비도 꾸준히 늘고 있다 들었다. 일 년 중 휴가지에서 소비하는 고기 양은 얼마나 될까. 이 시간에도 엄청난 양의 고기가 휴가지 불판 위에서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가축의 방귀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는 지구 가열화의 주범으로 알려진 지 오래다. 지구별 온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육식을 하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식용을 목적으로 한 가축 사육 역시 멈출 수 없는 일이다. 휴가철뿐 아니라 각 가정의 식탁에서도 고기 먹는 날을 조금씩 줄여가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박월수 수필가 이불장 문을 연다. 속에 든 걸 모두 꺼내 놓으니 산더미다. 빛바랜 베개부터 낡은 이불까지 버려야 할 것도 많다. 포장조차 뜯지 않은 이불도 있다. 쓸 것도 아니면서 모아 두는 건 낭비보다 더한 욕심이다. 옷장 안도 마찬가지다. 몇 년째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수두룩하다. 먼지 앉은 가방이며 모자도 만만찮다. 가벼워지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솟구친다. 더운 것도 잊고 버릴 것과 나눔 할 것을 분류해 내어 놓는다. 미련 없이 치우고 나니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개운하다. 한결 헐거워진 장롱이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아 보기 좋다. 가득 채우기보다 덜 채우는 걸 배우는 것도 지구에 빚진 자가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수필가 박월수

2024-08-06

일회용과 멀어지기

젊었을 적 어머니에게 보자기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손가방을 대신하는 것이었고 필요한 찬거리를 담아 나르는 든든한 함지와 같았다. 움켜쥐면 한 줌도 되지 않는 보자기는 시장을 볼 때도, 친정에 다니러 갈 때도, 학교 운동회 날에도 불룩한 보따리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했다. 어쩌다 종이에 싼 날생선이 들어있는 날은 보따리 한 귀퉁이가 축축하게 젖어있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아무도 모르게 보따리를 쌌다가 잠든 자식들을 보고 마음을 바꾼 적도 있다고 하셨다. 어머니에게 낡은 보자기는 세월의 애환이 깃든 물건이기도 했다.장바구니가 흔해지면서 어머니는 더 이상 보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팔에 끼거나 어깨에 멜 수도 있는 장바구니는 묶었다가 풀었다가 머리에 이는 보자기의 불편함을 덜어주었다. 장바구니 안에는 더러 비닐에 싸인 물건이 들어있기도 했는데 대부분 물기 있는 것들이 담겨있었다. 그 무렵 우리 마을엔 집집마다 짓던 밀 농사를 그만두었고 자연스레 방앗간에 길게 줄을 서서 국수를 빼던 일도 사라지게 되었다. 점방에 가면 색이 뽀얀 밀가루 포대며 예쁘게 포장된 말린 국수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편안함에 길들여졌고 거친 국산 밀가루보다 수입한 부드러운 밀가루가 더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마을 어른들은 봄과 가을로 나누어 경치 좋은 곳으로 희추(야유회)를 하러 갔다. 풍물을 앞세우고 솥단지며 양은그릇들을 이고 지고 떠났다. 희추를 하는 날만큼은 힘든 농사일을 잊고 놀이에 푹 빠져들었다. 신록 우거진 숲에서 목청껏 노래도 부르고 흥이 오르면 강에 나가 유람선도 탔다. 마을 공동으로 쓰는 그릇이 있어 가득 모인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하는데도 무리가 없었다. 두레 자금으로 마련한 그릇은 마을의 잔치에도 요긴하게 쓰였다. 푸짐하게 준비해 간 음식들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버리고 오는 쓰레기가 없어 마음 홀가분했다. 그 시절엔 모두가 먹거리를 하늘처럼 소중하게 여겼고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까닭이다.살기가 좀 나아지면서 일회용이란 말이 심심찮게 쓰였다. 대표적인 게 나무젓가락과 종이컵이었다. 나들이 때가 되면 일회용은 필수품처럼 따라다녔고 한 번의 쓰임이 있은 후 가차 없이 버려졌다. 음식을 주문할 때도 일회용품은 예외 없이 따라왔다. 건너 마을에는 나무젓가락 공장이 있었다. 공장 마당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길게 누운 채 그득 쌓여있었는데 그 많은 나무가 사라지기 바쁘게 또다시 새로운 나무가 그득 쌓이곤 했다. 더 가까이엔 화장지 공장이 있었다. 공원들은 라면 먹은 그릇을 물 대신 일회용 휴지로 쓱쓱 닦아낸다고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떼로 몰려나와 점방에 외상을 긋고 공장장 흉을 봐 가며 주전부리를 했다. 일회용 물건을 만드는 그들 머리엔 어지간한 바람에도 꿈쩍 않는 하얀 먼지가 켜켜이 앉아있었다.80년대 중반쯤 일회용 비닐팩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급격히 비닐과 친해졌다. 깨끗이 소독된 위생적인 비닐이란 이유로 마구잡이로 비닐을 애용했다. 냉장고에 들어가는 그릇들은 뚜껑 대신 비닐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아예 비닐에 음식을 담아 보관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시장에선 장바구니 든 사람을 찾아보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빈 손으로 장을 보러 가도 상인들은 비치해 둔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주었다. 비닐은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 되었고 지구는 대책도 없이 버려지는 그것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2020년 기준 우리나라 비닐봉지 소비 발자국은 총 276억 개, 1톤 트럭 55만 대가 훨씬 넘는 양이다. 1인당 533개, 약 10.7 킬로그램이라고 한다. 국민 한 사람이 하루에 꼭 1장 반을 소비한 셈이다. 비닐은 자연분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땅에 묻으면 토양에 산소 공급을 방해하고 강한 불에 태우면 다이옥신이란 유독 물질을 대기 중에 배출한다. 그러한 문제뿐만 아니라 바다로 흘러들어 가 바다 생물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비닐이 지구를 뒤덮고 있다는 자각으로 인해 2008년 7월 3일 ‘세계 일회용 비닐봉지 없는 날’이 만들어졌다. 과연 단 하루만이라도 비닐을 사용하지 않는 일은 가능할까. 나는 습관처럼 비닐봉지에 든 채소를 사고 허기진 배를 달래느라 이중으로 포장된 즉석식품을 사 먹는다. 박월수 수필가 장마철이 돌아오니 쏟아지는 집중폭우가 예전 같지 않다. 해마다 그 정도가 강해진다. 지구가 몸살 앓는 시기를 지나 중병으로 가고 있다는 걸 절감한다. 덜컥 겁이 난 나는 노모를 위해 장 보러 가는 길에 바구니부터 챙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회용은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 어머니는 구순의 고개를 넘고 있는 중에도 여전히 당신 혼자서 식사를 차려 드신다. 먹을 만큼의 음식을 단출하게 만들고 어쩌다 남은 음식은 뚜껑을 덮어 보관한다. 비닐팩이란 말은 어머니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가져온 비닐이 집안에 있으면 씻어서 말린 후 재사용하기 위해 접어서 보관한다. 사십 년은 족히 지났을 밥상보를 여전히 즐겨 쓰시는 어머니 곁에 누워 심상찮은 폭우 소리를 듣는다. 일회용과 멀어지는 연습을 더 많이 해야겠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박월수 수필가

2024-07-23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지구에는 산이 있어서 아름답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지만, 나는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 나무만큼 아름답고 착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목숨이 또 있겠는가? 이 세상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하고 모든 목숨을 살아 숨 쉬게 하는 나무들, 그 나무들은 저마다 모양과 빛깔과 크기와 생태가 다르지만 서로 어울리고 도와주고 채워준다. 그래서 모든 나무들이 다 제자리에 있어 제 할 일을 하면서 빛을 뿌린다.”‘이오덕의 자연과 사람이야기- 나무처럼 산처럼’에 나오는 말이다. 청송이 고향인 이오덕 선생님은 아동 문학가이며 교육자로 평생을 우리말 살리기 운동에 앞장섰던 분이다. 교단에서 퇴직하는 그날까지 시골 학교만을 두루 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벗하며 사셨다. 내가 선생님을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까닭은 전 국민이 표준말을 강요받던 시대에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쓰던 입말 그대로 글쓰기를 하라고 가르쳤던 점이다. 선생님은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부모님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셨다.이오덕 선생님은 많은 나무들 중에서 특히 감나무를 좋아하셨다. 선생님 기억 속 감꽃은 보릿고개의 허기를 달래주는 고마운 꽃이었다. 푸른 잎을 매단 감나무의 노래는 참새들을 불러서 안아주고, 발밑으로 내려가 개미들이 가는 길을 밝혀주고, 지렁이와 다람쥐들이 한 식구가 되게 한다고 했다.감나무 가지만큼 너그럽고 자유롭게 뻗어가는 나무는 없다고도 했다. 뻗어 나가던 가지가 다른 가지와 부딪칠 성싶으면 곧장 방향을 틀어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다시 뻗는다. 아름답게 하늘을 채운 겨울 감나무를 쳐다보고 있으면 나무의 성자란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러한 특성 덕분에 다른 과일나무와 달리 감나무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선생님의 동시에는 감나무 못지않게 포플러나무를 예찬한 것들이 많다.“눈부신 수만의 비늘을 단/ 물고기/ 호수에 잉어가 꼬리 치듯/ 하늘에는 포플러가 살아간다./ 파도 소리보다 더 찬란한 호흡으로/ 흐느끼며 헤엄치는/ 그 곁에 내가 서면/ 구부러진 허리가 죽 펴지고/ 겨드랑이에 푸른 날개가 돋는다.”- ‘포플러 1 전문’이오덕 선생님이 교사 시절 잠시 머물렀던 화목초등학교 앞 넓은 신작로 양쪽으로는 키 큰 포플러 나무가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 그 길을 오가며 행복에 겨운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는 걸 선생님 펴내신 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포플러라는 이름은 라틴어 민중(Populus)에서 왔다고 한다. 가지를 옆으로 뻗지 않아 햇볕을 가리지 않음으로써 다른 나무들과 더불어 사는 것도 포플러가 가진 특성이다. 나비나 나방의 애벌레가 포플러에 기대 살면서 작은 생태계가 형성되는데 어떤 나무보다 애벌레를 많이 키워낸다.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으면서 으깨지면 특유한 향을 발산해 더 많은 애벌레와 곤충이 모여드는 것이다. 하늘 높이 키가 자라서 새가 안정감을 느끼고 둥지도 많이 짓는다.그러고 보면 포플러는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하며 아이들을 위해 사셨던 이오덕 선생님을 많이 닮은 나무다. 하지만 포플러에서 나온 꽃가루가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엉뚱한 오해를 받고 나무는 가차 없이 베어졌다.나는 이런저런 일로 선생님의 생가가 있던 현서면 덕계리를 자주 지난다. 사라진 생가 부근엔 소박하기 그지없는 이오덕 작은 문학관이 있어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무처럼 사셨던 선생님을 떠올리고 고개가 숙여지곤 한다. 그런데 올해는 예년과 달리 선생님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 길을 지나기 힘이 든다.누구보다 나무를 사랑하고 자연을 노래했던 선생님의 고향에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까닭이다. 덕계리 주변 도로엔 그 옛날의 포플러 대신 은행나무 가로수가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봄이 지나 녹음 우거진 계절이 되어도 몇몇 나무에서는 초록빛을 볼 수 없었다. 주변 과수원에서 빛이 들지 않아 농사에 방해가 된다며 나무에 몹쓸 짓을 한 것이다. 푸른 잎 하나 달지 못하고 맨 둥치로 서 있는 나무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그 길을 차들이 씽씽 내달린다. 볼수록 참담한 풍경이다. 박월수 수필가 나무는 지구별에 사는 생명체에게 베풀기만 하는 존재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하므로 대기를 맑게 하는데 이는 지구 가열화를 늦추는데 크나큰 도움을 준다. 뿌리로는 토양을 고정시켜 바람과 물로 인한 침식을 막는다. 또한 토양 흡수를 통해 오염 물질을 제거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많은 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생태계의 안정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이오덕 선생님은 오래전, 감나무 아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푸른 잎들 속에 숨어 어린 새소리를 듣고 감 잎사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파란 하늘을 본 이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의 세계에 와서 숨 쉬고 있다는 행복감에 젖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나무를 헤치는 사람은 마음에 병이든 사람이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박월수 수필가

2024-07-09

여름 삽화

오춘 할머니 네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을 안노인들은 날만 새면 그 집 대청마루에서 여름을 났다. 그 집을 드나들던 할머니들 손에는 귀한 주전부리들이 들려있기도 했다. 집집마다 종이부채로 견디던 시절 그 집 마루에서는 저 혼자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가 돌아갔다. 할머니들이 마루에 빙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민화투를 치는 진종일 선풍기는 쉬는 법이 없었다. 마루를 가득 채운 할머니들에게 골고루 바람을 나눠줘야 했으므로 선풍기는 항상 회전을 했다. 사이사이엔 마당에서 뛰어놀다 더위에 지친 어린 우리들도 끼어 있었다.선풍기가 내 얼굴을 한 번 쓱 스쳐가고 나면 다시 선풍기의 방향이 나를 향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세월처럼 지루했다. 얼굴이 여러 개 달린 선풍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어린 마음에 생겨났다.일찍 혼자되신 오춘 할머니는 너른 집에 손주들과 함께 살았다. 아들 내외가 시내에 가게를 얻어 분가하면서 아이들을 맡겨둔 때문이었다. 덕분에 오춘 할머니 네는 할머니들의 사랑방뿐 아니라 동네 꼬맹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할머니는 꽃을 유난히 좋아해 골목과 대문 사이 네모모양 자투리땅에는 해마다 분꽃 씨앗 뿌리는 걸 잊지 않았다. 향기로운 분꽃이 피면 꼬맹이들은 그 꽃을 따서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소꿉을 살았다. 넓은 마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채소밭과 꽃밭이 나란히 반반을 차지했다.여름 마당엔 해바라기며 달리아, 백일홍 따위 키 큰 꽃이 많았고 옥수수며 들깨 온갖 채소도 우거져 있었다. 꼬맹이들은 꽃밭과 채소밭을 넘나들며 자주 숨바꼭질을 했다. 오춘 할머니가 남새밭이며 꽃이 망가진다고 호통을 내지르면 꼬맹이들은 우르르 도망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선풍기 앞으로 몰려들었다.오춘 할머니네 우물은 얕고도 시원했다. 우물이 없는 옆집에서는 항상 오춘 할머니네로 물을 길으러 다녔는데 여름에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게다. 날마다 김치통이 드리워있고 어쩌다 새끼줄에 묶인 수박이 담겨 있기도 했으니 그것들을 피해 가며 조심조심 두레박을 내리고 물을 길어야 했던 탓이다.우물 속에서 나온 열무김치는 서늘해서 입맛 없는 여름에는 제격이었다. 대청마루에 모인 안노인들은 점심때가 되면, 커다란 양푼에 우물에서 갓 꺼낸 열무김치와 살강 위 대소쿠리에 식혀 놓은 보리밥과 고추장을 듬뿍 넣고 한데 비볐다. 마지막엔 오춘 할머니 텃밭에서 나온 참기름도 한 방울 들어갔는데 그 고소함에 반해 눈치 없는 꼬맹이들이 숟가락을 먼저 들이밀곤 했다.여름내 잘 돌아가던 선풍기가 말썽을 부릴 때가 있었다. 되짚어보면 하루도 쉬지 않고 회전을 하며 마을 안노인들의 땀을 식혀주었으니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선풍기를 고치러 보낸 얼마 동안 할머니들도 꼼짝없이 부채질을 하느라 팔을 쉴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는 화투 패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연신 부채질을 하다가 차례가 돌아오면 부채를 내려놓고 화투장을 내놓고 집어가곤 했다. 부채질로는 더위가 가시지 않는 어느 오후 오춘 할머니는 아이들을 불러 점방에 얼음을 사러 보냈다. 꼬맹이들이 낑낑 거리며 심부름을 다녀오는 동안 마루에는 우물 속에서 건져 올린 수박이 초록빛도 선명하게 놓여있었다. 꼬맹이들에겐 반으로 툭 자른 수박을 양푼에 퍼 담고 설탕과 얼음을 넣어 휘휘 젓는 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물 한 방울 남김없이 싹싹 비웠던 어린 날의 수박화채는 고장 난 선풍기가 준 선물이었다.오춘 할머니네 꽃밭도 선풍기도 시들해지는 날이 있었다. 그 집 언니들이 유난히 심술을 부려 꼬맹이들을 못 살게 군 그런 날이었을 게다. 그런 날은 우리 집 감나무 그늘이 꼬맹이들을 불러 모았다. 감나무 아래는 오래된 평상이 여름 내 놓여있었다. 꼬맹이들은 평상에 앉아 마당에 핀 봉숭아꽃으로 손톱을 물들이고 종이 인형을 오리며 놀았다. 평상에 햇빛이 들어오면 어른들이 평상을 들어 그늘 쪽으로 옮겨주었다. 가끔씩 평상 위로 감나무에 살던 송충이가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꼬맹이들에겐 송충이를 구경하는 일마저 놀이가 되어주었다. 감나무 그늘 아래는 바람이 시원했고 바람이 없는 날은 부채가 바람을 만들었다. 꼬맹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향해 팔이 떨어져라 부채질을 해주며 깔깔거렸다. 감나무 이파리도 팔랑거리며 따라 웃었다.오춘 할머니도, 그 집 마루에 그득하던 안 노인들도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나신 지 한참이 지났다. 열린 양철 대문 안으로 철철이 다른 꽃을 피워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잡던 그 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지금 그 자리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바뀌었고 주변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층수를 자랑하는 아파트촌이 되었다. 아파트 베란다를 올려다보면 에어컨 실외기가 빠짐없이 나와 있다. 우물을 갖지 않은 아파트에선 선풍기만으론 살 수 없다는 듯 집집마다 날개가 없어도 시원한 바람을 쏟아놓는 에어컨을 설치해 놓고 쾌적하게 여름을 난다. 점점 더워지는 지구별을 생각하니 오춘 할머니 네 마루에 떡 하니 자리하고 앉아 여름내 마을 안노인들의 더위를 식혀주던 선풍기와 감나무 그늘과 평상에 놓였던 부채가 참으로 고마운 것들이었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박월수 수필가

2024-06-25

사 먹는 물

“너희들이 어른이 되면 가게에서 물을 사 먹는 시대가 올 것이다.”초등 사 학년 때였다. 중년의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얼토당토않은 예언을 했다. 아이들은 너무나 황당해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무렵은 거의 집집마다 맑은 우물이 있어 언제든 필요한 만큼의 물을 그저 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물은 또한 수박이나 김치를 담갔다 꺼내 먹을 수 있는 냉장고 구실도 했다.동네에 한 두 개씩 있는 공동우물은 식수원일 뿐 아니라 사교의 장이기도 했는데 그런 공짜 우물을 두고 누가 굳이 돈을 주고 사 먹는단 말인가. 선생님은 ‘사 먹는 물’ 이야기 외에도 교실마다 텔레비전을 설치해서 그걸 보며 공부를 하게 될 거라는 말씀도 하셨다. 선생님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해서 우리를 놀리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으므로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수요일이면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현장 학습을 갔다. 현장학습이래야 전교생이 나무젓가락과 빈 통조림 깡통을 들고 낮은 소나무에 앉은 송충이를 잡는 일이 전부였다. 송충이를 잡다가 목이 마르면 준비해 간 물통의 물을 마시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물을 사 먹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점심때가 되어 아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서는 가방에 뭐가 있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현장 학습 가는 날이면 내 가방 깊숙이 선생님께 드릴 담배며 삶은 계란을 챙겨 주곤 했기 때문이다.그럴 때의 선생님 얼굴에선 물을 사 먹게 되리라고 예견하던 진지함 따위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머릿속에 한 번 각인된 예언은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았다.신혼의 어느 날이었다. 손님을 대접하려고 닭죽을 끓였는데 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혹시나 싶어 한 입 넣었다가 진저리 치며 뱉어버렸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재료에 문제가 있나 보다 싶어 아까운 걸 다 버렸다. 저녁이 되어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서야 수돗물에서 악취가 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은 마침 장 담그는 날이어서 장을 못 쓰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며칠 후 악취의 원인이 낙동강에 버려진 독성 페놀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국은 떠들썩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가까이 지내던 이웃은 페놀 수돗물 탓에 임신한 아이를 유산하게 되었다며 서럽게 울었다. 페놀 수돗물로 인한 피해는 예상외로 컸으며 두 번에 걸친 페놀 사태는 전 국민의 이슈가 되어 오랫동안 오르내렸다. 페놀 사태로 인한 수돗물에 대한 불신은 결국 삼 년 후 국내 생수 판매 허용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을 사 먹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어릴 적 선생님의 말씀은 예언이 아니라 자료에 의한 것임을 알고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공허한 울림 같았다. 오랜 기간 내 뇌리를 채우고 있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보며 그분의 예언이 적중하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웠다. 운동장에서든, 공원에서든 사람들은 생수를 필요로 했다. 단체가 모이는 곳에는 생수가 필수품처럼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언제 어디서든 물을 사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뿐만 아니라 돈을 주고 사 먹는 생수병을 국내에서 보게 되었으니 잘 사는 나라가 된 듯 뿌듯함마저 든다는 이들도 꽤 있었다.하지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페트병으로 인해 환경오염 역시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수가 시판된 지 올해로 꼭 30년이 되었다. 그동안 생산된 생수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재활용된 병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한 근거가 없다.그린피스의 발표를 보면 2017년 기준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생수 소비량은 연간 96병에 달한다고 한다. 생수병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에서 1년에 소비되는 페트병은 2021년 현재 약 49억 개라는 집계가 나와 있다. 페트병은 생산부터 폐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재활용을 염두에 두더라도 지구별을 위협하는 엄청난 양임에는 틀림없다.페트병을 종이팩으로 전환한다면 탄소발자국을 줄이는데 많은 도움이 될 테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수돗물을 식수로 쓰는 집은 찾아보기 힘들다. 박월수 수필가 대부분 생수를 주로 배달시켜 먹거나 정수기를 사용한다. 예전처럼 보리차로 끓여 먹거나 하는 집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수돗물은 생활용수로나 쓴다는 인식이 강한 때문이다. 왜 수돗물을 식수로 사용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안전한지 믿을 수도 없거니와 일일이 끓여 먹기 성가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생수병 속에 든 미세플라스틱은 우리 몸을 망칠 수도 있다는 보고가 최근 들어 속속 발표되고 있다. 생수병에 들어있는 엄청난 수의 미세플라스틱 입자가 우리 인체에 들어가 축적된다면 어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페트병의 폐해를 생각한다면 정수기 사용까진 말릴 필요야 없겠지만 생수 사용은 깊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내 어릴 적 담임 선생님은 사 먹는 물이 건강을 망치고 나아가 지구를 병들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짐작이나 하셨을까. 우물물 먹던 시절이 갈수록 간절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

2024-06-11

물에 관한 단상

어릴 적엔 자주 앞 거랑에서 놀았다. 물가에 핀 꽃을 따서 소꿉놀이도 하고 징검다리에 앉아 찰방거리며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 신나게 노느라 신발 한 짝을 떠내려 보내고 쫓아가서 잡으려다 옷만 몽땅 버린 날도 더러 있다. 그런 날은 아버지께 어김없이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거랑은 일급 놀이터에 변함이 없었다. 빨래하는 어머니 옆에서 해진 걸레를 놓고 나무방망이를 두드리는 일도 재미났다. 물수제비뜨기는 좀체 실력이 늘지 않았지만 물풀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버들치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좀 더 자라서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넓은 거랑에서 여름을 났다. 헤엄치는 방법을 배우느라 자갈이 깔린 바닥을 수도 없이 짚어서 손바닥이 얼얼해도 좋았다. 어쩌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곁으로 풀숲에 쉬고 있던 물뱀이 지나가기도 했다. 혼비백산한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흩어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물에 들어가 놀았다. 아이들 중 하나가 물뱀은 독이 없다고 말한 때문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에야 퉁퉁 불어 허옇게 된 손발을 하고 물에서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엔 귀속에 들어간 물을 빼느라 머리를 양쪽으로 기울이며 노래를 불렀다.“강물이 많나, 바닷물이 많나”집 뒤 좁은 농수로에서는 주로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겨우 잡은 미꾸라지가 매끄러운 몸짓을 뽐내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때의 허전함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운이 좋아 몇 마리의 물고기를 잡은 날은 고무신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물가에 가지 않고도 가까이 두고 바라보고 싶었다. 어항 같은 건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우물 가까이에 흙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넣었다.희한한 일이었다. 한 두레박의 물을 붓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물은 까무룩 사라지고 물고기만 남아 팔딱거렸다. 또다시 부어줘도 마찬가지였다. 물은 바짝 마른 마당을 온전히 다 적시고야 고인다는 걸 어릴 적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논과 밭의 쓰임이 다르다는 걸 알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한여름 밤이 되면 마을 뒤 거랑은 아낙들 차지였다. 아낙들은 사람들 눈을 피해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땀에 젖은 몸을 씻었다. 달빛도 없는 거랑에서는 아낙들이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도타운 정을 쌓았다. 낮에 일어난 자잘한 소문도 밤의 거랑에서는 재미난 얘깃거리였다. 물속에서 그들이 나누는 즐거운 수다가 오래오래 여름밤을 적셨다. 그 속엔 어쩌다 우리 어머니도 있었다. 밤 마실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아버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모처럼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거랑은 며느리와, 아내와, 엄마로 사느라 지친 아낙들의 마음을 달래기에 마침맞은 곳이었다.열두어 살 될 무렵이었든가. 거랑은 더 이상 아이들의 놀이터도 아낙들의 수다 장소도 아니었다. 윗마을에 염색공장이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거랑은 맑은 물 대신 이상한 냄새가 나는 탁한 물이 흘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집집마다 있던 맑은 우물마저 뿌옇게 변했고 소독약 냄새 진동하는 수돗물이 식수를 대신했다. 언제든 달려가 안길 수 있는 요람 같은 곳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반짝이는 물가에 철마다 다른 꽃이 피는 꿈결 같은 곳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국가의 뜻에 반하는 행위는 그 무엇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릴 적 낙원을 잃어버린 나는 추억 속에서만 옛 거랑을 만난다.그 시절에서 멀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논과 밭이 사라지고 모든 거랑은 복개되어 버린 고향을 떠나 산골 깊숙이 들어와 살고 있다. 맑은 거랑물이 흐르는 사철 아름다운 곳이다. 자연이 들려주는 감미로운 노래를 들으며 새로운 낙원에 묻혀 지낸다.하지만 십여 년 전 처음 정착했을 때와 달리 벼농사를 짓던 논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부분 고소득 작물이라는 사과밭으로 변해서 무논은 찾아보기 힘들다. 논고동이며 소금쟁이, 물방개 따위와 온갖 물풀을 품고 있어 생물의 다양성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무논이 사라진다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무논은 공기 중의 습도를 머금고 있어 산불예방에도 적잖은 도움을 준다. 박월수 수필가 주일 미사 시간, 앞들 몇 남지 않은 무논에서 개구리 소리 요란하다. 신부님 강론시간에 왁자하게 끼어들어도 누구 하나 싫은 표정을 짓는 이 없다. 마침 신부님 강론도 생태이야기로 접어든다. 들 가운데 새치처럼 남아있는 무논이 완전히 사라지면 목청껏 울어쌓는 개구리 소리도 따라 없어질까 두렵다.점차 줄어드는 논도 걱정이지만 양서류를 위한 이동통로가 마련되지 않은 것도 개구리를 위협한다. 장마철에 운전을 하다보면 도로를 건너다 죽음을 맞는 개구리를 숱하게 만난다. 성가대 노래 속에 귀한 개구리 합창이 함께 하는데 나는 자꾸 생태계가 무너지는 소리 들리는 것 같다.집으로 오는 길, 논둑에 핀 찔레꽃이 무논에 담긴다. 빠르게 지나던 구름이 그 속에 잠시 머문다. 예전에 앞 거랑 물을 떠다가 장을 담그고 논에서 잡은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몸보신했다는 어르신이 전동차를 세우더니 개구리 소리를 감상한다. 사라질 풍경은 다 아름답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

2024-05-28

습지의 봄

습지의 봄은 버드나무 우듬지에서부터 온다. 연둣빛 새순이 와글와글 피어오르면 가부좌를 하고 묵언수행에 들었던 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만 같다. 송강 습지의 봄은 내가 가장 편애하는 풍경 중에 하나다. 봄물 든 습지 아래 잠자던 생명들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릴 것만 같다. 가까이 가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둔다. 좋아하는 것들은 늘 아껴가며 보고 싶은 때문이다. 어천교를 지나 임하댐 초입까지 습지의 버드나무는 끝도 없이 펼쳐진다. 연두의 향연은 때로 꽃보다 아름답다.습지를 끼고 있는 반변천은 일월산에서 발원해 임하로 흘러든다. 일월산을 출발해 협곡을 따라 흐르는 물을 버드나무는 날마다 보고 자란다. 내가 보는 연두는 해와 달을 품은 일월산 산 빛을 닮았다. 이른 봄에만 볼 수 있는 눈 시린 빛깔이다. 아련한 연둣빛 시들해지면 어느새 먼 산에 등불을 켠 듯 산 벚은 핀다. 반변천이 키우는 것들 중엔 토종 민물고기인 잉어며 참붕어, 누치, 쉬리며 처음 들어보는 귀한 이름 백조어, 드렁허리 각시붕어도 있단다. 낯선 이름 앞에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화르르 인다. 어릴 땐 영국 신사라 이름 붙은 누치를 좋아했다. 날렵하게 잘 생긴 녀석을 ‘눈치’도 없이 ‘눈치’라 불렀었다.송강 습지는 임하댐 상류에 자리해 있다. 자연 생태 환경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곳이다. 생태 자연 일 등급 권역에 든다고 하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것도 없다. 건강한 습지에는 생물의 종이 다양하게 서식하기 마련이다. 지역 주민은 이곳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분류되는 얼룩새코미꾸리를 발견했다는 얘길 들려주었다. 어떤 녀석일까 궁금하다. 사진에서 보는 것 말고 늪에서 헤엄치는 광경을 볼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한다. 멸종 위기종인 노란잔산잠자리와 흰목물떼새와 물방개도 서식한다니 생태의 보고인 셈이다. 희귀한 생물들을 품은 습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축복처럼 느껴진다. 날마다 찾아가 보듬어 주고 싶다.습지의 규모는 축구장 열아홉 개를 합친 정도다. 일 년 중, 많은 비로 인해 물에 잠기는 기간은 한 주에 그친다니 버드나무에겐 다행한 일이다. 뿌리에 숨구멍이 있어 물속에선 오래 살 수 없는 식물인 탓이다. 버드나무는 물을 좋아하고 물을 정화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예부터 우물가에 주로 심었다. 이곳 습지에 무더기로 자라는 버드나무는 수질 정화는 물론 생태이동 통로로 이용된다. 야생 동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때로 몸을 숨길 수 있는 비밀의 장소로도 쓰인다. 버드나무가 사라지면 동물들은 노숙자와 다름없는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스트레스에 시달린 새들은 더 이상 알을 품지 않고 덩치 큰 동물들은 살 곳을 찾아 떠날 것이다. 버드나무는 습지를 살아 숨 쉬게 한다.습지는 다양한 생명을 품는 일 외에 탄소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온실 가스로 인한 환경오염이 심각한 이때 댐 생태공간의 복원은 무엇보다 시급하다. 자연 생태를 기반으로 한 탄소중립을 이루는 일은 인류의 미래와도 맞닿아있다. 온갖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습지를 원래대로 돌려주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습지 내에서의 농작물 경작은 소중한 자연 생태 환경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다. 서둘러 개선되어야 하지만 농가와 수자원공사의 입장 차이가 쉬이 좁혀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농지로 쓰이는 땅이 보이고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 조금 더 멀리 바라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싶더니 요즘 들어 적당한 타협안이 나온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습지가 원래의 제 모습을 온전하게 찾을 날을 기대한다. 박월수 수필가 습지를 가까이 보기 위해 찰랑이는 연둣빛 속으로 발길을 옮겨놓는다. 버드나무 얇은 그늘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던 장끼 한 마리 사람 발자국 소리에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멀리 도망가지 않는 걸 보니 근처에 까투리라도 숨겨놓은 모양이다. 어쩌면 이곳보다 안전한 피신처는 없다고 여기는지 모른다. 자그마한 웅덩이에 정강이까지 잠긴 버드나무 몇 그루 고사한 채로 서 있다. 잘못 뿌리내린 나무로 인해 습지의 물이 오염될까 불안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두덩에 자리해 살아남은 나무는 먼저 간 나무의 몫까지 함께 살아낼 걸 안다. 웅덩이를 말갛게 만들고 그 이름처럼 멀리까지 뻗어나갈 것이다. 자연과 사람을 이롭게 하는 식물이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물러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습지가 보이는 언덕에서 일몰을 맞는다. 풀냄새 머금은 나무들이 물드는 석양을 베고 꿈꿀 채비에 든다. 아직 할 일이 남았는지 섶 비빔질 소리 나른한 풀숲에 새들의 지저귐 끊일 줄 모른다. 귀 기울여 듣고 있자니 몸 어딘가가 간질간질하다. 내 속에 든 노래 주머니가 공명하듯 퉁겨 나온다. 물옷을 입은 촌부가 해거름을 기다려 거랑 속에 발을 담근다. 유리 투망을 옆에 낀 걸 보니 다슬기를 잡을 모양이다. 반딧불이 유충의 먹이가 되는 다슬기를 싹쓸이하지는 마시라고 나는 속으로 읊조린다. 멧비둘기 한 마리 내 맘 알았다는 듯 꾸욱꾸욱꾸꾸욱 거리며 날아간다. 아름다운 시기를 지나는 습지를 등지고 나도 봄꿈을 꾸러 간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수필가

2024-04-30

커피가 감미롭지만은 않은 이유

커피콩 가는 소리가 들리면 함께 사는 강아지는 바빠진다. 손님이 온다는 걸 눈치 빠른 강아지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재빨리 창문 쪽으로 다가간다. 목을 길게 빼고 손님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좋은 향이 날아가기 전에 손님이 빨리 왔으면 싶다. 나는 언젠가부터 손님이 오지 않는 날은 커피를 내리지 않는다. 지구별에 보내는 내 작은 성의다.커피만큼 사람을 휘어잡는 것이 또 있을까. 주변에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야 산다는 이들이 꽤 있다. 헤어날 수 없는 커피의 마력에 빠진 이들이다. 악마의 유혹에 이끌린 사람들로 인해 거리엔 카페가 넘쳐난다. 자고 나면 생겨나는 건 카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밥보다 커피를 좋아하는 이들의 역할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밥을 먹고 나면 당연히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범국민적 공감대가 카페의 부흥에 가장 큰 디딤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어떻든 커피는 감미로운 향과 맛으로 팍팍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무한다.내가 커피와 가까워진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커피나무나 커피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때였다. 설탕과 크림을 듬뿍 넣은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짬 모르게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담배 냄새가 짙게 밴 다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맛도 모르는 커피를 줄기차게 마셔댔다.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때로는 선배들이 하는 대로 다방 탁자에 놓인 소금을 집어넣어 보기도 했다. 소금 커피는 달달한 커피보단 못했다. 어른이 되려면 아직 먼 듯했다.서른이 가까워오자 블랙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쓴맛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으므로 의도적으로 마셨다. 산다는 일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때였다. 그러다가 차츰 매혹적인 커피의 향에 눈뜨게 되었다. 쓴맛에서 느껴지는 커피 본연의 맛을 음미할 줄 알게 되면서 저절로 철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독약처럼 쓰다는 그것이 마음 맞는 친구 하나를 얻은 것처럼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런 커피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줄곧 이어졌다.하나 요즘 들어 커피로 인한 고민이 생겼다. 마시면 마실수록 죄를 짓는 기분이 따라다닌다. 지구의 허파 구실을 하는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있는 건 커피가 원인이기도 한 까닭이다. 전 세계 커피 인구가 늘어나면서 돈이 되는 커피나무를 재배하기 위해 열대우림은 마구잡이로 파괴되었다. 그 속에 깃들어 살던 수 만종의 동식물들도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지구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던 열대우림이 지금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곳으로 변했다고 한다. 지구가열화에 열풍기를 튼 격이다. 곰곰이 따지고 들면 그렇게 된 원인 중엔 오랜 세월 커피를 즐기는 나도 들어있는 것이다.커피의 탄소발자국은 소고기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서 21g, 커피콩 1kg에서 15.3kg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커피 원두가 전 세계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또다시 많은 탄소 발자국을 남긴다. 물 발자국 역시 제품이 생산되어 쓰이고 버려지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물이 사용되는지 나타내는 환경 관련 지표를 말한다. 커피 한 잔이 만들어지기까지 커피나무를 키우고 열매를 수확하고 커피콩을 볶아서 전 세계로 유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130ℓ의 물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커피 소비량은 지난해 1인당 405잔을 마셨다는 통계가 있다. 전 세계 평균의 두 배가 훌쩍 넘는다.내 폰에는 지난해 생일에 날아든 스타벅스 커피 쿠폰이 몇 장 있다. 소읍에는 스타벅스 매장이 없어 도시에 갈 때 써야지 했는데 매번 바빠서 아직 쓰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눠주는 사은품이 탐이 나거나 혹은 주변에 선물을 하느라 미리 한 묶음의 커피 쿠폰을 구입하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소비자가 언제 마실지 모를 커피값을 미리 지불해 놓을 정도니 업자 측에선 커피 원두를 확보하느라 바쁘겠다. 그들이 지구 환경까지 관심 가질 여력이 있을까. 인터넷 쇼핑몰에 필요한 물건을 주문했더니 사용 후기를 올리면 100% 당첨된다는 커피 쿠폰 안내 쪽지를 보내왔다. 그야말로 우리는 커피를 빼놓으면 어딘가 허전한 시대를 살고 있다. 박월수 수필가 우리와 친숙한 커피는 우리 뇌를 혹사 시키는 역할을 한다. 커피에 든 카페인은 피곤한 상태에서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는 착각을 일으킨다. 뇌로 하여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피곤할 땐 쉬어야 하지만 커피의 힘을 빌려 업무를 보는 이들이 주변에 흔하다. 커피는 피로회복제가 아니며 제대로 된 휴식만이 업무 효율을 높인다는 걸 기억하자.지구별의 신음 소리가 곳곳에서 커져가고 있다. 최근 남미의 기록적인 폭우와 그로 인한 홍수, 이상고온은 뭇사람의 생명까지 앗아갔다. 내가 사는 산골에는 이상 기온으로 인해 사과나무의 꽃눈이 잎눈으로 변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꽃이 오지 않으면 열매 역시 기대할 수 없는 건 뻔한 이치다. 사과 농가의 수심이 깊어만 간다. 지금부터라도 지구별을 위한 작은 실천을 해야 할 때다. 우선 모임 자리에서 습관처럼 마시는 커피 대신 몸에 좋은 우리 차로 바꿔 보자.◇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박월수 수필가

2024-04-23

낭만을 사는 값

앞산 달비골은 우리들 낭만 놀이터였다. 방학을 맞아 약속한 날짜가 돌아오면 동아리 남학생들은 손수레에 장작을 싣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올랐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이날은 동아리 선후배 단합의 장이었다. 오르막을 만날 때마다 무거운 손수레를 미는 건 고역이었으나 후배들이 장작을 나르는 건 전통처럼 되어있었다. 선배들은 읍내 지서에 동아리 모임 허락을 얻은 후 산 중턱에 몇 동의 텐트를 쳐놓고 후배들을 기다렸다. 여학생들은 각자 맡은 찬거리를 싸 들고 흙먼지 이는 길을 걸었다. 누군가의 어깨엔 기타가 걸려있었고 불룩한 주머니엔 하모니카도 들어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숲은 깔깔거리고 마주 웃었다.신나게 공놀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다가왔다. 선배 언니들은 카레라이스며 볶음밥, 김치찌개 같은 걸 망설이는 법 없이 척척 차려냈다. 후배들이 어설픈 설거지를 마치면 모두들 숲속 공터로 모였다. 둥글게 원을 그리고 촛불을 손에 든 우리는 저마다의 꿈을 마음속에 새겼다. 누군가 언덕 위에서 묶인 줄을 따라 불씨를 내려보내면 화들짝 놀란 밤의 골짜기는 갑자기 소란해졌다. 우리는 높이 치솟는 모닥불 앞에서 기타를 퉁겼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으며 신들린 듯 몸을 흔들었다. 타오르는 모닥불과 젊은이들의 열기로 주눅 든 달빛마저 시들해지면 새벽이 뿌옇게 밝아왔다. 꼽아보니 마흔 해가 지난 일이다.지난해 여름 두 아이가 휴가를 받아 함께 내려온다고 했다. 직장이 서로 달라 휴가를 맞추기도 어려울 텐데 각별한 남매의 정이 기특했다. 게다가 나 더러 하고 싶은 게 있느냐고 정중히 물어오기까지 했다. 기억에 오래 남을 여행을 하고 싶었다. 곰곰이 계획을 짜다가 문득 달비골 생각이 나서 캠핑을 가자고 했다. 종종 전해 듣기로 코로나 이후 아들은 골수 캠핑족이 된 모양이어서 장비 걱정은 없을 듯했다. 더구나 낚시에도 꽤 이력이 붙어서 아들이 낚아 올린 생선회를 맛볼 수도 있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아이들은 흔쾌히 응했고 강아지 동반이 가능한 캠핑장도 미리 예약해 놓았다며 지도를 공유해 주었다. 바다 바로 곁에 있는 캠핑장은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거느린 근사한 곳이었다. 함께 사는 강아지도 눈치를 챘는지 사방으로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한창때를 지난 평일의 캠핑장은 한산하고 깨끗했다. 어디 한 곳 강아지 배설물이 널브러진 곳도 없었다. 깨끗한 샤워장과 잘 갖춰진 주방, 있을 것 다 있는 매점을 보며 캠핑장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편리함이 추억까지 길어 오진 않는다. 가까스로 부모님의 허락을 얻고 동아리 친구들과 달비골로 향하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산짐승 소리만 들리는 골짜기에서 계곡물로 밥을 짓고 서툰 설거지를 하고 밤을 꼬박 새우며 우정을 돈독히 하던 그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두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주로 오토캠핑장을 다녔으므로 캠핑의 불편함이 많지 않았다. 그만큼 아이들은 제대로 된 캠핑의 낭만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잘 갖춰진 장비가 낭만을 대신해 준다고 여길지 모른다.짐을 부리고 텐트를 치기 바쁘게 아들은 빤히 보이는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겼다. 어릴 적 남해 어디 섬에서 첫 바다낚시의 손맛을 경험한 아들은 그 짜릿함을 온몸에 묻어두고 지낸 모양이었다. 성인이 된 아들은 가끔씩 월척을 낚은 사진을 내게 전송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벼르던 날의 낚시는 성적이 좋지 않은 법이어서 어린 노래미 몇 마리를 낚아 돌려보냈을 뿐이다. 나 대신 장을 봐온 아이들은 소고기를 굽고 와인을 따르고 차돌 된장국을 끓여 저녁 식탁을 차렸다. 자식 키운 보람 같은 게 언뜻 느껴졌다. 저녁상을 물리자 아들은 매점에서 사 온 장작을 준비해 온 화로에 넣고 모닥불을 피웠다. 우리는 깊어가는 여름밤을 ‘불멍’을 하며 보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텐트에서도 당연한 절차라는 듯 모닥불을 피워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백석탄을 낀 신성계곡 물빛이 한꺼번에 핀 봄꽃들로 하여 눈이 부시다. 아직 드문드문 남은 산벚이 사람의 마음을 사무치게 한다. 일 년에 단 한 번 산이 웃는 시기다.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나는 또 목마른 사람처럼 산벚 피는 시기를 기다릴 것이다. 박월수 수필가 가까운 캠핑장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추억을 쌓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우리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뜨거운 봄을 지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우리 가족이 캠핑을 다녀오며 남긴 탄소발자국은 얼마쯤일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지구 환경에 너무나 무지한 사람이었다.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양껏 고기를 굽고 와인병을 따고 장작을 지폈다.고단한 현실을 벗어나 가족을 위한 시간을 가지는 건 권할만한 일이다. 해변 혹은 숲에서 온전히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은 삶의 소중한 에너지가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점점 가열화되는 지구를 생각한다면 화석 연료의 사용은 지양해야 옳다. 최소한의 소비가 지구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길이란 걸 기억한다면 아무리 좋아하는 캠핑이라도 현재의 절반으로 줄여보는 건 어떨까. ‘불멍’을 위한 모닥불을 지피기 전에 한 번 더 지구별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보라고 캠핑을 즐기는 아들에게 전화 한통 넣어야겠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박월수 수필가

2024-04-16

숨탄 것과 동거

눈 내린 아침 너구리의 방문을 받았다. 녀석은 바깥 아궁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비집고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눈 마당을 산책하는 중이었고 녀석은 내 발자국 소리에 부스럭거렸다. 기척을 듣고 다가가니 눈 덮인 뒷산을 내려왔는지 기력은 쇠잔해 보였고 털은 젖어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엉덩이를 돌려 앉는 시늉만 할 뿐 자리를 떠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짐승의 형편이 오죽할까 싶었다. 급한 대로 아끼는 강아지 사료를 한 그릇 부어 근처에 놓아주고 돌아섰다. 허기가 가시고 나면 목마른 것쯤이야 마당 가득 쌓인 눈을 먹으면 해결될 터였다.처마를 지탱하는 철골 구조물 틈새엔 박새 부부가 산다. 아침이 되어 먼저 일어난 한 녀석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더니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눈 덮인 세상을 한참이나 둘러보았다. 사냥을 나가기에 적당한지 어떤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잠시 박새 부부는 좁은 구조물 틈새를 벗어나 사이좋게 날아올랐다. 아침을 거르는 것보단 눈 속에서라도 먹잇감을 찾기로 한 것 같았다. 지켜보는 내내 기특한 맘이 가시지 않았다.산속, 마당 넓은 집에 살다 보면 온갖 숨탄 것들을 대하게 된다. 대낮 닭장 앞에서 잘 생긴 삵과 마주치기도 하고 뜰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마당을 가로지르는 담비 가족을 보기도 한다. 개울을 벗어나 집안을 기웃거리는 수달을 구슬려 돌려보낸 일도 있다. 평상으로 쓰는 너럭바위 곁에서 햇볕을 즐기는 뱀도 만난다. 꽃나무에 터 잡고 사는 딱새도 있고 수시로 날아와 제 안부를 전하고 가는 직박구리 한 쌍은 오래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다. 툭하면 뒷마당을 순회하는 꿩 무리며 뜀박질하는 고라니, 뒷산 뻐꾸기 울면 희한하게 알아듣고 마당귀에선 뻐꾹채 꽃 핀다. 천지가 잠든 밤이면 여운 가득 끌어안은 부엉이 소리가 먼 마을까지 기별을 보낸다.어떤 뜻밖의 방문객을 맞든 이제 더는 놀라지 않는다. 원래 그들의 영역이었던 곳에 허락도 없이 둥지를 튼 건 나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이방인이다. 나는 이기적인 동물이라 그들이 나를 밀어내더라도 나갈 생각 같은 건 없다. 되도록 주인 티를 내지 않고 그들과 섞여서 살고 싶다. 뒷산 은사시 나무에 몸빛이 노랗고 예쁜 꾀꼬리가 날아와 고운 소리로 불러주는 노래를 오래도록 듣고 싶다. 귀하고 사랑스러운 담비 가족을 내 집 마당에서 더 자주 만나고 싶다. 이런 생각마저 욕심인 걸 알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게 사람 맘이다.눈 내린 이튿날 가장 먼저 바깥 아궁이부터 살펴보았다. 빈 사료 그릇만 남겨두고 손님 너구리는 언제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개밥을 먹은 산짐승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다가 금방 안쓰러운 맘이 들었다. 녀석이 앉았던 자리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온기라곤 없었다. 서둘러 떠난 걸 보면 포근한 안식처는 아니었던가 보았다. 녀석이 숨어들었을 뒷산을 올려다보니 날이 푹해서 눈은 이미 다 녹고 없었다. 녀석은 어쩌다 겨울잠 자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홀로 민가에 내려와 떨고 있었을까. 뒷산에 녀석이 먹을 것들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봄이 올 때까지 잘 견뎌 주었으면 했다.아침상에 어머니가 자주 해 주시던 감자탕을 올렸다. 뼈다귀를 들고 정신없이 뜯다가 물휴지에 손이 가려는 걸 겨우 참는다. 얼른 행주에 손을 닦는다. 쓰레기 하나를 줄인 셈이다. 빈 그릇 가득한 뼈다귀를 살짝 헹궈 마당을 지키는 개한테 가져다준다. 음식 쓰레기가 특식으로 변했다. 코를 박고 먹는다. 식탁에서 짓는 죄를 조금 덜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볍다. 밀가루를 풀어 설거지를 한다. 세제로 부신 것보다 더 개운하다. 마트에 근무하는 친구가 봉지가 뜯어져 판매할 수 없는 것을 나눠 준 것이다. 생태에 관심이 많은 그 친구로 인해 우리 집엔 설거지용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는다. 어릴 적에 손님이 오기로 한 날이면 촘촘한 타일 부뚜막을 밀가루 묻힌 행주로 깨끗이 닦아내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세제 대신 밀가루 설거지를 하면서 푸른 지구별을 위한 작은 마음 하나를 보탠다는 생각에 더없이 뿌듯하다.아흔 고개를 넘는 어머니에게 일회용품은 소용에 닿지 않는 물건이었다. 필요한 만큼 그때그때 음식을 만들고 넉넉하다 싶으면 낮은 담장 너머로 이웃과 나누었다. 냉장고란 게 집안에 들어온 후에도 일회용 비닐에 음식을 담거나 하지 않으신다. 전기와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세탁기 보다 손빨래를 즐기는 어머니는 평생토록 간소한 삶을 이어오셨다. 전기와 물과 기름을 누구보다 아끼고 낭비를 무서워하는 어머니는 아픈 지구별의 이마를 언제나 짚어주고 계셨다. 박월수 수필가 오늘도 산골 마당엔 딱새가 놀고 직박구리가 다녀갔다. 내 눈이 미치지 않는 뒷마당 귀퉁이에 배고픈 산짐승이 내려와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 거랑 보 아래선 흰 두루미들이 모임이라도 하는지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새 그득하다.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면 내 욕심을 내려놓고 숨탄 것들을 배려하는 맘이 먼저라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정갈하고 간소하게 살아야겠다. 나는 보일러 온도를 낮추고 도톰한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수필가 박월수

2024-01-23

자전거 탄 풍경

현재 지구 환경은 위기에 처해있다.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가열화 상태에 접어든 지도 한참이다. 연초부터 세계 곳곳에서 들리는 이상 기후로 인한 재난 소식은 지구촌 식구들 모두가 마음 기울여야 할 지구 생태에 관한 문제다.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우리 주변에서 실천할 수 있는 소소한 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수필가의 눈으로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자전거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반짝이는 빨간 자전거를 타고 거랑둑을 산책하거나 꽃집을 향해 가는 장면을 떠올리면 가물거리던 행복의 실체가 손에 잡힐 것도 같았다. 자전거에 올라앉아 귀를 사로잡는 거랑물소리를 들으며 제라늄 화분을 사서 집으로 오는 길을 상상하는 일 만으로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다. 겨우 반나절 연습하다 그만둬 버린 게 고작이다. 나에게 자전거는 지구별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낭만을 위한 장치였다.아버지에게 자전거는 평생토록 발이 되어준 고마운 물건이었다. 아침마다 들로 나가 당신의 농지를 둘러보는 일은 언제나 자전거와 함께였다. 툭하면 병치레하는 막내딸을 등 뒤에 앉히고 읍내에 하나뿐인 병원을 향할 때에도, 농사철이 돌아와 엄마 대신 들밥을 싣고 나를 때에도 아버지의 자전거는 바쁘게 움직였다. 닷새장을 찾아 막걸리를 거나하게 걸친 아버지의 자전거 짐칸에는 누런 종이에 싸인 간갈치며 몇 톳의 김, 때론 항아리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기도 했다.첫 아이를 낳고 집을 옮길 돈이 모자라 끙끙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털털거리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딸네 집엘 오셨다. 언덕배기 이층집 한 귀퉁이에 세 들어 살던 딸을 위해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온 아버지는 신문지에 싼 돈뭉치를 품에서 꺼내주곤 쌩하니 돌아서 가셨다. 버스를 마다하고 먼 길을 굳이 노를 젓듯 출렁이며 오신 노년의 아버지에게 자전거는 건재함의 표징이기도 했다.몇 해 전, 딸아이와 간사이 지방을 여행하느라 오사카 시내에 닷새가량 머물렀다. 벚꽃 시즌이어서 숙소 맞은편 건물 앞에 선 늙은 벚나무도 꽃등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밤 벚꽃이 내뿜는 매력에 이끌려 따뜻한 사케 한 잔을 들고 창가를 서성였다. 그러다 자전거 탄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끝도 없이 밀려와 벚꽃 잎이 마중하는 건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 밖으로 나온 그들은 자전거 방향을 돌려 타고 떠났다. 어느 단체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자전거 행렬은 여행 내내 거리 곳곳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치마나 정장을 입고도 자전거를 탔다. 출근을 하든, 공원을 가든 그들에게 자전거는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신 오사카 역에 주차된 수만 대의 자전거를 목격했을 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교토의 주택가 골목을 걸으며 보니 집집마다 각양각색의 자전거가 한 대씩은 놓여 있었다. 자전거는 일상을 함께하는 소박한 친구로 보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멀지 않은 마트에 갈 때조차 당연한 듯 차를 타고 다녔다. 화석연료를 생산하는 거대 석유기업의 배를 불리고 탄소 배출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한심하게도 하지 못했다.지난해엔 딸아이와 베트남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 느긋하게 둘러볼 계획이었다. 하노이에 도착한 첫날부터 도로를 가득 매운 오토바이로 인해 정신이 아찔했다. 오토바이 매연은 건강한 사람도 지치게 만들었다. 비행기에서 본 검은 구름 탓인지 파란 하늘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흘을 그 도시에 머물렀지만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하늘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 밀려드는 관광객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라진 하늘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몰랐다.외곽에 위치한 하롱베이에선 크루즈에서 내뿜는 지독한 매연으로 인해 매스꺼움과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크루즈 꽁무니에 매달린 통통배가 손님을 실어 나를 때마다 뭉텅뭉텅 뱉어내는 검은 매연은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도 마스크를 찾게 만들었다. 카약도 섬 구경도 팽개치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맘이 솟구쳤다. 쏟아지는 매연과 지구는 별개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현지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음과 매연이 범벅된 곳을 떠나 다낭으로 내려갔을 때 겨우 파란빛을 지닌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 하늘도 모습을 감추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감지되는 걸 슬프게 지켜봤다. 박월수 수필가 자동차를 타는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별에 폭력을 일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열화로 치닫는 지구별에서 지금껏 해오던 그대로 살아가는 건 죄를 짓는 일이다. 열병에 걸린 지구를 위해 자동차 대신 자전거 타는 풍경을 그려본다. 밥을 주어야 움직이는 시계태엽처럼 발바닥의 힘으로 달리는 바퀴 위에서 고스란히 전해지는 땅의 기운을 느끼며 사는 이들은 여유롭다. 자전거 위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정다운 인사를 주고받는다. 자전거 타는 풍경이 늘어날수록 기후위기를 겪는 지구는 그만큼 맑아지겠다.내가 처음 자전거에 올라본 건 여고 진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버려진 비상 활주로에서 내 자전거를 잡아주며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돌려야 한다고 일러주던 사람이 있었다. 옆마을 큰 기와집 아들이던 그는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중이었고 사춘기를 지나던 내게 대학생 오빠가 잡아주는 자전거는 몹시도 부담스러웠다. 그날 이후 내 자전거 타는 실력은 한 뼘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나뿐인 지구별이 넘어지기 전에 우선 자전거 타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

2024-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