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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사과가 좋다

등록일 2024-09-03 19:54 게재일 2024-09-0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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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색깔을 내기 위해 은박 필름을 깔아놓은 과수원.

햇사과가 익어간다. 과수원마다 일꾼들 손길이 분주하다. 볕이 따가운 한낮에도 품 일을 하는 사람들은 쉴 줄을 모른다. 서둘러 열매 주변에 잎을 따주어야 볕이 고루 스며들어 빛깔 좋은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여기저기 바람풍선도 나부낀다. 키다리 풍선이 양팔을 치켜들고 종일 새를 쫓는다. 전기로 바람을 일으키는 풍선이 툭하면 태업을 일삼지만 잽싸게 일으켜 세우는 것도 농부 몫이다. 돈을 사야 할 탐스런 열매를 새에게 빼앗기긴 억울해서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여름 사과 출하준비를 하느라 과수농가들은 신경이 예민해진다. 추석 대목에 미처 내보내지 못한 여름 사과는 제 값을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해서다.

사과를 수확하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단계가 하나 더 있다. 나무 아래 은박 필름을 깔았다가 걷어내는 일이다. 은박지를 까는 일은 여간 품이 많이 드는 게 아니다. 낮은 자세로 기다시피 해야 하는 작업이라 몇 배로 힘이 든다. 과수 농사에 어지간히 이골 난 사람들도 은박지 설치 작업만큼은 피하고 싶어 한다. 해마다 은박지를 구입하는 데 드는 돈도 만만찮다. 또한 강한 빛으로 인해 낮게 달린 사과는 화상을 입기도 한다. 사과를 따는 동안에는 작업자의 눈이 부셔서 미리 걷어내야 하는데 이 또한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한다. 햇볕을 받지 못한 사과 밑동까지 골고루 색이 들어야 좋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먹던 사과는 국광과 홍옥 정도였다. 홍옥은 이름만 떠올려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일만큼 새콤한 맛이 으뜸이었다. 어머니는 마을에 하나뿐인 과수원에서 홍옥 한 포대를 사서 머리에 이고 오는 것으로 추석 준비를 시작하셨다. 어린 남매가 달콤한 사과를 먹으며 기대에 부푼 채 명절을 기다리길 바라셨는지 모른다. 포대에 담긴 홍옥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에 군데군데 푸른빛이 도는 것도 섞여있었다. 어느 것이든 맛은 일품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매일 조금씩 꺼내주는 홍옥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다. 하루는 아무도 몰래 다락에 올라가 껍질째 쓱쓱 문질러 물리도록 먹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잘 차려진 저녁상을 마주 하고도 이가 시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과는 어릴 적 몰래 먹었던 홍옥이다.

수년 전, 유럽 여행을 하며 마켓을 들를 일이 생길 때마다 과일을 눈여겨보았었다. 특히 우리 지역 특산품인 사과에 눈길이 가곤 했는데 하나같이 작고 허술해 보였다. 식당에서 맛본 사과들 역시 어른이 된 내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커다랗고 빛깔 좋은 사과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청송에서 맛본 것처럼 과육이 단단하지도 않았다. 유기농을 중요시하는 그들은 제품의 겉모습에 마음 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볼품은 없지만 안전한 먹거리가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나아가 후손의 건강에까지 직결된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아가 그들은 지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여행한 이들 중엔 한국 사과 맛에 길들여진 탓인지 탐탁지 않아 하는 이도 있었다.

청송에서는 여름 사과 생산량이 가을 사과에 훨씬 못 미친다. 부사가 익어 가는 가을은 들판이 빨갛게 물들 정도다. 농가에서는 잎 소제며 은박지 깔아줄 품을 구하느라 부산하다. 주말이면 농가 일손을 돕기 위해 청송으로 향하는 출향인들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자체에서 외국인 인력을 공급하고 있지만 지원에는 한계가 따른다. 그렇듯 몸과 마음이 초조해지는 시기에도 초연한 사람들이 있다. 황금 사과를 재배하는 농가들이다. 노란빛이 탐스런 황금사과는 열매 주변의 잎을 따주거나 나무 아래 은박지를 까는 따위의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사과밑동까지 노란빛이 자연스럽게 스며있기 때문이다. 황금사과 재배 농가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품값과 자재 값을 한꺼번에 아낄 수 있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맛 역시 뛰어나서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최근 들어 황금 사과를 재배하는 농가가 부쩍 늘어난 것도 이러한 이점이 두루 있어서다.

박월수 수필가
박월수 수필가

어릴 적 초등학교 가는 길에 과수원이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힐끔힐끔 들여다본 과수원 바닥엔 은박지 같은 건 깔려있지 않았다. 잎을 따 주거나 하는 것도 못 보았다. 겨우 병해충 방제를 위해 약을 치고 가지치기며 풀베기 작업을 하는 게 전부인 것 같았다. 꼬맹이들이 가끔 울타리를 비집고 들어가 풋사과를 훔쳐 먹고 배앓이를 하는 일도 있었으나 익을 만큼 익어서 제 때에 딴 사과는 모양이 예쁘지 않다거나 색깔이 곱지 않다고 맛이 덜하지는 않았다.

사과 수확 철이 다가오면 과수원마다 은박지 물결이 춤을 춘다. 관리 소홀로 바람에 날려가 하천 주변이나 야산을 떠도는 은박지도 숱하다. 바람에 날리는 은박지는 전선 줄에 걸려 자연발화되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일회용이어서 해마다 은박지는 생산되고 소비된다. 밑동이 빨갛게 물들지 않은 사과도 맛은 훌륭하다. 환경오염을 부추기는 은박지 사용을 그만둘 때다. 몸살 중인 지구별을 위해 농가와 소비자가 마음을 모아야 한다.

/박월수 수필가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의 지구별에 보내는 편지 기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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