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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지우기

등록일 2024-08-20 18:21 게재일 2024-08-2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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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게 정리된 메일함.

좋은 추억은 영혼의 허기를 달래준다. 오래 묵은 편지는 추억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물건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 건네주었던 편지들을 꺼내 읽는다. 삐뚤빼뚤 적힌 연필 글씨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더위에 지쳐 사라졌던 입맛이 금세 돌아올 것 같다. 빛바랜 편지마다 빠짐없이 들어있는 사랑한다는 말이 마음을 촉촉하게 한다. 성적이 떨어져서 미안하다며 쓴 편지도 지나고 보니 사랑스럽기만 하다. 세상에서 엄마가 최고라는 말은 읽을수록 기운 난다. 어버이날마다 편지와 함께 받았던 안마 이용권은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넣어두기만 했었다. 지금 보니 까무룩 넘어가도록 좋다. 아이가 철이 들어 남의 나라 여행 가서 보내온 편지는 어찌나 절절한지 코끝이 시큰하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 소중해서 마음 안에 오래도록 품고 싶은 보물이다.

메일함을 연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광고며 스팸 메일이 수두룩하다. 수신인이 원하지 않는데 마구잡이로 보내는 건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차단하기 바쁘게 발신인을 바꾸어 다시 보내는 데도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수시로 버리지만 쌓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읽고 버리지 않은 메일도 가득 쌓여있다. ‘디지털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일 중엔 메일함 비우기도 있다는 걸 알고부터 언젠간 몽땅 비워야지 했다. 그런데도 하루 이틀 시간만 보냈다. 지구별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끄럽게도 내 게으름을 따라잡지 못한 탓이다. 받은 메일함의 숫자를 살펴본다. 천 개가 훌쩍 넘는다. 게 중에 꼭 보관해야 할 중요한 메일은 몇이나 될까.

받은 메일함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니 2004년 4월에 온 것부터 저장돼 있다. 이미 이십 년 전부터 손 편지 쓰기를 그만두었다는 확실한 물증이다. 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던 어쩌면 삭막한 시대에 디지털카메라를 옆에 끼고 어릴 적 꿈꾸던 작가 공부를 시작했다. 보낸 이를 훑어보니 가까이 지내던 수필가며 사진 선생님에게서 받은 메일이 대부분이다. 그 무렵엔 좋아하는 수필가의 홈을 들락거리며 글 얘기와 사진 얘기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홈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메일로 주고받았다. 각 문예지에서 처음으로 받은 원고청탁서며 별것도 아닌 내 글을 읽고 여기저기서 보내온 격려 메일도 숱하다. 정성껏 꾹꾹 눌러쓴 펜글씨는 아니라도 언제든 위로가 되어주는 고마운 글이다. 게 중에 아껴가며 보고 싶은 것들만 추려서 보관 메일함으로 보낸다.

보낸 메일함 역시 만만찮다. 행사 때마다 글쓰기 동인들의 사진을 찍어 일일이 보내주고도 지우는 게 귀찮아 그대로 둔 게 태반이다. 여기저기에 보낸 원고들도 버려야 할 것들이다. 후배 작가들이 부탁한 습작품에 도움을 준 글들도 꽤 있다. 선배 역할에 충실하느라 다정한 인사도 잊지 않고 빼곡히 적어 놓았다. 종이 편지였다면 이미 내 것이 아닐 것들이 전자 편지라서 남아 있다는 게 괜히 무겁게 느껴진다. 다만 한 사람, 나를 무채색의 세상에서 꺼내 준 아름다운 수필가에게 꼬박꼬박 보낸 메일만은 따로 챙겨둔다. 두고두고 다시 읽어도 그녀에게 빠진 내 마음이 배어있어 향기로울 거라는 걸 안다. 나머지는 눈 딱 감고 삭제 단추를 누른다. 후련하다.

내게 쓴 메일함이 남았다. 수업 자료를 저장했다가 출력하는 목적으로 이용하는 요긴한 곳이다. 청소를 싫어하는 아이처럼 소용이 끝난 후에도 제 때 비우지 않아 눈덩이처럼 쌓였다. 제목도 없는 내용들이 그득하다. 처음의 자료가 뭘까 열어보니 박성우 시인의 ‘오이를 씹다가’란 시가 들어있다. 이 시를 암송할 때만 해도 아직 푸릇한 나이였다는 착각을 하며 잠시 추억에 잠긴다. 퍼뜩 마음을 다잡고 한꺼번에 삭제 단추를 눌러나간다.

박월수 수필가
박월수 수필가

메일함 전부를 비우는 데 꼬박 여덟 시간이 걸렸다. 제때 정리하지 않은 까닭에 버려야 할 것과 보관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이십 년 동안 쌓아두고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개인의 사소한 기록을 보관해 주느라 지구 한 귀퉁이는 병들고 있었다는 늦은 자각이 든 때문이다. 우리가 인터넷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동안 데이터 센터에서 내뿜는 온실가스 발생량은 계속 증가할 게 뻔하다. 메일함을 비우는 일은 어쩌면 추억을 지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별을 생각한다면 소소한 것들은 버릴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것들은 마음 안에 간직하면 될 일이다.

환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디지털 탄소발자국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인 ‘스몸비족’이란 말이 유행한 지도 꽤 되었다. 현대인들은 잠시도 스마트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도 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뿐 아니라 폐기할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양은 엄청나다고 들었다. 환경오염 따위 먼 나라 얘기라는 듯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바꾸기보다 십 년째 같은 폰을 쓰는 이가 많았으면 싶다. 낡은 스마트폰을 들고 메일함을 자주 비우며 쓰지 않는 코드는 뽑아 놓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지구별은 반짝이지 않을까. /수필가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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