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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에 거는 기대

등록일 2024-09-24 19:27 게재일 2024-09-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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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내린 날 청송읍 전경.

60년대까지 청송엔 대마 농사가 성행했다. 집집마다 씨앗을 뿌려 대마를 길렀다. 대마 채취가 끝나면 마을 사람 모두가 나서서 삼굿을 했다. 삼 껍질이 잘 벗겨지도록 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장작을 깔고 그 위에 돌을 얹어 삼을 재고 풀과 흙을 덮은 후 불을 지폈다. 삼굿은 힘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마을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삼굿이 끝나면 푹 삼긴 삼을 꺼내 차가운 계곡물에 식혔다가 건져내어 껍질을 벗겼다. 삼에서 뽑아낸 실을 꼬아 삼을 삼고 베를 매고 짜는 일은 대부분 섬세한 아녀자들 몫이었다. 삼베가 완성되면 잘 짜진 베는 팔아 살림에 보탰고 올이 굵은 베로는 가족들 옷을 지어 입혔다. 밤이고 낮이고 베틀에 올라앉아 베를 짜던 아낙들이 이제는 텃밭 농사도 힘에 부쳐서 경로당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주왕산 마을 여든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 삼 농사지어 베 짜던 시절 얘기를 주절주절 풀어놓는다. 삼굿이 끝나고 차갑게 식힌 삼 껍질을 벗길 때 집집이 해 온 밥을 펼쳐놓고 거랑가에 둘러앉아 먹던 때가 어제 일처럼 선하단다. 어느 댁은 계추리(황저포)를 잘 짰고 어느 댁은 열세로 치는 계추리는 아니라도 일곱세는 짰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그 시절을 지나오지 않은 내 귀에는 무슨 암호처럼 들린다. 눈치 빠른 어르신이 설명을 보탠다. 계추리는 삼의 겉껍질을 긁어버리고 만든 고운 실로 짜는데 부드러워서 삼베 중에 최고로 치고 올이 굵은 삼베는 다섯세, 여섯세도 있었단다. 어렴풋이 귀가 열린다. 한창 삼을 삼고 베를 짤 무렵 어르신들 손가락 끝이 얼마나 아렸을까 싶어 멀쩡한 내 손끝이 저려온다. 정작 직접 짠 고운 삼베를 오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는 어르신 얼굴엔 자부심만 한가득이다. 온몸으로 세월을 건너온 어르신들이 지구 생태에 건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고나 계실까.

안동 금소리 대마.  /네이버 블로그 캡처
안동 금소리 대마. /네이버 블로그 캡처

어머니가 들려준 외조모 얘기도 주왕산 어르신들 못지않다. 외조모는 손이 매워서 삼베는 물론이고 무명이며 명주 짜는 솜씨가 유달리 좋았다고 한다. 마을의 부자로 통했던 외조부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다 날리게 되면서 외조모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집안이 망했다고 낙담할 사이도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웠다. 누에에서 실을 뽑아 몇 날 며칠 베를 짠 후 공인된 허가증을 목에 걸고 명주를 팔러 나섰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통에 아무리 먼 길도 걸어 다녔다. 가지고 간 베를 다 팔 때까지 남의 집 고방에서 묵는 일은 예사였고 끼니를 굶는 일도 숱했다. 무거운 명주를 이고 지고 발품을 팔아가며 번 돈으로 자식 공부를 시켰다. 쓰러졌던 외가는 억측이었던 외조모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외조모에게 뽕나무와 누에와 명주는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것이었고 그분은 몰랐으나 그로 인해 지구 한 귀퉁이는 맑았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값싼 화학섬유로 만든 의류가 시장을 지배했다. 경제개발이란 미명하에 품이 많이 드는 삼베며 무명이며 명주는 우리 주변에서 밀려났다. 경지 정리된 논에는 대마와 목화와 뽕나무 대신 소출이 많다는 벼가 심겼다. 사람들은 더 이상 비싼 값을 들여 몸에 좋은 천연 섬유로 짠 옷을 입지 않았다. 베틀은 쓸모가 없어졌고 대마는 아편처럼 중독성이 있다는 불명예마저 안게 되었다. 시골 구석구석 흔하게 자라던 대마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십여 년 전 청송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 빈 집 울타리 안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대마가 저절로 자라는 걸 본 적 있다. 이곳 토박이들의 오랜 역사를 만난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얼마 안 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 뿌리라도 키우면 불법이라는 걸 마을 사람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게 된 까닭이었다.

안동은 안동포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요즘 들어 대마 농사를 짓는 농가도 늘고 있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주 작목인 고추 농사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반면 대마 농사는 수월함과 수익성을 모두 갖춘 때문이란다. 대마는 밭을 갈고 씨만 흩뿌려서 흙을 덮어주면 3개월 동안에 2미터 이상 자랄 정도로 잡초보다 성장이 빠른 작물이다. 비료 없이도 잘 자라고 1년에 2 모작이 가능하다. 병해충에 강해 농약을 칠 필요도 거의 없다. 이러한 이점 덕분에 최근엔 대마 농사를 짓기 위해 멀리서 알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단다. 섬유용 대마는 옷부터 건축자재, 자동차 내장재까지 다양한 산업분야에 활용될 정도로 미래 산업가치도 뛰어나다. 몸에 좋은 대마종자유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외국에서는 새롭게 떠오르는 작물이기도 하다.

박월수 수필가
박월수 수필가

나무는 온실 가스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성장이 빠른 대마를 심는 일은 뜨거워지는 지구별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값싼 방법이라고 생태환경 운동가들은 말한다. 자연분해가 가능하고 독성이 없는 대마를 이용해 플라스틱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니 석유화학물질에 대한 의존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대마가 합법적으로 재배되고 있다는 건 지구별의 입장에선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지구의 내일을 위해 중독성 없는 대마를 재배하는 일이 어디에서나 가능해지기를 바라본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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