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자주 앞 거랑에서 놀았다. 물가에 핀 꽃을 따서 소꿉놀이도 하고 징검다리에 앉아 찰방거리며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 신나게 노느라 신발 한 짝을 떠내려 보내고 쫓아가서 잡으려다 옷만 몽땅 버린 날도 더러 있다. 그런 날은 아버지께 어김없이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거랑은 일급 놀이터에 변함이 없었다. 빨래하는 어머니 옆에서 해진 걸레를 놓고 나무방망이를 두드리는 일도 재미났다. 물수제비뜨기는 좀체 실력이 늘지 않았지만 물풀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버들치는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좀 더 자라서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넓은 거랑에서 여름을 났다. 헤엄치는 방법을 배우느라 자갈이 깔린 바닥을 수도 없이 짚어서 손바닥이 얼얼해도 좋았다. 어쩌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곁으로 풀숲에 쉬고 있던 물뱀이 지나가기도 했다. 혼비백산한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흩어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물에 들어가 놀았다. 아이들 중 하나가 물뱀은 독이 없다고 말한 때문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에야 퉁퉁 불어 허옇게 된 손발을 하고 물에서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엔 귀속에 들어간 물을 빼느라 머리를 양쪽으로 기울이며 노래를 불렀다.
“강물이 많나, 바닷물이 많나”
집 뒤 좁은 농수로에서는 주로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겨우 잡은 미꾸라지가 매끄러운 몸짓을 뽐내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때의 허전함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운이 좋아 몇 마리의 물고기를 잡은 날은 고무신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물가에 가지 않고도 가까이 두고 바라보고 싶었다. 어항 같은 건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우물 가까이에 흙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넣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한 두레박의 물을 붓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물은 까무룩 사라지고 물고기만 남아 팔딱거렸다. 또다시 부어줘도 마찬가지였다. 물은 바짝 마른 마당을 온전히 다 적시고야 고인다는 걸 어릴 적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논과 밭의 쓰임이 다르다는 걸 알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여름 밤이 되면 마을 뒤 거랑은 아낙들 차지였다. 아낙들은 사람들 눈을 피해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땀에 젖은 몸을 씻었다. 달빛도 없는 거랑에서는 아낙들이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도타운 정을 쌓았다. 낮에 일어난 자잘한 소문도 밤의 거랑에서는 재미난 얘깃거리였다. 물속에서 그들이 나누는 즐거운 수다가 오래오래 여름밤을 적셨다. 그 속엔 어쩌다 우리 어머니도 있었다. 밤 마실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아버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모처럼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거랑은 며느리와, 아내와, 엄마로 사느라 지친 아낙들의 마음을 달래기에 마침맞은 곳이었다.
열두어 살 될 무렵이었든가. 거랑은 더 이상 아이들의 놀이터도 아낙들의 수다 장소도 아니었다. 윗마을에 염색공장이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거랑은 맑은 물 대신 이상한 냄새가 나는 탁한 물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집마다 있던 맑은 우물마저 뿌옇게 변했고 소독약 냄새 진동하는 수돗물이 식수를 대신했다. 언제든 달려가 안길 수 있는 요람 같은 곳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반짝이는 물가에 철마다 다른 꽃이 피는 꿈결 같은 곳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국가의 뜻에 반하는 행위는 그 무엇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릴 적 낙원을 잃어버린 나는 추억 속에서만 옛 거랑을 만난다.
그 시절에서 멀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논과 밭이 사라지고 모든 거랑은 복개되어 버린 고향을 떠나 산골 깊숙이 들어와 살고 있다. 맑은 거랑물이 흐르는 사철 아름다운 곳이다. 자연이 들려주는 감미로운 노래를 들으며 새로운 낙원에 묻혀 지낸다.
하지만 십여 년 전 처음 정착했을 때와 달리 벼농사를 짓던 논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부분 고소득 작물이라는 사과밭으로 변해서 무논은 찾아보기 힘들다. 논고동이며 소금쟁이, 물방개 따위와 온갖 물풀을 품고 있어 생물의 다양성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무논이 사라진다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무논은 공기 중의 습도를 머금고 있어 산불예방에도 적잖은 도움을 준다.
주일 미사 시간, 앞들 몇 남지 않은 무논에서 개구리 소리 요란하다. 신부님 강론시간에 왁자하게 끼어들어도 누구 하나 싫은 표정을 짓는 이 없다. 마침 신부님 강론도 생태이야기로 접어든다. 들 가운데 새치처럼 남아있는 무논이 완전히 사라지면 목청껏 울어쌓는 개구리 소리도 따라 없어질까 두렵다.
점차 줄어드는 논도 걱정이지만 양서류를 위한 이동통로가 마련되지 않은 것도 개구리를 위협한다. 장마철에 운전을 하다보면 도로를 건너다 죽음을 맞는 개구리를 숱하게 만난다. 성가대 노래 속에 귀한 개구리 합창이 함께 하는데 나는 자꾸 생태계가 무너지는 소리 들리는 것 같다.
집으로 오는 길, 논둑에 핀 찔레꽃이 무논에 담긴다. 빠르게 지나던 구름이 그 속에 잠시 머문다. 예전에 앞 거랑 물을 떠다가 장을 담그고 논에서 잡은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몸보신했다는 어르신이 전동차를 세우더니 개구리 소리를 감상한다. 사라질 풍경은 다 아름답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