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포항에서 처음 보고된 소나무재선충병은 여전히 숲을 갉아먹고 있고, 푸르름을 내뿜던 소나무는 붉게 물들며 신음하고 있다.
지난 2일 호미 반도의 시작점인 포항시 남구 동해면 금광리에 들어서자 도로 갓길 옆 생을 마감한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가지는 말라비틀어졌고, 줄기 껍질은 일그러져 벗겨지고 있었다. 한때 산 전체를 감싸던 짙은 녹음은 사라지고 검붉게 드러난 나무 뼈대들이 황량하게 서 있었다.
동해면 임곡리로 들어서자 야트막한 산등성이 위로 우람했던 소나무들이 병든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병든 채 숨이 끊긴 나무처럼 처연했다.
연오랑세오녀테마파크 관광지 주변 산도 병세가 깊었다. 바람에 떨어진 솔방울과 솔잎들이 바닥을 덮었고, 앙상한 가지들은 방향을 잃은 채 뒤엉켜 있었다. 반쯤 마른 나무들은 건강한 줄 착각하게 하지만 가까이 보면 침엽수 고유의 윤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임곡리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A씨는 “펜션 바로 옆에 있는 소나무가 7~8년 전부터 조금씩 말라가기 시작했고, 줄기까지 새까맣게 벗겨져선 죽어버렸다"면서 "함부로 베어낼 수도 없고,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흥환간이해수욕장 근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라던 해송 군락이 사라지고 죽은 나무 몇 그루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 위로 날아든 까마귀 한 마리가 연신 껍질을 쪼아댔다. 생명을 잃은 나무 위에서조차 또 다른 생명이 생존을 위해 파고들었다.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벌목지에는 낙석 방지막이 설치돼 있다. 급경사지에 나무가 사라지자 토사 유실을 막기 위해 급히 조치한 것이다. 그러나 벌거숭이 된 산은 여전히 무방비하다. 낙엽이 깔렸어야 할 땅엔 잘린 나무의 흔적만이 흩어져 있다.
발산리 한 야산은 전체가 이미 벌목을 마친 상태다. 줄지어 자란 소나무들은 사라지고 휑한 경사면만 남았다. 나무 하나 없는 산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 하염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미곶면 대동배리로 접어들면 고사한 소나무 위로 담쟁이덩굴이 자리를 잡고 올라간다. 살아 있는 나무를 덮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나무에 남겨진 줄기를 덮는 덩굴은 묘한 공허감을 안긴다. 30년 넘게 마을에 거주한 김모씨(70)는 “바위 위에 바람이 불고 태풍이 와도 꿋꿋하게 서 있던 소나무도 순신간에 재선충에 감염돼 사라져 쓸쓸하기만 하다”며 한때 마을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소나무 이야기를 전했다.
‘지뢰 매설지역’이라는 붉은 경고판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도 재선충에 말라 죽은 소나무들이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지를 잃고 비틀린 채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들은 마치 살려달라 외치는 듯 침묵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호미반도 둘레길을 걷던 이명자(58)·박진호(62) 부부는 “때 아닌 단풍인 줄 알았는데, 말라 죽은 소나무였다"라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포항은 푸른 바다에 초록 소나무였는데 지금은 죽음의 색으로 덮였다”며 아쉬워 했다.
호미곶 해맞이광장 인근의 일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명소의 해송들도 고사한 채 남아 있었다. 일부는 반쯤 마른 상태였고, 일부는 이미 잘려 흔적만 남았다. 사진작가 이윤재씨(43)는 “SNS에 해송 사진 올리면 다들 감탄했는데 이젠 그 자리에 병든 나무만 남았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기읍성 뒷산으로 가보면 푸른 대숲과 고사목이 기이하게 공존한다. 붉게 물든 고사목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푸르른 대나무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산 아래 민가까지도 재선충 피해가 번져 있었다.
50년 넘게 이 마을을 지킨 오모씨(75)는 “어릴 적 저 산에 소풍도 가고 도토리도 주웠다. 지금은 다 말라서 겁난다. 마을 쪽으로 벌레가 내려오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숲이 푸르니까 그래도 숨통은 트인다"며 한숨지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구룡포에서 장기까지 이어지는 구간의 바다 쪽은 동해의 짙푸름이 반짝이지만, 반대편 산들은 죽은 소나무로 검붉게 뒤덮였다. 반짝이는 바다 풍경과 병든 산의 대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든다. 과연 같은 시공간인지 믿기 어려울 만큼 격차가 크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의 산들도 예외는 아니다.
곳곳에서 벌목이 이뤄졌지만 이미 감염이 번진 뒤였다. 등산로 입구는 벌겋게 고사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뒷산까지 감염 흔적이 역력했다. 2대째 복숭아를 재배하는 정모씨(55)는 “처음 재선충이 발생했을 때 방재를 요청했지만, ‘순서대로 한다’는 이유로 미뤄졌고, 결국 산 곳곳으로 퍼졌다”고 말했다.
신광면 비학산은 학이 날개를 펼치는 듯한 능선으로 이름 붙여졌지만, 지금은 재선충 피해로 날개 끝이 썩어 들어간 듯하다. 인접한 야산까지 피해가 확산한 상태였다. 정상부터 시작된 고사 현상이 산 전체로 퍼지고 있었고 녹색의 생명력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죽음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포항시 녹지과 관계자는 “소나무재선충은 길이 약 1mm의 실처럼 가는 선충으로 단 3~5일 만에 성충이 돼 빠르게 번식한다”며 “이 재선충은 스스로 이동하지 못하고 북방수염하늘소나 솔수염하늘소 같은 매개충이 옮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 하늘소는 겨울 동안 소나무 속에서 월동한 뒤 봄에 우화해 건강한 소나무를 가해하고 이 과정에서 재선충이 함께 전파된다”고 덧붙였다.
방제 방식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감염목만 베어내는 ‘단목 방제’를 실시했지만, 지금은 감염 확산이 심해서 감염목 주변의 미감염목까지 함께 제거하는 ‘모두베기’ 방식으로 전환했다”며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동해면, 장기면, 호미곶면 등은 현재 방제 특별구역으로 지정돼 있고, 해당 지역은 모두베기와 수종 전환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베어낸 자리는 법에 따라 3년 이내에 반드시 조림해야 하며 재감염 방지를 위해 소나무가 아닌 다른 수종을 심고 있다”며 “산사태 우려와 관련해 시민들이 걱정할 수는 있지만 나무를 베어낸 뒤에도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 2~3년 동안 토양을 단단히 붙잡아준다”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항공 방제는 익충까지 피해를 주기 때문에 시행하지 않으며 매개충의 활동 시기에 맞춰 드론을 활용한 국지적 방제를 진행하고 있다”며 “올해도 이미 여러 차례 방제해 재선충 확산을 차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