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구 환경은 위기에 처해있다.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가열화 상태에 접어든 지도 한참이다. 연초부터 세계 곳곳에서 들리는 이상 기후로 인한 재난 소식은 지구촌 식구들 모두가 마음 기울여야 할 지구 생태에 관한 문제다.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우리 주변에서 실천할 수 있는 소소한 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수필가의 눈으로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자전거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반짝이는 빨간 자전거를 타고 거랑둑을 산책하거나 꽃집을 향해 가는 장면을 떠올리면 가물거리던 행복의 실체가 손에 잡힐 것도 같았다. 자전거에 올라앉아 귀를 사로잡는 거랑물소리를 들으며 제라늄 화분을 사서 집으로 오는 길을 상상하는 일 만으로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다. 겨우 반나절 연습하다 그만둬 버린 게 고작이다. 나에게 자전거는 지구별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낭만을 위한 장치였다.
아버지에게 자전거는 평생토록 발이 되어준 고마운 물건이었다. 아침마다 들로 나가 당신의 농지를 둘러보는 일은 언제나 자전거와 함께였다. 툭하면 병치레하는 막내딸을 등 뒤에 앉히고 읍내에 하나뿐인 병원을 향할 때에도, 농사철이 돌아와 엄마 대신 들밥을 싣고 나를 때에도 아버지의 자전거는 바쁘게 움직였다. 닷새장을 찾아 막걸리를 거나하게 걸친 아버지의 자전거 짐칸에는 누런 종이에 싸인 간갈치며 몇 톳의 김, 때론 항아리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기도 했다.
첫 아이를 낳고 집을 옮길 돈이 모자라 끙끙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털털거리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딸네 집엘 오셨다. 언덕배기 이층집 한 귀퉁이에 세 들어 살던 딸을 위해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온 아버지는 신문지에 싼 돈뭉치를 품에서 꺼내주곤 쌩하니 돌아서 가셨다. 버스를 마다하고 먼 길을 굳이 노를 젓듯 출렁이며 오신 노년의 아버지에게 자전거는 건재함의 표징이기도 했다.
몇 해 전, 딸아이와 간사이 지방을 여행하느라 오사카 시내에 닷새가량 머물렀다. 벚꽃 시즌이어서 숙소 맞은편 건물 앞에 선 늙은 벚나무도 꽃등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밤 벚꽃이 내뿜는 매력에 이끌려 따뜻한 사케 한 잔을 들고 창가를 서성였다. 그러다 자전거 탄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끝도 없이 밀려와 벚꽃 잎이 마중하는 건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 밖으로 나온 그들은 자전거 방향을 돌려 타고 떠났다. 어느 단체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자전거 행렬은 여행 내내 거리 곳곳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치마나 정장을 입고도 자전거를 탔다. 출근을 하든, 공원을 가든 그들에게 자전거는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신 오사카 역에 주차된 수만 대의 자전거를 목격했을 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교토의 주택가 골목을 걸으며 보니 집집마다 각양각색의 자전거가 한 대씩은 놓여 있었다. 자전거는 일상을 함께하는 소박한 친구로 보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멀지 않은 마트에 갈 때조차 당연한 듯 차를 타고 다녔다. 화석연료를 생산하는 거대 석유기업의 배를 불리고 탄소 배출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한심하게도 하지 못했다.
지난해엔 딸아이와 베트남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 느긋하게 둘러볼 계획이었다. 하노이에 도착한 첫날부터 도로를 가득 매운 오토바이로 인해 정신이 아찔했다. 오토바이 매연은 건강한 사람도 지치게 만들었다. 비행기에서 본 검은 구름 탓인지 파란 하늘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흘을 그 도시에 머물렀지만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하늘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 밀려드는 관광객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라진 하늘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몰랐다.
외곽에 위치한 하롱베이에선 크루즈에서 내뿜는 지독한 매연으로 인해 매스꺼움과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크루즈 꽁무니에 매달린 통통배가 손님을 실어 나를 때마다 뭉텅뭉텅 뱉어내는 검은 매연은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도 마스크를 찾게 만들었다. 카약도 섬 구경도 팽개치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맘이 솟구쳤다. 쏟아지는 매연과 지구는 별개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현지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음과 매연이 범벅된 곳을 떠나 다낭으로 내려갔을 때 겨우 파란빛을 지닌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 하늘도 모습을 감추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감지되는 걸 슬프게 지켜봤다.
자동차를 타는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별에 폭력을 일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열화로 치닫는 지구별에서 지금껏 해오던 그대로 살아가는 건 죄를 짓는 일이다. 열병에 걸린 지구를 위해 자동차 대신 자전거 타는 풍경을 그려본다. 밥을 주어야 움직이는 시계태엽처럼 발바닥의 힘으로 달리는 바퀴 위에서 고스란히 전해지는 땅의 기운을 느끼며 사는 이들은 여유롭다. 자전거 위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정다운 인사를 주고받는다. 자전거 타는 풍경이 늘어날수록 기후위기를 겪는 지구는 그만큼 맑아지겠다.
내가 처음 자전거에 올라본 건 여고 진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버려진 비상 활주로에서 내 자전거를 잡아주며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돌려야 한다고 일러주던 사람이 있었다. 옆마을 큰 기와집 아들이던 그는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중이었고 사춘기를 지나던 내게 대학생 오빠가 잡아주는 자전거는 몹시도 부담스러웠다. 그날 이후 내 자전거 타는 실력은 한 뼘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나뿐인 지구별이 넘어지기 전에 우선 자전거 타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