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아침 너구리의 방문을 받았다. 녀석은 바깥 아궁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비집고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눈 마당을 산책하는 중이었고 녀석은 내 발자국 소리에 부스럭거렸다. 기척을 듣고 다가가니 눈 덮인 뒷산을 내려왔는지 기력은 쇠잔해 보였고 털은 젖어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엉덩이를 돌려 앉는 시늉만 할 뿐 자리를 떠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짐승의 형편이 오죽할까 싶었다. 급한 대로 아끼는 강아지 사료를 한 그릇 부어 근처에 놓아주고 돌아섰다. 허기가 가시고 나면 목마른 것쯤이야 마당 가득 쌓인 눈을 먹으면 해결될 터였다.
처마를 지탱하는 철골 구조물 틈새엔 박새 부부가 산다. 아침이 되어 먼저 일어난 한 녀석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더니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눈 덮인 세상을 한참이나 둘러보았다. 사냥을 나가기에 적당한지 어떤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잠시 박새 부부는 좁은 구조물 틈새를 벗어나 사이좋게 날아올랐다. 아침을 거르는 것보단 눈 속에서라도 먹잇감을 찾기로 한 것 같았다. 지켜보는 내내 기특한 맘이 가시지 않았다.
산속, 마당 넓은 집에 살다 보면 온갖 숨탄 것들을 대하게 된다. 대낮 닭장 앞에서 잘 생긴 삵과 마주치기도 하고 뜰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마당을 가로지르는 담비 가족을 보기도 한다. 개울을 벗어나 집안을 기웃거리는 수달을 구슬려 돌려보낸 일도 있다. 평상으로 쓰는 너럭바위 곁에서 햇볕을 즐기는 뱀도 만난다. 꽃나무에 터 잡고 사는 딱새도 있고 수시로 날아와 제 안부를 전하고 가는 직박구리 한 쌍은 오래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다. 툭하면 뒷마당을 순회하는 꿩 무리며 뜀박질하는 고라니, 뒷산 뻐꾸기 울면 희한하게 알아듣고 마당귀에선 뻐꾹채 꽃 핀다. 천지가 잠든 밤이면 여운 가득 끌어안은 부엉이 소리가 먼 마을까지 기별을 보낸다.
어떤 뜻밖의 방문객을 맞든 이제 더는 놀라지 않는다. 원래 그들의 영역이었던 곳에 허락도 없이 둥지를 튼 건 나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이방인이다. 나는 이기적인 동물이라 그들이 나를 밀어내더라도 나갈 생각 같은 건 없다. 되도록 주인 티를 내지 않고 그들과 섞여서 살고 싶다. 뒷산 은사시 나무에 몸빛이 노랗고 예쁜 꾀꼬리가 날아와 고운 소리로 불러주는 노래를 오래도록 듣고 싶다. 귀하고 사랑스러운 담비 가족을 내 집 마당에서 더 자주 만나고 싶다. 이런 생각마저 욕심인 걸 알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게 사람 맘이다.
눈 내린 이튿날 가장 먼저 바깥 아궁이부터 살펴보았다. 빈 사료 그릇만 남겨두고 손님 너구리는 언제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개밥을 먹은 산짐승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다가 금방 안쓰러운 맘이 들었다. 녀석이 앉았던 자리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온기라곤 없었다. 서둘러 떠난 걸 보면 포근한 안식처는 아니었던가 보았다. 녀석이 숨어들었을 뒷산을 올려다보니 날이 푹해서 눈은 이미 다 녹고 없었다. 녀석은 어쩌다 겨울잠 자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홀로 민가에 내려와 떨고 있었을까. 뒷산에 녀석이 먹을 것들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봄이 올 때까지 잘 견뎌 주었으면 했다.
아침상에 어머니가 자주 해 주시던 감자탕을 올렸다. 뼈다귀를 들고 정신없이 뜯다가 물휴지에 손이 가려는 걸 겨우 참는다. 얼른 행주에 손을 닦는다. 쓰레기 하나를 줄인 셈이다. 빈 그릇 가득한 뼈다귀를 살짝 헹궈 마당을 지키는 개한테 가져다준다. 음식 쓰레기가 특식으로 변했다. 코를 박고 먹는다. 식탁에서 짓는 죄를 조금 덜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볍다. 밀가루를 풀어 설거지를 한다. 세제로 부신 것보다 더 개운하다. 마트에 근무하는 친구가 봉지가 뜯어져 판매할 수 없는 것을 나눠 준 것이다. 생태에 관심이 많은 그 친구로 인해 우리 집엔 설거지용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는다. 어릴 적에 손님이 오기로 한 날이면 촘촘한 타일 부뚜막을 밀가루 묻힌 행주로 깨끗이 닦아내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세제 대신 밀가루 설거지를 하면서 푸른 지구별을 위한 작은 마음 하나를 보탠다는 생각에 더없이 뿌듯하다.
아흔 고개를 넘는 어머니에게 일회용품은 소용에 닿지 않는 물건이었다. 필요한 만큼 그때그때 음식을 만들고 넉넉하다 싶으면 낮은 담장 너머로 이웃과 나누었다. 냉장고란 게 집안에 들어온 후에도 일회용 비닐에 음식을 담거나 하지 않으신다. 전기와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세탁기 보다 손빨래를 즐기는 어머니는 평생토록 간소한 삶을 이어오셨다. 전기와 물과 기름을 누구보다 아끼고 낭비를 무서워하는 어머니는 아픈 지구별의 이마를 언제나 짚어주고 계셨다.
오늘도 산골 마당엔 딱새가 놀고 직박구리가 다녀갔다. 내 눈이 미치지 않는 뒷마당 귀퉁이에 배고픈 산짐승이 내려와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 거랑 보 아래선 흰 두루미들이 모임이라도 하는지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새 그득하다.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면 내 욕심을 내려놓고 숨탄 것들을 배려하는 맘이 먼저라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정갈하고 간소하게 살아야겠다. 나는 보일러 온도를 낮추고 도톰한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수필가 박월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