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 달비골은 우리들 낭만 놀이터였다. 방학을 맞아 약속한 날짜가 돌아오면 동아리 남학생들은 손수레에 장작을 싣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올랐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이날은 동아리 선후배 단합의 장이었다. 오르막을 만날 때마다 무거운 손수레를 미는 건 고역이었으나 후배들이 장작을 나르는 건 전통처럼 되어있었다. 선배들은 읍내 지서에 동아리 모임 허락을 얻은 후 산 중턱에 몇 동의 텐트를 쳐놓고 후배들을 기다렸다. 여학생들은 각자 맡은 찬거리를 싸 들고 흙먼지 이는 길을 걸었다. 누군가의 어깨엔 기타가 걸려있었고 불룩한 주머니엔 하모니카도 들어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숲은 깔깔거리고 마주 웃었다.
신나게 공놀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다가왔다. 선배 언니들은 카레라이스며 볶음밥, 김치찌개 같은 걸 망설이는 법 없이 척척 차려냈다. 후배들이 어설픈 설거지를 마치면 모두들 숲속 공터로 모였다. 둥글게 원을 그리고 촛불을 손에 든 우리는 저마다의 꿈을 마음속에 새겼다. 누군가 언덕 위에서 묶인 줄을 따라 불씨를 내려보내면 화들짝 놀란 밤의 골짜기는 갑자기 소란해졌다. 우리는 높이 치솟는 모닥불 앞에서 기타를 퉁겼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으며 신들린 듯 몸을 흔들었다. 타오르는 모닥불과 젊은이들의 열기로 주눅 든 달빛마저 시들해지면 새벽이 뿌옇게 밝아왔다. 꼽아보니 마흔 해가 지난 일이다.
지난해 여름 두 아이가 휴가를 받아 함께 내려온다고 했다. 직장이 서로 달라 휴가를 맞추기도 어려울 텐데 각별한 남매의 정이 기특했다. 게다가 나 더러 하고 싶은 게 있느냐고 정중히 물어오기까지 했다. 기억에 오래 남을 여행을 하고 싶었다. 곰곰이 계획을 짜다가 문득 달비골 생각이 나서 캠핑을 가자고 했다. 종종 전해 듣기로 코로나 이후 아들은 골수 캠핑족이 된 모양이어서 장비 걱정은 없을 듯했다. 더구나 낚시에도 꽤 이력이 붙어서 아들이 낚아 올린 생선회를 맛볼 수도 있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아이들은 흔쾌히 응했고 강아지 동반이 가능한 캠핑장도 미리 예약해 놓았다며 지도를 공유해 주었다. 바다 바로 곁에 있는 캠핑장은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거느린 근사한 곳이었다. 함께 사는 강아지도 눈치를 챘는지 사방으로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한창때를 지난 평일의 캠핑장은 한산하고 깨끗했다. 어디 한 곳 강아지 배설물이 널브러진 곳도 없었다. 깨끗한 샤워장과 잘 갖춰진 주방, 있을 것 다 있는 매점을 보며 캠핑장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편리함이 추억까지 길어 오진 않는다. 가까스로 부모님의 허락을 얻고 동아리 친구들과 달비골로 향하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산짐승 소리만 들리는 골짜기에서 계곡물로 밥을 짓고 서툰 설거지를 하고 밤을 꼬박 새우며 우정을 돈독히 하던 그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두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주로 오토캠핑장을 다녔으므로 캠핑의 불편함이 많지 않았다. 그만큼 아이들은 제대로 된 캠핑의 낭만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잘 갖춰진 장비가 낭만을 대신해 준다고 여길지 모른다.
짐을 부리고 텐트를 치기 바쁘게 아들은 빤히 보이는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겼다. 어릴 적 남해 어디 섬에서 첫 바다낚시의 손맛을 경험한 아들은 그 짜릿함을 온몸에 묻어두고 지낸 모양이었다. 성인이 된 아들은 가끔씩 월척을 낚은 사진을 내게 전송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벼르던 날의 낚시는 성적이 좋지 않은 법이어서 어린 노래미 몇 마리를 낚아 돌려보냈을 뿐이다. 나 대신 장을 봐온 아이들은 소고기를 굽고 와인을 따르고 차돌 된장국을 끓여 저녁 식탁을 차렸다. 자식 키운 보람 같은 게 언뜻 느껴졌다. 저녁상을 물리자 아들은 매점에서 사 온 장작을 준비해 온 화로에 넣고 모닥불을 피웠다. 우리는 깊어가는 여름밤을 ‘불멍’을 하며 보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텐트에서도 당연한 절차라는 듯 모닥불을 피워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백석탄을 낀 신성계곡 물빛이 한꺼번에 핀 봄꽃들로 하여 눈이 부시다. 아직 드문드문 남은 산벚이 사람의 마음을 사무치게 한다. 일 년에 단 한 번 산이 웃는 시기다.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나는 또 목마른 사람처럼 산벚 피는 시기를 기다릴 것이다.
가까운 캠핑장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추억을 쌓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우리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뜨거운 봄을 지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우리 가족이 캠핑을 다녀오며 남긴 탄소발자국은 얼마쯤일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지구 환경에 너무나 무지한 사람이었다.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양껏 고기를 굽고 와인병을 따고 장작을 지폈다.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 가족을 위한 시간을 가지는 건 권할만한 일이다. 해변 혹은 숲에서 온전히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은 삶의 소중한 에너지가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점점 가열화되는 지구를 생각한다면 화석 연료의 사용은 지양해야 옳다. 최소한의 소비가 지구의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길이란 걸 기억한다면 아무리 좋아하는 캠핑이라도 현재의 절반으로 줄여보는 건 어떨까. ‘불멍’을 위한 모닥불을 지피기 전에 한 번 더 지구별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보라고 캠핑을 즐기는 아들에게 전화 한통 넣어야겠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