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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겨울철 불청객 블랙아이스

우정구 논설위원 불청객(不請客)이란 오라고 청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찾아오는 손님을 이르는 말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의 대명사다. 계절마다 불청객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들이 꽤 있다. 봄철에는 황사나 졸음운전, 여름철에는 식중독과 태풍 등이 이것에 해당한다. 가을철에는 밤낮의 기온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생기는 안개가 불청객이 된다. 특히 안개는 산간지방 교통사고의 큰 원인이 되면서 운전자들이 만나기 싫어하는 불청객이다. 겨울철에는 동상이나 블랙아이스 등이 불청객 대접을 받는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봄철에 자주 발생하는 졸음운전은 예상밖에 음주운전보다 더 많은 교통사고 피해를 내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지난 5년동안 졸음운전으로 발생한 교통사고는 무려 1만 건을 넘는다. 사망자도 300여 명에 이르러 음주교통 사고의 2배 수준이라 한다. 올 겨울 들어 가장 강력한 한파가 닥쳤다. 도로 곳곳이 결방 위험에 노출되면서 운전자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블랙아이스란 도로 표면에 얇은 얼음막이 생기는 현상이다. 도로 위에 생긴 살얼음을 이르는 말이다. 얼음 자체는 검지 않으나 블랙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스팔트 색이 얇은 얼음에 투과돼 보이기 때문이다. 블랙아이스는 다리 위, 터널 출입구, 그늘진 도로, 산모퉁이 음지 등에 잘 생기며 운전자들에게는 쉽게 분간이 안돼 대형 교통사고의 원인이 된다. 작년 11월 강원도 원주 국도에서 차량 53대가 연쇄 충돌해 11명이 다친 사고도 블랙아이스가 원인이었다. 겨울철 불청객인 불랙아이스에 대한 운전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망되는 시기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1-09

포항이여, 5차 산업혁명 진원지가 되어라

신광조​​​​​​​ 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대구와 경북이 위대한 이유는, 1870년 전기를 이용한 대량 생산이 본격화된 2차 산업혁명과 1969년 컴퓨터 정보화 및 자동화 생산 시스템이 주도한 3차 산업혁명을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수용해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으로 이뤄지는 산업혁명으로, ‘초연결·초지능·초융합’이 핵심 키워드다. 이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로봇 기술, 드론, 자율주행차, 가상현실(VR) 등이 주도하는 산업혁명으로, 2016년 6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의장이었던 클라우스 슈밥은 “이전의 1, 2, 3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적 환경을 혁명적으로 바꾼 것처럼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 질서를 새롭게 만드는 동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4차 산업혁명 원조는 독일이다. 그러나 미국이 독일의 ‘인더스티리 4.0’을 가져다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세계 경제포럼의 대대적인 행사와 저서를 통해 원조 행세를 해왔다. 모든 산업혁명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산업주도권을 미국에 뺏긴 EU는 “보다 따뜻하고 지속가능하며 인간과 자연을 위한 산업혁명 철학과 관점”에서 2020년부터 ‘5차 산업혁명’을 본격 제기하고 있다. 논의의 초점은 4차 산업혁명 빛에 가려진 우울한 회색빛 그림자를 ‘그린(Green)’의 생명력으로 치유하여, 우리 모두와 지구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5차 산업혁명 논의는 이제 시작단계다. 지구환경보호를 위해 지속가능성이 고려돼야 하고, 생산프로세스에 효율성 극대화를 위한 새로운 기술개발보다는 인간행복 관심에 중점을 둬야 하며, 산업생산에서 높은 수준의 견고한 사랑과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프라를 제공해야 함을 강조한다. 지속가능성·인간 중심·탄력성을 3대 핵심요소로 한다. 유럽위원회가 밝힌 인더스트리 5.0의 6대 기술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별화된 인간·기계의 상호작용 △생물에서 영감을 얻은 기술 및 스마트 재료 △디지털 트윈 및 시뮬레이션 △데이터 전송, 저장 및 분석기술 △인공지능 △에너지 효율성, 재생에너지 및 저장을 위한 기술이다. 여기에서 한국에서 발전가능성이 높고 치고 나갈 수 있는 분야는 ‘생물에서 영감을 얻은 기술(청색기술)’이다. 우리 앞에 4차 산업혁명이 달려가고 있고, ESG혁명이 압박하고 있고, 5차 산업혁명이 추격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경제포럼이나 다른 나라가 5차 산업혁명을 추진할 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EU에서 5차 산업혁명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고, 국가는 자국이해관계 따지며 저울질하고 있지만 세계 지성들은 인류문명의 올곧은 전환을 위한 지름길로 인정하고 있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 매가 지상의 먹이를 발견하면 전속력으로 수직낙하 하듯 돌진해야 한다. 아무리 보아도 포항이 적격·적소다. 포스코와 포항공대 때문이다. 국내에는 얼마 전 ‘인더스트리 5.0’책자를 발간한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 등 10여 명의 전문가가 있다. 포항을 ‘5차 산업혁명 특구’로 선포하자. ‘청색기술 연구소’ 설립 등을 통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의 돌파구와 활력을 찾아주자. 이제 우리도 선진국의 산업 기준을 따라가는 국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준을 창조하는 국가로 변신해야 할 때가 왔다.

2025-01-09

을사년에 바라는 것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새해는 돋았으나 예년과 같이 밝고 희망찬 아침이 아니다. 지난 연말 일어났던 제주항공 참사가 국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전국에 설치된 분향소에 밀려와서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는 연말연시에 정치계의 계엄 잡음 또한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탓이다. 대통령 체포 명령이 5시간 대치 속에서도 성사되지 못하고 재차 시도를 계속하는 체포-사수의 공방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갉아내고 있으니 ‘새해답지 않은 새해’를 맞고 있는 심정이다. 이렇듯 나라가 두 쪽으로 나누어진 듯하니, 날씨도 두 쪽인 듯…. 소한(小寒) 집에 대한(大寒)이 놀러 왔는지 서해안엔 강풍과 함께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며 눈발이 날리고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는데 이곳 동해안에는 건조주의보가 내려져 산불을 조심하라니 작은 나라가 이렇게 날씨마저도 갈라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안쓰럽다. 올해는 ‘푸른 뱀’의 해, 을사년이다. 천간(天干) 을(乙)과 지지(地支) 사(巳)는 각각 나무와 불의 기운을 상징하며 생동감과 도전을 의미한다. 또 뱀은 통찰력과 직관력을 가진 겨울잠 자는 동물이라 을사년은 ‘지혜로운 변혁 새로운 시작’으로 해석되니 그 잠에서 깨어나 나라를 바로 일으켜주었으면 한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앰블럼에는 지팡이를 감고 있는 뱀이 그려져 있는데 고대 그리스인은 ‘치유의 신’, 불교계에서는 비와 땅을 관장하는 ‘풍요의 신’으로 여기고 있으니 올해에는 푸른 뱀의 기운을 받아 사회적 육체적 모든 병이 없어졌으면 한다. 마침 올겨울부터 호흡기 질환이 급격히 늘고 있어 가뜩이나 의료대란으로 인해 패닉 상태가 되어있는 전국 병원들이 포화상태를 염려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을사년의 기운으로 사라지길 바란다. 지난 6일 포항상공회의소는 신년인사회를 가졌다. 국내 사태로 인한 민생경제의 내리막과 트럼프 차기 정부가 벼르고 있는 보호무역주의로 인한 경제 불확실성으로 부의 양극화와 지방소멸 위기에 따른 저성장 진입을 우려하는 얘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올 10월 말 경주에서 개최되는 APEC회의는 태평양 연안 21개국에서 6천여 명의 경제인들이 참석하는 국제행사이니만큼 잘 계획하고 추진하여 세계로의 날개를 펴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려는 꿈을 키우자. 또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국회의 예산 삭감으로 어려워진 듯하지만 우리 경북의 힘으로도 큰 고래가 물을 뿜어 올리듯 동해안 해저에서 석유가 솟아오르게 할 수 없을까? 어디 그뿐이랴. 1월1일부터 개통한 포항∼속초간 166.3㎞ 동해중부선 운행으로 동해안이 새로운 활력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푼다. 한반도 호랑이의 척추 위를 달리는 iTX 철마가 대구, 부산에서 업고 온 기운으로 울진 삼척까지 달려 새로운 동해안 시대를 열 것이며, 아울러 연말에 포항-영덕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포항은 동해의 중심으로 일어설 것으로 기대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포항시는 사자성어 ‘총화전진(總和前進)’을, 시의회는 ‘운외창천(雲外蒼天)’을 내걸었으니, 근래 철강산업의 부진으로 조금 위축되었을 산업역량도 회복시켜 보자.

2025-01-09

노인과 음식

노병철 수필가 장염과 식중독은 비슷하다. 설사와 복통, 구토와 발열이다. 노로바이러스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건 식중독이 아니라 장염을 말한다고 알면 된다. 식중독은 오염된 음식에 의해 발생하기에 살모넬라, 대장균 같은 독한 녀석들 이름이 나온다. 장염이나 식중독 구분은 병원에 맡겨놓으면 되고 우선 중요한 것은 상한 음식이나 비위생적인 음식을 아깝다고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노인에겐 절대적인 말이다. 젊을 땐 어느 정도의 균을 퇴치할 능력이 몸에 존재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면역력이 줄어 조금만 이상해도 탈이 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식중독균은 끓여도 죽지 않는다. 끓였다고 안심하고 먹다간 큰일 난다. 옛날엔 다 먹었는데 괜찮다고 우기지 말고 제발 젊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하면 된다. “한겨울엔 괜찮다. 옛날엔 다 먹었다.” 이런 말씀을 하던 어머니가 식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만큼 오래된 음식은 먹지 말라고 했건만 노친네 고집이 장난이 아니다. 버리기엔 아깝다고 먹은 음식 때문에 병원비만 수천 배 더 들어갔다. 돈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온 식구들이 병간호하랴 병문안하랴 난리였다. 자식들이 서울서 내려오고 부산서 올라오고. “엄마가 자식들이 보고 싶어 상한 음식을 억지로 먹었나 보다.”라고 동생들이 위안을 주지만 모시고 있는 우리 부부는 좌불안석이다. 어떻게 모셨으면 상한 음식을 엄마에게 드렸냐고 야단을 치는 것 같다. 특히 엄마를 모시고 있는 장남인 나는 집사람에게 더 죄인이 되고 만다. 집에서 엄마와의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제일 큰 문제가 위생 문제이다. 걸레 빨다가 음식 만지고 하는 통에 손녀들이 기겁한다. 청소도 하지 말고 음식도 하지 말라고 애원해도 들은 체 만 체이다. 냄비 태워 먹은 것이 열댓 개가 넘고 집안이 메케한 탄 냄새가 가실 날이 없을 정도다. 어머니 손맛은 자식들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주면 주는 대로 먹었던 시절. 즉 아주 익숙한 맛이란 뜻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음식 솜씨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나 역시 집사람 음식 솜씨를 잘 모른다. 신혼 때는 정말 이상한 음식을 먹으라고 들이민다고 생각할 정도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엄마 손맛에 익숙한 나로선 엄마한테 가서 좀 배워오라고 할 정도였다. 지금 우리 애들은 지네 엄마 음식 솜씨를 환상적이라 극찬을 하지만, 거의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나로선 어쩌다 먹는 집밥을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진짜 그정도로 맛있다면 흑백요리사에 나갔을 것이다. 결론은 우리가 엄마의 손맛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익숙한 맛이란 이야기이지 결코 맛이 진짜 있거나, 위생과 결부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상위에 놓인 된장찌개에 온 식구들이 입에 빤 숟가락을 넣던 시절은 지났다. 이젠 앞접시가 일반화된 시대이다. ‘꼰대’. 권위적인 나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은 항상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노인이라고 영국 BBC방송은 꼰대를 오늘의 단어로 소개하면서 풀이한 내용이다. 노인들도 이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시대정신에 맞게 사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2025-01-09

관저에 갇힌 대통령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관저(官邸)는 고위직 관리가 살 수 있도록 정부에서 관리해주는 집을 의미한다. 이전까진 청와대가 최고 권력자의 관저 역할을 했으나,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의 결정으로 청와대를 나와 서울시 용산구에 따로 관저를 마련해 살았다. 지난해 12월 3일 밤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된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와 집행 무산, 연이은 영장 재발부 등으로 용산 대통령 관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관저 지척에선 탄핵 찬성, 탄핵 반대 시위대의 목소리도 뜨겁다. 첫 번째 체포영장 집행에 실패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두 번 실패는 없을 것’이란 태도로 재발부 된 영장 집행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대비해 윤 대통령 관저 인근엔 가시 돋친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입구엔 대형 버스를 이용한 ‘차벽’이 들어섰다. 누군가가 들어가지 못하는 건물이라면, 안에 있는 사람 역시 갇힌 격이 된다. 외신은 앞 다퉈 이 소식을 자기들 나라로 타전 중이다. 국회에서 탄핵된 정부의 수장이 관저에 갇힌 작금의 우리나라 상황. 국민들은 답답하고 남우세스럽다. ‘어진 정치’의 중요성을 말했던 공자(孔子)는 “부끄러울 게 없다면 숨길 것도 없다”고 설파했다. 만약 공자가 살아있어 관저에 갇힌, 또는 숨어버린 한국 대통령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퇴근 후 보통의 주부들처럼 동네 슈퍼마켓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고르던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경호원을 따돌린 채 직접 오토바이를 몰아 연인의 집을 찾아간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의 ‘활짝 열린’ 태도와 당당한 행동이 부러워지는 요즘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1-08

어둠에서 희망을

장규열 고문 시국이 캄캄하다. 밤이 깊어 앞이 안 보인다. 대통령이 직무정지된 상황에서 나라가 길을 잃었다. 할 일은 태산인데 국가가 표류하는 중이다. 국민의 불안과 좌절이 커져가는 이때, 어디에서 길을 찾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 터인지 혼돈스럽다. 새해를 맞이하며 여느 때 같았으면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야 할 시기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희망은 멀리만 느껴지고 불확실과 두려움이 모두를 짓누르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위기의 순간은 새 도약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 나아갈 방향을 재정비하는 일이 아닐까. 누구보다 정치와 언론이 태도와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국민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념과 당략에 얽매여 갈등과 반목만 반복할 때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회복시키고 안정된 일상을 찾도록 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의견과 가치를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위기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국민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실수에서 비롯하였다. 실수를 인정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뿐 아니라 캐나다와 미국,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지도자의 성향이 문제로 나타난 일이 바람직하지는 않아도 없는 일은 아니다. 과거를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짚어보며,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냉철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나라의 경쟁력을 지키고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현상만 유지해서는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가 없다. 경제, 교육, 환경, 외교,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국민이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리더십을 새롭게 세워야 하고 모든 정책이 국민 일상의 질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희망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이자 원동력이다. 새해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다.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사욕과 당리당략을 버리고 국민과 함께하는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최근 작고한 지미카터(Jimmy Carter) 전 미국대통령이‘우리는 그냥 마구 섞인 잡탕밥(melting pot)이 아니라 아름다운 모자이크(beautiful masaic)를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 다른 생각, 다른 희망, 다른 꿈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사회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더 나은 미래는 서로 다른 성향을 인정하고 함께 공존하는 신뢰와 공감의 공동체를 세울 때 비로소 가능하다. 밤이 깊어도 새벽은 온다. 짙은 밤하늘에 별빛이 두드러지듯, 어둠 가운데 희망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어지러운 혼란과 복잡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희망과 기대로 넘치는 내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이 역사 가운데 증명했듯이, 오늘의 어둠이 내일의 광채로 살아 나기를 기대한다. 역시 희망이 화두다. 어둠에서 기어이 희망을 들어올려야 한다.

2025-01-08

장갑 한 짝

윤명희 수필가 오늘은 버스타고 출근한다. 어젯밤, 퇴근 후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즐긴 탓이다. 이미 출근시간은 늦었고, 버스는 한산하다. 내 차로 십오 분이면 도착할 사무실이 삼십 분이 지나도 아직 한참 더 가야 할 것 같다. 버스가 중앙시장에 정차했다. 시장의 아침은 번잡한데 버스에 오르는 이가 없다. 바쁜 내 마음과는 달리 운전기사는 문을 열어둔 채 정류장을 내다보고 있다. 검정비닐봉지를 든 백발의 할머니가 힘겹게 버스에 오른다. 한 발 오르고 다시 또 다른 발을 올린다. 걷는 걸음마다 바라보는 내가 숨이 찬다. “잠시만 잠시만요, 기사양반 내가 앉거든 출발 하세이” 손잡이를 꽉 움켜잡은 할머니가 당부한다. 계단에 발을 올리면서부터 운전석 바로 뒤의 의자까지 한 발자국씩 내 딛는 걸음걸이가 빙판길을 걷는 것 같다. 서너 발자국이면 닿을 거리가 멀기만 하다. 겨우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손에 든 검정비닐봉지를 발치에 놓는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할머니가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란 운전기사가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손가방이 없어졌다며 빈손을 들어 허둥거렸다. 운전기사가 황급히 핸드브레이크를 당겼다. 그는 할머니에게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말을 연거푸 내뱉으며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고, 정류장 의자 밑까지 가방을 찾아보는 그를 내다보았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있었다며 검정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헤쳐 보았다. 작은 손가방을 발견한 그녀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했다. 나는 못 본 척 눈을 반쯤 감고 있는데, 내 뒷좌석에 앉은 남자가 쥐어박을 듯이 혀를 찼다. 할머니가 차에 오를 때부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연신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혀를 찼던 남자다. 마지막 ‘에잉!’까지 따라붙는 남자의 말투에 속이 뒤틀렸지만, 어떤 사람인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 할머니의 모습이 나의 내일인 것 같은데 혀까지 찰 일인가. 얼마 전, 친구와 시골길을 걸었다. 추수를 끝낸 들판은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햇볕이 모인 논둑 밑에 한 무더기의 들국화가 보였다. 소담스러운 모습을 지나칠 수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내려보다가, 서리라도 내리면 시들어버릴 들국화에 욕심이 생겼다. 치맛자락을 모아 움켜쥐고 조심스레 내려가려 하자, 친구가 나잇값을 하라고 했다. 괜히 엎어지는 불상사를 만들지 말라는 말에 나는 바지만 입었다면 폴짝 뛰어내릴 수도 있다고 장담했다. 큼지막한 돌을 밟고 내려가면 될 것 같아 살짝 왼발을 내렸다. 몸의 무게가 오른 다리에 실리자 무릎이 시큰거렸다. 삼십 몇 년 전에 다쳤던 무릎이 요즘 말썽이다. 불편한 발을 먼저 내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오른 발끝이 돌에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논바닥에 가오리 엎어놓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의 경로는 기억에 없다. 왜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천천히 가고 있었다. 논바닥에 뺨을 붙인 채 일어서지를 못했다. 친구의 부축에 겨우 일어난 나는 비틀어진 안경보다 얼얼한 오른쪽 광대뼈에 먼저 손이 갔다. 얼굴에 상처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긁힌 무릎에 붙은 흙을 쓸어내리며 논둑을 쳐다보았다. 저 높이에 내가? 허방을 짚은 것도 아닌데? 치맛자락에 도깨비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친구는 가시를 떼어내며 걱정스레 살폈다. 바위를 이리 저리 뛰어넘으며 산을 오르던 순발력은 이미 나를 떠나고 없었다. 몸은 세월의 눈금만큼 정확하게 가고 있는데, 내 마음은 그 몸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젠 우리 나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유리조각이 되어 가슴에 빗금을 그은 날이었다. 버스가 서자, 혀를 차던 남자가 일어섰다. 나는 눈을 지그시 뜨고 그 남자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정수리가 휑한 그도 한발 내리고 또 한 발 옮긴다. 창밖을 내다보니 굽은 등이 허정거리며 가고 있다. 내 눈길이 따라간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하자, 갑자기 그가 돌아서서 허우적거리며 뛰어왔다. 장갑 한 짝을 든 손을 휘휘 저으며 ‘장갑, 장갑’이라고 외쳤다. 뒤돌아보니 그가 앉았던 자리에 한 짝이 놓여있다. 던져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버스가 천천히 달렸다.

2025-01-08

몽주, 두루두루 넓은 꿈

나는 불후(不朽)를 생각하지 않았다 풀잎 끝 이슬이 곧 햇살에 추락해도 맑고 고운 뜻은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거친 바람과 빗속에서도 사람의 길을 지키고자 했다 약발 다한 왕조의 귀퉁이에서 버리면 산다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징검다리가 되어 나 하나의 희생으로 명분이라도 생긴다면 참 즐거운 일, 운제산 기상이 훗날까지 이어지고 형산강 물길이 동해에 퍼지듯 사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구나 혹은 그럴 수도 있구나 반추하면서 나, 몽주, 꿈을 두루두루 펼쳐 세상이 아름답기를, 그 누구도 불후를 꿈꿀 수 없다 그래서 불후가 된다. 몽주 어른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정치는 잡놈들이 하는 짓이다. 그런데 몽주를 영천에서도 팔고 용인에서도 판다. 세상살이가 그런 것이니 생각하면, 더욱 아득하다. 두루두루 넓은 꿈을 펼치기에는 세상은 협소한 비탈길이다. 버티고 살아야 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1-08

인체를 교정하는 상체 운동법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현대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적인 자세 변화는 특히 상체에 심각한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무거운 머리가 척추 꼭대기 위에 위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로, 중력을 가장 적게 받으려면 척추 중앙에 머리가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앞으로 빼서 일을 하며, 이는 육체 노동자는 물론 사무직과 학생들에게도 해당된다. 목이 앞으로 빠진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자연스럽게 어깨가 앞으로 굽어지고 등도 굽어진다. 흔히 말하는 일자목과 둥근 어깨, 굽은 등이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운동으로도 편향된 근육만 발달해 상체가 굽을 수 있다. 등이 굽으면 자연스럽게 어깨가 앞으로 쏠리게 되는데, 이런 자세로 어깨를 많이 쓰면 어깨 쪽에서 충돌이 일어나 회전근개 근육이 파열되거나 석회가 생길 수 있다. 어깨 문제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온 거북목과 일자목은 디스크의 압력을 증가시키고, 편향되게 경추에 힘을 가중시켜 신경 뿌리가 나오는 구멍이 좁아지고 염증이 생겨 팔이 저리게 된다. 이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뼈가 닳아 영구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자세를 바로잡고 치료를 해야 한다. 등에는 오장육부가 모두 붙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자율신경이 흉추에서 나와 각 오장육부로 연결되어 있어 등이 굽은 사람들은 이 오장육부의 순환에 문제가 생긴다. 소화기 문제가 가장 흔하며, 심하면 불면이나 화병 같은 정신 질환까지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된다. 따라서 등과 어깨를 펴고 목을 바로 세우는 운동을 하는 것은 정신과 오장육부까지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운동은 간단하다. 뒤통수에 깍지를 낀 후 양 팔꿈치를 쫙 펴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어깨가 벌어지고 펼쳐진다. 이때 등도 바로 세우면서 가슴을 펼쳐주면 등과 어깨 모두 활짝 열리게 된다. 한 번 더 가슴을 살짝 위로 올려주는 동작을 취해주면 더욱더 가슴이 열리고 등과 어깨가 펴진다. 단, 깍지를 당겨 목을 앞으로 당기는 것은 일자목을 심화시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목은 턱을 살짝 당겨 앞으로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간 날 때마다 10회에서 20회 정도 반복해 준다. 그리고 벽 짚고 팔굽혀펴기를 해야 한다. 남성들은 정자세로 팔굽혀펴기를 해도 되지만, 근력이 부족한 경우에는 치료가 잘 되지 않고 치료 기간이 길어진다. 근력이 충분한 사람과 부족한 사람은 질환이 있을 때 치료 효과에 차이가 있으므로, 상체의 근력을 키워놓는 것이 중요하다. 벽에 양팔을 어깨너비만큼 벌려 손을 짚은 후 팔굽혀펴기를 하면 된다. 이때 턱은 살짝 당겨 목이 앞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힘이 없는 사람은 벽에 가깝게 붙어서 5회에서 10회 정도 한 후 잠시 쉬고 다시 반복하면 된다. 힘이 붙으면 벽에서 조금씩 떨어져서 하면 된다. 근력을 붙이면서 치료를 하면 치료 효과가 눈에 띄게 좋아진다. 아프지 않더라도 상체의 자세를 바로잡고 약간의 근력을 키워주면 정신과 오장육부 건강이 좋아지므로, 시간 날 때마다 꾸준히 운동과 훈련을 하는 것이 좋다.

2025-01-08

일상의 고마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아침 7시 30분.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인터넷 강의를 듣느라 새벽에야 눈을 붙였다. 몸이 찌뿌둥해 좀더 잘까 하다가 일단 일어난다. 두유라도 만들어놓고 눈을 더 붙여볼 수도 있다. 흰콩과 검은콩을 섞어 둔 통에서 계량컵 3개 분량을 담아 살짝 물에 씻어 두유기에 넣는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을 동안에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다. 전원을 켜 두유를 선택하여 누른다. 32분이 지나면 두유가 완성될 것이다. 그동안 다시 침대로 가 몸을 누일까. 생각해 보니 찐달걀이 없다. 냉장고에서 달걀 6개를 꺼내 물에 씻어 달걀찜기에 올려 전원을 켠다. 13분 뒤면 다 익을 것이다. 냉동실에서 통밀빵 한 조각을 꺼내 에어프라이어에 넣는다. 며칠전 만들어 둔 양배추 당근라페와 그릭요거트도 꺼내 식탁 위에 올린다. 그 사이 몸은 그런 대로 괜찮아진다. 30분 뒤 남편을 부른다. 강아지도 남편의 무릎 위에 앞다리를 얹는다. 오후 2시 30분. 범어초등학교. 돌봄교실 인터폰을 누르고 잠시 기다린다. 아이 둘을 데리고 나오신 선생님께 손을 가지런히 배꼽 위에 얹고 고개를 90도로 숙여 공수인사를 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나도 선생님께 답례를 하고는 달려오는 아이들을 맞는다. 팔을 크게 벌리고 있으면 손자가 먼저 폭 안긴다. 땀냄새가 짙다. 농구했구나. 응 할머니 오늘은 우리 편이 이겼어. 나도 한 골 넣었어. 우와 잘했네. 그 사이 다가온 손녀의 손엔 과학시간에 만든 뭔가가 들려있다. 할머니 오늘은 냄새 없애는 거 만들었어. 발에 뿌리면 냄새가 없어져. 향기도 나. 아빠에게 주려고 해. 할머니도 뿌려 줄까? 손에도 닿아도 괜찮대. 글리세린을 넣었어. 근데 만들 때 좀 쏟았어. 나만 아니고 다른 애들도 다 조금씩 쏟아서 선생님이 닦아주셨어. 아이들 등의 가방을 빼 든다. 꽤나 무겁다. 이 깊은 겨울까지도 몇 개씩 달려있던 플라타너스나뭇잎이 떨어져 인도에 나뒹군다. 아이들은 제 발보다 더 큰 나뭇잎을 찾아 밟는다. 워석버석 소리를 내면서 바스러진다. 그것도 놀이다. 내가 밟은 나뭇잎이 더 커. 아니야, 내 나뭇잎이 더 크고 소리도 컸어.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을씨년스럽다. 내 생각을 읽었나 손자가 한 마디 한다. 할머니 밤에 나오면 참 아름다워. 우리집에 있는 것보다 크고 더 많이 반짝거리거든. 밤 10시. 또 울리는 알람. 붓글씨 쓰는 시간. 한 장을 다 쓰면 등줄기에 땀이 느껴진다. 몸쓰는 일보다 더 힘든가 보다. 이 루틴을 올해는 지키려 애쓴다. 토요일 아침 10시. 스포츠센터 수영장. 손녀와 매주 같이 다닌 지 석 달째다. 내가 수영 다녀 보니 부자나 모녀가 같이 오는 게 좋아 보여 며느리에게 권유했다. 바쁜 며느리 대신 내가 손녀를 데리고 다닌다. 대충 씻겨 수영복으로 갈아입히면 제 먼저 들어간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레인에서 수영하면서 힐끔힐끔 손녀를 찾아본다. 발차기도 하고 머리를 물속에 넣었다 뺐다 하는 모습이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다. 우리가 수영장에 있는 시간에 남편은 손자를 데리고 축구교실에 가 있다. 힘들지 않냐고 누군가 묻는데 천만의 말씀. 이 즐거움과 고마움을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 한다. 애들이 더 크기 전에.

2025-01-08

비트코인과 민주주의

최진승 가상화폐 전문가 발디딜 틈 없는 인파 속에서도 시민들은 질서를 잃지 않았다. 마주 오는 이들을 향해 격려의 인사를 건넸고, 통행이 막히는 곳에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천천히”를 외쳤다. 유모차를 끌고 온 이 옆에서는 “유모차”를 외치며 함께 길을 터주기도 했다. 거대한 용광로 같은 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은 스스로 질서있게 입장하고 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한겨울 눈발 속에서도 행렬은 멈출 기미가 없다. 비상계엄 여파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염원을 멈춰 세우진 못했다. 지난 한 달 간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은 아득히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비상계엄이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이를 극복해 가는 시민들의 모습 역시 극적이여서 그렇다. 마치 우리 국민 모두가 한순간에 이세계로 소환되어 허무맹랑한 마법을 풀어가는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우린 동료를 얻기도 하고 때론 적들과 마주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한다. 우리 국민들이 또 한 번 레벨업을 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지금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최근 우리의 정치 상황은 비트코인의 역사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강렬한 내러티브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비트코인은 시가총액 기준 전세계 자산 순위 7위에 올랐다. 은의 시가총액(9위)을 넘어선 수준이다. 1위인 금의 시가총액에는 여전히 못미치지만 비트코인 탄생 15년 만에 이룬 성과 치고는 괄목할 만한 것이다. 짧은 역사 속에서 비트코인 역시 갈등과 경쟁을 반복해 왔다. 비트코인이 특별한 이유는 은행과 같은 중앙기관에 의해 관리되는 것이 아닌 네트워크 참여자들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이다. 비트코인은 거래내역을 담은 블록들이 네트워크 상에서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참여자들은 경쟁적으로 블록을 생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대가로 비트코인을 얻는다. 이러한 구조는 특정 운영 주체가 없기 때문에 분산원장이라 불린다. 분산원장이라고 해서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트워크 참여자들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정해진 규칙(Protocol)을 따라야 한다. 이 규칙을 둘러싼 갈등과 경쟁도 있어 왔다. 규칙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참여자들의 동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그룹들이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해 경쟁과 분열의 과정을 거쳤다. 민의(民意)를 반영하기 위해 정당 간 경쟁하는 민주주의 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트코인에서 경쟁적으로 블록을 생성하고 연결할 때 작동하는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가장 긴 체인(Longest chain)을 유효한 것으로 채택하는 규칙이다. 이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 가장 긴 체인을 통해 표현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장 긴 체인은 가장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쟁적 에너지 소비야말로 비트코인 네트워크에서 참여자들의 ‘선의’를 가리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를 ‘작업증명’(Proof of Work)이라 부른다. 민주주의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각자 다를 것이다. 다만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비트코인의 작동 원리는 토론과 경쟁을 통해 민의를 반영하는 민주주의 원리와 상통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비트코인은 프로그램 된 규칙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비트코인에 없고 민주주의에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가장 긴 체인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일 것이다. -(현)두코미디어 전략기획 이사 -전 씨엘모빌리티 전략기획부 책임

2025-01-07

국정 혼란… ‘경주APEC’ 준비는 잘 되나

심충택 논설위원 정치 불안으로 국가 신인도와 위상이 끝없이 추락해 올가을 경주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주 SNS를 통해 APEC 회원국에 ‘여야정 공동사절단’과 최태원 회장(CEO서밋의장)을 파견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정치적 혼란에 대한 각국의 의구심을 불식시키자는 취지다. 정부는 관례대로 오는 5~6월 중 APEC 각국 정상과 기업인을 대상으로 초청장을 보낼 예정이다. 초청장은 한국 대통령 명의로 발송되지만, 현재로서는 누구 이름으로 보내게 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을 당시에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정부가 회의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연말 국무총리와 경제 6단체 대표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도 한 대행은 “의장국 수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의장국 활동은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역내 다양한 협력 의제를 주도하는 역량을 갖췄음을 보여주는 국격 성장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 연말부터는 한 대행의 직무가 정지되고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외교부가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우리나라가 의장국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지만, 1인 3역(대통령, 국무총리, 장관)을 해야 하는 최 대행이 경주 APEC회의에 얼마나 신경을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경주 APEC 회의는 이미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다. APEC 고위관리회의(SOM)를 준비하는 비공식회의가 지난달 서울에서 21개 회원국 관계자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이미 열렸다. 정부는 앞으로 2000명 이상이 참석하는 3회의 고위관리회의를 비롯해 분야별 장관회의 10여 회, 산하 4개 위원회 및 40여 개 실무작업반 회의를 가진다. APEC 고위관리회의는 21개국 정상들이 논의할 의제를 결정하는 기구다. 경북도는 다음달 24일부터 3월 9일까지 경주에서 열리는 제1차 고위관리회의를 앞두고 어제(7일) 입출국과 수송, 관광 지원을 맡을 자원봉사자 신청을 마감한 상태다. 경북도는 APEC 회원국에서 유학하는 학생들도 일정 인원 선발해, 한국과 회원국 간 가교역할을 맡길 계획이다. 경주 APEC 회의의 성공 여부는 주요국 정상들이 얼마나 참석하느냐에 달렸다. 오는 20일 취임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참석 여부가 최우선 관심사다. 트럼프 당선인의 경우, 대통령 재임당시 세 차례의 APEC 정상회의가 개최됐는데, 이 중 부통령을 참석시킨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 차례 참석했었다. 시진핑 주석은 최근 10년간 개최된 APEC 정상회의에 모두 참석했다. 중국은 차년도 APEC 의장국이기도 해 참석 가능성이 크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때문에 지난 2022년부터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 이철우 지사가 제안한 것처럼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하루빨리 국정혼란을 수습해서, 경주APEC 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총력을 쏟아주길 바란다.

2025-01-07

CES 2025를 주목하는 이유

우정구 논설위원 전자업계 트렌드의 바로미터라 불리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전시회 CES가 어제(7일) 개막됐다. 전세계 160개국 4500여 개 기업들이 참가하는 인류 최대의 신기술 경연장이다. 올해 CES의 주제는 몰입(Dive In)이며 핵심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다. 파나소닉, 지멘스, 마그나 등 글로벌 기업들이 총망라한 가운데 국내서는 삼성전자, LG, SK하이닉스 등 대·중소기업 등이 대거 참여했다. 최고의 신기술이 경합을 벌이는 이곳은 앞으로 인류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모으고 있다. 올해 CES가 선정한 주제 ‘몰입’은 인공지능을 통해 연결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CES에서 선보인 테크놀로지가 미래의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또 그러한 기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지를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해는 AI 기술이 첨가된 로보틱스, 모빌리티, 스마트홈, 디지털헬스 등이 인류의 실생활 전반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지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AI 시장의 최대 수혜자로 꼽히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의 기조연설은 이러한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번 전시회에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기업들이 참가했다. 또 CES 측이 주는 기술분야 혁신상에서도 가장 많은 수상을 기록했다. 전체 수상기술 294개 중 44%인 129개를 수상한 나라다. 신기술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자랑스런 한국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는 매년 다른 기업과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만나 신기술을 놓고 인류의 미래를 고민한다. 이러한 점에서‘인류 최고의 기술경연장’이라는 별칭이 늘 따라 붙는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1-07

파행의 소용돌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다사다난이 무색할 정도로 연말연시의 난국이 연일 소용돌이 치고 있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연말에 예기치 못한 비행기 사고까지 겹쳐서 온 나라가 침통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묵은 해를 정리하고 보내야 하는 차분함도, 새해를 맞이하는 기대와 설렘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극한대치와 긴장이 불안과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파행의 터널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정국과 민생이 여지없이 요동치고 있어서 안타깝고 암울하기만 하다. 갈수록 태산(去益泰山)이라더니, 정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고 점입가경이 따로 없을 정도다. 평지풍파도 유분수지,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파탄일로에 절체절명의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는가?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기후변화, 경기침체와 북한의 위협 등 모든 것이 녹록찮고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 대화와 타협으로 협치와 상생을 도모해도 모자랄 판국에 걷잡을 수 없는 내분과 내홍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 참으로 개탄스럽고 알다가도 모를 불가해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토록 강조하던 공정과 상식은 무엇이며 법치와 평등은 어디로 갔는지, 헌정사상 유례가 없고 세계적으로도 극히 이례적인 일 앞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오죽했으면 외신에서조차 한국의 정세가 드라마보다 더한 이변과 초조감이고, 모종의 음모론(?) 같은 걸 연상시키는 기상천외한 현실이라고 꼬집었을까? 이런저런 복잡다단한 세상사 잠시 접어두고, 난마 같은 탄핵정국에 이골이 난 눈과 귀를 씻기 위해 산행에 나섰다. 산은 늘 그 자리에서 듬직한 모습으로 반기지만 자주 찾을 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마침 그날은 포항의 모산악회 새해 첫 산행으로 시산제를 겸한 산행이고 안동의 숨은 보석 같은 산이라 선뜻 동행하게 됐다. 이육사의 고향인 원촌리와 이육사문학관이 손에 잡힐 듯하고 안동댐을 내려다보며 우뚝 솟아있는 왕모산(王母山)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왔을 때 왕의 어머니가 이 산에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행 초입에 자리한 월란정사(月瀾精舍)는 퇴계선생이 제자들과 즐겨 찾아 강학하고 시문을 읊었던 곳으로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어우러져 안동시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음에도 퇴락한 곳이 많아 관리가 잘 안돼 보였다. 인생 아리랑 열두 고개마냥 야트막한 봉우리 12개를 넘어야만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 왕모산은 삶의 축소판 같은 인내와 고난, 고비와 안도의 여유를 안겨주며 어머니의 품처럼 산객을 맞이하는 듯했다. 정상에서 펼쳐지는 일망무제 조망은, 마치 푸른 뱀같이 구불구불한 강줄기가 희끗희끗 얼어붙어 안동호로 이어지는 물굽이 그 위로는 올망졸망 능선들이 겹겹이 에워싸며 추운 겨울을 푸르게 지키는 듯하고, 맨 뒤로는 안동의 최고봉 학가산의 위용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 산행내내 난세의 이 시국이 왕모산의 주변 형세와 낙동강의 물돌이와 비슷하게 여겨짐은 나만의 억측일까? 꽁꽁 얼어붙은 파행의 강바닥 민생이며 이육사의 ‘절정’ 시판이 설치된 칼선대의 일침, 너럭바위와 군데군데 고사목이 뼈저리게 무언의 항변을 하는 듯했다.

2025-01-07

작은 꿈과 새로움을 여는 자기경영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새해는 늘 새로운 다짐으로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거창한 목표를 세웠다가 몇 주 지나지 않아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의지 부족 때문이 아니라 목표가 지나치게 크고 모호해서 지속 가능한 행동으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경영의 핵심은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작지만 꾸준한 변화를 통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작심 3일이 안 되게 하는 것이다. 작은 변화는 부담이 적고 실천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매일 1시간 운동하기’라는 목표보다 ‘하루에 10분 스트레칭하기’로 시작하면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미니멀 액션(Minimal Action)’이라고 부른다. 작은 변화가 습관으로 자리 잡으면 더 큰 변화를 위한 기반이 된다. 10분의 작은 변화가 하루하루 쌓이면 한 달, 1년 뒤에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를 ‘복리 효과’라고도 표현 할 수 있다. 예컨대, 하루 1%씩 나아진다면 총 증가 배율[(1+0.01)*365]에 따라 1년 뒤에는 약 37배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작고 꾸준한 행동은 결국 큰 성과로 이어진다. 자기경영을 잘 하기 위한 실질적인 실행 방안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자기경영의 실천 순서로서는 첫째, 꿈을 그리는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미래의 바라는 모습이나 하고 싶은 것을 꿈으로 그리는 것이다. 가령, ‘건강한 몸을 만들어 행복한 삶 영위하기’라고 그려보는 것이다. 둘째, 명확한 목표 설정이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담배 끊기, 하루 30분 걷기’ 등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셋째, 계획과 습관 쌓기다. 하루 일과를 목표 달성을 위한 시간으로 계획하고 새로운 행동을 기존 생활 습관에 연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 일정을 일하기, 퇴근 후 철길 30분 걷기, 악기 1시간 배우기, 하루 정리 등 하는 일과다. 필자는 새해가 되면 매년 정하는 목표가 있다. 기업 혁신 대학원 교재, 기업에 도움이 되는 혁신 바이블 등 책 두 권 발간하기인데, 수 년 째 실행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주어진 하루 시간과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한 바람과 의지만의 꿈 때문 아닐까. 2025년 을사년(乙巳年)의 꿈은 우선 칼럼 내용을 재정리하여 ‘기업과 문화’, ‘혁신경영’ 등 테마별 e-book을 발간하는 일이다. 기업 혁신 담당이나 경영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쉽게 활용하여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고 실행이 간단하기 때문이다. 이후에 22여 년의 기업 혁신활동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혁신과 성장’이란 책을 발간하는 일이다. ‘꿈은 도전을 낳고 도전은 열매를 얻는다’라는 말이 있다. 꿈은 생각이 만드는 그림이고 생각이 멈추면 꿈도 그려내지 못한다. 하루 하루의 작은 변화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삶의 질이 바뀌고 꿈을 실현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우리에게 성취감을 주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새해 꿈을 향한 작은 변화는 좋은 습관을 만들고 좋은 습관들은 삶을 바꿔놓을 것이다. 원하는 삶의 꿈은 작은 변화와 자기경영으로 이루어진다.

2025-01-07

거제의 작은 섬, 씨릉섬과 그 주변 이야기

‘씨릉섬’이라니, 섬의 이름이 독특하다. 그런데 또 제목을 정해 글을 쓰려니 명칭 또한 애매하다. 씨릉섬은 거제도의 섬일까, 칠천도의 섬일까. 경남 남부 해상의 거제도는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한국의 섬 도시 중에서 유일한 자치 시로, 73개의 부속 섬을 거느리고 있다. 10개의 유인도와 63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 가장 큰 부속섬이 바로 칠천도(七川島)다. 칠천도는 거제도의 북쪽 끝 장목면에서 서쪽에 보이는 섬이다. 일곱 개의 하천이 있다고 해서 칠천도지만, 예전에는 옻나무가 많아 이름에 옻 칠(漆) 자를 쓰기도 했다. 부산에서 거가대교를 지난 뒤 칠천연륙교를 건너면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다. 해안 일주도로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광과 칠천도 최고봉 옥녀봉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가 없는데, 옥녀봉 남쪽 1,2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섬이 바로 씨릉섬이다. 씨릉섬은 옥황상제의 딸 옥녀의 설화가 깃든 섬이다. ‘거제도 설화 전집’에 의하면 “옛날 옛적, 하늘나라 옥황상제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주 아름답고 총명한 공주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실수를 저질렀고, 공주를 너무 사랑한 옥황상제도 하늘나라의 규칙을 어길 수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딸을 거제 땅 칠천도로 쫓아내고 말았다. 그렇게 딸은 지상으로 내려와 외로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고, 거제도 사람들은 그녀를 ‘옥녀’라고 불렀다. 오로지 하늘나라로 올라갈 날만을 기다리던 공주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지쳐버렸고, 결국에는 산이 되고 말았다. 그 산이 바로 칠천도의 최고봉 옥녀봉이라고 한다. 칠천도에 머무르던 옥녀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매일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아름다운 음악 소리는 바다 건너까지 울려 퍼졌고, 그 매혹적인 선율에 용왕신이 바다에서 올라와 그녀의 거문고 반주에 맞춰 북을 쳤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광경이었던지, 옥녀의 거문고 소리에 맞춰 섬도 즐거워서 ‘씨릉씨릉’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그 섬이 바로 ‘씨릉섬’이고, 용왕신이 북으로 이용한 섬이 씨릉섬 옆에 있는데, 섬의 모양이 북처럼 생겼다고 해서 ‘북섬’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금도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이 칠 때면 씨릉섬과 북섬은 ‘둥둥’ 북소리를 낸다고 한다.” 송포 아랫마을에서 조망하는 수야방도 인도 교와 수야방도 전경. 행정상으로 씨릉섬은 경남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산 79번지다. 전체 면적은 7만 8985㎡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서’다. ‘무인도서’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만조 시에 해수면 위로 드러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땅으로서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곳을 말한다. 그 씨릉섬이 지난 7월부터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섬에 출렁다리가 놓인 것이다. 한갓지던 해변에는 떠들썩함이 하루 이틀 밀려들더니 이제는 일상이 되고 말았다. 필자도 진작에 한번 찾아들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꽃 피는 봄보다, 녹음이 드리워지는 여름보다, 색동옷으로 갈아입는 가을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처럼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겨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씨릉섬 출렁다리는 길이 200m, 폭 2m 규모로 조성되었다. 칠천도 칠천량해전공원 해안로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씨릉섬과 연결되었다. 다리의 입구는 두 개로, 데크계단과 무장애 길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무장애 길은, 교통약자를 위해 별도의 경사로를 조성해 휠체어 이용자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출렁다리 넘은 씨릉섬에는, 길이 1,488m의 해안산책로와 5개의 쉼터가 있다. 섬의 입구인 정자목 쉼터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보면 봉우리, 물빛, 초록바람 쉼터를 차례로 만나고, 다시 돌아 나오면서는 너울 쉼터를 만날 수 있다. 초록바람 쉼터는 씨릉섬의 정상부를 겸했는데 푸르른 소나무 숲과 더불어 애기동백꽃을 만날 수 있다. 왕복 거리는 3.6km, 산책 소요 시간은 약 1시간 정도로 대부분이 나무 그늘로 조성되어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다. 씨릉섬을 한바퀴 다 돌아 나오는 길, 푸르른 소나무 숲이 돋보이는 너울 쉼터 부근에서 북섬이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애절하게 울어대던 새들의 목소리가 잊히질 않는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옥녀의 그리움과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 조선 수군의 아우성이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일렁이는 대나무 숲과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져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먼 길을 달려 거제도까지 갔다면 씨릉섬 하나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지척에 임진왜란 7년의 해전사 중 유일하게 우리 수군이 패배한 전투인 칠천량해전을 기억하기 위한 칠천량해전공원과 차량으로 5분 거리에 수야방도(垂也防島)라는 섬이 있다. 지홍석 수필가 칠천량해전은 1597년 7월 원균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이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전함 180척 중 150척이 침몰하면서 1만여 명의 병사가 숨진 조선 수군 최대의 패전을 기록한 공원이고, 수야방도는 대곡리 송포마을 아래 바닷가에 뾰족한 땅끝이 반도를 형성하고 있는 작은 섬이다. 10,036㎡의 무인도로 트레킹 길이 개설되어 있는데 도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2017년 칠천도 본섬 송포 아랫마을과 연결하는 수야방도 인도교가 가설되어, 언제나 부담 없이 다녀올 수가 있다.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는 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정상에 설치된 정자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가능하다. 고성의 구절산과 마산 진동면의 해안 모습, 진해의 장복산과 불모산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다. 아직은 때 묻지 않은 푸른 숲을 간직한 씨릉섬이다. 오랫동안 거제의 숨은 보석 중 하나로 손꼽힌 섬이기도 하다. 가족과 연인, 어떠한 모임도 만족할 만한 부담 없는 탐방지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과 울창한 나무들 사이의 산책로는 힐링에 제격이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칠천량해전공원과 수야방도 트레킹은 여행의 아쉬운 부분들을 채울 수 있는 마지막 퍼즐이 될 것이다. /지홍석 수필가

2025-01-07

다시 일어설 기회

허민 문학연구자 실패와 실수, 후회와 불안, 후퇴와 망설임은 모두가 기피할 순 있어도 살다 보면 마주해야만 하는 단어들이다. 아니 마주한다기보단 끌어안고 지낸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저마다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그런 기쁨보다는 반대의 경우가 더 일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공부하게 된 이유도 비슷했다. 내게 소설은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앞만 보며 달리다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때론 거대한 벽에 막혀 뒷걸음질 치곤 하는 가장 보통의 실패를 담은 양식이 소설 아닌가 싶었던 거다. 인생의 승자보다는 패자가 될 확률이 높아 보이기도 했고, 승리를 자임할 수 있는 상황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소설과 문학은 슬픔과 불행을 끌어안는 장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소설의 반의어가 있다면 자기계발서 아닐까? 자기계발이란 타인과의 경쟁을 세계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다툼 속에서 출세를 노리는 병법에 다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도 한때는 정말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읽다 보니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자기계발서는 각자의 삶이 잘되길 바라는 당연한 마음에서 읽는다기보다는 잘 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애써 지연하기 위해 찾게 되는 글이라는 거였다. 성공을 위한 지침대로 산다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산다 해도 승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초조함이 모두를 궁지로 내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일종의 원리로서 작동하는 시대의 비참은 그렇게 반복 형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나간 선택에 대한 후회와 그러한 감회에서 비롯되는 자기에 대한 의혹에서야말로 지성이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지성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 다른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인간이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는 만큼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도를 사상의 언어로 포착해야 한다며 “정정 가능성의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는 문제가 있다. 자기의 잘못을 정정할 수 있는 기회조차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은 결국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의 차별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한다. 나는 모두에게 ‘플랜B’를 수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플랜B’란 모두가 범할 수 있는 과오로부터 다만 좌절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다음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의 이름이다. 물론 그 가능성에는 개인적인 다짐과 용기를 넘어서 제도적인 뒷받침도 필요하다.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음에도 자기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여지에는 왜 사회적인 격차가 작동할까? 더구나 팬데믹 이후 장기 불황 속에서 극단적인 경제적 양극화가 야기되고 있기도 하다. 즉 누군가는 평범하게 살아가기조차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차선과 대안, 보완과 처방은 사회적 동물로서 존재하는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게 됐다. 한국 사회의 가장 긴급한 과제로서 ‘플랜B’의 사회적 보장이 필요하다.

2025-01-06

새해엔 희망 하나는 품고 살아야

김규인 수필가 새해 첫날의 전국 날씨는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하의 날씨다. 차가운 바람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민다. 정치는 어수선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환율은 우리의 마음을 졸인다. 기업체 경영자는 트럼프의 등장에 줄어드는 수익과 높아질 관세장벽에 근심이 늘어난다. 살아내야만 하는 서민들의 팍팍한 살림살이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도 몇 번이나 계산기를 두드린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기에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도움의 손길 때문이다. 하루에 1만원씩, 1년간 모아 365만원을 기탁한 붕어빵을 파는 김남수 씨의 나눔이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나눔을 실천한다고 다짐한다. 어려운 형편에도 이웃을 돕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에 추운 겨울을 이겨낸다. 서귀포시 안덕면사무소 이은선 팀장은 경조사를 보며 답례품으로 받은 150만원의 상품권을 아동 학대 예방 및 보호 지원을 위해 내놓았다. 학대 피해 아동에 기쁨과 희망의 선물이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고맙다. 이 팀장은 존셈봉사회 소속으로 꾸준히 봉사활동을 한다. 봉사는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고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한다. 구두를 수선해 하루 1만원씩 모아 365만원을 기부한 구둣방 부부도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김주술 씨와 아내 최영심 씨는 힘든 시절을 겪고 나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나눔을 시작했다. 나눔을 통해 더 행복하며 얻는 것도 많다고 한다. 힘든 삶을 이겨낸 그들이 내미는 손길에서 따스함을 느낀다.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남긴 상자에는 5만원권 지폐 뭉치 8000만원을 포함하여 8003만8850원이 있었다. 그의 누적 성금은 10억4483만6520원에 이른다. 25년째 이웃을 돕는 그의 선행을 보며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많은 돈을 내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봉사의 참뜻을 배운다. 작은 도움에도 자신을 드러내기 바쁜 것이 요즈음 형태인데 말이다. 이들 외에도 각종 단체의 선행은 줄을 잇는다. 자선 경기를 열거나 자선 바자회 수익으로 이웃을 돕는 단체와 성금을 모은 산업체, 지속적인 선행을 하는 연예인들과 그들의 팬클럽 회원들이 불경기에도 이웃을 돕는다. 남을 돕는 것은 어려울 때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이 헛되지 않게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잘 이겨내기를 빈다. 어쩌면 남을 돕는다는 것은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기 힘들다. 겪어보지 않았기에 가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모른다. 돈이 없어 끼니를 굶어보았거나, 기업체는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거나, 연예인들은 긴 무명의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기에 아픔을 안다. 그러하기에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선다. 약한 자들에게 이번 겨울은 길고 혹독하다. 힘든 시간에 옆에서 손 내밀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기운에 힘을 내고 언젠가는 밝게 웃을 것이다. 새해엔 어려워도 누구나 희망 하나 품고, 웃음 가득한 한 해가 되면 좋겠다.

2025-01-06

폐지

먼지를 뒤집어쓴 덮개를 걷는다. 헌책이 와르르 무너진다. 읽고는 쟁여놓은 책들이다. 해묵은 것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라면 상자에 책을 담았다. 네 상자 째 들고 나갔을 때, 마침 파지를 줍는 할아버지가 오고 있었다. 키가 자그마한 할아버지는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다. 하루는 밀짚모자를 쓰고 또 하루는 꽃이 달린 여자 모자를 썼다. 모자가 자주 바뀌어서 동네 사람들은 모자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책 더미를 보며 잇몸을 가득 드러냈다. 오늘은 횡재수가 들었다며 수레에 실린 짐들을 밀어내고 빈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거들려 하자 할아버지는 지저분해진다며 만류했다. 마지막 상자를 들고 나가자 할아버지가 상자 밑에 깔린 신문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새댁, 참기름 짰어? 신문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네” 참기름? 그럴 리가 없었다. 고소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엄마는 비싼 참기름은 아들에게, 싼 들기름은 딸인 나에게 주었다. 마음이 바뀌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의 편애는 눈에 훤히 보였다. 어쩌다 내가 상을 받아 와도 ‘우리 아들이 받아야 하는데’하며 속을 드러냈다. 내 아이가 전교 1등을 해도 ‘친손주가 잘해야 하는데’ 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쏟아냈다. 엄마의 지갑 속에는 오빠네 가족들의 사진만 환하게 웃고 있다. 오빠에겐 늘 새 밥에 금방 한 반찬을 차려주지만 내가 가면 ‘어제 먹던 돈가스 있는데 데워 먹을래’ 하며 식어빠진 말을 던진다. 부리나케 들어와 싱크대 문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인 두 개의 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병뚜껑을 여니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웃음이 실실 났다. 엄마의 실수가 고소해서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았다. 실수일까, 진심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갑자기 참기름이 먹고 싶었다. 양푼에 밥통에 있는 밥을 모두 퍼 담았다. 열무를 꺼내어 넣고 김치도 잘게 썰고 계란 프라이도 부치고 김 가루를 뿌렸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었다. 꼬신내가 숲의 향기처럼 기분 좋게 내 몸에 먼저 닿았다. 그릇을 덮고 수저를 두 개 챙겨 재활용품 수집장으로 내려갔다. 김경아 작가 할아버지는 만선이 된 리어카를 끈으로 묶고 있었다. 할아버지 좀 쉬었다 일하라고 엄마가 준 참기름으로 밥을 비벼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이내 묶었던 끈을 풀고는 신문지를 꺼냈다. 겹겹이 포개어 자리를 두 개 만들고 손바닥으로 탁탁 치니 어느새 평평해졌다. 함께 밥을 먹긴 처음이었다. 나는 양 볼이 미어터지도록 밥을 밀어 넣으며 아들만 챙기는 엄마에게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꺼내 놓았다. 구석구석 묵은 감정들이 하나씩 실체를 드러냈다. 당신도 어머니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할아버지는 여자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했다. 모(母)는 어미고 자(子)는 아들이므로 모자를 쓰면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참기름이면 어떻고 들기름이면 또 어떤가. 손수 짜서 보내주는 엄마가 있는 새댁이 부럽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숟가락질만 했다. 설움도 서운함도 함께 담아 비벼 먹는데 갑자기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나는 몸을 돌렸다. 눈물이 났다. 엄마가 원하는 ‘착한 딸’로 살아온 지난 감정들이 빛바랜 스냅 사진 속에 들어 있는 끝없는 이야기처럼 불쑥 올라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반복될 감정의 멍에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 비워내고 지친 마음이 들어가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오늘 참기름 실컷 먹었으니 이제 앙금은 리어카에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려놓아요. 고물상에 가서 폐지도 팔고 새댁 묵은 감정까지 팔고 오지요.” 할아버지는 몸을 일으켰다. 내게 환한 웃음을 보이고는 다시 리어카를 끌었다.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지만 내 묵은 감정까지 실은 할아버지의 리어카는 무거워보였다. 할아버지의 리어카가 보이지 않고서야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김경아 작가

2025-01-06

도쿄대생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

2024년 12월 18일에는 도쿄대 18호관에서 2시간에 걸쳐 저의 조촐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학교 측으로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주제가 ‘21세기 한국의 다문화 소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도쿄에 오기 전에, 21세기에 발표된 한국 다문화 소설과 관련하여, ‘다문화시대의 한국소설 읽기’(2015), ‘이질적인 선율들이 넘치는 세계’(2021)라는 두 권의 졸저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제가 강연주제로 ‘한국의 다문화 소설’을 정한 이유는, 21세기에 들어와 한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들을 형상화한 소설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본 사회 내 재일한인문제나 과거사 등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강연은 크게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21세기 다문화소설의 실상’이라는 두 부분으로 준비했는데요. 오늘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관련된 것입니다. 본래 저의 전공은 식민지 시대(1910-1945) 한국문학으로서, 특히 저는 식민지 시대 한반도의 핵심적인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던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한국의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우연한 발견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당시 베스트셀러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를 읽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은 장애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반항아 도완득이 질풍노도의 고교 시절을 보내며 겪는 이야기를 그려낸 성장소설입니다. 그런데 ‘완득이’라는 작품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활동했던 김사량의 ‘빛 속으로’(문예수도, 1939.10)와 너무나 비슷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최고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 최종심에까지 오른 ‘빛 속으로’는 일제 말기 도쿄를 배경으로 하여, 일본 출신의 아버지와 조선 출신의 어머니를 둔 국제아 야마다 하루오가 자신 안에 있던 ‘조선적인 것’을 부정하다, 南先生(남선생, 미나미 센세)을 만나 자신의 ‘조선적인 것’을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완득이’에서 베트남 출신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도완득은 ‘빛 속으로’의 국제아인 야마다 하루오에 대응되며, 어둠 속에 방치된 완득이를 사회로 이끌어주는 동주 선생은 南先生에 대응됩니다. 두 소설의 어머니들은 모두 인종적·계급적·젠더적 모순이 중첩되어 고통 받는 서발턴(하위주체, subaltern)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유사성은 1939년과 2008년의 시간적 거리와 도쿄와 서울이라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족이나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통이 현재진행형이기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빛 속으로’는 일제 말기에 쓰여진 ‘완득이’이며, ‘완득이’는 21세기에 쓰여진 ‘빛 속으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사량(1914-1950)은 평양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동경제대에서 수학했는데요. ‘빛 속으로’의 南先生(남선생, 미나미센세)도 제국대학 학생으로 세틀먼트(settlement)에서 빈민가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야마다 하루오를 만나게 됩니다. “원래 S협회는 제대帝大 학생 중심의 인보사업(隣保事業) 단체로 탁아부나 아동부를 시작으로 시민교육부, 구매조합, 무료의료부 등도 있어서, 이 빈민지대에서는 친밀도가 높았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동경제대 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회봉사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2017년에 몇 명의 한일 연구자들과 동경제대 세틀먼트(정식명칭은 동경제대 야나기시마 세틀먼트)가 있던 곳을 찾아간 적이 었었는데요. 그 터에는 다른 민가가 자리 잡고 대신 한 블록 떨어진 야나기시마 놀이터에 세틀먼트를 기념하는 표지판만이 남아서 그때의 일을 증언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강연을 준비하며 다시 야나기시마 놀이터를 찾으니, 2024년 2월에 새로 만들어져 사진 등이 보강된 표지판이 맞아 주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빛 속으로’에서 하루오의 엄마인 정순은 일제 말기 재일조선인이 겪은 고통과 수난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정순은 남편 한베에게 끔찍한 학대와 폭행을 당합니다. 정순은 자신이 조선인이어서 학대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학대받는 처지를 당연시하는데요. 더욱 끔찍한 것은 정순이 아들인 하루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배척하는 일도 감내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강의실에서 ‘빛 속으로’를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저를 비롯한 학생들은 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순이 겪는 고통과 그런 어머니를 부정하는 어린 하루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는 합니다. 그런데 70년 후에 한국에서 창작된 소설에서도, 국적과 위치만 바뀐 채 이러한 고통이 반복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전에 이 연재에서도 다룬 바 있는 재일한인들의 소설에는 정순이나 하루오가 겪은 일이 70년이 지난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는데요. 제가 도쿄대생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단순한 꿈,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일이 없는 사회를 향한 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2025-01-06

여섯 살 모차르트의 첫 연주여행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불멸할 것이 자명한 클래식 작곡가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에 가본 적이 있다. 녹음 우거진 여름이었다. 운 좋게도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모차르트 추모음악회는 천재 작곡가를 자랑스러워하는 고향 사람들과 그곳을 찾은 관광객 모두를 즐겁게 했다. 연주된 모든 곡들이 좋았다. 18세기 비엔나 고전파를 대표하는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감동시킨 수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받는 그는 “음악 역사의 기적” “성스러운 인간”이라고 숭배받기까지 한다. 지금으로부터 263년 전인 1762년 1월 7일은 바로 그 모차르트가 첫 번째 연주여행을 떠난 날이다. 당시 모차르트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와 누나의 악기 연주를 들으며 자란 그는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세 살 때 쳄발로를 연주했고, 다섯 살 때는 작곡을 해낼 정도. 그러니, 아장거리는 걸음걸이의 여섯 살 아이가 유럽 전역으로 연주를 위한 여행을 떠났다 해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 천재 아이의 삶이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음악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었으니 세상 이치에 어두웠고, 작곡이 아닌 다른 분야의 해석력은 백치에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유럽의 겨울도 한국처럼 춥다. 꽁꽁 언 고사리손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며 피아노를 쳤던 여섯 살 모차르트를 떠올리면 부럽다기보다는 측은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1-06

‘1987년 체제’의 위기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지난 한 달 간, 숨가쁜 나날들이었다. 비상계엄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안 가결, 한덕수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의 탄핵, 대행의 대행에 의한 헌법재판소 판사 임명, 무안 공항의 제주항공 비행기 동체착륙 폭발 대참사,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등의 사건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많은 국민들은 순진한 면이 있다. 그네들은 티비가 연출하는 조작된 이미지들에 ‘사로잡힌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다. 과연, 이 연속적인 사태의 귀결점은 어디일까? 필자는 현금의 상황을 ‘1987년 체제’의 파국으로 진단한다. ‘1987년 체제’란 1987년 6월 10일에 시작된 ‘6월 항쟁’에 의해 수립된 현재의 헌법적 체제를 의미한다. 유신체제에서 신군부 정권까지 국민들은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1987년의 6월 항쟁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자기 손으로 뽑는 국민주권 원리를 실질적으로 회복한 역사적 혁명이다.‘1987년 체제’란 직선제로 상징되는 국민주권의 공준 체제다. ‘1987년 체제’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 또한 본질적이다. 신군부의 ‘기만적인’‘6·29 선언’ 이후 새로운 요구와 도전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7~8월 노동자 대투쟁’이 그것이다. 1987년 체제는 이 민중적 요구와 권리를 헌법적으로, 국가정체적으로 인정하고 보장하는 체제다. 때문에 이 체제는 항상적인 ‘위기 체제’이기도 하다. 민중들의 요구는 이 체제에서 합법적, 합헌적이다. 이 체제는 항상적인 위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위기를 겪지만 감내해야 한다. 위기 속의 ‘영구혁명’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대가다. 이와 같은 전제 위에서, 현재의 파국적 상황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많은 이들에게 계엄령은 반민중적 독재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시대착오적 도발로 이해된다. 대통령은 군사독재 세력을 계승한 ‘국힘’을 대표하는 존재이고, 이 세력의 독재주의적 도발이 충격적으로 시도된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대통령은 어째서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했던가? 그는 그날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비상 수단을 동원한 것이라고 했다. 만약, 대통령의 주장대로, 지금 우리가 ‘1987년 체제’의 제1원리인 국민주권의 원리를 침해, 침탈당한 상황이고, 국민들이 이를 채 깨닫지 못한 상태라면, 그런 조건 속에서의 민중적 ‘영구혁명’은 전체주의의 도래를 의미할 뿐이다. 지금 성행하는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 체포·수사·구속, 언론 조작을 통한 여론 유도, 군중 심리의 억압, 인민 재판적 지목 양상 등은 바로 전체주의의 대표적 요소들이 아닐 수 없다. 부정선거 시스템의 존재와 작동 여부는 월드 와이드 웹이 지배하는 가상현실 세계의 작동 원리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다. 많은 서구국가들과 티이완이 아날로그적인 수개표를 고집한 데 반해 한국의 중앙선관위는 국민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전산 개표를 투명하다고 강변해 왔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에 가까운가? 필자는 생각한다. 사태의 진실은 우리가 보았다고 생각한 것과는 언제나 많이 달랐다고. 여기서는 필자 또한 예외는 될 수 없을 것이다.

2025-01-06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

묵은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였다. 떠나보낸 어떤 것에 대한 인상은 마지막 모습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2024년은 많은 이들에게 아름답게 기억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과 혼란, 그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타격,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었을 끔찍한 참사. 2024년은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한 해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그러나 나라는 한 개인에게는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진 해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2024년은 내가 나의 아들을 처음 품에 안은 해이고, 아빠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은 이전과 다르다. 나의 세상을 화려하게 만들어가는 일보다 아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주는 일 쪽에 삶의 비중을 더 두기로 결심한 터라 이전과는 조금 다른 염원을 가슴에 품게 되는 것이다.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빠른 속도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아들이 만날 세상이 부디 험하고 추운 곳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한 곳이기를. 내가 물려줄 세상이 한 번 살아볼 만한 아름다운 곳이기를. 그런 세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먼저, 나는 아들의 세상에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장은 힘겹더라도 버텨내고 나면 지금보다는 분명히 나아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살 수 있는 세상이길 바란다. 나는 이 사회와 국가에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곤 한다. 1%대까지 떨어져버린 경제 성장률, 국가의 존폐를 걱정하게 만드는 인구 지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책을 내어놓기는커녕 이미 이 나라를 지키며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마저 맥 빠지게 만들고 급기야는 떠나고 싶은 마음을 품게 만드는 정치권의 행태. 개개인이 노력한다면 정말로 다시 좋았던 시절을 회복하고 다음 세대에게 지난 세대가 살았던 세상보다 풍요로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이제는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가 없다. 언젠가 아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를 설명해 주어야 할 텐데, 그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려야 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이 나라를 포기하지 않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서로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해할 것이란 의심 없이,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불행한 사건이 내게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 없이 살 수 있는 세상 말이다. 우리는 이미 이웃의 SNS 게시물을 이용하여 딥페이크 성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바 있다. 부동산 전세 사기를 당해 괴로워하는 모습도 주변에서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규칙을 어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에게 신체적·정서적 위해를 가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것을 빼앗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 너무나 작고 연약한 나의 아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할 정도로 괴롭고 두렵다. 내 아들을 그러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내야 하는 것으로 충분했으면 좋겠다. 내가 타인을 해하지 않는다면 타인도 나를 해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르치고 싶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의가 승리하는 공정한 세상이다. 그것은 악행을 저지르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이라면 지위의 고하나 재산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똑같이 처벌 받는 세상이다. 다른 이들을 두렵게 만든 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에 피해를 끼친 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이가 권력으로부터 비호 받지 않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 소중한 내 아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는 동화책에는 선한 자는 상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을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고 가르치고 싶다.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품고 있는 새해 소망이 대단한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허황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가. 누가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나는 내 세대가 안타까운 세대로 기록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혼란을 겪은 세대, 비록 자신들은 한 때 불안과 절망 속에서 살았을지언정 다음 세대에게는 평화와 희망을 물려준 세대라고 평가받길 간절히 바란다. 나의 아들은 부디 내가 살았던 것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모두 작년보다는 나은 올해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2025-01-06

보통의 날

슬픔과 분노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언스플래쉬 그날은 참 이상했다. 2월에 출산 예정이던 새언니가 조산 기운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제 17개월 된 첫째 조카를 돌봐줄 사람을 찾지 못해 부모님이 급하게 아이를 데리고 본가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감기 기운과 잡다한 일 처리를 요구하는 연락 때문에 괴로워하던 중이었다. 나의 몸 상태가 실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체크리스트를 정리했다. 급한 것부터 차근차근 처리하자 싶었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본 뉴스,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소식 때문이었다. 어떤 기적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던. 그러나 끝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던.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중얼거리던 날. 다음 날 강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본가로 향했다. 잠깐이라도 조카의 얼굴을 보고 오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엉망인 컨디션에 장거리 운전까지 더하니 몸이 금방이라도 두 동강 날 것만 같았다. 조카의 상태는 나보다 훨씬 심각했다. 고열에 시달리며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심리적 압박이 육체적 형태로 발현된 것 같았다. 부모님은 회사로 출퇴근해야 했으므로 아이를 돌보는 손이 턱 없이 부족했다. 결국 내가 본가에 일주일을 머무르며 함께 조카를 돌보기로 했다. 조카의 상태는 호전되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제대로 쉬질 못하니 감기 기운은 점점 더 심해졌고 끝내야 할 일은 줄어들기는커녕 쌓여만 갔다. 약기운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조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서 달려가 보니 주위가 엉망이었다. 손이 닿는 곳은 물론이고 서랍장 안의 모든 물건을 꺼내서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있던 것이다. 조카가 양손에 쥔 뾰족한 물건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익숙한 공간에 당연하게 놓인 것들이 무시무시한 흉기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런 조카의 행동에 이토록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왕성한 호기심 정도로 치부하고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인형이나 소리가 나는 장난감처럼 무해한 것들로 유인하며 아이의 관심을 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엉엉 우는 아이를 뒤로한 채 위험한 구석이 있는 것들을 모조리 숨겼다. 절대 다쳐서는 안 돼. 조그만 생채기라도 나선 안 돼. 그런 마음으로 억척스럽게 조카를 안았다. 그렇게 새해가 밝았다. 덕담을 건네는 연락이 없었다면 새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새해였다.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쉽게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좋은 일 가득한 새해 되세요. 그런 상투적인 답장을 쓰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건강히 지내라는 말,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머릿속은 어두운 형체가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혼돈과 혼란, 죽음에 관한 것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다음 주에 예정된 수업을 위해 다시 집으로 올라오면서 나는 조금 울었다. 하나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소한 일에도 덜컥 겁이 났다. 평범한 하루가 큰 불행으로 확장될 것만 같았다. 와중에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느슨해졌다. 도로 위로 가벼운 눈이 흩날렸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감정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세상의 나쁜 일들이 하나도 해결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불안에 잠식당하는 중이다. 슬픔과 분노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상황에 체념하게 되고 허무와 냉소로 나아간다. 나는 그런 마음을 경계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인데 둔탁한 손이 내 무릎을 툭 꺾는 기분이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황망한 비극은 우리 삶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 반복되고 있다. 따져 보니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아득한 터널을 지나는 기분은 여전하다. 뉴스를 통해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소식을 본다. 자신의 일상을 위해, 기꺼이 도움의 손을 내밀기 위해. 그런 면에서 연재 중인 지면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변명의 여지없이 마감이라는 책임을 지켜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나는 순식간에 보통의 날로 돌아온다. 어쩌면 우리를 슬픔의 한복판으로 데려가는 것도, 일상으로 되돌려놓는 것도, 이 가냘픈 책임감의 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원위치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궤도가 포물선을 그리며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보통의 날을 향해.

2025-01-06

O. J. 심슨은 돈도 명예도 다 잃었다

김진국 고문 공수처가 윤석열 대통령 체포영장을 집행하는데 1차 실패했다. 윤 대통령이 경호처와 경호부대를 동원해 철벽을 쳤기 때문이다. 계엄이나 마찬가지로 TV로,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해외에도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한남동 일대를 시위군중이 점령했다. 누가 옳으냐를 떠나 나라 망신이다. 1994년 미국 LA 경찰이 한 살인 혐의자가 차로 도주하는 것을 추격하는 상황이 중계됐다. 뉴스 전문 채널인 CNN은 물론 지상파 방송들도 생중계했다. 방송국은 헬기까지 동원했다. 한국 TV도 CNN을 그대로 보여줬다. 고속도로로 달아나는 차를 보면서 곧 그를 체포해 감옥에 보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인 O. J. 심슨이다. 그와 이혼한 전처와 식당 종업원이 피살된 채 발견됐고, 혈흔을 비롯한 여러 증거가 그를 지목하고 있었다. 검찰이 소환한 날 친구에게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는 편지를 남기고 잠적했다. 이틀 뒤 경찰이 그를 찾아냈으나 도주극을 펼쳤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건 그가 무죄 평결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는 300만~600만 달러(약 44억~88억 원)로 쟁쟁한 변호인들을 고용했다. 통계와 확률까지 동원해 그를 무죄로 만들었다. 유전무죄(有錢無罪)의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사건이다. 뒤에 그는 탈세로 체포되기도 하고, 강도 혐의로 33년 형을 받아 수감되기도 했다. 심슨이 떠오른 것은 윤 대통령 측 변호인들의 말 때문이다. 그때 비싼 수임료를 챙긴 변호인들이 온갖 요설로 배심원을 헷갈리게 했다. 이번 사건은 온국민이 TV로 지켜봤다. 수사당국이 발표한 것이라면 조작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시 국회를 포위하고, 정치인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던 특수부대 사령관들이 직접 TV에서 증언했다. 변호사들의 현란한 법 논리가 이해하기 어렵다. 상식으로 판단할 때 헌법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 분명하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위기 시 나라를 보호하라고 계엄령을 발동할 권한을 부여했다. 국회에는 해제권을 주어 대통령의 독단을 견제하도록 했다. 그런데 무력으로 국회를 무력화해 헌법상 권한인 해제를 막았다. 헌법 질서를 파괴했고, 무력으로 국민이 위임한 것보다 더 많은 권력을 쥐려 했다. 명백한 친위쿠데타다. 그런데도 물리력에 막혀 법을 집행하지 못한다면, 심슨보다 더한 사례로 인용될 게 뻔하다. 당당하다면 법정에서 다투는 게 옳다. 부하를 희생시키고, 국론과 국민을 쪼개고, 국정과 국법 질서를 마비시키고… 그런다고 없는 일이 될 수 있나.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은 타조를 보는 것같아 낯이 뜨겁다. 수사 주체를 둘러싼 논란도 어이가 없다. 특정인을 위해 졸속으로 검수완박을 밀어붙이다 이런 꼴이 됐다. 그렇지만 혼선이 생기면 결국 누가 정리해야 하나. 법원이 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도 법원의 영장마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물리력으로 집행을 막았다. 형사소송법 110조, 111조의 예외로 했다는 부분이다. 보안시설 책임자가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조항이다. 관저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 본인이다. 법원이 영장에 예외를 명시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는 한 영원히 체포할 수 없다. 말장난이다. 윤 대통령 스스로 출두해 조사받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힘없고, 불쌍한 국민만 법을 지켜야 하나. 그게 나라냐. 기묘사화 때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을 써놓고, 조광조를 모함했다. 말도 안 되는 주장도 반복하면, 믿고 싶은 사람은 빠져든다. 총선 민심은 윤 대통령이 뒤집어놨다. 이제 와 부정선거 탓으로 돌려 그때의 행동을 칭찬이라도 받을 건가. 부정이라는 핑계로 선거 결과를 투표가 아닌 총칼로 뒤집으려는 건가. 선거 부정이 있었다면 법 절차로 해결해야 한다. 불법을 바로잡기 위해 더 큰 불법행위를 한다는 건 명분이 되지 못한다. 전직 검찰총장이 법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불법으로 무장 군인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을 믿어야 하나. 이번 사태도 숨어서 큰소리칠 게 아니라 법정에서, 헌법재판소에서 따지면 될 일이다. 합법적 절차를 포기하고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나.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1-05

일자리 창출이 최고의 복지다

김장호 구미시장 현대 사회에서 일자리는 시민들의 행복을 높이는 핵심 요소다. 세계은행 연구에 따르면 고용률이 1% 증가하면 빈곤율이 평균 0.7%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나 안정적인 일자리가 빈곤 해결의 중요한 열쇠임을 보여준다. OECD 보고서 역시 고용률이 높은 국가일수록 국민 행복 지수가 높고, 특히 정규직 종사자의 삶의 만족도가 더 높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2023년 대한민국의 고용률(69.2%)은 OECD 평균(70.1%)에 미치지 못하며, 스웨덴(77.4%), 네덜란드(82.4%), 독일(77.4%) 등 복지 선진국과 비교해 크게 낮은 수준이어서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라는 금언(金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민선 8기 구미시는 ‘좋은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시정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반도체 특화단지, 방산혁신클러스터, 기회발전특구 등 주요 국책 프로젝트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기업 친화적 환경을 조성해 왔다. 이를 통해 기업에 세제 및 재정 지원, 규제 특례, 정주 여건 개선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며 기업 하기 좋은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선 8기 출범 이후 현재까지 604개 기업으로부터 8조 1,807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고, 5,615명의 고용을 창출했다. 특히 작년에는 263개 기업에서 3조 8,493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는 성과를 거뒀는데 이는 기업 하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구미시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미시는 지역 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애로대책팀’을 운영하며 지난 2년 6개월간 110건의 민원 중 76건을 해결해 70%의 높은 해결률을 기록했다. 이 팀은 법률, 특허, 세무, 노무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기업애로 바로톡’과 ‘기업애로 상담관’ 제도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신속하게 반영하고 있다. 또한, 구미시는 투자 유치의 장애요소였던 규제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힘써왔다. 지난해 5산단에 2조 원 규모의 수소연료전지발전소와 AI데이터센터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관계 부처와의 긴밀한 협의 끝에 용도변경 허가를 이끌어내며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이를 토대로 구미시는 앞으로 지속적인 AI 분야 투자 유치를 통해 글로벌 AI데이터 허브로 도약할 계획이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지원을 위해서는 관내 업체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자 관급 계약에서 분할 발주를 제도화하고, 소상공인 특례 보증 및 이차보전 지원 규모를 대폭 확대하여 민생경제 회복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35개소 1,868면의 시민행복주차장을 포함한 권역별 공영주차장 신규 조성을 통해 전통시장 등 지역 경제 활성화와 중소기업·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기반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도내 최초로 ‘원스톱 민원팀’을 신설하여 복합 민원을 효율적으로 해결하며 기업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이 팀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지난 6년간 해결하지 못한 기업의 침수 피해를 단기간 내 조율하는 등 베테랑 팀장들의 높은 전문성과 현장 이해력을 바탕으로 기업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아울러 지역 기업을 직접 방문해 현장의 목소리를 먼저 들으면서 투자유치의 패러다임도 바꿔나갔다. 이를 통해 ‘낙동강 변 진출입로 확보’, ‘낙석 위험 절개지 사면 정비’ 등 다양한 기업애로 사항을 해결하며 기업애로 원스톱 처리시스템을 확립했다.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구미시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시민들의 행복을 제고하는 데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구미시는 민선 8기 출범 이전 ‘대한민국 행복지도’에서 전국 228개 지자체 중 하위 20%에 해당하는 E등급이라는 오명을 얻었던 도시다. 하지만, 지난해 11월에는 ‘도시브랜드평판지수’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으며, 2024년 ‘경상북도 투자유치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한국지방자치경쟁력지수’ 평가에서 도내 종합 1위를 기록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며 그동안의 오명을 말끔히 씻어내고 있다. 이러한 고무적인 성과는 구미시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청신호라 할 수 있다. 구미시는 앞으로도 일자리 창출을 통해 시민의 삶을 개선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한편, 시민 복지 증진에 전력을 다할 계획이다. 을사년 새해를 맞아 41만 시민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구미시의 새 희망과 혁신은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다.

2025-01-05

첫 줄이 써진다면

이희정 시인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식기를 가지런히 엎어두고 물기가 마르길 기다리듯이 푸릇한 것들의 꼭지를 따서 찬물에 헹군다 비릿한 것들의 상처를 벌려 내장을 꺼낸다 (중략)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 아침상을 차린다 나쁜 일들을 쓰다듬어주던 크나큰 두 손이 지붕 위에서 퍼드덕거릴 때 햇살이 집안을 만건곤하게 비출 때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을 간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돕고 있다 살점을 떼어낸 듯한 묵상이 눈물처럼 밥상에 뚝뚝 떨어진다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은다 -김소연, ‘생일’부분,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운명이 중력에 맞서는 힘겨운 날들이다. 하루키는 “역사가 인간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명제는‘그 당시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1Q84) 김소연 시인(1967년~)은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기적이라고 말하는 생일 밥상을 차려내고 있다. 시에서 화자는 눈처럼 흰 쌀밥을 지었지만, 나는 전날 밤 오래 삶아 놓은 팥에 찹쌀과 멥쌀을 반반 섞어 전기밥솥에 앉혔다. 팥은 나쁜 일을 막는 벽사진경의 염을 지녔다기에. 하지만 팬에 기름을 두르고 약한 불에서 센불로 이동하며 비릿하게 익어가는 해동 도미의 살냄새를 앓아야 했다. 거기에 푸른 잎사귀를 데쳐 조물조물 무친 나물에서 풍겨 나오는 참기름의 고소한 풍미까지. 다시 들춰 보는‘새천년 희망증서’는 오래전 즈믄둥이로 태어난 첫 아이에게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 보낸 첫 증서였다. 함께 딸려 온 선물 모빌과 함께 출생아 조사라는 행정절차를 거치느라 늦게 당도했다. 언제나 기다리는 것들은 아직이거나, 때를 지나기 마련인가. 천장에 달린 모빌은 제때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지나쳐 간 때란 누군가에는 쓸모가 되는 아이러니가 운명이고 중력이기도 해서 다음 아이에게 와서는 쓸모가 되기도 한다.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이”고“오로지 아름다워 보이”는 이 아이러니가 슬픔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시집 발문에 얹힌 황현산의“씩씩한 시인 김소연이 가장 깊은 슬픔으로 짠 시간이기에 슬프다. 슬픔만이 진정으로 씩씩한 것을 만든다는 아이러니가 슬프다”는 위무의 서신마저 애도가 된다. 세상의 멸망을 막아 보겠다는 시인의 열망이 미명의 중력을 통과할 때 붉은 해가 떠오른다. 지난해 머나먼 타국 열기구 위에서 맞은 일출의 순간, 아스라한 상공을 오르기 전 열심히 반복 학습했던 건 다름 아닌 랜딩 연습이었음을.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 그 위에 두 손 꼭 모으며 첫 줄은 써질 것이라는 희망에 간절함을 얹어 보는 것이다. “햇살이 만건곤하게 비출 때”

2025-01-05

구미시의 공연장 대관취소 후유증

류승완 경북부 정치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밝혀온 가수 이승환의 구미 공연 취소를 놓고 구미시가 몸살을 앓고 있다. 5일 구미시청 입구에는 김장호 구미시장의 공연장 대관 취소를 환영하고 지지하는 화환 150여개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화환말고도 구미시는 김시장의 대관 취소 결단을 칭찬하는 시민 단체의 화환띠들만 따로 선별해 나무들 사이 전시해 놓고 있다. 이들 화환에는 “김장호 시장님, 보수의 성지 구미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장님의 결단을 응원합니다” 등의 환영 지지일색의 메시지가 실려 시청 입구를 오가는 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같은 전시행위에는 김시장의 공연장 대관 취소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응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여러 여론층에 홍보하고 과시하려는 구미시의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반면 구미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구미시의 공연장 대관 취소를 반대하는 비난 글이 쇄도하고 있다. 공연취소가 처음 알려진 지난해 12월23일 하루동안 시 홈페이지에는 평소 게시물의 150여배에 달하는 800여개의 의견이 실렸다. 이중 80~90% 이상이 김 시장의 대관 취소를 비난하는 글들이다. ‘문화를 정치로 선동하는 구미시장’, ‘예술의 자유도 보장없는 문화 무덤도시’ 등이 실린 게시판에는 가수 이승환의 팬들뿐 아니라 표현의 자유 침해를 우려하는 일반 시민들의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5일까지 구미시 홈페이지에는 대관 취소에 대한 1500여개의 찬반양론 의견글이 실려 시민들간 극단적 양면 대결과 분열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김 시장은 공연장 대관 취소 결정에 대해 “정치적 배경이 아니라 공연을 반대한 보수단체 회원들과 가수 이승환 팬들간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문제 때문”이란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공연장 대관 취소에 대한 반향은 김시장의 당초 의도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일부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시국으로 보수 진보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김 시장의 대관 취소 결단이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즉 보수색이 우세한 구미에서 공연장 대관 취소 결정이 김 시장에게는 정치적으로 손해볼게 없다는 계산이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가수 이승환은 김 시장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기로 한데 이어 지난해 12월 29일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도록 요구한 서약서 요청이 표현의 자유를 막는 위헌임을 확인하는 헌법소원을 준비중이다. 또 가수 이승환 측이 요구한 손해배상소송 청구금액은 이승환 가수측 1억원과 공연 예매자 1인당 50만원 등 수 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법조계에서는 손해배상소송이 가수 이승환 측에 다소 유리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소송을 마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김 시장의 공연장 대관 취소 결정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구미시의 행정은 물론 김시장의 정치적 행보에도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다. /ryusw@kbmaeil.com

2025-01-05

아주 보통의 하루

우정구 논설위원 영국 속담 한토막 소개한다. “하루만 행복하려면 이발소에 가라,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한 달을 행복하려면 말을 사라, 일 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게 살아라”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를 교훈적으로 가르치면서 정직한 생활 자체가 행복의 중요 요소임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대다수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가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각기 다르다. 행복이란 가치가 매우 주관적이고 포괄적 개념이어서다. 사전에는 부족함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는 심리적 상태를 행복으로 규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만족을 느껴야 하는 안정된 심리상태인데, 이는 개인이 느끼는 정도에 따라 행복의 편차가 있을 수 있다. 트렌드 분석지 ‘트렌드 코리아 2025’가 올해 트렌드 중 하나로 ‘아보하’를 꼽았다. “아주 보통의 하루”를 줄인 말로 특별히 행복하거나 불행하지도 않은 평범한 하루란 의미다. 그저 출근하고 퇴근해 가족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무탈 무사한 일상을 말하는 것이다. 무한경쟁 시대에 지쳐 살아온 현대인의 반발 심리가 낳은 트렌드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삶의 자세가 될 것 같아 트렌드의 흐름에 관심이 간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1-05

정치의 사법화, 우려된다

윤희정 편집부국장대우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사건을 심리 중인 헌법재판소에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전개되는 정국 현상은 마치 온 국민이 어지러운 불량 롤러코스터에 타고 있는 형국이다. 허점도 계속 드러나고 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에 대한 탄핵 여부를 결정하는 일인 만큼 ‘시급성’ 못지않게 ‘신뢰성’에도 무게를 두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3일 진행한 윤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 2차 변론준비기일에서 변론기일을 통지했다. 헌재가 발표한 변론기일은 오는 14일부터 2월 4일까지 5차례다. 일정대로라면 주당 2회꼴로 재판이 진행되는 셈이다. 변론준비기일을 마친 후 국회 측 대리인단은 “예상대로 변론기일을 진행하게 돼 다행”이라고 밝혔지만, 윤 대통령 측은 “방어권을 제한하고 신중한 심리를 저해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법조계와 정치권에서 큰 논란이 된 것은 국회 탄핵소추단이 이날 탄핵 사유에 적시된 ‘형법상 내란죄’를 철회하겠다고 밝힌 일이다. 국회가 지난달 14일 통과시킨 윤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서에는 ‘형법의 내란죄, 직권남용죄 등 중대 범죄’가 탄핵 핵심 사유로 명시돼 있다. 이를 제외하겠다고 나선 것은 결국 탄핵을 주도한 야당이 재판 속도를 앞당기려는 전략이라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다. 윤 대통령 측은 “이번 탄핵 심판은 내란죄 성립을 토대로 한 것인데, 내란죄를 뺀다면 탄핵소추 의결 자체가 무효 아니냐”며 반발했다. 헌재는 국회 측에 추가 서면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내란죄’ 포함 여부는 오는 14일부터 진행되는 정식 변론기일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학계에선 “탄핵소추 의결서에 담긴 내란죄를 임의로 배제한다면, 심판 절차의 적법성 논란이 일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소추 사기’라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이호선 국민대 법대 학장은 ‘내란죄’를 소추 사유에서 빼려면 국회의 예비 심판인 탄핵소추안을 다시 의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학장은 “헌재는 이번 탄핵을 즉시 각하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현재의 정국에서 헌법재판소의 존재감이나 역할은 다른 기관을 압도한다. 마치 이 나라의 운명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통째로 맡겨진 듯한 상황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치변동을 주도하는 주체는 소수의 정치지도자에서 사법부로 넘어가는 추세다.‘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 시점에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사법부가 극단적인 정치분위기에 휩싸여 흔들리는 것이다. 이미 두 차례나 대통령 탄핵소추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이후 얼마나 뒷말과 혼돈이 깊었는지를 반추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닉슨 대통령을 탄핵할 때 조사를 2년간이나 했다. 클린턴 대통령도 1년 이상 조사를 진행했다. 최소한 국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증거와 법리를 확보한 다음에 결정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여야갈등을 겪는 국가 주요현안마다 정치과정이 아닌 사법절차를 통해 해결책을 찾는, 정치의 사법화가 크게 우려스럽다. 하루빨리 극단적 진영정치가 청산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복원되길 기대한다.

2025-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