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더는 우리나라가 문학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부에 가까이 있음을 말한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한강 작가의 책은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책이 없어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수필 쓰는 사람으로 얼마 만에 찾아온 기쁨인지. 이제 문학도 한류의 주역임을 확인하게 되어 기쁘다.
신문사에서는 신춘 문예의 계절이 왔음을 알린다. 글 쓰는 사람들의 잔치다. 하지만 수필을 쓰는 사람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럼 남의 잔치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된다. 이제까지 발표된 전국 일간지 24개 신문사의 신춘 문예 공고를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중앙지에서는 수필을 뽑는 곳은 없고 지방지에서 세 곳만 뽑는다. 그것도 한 곳은 등단한 자는 제외한다.
시의 스물네 곳과 단편 소설의 열아홉 곳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하고 동화와 비교해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요즈음 많이 쓰지 않는 시조의 아홉 곳에 비하여도 훨씬 적다. 신춘 문예에서 수필이 홀대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왜 이런 상황까지 왔는지 참담하기 그지없다.
수필은 다른 문학에 비하여 출발은 늦었지만,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와 더불어 수필 인구도 많이 늘었다. 여기에는 1974년 창간한 한국수필을 비롯한 문예지의 역할도 컸다. 그 후 수십 년간 매년 등단자를 배출하며 수필 인구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늘어난 작가 수만큼이나 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수필은 글쓰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손을 내밀어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으며, 스스로 책을 사서 읽는 데도 수필의 역할은 너무 크다. 그러한 공로는 뒤로한 채 수필은 한국 문학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시와 소설, 동화와 시조에도 밀리고 마지막 남은 몇 곳의 신문에 간신히 의지한다.
수필은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으며 토양을 단단히 하였다. 수필로 시작하여 문학에 입문한 사람이 시와 소설로 넘어가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주위에서 수필을 대하는 태도는 싸늘하다. 신변잡기라고 부르며 밀어낸다. 누구나 시작은 어설프기도 하고 모자라는 부분이 많은 게 당연하다. 지금은 그러한 시간을 딛고 뛰어난 작품을 쓰는 수필가도 많다.
문학의 발전을 위해 신춘 문예를 주최하는 신문사를 탓할 생각은 없다. 더 큰 안목으로 내일을 내다보고 조화와 균형을 생각한다면 수필을 위해 신춘 문예의 폭을 더 넓혀야 한다. 신춘 문예를 통해 좋은 수필 작품이 발표되면 수필과 한국 문학의 질적 향상도 도모할 수 있다.
수필의 질을 탓하고 기득권을 내세워 신문의 지면을 아낀다면 수필의 발전은 이룰 수 없다. 수필에 대하여 우대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다른 문학과 동등한 대우를 원한다. 늘어난 수필가들의 수만큼이나 수필의 질도 좋아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필 또한 소재의 다양화, 의미화와 형상화를 통해 문학성을 높여야 한다. 제대로 된 평론과 각고의 노력으로 질적 향상을 이뤄내야만 한다. 많은 수필가가 있어 한강처럼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작품이 나온다고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