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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애타게 ‘우리’를 찾는 건

등록일 2024-06-03 18:16 게재일 2024-06-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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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인 수필가
김규인 수필가

대한민국에서 ‘우리’라는 말이 사라진다. 코로나로 사람들은 혼자가 되고, 정치권에서는 철저히 나와 남을 두부 자르듯이 구분한다. 잘린 무리는 남이 되어 우리의 크기를 자꾸 줄인다. 수천 년 전부터 ‘우리’를 입에 달고 살아온 한민족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줄어드는 인구로 가속도가 붙으며 사그라든다.

혼자 크는 자녀가 ‘우리’라는 단어를 잃고, 집뿐만 아니라 식당에서조차 홀로 식사하는 자리가 늘어난다. 음식물 제조 회사에서는 일인 가구에 맞추어 용량을 줄인 상품을 잇달아 내어놓고 편의점에서는 한 사람의 식사에 맞추어 무가 자신의 형체를 잃고 토막 난 채로 잘려 나온다. 그렇게 ‘우리’는 해체된다.

휴대전화의 출현은 나 홀로의 삶을 부추긴다. 친구를 만나려는 사람들을 떼어놓고, 긴 시간을 붙들고 자기만 쳐다보라고 다양한 미끼를 던진다. 미끼를 문 사람들을 놓지 않는다. 심지어 버스에서 내려 길거리를 걸을 때도 휴대전화를 쳐다보느라 사고를 당해도 사람의 일이라 넘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꽉 쥔 채 놓지 못한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고는 모두 휴대전화를 쳐다보느라 바쁘다. 말하더라도 휴대전화가 중심이 된다. 휴대전화 게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최신 모델의 휴대전화가 이야기 소재가 된다. 휴대전화는 한 번 문 미끼는 절대 놓지 않는다.

사람들이 혼자의 삶을 즐기고 휴대전화가 자신에게 빠진 사람들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홀로 떠돈다. 우리 엄마, 우리나라, 우리 집과 같이 ‘우리’가 붙어야 말맛을 느끼던 우리의 모습은 다 어디로 갔을까. 모두가 혼자의 삶에 빠져있는 사이, 밀려 사라지는 ‘우리’를 되찾아야 한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우리’를 다시 모으자.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이모, 밥 한 그릇 줘요”라고 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모가 차려주는 한 끼의 식사는 몸과 마음을 덮인다. 돈을 내고 먹는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우리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일상에서 확인하는 순간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2002년 월드컵 경기 당시 한국인들의 월드컵 응원 열기는 축구 실력 못지않게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모두가 하나 같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하나 되어 응원하는 모습은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보기 어렵다. 한국인은 좋으나 슬프나 한결같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 애타게 ‘우리’를 찾는 것은, 혼자 해결하기에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 때문이다. 낮은 신생아 출생률, 합의를 모르고 각자의 길을 가는 의대 증원 문제, 침체한 경제는 아직 헤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민연금 개혁 문제는 다시 22대 국회로 책임을 떠넘긴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인데 그 앞에서 나만을 찾는다.

다시 ‘우리’를 회복할 수는 없을까. IMF 위기 앞에 금을 모으고 국가 채무를 갚기 위해 돈을 모으던 우리의 유전자는 그대로 우리 몸에 남아있지 않는가. 혼자가 편하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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