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지나쳐도 그만인 스승의 날이 지나갔다.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하지만 간단하게 소프트볼을 하며 자축한다. 이제는 감정노동자로 전락해 버린 가르치는 노동자들의 초라한 시간이 흘러간다. 선생들만의 스승의 날 행사가 벌써 몇 년째 이어진다.
우리 사회가 요구해서 만들어진 학생 인권조례로 이제는 생활지도는 없고 지식만을 전달하는 교실이다. 세상이 이렇게 험한데 윤리가 필요 있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래도 세상은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에 의하여 돌아간다”는 은사님의 말씀을 학교에서 더는 들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챗GPT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꾸는 요즈음 알량한 지식을 파는 일도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가 없다. 챗GPT에 “너희들이 선생의 자리를 대신할 날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어쩌면 신이 나서 바로 지금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집안의 밥상머리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람에 대한 교육이 사라진다. 하나밖에 없는 아이의 기를 살리고 아이의 소중한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부모는 아이를 보는 시간도 줄여가며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맛있는 햄버거와 두툼하게 집어주는 용돈으로 부모는 미소 짓지만, 차가운 휴대전화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사람다움을 잃어간다.
학교에 떠맡겨진 사람 교육은 학생인권조례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고, 열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는 학생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법의 심판을 기다린다. 교육학을 공부하며 교사로서의 의지를 불태우는 선생이 점점 사라진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학교에 관한 기사가 올라온다. 동물의 세계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학교폭력은 끝이 없고 학생과 학부모가 선생을 고소하고 다시 선생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대응한다. 학생과 학부모의 눈에 선생이 안 보이는 일이 너무나 잦다. 교직을 떠난 지 일 년이 되어가지만, 학교의 현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갈라버린다. 내가 보는 것이 옳고 상대방은 틀리고,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몰아버린다. 이럴 때면 어떻게 살아야 바른 것인지 헷갈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그래도 세상은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에 의하여 돌아간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기만 한다.
그렇다고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간다고 탓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같이’를 찾고 싶다. 그래도 교실에는 아직 선생의 말에 귀 기울이는 학생들이 있고 그런 학생들의 모습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선생이 있음을 느끼며 살고 싶다.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있는 한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지 않은가.
웃음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슬픔과 처진 후배들의 뒷모습을 애써 외면한다. 선생의 옆에는 학생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교육은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가 만들어 내는 하모니임을 아직도 믿는다. 학교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퍼져서 우리 사회를 가득 메우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