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권에서는 진보를 비판하고, 보수정권에서는 보수를 비판하는 당신은 도대체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편 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언론이나 지식인은 정권·이념·권력의 편이 아니라, 정의·진실·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유·정의·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념적 프레임’에 갇히는 ‘편 가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프레임은 정치이념이 반영된 ‘선택과 배제’의 결과물이다.
정치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자유인의 사고는 유연성을 잃고 정신적 노예로 전락한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편이냐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진영논리에 빠졌다는 것은 주체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자유와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영과 진영 사의의 경계’에 서야 한다. ‘경계인’의 삶이야말로 자유인의 지성적인 삶이다.
‘정의’라는 담론 역시 진영논리로 정치화되면 ‘선택적 정의’가 ‘보편적 정의’를 대신하게 된다. 편향적인 ‘보수의 정의’나 ‘진보의 정의’가 ‘보편적 정의’로 인정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정·정의·상식’의 역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못한 이유는 대통령들의 정치성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공정은 정의로워야 하고 정의는 공존을 지향할 때 비로소 보편적 정의가 될 수 있다.
‘확증편향이 지배하는 흑백사회’에서는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 사람을 흔히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매도한다. 보수를 비판하면 진보이고, 진보를 비판하면 보수라는 단세포적 발상은 반민주적 흑백론이다.
파스칼(B. Pascal)이 갈파했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천사(백색)도 악마(흑색)도 아닌 중간적 존재(회색)”이다. 완벽한 백색 또는 흑색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수많은 회색들의 농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는 중도층이 보수와 진보의 극단화를 막아주고,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 빈부갈등을 완화시켜주니 ‘회색지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지금 앓고 있는 ‘확증편향이라는 병’은 망국병이다. 조선시대의 동인과 서인, 해방정국에서 좌파와 우파의 극단적 대립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독선과 오만에 빠진 ‘편 가르기의 끝은 공멸’이다. 정치이념이 종교화되면 권력투쟁은 종교전쟁처럼 극단화되기 때문이다. 독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성’이 아니라 ‘신념’이며, ‘외골수의 신념’은 이성적 토론을 어렵게 함으로써 마침내 민주주의는 사망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말자. 그 대신 우리의 인식과 행태가 불편부당(不偏不黨)하도록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자.
철학자 호르크하이머(M. Hork heimer)는 “인간의 이성이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포기할 때 비극이 초래된다”고 했다. ‘확증편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성찰’과 ‘통합적 인식의 시선’이 절실한 이유다.